대집대허공장보살소문경(大集大虛空藏普薩所問經) 제2권

대집대허공장보살소문경(大集大虛空藏普薩所問經) 제2권

그 때에 세존께서 다시 허공장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보살은 계율바라밀을 허공처럼 닦아 네 가지 법을 성취하느니라. 이른바 그 네 가지 법이란, 몸뚱이가 그림자와 같은 것임을 아는 것이 첫째이고, 음성이 골짜기의 메아리와 같은 것임을 아는 것이 둘째이고, 마음이 허깨비와 같은 것임을 아는 것이 셋째이고, 지혜가 허공과 같은 것임을 아는 것이 넷째이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이 허공처럼 계율바라밀을 닦아 네 가지 법을 성취하는 것이니라.

또 보살은 계율바라밀을 청정이 닦아 여덟 가지 법을 성취하느니라. 이른 바 그 여덟 가지 법이란, 계율을 청정하게 하기 위하여 보리의 마음을 여의지 않는 것이 첫째이고, 한량없는 마음을 얻어 계율을 청정하게 하기 위하여 성문·연각의 마음을 여의는 것이 둘째이고, 그 지혜를 청정하게 하기 위하여 일체의 학문을 여의지 않는 것이 셋째이고, 서원을 청정하게 하기 위하여 일체의 인식 대상을 초월하는 것이 넷째이고, 수행을 청정하게 하기 위하여 방일하거나 지어서 꾸미지 않는 것이 다섯째이고, 수행에 방해가 되는 마음을 청정하게 하기 위하여 보리에 회향하는 것이 여섯째이고, 번뇌를 청정하게 하기 위하여 마음의 열뇌(熱惱)를 없애는 것이 일곱째이고, 보리를 청정하게 하기 위하여 큰 서원을 원만하게 하는 것이 여덟째이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 이 계율바라밀을 청정이 닦아 여덟 가지 법을 성취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마치 허공이 청정한 것처럼 보살의 계율이 청정한 것도 그러하며, 허공이 더러움이 없는 것처럼 보살의 계율이 더러움이 없는 것도 그러하며, 허공이 고요하여 어지럽지 않은 것처럼 보살의 계율이 고요한 것도 그러하며, 허공이 그 끝이 없는 것처럼 보살의 계율이 그 끝이 없는 것도 그러하며, 허공이 얽매임이 없는 것처럼 보살의 계율이 얽매임이 없는 것도 그러하며, 허공이 집착이 없는 것처럼 보살의 계율이 집착이 없는 것도 그러하며, 허공에 무엇을 쌓을 수 없는 것처럼 보살의 계율에 아무런 쌓임이 없는 것도 그러하며, 허공이 그 성품을 여의지 않는 것처럼 보살이 계율의 성품을 여의지 않는 것도 그러하며, 허공이 그 성품에 언제나 머무는 것처럼 보살이 계율에 언제나 머무는 것도 그러하며, 허공이 구경(究竟)과 같아 다함이 없는 것처럼 보살의 계율이 다함이 없는 것도 그러하며, 허공이 아무런 형상이 없는 것처럼 보살의 계율이 형상을 여의는 것도 그러하며, 허공이 가고 오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살의 계율이 동요하지 않는 것도 그러하며, 허공이 희론(戱論)이 없는 것처럼 보살의 계율이 희론이 없는 것도 그러하며, 허공이 모든 번뇌를 멀리 여읜 것처럼 보살의 계율이 번뇌가 없는 것도 그러하며, 허공이 지음이 없는 것처럼 보살의 계율이 지음이 없는 것도 그러하며, 허공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살의 계율이 변하지 않는 것도 그러하며, 허공이 분별하지 않는 것처럼 보살의 계율이 분별을 취하지 않는 것도 그러하며, 허공이 일체의 처소를 두루 덮어 주는 것처럼 보살의 계율이 일체의 유정들을 두루 덮어 주는 것도 그러하며, 허공이 파괴함이 없는 것처럼 보살의 계율이 파괴하지 않는 것도 그러하며, 허공이 높고 낮음이 없는 것처럼 보살의 계율이 평등함도 그러하며, 허공의 성품이 물들지 않는 것처럼 보살의 계율이 물들지 않는 것도 그러하니라.

선남자여, 이것이 바로 보살이 계율바라밀을 허공처럼 닦는 것이니라.”

세존께서 다시 게송을 읊어 말씀하셨다.

계율을 지켜 마음에 더러움이 없어야
능히 일체의 번뇌를 제거할 수 있고
몸·입·뜻의 업에 하자가 없어야만
일체의 위의를 구족할 수 있느니라.



지혜로운 자는 교만하지 않아
마음이 고요하여 산란함이 없고
언제나 보리의 마음에 의지하여
그 마음과 뜻이 물들지 않느니라.



모든 업을 여의고 상념이 없어
온갖 분별을 내지 않는가 하면
푸르고 누렇고 붉고 흰 색상을 여의듯
또한 온갖 물질에 머무르지 않느니라.



계율은 취함도 버림도 물듦도 없으니
마치 허공이 걸림이 없는 것과 같고
또한 계율 자체로서 찬탄을 받지
구절의 뜻에 찬탄 받지 않느니라.



계율은 마음을 고요하게 하므로
역시 모든 번뇌를 고요하게 하고
모두 지관(止觀)의 경계를 얻어서
해탈을 나타내 보이게 하느니라.



성스러움으로 모든 속박을 풀어서
모두 계율에 편히 머물게 하니
계율이 뛰어난 해탈이 되고
또한 보리의 근본 구절이 되느니라.



온갖 두타(杜多)1)로 수행처에 머물되
탐욕을 끊어 바라는 것 없이 족하며
번잡함을 멀리 여의고 선정에 머물되
마음이 편안하여 번뇌를 여의느니라.



이와 같이 계율이 근본이 되니
고요히 해탈의 구절을 사유하고
이로 말미암아 계율을 장엄하니
일체의 처소가 안락한 길이 되느니라.



또한 모든 번뇌와 소견을 끊고
흩어버려서 멀리 여의게 하고
자비로움이 허공처럼 두루하고
청정하게 하여 그것에 머물게 하느니라.



반드시 보리를 버리지 않기에
보리에 대해 분별함도 없으니
지혜로운 자가 이 같은 공덕을 갖추는 것은 다
계율로 말미암아 피안(彼岸)에 이르기 때문이네.

“선남자여,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허공처럼 닦아 네 가지 법을 성취하느니라. 이른바 그 네 가지 법이란, 다른 사람으로부터 욕설을 듣더라도 그 말을 허공처럼 알아서 보복하지 않는 것이 첫째이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구타를 당하더라도 그 몸뚱이를 허공처럼 알아서 보복하지 않는 것이 둘째이며, 다른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사더라도 그 마음을 허공처럼 알아서 보복하지 않는 것이 셋째이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희롱을 당하더라도 그 뜻을 허공처럼 알아서 보복하지 않는 것이 넷째이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허공처럼 닦아 네 가지 법을 성취하는 것이니라.

또 보살은 인욕바라밀다를 닦아 여덟 가지 법을 성취하느니라. 이른바 그 여덟 가지 법이란, 인욕을 닦아 청정함을 얻기 위해 모든 유정들에게 허공처럼 그 마음이 걸림이 없는 것이 첫째이고, 인욕을 닦아 청정함을 얻기 위해 허공처럼 모든 이익에 집착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둘째이며, 인욕을 닦아 청정함을 얻기 위해 모든 유정들에게 허공처럼 그 이익을 평등하게 하는 것이 셋째이고, 인욕을 닦아 청정함을 얻기 위해 허공처럼 그 몸과 마음이 무너지지 않는 것이 넷째이며, 인욕을 닦아 청정함을 얻기 위해 허공처럼 모든 의혹과 번뇌를 제거하는 것이 다섯째이고, 인욕을 닦아 청정함을 얻기 위해 허공처럼 모든 법과 경계에 대한 관찰을 여의는 것이 여섯째이며, 인욕을 닦아 청정함을 얻기 위해 허공처럼 모든 법의 성품이 생함도 멸함도 없음을 관찰하는 것이 일곱째이고, 인욕을 닦아 청정함을 얻기 위해 허공처럼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를 자비로운 마음으로 두루 덮어주는 것이 여덟째이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이 허공처럼 인욕바라밀다를 닦아 여덟 가지 법을 성취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보살은 또 법의 지혜를 자세히 관찰하고 인욕바라밀다를 닦아 여덟 가지의 법을 성취하느니라. 그 여덟 가지의 법이란, 첫째가 성공(性空)인욕으로 일체의 공의 견해를 무너뜨림이 없기 때문이고, 둘째가 무상(無相)인욕으로 상을 떨쳐버림이 없기 때문이며, 셋째는 무원(無願)인욕으로 보리(菩提)를 버림이 없기 때문이고, 넷째는 무행(無行)인욕으로 함이 있는 것에 다함이 없기 때문이며, 다섯째는 무생(無生)인욕으로 함이 없는 것에 머묾이 없기 때문이고, 여섯째는 무기(無起)인욕으로 생멸에 머묾이 없기 때문이며, 일곱째는 무유정(無有情)인욕으로 몸의 성품을 무너뜨림이 없기 때문이고, 여덟째는 여여(如如)인욕으로 3세(世)를 무너뜨림이 없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이것이 바로 보살이 법의 지혜를 자세히 관찰하고 인욕바라밀다를 닦아 여덟 가지 법을 성취하는 것이니라.

다시 선남자여, 보살이 인욕바라밀다를 수행할 때에 어떤 이가 자신을 헐뜯고 모욕하더라도 이를 참고 받아들이되, 만약 ‘이것이 나의 인욕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인욕 바라밀이 아니니라. 또 모욕하는 자를 보거나 그 모욕하는 방법이 어떠하던 간에 이를 다 참고 받아들이되, 만약 ‘이것이 나의인욕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인욕바라밀다가 아니니라. 또 다툼이 없는 행을 닦되, 만약 ‘그 말을 참는 것이 나의 인욕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인욕바라밀다가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수행을 거듭하여 서로가 다 공(空)의 경지에 이르더라도 만약에 ‘이렇게 서로 인욕하는 것은 다 덧없는 것이다’라든지 또는 ‘이렇게 인욕하는 것은 인욕을 베푸는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인욕바라밀다가 아니니라.

그러므로 선남자여, 수행자는 수행하는 것을 반드시 보이지 않아야 하느니라. 마치 어떤 사람이 날카로운 도끼를 가지고 저 사라수(娑羅樹) 숲속에 들어가서 가지와 잎을 베더라도, 사라수는 ‘누가 나무를 벤다’거나 또는 애증을 갖지 않으니, 이러한 생각을 끝내 하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보살마하살이 인욕바라밀다를 닦는 것도 그와 같아서, 애증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무엇을 분별하거나 분별할 것이 없느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이 인욕바라밀다를 허공처럼 닦는 것이니라.”

그 때에 세존께서 다시 게송을 읊어 말씀하셨다.

청정한 무생법인을 성취해야만
그 지혜가 경계에 물들지 않고
안팎이 고요하여 의지하는 것이 없어야만
저 인욕의 마음이 허공처럼 청정하니라.



이 몸은 그림자나 초목과 같고
이 마음은 허깨비와 같아 진실이 없고
이 법의 성품은 공(空)하여
몸과 마음에 차별이 있음을 볼 수 없네.



결과야 어떻든 기쁨도 성냄도 없고
분별도 없으며 높고 낮음도 없으니
땅과 문지방과 같이 인욕을 알아서
그 가르침대로 유정을 제도하느니라.


비록 일체 법의 성품이 공함을 알더라도
나[我]·사람[人]·수명(壽命)에 대한 생각이 없더라도
저 인연과 지음에 어긋나지 않아야만
그 인욕이 바로 최상의 진실한 행이니라.



그러므로 어떤 나쁜 말을 듣더라도
그 말을 허공처럼 알아 성내지 않고
몸과 마음도 다 허공처럼 그렇게 닦으며
유정을 위해 이 청정한 인욕을 닦느니라.

“선남자여, 보살이 정진바라밀다를 허공처럼 닦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보살은 정진바라밀다를 허공처럼 닦아 네 가지 법을 성취하느니라. 이른바 그 네 가지 법이란, 첫째 자신의 선근(善根)을 부지런히 닦는 것으로 일체의 법을 아직 성취하지 못했음을 알기 때문이고, 둘째 모든 부처님께 큰 공양을 올리는 것으로 여래의 몸이 평등함을 분명히 알기 때문이며, 셋째 항상 유정들을 성취시키는 것을 좋아하는 것으로 유정들이 깨달음을 얻지 못했음을 알기 때문이고, 넷째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바른 법을 받아 지니는 것으로 그 법을 싫어하거나 여의지 않기 때문이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이 정진 바라밀을 허공처럼 닦아 네 가지 법을 성취하는 것이니라.

다시 선남자여, 보살은 정진바라밀다를 청정이 닦아 여덟 가지 법을 성취하느니라. 이른바 그 여덟 가지 법이란, 첫째 몸을 장엄하기 위해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으로 그 몸이 그림자와 같아서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고, 둘째 말을 장엄하기 위해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으로 그 말이 이슬과 같아서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며, 셋째 마음을 장엄하기 위해 부지런히 정진하여 선정을 성취하는 것으로 그 마음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고, 넷째 모든 바라밀을 갖추기 위해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으로 그 반복하여 닦는 것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음을 생각하기 때문이며, 다섯째 일체 보리의 법을 성취하기 위해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으로 그 보리의 성품과 모습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음을 생각하기 때문이고, 여섯째 일체의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기 위해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으로 그 불국토가 허공과 같아서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며, 일곱째 일체의 들은 것을 다 받아 지니기 위해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으로 그 들은 법이 메아리와 같아서 끝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고, 여덟째 일체의 부처님 법을 성취하기 위해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으로 그 모든 법계가 평등한 한 가지 상(相)이어서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이 정진바라밀다를 청정이 닦아 여덟 가지 법을 성취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보살에게는 또 두 가지 정진하는 법이 있으니, 가행(加行) 정진과 한제(限齊) 정진이 그것이니라. 가행 정진으로써 몸·입·뜻을 채찍질하는 것은 그 일체의 선한 법을 수습하되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얻을 것이 없음을 관찰하기 때문이고, 한제 정진으로써 마땅히 머물러 드나들지 않는 것은 가고 오는 것 없이 법계에 수순하여 허공처럼 얻을 것이 없음을 관찰하기 때문이니라. 다시 말하면, 저 허공이 물질이 없이 모든 유정들의 일을 성취시켜 주는 것처럼, 보살의 정진이 일체의 부처님 법에 의지하여 유정들의 일을 성취시켜 주는 것도 그러하니라. 또 허공이 일체의 색상을 다 거두어들이는 것처럼, 보살의 정진이 일체의 유정들을 다 거두어들이되 그 모든 소견을 여의는 것도 그러하니라. 또 허공이 일체의 초목을 다 길러내되 머묾과 집착이 없는 것처럼, 보살의 정진이 일체의 부처님 법을 길러내되 나[我]라는 견해에 집착하지 않는 것도 그러하니라. 또 허공이 일체의 처소에 두루 편만하되 동요함이 없는 것처럼, 보살의 정진이 일체의 선한 법에 두루 편만하되 흔들리는 모습이 없는 것도 그러하니라. 또 허공이 갖가지 물질을 평등하게 나타내는 것처럼, 보살의 정진이 유정들을 위해 갖가지 일을 평등하게 닦되 얻을 것이 없음을 아는 것도 그러하니라. 선남자여, 이것이 바로 보살이 정진바라밀다를 허공처럼 닦는 것이니라.”

그 때에 세존께서는 다시 게송을 읊어 말씀하셨다.

용맹하게 정진의 힘을 내어
몸과 목숨과 재물을 아끼지 않고
위덕(威德)의 큰 보리를 갖추어야만
모든 유정을 이롭게 할 수 있느니라.



전생부터 닦은 온 그 공덕을
항상 닦되 싫증을 내지 않으며
모든 유정들을 해탈시키고자 하여
모든 여래에게 항상 공양하느니라.



한량없는 불국토를 다니면서
일체의 마군을 다 항복 받고
일체 인민들에 보시하기를 좋아하되
항상 이 청정한 계율을 옹호하느니라.



자비로운 모습과 생각이 상응하여서
모든 선근(善根)을 부지런히 모으고
한량없는 선정에 들어가기 위하여
큰 지혜로써 이치를 관찰하느니라.



한량없는 자비심으로 성냄을 버리고
공덕의 이익을 올바르게 닦되
몸과 목숨까지도 아낌이 없이
모든 번뇌로부터 능히 해탈하느니라.



무아(無我)·공(空)·해탈을 닦음으로써
온갖 모습을 여의어 큰 위덕을 갖추고
일체의 소견을 끊고 보리를 닦아서
아지랑이처럼 법의 성품을 관찰하느니라.



세간에서 일체의 경전을 청정이 읽고
공한 법은 상념이 없음을 널리 설하며
또 법에 둘이 없음을 관찰하되
음성과 문자를 버리지 않느니라.



세간에서 항상 모든 경전을 설하고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함 역시 끝이 없고
그 유정들의 마음과 행도 한량이 없으니
지혜로운 자는 마땅히 크게 정진하느니라.



한량없는 유정들을 깨우치고
남도 나지 않음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가없는 정진의 마음으로써 능히
유정을 제도하고 청정한 법을 닦느니라.

“선남자여, 보살이 선정바라밀다를 허공처럼 닦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보살은 선정바라밀다를 허공처럼 닦아 네 가지 법을 성취하느니라. 이른바 그 네 가지 법이란, 마음을 안에서부터 안정시켜 그 안의 마음으로 하여금 소견을 일으키지 않게 하는 것이 첫째이고, 마음을 바깥에서부터 억제시켜 그 바깥의 마음으로 하여금 얻을 것이 없게 하는 것이 둘째이며, 자신의 마음이 평등함으로 말미암아 일체 유정들의 마음도 본래 평등한 것임을 아는 것이 셋째이고, 다른 사람의 마음이 다 평등함을 앎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의 자체가 허깨비와 같음을 증득하는 것이 넷째이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이 선정바라밀다를 허공처럼 닦아 네 가지 법을 성취하는 것이니라.

다시 선남자여, 보살은 선정바라밀다를 허공처럼 닦아 여덟 가지 법을 성취하느니라. 이른바 그 여덟 가지 법이란, 5온(蘊)에 의지하지 않고 선정을 닦는 것이 첫째이고, 12처(處)에 의지하지 않고 선정을 닦는 것이 둘째이며, 18계(界)에 의지하지 않고 선정을 닦는 것이 셋째이고, 현재 세간에 의지하지 않고 선정을 닦는 것이 넷째이며, 다른 세간에 의지하지 않고 선정을 닦는 것이 다섯째이고, 욕계(欲界)에 의지하지 않고 선정을 닦는 것이 여섯째이며, 색계(色界)에 의지하지 않고 선정을 닦는 것이 일곱째이고, 무색계(無色界)에 의지하지 않고 선정을 닦는 것이 여덟째이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이 선정바라밀다를 허공처럼 닦아 여덟 가지 법을 성취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보살은 또 그 마음을 선정에 집중함으로써 청정함을 성취하느니라. 이른바 그 선정에 집중함이란, 일체 법의 명자(名字)를 더하거나 덜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변동과 차별과 손익(損益)이 없고 취함도 버림도 어둠도 밝음도 없으며, 분별이 없는가 하면 분별이 없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가 하면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며, 하나·둘이 없는가 하면 하나·둘이 없는 것도 아니고, 행동도 사색도 희론(戱論)도 없으며, 적취(積聚)도 없고 적취가 없는 것도 아니면서 일체의 상(相)을 벗어나 그 마음에 머묾이 없는 것을, 선정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니라.

다시 말하면, 선정에 집중하는 그 마음이 흩어지지 않음으로써 눈에 대한 물질과 물질에 대한 안식(眼識)을 멀리 여의어서 본래의 모습이 청정하니라. 또 선정에 집중하는 그 마음이 흩어지지 않게 관찰함으로써 귀에 대한 소리와 귀에 대한 이식(耳識)을 멀리 여의어서 본래의 모습이 청정하니라. 또 선정에 집중하는 그 마음이 흩어지지 않음으로써 코에 대한 냄새와 코에 대한 비식(鼻識)을 멀리 여의어서 본래의 모습이 청정하니라. 또 선정에 집중하는 그 마음이 흩어지지 않음으로써 혀에 대한 맛과 혀에 대한 설식(舌識)을 멀리 여의어서 본래의 모습이 청정하니라. 또 선정에 집중하는 그 마음이 흩어지지 않음으로써 몸에 대한 감촉과 몸에 대한 신식(身識)을 멀리 여의어서 본래의 모습이 청정하니라. 또 선정에 집중하는 그 마음이 흩어지지 않음으로써 뜻에 대한 법과 뜻에 대한 법의 인식을 멀리 여의어서 본래의 모습이 청정하니라.

선남자여, 마치 허공에 겁화(劫火)가 일어나더라도 그 겁화에 타버리지 않고, 수재(水災)가 일어나더라도 그 수재에 휩쓸리지 않는 것처럼, 보살이 닦는 선정도 그와 같으니라. 일체의 번뇌의 불길에 타버리지 않고 일체 외도의 물길에 빠지지 않음은 물론, 해탈의 평등함에 이르러 언제나 유정들을 안정시켜서 동요하지 않게 하느니라. 또 보살이 스스로 선정에 편히 머묾으로써 선정에 들더라도 애착의 맛을 내지 않고, 선정에서 나오더라도 다시 장애가 없이 그 모든 성인들에게 항상 고요함을 나타내니, 성인들이 힘써 성취하는 것과는 다르니라.

뿐만 아니라 보살은 항상 그 선정의 마음에 평등하게 머물게 하니, 평등하지 못한 자를 교화하기 위해 평등하게 연설하되 그 평등함과 평등하지 않음을 보지 않느니라. 평등함과 평등하지 않음 역시 다 어긋남이 없기 때문에 그 마음이 걸림이 없어 마치 허공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이것을 일컬어, 보살이 닦는 선정이라고 하고, 수승한 지혜의 선정이라고 하고, 인식에 집착하지 않는 선정이라고 하느니라. 이러한 선정으로 말미암아 보살이 저 허공처럼 머묾이 없는 선정을 얻게 되느니라.”

그 때에 세존께서 다시 게송을 읊어 말씀하셨다.

감관을 잘 단속하여 선정을 닦되
항상 유정들에게 집착함이 없이
세간을 평등하게 제도하여 이끌며
안팎으로 항상 편히 머무느니라.



5온·12처·18계에 의지하지 않고
경계를 멀리 여의어 고요함에 머무니
지혜로운 자는 그 마음이 선정에 있고
평등과 평등 아님 없이 다 평등하니라.



법계의 높고 낮음 없이 통달하여
그 마음과 뜻이 언제나 고요하고
세간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선정에 따른 모든 변화와

변화 없는 선정을 나타내 보이되
자재로운 마음으로 항상 그러하고
욕계·색계·무색계에도
그와 같이 나타내느니라.



유정을 성취시키기 위한 것일 뿐
또한 유정들에게 집착하지 않으니
그 경계가 허공이나 허깨비나 아지랑이나
물 속의 달이나 꿈이나 구름 같으니라.



선정과 세간을 이미 알아서
마음을 돌려 지혜를 성취하니
그 마음을 덮을 이가 없기에
곧 자재로운 마음을 얻느니라.



선정과 신통을 환히 깨우쳐
억천의 불국토를 두루 다니면서
모든 부처님께 널리 공양하고
무명과 장애를 다 제거하느니라.



모든 감관을 조복함으로써
분별없는 사마타(奢摩他)2)에 들어가
세간의 뜻까지 다 청정하게 하고
지혜의 힘을 얻어 항상 고요하니라.



얻을 것 없는 평등함에 머물면
상(相)없이 두루 평등하다고 하며
평등함에 머묾이 없으면
선정을 얻었다고 하느니라.

“선남자여, 보살이 반야(般若)바라밀다를 허공처럼 닦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허공처럼 닦아 네 가지 법을 성취하느니라. 이른바 그 네 가지의 법이란, 허공의 청정함으로 말미암아 일체 유정들의 청정함에 들어가는 것이 첫째이고, 지혜의 청정함으로 말미암아 일체 인식의 청정함에 들어가는 것이 둘째이며, 법계의 청정함으로 말미암아 나·유정·수명의 청정함에 들어가는 것이 셋째이고, 이치의 청정함으로 말미암아 일체 문자의 청정함에 들어가는 것이 넷째이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허공처럼 닦아 네 가지 법을 성취하는 것이니라.

다시 선남자여,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를 허공처럼 닦아 여덟 가지 법을 성취하느니라. 이른바 그 여덟 가지 법이란, 일체의 선한 법을 부지런히 모으되 상견(常見)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첫째이고, 일체의 선하지 않은 법을 부지런히 끊되 단견(斷見)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둘째이며, 12연기(緣起)의 법을 앎으로써 무생법인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 셋째이고, 4무애(無礙)를 나타냄으로써 4변재(辯才)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넷째이며, 4오타남(鄔馱南)을 잘 결정하여 분별하되 덧없음·괴로움·나 없음·고요함에 빠지지 않는 것이 다섯째이고, 업의 과(果)를 널리 설하되 그 업의 과가 없는 것에 머물러 흔들리지 않는 것이 여섯째이며, 희론(戱論)이 없는 지혜로써 항상 일체 법의 구절의 갖가지 모습을 널리 설하는 것이 일곱째이고, 일체의 청정한 법의 광명을 얻음으로써 모든 유정들에게 청정한 법을 널리 설하여 다른 법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이 여덟째이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이 청정한 반야바라밀다를 허공처럼 닦아 여덟 가지 법을 성취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반야바라밀다가 바로 청정한 법의 구절인 것은 모든 악한 소견을 부수기 때문이고, 반야바라밀다가 바로 변화가 없는 법의 구절인 것은 자체의 모습이 청정하기 때문이고, 반야바라밀다가 바로 분별이 없는 법의 구절인 것은 한정할 수 없기 때문이고, 반야바라밀다가 바로 사실 그대로의 법의 구절인 것은 그 성품이 진실하기 때문이고, 반야바라밀다가 바로 진리의 법의 구절인 것은 동요함이 없기 때문이고, 반야바라밀다가 바로 성실한 법의 구절인 것은 허망한 속임이 없기 때문이고, 반야바라밀다가 바로 지혜로운 법의 구절인 것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기 때문이고, 반야바라밀다가 바로 만족스러운 법의 구절인 것은 성스러운 공덕을 갖추기 때문이고, 반야바라밀다가 바로 통달한 법의 구절인 것은 모든 것을 잘 관찰하기 때문이고, 반야바라밀다가 바로 으뜸가는 이치의 법의 구절인 것은 아무런 언설(言說)이 없기 때문이고, 반야바라밀다가 바로 평등한 법의 구절인 것은 아무런 차별이 없기 때문이고, 반야바라밀다가 바로 견고한 법의 구절인 것은 파괴할 수 없기 때문이고, 반야바라밀다가 바로 변동이 없는 법의 구절인 것은 의지함이 없기 때문이고, 반야바라밀다가 바로 금강의 법의 구절인 것은 모든 것을 꿰뚫을 수 있기 때문이고, 반야바라밀다가 바로 유정을 제도하는 법의 구절인 것은 해야 할 일을 이미 성취하였기 때문이고, 반야바라밀다가 바로 청정한 법의 구절인 것은 성품이 물듦이 없기 때문이고, 반야바라밀다가 바로 어둡지 않은 법의 구절인 것은 얻을 바 없는 광명이기 때문이고, 반야바라밀다가 바로 둘이 아닌 법의 구절인 것은 아무런 차별이 없기 때문이고, 반야바라밀다가 바로 모든 것이 다한 법의 구절인 것은 구경(究竟)의 적멸함이기 때문이고, 반야바라밀다가 바로 다함이 없는 법의 구절인 것은 항상 머묾이 없기 때문이고, 반야바라밀다가 바로 함이 없는[無爲] 법의 구절인 것은 생멸이 없기 때문이고, 반야바라밀다가 바로 공(空)의 법의 구절인 것은 가장 청정하기 때문이고, 반야바라밀다가 바로 허공의 법의 구절인 것은 아무런 장애가 없기 때문이고, 반야바라밀다가 바로 허공의 도(道)의 구절인 것은 그 행적(行跡)이 없기 때문이고, 반야바라밀다가 바로 얻을 바 없는 법의 구절인 것은 그 성품이 없기 때문이고, 반야바라밀다가 바로 지혜로운 법의 구절인 것은 지혜와 인식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고, 반야 바라밀이 바로 견줄 바 없는 법의 구절인 것은 대치(對治)를 여의기 때문이고, 반야 바라밀이 바로 형상이 없는 법의 구절인 것은 전도됨이 없기 때문이고, 반야바라밀다가 바로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인 법의 구절인 것은 그 모든 괴로움에 대해 알고 벗어나기 때문이고, 반야 바라밀이 바로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인 법의 구절인 것은 모든 탐욕을 없애기 때문 이고, 반야바라밀다가 바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를 증득하는 법의 구절인 것은 끝내 생멸이 없음을 깨닫기 때문이고, 반야바라밀다가 바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를 증득하는 법의 구절인 것은 둘이 아닌 길에 들기 때문이고, 반야바라밀다가 바로 불타(佛陀)의 법의 구절인 것은 바른 깨우침을 능히 내기 때문이고, 반야 바라밀이 바로 달마(達摩)의 법의 구절인 것은 끝내 모든 욕심을 여의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이러한 법의 구절의 이치가 다 지혜의 광명으로 말미암아 나타남으로써 다른 데에 얽매이지 않고, 또 그 법의 구절을 설함에 있어서도 도무지 분별과 분별하는 것이 없느니라.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다를 허공처럼 닦는 것이니라.”

그 때에 세존께서는 다시 게송을 읊어 말씀하셨다.

밝은 지혜는 번뇌의 습기를 끊어
모든 인연의 업을 나타내 보이니
나·유정·수명이라는 견해와 상에
의지하거나 머무르지 않느니라.



나·나 없음의 둘을 함께 버림으로써
반야바라밀다의 참된 근원에 도달하니
반야는 능히 모든 존재를 벗어나고
모든 난폭한 흐름을 건너가느니라.



반야는 청정한 인(因)을 일으키고
수승한 해탈을 얻어 능히 안락하며
맑은 지혜는 모든 얽매임을 여의고
5온·12처·18계를 두루 아느니라.



밝은 지혜로 삼계의 공함을 비추어
능히 그 모든 상(相)에서 해탈하게 하니
반야의 행을 닦아 청정하게 하면
일체의 세간에 집착함이 없느니라.



항상 반야의 행을 닦아 통달하게 되면
그 지혜의 광명이 진공(眞空)을 비추고
다섯 눈과 감관이 청정하게 되니
5취(趣)·5온(蘊)을 제거하느니라.



피안에 이르러 항상 안락하게 머무르고
법계에 들어서도 그러하고
마치 큰 허공처럼 평등하여
크나큰 부처님의 지혜에 수순하느니라.



얻을 것과 얻을 바 없는 둘을 다 여의어
중도(中道)의 감로문(甘露門)을 보여주고
모든 성인들의 분별과
분별 없음에 수순하느니라.



고(苦)·집(集)·멸(滅)·도(道)를 앎으로써
탐심과 애욕을 끊어 함이 없음을 나타내며
진실된 지혜의 광명을 성취함으로써
3세(世)의 가고 옴이 없음을 깨닫느니라.



모든 불국토의 평등함을 아는가 하면
모든 법의 고요함을 깨닫는 것도 그러하고
나·유정·수명이 없는 것까지도 깨우치니
이것이 곧 참된 지혜를 닦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보살이 복덕을 허공처럼 닦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그 일체 법의 성품이 허공과 같기 때문이고, 보리의 마음으로 종자를 삼으니 그 복덕의 더미를 닦음에 있어서 언제나 보리의 마음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고, 선근(善根)을 쌓되 다 살바야(薩婆若)5)의 바다에 회향하니 그 지혜로 말미암아 허공처럼 한량없는 복덕을 얻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보살은 마땅히 이러한 마음을 일으켜야 하니, 저 허공이 한량이 없기에 복덕의 쌓임을 성취함도 한량이 없고, 그 뜻이 한량이 없기에 복덕을 얻음도 한량이 없느니라. 보살은 저것에 대해 응하여서 이렇게 관찰해야 하느니라.

선남자여, 다시 열 가지 한량이 없는 장엄을 갖추어야만 보살은 이와 같은 복덕의 쌓임을 원만하게 할 수 있느니라. 이른바 그 열 가지란, 첫째 한량없는 몸을 장엄함은 그 상호를 원만하게 하기 때문이고, 둘째 한량없는 말을 장엄함은 그 청정한 법륜(法輪)을 널리 설하기 때문이며, 셋째 한량없는 마음을 장엄함은 그 일체 유정들의 마음을 통달하기 때문이고, 넷째 한량없는 행의 몸을 장엄함은 그 한량없는 유정들을 성숙시키기 때문이며, 다섯째 한량없는 행의 모습을 장엄함은 그 한량없는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고, 여섯째 한량없는 복덕으로 선정(禪定)의 정진을 장엄함은 그 한량없는 부처님의 위의를 원만히 성취하기 때문이며, 일곱째 한량없는 보리의 큰 도량을 장엄함은 그 일체의 상(相)과 행을 원만히 갖추기 때문이고, 여덟째 한량없는 보시로써 광명을 장엄함은 그 한량없는 부처님의 백호(白毫)의 모습을 원만히 성취하기 때문이며, 아홉째 한량없는 나 없음[無我]의 경지를 장엄함은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여래의 정수리의 모습을 우러러 보기 때문이고, 열째 한량없는 선정의 장엄을 끊임없이 수행함은 그 한량없는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 왜곡됨이 없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열 가지 한량없는 장엄이란 바로 이러한 것이니, 보살이 이 허공과 같은 크나큰 마음을 내는 것은 곧 허공과 같은 복덕을 얻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보살이 지혜를 허공과 같이 닦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보살은 그 일체 유정들의 마음을 두루 관찰하여서 욕심이 있고 없음을 여실히 알고, 성내는 마음이 있고 없음도 여실히 알며, 어리석은 마음이 있고 없음도 여실히 알고, 번뇌로 물든 마음이 있고 없음을 여실히 아느니라. 그러므로 스스로가 욕심을 여의어서 다시 다른 유정[補特伽羅]들을 위해 그 욕심을 조복하는 법을 널리 설하고, 스스로가 성내는 마음을 여의어서 다시 다른 유정들을 위해 그 성내는 마음을 조복하는 법을 널리 설하고, 스스로가 어리석은 마음을 여의어서 다시 다른 유정들을 위해 그 어리석은 마음을 조복하는 법을 널리 설하고, 스스로가 번뇌로 물든 마음을 여의어서 다시 다른 유정들을 위해 그 번뇌로 물든 마음을 조복하는 법을 널리 설하느니라.

또한 그렇다고 해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번뇌를 여의지 못한 자를 하찮다고 생각하거나, 또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번뇌를 여읜 자를 가장 수승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니라. 왜냐 하면 보살은 그 차별 없는 법계(法界)의 청정한 법문에 따라 유정들의 마음을 환히 알기 때문이니라. 이러한 법계가 바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여의는 것이고, 이러한 법계가 바로 번뇌의 물듦을 여의는 것이니, 이 법계가 곧 일체의 법에 서로 드나들어, 이 법계가 곧 일체의 법이고 일체의 법이 곧 법계로서 두루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나의 경계를 아는 자라야만 곧 법계를 알게 되니, 나의 경계와 법계가 차별이 없기 때문이니라. 다시 말하면, 나의 경계가 청정하기 때문에 법계가 청정하고, 이러한 일체의 법계가 청정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않음이 없느니라. 또 일체의 상(相)이 있고 상이 없음을 여의기 때문에 의지하거나 걸림이 없어서 마치 허공과 같으니, 이 걸림 없는 지혜로 말미암아 일체의 법을 깨우쳐서 아무런 장애가 없느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이 지혜를 허공처럼 닦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보살이 부처님께서 인가(印可)하신 부처님을 수념(隨念)하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번뇌가 없는 계율을 염(念)하는 것은 이 계율로써 부처님을 수념하기 때문이고, 일체의 법에 평등하고도 산란하지 않은 선정을 염하는 것은 이 선정으로써 부처님을 수념하기 때문이고, 일체법에 분별함이 없는 지혜를 염하는 것은 이 지혜로써 부처님을 수념하기 때문이고, 두 마음에 머물지 않는 해탈을 염하는 것은 이 해탈로써 부처님을 수념하기 때문이고, 일체의 지혜에 집착하지 않는 해탈지견(解脫知見)을 염하는 것은 이 해탈지견으로써 부처님을 수념하기 때문이고, 3세(世)에 평등한 흔들리지 않는 힘을 염하는 것은 이 흔들리지 않는 힘으로써 부처님을 수념하기 때문이고, 일체의 번뇌에 더럽혀지지 않는 그 두려움 없는 힘을 염하는 것은 이 두려움 없는 힘으로써 부처님을 수념하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마땅히 부처님을 수념하는 것은, 그 일체의 공덕이 다 부처님을 수념함으로써 성취되고 법계의 평등함과 분별없는 지혜를 얻기 때문이니라.

또 부처님을 수념하는 것에 있어서, 부처님의 모든 색상(色相)을 염하는 것은 그 성품이 청정함으로 말미암아 색상의 성품을 청정하게 보기에 상념 없이 지혜에 이르게 되는 것이고, 내지 느낌·생각·지어감·의식의 성품을 청정하게 보기에 상념 없이 지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니라. 12처(處)와 18계(界)도 또한 다 그러하니, 이른바 일체 법의 성품이 청정함으로 말미암아 지혜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니라. 곧 가장 수승한 지혜로써 일체의 일을 이루어내고 일체의 얽매인 소견에서 벗어나 아무런 더러움과 흐름이 없느니라. 또 부처님을 수념하는 것에 있어서, 부처님께서 걸으시고 머무시고 앉으시고 누우시는 그 일체의 위의를 염하되 집착을 일으키지 않고,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는 그 고요한 이치를 염하되 역시 집착하거나 생각을 일으키지 않느니라. 왜냐 하면 상념도 없고 지음도 없고, 뜻도 아니고 색상도 아니고 법도 아니고 법이 아닌 것도 아니어서 일체의 상념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인가하신 부처님을 수념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또한 보살이 부처님께서 인가하신 법을 수념하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욕심을 여읜 법을 염하는 것은 어떤 법에도 물듦이 없기 때문에 역시 다른 법을 수념함이 없고, 아뢰야식(阿賴耶識)이 없는 법을 염하는 것은 어떤 법에도 몰입함이 없기 때문에 역시 다른 법을 수념함이 없고, 고요한 법을 염하는 것은 어떤 법에도 마음과 의식의 집착이 없기 때문에 역시 다른 법을 수념함이 없고, 상(相)이 없는 법을 염하는 것은 어떤 법에도 상으로 말미암아 의식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역시 다른 법을 수념함이 없고, 함이 없는[無爲] 법을 염하는 것은 어떤 법에도 시설(施設)의 집착이 없기 때문에 역시 다른 법을 수념함이 없느니라.

다시 말하건대, 법을 수념하는 것이란, 그 법을 끊임없이 수념하되, 법에 대한 상념을 일으키지 않아야만 곧 바른 지위에 들어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할 수 있느니라. 또 일체의 법이 본래 생멸이 없기 때문에 어떤 법을 증득할 것조차 없음을 관찰해야만 곧 올바른 보리의 지위에 나아갈 수 있느니라. 곧 이것이 일체의 유학(有學)·무학(無學)이나 연각(緣覺)·보살(菩薩)들이 증득한 해탈의 법이고 그 법 또한 본래의 성품이 없는 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이 부처님께서 인가하신 법을 수념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또한 보살이 부처님께서 인가하신 스님들[僧伽]을 수념하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함이 없는 스님들이란, 그 모든 일에 조작이 없으므로 몸·입·뜻의 업에 따라 나타내는 행이 없고 다만 시설(施設)로 인하여 행을 나타낼 뿐이니, 이 함이 없는 스님들은 모든 시설에 대한 집착을 여의고 온갖 언론(言論)을 다 초월하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인가하신 스님들을 수념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또한 보살이 부처님께서 인가하신 버림[捨]을 수념하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버림이란, 일체의 의지하는 자구(資具)을 다 버리고 그 법까지 버림으로써 더 버릴 것이 없는 것을 가장 수승한 버림이라고 하느니라. 그 일체의 법에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고 구하는 것도 없으며, 인연 따라 일어나는 것이 있지도 없지도 않고, 심행(心行)과 시설(施設)이 없으므로, 인식에 머물지도 않고 마음에 머물지도 않아 그 일체의 머무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이를 부처님께서 인가하신 버림이라고 하느니라.

다시 말하건대, 보살이 그 버림을 수념하는 것이란, 모든 수행을 평등한 일체지(一切智)의 지혜에 회향함으로써 보리를 깨치기 위해 수념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니라. 왜냐 하면 일체의 지혜에 회향하는 것이 저 보리를 수념하는 성품과 둘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이러한 법과 지혜는 서로 상응하니, 이것이 부처님께서 인가하신 버림을 수념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또한 보살이 부처님께서 인가하신 계율을 수념하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함이 없는 계율이란, 번뇌와 장애가 없음으로써 공용(功用)6)을 영원히 그치고 일체의 금계(禁戒)를 성취하는 것이며, 인식과 형상이 없음으로써 집착을 영원히 벗어나 삼마지를 성취하는 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최승의 계율이니, 청정한 지혜의 근본을 내고 모든 희론(戱論)과 해탈의 상(相)까지도 여의어서 두 가지 분별하는 상이 없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지혜로운 자는 이러한 색상이 없음을 찬탄하여 온갖 번뇌와 시설의 집착을 없애고, 안락하게 수행하여 일체의 대립과 분별이 없느니라. 보살은 항상 이와 같이 계율을 수행하여 더러움에 물듦이 없느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이 부처님께서 인가하신 계율을 수념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또한 보살이 부처님께서 인가하신 하늘을 수념하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하늘에는 두 하늘이 있어 이를 수념하니, 첫째 5정거천(淨居天)을 수념하는 것은 성자(聖者)들이 머물기 때문이고, 둘째 사다천(史多天)을 수념하는 것은 보살이 일생보처(一生補處)의 지위에 이르러 저 하늘에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니라. 다시 일생보처의 지위에 이르러 하늘의 궁전에 머무를 수 있는 보살은 열 가지 으뜸이 되는 법을 갖추어야 하니, 이른바 열 가지란, 일체의 바라밀에 있어서 반야바라밀다를 그 으뜸으로 삼는 것이 첫째이고, 일체의 신통에 있어서 물러나지 않는 신통을 그 으뜸으로 삼는 것이 둘째이며, 일체의 지위에 있어서 관정(灌頂)의 지위를 그 으뜸으로 삼는 것이 셋째이고, 일체의 보리의 법에 있어서 물러나지 않는 바른 소견으로 수승한 삼마지(三摩地)에 드는 것을 그 으뜸으로 삼는 것이 넷째이며, 일체의 걸림이 없는 견해에 있어서 옳은 변재의 걸림이 없는 것을 그 으뜸으로 삼는 것이 다섯째이고, 일체의 지혜에 있어서 집착과 장애가 없는 지혜를 그 으뜸으로 삼는 것이 여섯째이며, 일체의 근기에 있어서 상·중·하의 차별을 아는 걸림이 없는 지혜로운 근기를 그 으뜸으로 삼는 것이 일곱째이고, 일체의 힘에 있어서 밝게 지혜에 들어가는 두려움 없는 힘을 그 으뜸으로 삼는 것이 여덟째이며, 일체의 눈에 있어서 부처님의 눈으로 모든 법을 마치 손바닥 안에 있는 것처럼 분명히 관찰하는 것을 그 으뜸으로 삼는 것이 아홉째이고, 일체 보리의 도량에 앉아서 정각(正覺)을 성취하되 한 찰나도 그 마음을 바로 지혜에 상응하게 하는 것을 그 으뜸으로 삼는 것이 열째이니라. 보살이 이 열 가지 으뜸이 되는 법을 수념해야만 그 어떤 번뇌에도 얽매이지 않고 모든 희론(戱論)을 벗어날 수 있으며 번뇌의 더러움이 없게 되니, 마땅히 보살은 이와 같이 저 하늘을 수념해야 하느니라. 선남자여, 이것은 바로 보살이 부처님께서 인가하신 하늘을 수념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또한 보살이 모든 행을 열반처럼 평등하게 수행하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이른바 열반이란 고요한 것으로서, 일체의 번뇌를 다 제거하고 일체의 느낌을 없애며 일체의 인연을 여의어 5온(蘊)·12처(處)·18계(界)를 벗어나는 것이니라. 저 보살이 열반의 평등함을 얻는 것은 바로 그의 본래의 원력으로써 큰 자비심에 머물고 방편의 지혜로써 여래의 가호를 받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지혜를 잘 닦고 청정이 하여 오묘한 삼마지에 머문다면, 그는 곧 유정들의 생사 번뇌가 다 허깨비와 같은 것임을 알아, 몸을 받더라도 이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생사의 얽매임을 끊어서 더러워지거나 물드는 일이 없느니라. 이것을 일컬어 열반이라고 하느니라. 나아가서는 이 열반의 자유를 얻음으로써 생사가 있지도 없지도 않는 동시에 항상 열반에 놓여 있어 생사를 끊지 않고서도 유정들을 끊임없이 성숙시킬 수 있느니라. 선남자여, 이것이 이른 바 대비와 방편의 두 지혜문(知慧門)이니라. 보살이 이 지혜문에 머문다면 곧 열반의 평등함을 얻어 보살의 행을 행할 수 있느니라. 선남자여, 또한 보살이 일체 유정들의 행의 상을 잘 아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8만 4천에 달하는 그 행의 근본이 되는 오타남(鄔馱南)의 구절과 유정들의 행의 상을 잘 아는 것이니라. 그러나 이러한 유정들의 행은 너무나 한량이 없고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에, 부처님만이 아시고 저 성문·연각·보살들로서는 알 수 없느니라. 보살은 부처님의 가피력(加被力)과 자신의 지혜의 힘에 힘입어 일체 유정들의 행의 상을 따라 알게 되느니라. 이른 바 일체의 지혜를 갖추어 조복시킬 수 없는 상을 제외하고는, 유정들 본래의 성품의 상·행의 상·인연의 상·지음의 상·화합의 상·갖가지 욕심을 여읜 상·탐욕의 상·성냄의 상·어리석음의 상·지옥의 상·축생의 상·아귀의 상·하늘의 상·사람의 상·성문 니야마(尼夜摩)의 상·연각 니야마의 상·부처 니야마의 상·원인(遠因)의 상·중인(中因)의 상·근인(近因)의 상 등, 이러한 유정들의 갖가지 상을 다 여실히 알게 되느니라. 선남자여, 이것이 바로 보살이 일체 유정들의 행의 상을 잘 아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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