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입제불경계지광명장엄경(大乘入諸佛境界智光明莊嚴經) 제4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묘길상이여, 보리는 허공과 같나니, 이른바 허공은 높고 낮음이 없다. 보리도 그와 같아서 높고 낮음이 없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정등각을 이루셨으며, 비록 정등각을 이루셨으나 티끌만한 조그만 법도 높거나 낮음이 시설이 없나니, 이런 법을 이와 같이 알면 그것은 여실한 지혜이다.
묘길상이여, 무엇 때문에 그것을 여실한 지혜라 하는가. 이른바 일체 법은 근본이 없고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그 실답지 않은 성질조차도 얻을 것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만일 실다운 성질이 있다면 그것은 멸하는 법이니, 그것이 비록 생은 있더라도 주재(主宰)가 없고, 또한 섭수도 없느니라. 묘길상이여, 만일 주재가 없고 섭수가 없는 법이라면 그것은 멸하는 법이니, 이런 모든 법은 생기거나 멸하거나 그것은 다 인연으로 변하는 것이지마는 거기에는 조그만 법도 변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부처님 여래께서는 모든 법에 대해서 단멸상(斷滅相)을 말씀하시지 않느니라.
다시 묘길상이여, 보리란 여설구(如說句)이다. 무엇 때문에 여설구라 하는가? 여설구란 곧 보리이니, 그 보리와 같이 색ㆍ수ㆍ상ㆍ행ㆍ식도또한 그러하여 진여를 떠나지 않고, 그 보리와 같이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뜻과 빛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감촉ㆍ법도 또한 그러하여 진여를 떠나지 않으며, 그 보리와 같이 안계ㆍ색계ㆍ안식계와 이계ㆍ성계ㆍ이식계와 비계ㆍ향계ㆍ비식계와 설계ㆍ미계ㆍ설식계와 신계ㆍ촉계ㆍ신식계와 의계ㆍ법계ㆍ의식계도 그러하여 진여를 떠나지 않고, 그 보리와 같이 지계ㆍ수계ㆍ화계ㆍ풍계도 또한 그러하여 진여를 떠나지 않는다.
이런 여러 법을 이렇게 시설하나니, 그 시설이란 이른바 온(蘊)ㆍ처(處)ㆍ계(界)이니, 이로 말미암아 여래께서 등정각을 이루시고 이루어진 정각은 뒤바뀐 법을 떠난다. 그 먼저 법과 같이 뒤의 법도 그러하고, 가운데 법도 그러하여 전제(前際)는 생기지 않고, 후제는 가지 않으며, 현세의 성품[中際]은 떠난다. 이런 법을 여소설구라 하며, 그 한 법과 같이 많은 법도 그러하고, 그 많은 법과 같이 한 법도 그러하니라.
묘길상이여, 한 성품이거나 많은 성품이거나 다 얻을 것이 없고, 상이 있거나 상이 없거나 들어감도 없고 머무름도 없는 것이다. 무엇을 상이 있다 하며, 무엇을 상이 없다 하는가? 이른바 상이란, 즉 모든 선법을 일으키는 것이요, 이른바 상이 없음이란 즉 일체 법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상이란, 이른바 마음의 머무는 분위(分位)가 없는 것이요, 상이 없음이란 즉 무상삼마지(無相三摩地)의 해탈 법문이다. 또 상이란 즉 일체 법을 생각하고 헤아리며 셈하고 관찰하는 것이요, 상이 없음이란 이른바 헤아림을 초월한 것이다. 어떤 것을 헤아림을 초월함이라 하는가. 이른바 분별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또 상이란 즉 유위의 관찰이요, 상이 없음이란 곧 무위의 관찰이니라.
다시 묘길상이여, 보리란 곧 무루(無漏)요 무취(無取)이다. 어떤 것을 무루라 하고, 어떤 것을 무취라 하는가. 무루란 이른바 네 가지 유루의 법을 떠나는 것이다. 그 네 가지란, 첫째는 욕루(欲漏)요, 둘째는 유루(有漏)이며, 셋째는 무명루(無明漏)요, 넷째는 견루(見漏)이다. 무취란, 이른바 네 가지 집착하는 법을 떠나는 것이니, 그 네 가지란, 첫째는 욕취(欲取)요, 둘째는 견취(見取)이며, 셋째는 계금취(戒禁取)요, 넷째는 아어취(我語取)이다. 이런 4취는 다 무명의 덮음으로 말미암아 애법(愛法)이 불어나 서로 취착(取著)하는 것이다.
묘길상이여, 만일 처음에 아어취의 근본을 잘 알면 곧 나[我]가 청정하고, 나가 청정하면 일체 중생의 청정함을 알며, 나가 청정하기 때문에 저 일체 중생이 청정하고, 일체 중생이 청정하면 법에 둘이 없고 두 종류가 없으며, 그 두 이치가 없으면 곧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느니라.
묘길상이여, 만일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면 곧 변전할 마음과 뜻과 알음알이가 없고, 만일 변전할 마음과 뜻과 알음알이가 없으면 곧 분별이 없으며, 만일 분별이 없으면 곧 깊고 견고한 작의에 상응하여 무명이 일어나지 못하며, 만일 무명이 일어나지 못하면 곧 12유지(有支)가 생장하지 못하고, 만일 12유지가 생장하지 못하면 곧 법이 생기지 않으며, 만일 법이 생기지 않으면 곧 법이 결정되고, 만일 법이 결정되면 곧 조복의 이치요, 만일 조복의 이치면 곧 그것은 승의이며, 만일 그것이 승의이면 곧 보특가라의 이치를 떠나는 이치요, 만일 보특가라를 떠나는 이치이면 곧 말할 수 없는 이치이며, 만일 말할 수 없는 이치이면 곧 연생(緣生)의 이치요, 만일 연생의 이치이면 곧 법의 이치며, 만일 법의 이치면 곧 여래의 이치이다.
이와 같이 말한 대로 만일 연생을 보면 곧 법을 볼 수 있고, 만일 법을 볼 수 있으면 곧 여래를 볼 수 있다. 저 모든 소견을 이치답게 관찰할 때에는 거기에는 볼 수 있는 조그만 법도 없느니라. 묘길상이여, 어떤 것을 조그만 법이라 하는가? 이른바 마음에 반연되는 것이니, 만일 마음에 반연되는 것이 없으면 곧 보이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이런 법으로 말미암아 여래는 등정각을 이룬 것이니, 평등하기 때문에 평등이니라.
다시 묘길상이여, 보리란 바로 청정의 뜻이요, 무구(無垢)의 뜻이며, 무착(無著)의 뜻이다. 어떤 것을 청정이라 하고, 어떤 것을 무구라 하며, 어떤 것을 무착이라 하는가? 이른바 공해탈문(空解脫門)이 곧 청정이요,
무상(無相)해탈문이 곧 무구이며, 무원(無願)해탈문이 곧 무착이다. 무생(無生)이 바로 청정이요, 무작의(無作意)가 바로 무구이며, 무기(無起)가 바로 무착이다. 자성(自性)이 바로 청정이요, 원정(圓淨)이 바로 무구이며, 명량(明亮)이 바로 무착이다. 희론(戱論) 없음이 바로 청정이요, 희론을 떠남이 바로 무구이며, 희론 그침이 바로 무착이다. 진여가 바로 청정이요, 법계가 바로 무구이며, 실제가 바로 무착이다. 허공이 바로 청정이요, 비고 넓음이 바로 무구요, 광대함이 바로 무착이다. 안의 법을 앎이 바로 청정이요, 밖으로 소행 없음이 바로 무구이며, 안팎에 소득 없음이 바로 무착이다. 온법(蘊法)을 앎이 바로 청정이요, 법계의 자성이 바로 무구이며, 처법(處法)을 떠남이 바로 무착이다. 과거를 다한 지혜가 바로 청정이요, 미래의 무생지(無生智)가 바로 무구이며, 현재 법계에 안주하는 지혜가 바로 무착이다.
묘길상이여, 이와 같은 청정과 무구와 무착의 모든 뜻을 한 글귀에 다 포섭할 수 있으니, 이른바 적정(寂靜)이라는 글귀이다. 만일 적정이라면 그것은 곧 변적(徧寂)이요, 변적은 곧 근적(近寂)이며, 근적은 곧 적지(寂止)요, 적지라면 이것은 바로 큰 모니의 법이니라.
다시 묘길상이여, 저 허공과 같이 보리도 또한 그러하고, 저 보리와 같이 모든 법도 또한 그러하며, 그 모든 법과 같이 중생도 또한 그러하고, 그 중생과 같이 찰토(刹土)도 또한 그러하며, 그 찰토와 같이 열반도 또한 그러하니라.
묘길상이여, 이 말은 곧 열반의 평등이, 일체 법의 마지막이 되는 변제(邊際)의 청정한 인(因)은 대치(對治)가 없고 대치를 떠난 인(因)으로서 본래 청정하고 본래 무구이며 본래 무착이라는 것이다. 여래께서는 일체 법의 이런 상을 잘 아시기기 때문에 현재에 정각을 이루시고, 그런 뒤에 모든 중생계를 관찰하시고서 청정하고 때묻지 않고 집착이 없이 자재하게 설하는 법문(法門)을 건립하여 이 이름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대비심을 굴리시느니라.
또 묘길상이여, 바로 어떤 것을 보살이 행할 바라 하고, 보살의 승행(勝行)이라 하는가? 이른바 만일 보살이 다함이 없거나 다하지 않음이 없거나, 생함이 없거나 멸함이 없으면, 필경에 상(相)을 다하고 받아들이는 바가 없게 된다. 그런데도 또한 무너지지 않고 필경에 생겨나지 않느니라. 묘길상이여, 보살이 만일 이와 같이 행하면 이것을 보살의 승행이라 하느니라.
또 묘길상이여, 보살은 과거의 마음은 이미 지나갔으니 여기 행이 없으며, 미래의 마음은 아직 이르지 않았으니 여기 행이 없으며, 현재의 마음은 머물지 않으니 여기 행이 없다. 보살은 과거나 미래와 현재의 모든 마음에 다 집착이 없다. 보살이 만일 이렇게 행하면 이것을 보살의 승행이라 하느니라.
또 보시의 법에 있어서 모든 부처님 여래와 모든 보살은 그 둘이 없고 두 종류가 없다. 보살이 만일 이렇게 행하면 이것을 보살의 승행(勝行)이라 한다. 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에 있어서 그와 같아서 부처님 여래와 모든 보살은 그 둘이 없고 두 종류가 없다. 보살이 만일 이렇게 행하면 이것을 보살의 승행이라 하느니라.
또 묘길상이여, 보살은 색(色)과 공(空)을 행하지 않고, 색과 불공을 행하지 않는다. 보살이 만일 이렇게 행하면 이것을 보살의 승행이라 한다. 왜냐하면 색이 곧 공이요, 색의 자성이 공이기 때문이다. 수ㆍ상ㆍ행ㆍ식도 또한 그렇다. 그러므로 식(識)과 공을 행하지 않고 식과 불공도 행하지 않나니, 만일 보살이 이렇게 행하면 이것을 보살의 승행이라 한다. 왜냐하면 이른바 마음과 뜻과 알음알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묘길상이여, 이 속에는 있어야 할 조그만 법도 없다. 만일 알거나 만일 끊거나 만일 닦거나 만일 깨치거나 다 말미암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이것을 다함이라 하며, 이렇게 하여 곧 끝까지 다한 상이 되나니, 만일 필경의 다함이면 곧 다할 것이 없고, 다함없는 것도 또한 다함이 없다. 왜냐하면 여소설(如所說)이 다했기 때문이며, 만일 여소설이 다하면 곧 다할 법이 없고, 만일 다할 법이 없으면 곧 무위이며, 만일 무위이면 곧 생도 멸도 없다. 만일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거나 만일 세상에 나오시지 않거나 법성(法性)은 항상 머물고, 법이 머물면 곧 이것은 법계이다. 법계가 머물기 때문에 지혜를 굴릴 것이 없고, 또한 굴림이 없는 것도 아니며, 지혜를 굴릴 것도 없고, 굴림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만일 이렇게 법리(法理)를 깨치면 곧 무루와 무생과 무멸을 얻으리니, 이것을 누진(漏盡)이라 하느니라. 그러므로 묘길상이여, 비록 세속의 음성과 문자를 모두 모아 시설하더라도 거기서 생하고 멸하는 조그만 법도 없는 줄을 알아야 하느니라.”
그 때 묘길상 동진 보살마하살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 무릎을 땅에 대고 부처님을 향해 합장하고 묘한 가타(伽陀:게송)로 찬탄하였다.
형상과 나타내는 빛깔 없고 모양도 없나니
이 가운데에는 멸함도 없고 또한 생김도 없네.
머무름도 없거니와 또한 다시 근본 없으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머무름이 없기 때문에 나감도 들어옴도 없고
또한 다시 저 모든 나뉜 위치[分位]도 없어
여섯 곳의 문[六處門]을 이미 능히 해탈하였으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일체의 법 가운데서 머무르는 곳이 없고
성품이 있거나 성품이 없거나를 다 멀리 떠나
모든 행이 평등하여 다 원만하게 이루어졌으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이미 삼계에서 벗어나고
허공이 평등한 성품에 머물며
세간의 모든 욕심에 마음이 물들지 않았으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삼마혜다(三摩呬多)에 항상 편안히 머물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역시 다시 그러하네.
모든 위의의 일이 묘하고 엄숙하게 이루어졌으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평등하게 왔다가 평등하게 가고
평등한 성품 가운데 묘하게 안주하네.
평등한 성품의 법의 문 무너지지 않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대성께서 평등한 성품에 잘 들어가고
모든 법이 모두 등인(等引:禪定)의 마음에 머무네.
상이 없는 묘한 법의 문에 두루 들어가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대성께서는 머묾도 없고 반연하는 바 없고
정(定) 가운데 지혜의 봉우리 높이 쌓고
모든 법을 두루 원만히 이루었으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중생의 위의와 색상(色相)
언어와 음성 또한 그와 같이
두루 찰나간에 시현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대성께선 이미 명색(名色)을 떠났고
온법(蘊法)과 계법(界法)도 또한 두루 끊었네.
다시 상이 없는 문에 잘 들어가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대성께서 모든 상을 잘 떠났고
모든 상의 경계 역시 멀리 떠났네.
이미 상이 없는 문에 잘 들어갔으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사유하는 바도 없고 분별도 없고
깨끗한 뜻 또한 다시 머무는 바 없네.
모든 작의도 없고 생각이 일어남도 없으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비유하면 허공이 간직함이 없는 것과 같이
이미 희론과 집착하는 바 없음을 떠났고
그 마음 평등하여 또한 공(空)과 같으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비유하면 허공이 가[邊]가 없는 것같이
모든 부처님의 법의 성품 역시 그러하네.
이미 3세의 문을 초월하였으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모든 부처님은 허공의 상(相)과 같으니
곧 이 허공 역시 상이 없네.
이미 일과 인(因)을 잘 해탈하였으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일체 법 가운데 의지가 없음이
물속의 달이 취할 바 없음과 같네.
아상(我相)도 없고 또한 음성도 없으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대성께서는 온법(蘊法)에 의지하지 않고
계(界)와 처(處)의 모든 법 역시 그러하네.
이미 전도된 마음을 잘 해탈하였으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큰 성인께서는 이미 두 치우침을 떠나고
또한 다시 나[我]라는 견해를 끊어 없애어
법계에 대한 평등한 마음이 원만히 이루어졌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색상(色相)과 명수(名數)를 이미 해탈하였고
또한 다시 바르지 못한 법을 멀리 떠나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는 평등한 마음이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모든 마(魔)의 법을 이미 능히 모두 초월하였고
일체의 법 속을 모두 환히 통달하고
묘하게 장애가 없는 법의 문에 들어갔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바른 지혜는 모든 법의 있음도 말하지 않고
또한 다시 모든 법의 없음도 말하지 않고
말의 길이 없고 그것이 발생하지도 않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성인께서는 두 가지 법에 의지하지 않고
오래전에 이미 아만(我慢)의 깃대를 꺾고
둘과 둘이 없는 법의 문을 해탈했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몸과 말과 뜻의 모든 허물을
큰 성인께서는 오래전에 이미 끊어 없앴고
비유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큰 성인께서는 굴림도 없고 또 깨침도 없고
일체의 허물을 모두 멀리 떠나고
지혜가 길잡이 되어 모두 두루 행하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번뇌가 없는 깨끗한 생각이 가장 미묘하여
실답고 실답지 않은 법을 모두 알면서도
매임과 집착이 없고 생각도 또한 없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큰 성인께서는 마음에 반연하는 바 없으나
일체의 마음을 능히 두루 다 알면서도
나와 남이라는 생각이 생기지도 않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반연하는 바 없는 가운데 반연하는 바 있어
일체의 마음에 미혹하여 집착하지 않고
장애가 없는 법이 이미 원만히 밝았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큰 성인께서는 마음에 반연하는 바 없고
또한 다시 제 성품에 소유가 없고
마음이 없는 평등이 원만히 이루어졌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큰 성인께서는 지혜와 법에 의지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찰토(刹土)를 능히 두루 관찰하며
일체 중생들의 행도 그와 같아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지혜로운 사람은 마음에 얻는 바 없고
이 가운데서도 또한 다시 끝까지 없으면서
일체의 법을 바로 두루 다 아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일체의 법은 모두 허깨비와 같은데
이 허깨비도 또한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
허깨비 같은 법의 문을 이미 잘 해탈했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정각(正覺)께서는 비록 세간에서 살아가지만
세간의 법에 의지하지 않고
다시 세간의 분별하는 마음 없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큰 성인께서 저 공중을 다님은
공(空)으로 이루어진 공의 경계로 말미암음이니
공과 공 아님은 성인께서 말씀하신 바라.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큰 신통을 나타내고 요술 같은 일을 일으킴은
모두 허깨비와 같은 삼마지(三摩地)에 의해서이며
갖가지 성품의 두루 들어가는 문을 떠났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하나도 아니요 많음도 아닌 성품을 잘 알고
가까이서나 멀리서나 굴리는 바 없고
높음도 없고 낮음도 없는 평등한 마음이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금강(金剛)에 비유할 선정이 현재 앞에 있어
한 찰나 사이에서 바른 깨달음을 이루고
대애(對礙)가 없는 법의 문에 두루 들어갔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비록 열반을 알더라도 거기에 흔들림 없이
3세(世)를 또한 잘 제어해 항복 받고
가지가지 방편의 문을 두루 원만히 갖추었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저 일체 중생의 무리에 대해
지혜와 방편을 잘 아네.
그런데도 또한 열반의 문에서 움직이지 않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큰 성인께서는 상(相)도 없고 깨침도 없으며
이미 희론(戱論) 떠났으며 대애(對礙)도 없고
나[我]가 없기 때문에 대애의 마음 없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
이미 의혹을 떠나 아무 허물이 없는데
나[我]와 내 것[我所]이 없는 것도 또한 그렇고
일체의 곳을 바르게 두루 아나니
반연하는 바 없는 어르신을 지금 예찬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