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전 제09권

고승전 제09권

3. 신이(神異) ①

01) 축불도징(竺佛圖澄)

축불도징은 서역(西域) 사람이며, 본래 성은 백(帛)씨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맑고 진실하게 배움에 힘썼다. 그리하여 경전 수백 만 글자를 외우고, 의미 또한 잘 이해하였다. 비록 이 땅의 유교와 역사책을 아직 읽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여러 학사들과 의심나고 막히는 곳을 따르고 논할 때면, 마치 증거 조각이 서로 일치하는 것과 같았다. 아무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 스스로 말하였다.

“두 번 계빈국(?賓國)에 가서 이름난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았더니, 서역에서는 모두 득도하였다고 말하였다.”

진(晋)의 회제(懷帝) 영가(永嘉) 4년(310) 중국에 와서 낙양(洛陽)으로 갔다. 불법을 널리 펴는 데 뜻을 두었다. 또한 신비한 주문[神呪]도 잘 외워서 귀신을 부릴 수 있었다. 삼씨로 짠 기름[麻油]을 연지(?脂)에 섞어 손바닥에 바르면, 천 리 밖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손바닥에 있는 그대로 환히 드러났다. 마치 얼굴을 마주 대한 것 같았다. 깨끗하게 목욕재계한 사람도 역시 볼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방울소리를 듣고 그것으로 어떤 일을 말하면, 효험스럽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낙양에 절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유요(劉曜)의 군대가 낙양을 쳐들어왔다. 그러므로 제왕의 서울이 어지러워져서, 절을 세우려는 불도징의 뜻도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물가의 초야에 숨어서, 세상의 변화를 관망하였다.

당시 석륵(石勒)1)이 갈파(葛陂)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오로지 살육으로 위엄을 삼았다. 사문으로서 그에게 살해된 자도 매우 많았다. 불도징은 창생들을 가엾게 생각하여 도로써 석륵을 교화시키려 하였다. 이에 지팡이를 짚고 군문에 도달하였다.

석륵의 휘하에 있던 대장군 곽흑략(郭黑略)은 평소에 불법을 받드는 사람이었다. 불도징은 곧 곽흑략의 집에 몸을 숨겨 그곳에 머물렀다. 곽흑략이 불도징에게서 5계를 받고 제자의 예로 숭배하였다. 그 후 곽흑략은 석륵을 따라 정벌에 나섰다. 그때마다 미리 승부를 알았다. 석륵이 의아하여 물었다.

“경에게 출중한 지모가 있을 줄은 나도 몰랐소. 그런데도 매양 행군할 때의 길흉을 아는 것은 어째서인가?””장군은 하늘이 내리신 우뚝 뛰어난 무예를 지닌 분으로 보이지 않는 신령이 돕니다. 도술과 지혜가 비상한 한 승려가 계십니다. 그분이 ‘장군이 중국 땅을 차지하고 싶다면 나를 스승으로 삼아야만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전후해서 아뢴 말씀은 모두 그의 말입니다.”

석륵은 기뻐하였다.

“하늘이 내려주었도다.”

불도징을 불러 물었다.

“불도에는 어떤 영험(靈驗)이 있는가?”

불도징은 석륵이 깊은 이치에는 도달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바로 도술로써 징험해 보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말하였다.

“지극한 도는 비록 멀다고 하지만, 우리에게 가까운 일로도 역시 증명할 수 있습니다.”

곧 적당한 그릇을 가져와, 물을 담고 향을 사르며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잠깐 사이에 푸른 연꽃이 피어나, 빛나는 색이 눈부시게 하였다. 석륵은 이로 말미암아 불법을 믿고 감복하였다. 불도징이 석륵에게 간언하였다.

“무릇 왕자란 덕에 의한 교화가 지경 안을 촉촉이 적셔주면, 네 가지 신령한 영물이 상서로움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정치가 피폐하고 도가 사라지면, 불길한 혜성(彗星)과 발성(?星)이 하늘에 나타납니다. 변치 않는 물상이 뚜렷이 나타나는 대로 길흉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야말로 예나 이제나 항상 하는 증거로서, 하늘이 사람에게 내리는 밝은 훈계입니다.”

석륵은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마땅히 주살 당할 남은 사람 가운데, 그의 도움을 입은 사람이 열에 아홉은 되었다. 이로써 중국의 오랑캐와 중국 사람들 거의가 모두 부처님을 받들었다.

당시 고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있었다. 세상에서 아무도 이를 치료하지 못하였다. 불도징이 이들을 의술로 치료하여 때에 맞추어 병이 줄어들었다. 남몰래 베풀어 말없이 도움 받은 자는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석륵이 갈파에서 하북(河北)으로 돌아갔다. 방두(坊頭)를 지나가자, 방두 사람들이 밤에 병영을 기습하려 하였다. 불도징이 곽흑략에게 말하였다.

“잠시 후 도적들이 올 것이니, 공에게 알리는 것이 좋겠소.”

과연 그의 말과 같았는데 대비하였으므로 패하지 않았다.

석륵이 불도징을 시험해 보고자 하였다. 밤에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고 칼을 손에 잡고 앉아서 불도징에게 사람을 보내 전하게 하였다.

“밤사이 대장군의 소재를 모릅니다.”

심부름 간 사람이 불도징에게 가서 아직 말하기도 전에 불도징이 거꾸로 물었다.

“평안한 거처에 침범하는 적도 없다. 무엇 때문에 밤 경계를 엄중히 하는가?”

석륵은 더욱 그를 공경하였다. 석륵이 그 후 화가 나서 모든 도사들을 살해하고, 아울러 불도징도 괴롭히려 하였다. 불도징은 곧 피하여 곽흑략의 집에 이르러, 제자에게 말하였다.

“만약 장군이 심부름꾼을 보내어 나의 소재를 묻거든,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보고하여라.”

심부름꾼이 곧 뒤이어 이르렀으나 불도징을 찾을 수 없었다. 돌아가서 석륵에게 보고하니, 그가 놀랐다.

“내가 나쁜 생각을 가지고 성인을 대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이 나를 버리고 떠난 것이다.”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고 불도징을 만날 생각만 하였다. 불도징은 석륵이 잘못을 뉘우쳤음을 알았다. 이튿날 새벽 찾아가니 그가 말하였다.

“어젯밤에는 어디를 갔는가?”

불도징이 말하였다.

“공에게 성난 마음이 있기에 어젯밤에는 짐짓 일부러 피했습니다. 지금은 공께서 잘못을 뉘우치므로 감히 찾아온 것입니다.”

석륵은 크게 웃었다.

“도인이 틀렸네.”

양(襄)나라 성을 둘러싼, 해자로 흘러드는 물의 근원은 성의 서북쪽 5리 되는 지점의 단환사(團丸祠) 아래에 있었다. 그 물이 갑자기 메말랐다. 석륵이 불도징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물을 얻겠나?”

불도징이 말하였다.

“지금 곧 용에게 명령을 내리십시오.”

석륵은 자(字)가 세룡(世龍)이라서, 불도징이 자기를 조롱하는 줄 알고 대답하였다.

“바로 그 용으로도 물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물어보았네.”

불도징이 말하였다.

“이는 성심으로 한 말이지 농담이 아닙니다. 샘물의 원천에는 반드시 신룡(神龍)이 삽니다. 지금 그곳에 가서 칙명을 내리시면, 물을 반드시 얻을 수 있습니다.”

곧 제자인 법수(法首) 등 몇 사람과 함께 샘물의 상류원에 이르렀다. 그 원천의 옛 곳은 이미 오래 전에 건조하게 말라, 갈라진 것이 수레바퀴 자국 같았다. 따라간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의심하며, 물을 얻기는 어렵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불도징은 새끼를 맨 의자[繩床]에 앉아, 안식향(安息香)을 사르고 수백 마디의 주문을 외웠다. 이렇게 사흘이 지나자, 물이 솟아나 미세한 흐름을 이루었다. 이 때 길이가 대여섯 치 가량 되는 한 작은 용이 물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여러 도사들이 다투어 그곳에 가서 이것을 보려 하니, 불도징이 말하였다.

“용에게는 독이 있으니, 그 옆에 가까이 가지 말아라.”

잠시 후에 물이 크게 솟아나 성의 해자가 가득 찼다. 불도징은 한가롭게 앉아 탄식하였다.

“이틀 후에는 아마도 한 소인배가 이 성 아래를 놀랍게 동요시킬 것이다.”

양나라의 설합(薛合)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그들은 소인배이면서 교만하여 선비족(鮮卑族) 노복을 얕보고 희롱하였다. 노복이 분해서 칼을 뽑아 그 아우를 찔러 죽였다. 방으로 들어가, 그의 형을 잡고 칼로 심장을 겨누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든 집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곧 손을 쓰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설합에게 말하였다.

“나를 우리나라로 돌려보내면, 당신의 아이를 살려주겠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여기에서 함께 죽겠다.”

집 안팎이 깜짝 놀라, 가서 구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석륵도 스스로 그곳에 갔다. 이 광경을 보고 설합에게 말하였다.

“노복을 보내서 경의 아들을 보전하면 참으로 좋은 일이오. 이런 일이 일단 일어나면 바야흐로 훗날에 해가 될 것이니, 경은 잠시 너그러운 심정을 가지시오. 나라에는 변치 않는 법이 있소.”

그러나 설합이 사람들에게 노복을 잡아오라고 명령하였다. 노복이 마침내 그의 아들을 죽이고 자살하였다.

선비족의 단파(段波)가 석륵을 공격하였다. 그 무리의 기세가 매우 성하였다. 석륵은 두려워서 불도징에게 물으니, 그가 말하였다.

“어제 절의 방울이 울리면서 이르기를, ‘내일 아침밥을 먹을 때면 단파를 사로잡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석륵이 성에 올라 단파의 군대를 바라보았다. 앞뒤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창백해져 말하였다.

“적군의 행렬이 땅을 기울게 할 정도이다. 어찌 단파를 사로잡을 수 있단 말인가? 이는 공이 나를 안심시키려고 한 말일 뿐이다.”

다시 기안(夔安)을 보내서 불도징에게 물어보니, 불도징이 말하였다.

“이미 단파를 사로잡았소.”

당시 성의 북쪽으로 복병이 나갔다가, 우연히 단파를 만나 사로잡은 것이다. 불도징이 석륵에게 단파를 용서하고 본국으로 돌려보내라 권유하였다. 석륵이 이에 따르니, 마침내 선비족의 쓰임을 얻었다.

당시 유재(劉載)는 이미 죽었다. 유재의 사촌동생 유요(劉曜)가 제왕의 자리를 찬탈하여, 연호를 광초(光初)라 칭하였다. 광초 8년에 유요는 사촌동생인 위중산왕(僞中山王) 유악(劉岳)을 파견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석륵을 공격하였다. 석륵은 석호(石虎)를 파견하여,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이에 항거하였다. 낙양의 서쪽에서 크게 싸웠다. 유악이 패배하여 석량오(石梁塢)만 보전하였다. 석호도 울타리를 단단히 하고 수비하였다. 불도징이 제자들과 관사(官寺)에서 중사(中寺)로 가다가, 절문을 들어서면서 탄식하였다.

“유악이 불쌍하구나.”

제자인 법조가 그 까닭을 물어보니, 불도징이 말하였다.

“어제 해시(亥時)에 유악은 이미 사로잡혔다.”

과연 그의 말과 같았다.

광초(光初) 11년에 유요는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 낙양을 공격하였다. 석륵이 몸소 낙양으로 가서 유요에게 항거하려고 하였다. 내외의 보좌하는 관료들로서 반드시 말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석륵이 불도징을 방문하니, 불도징이 말하였다.

“탑 상륜(相輪)부의 방울이 이르기를, ‘수지(秀支)·체려강(替戾岡)·복곡(僕谷)·구독(?禿)’이라 하니, 이는 갈족(?族)의 말입니다. 수지는 군대라는 뜻이고, 체려강은 나간다는 뜻이고, 복곡은 유요가 오랑캐에 있을 때의 벼슬 이름이며, 구독은 사로잡는다는 뜻에 해당합니다. 이 말은 군대가 나가면, 유요를 사로잡을 수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당시 서광(徐光)이 불도징의 말을 듣고 간절하게 석륵의 출병을 권유하였다. 석륵은 마침내 맏아들 석홍(石弘)으로 하여금 남아서 불도징과 함께 양(襄)나라를 진정케 하였다. 그리고는 몸소 중군(中軍)의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바로 낙양성으로 나아갔다.

양군이 교전하자마자 유요의 군대는 크게 허물어졌다. 유요의 말이 물 속에 빠져서, 석감(石堪)이 그를 사로잡아 석륵에게 보냈다. 불도징이 당시 어떤 물건을 손바닥에 바르고 이를 보니, 큰 무리가 있는 것이 보였다. 큰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포박당해 있고 목에 붉은 끈이 감겨 있었다. 그 때 이런 일을 갖고 석홍에게 알렸다.

“그때쯤 되어서 바로 유요를 사로잡았습니다.”

유요를 평정한 후에, 석륵은 조천왕(趙天王)이라 외람되이 일컬었다. 연호를 건평(建平)으로 바꾸어 황제의 일을 행하였다. 이 해는 동진(東晋) 성제(成帝)의 함화 5년(330)에 해당한다.

석륵은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에 불도징을 더욱 독실하게 섬겼다. 당시 석총(石?)이 모반을 꾀하였다. 그 해 불도징이 석륵에게 경계의 말을 하였다.

“올해에는 파[?: 석총을 말한 것] 속에 벌레가 있어 먹으면 반드시 사람을 해칠 것입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파를 먹지 않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석륵은 지경 안에 나누어 알려서, 파를 삼가하고 먹지 말게 하였다. 8월에 이르러 과연 석총이 달아나니, 석륵은 불도징에게 더욱 존중을 더하였다. 반드시 일이 있으면, 자문 받은 후에 행하였다. 큰 스승[大和上]이라 불렀다.

석호(石虎)에게 빈(斌)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뒤에 석륵이 그를 매우 사랑하였다. 그러나 문득 갑작스러운 병으로 죽었다. 이미 이틀이 지났을 때, 석륵이 말하였다.

“예전에 괵(?)나라의 태자가 죽었을 때, 편작(扁鵲)이 그를 살렸다고 짐은 들었다. 큰 스승[大和上]은 우리나라의 신인(神人)이니, 급히 찾아가서 알리는 것이 좋겠다. 반드시 복을 이룰 수 있으리라.”

불도징이 곧 버들가지를 갖고 와서 주문을 외우니, 잠깐 사이에 죽은 아이가 일어났다. 얼마 후에는 예전 상태로 회복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석륵의 모든 어린 아이들은 대부분 절 안에서 길러졌다. 4월 초파일마다 석륵은 몸소 절을 찾아 불상을 씻으며, 아이들을 위하여 발원하였다.

건평(建平) 4년 4월에 하늘은 고요하여 바람이 불지 않는데, 탑 위의 방울 하나가 홀로 울렸다. 불도징이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방울이 알려주는 구나. ‘나라에 초상이 나며, 그 시기는 올해를 지나지 않는다’고.”

이 해 7월에 석륵이 죽고, 아들 석홍(石弘)이 자리를 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석호는 석홍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왕의 자리에 올랐다. 게다가 도읍지를 업성(?城)으로 옮기고, 연호를 건무(建武)라 칭하였다. 석호는 마음을 기울여 불도징을 섬기기를 석륵보다도 더 존중함이 있었다. 글을 내려 전하였다.

“스승[和上]께서는 이 나라의 큰 보배인데도, 영예로운 작위를 더하지 않았다. 높은 봉록(俸祿)도 받지 않았다. 영화와 봉록이 미치지 않으니 무엇으로 그 덕을 기리겠는가? 지금부터는 옷을 비단으로 만들어 드리고, 타실 것은 그림을 조각한 큰 가마로 마련하여 드리도록 하라.

조회(朝會)가 있는 날에 스승께서 궁전에 오르실 때, 상시(常侍) 이하 모든 사람들이 가마를 들어올리고, 태자와 여러 공자(公子)들이 양쪽을 부축해서 오르게 하라. 주도하는 사람들이 ‘큰 스승[大和上]께서 오셨다’고 외치면, 모든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어서서 그 존귀하심을 나타내도록 하라.”

또한 위사공(僞司空) 이농(李農)에게 명령하였다.

“아침·저녁으로 몸소 문안을 드려라. 태자와 모든 공자들은 5일에 한 번 찾아가서, 짐의 공경하는 마음을 나타내거라.”

불도징은 당시 업성 안의 중사(中寺)에 머물렀다. 제자인 법상(法常)을 북쪽으로 보내 양(襄)나라에 이르게 하였다.

제자인 법좌(法佐)는 양나라에서 업성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양기성(梁基城) 아래에서 서로 만나 함께 유숙하였다. 수레를 마주 대고 밤에 이야기를 나누다가 스승[和尙]의 일을 언급하였다. 아침 무렵에 각기 길을 떠났다. 법좌가 업성에 이르러 절에 들어가서 불도징에게 문안을 드리니, 불도징은 웃음으로 맞이하였다.

“어젯밤에 너와 법상이 수레를 맞대고 함께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더구나. 선대 사람들 말씀에, ‘공경하라고 하지 않더냐?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그 마음을 고쳐먹지 말라. 삼가라고 하지 않더냐? 홀로 있어도 게으르지 말라’고 하셨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홀로 있는 자라도 공경하고 삼가는 것이 근본이다. 그것을 너는 모르느냐?”

법좌가 깜짝 놀라 부끄러워하고 참회하였다. 이에 나라 안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할 때마다 말하였다.

“나쁜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 스승[和上]께서 너의 마음을 아신다.”

불도징이 있는 곳을 향해서는 감히 울거나, 침을 뱉거나, 똥이나 오줌을 누지 않았다.

당시 태자 석수(石邃)의 두 아들이 양나라에 살았다. 불도징이 석수에게 말하였다.

“소아미(小阿彌: 남의 아들에 대한 존칭)께서 요즘 아마도 병에 걸렸을 터이니, 가서 그를 이곳으로 데려오는 것이 좋겠습니다.”

석수가 곧 심부름꾼을 보내 가보게 하였다. 과연 이미 병을 앓았다. 궁전의 대의인 은등(殷騰)과 외국의 도사들이 고칠 수 있다고 자부하였다. 불도징은 제자인 법아(法雅)에게 말하였다.

“바로 성인이 다시 세상에 태어나신다 하더라도, 이 병은 고칠 수 없을 것이다. 하물며 이들 무리들이 고칠 수 있겠느냐?”

그 후 사흘 만에 과연 그 아이는 죽었다. 석수는 주색에 빠져 장차 역모를 꾀하였다. 어느 날 환관에게 말하였다.

“스승[和上]은 신통력이 있다. 어쩌면 도모하는 일이 발각될 수 있다. 내일 그가 오면, 곧 먼저 그를 제거하거라.”

불도징은 보름날이 되자 곧 궁중에 들어갔다. 석호를 뵈려 하면서, 제자인 승혜(僧慧)에게 말하였다.

“어젯밤에 천신(天神)이 나를 불러 이르기를 ‘내일 궁중에 들어갔다가 돌아올 때, 사람들 앞을 지나쳐 오지 말아라’고 하였다. 내가 만일 사람 앞을 지나쳐 오는 곳이 있거든, 네가 곧 이를 멈추게 하여라.”

불도징은 항상 궁중에 들어갈 때마다, 반드시 석수의 앞을 지나갔다. 석수는 불도징이 궁중에 들어오는 것을 알고는, 매우 애타게 길목을 지키며 기다렸다.

불도징이 곧 남대(南臺)에 오르려 하자, 승혜가 옷을 잡아당겼다. 불도징이 말하였다.

“사정상 멈출 수가 없구나.”

앉았지만 편안하지가 않아 곧 일어났다. 석수가 굳게 만류하였다. 그러나 머물지 않아서 석수가 꾀한 일은 마침내 어그러졌다.

불도징은 절에 돌아와 탄식하였다.

“태자가 난리를 꾸며 그 형세가 곧 이루어질 것이다. 말하고자 하여도 말하기 어렵고, 참으려 하여도 참기 어렵구나.”

곧 어떤 일에 인연하여 조용히 석호에게 경계하라는 말을 하였다. 그러나 석호는 끝내 그 뜻을 해득하지 못하였다. 얼마 있다가 사건이 발생하자, 비로소 불도징의 말뜻을 깨달았다.

그 후 곽흑략이 군대를 거느리고 장안 북쪽 산의 강(羌)족 오랑캐를 정벌하다가, 오랑캐들이 매복시킨 복병(伏兵)들 속에 떨어졌다. 당시 불도징은 법당 위에 앉아 있고, 제자인 법상(法常)이 그의 옆에 있었다.

불도징이 참연히 얼굴빛을 고치며 말하였다.

“곽공이 지금 곤경에 빠졌구나.”

그리고는 소리 높이 외쳤다.

“대중 승려들은 주문을 외우며 발원하라.”

불도징도 또한 스스로 주문을 외우며 발원하다가, 잠시 후 다시 말하였다.

“만약 동남쪽으로 나간다면 살 수 있으나, 다른 방향은 곤란하다.”

다시 주문을 외우며 발원하였다. 얼마 후 말하였다.

“탈출하였다.”

그 후 한 달 남짓 지나서 곽흑략이 돌아와 스스로 설명하였다.

“강족 오랑캐의 포위망 속에 떨어졌습니다. 동남쪽을 향해서 말을 달리던 중에, 바로 장막 아래에 있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가 말을 내주면서, ‘공은 이 말을 타시오. 소인이 공의 말을 타겠소. 구제될지 구제되지 못할지는 천명에 맡기지요’라고 하였습니다.”

곽흑략은 그의 말을 빌려 타서 재난을 면할 수 있었다. 그 날짜와 시간을 미루어 따져보니, 바로 불도징이 주문을 외우며 발원하던 때였다.

위대사마(僞大司馬)인 연공(燕公) 석빈(石斌)을 석호가 유주(幽州)의 목사로 임명하여 계(?)에 주둔케 하였다. 이 때 뭇 흉악한 무리들이 그곳에 모여들어 마음껏 포악한 짓을 일삼았다. 불도징은 석호에게 경계의 말을 하였다.

“어제 밤에 천신(天神)이 말하기를, ‘빨리 거두어들여 말을 돌아오게 하여라. 가을이 되면 제(齊)가 아마도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석호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곧 모든 곳에 명령하여 말을 거두어 돌아오게 하였다. 그 해 가을에 어떤 사람이 석호에게 거짓으로 석빈을 모함하였다. 석호는 석빈을 불러 3백 대의 채찍질을 하고, 그의 소생모인 제씨(齊氏)를 죽였다.

석호는 활을 휘어 화살을 집고서는, 스스로 석빈에게 행한 형벌이 가볍다고 생각하고, 곧 손수 5백 명을 죽이려 하였다. 불도징이 간언하였다.

“마음을 제멋대로 놓아두어서는 안 되며, 죽으면 다시는 살릴 수 없습니다. 예법에도 ‘친히 사람을 죽여서 은혜를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천자가 손수 행하는 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석호는 이윽고 중지하였다. 그 후 진(晋)나라 군대가 회하(淮河)와 사수(泗水) 지방으로 진출하니, 농북(?北) 일대의 모든 성이 침략당하여 핍박받았다. 세 방면에서 다급함을 알려와 인정이 위태하고 어지러웠다. 이에 석호는 성을 내었다.

“나는 부처를 받들고 승려들에게 공양을 했다. 하지만 다시 외부의 침략을 당하니, 부처에게는 신통이 없다.”

불도징이 이튿날 새벽에 일찍 궁중에 들어가니, 석호가 이 일로 불도징에게 물었다. 불도징은 이로 인하여 석호에게 간언하였다.

“왕은 전생에 큰 장사꾼이 되어, 계빈사(?賓寺)에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큰 모임에 공양을 올릴 때에 그 가운데는 60나한(羅漢)이 있었습니다. 저의 이 미미한 몸도 그 모임에 참여하였습니다. 그 때 어떤 득도한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이 공양주는 명이 다하면 아마도 닭으로 태어났다가, 그 후에는 진(晋)나라 땅의 임금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임금님께서는 임금이 되었으니, 어찌 복이 아니겠습니까? 국경 지대에 군대가 침범하는 것은 나라에 보통 있는 일인데, 어떻게 삼보를 원망하고 비방할 수 있으며, 한밤중에 독한 생각을 일으킬 수 있으십니까?”

석호는 이에 믿고 깨달아 무릎을 꿇고 사과하였다. 늘상 석호가 불도징에게 물었다.

“불법이란 어떤 것인가?”

불도징이 대답하였다.

“불법이란 살생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석호가 말하였다.

“짐이 천하의 주인이 되어 형벌과 죽이는 일이 아니면, 난리를 평정하여 세상을 깨끗이 할 수가 없다. 이미 계율을 어기고 살생을 하였다. 그러니 비록 다시 부처님을 섬긴다 하더라도, 어떻게 복을 얻을 수 있겠는가?”

불도징이 말하였다.

“제왕이 부처님을 섬기는 일은 마땅히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마음을 수순하여 삼보를 크게 드러내어, 포학한 짓을 하지 않고 무고한 사람을 해치지 않는 데 있습니다. 흉악하고 어리석은 무뢰한(無賴漢)들은 교화로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죄가 있으면 죽이지 않을 수 없고, 악한 일이 있으면 형벌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만 마땅히 죽여야 할 사람만 죽이고, 형벌을 내려야 할 사람만 형벌을 내려야 합니다.

만약 포학하고 마음대로 날뛰는 무리를 살해한다면,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비록 그들이 다시 재산을 기울여 불법을 섬긴다고 하더라도, 재앙과 화를 풀 길은 없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 욕심을 죽이고 자비심을 일으켜 널리 모든 백성들에게 미치게 하옵소서. 그리하신다면, 불교는 영구히 융성해지고, 나라의 복된 운수도 바야흐로 먼 훗날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석호는 비록 다 따를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이익된 것이 적지 않았다. 석호 아래에서 상서(尙書)로 있던, 장리(張離)와 장량(張良)은 집안의 부유함으로 부처님을 섬겨서 각기 큰 탑을 세웠다. 불도징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부처님을 섬기는 일은 청정하고 욕심 없이 자애롭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시주들은 의례적으로는 대법을 받들면서도 탐욕과 인색한 마음이 끝이 없습니다. 사냥을 즐기기에 한도가 없고, 재물을 모아 쌓기에 다함이 없습니다. 바야흐로 현세에서 그 죄의 대가를 받을 것인데, 어떻게 미래의 복된 과보를 받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그 후 장리와 장량 등은 모두 살육 당하고 멸족되었다. 당시에 또한 가뭄이 오래 계속되어 정월에서 유월까지 이르렀다. 석호는 태자를 임장(臨?)의 서부구(西釜口)로 보내 기우제를 지냈다. 하지만 이후에도 오래도록 비는 내리지 않았다. 석호는 불도징에게 스스로 기우제를 행하게 하였다. 곧 두 마리의 흰 용이 나타나, 제사 드리는 곳으로 내려왔다. 그 날 사방 수천 리에 큰비가 내렸다. 그 해 농사는 큰 수확을 거두었다.

융맥(戎貊: 북쪽 오랑캐)의 무리들이 전에는 불법을 몰랐었다. 불도징의 신비한 영험을 듣자, 모두 멀리 불도징을 향하여 예배드렸다. 그러니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교화된 것이다.

불도징은 늘상 제자를 서역으로 보내서 향을 사오게 하였다. 제자가 길을 떠나자, 불도징이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향을 사러 간 제자가 손바닥에 보인다. 어느 곳에선가 처음으로 도적들에게 겁탈 당하여, 거의 죽으려 하는구나.”

그러고는 향을 사르고 주문을 외우며 발원하여, 멀리 있는 그를 구제하여 보호하였다.

그 후 제자가 돌아와서 말하였다.

“어느 달 어느 날 어느 곳에서 도적들에게 겁탈 당하여 거의 죽을 뻔하였습니다. 문득 향냄새를 맡자, 도적들이 까닭 없이 스스로 놀라 말하기를 ‘구원병이 이미 이르렀다’고 하며, 저를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석호는 임장(臨?)에서 옛 탑을 수리하였다. 승로반(承露盤)이 모자랐다. 불도징이 말하였다.

“임치성(臨淄城) 안에는 옛날 아육왕(阿育王)이 조성한 탑이 있고, 땅 속에는 승로반과 불상이 있습니다. 지금 그 위에는 숲과 나무들이 무성하나, 그곳을 파면 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곧 그림을 그려 심부름꾼에게 주었다. 그의 말대로 그곳을 파니, 과연 승로반과 불상을 얻었다. 석호는 늘 연(燕)나라를 토벌하고자 하였다. 불도징이 충고하여 말했다.

“연나라의 운세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끝내 그것을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석호가 여러 번 연나라를 토벌하였다. 그러나 실패하자 비로소 불도징의 훈계를 믿었다.

불도징의 도에 의한 교화가 행해지자, 백성들이 대부분 부처님을 받들었다. 모두 절[寺廟]을 영조하며, 서로 다투어 출가하였다. 그런 까닭에 진짜와 가짜가 뒤섞여 허물과 과오가 많이 생겨났다. 석호는 글을 내려 중서성(中書省)에 물어보았다.

“부처님을 세상에서는 세존이라 부르며 국가에서는 받드는 분이다. 동네의 소인으로 벼슬과 직위가 없는 사람들도, 부처님을 섬겨도 마땅한 것인가? 또한 사문이란 모두가 마땅히 고결하고 곧고 바른 사람으로, 정진을 행한 연후에야 도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사문의 수효는 너무나 많다. 그 가운데는 혹 간사하고 악독한 자가 부역을 피한 경우도 있어서 마땅하지 않은 사람이 많다. 그러니 이를 가려내 자세히 의론하는 것이 좋겠다.”

중서저작랑(中書著作郞)인 왕도(王度)가 상주하여 아뢰었다.

“무릇 ‘왕자란 천지에 교사(郊祀)의 제사를 올리고, 모든 신을 제사로 받들어야 한다’고 제사의 법전에 실려 있습니다. 그 예법은 음식을 잡수도록 올리는 것입니다. 부처는 서역에서 태어났고, 외국의 신이라 공덕이 백성들에게 베풀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자나 여러 귀족들이 마땅히 제사 드리며 받들 대상이 아닙니다.

과거 한(漢)나라의 명제(明帝)가 꿈에 부처에 감응하여 처음으로 그 도가 전해졌습니다. 오직 서역 사람에게만 도읍지에 절을 세워, 그 신을 받드는 일을 허용하였을 뿐입니다. 한나라 사람은 모두 출가할 수 없었습니다. 위(魏)나라에서 그 제도를 이어받아 역시 전대의 법도를 닦아왔습니다. 지금 우리 위대한 조(趙)나라가 천명을 받아서는, 거의 옛 법도로 말미암고 있습니다.

중국과 오랑캐는 제도가 다르고, 사람과 신에 있어서도 부류가 다릅니다. 외국은 우리나라와 같지 않고, 음식을 잡수도록 올리는 제사 또한 예법이 다릅니다. 중국의 의복과 제사를 뒤섞이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나라에서 조나라 사람은 모두 절을 찾아가 향을 사르거나 예배드리는 일을 허락하지 마옵소서. 단절시켜 전례(典禮)를 따르도록 해야만 합니다.

모든 관료와 공경대부에서부터 아래로는 많은 노예들에 이르기까지, 예에 따라 모두 금지시켜야 합니다. 이를 범하는 자가 있으면, 법도에 어긋나는 제사를 지내는 사람과 같은 죄로 처벌하십시오. 조나라 사람으로서 사문이 된 자는 다시 4민(民)의 복장으로 환원시켜야 합니다.”

위중서령(僞中書令) 왕파(王波)도 왕도와 같은 내용을 상주하였다. 석호는 글을 내려 전하였다.

“왕도의 논의에 의하면, 부처는 외국의 신이라서 이 나라의 천자나 여러 귀족들이 마땅히 받들 만한 신이 아니라고 하였다. 짐은 변방에서 태어나, 분수에 넘치게 한 시기의 천운을 만나 중국 땅에 군림하였다. 음식을 잡수도록 올리는 제사에 이르러서는, 중국의 제사에다 마땅히 본래의 풍속을 겸하여 따라야 할 것이다. 부처는 바로 오랑캐 나라의 신이니 마땅히 받들어야 할 존재다.

무릇 제도라는 것은 윗사람으로 말미암아 행해져서 영원히 세상의 법칙이 되는 것이다. 그렇거늘 진실로 일에 이지러진 점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전시대의 법에 구애받겠는가? 오랑캐든 조나라 사람이든 기타 모든 만족(蠻族)에 이르기까지, 법도에 어긋나는 제사를 버리고 부처님을 섬기기를 즐거워하는 자들은, 모두 도를 위하는 것을 허락하노라.”

이에 계율에 태만하던 무리들도 이로 인하여 계율 지키기에 힘썼다.

황하(黃河) 안에서는 예전에는 자라가 생겨나지 않았다. 문득 자라 한 마리를 얻어, 석호에게 바쳤다.

불도징이 이것을 보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환온(桓溫)2), 그 사람이 강물 속에 들어갈 날도 멀지 않겠구나?”

환온의 자는 원자(元子: ?)이다. 그 후 과연 그의 말과 같이 되었다.

당시 위현(魏縣)에 한 떠돌이 백성이 있었다. 그의 씨족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항상 위현의 한 가운데서 구걸을 하고 다녔다. 삼베로 된 속옷과 무명으로 된 치마를 입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그를 마유(麻?: 삼베 속옷)라고 불렀다. 말솜씨는 탁월하고 모습은 정신병자와 같았다.

쌀이나 곡식을 구걸해서 얻으면 먹지 않았다. 곧 큰길에 흩어두고 일컬었다.

“천마(天馬)의 먹이다.”

초흥(超興) 태수가 호적에서 빼내고 거두어, 석호에게 보내서 그를 만나게 하였다. 이에 앞서 불도징이 석호에게 말하였다.

“나라 동쪽 2백 리에서 아무 달 아무 날에 아마도 한 비상한 사람을 보내올 것입니다. 그를 죽이지 마옵소서.”

과연 그가 말한 날짜대로 이 사람이 이르렀다. 이에 석호는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조금도 이상한 말은 없었다. 오직 이렇게만 말하였다.

“폐하께서는 아마도 기둥 하나짜리 궁전 아래에서 세상을 마칠 것입니다.”

석호는 이 말을 해득하지 못하였다. 그를 보내서 불도징을 찾아가게 하였다. 이 때 마유가 불도징에게 말하였다.

“예전 광화(光和) 연간(178~184)에 만나고 어느덧 오늘에 이르렀구나. 서쪽 오랑캐가 하늘의 명[玄命]을 받았으나, 운수가 끊어지는 것은 끝내 정해진 기일이 있다. 금을 비록 떨어뜨려 땅에서 녹인다 하더라도, 변방의 황무지 사람을 따를 수는 없다. 신령한 기약[靈期]의 자국을 몰아내서 제거하니, 자기를 자기답게 하는 아름다움도 나타내지 말거라. 후세 자손들의 잎새가 번성하면 내세의 복도 비로소 쌓이리라. 아름다운 시기를 어디에서 기약하겠는가? 길이 이를 한탄하노라.”

불도징이 말하였다.

“하늘은 돌고 돌아 운이 다하면 운수가 나빠져서 지탱하지 못한다. 아홉 나무의 물이 어려워지면 도술로서도 안녕할 수가 없다. 어질고 밝은 이가 비록 세상에 남아 있다 하더라도, 기초가 반드시 무너져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오래도록 노닐어 염부제를 이롭게 했지만, 어지럽고도 어지러워 이런 근심만 많다. 걸어 구름을 넘나드는 집에 올라, 신령이 노니는 곳에서 만나자.”

불도징과 마유는 하루 종일 강론을 나눴다. 그러나 아무도 그 뜻을 해득하는 사람이 없었다. 가만히 몰래 엿들은 사람이 있으나, 오직 이 몇 마디 말만 들었을 뿐이다. 미루어 헤아려보면, 수백 년에 걸친 미래의 일을 논한 듯하다.

석호가 역마(驛馬)를 보내서 본래의 고을로 되돌려 보냈다. 이미 성밖을 벗어나자, 말을 사양하고 걸어갈 수 있다면서 말하였다.

“내가 마땅히 방문해야 할 곳이 있소. 그렇지만 출발하기에는 아직 편안한 시간이 아니오. 합구교(合口橋)에 이르면 머무르시오. 거기에서 만나는 것이 좋겠소.”

심부름꾼은 그의 말대로 말을 달려 떠났다. 미처 합구교에 이르기도 전에, 이미 마유는 다리 위에 있었다. 그의 걸음걸이[行步]를 생각해보니, 나는 것과 같은 도술이 있는 듯하였다.

도진(道進)

불도징에게는 도진이라는 제자가 있었다. 배움이 내외의 경전에 뛰어나, 석호의 존중을 받았다.

어느 날 이야기가 은사(隱士)의 일에 대하여 미치자, 석호는 도진에게 말하였다.

“양가(楊軻)라는 사람은 짐의 백성이다. 10여 년 동안 그를 불렀으나, 짐의 명령에 공손하지 않았다. 짐짓 몸소 그를 찾아가 보았는데도 오만하게 누워 있었다. 짐이 비록 덕이 없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만방에 군림하고 있다. 내가 탄 가마가 향하는 곳은 하늘이 끓고 땅도 용솟음친다. 비록 나무나 돌을 무릎 꿇게 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어찌 필부로서 길이 오만할 수 있는가? 예전에 태공(太公)이 제(齊)나라로 갈 때 먼저 화사(華士)를 주살하였다. 태공은 현철한 인물이니, 어찌 그가 그릇된 일을 했겠는가?”

도진이 대답하였다.

“예전에 순(舜)임금은 부들 옷[蒲衣]을 입은 사람을 넉넉히 대하였고, 우(禹)임금은 백성(伯成)을 찾아갔습니다. 위문후(魏文侯)는 단간목(段干木)에게 수레 위에서 인사했고, 한(漢)나라는 주당(周黨)을 찬미하였습니다. 관녕(管寧)은 조조(曺操)의 부름에 불응하였고, 황보(皇甫)씨는 진(晋)나라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이들 두 분의 성인과 네 사람의 임금은 함께 그들의 절조를 더했습니다.

장차 탐욕하고 다투는 무리들을 무찌르고, 맑은 풍조를 우뚝하게 하고자 한다면, 폐하께서는 순(舜)·우(禹)의 덕을 따르시고, 태공의 형벌 씀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임금의 거둥은 반드시 글로 쓰여집니다. 어찌 조(趙)나라의 역사에 은둔한 사람들의 전기가 없어지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석호는 그의 말에 기뻐하였다. 곧 양가를 그가 머물던 곳으로 되돌려 보내고, 열 집의 조세(租稅)를 그에게 공급하게 하였다. 도진이 돌아와서, 자세히 이 이야기를 불도징에게 아뢰었다. 그러니 불도징은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였다.

“너의 말은 착했으나, 다만 양가의 명이 매달린 곳이 있구나.”

그 후 진주(秦州)에 병란(兵亂)이 일어났다. 양가의 제자는 양가를 소에 태우고 서쪽으로 달아났다. 융(戎)족 군대에게 사로잡혀 모두 살해되었다.

어느 날 석호가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다. 양(羊)떼들이 물고기[魚]를 업고, 무리를 지어 동북쪽에서 오는 것을 보았다. 꿈에서 깨어나 불도징을 방문하니, 불도징이 말하였다.

“상서롭지 못한 꿈입니다. 선비족(鮮卑族)이 중원 땅을 가질 것입니다.”

그 후 과연 모용씨(慕容氏: 5호 16국 때 燕나라를 세운 선비족)가 거기에 도읍하였다. 또 어느 날 불도징은 석호와 함께 중당(中堂)에 올랐다. 불도징이 문득 놀라서 말하였다.

“변(變)이다, 변이다. 유주(幽州)에서 화재를 만났구나.”

그리고는 이어 술을 갖다가 그쪽 방향에 뿌렸다. 오래 있다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제 불은 꺼졌다.”

이에 석호는 사람을 보내서 유주에 가서 증험해 보게 했더니, 그곳에서 전하였다.

“그 날 불이 사방의 문에서 일어났습니다. 서남쪽에서 검은 구름이 몰려와 소낙비를 퍼부어 불을 껐습니다. 그 비에는 또한 자못 술기운이 있었습니다.”

석호의 건무(建武) 14년(348) 7월에 이르러, 석선(石宣)과 석도(石韜)가 장차 서로 죽이기를 꾀하였다. 당시 석선은 절에 이르러 불도징과 함께 앉아 있었다. 탑의 방울 하나가 홀로 울리니, 불도징이 석선에게 말하였다.

“방울소리를 이해하십니까? 방울이 호자낙도(胡子落度)라고 말합니다.”

석선의 얼굴빛이 변하여 물었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불도징은 거짓으로 말하였다.

“이 늙은 오랑캐가 도를 위한다면서 산에 살지 않으니,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두터운 왕골방석에 앉아서 아름다운 옷을 입으니, 어찌 이것이 낙도(落度: 법도가 떨어진 것)가 아니겠습니까?”

그 후 석도가 그곳에 이르렀다. 불도징이 한참 동안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석도가 두려워하며 불도징에게 까닭을 물었다. 이에 불도징이 말하였다.

“괴이하게 공에게서 피냄새가 나기 때문에 쳐다보았을 따름이오.”

8월에 이르러 불도징은 열 사람의 제자들에게 별실에서 재를 올리게 하였다. 그러고는 자신은 잠시 동각(東閣)에 들어갔다. 석호와 황후인 두(杜)씨가 안부를 물었다. 이 때 불도징이 말하였다.

“겨드랑이 밑에 도적이 있으니, 열흘이 넘지 않을 것입니다. 불도각(佛圖閣)에서부터 서쪽까지, 이 법전에서 동쪽까지 유혈사태가 있을 것입니다. 삼가하여 동쪽으로 가지 마십시오.”

두황후가 말하였다.

“스승[和上]께서는 노망이 나셨나? 어디에 도적이 있다는 것인가?”

불도징은 곧 말을 바꾸었다.

“6정(情)으로 받은 것이 모두 다 도적입니다. 늙으면 저절로 노망이 들겠지만, 다만 젊은 사람들로 하여금 혼미해지지 않게 하고자 할 뿐입니다.”

곧 빗댄 말로 바꾸어 다시는 드러내서 말하지 않았다. 그 후 이틀이 지나자, 과연 석선이 사람을 파견하여 절 안에서 석도를 살해하였다. 이어 석호가 초상에 임하는 기회를 틈타서 대역(大逆)을 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석호는 이에 앞선 불도징의 훈계 때문에 면할 수 있었다.

석선은 일이 발각되어 수감 당하였다. 불도징이 석호에게 간하였다.

“기왕 이 사람도 폐하의 아들입니다. 어떻게 거듭 화를 만들 수 있습니까? 폐하께서 만약 노여운 마음을 참고 자비를 더하신다면, 그는 아직도 60여 년은 더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반드시 주살하고자 하신다면, 혜성(彗星)이 내려와 업궁사(?宮寺)를 쓸어낼 때 해야만 합니다.”

석호는 그의 말에 따르지 않았다. 쇠사슬로 석선의 턱을 뚫어 끌고 가서,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고 불태워 죽였다. 더구나 그의 관속 3백여 명을 거두어, 모두 말이 모는 수레로 사지를 찢어 장하(?河)에 던졌다.

불도징은 곧 제자들에게 명령하여 별실에서 재 올리기를 그만두게 하였다. 그 후 한 달 남짓 지나서 한 필의 요괴한 말이 나타났다. 갈기와 꼬리에 모두 불에 탄 형상이 있었다. 이 말이 중양문(中陽門)으로 들어와서 현양문(顯陽門)으로 나갔다. 동쪽으로 머리는 동궁(東宮)을 향하였다. 그러나 모두 들어가지 못하고 동북쪽으로 달아나다가,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불도징은 이 소식을 듣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재앙이 미치겠구나.”

그 해 11월이 되자, 석호는 뭇 신하들에게 태무전전(太武前殿)에서 크게 향응을 베풀었다. 불도징은 읊조렸다.

“궁전이여, 궁전이여. 가시가 숲을 이루네. 장차 사람들의 옷을 허물겠구나.”

석호는 궁전의 돌 밑을 파서 보게 하니, 돋아나는 가시나무가 있었다. 불도징은 절에 돌아와서 불상을 보면서 말하였다.

“장엄할 수 없는 것이 슬프고 한이 됩니다.”

그리고는 혼잣말로 일컬었다.

“3년 더 살 수 있을까?”

스스로 말하였다.

“안 돼, 안 돼.”

또 말하였다.

“2년, 1년, 백 일, 한 달, ……”

스스로 대답하였다.

“안 돼.”

곧 다시는 말이 없었다. 그 길로 방으로 돌아가 제자인 법조(法祚)에게 말하였다.

“무신년(348)에 화란의 조짐이 싹트고, 기유년(349)에 석씨가 멸망할 것이다. 나는 그 난리가 미치기 전에 앞서, 죽음의 길을 따르려 한다.”

곧 사람을 보내서 석호에게 이별의 말을 전하였다.

“사물의 이치는 반드시 옮겨지는 법이라, 목숨은 보장된 것이 아닙니다. 빈도의 허깨비와 불꽃같은 몸에 죽음의 기약이 이미 이르렀습니다. 이미 은혜를 입은 것이 남다르게 무거웠던 까닭에, 거꾸로 우러러 이 일을 알려드립니다.”

석호는 한탄하더니 말하였다.

“스승[和上]에게 병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건만, 문득 그렇게 임종을 알립니까.”

곧 몸소 궁전을 나와 절을 찾아가서 위로하고 달랬다. 불도징이 석호에게 말하였다.

“태어나서 죽음에 들어가는 것은 변치 않는 도리입니다. 명의 길고 짧음은 분수대로 정해져 있으므로, 사람이 연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는 행실이 온전한 것을 존중합니다. 덕은 게으름이 없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진실로 일과 지조에 이지러진 것이 없다면, 비록 죽는다 하더라도 살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천명을 어겨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저의 뜻에 미진한 것이 있다면, 국가가 마음으로 불교의 진리를 존속시켜서 불법을 받드는 데 인색함이 없이 하며, 절[寺廟]을 흥기시켜서 높고 뚜렷하게 장엄하고 화려하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공덕을 칭송한다면, 마땅히 아름다운 복을 향유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를 펴는 것이 맹렬하고, 도에 지나친 형벌[淫刑]이 가혹하게 넘치며, 뚜렷이 성전의 말씀을 어기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법의 훈계에 등을 돌려서 스스로 징계하고 고치지 않는다면, 끝내 복된 도움은 없을 것입니다.

만약 마음을 내려놓고 생각을 바꾸어 아래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푼다면, 나라의 운수가 연장되고 도인과 속인이 기뻐하며 의지할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목숨이 끝나는 지경에 나아간다 하더라도, 여한[遺恨]이 없겠습니다.”

석호는 비통해 하여 오열을 터트렸다. 불도징이 반드시 갈 것임을 알고는,

곧 그를 위하여 땅속을 뚫어 분묘를 영조하였다.

12월 8일에 이르러 업궁사(?宮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이 해는 진(晋) 목제(穆帝)의 영화(永和) 4년(348)이다. 그 때 나이는 117세이다. 선비와 서민들이 슬퍼하여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니, 나라가 기울어질 정도였다. 이어 임장(臨?)의 서쪽 시맥(柴陌)에 묻었다. 곧 석호가 만든 무덤이다.

갑자기 양독(梁犢)이 난을 일으켰다. 다음해에 석호가 죽었다. 염민(?閔)이 제왕의 자리를 찬탈하여, 석씨 종족을 모두 다 죽였다.

염민의 어릴 때 자(字)가 극노(棘奴)였다. 앞서 불도징이 이른바 “가시가 숲을 이룬다”라고 한 것은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불도징의 왼편 젖무덤 옆에 둘레가 네다섯 치 가량 되는 구멍 하나가 있었다. 그것이 배 안까지 관통하였다. 때로는 창자를 뱃속에서 꺼내거나, 혹은 솜으로 구멍을 막기도 하였다. 밤에 책을 읽고자 하여 곧 솜을 뽑으면, 온 방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또한 재를 올리는 날이 되면, 곧 물가로 가서 창자를 꺼내어 씻고, 다시 안에 넣었다.

불도징은 키가 8척이나 되었다. 풍모와 자태가 청아하였다. 오묘하게 깊은 경전을 해득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세속의 논리에도 뛰어났다. 강설하는 날에는 오직 종문의 취지를 표방하고, 시작과 끝의 말을 밝게 깨닫게 하였다. 이에 더하여 또한 자비로움으로 창생을 적셔, 위태하고 고통 받는 사람을 건져 구제하였다.

흉악하고 강포한 두 석씨[石勒·石虎]의 정도에 비켜선 학살과 해침이, 만약 불도징과 날을 함께 하지 않았다면, 누가 그 참상을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백성들은 이익을 힘입었지만, 그것이 날마다 작용하는데도 몰랐을 뿐이다.

불조(佛調)·수보리(須菩提) 등 수십 명의 이름난 승려들이 모두 천축국의 강거(康居)에서 나와서, 수만 리 길을 멀다 않고, 발로 고비 사막을 건너 불도징을 찾아와 가르침을 받았다. 번면(樊沔: 樊川과 沔水)의 석도안(釋道安), 중산(中山)의 축법아(竺法雅)도 나란히 함곡관과 황하를 넘어 불도징의 강설을 들었다. 모두 정밀한 교리에 오묘하게 뛰어나, 그윽하고도 미묘한 진리를 헤아려 닦았다.

불도징은 스스로 말하였다.

“내가 태어난 곳은 업성(?城)과의 거리가 9만여 리나 된다. 집을 버리고 도문에 들어온 지는 109년이나 되었다. 술은 이빨의 문턱을 넘지 않았고, 정오가 지나면 먹지 않았다. 계율이 아닌 것은 하지 않았고, 욕망도 없고 구하는 것도 없다.”

수업 받고 따라 노니는 이들이 항상 수백 명이었다. 전후해서 문도의 수효만도 거의 1만 명이었다. 거쳐간 주(州)·군(郡)에 절을 세운 것만도 893곳에 이르렀다. 그러니 불법을 널리 펴는 성대함에서 그보다 앞설 사람은 없었다.

과거 석호가 불도징의 시신을 염하면서, 살아 있을 때의 지팡이와 발우를 관 속에 넣었다. 그 후 염민이 제왕의 자리를 찬탈하고, 관을 열어보았다. 오직 발우와 지팡이만 있고,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불도징이 죽던 달, 그가 고비 사막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였다. 석호는 불도징이 죽지 않았다고 의심했으므로, 관을 열어보니 시신이 없었다.

그 후 모용준(慕容俊)이 업성에 도읍을 정하고, 석호(石虎)의 궁전에서 거처하였다. 늘 꿈에 호랑이가 그의 팔뚝을 무는 것을 꾸었다. 그는 생각하였다.

‘석호의 귀신이 재앙을 내려서 그런 것이다.’

곧 석호의 시체를 찾았다. 동명관(東明館)에서 이를 파내었다. 당시 시신은 강시(?屍: 미이라)가 되어 허물어지지 않았다. 모용준은 그 시신을 발로 밟고 욕을 하였다.

“죽은 것이 어찌 감히 살아 있는 천자를 무섭게 하는가? 네가 궁전을 지어 완성시켰지만, 너의 자식의 도모하는 대상이 되었거늘, 하물며 또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가?”

매질을 하여 훼손시키고 욕을 하면서, 장하(?河)에 던져버렸다. 시체는 다리기둥에 기대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진(秦)나라의 장군인 왕맹(王猛)이 곧 이를 거두어 장례 지냈다. 마유(麻?)의 이른바 ‘기둥 하나짜리 궁전’이 이것이다.

그 후 부견(符堅)이 업성을 정벌하자, 모용준의 아들 모용위(慕容暐)가 부견 군대의 대장인 곽신호(郭神虎)에게 사로잡혔다. 실로 이는 모용준이 먼저 꿈에 본 일의 영험인 것이다. (곽신호의 끝 이름이 호랑이 ‘虎’이다.) 전융(田融)의 『조기(趙記)』에 일컬었다.

“불도징이 죽기 몇 해 전에 스스로 무덤을 영조하였다.”

불도징은 이미 반드시 무덤이 열릴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또한 시신도 그 속에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미리 무덤을 만들었다는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아마도 전융이 잘못 알고 썼을 것이다.

불도징은 혹 불도등(佛圖?)이라고도 하고, 혹 불도등(佛圖橙)이라고도 하며, 또 혹 불도징(佛圖澄)이라고도 한다. 모두가 범어에서 취한 발음이 같지 않아서일 따름이다.

02) 단도개(單道開)

단도개의 성은 맹(孟)씨이며, 돈황(燉煌)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숨어살 마음을 품었다. 경전 40만여 글자를 외우며, 곡식을 끊고 잣 열매를 먹고살았다. 잣 열매를 얻기 어려우면 다시 송진을 먹었다. 나중에는 미세한 돌가루를 복용하였다. 한 번에 몇 매(枚)씩 삼키기를 며칠에 한 번 하였다. 혹 어떤 때는 일정 분량의 생강과 후추를 먹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7년 동안 계속하니, 그 이후로는 추위와 더위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겨울에는 몸이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여, 낮이나 밤이나 눕지 않았다. 동학(同學) 열 사람과 함께 이러한 것을 먹고 복용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10년이 지나자, 어떤 사람은 죽고 어떤 사람은 물러나서, 오직 도개만이 뜻을 온전히 하였다.

부릉(阜陵) 태수가 말을 보내서 도개를 맞아들이려 하였다. 그러자 도개는 걸어가도 된다 하여 사양하였다. 3백 리 길을 말 탄 사람보다 하루 일찍 이르렀다.

산의 나무 신[樹神]이 간혹 다른 형상으로 나타나 그를 시험하였다. 그러나 애초부터 두려운 빛이 없었다.

석호의 건무(建武) 12년(346)에 서평(西平)에서 올 때는, 하루에 7백 리를 걸어서 남안(南安)에 이르렀다. 한 동자(童子)를 제도하여 사미(沙彌)로 삼았다. 나이는 열네 살이었다. 그가 교법을 품수 받자, 걸음이 도개에 미칠 수 있었다. 당시 태사(太史)가 석호에게 상주하였다.

“선인의 별자리[仙人星]가 보였으니, 아마도 덕이 높은 선비가 경내로 들어올 것입니다.”

석호는 두루 주(州)·군(郡)에 명령하였다. 범상치 않은 사람이 있으면, 상계(上啓)하여 알리도록 하였다. 그해 겨울 11월에 진주(秦州) 자사가 표를 올려 도개를 보냈다.

처음에 업성(?城) 서쪽의 법림사(法?祠)에 머물렀다. 그 후 임장(臨?)의 소덕사(昭德寺)로 자리를 옮겼다. 방안에 높이 8척 내지 9척 가량의 이중 다락을 만들었다. 그 위에 왕골로 엮어 선실(禪室)을 만들었다. 광주리 열 섬들이 크기만 하여, 항상 그 안에서 좌선하였다.

석호가 공급하는 물자는 매우 후하였다. 도개는 모두 이것으로 보시를 베풀었다. 당시 신선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이 찾아와서 자문을 구하였다. 그러나 도개는 도무지 대답하지 않았다. 마침내 게송을 설하였다.

모든 고통 받는 사람이 가여워서
출가하여 세상을 이롭게 하려 했소.


이롭게 하려면 모름지기 학문에 밝아야 하니
학문이 밝으면 악을 끊을 수 있다오.



산이 멀어 양식 구하기 어려워
단식하는 계책을 만들었을 뿐
신선의 짝이 되려는 것이 아니니
전설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소.



我矜一切苦 出家爲利世
利世須學明 學明能斷惡
山遠糧粒難 作斯斷食計
非是求仙侶 幸勿相傳說

도개는 눈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 당시 진공(秦公)이었던 석도(石韜)가 도개를 찾아가 눈병을 치료하였다. 약을 넣으니, 조금 아파서 석도는 매우 두려워하였다. 결국은 그 효과를 얻었다. 불도징(佛圖澄)이 말하였다.

“이 도사는 나라의 흥망성쇠를 비추어 본다. 만약 떠난다면 아마도 큰 재앙이 있으리라.”

석호의 태녕(太寧) 원년(359)에 이르자, 도개는 제자와 더불어 남쪽 허창(許昌)으로 건너갔다. 석호의 아들과 조카들이 서로 살상을 자행하여 업도(?都)가 크게 어지러웠다.

진(晋)의 승평(昇平) 3년(359)에 다시 건업으로 왔다가 갑자기 남해(南海)로 갔다. 그 후 나부산(羅浮山)에 들어가 홀로 띳집에서 거처하였다. 쓸쓸히 세상 밖에서 살다가, 백여 세에 이르러 산의 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제자에게 명령하여 시신을 동굴 속에 버려 두게 하였다. 제자가 곧 시신을 석실로 옮겼다.

강홍(康泓)은 예전에 북간(北間)에서 머물 때, ‘도개가 예전에 산중에 있을 때는 늘 신선과 왕래가 있음’을 도개의 제자가 서술하는 것을 들었다. 이에 멀리서도 마음속으로 공경하고 고개 숙였다. 후에 남해에 신역을 살러 와서는 친히 만나자, 바로 옆에서 우러르고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이 두루 지극하였다. 이에 그를 위하여 전기를 쓰고 찬양의 글을 지었다.

쓸쓸하구나, 이 어른이여.

바람 나부끼듯 번뇌를 끊어
밖으로는 소승을 본받으나
안으로는 몸의 공함을 트이셨네.



현묘한 모습이 휘황하게 빛나니
높은 선비들이 여기에 찾아들었네.


연한 풀뿌리 자시며
바위와 나루터를 떠도셨도다.



蕭哉若人 飄然絶塵
外軌小乘 內暢空身
玄象暉曜 高步是臻
餐茹芝英 流浪巖津

진(晋)의 흥녕(興寧) 원년(363)에 진군(陳郡)의 원굉(袁宏)이 남해의 태수가 되었다. 아우인 영숙(穎叔)과 사문 지법방(支法防)과 함께 나부산에 올랐다. 석실 입구에 이르러 도개의 해골과 향화·질그릇 등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보았다. 이에 원굉이 말하였다.

“법사의 일과 행실은 일반 무리와 달랐으니, 바로 매미가 허물을 벗듯 세상을 떠나셨구나.”

곧 찬탄의 글을 지었다.

기이함을 부르신 빼어난 님이여,
외롭지 않은 덕을 세우셨어라.


멀고 먼 그윽한 님이여,
바위를 바라보던 화락한 님이여,

살랑 살랑이던 신령한 신선들
여기서 노닐고 모였어라.


남긴 신발 숲에 있으니
천 년에 한 사람 그 뒤이을는지.



物俊招奇 德不孤立
遼遼幽人 望巖凱入
飄飄靈仙 ?焉遊集
遺?在林 千載一襲

그 후 사문 승경(僧景)과 도점(道漸)이 함께 나부산에 오르고자 하였다. 그러나 끝내 정상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03) 축불조(竺佛調)

축불조는 씨족이 확실하지 않다. 혹 천축국 사람이라고도 한다. 불도징(佛圖澄)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상산사(常山寺)에 여러 해 동안 머물렀다. 그는 일이 순박한 것을 숭상하여, 말을 수식해서 표현하지 않았다. 당시 모두가 이를 높이 평가하였다.

상산(常山)에 법을 받드는 두 형제가 있었다. 절에서 백 리 떨어진 곳에 살았다. 형수의 병이 위독하자, 절 옆으로 모시고 와서 의약과 가까이하게 하였다. 형이 불조를 받들어 스승으로 삼았다. 아침부터 낮까지 항상 절 안에 있으면서, 묻고 자문 받으며 도를 행하였다. 어느 날 불조가 문득 아우의 집을 찾아갔다. 그가 자세히 형수의 괴로워하는 바와 아울러 형의 안부를 물어 보았다. 불조가 말하였다.

“병자는 조금 좋아졌고, 자네의 형은 평상시와 같네.”

불조가 떠난 뒤에 아우도 역시 말을 채찍질해서 그의 뒤를 따라 절로 갔다. 불조가 아침에 자기 집에 온 일을 언급하자, 형은 놀라며 말하였다.

“스승[和上]께서는 아침에 한 번도 절 밖으로 나가지 않으셨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그분의 얼굴을 보았단 말이냐?”

형제가 다투다가 이를 불조에게 물어보았다. 불조는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형제는 함께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불조는 간혹 홀로 산에 들어가, 1년이나 반년을 지내곤 하였다. 언제나 마른 밥 몇 되를 갖고 갔다. 돌아올 때는 항상 남은 밥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한번은 불조를 따라 산길을 수십 리 걸어갔다. 날은 저물고 큰 눈이 내렸다. 불조가 바위에 있는 호랑이 굴속으로 들어가 유숙하였다. 호랑이가 돌아와서는 굴 앞에 함께 누웠다. 불조가 호랑이에게 말하였다.

“내가 너의 거처를 빼앗았다. 부끄럽지만 어쩌겠느냐?”

호랑이는 곧 귀를 늘어뜨리며 산을 내려갔다. 따라간 사람은 놀랍고 두려웠다. 불조가 후에 스스로 죽을 날을 잡아놓으니, 멀고 가까운 곳의 사람들이 모두 찾아왔다. 불조는 모두에게 말하였다.

“천지는 장구하지만, 그래도 붕괴될 때가 있다. 하물며 사람이 어찌 영구히 존재하기를 구하겠느냐? 만약 3업의 때[三垢]를 완전히 씻어내고 청정한 진여[眞淨]에 전념할 수 있다면, 형체의 작용은 비록 어긋나더라도, 반드시 진리와 들어맞을 것이다.”

대중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죽지 말기를 굳게 요청하니, 불조는 말하였다.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인데, 그것을 요청한다고 되겠느냐?”

곧 방으로 돌아가서 단정하게 앉아, 옷으로 머리를 덮고 문득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몇 년이 지나서, 불조의 속가제자[白衣弟子] 여덟 사람이 서산(西山)에 들어갔다. 나무를 베다가, 문득 보니 불조가 높은 바위 위에 있었다. 의복은 선명하고 자태와 거동이 화창하며 즐거운 모습이었다. 모두가 놀라 기뻐하고 절을 하며 말하였다.

“스승[和上]께서는 아직도 살아 계셨습니까?”

불조가 말하였다.

“나는 항상 살아 있다.”

아는 친구들의 안부를 자세히 물어보고, 한참 후에 떠나갔다. 여덟 사람은 하던 일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왔다. 법을 함께 받드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말해 주었다. 그러나 대중들에게 이를 증명할 길이 없었다. 함께 무덤을 파헤쳐 관을 열어보았다.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옷과 신발만 남아 있었다.

어떤 기록에 전해진다.

“이 축불조가 『법경경(法鏡經)』과 『십혜(十慧)』 등을 번역해 출간하였다.”

그러나 석도안(釋道安)의 경록(經錄)을 고찰해보니,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한(漢)나라 영제(靈帝) 광화(光和) 연간(178~184)에 사문 엄불조(嚴佛調)가 안현도위(安玄都尉)와 함께 『법경경』과 『십혜』 등을 번역해서 출간하였다는 말이 ?역경전(譯經傳)?에 실려 있다.”

이 이야기 속의 불조는 곧 동진(東晋) 시대의 사람인데, 당시 사람들이 이름자가 같은 것을 보고 동일인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니 이는 잘못이다.

04) 기역(耆域)

기역은 천축국 사람이다. 중국과 오랑캐 나라를 두루 떠돌아다니며, 일정한 거처가 없었다.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신기(神奇)하였다. 천성이 풍속을 소홀히 여겼다. 자취와 행방이 일정하지 않아 당시 사람들이 추측할 수 없었다. 천축국을 떠나서부터 부남(扶南)에 이르기까지 여러 바닷가를 지났다. 이어 교주(交州)와 광주(廣州)에 이르기까지 두루 신령하고 기이한 일이 있었다.

이미 양양에 도달하자, 배를 타고 양자강을 넘고자 하였다. 뱃사공이 그를 보니, 인도 사문이고 의복이 낡아 누추하였다. 그러므로 가볍게 여겨 태워주지 않았다. 그런데 배가 북쪽 둑에 도달해보니, 기역도 역시 이미 강을 건너와 있었다. 앞서서 걸어갈 때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나타나, 귀를 늘어뜨리고 꼬리를 흔들었다. 기역이 손으로 호랑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니 호랑이는 길에서 내려가 그곳을 떠났다. 양쪽 강둑에서 이를 본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라 무리를 이루었다.

진(晋)의 혜제(惠帝, 290~306) 말기에 낙양(洛陽)에 이르니, 모든 도인들이 절을 하였다. 기역은 편안히 꿇어앉아, 얼굴빛에 흔들림이 없었다.

때로는 혹 사람들에게 전생의 몸이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을 알려 주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지법연(支法淵)은 소[牛]로 살다가 이승에 온 사람이라 하였다. 축법흥(竺法興)은 사람 가운데 살다가 다시 이 세상에 온 사람이라 하였다. 또한 그는 모든 대중 승려들의 의복이 화려한 것을 꾸짖으며, 본래의 법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낙양의 궁성을 보고 말하였다.

“도리천(?利天)의 궁성과 비슷한데, 다만 자연과 사람이 한 일이 같지 않을 뿐이다.”

기역이 사문 기사밀(耆?蜜)에게 말하였다.

“이 궁성을 지은 목수는 도리천에서 온 사람이다. 그런데 궁성이 낙성되자, 곧 천상 세계로 돌아갔다. 집의 용마루 기와 밑은 아마도 1천5백 개의 그릇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당시 모두가 말하였다.

“예전에 이 궁성을 지은 장인(匠人)은 참으로 그릇을 만들어 기와 밑에 붙였다고 들었다. 그리고 궁전이 낙성된 후 바로 살해당하였다.”

당시 형양(衡陽)태수인 남양(南陽)의 등영문(?永文)이 낙양에 있었다. 그러면서 만수사(滿水寺)에 몸을 의지하여 머물다가 병을 얻었다. 한 해가 지나도 낫지 않았다. 두 다리가 굽고 휘어져, 일어나 걸어 다닐 수가 없었다. 기역이 그곳에 가서 그를 보고 말하였다.

“그대는 병을 낫게 하고 싶은가요?”

그러고는 맑은 물 한 잔과 버들가지 하나를 갖고 왔다. 곧 버들가지로 물을 뿌리고, 손을 들어올려, 등영문을 향해서 주문을 외웠다. 이렇게 하기를 세 번 반복하였다. 이어 손으로 등영문의 두 무릎을 끌어당겨 일어서게 하였다. 그러자 곧 일어나서 걷는 것이 옛날과 같았다.

이 절 안에 수십 그루의 사유수(思惟樹) 나무가 있었지만, 모두 말라죽었다. 기역이 등영문에게 물었다.

“이 나무가 죽은 지 얼마나 되었나요?”

등영문이 대답하였다.

“여러 해 되었소.”

기역은 곧 나무를 향해 주문을 외웠다. 앞서 등영문을 향해서 외운 주문의 방법과 같았다. 곧 나무에 싹이 돋아나고, 성긴 가지를 부추겨 꽃이 무성하게 피어났다.

예전에 한참 더위가 기승부릴 때에, 어떤 사람이 오래된 체증[病?]으로 거의 죽을 뻔했다. 기역은 물을 받아내는 그릇을 병자의 배 위에 올려놓고, 흰 천으로 배를 덮었다. 수천 마디의 주문을 외우며 발원하였다. 곧 고약한 냄새가 풍겨나며, 온 집안에 깊이 배어들었다.

이 때 병든 사람이 말하였다.

“나는 살아났다.”

기역이 사람을 시켜 천을 걷어올리게 하였다. 그러자 그릇 속에 진흙 앙금 같은 것이 몇 되나 있었다. 고약한 냄새가 나서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병자는 마침내 살아났다.

낙양에 전쟁으로 난리가 일어나자, 낙양을 떠나 천축국으로 돌아갔다.

낙양의 사문 축법행(竺法行)은 뛰어난 분으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악령(樂令)과 견주었다.

그가 기역에게 요청하였다.

“상인(上人)께서는 이미 득도하신 스님이시니, 한마디 말씀을 남기시어 영원한 훈계로 삼게 해주소서.”

기역이 말하였다.

“두루 많은 사람을 모이게 하는 것이 좋겠다.”

대중들이 모이자 기역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말하였다.

“입을 지키고 몸과 생각을 거두며, 삼가 여러 악한 일을 범하지 말라. 그리고 모든 선한 일을 닦고 행하라. 이와 같이 하면 세상에서 득도하느니라.”

말을 마치자 곧 선정의 침묵 속으로 들어갔다. 이에 법행이 거듭 요청하였다.

“상인께서는 우리가 듣지 못한 법문을 내려주시기 원합니다. 이와 같은 게송의 뜻은 여덟 살 난 동자라도 이미 암송하니, 득도하신 분께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역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여덟 살에 비록 외웠다 하더라도, 백 살이 되어도 행하지 않는다면, 이를 외운들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八歲雖誦 百歲不行 訟之何益] 사람들은 모두 득도한 사람을 공경할 줄은 알면서도, 이를 행하면 자신도 득도한다는 것을 모른다. 나의 말은 비록 적으나 행하는 사람에게는 이익이 많도다.”

이에 작별하여 떠났다. 이 때 수백 명의 사람들이 각각 기역을 점심 식사에 초청하였다. 기역은 이들 모두에게 가겠다고 허락하였다. 이튿날 아침 5백 집에 모두 한 사람의 기역이 있었다. 처음에는 모두 자기에게만 홀로 방문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뒤에 서로 물어보고는 비로소 분신(分身)이 내려온 것임을 알았다.

길을 떠나자 여러 도인들이 송별하여 하남성에 이르렀다. 기역이 천천히 걸어가도 뒤따라오는 사람이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자 기역은 곧 지팡이로 땅에 금을 긋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헤어집시다.”

그 날 장안에서 온 사람이 있었다. 기역이 그곳 절 안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또 장사꾼 호습등(胡濕登)은 곧 이날 날이 저물 무렵에 기역을 고비 사막에서 만났다고 하였다. 계산해보니 이미 9천여 리나 걸은 것이다. 그가 서역으로 돌아간 뒤,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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