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전 제10권
3. 신이 ②
01) 건타륵(?陀勒)
건타륵은 본래 서역 사람으로 낙양(洛陽)에 온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대중들은 비록 그의 지조 있는 풍모를 공경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끝내 아무도 그의 경지를 헤아리지는 못하였다. 훗날 대중 승려들에게 말하였다.
“낙양의 동남쪽에 반치산(槃?山)이 있습니다. 그 산에는 예전의 절터가 있어 기단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다 함께 수축하여 세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중들은 아직 그의 말을 믿지 못하고, 시험 삼아 뒤쫓아가서 조사해 보았다. 산에 들어가 한 곳에 이르니, 사면이 평탄하였다. 건타륵은 이를 보여주었다.
“이곳이 곧 절터입니다.”
곧 그곳을 파보니, 과연 절의 기초석[石基]이 발견되었다. 다음에 강당과 승방이 있던 곳을 가르쳐 주었다. 그의 말대로 모두 증명되었다. 대중들은 모두 경탄하면서, 이내 함께 수축하여 절을 세웠다. 건타륵을 절의 주지로 모셨다.
절은 낙양성에서 1백여 리 거리에 있다. 그는 이른 아침마다 낙양에 이르렀다. 여러 절을 다니다가, 해가 저물면 기름을 한 발우 구걸하여, 절로 돌아가 등불을 밝혔다. 이것으로 일과를 삼아 한 번도 어기거나 거르는 일이 없었다.
걸음을 잘 걷는 어떤 사람이 건타륵을 따르며, 그의 걸음이 빠른지 느린지를 보고자 하였다. 달리고 치달리면서 땀을 흘렸으나, 고생만 하고 미치지 못하였다. 건타륵은 그에게 가사 끝자락을 잡고 따라오게 하였다. 오직 매운 바람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다시는 피로함을 느끼지 못하고, 잠깐 사이에 절에 이르렀다. 건타륵이 후에 세상을 마친 곳은 알지 못한다.
02) 가라갈(訶羅竭)
가라갈은 본래 번양(樊陽)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2백만 글자의 경전을 외웠다. 성품이 텅 비어 그윽하고, 계율과 절조를 지켰다. 거동이 착하고 용모가 수려하였다. 두타행(頭陀行)을 많이 하여 홀로 산과 들에서 잠잤다.
진(晋) 무제(武帝)의 태강(太康) 9년(288)에 잠시 낙양에 이르렀다. 당시 낙양에는 돌림병이 매우 유행하여 죽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가라갈은 이들을 위하여 주문을 외워 치료하였다. 열 사람 가운데 여덟, 아홉 사람을 고쳤다.
진(晋) 혜제(惠帝)의 원강(元康) 원년(291)에 이르러, 곧 서쪽으로 들어갔다. 누지산(婁至山)의 석실 안에 머물면서 좌선(坐禪)에 몰두하였다. 이 석실은 물과 거리가 매우 멀었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시냇물을 끌어대고자 하였다. 가라갈은 말하였다.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됩니다.”
곧 스스로 일어서서, 왼발로 석실의 서쪽 석벽을 밟아 눌렀다. 그러자 벽이 손가락 길이만큼 무너져 내렸다. 발을 들어내자 물이 그 속에서 나왔다. 맑고 향기롭고 부드러우며 깨끗하였다. 일년 내내 끊어지지 않았다. 와서 마시는 사람들은 모두 배고프고 목마른 것이 멎고, 질병이 제거되었다.
원강 8년(298)에 단정히 앉아 세상을 떠났다. 제자들이 서쪽 나라의 법에 의하여 화장하였다. 여러 날 불이 타올랐건만, 시신은 아직도 불길 속에 앉아 있었다. 길이 재가 되지 않기에, 이에 다시 석실 안으로 옮겼다.
축정(竺定)
후에 서역 사람인 축정은 자(字)가 안세(安世)였다. 동진(東晋)의 함화(咸和) 연간(326~334)에 그 나라로 가서 직접 보았다. 근엄하고 평온하게 앉아 있었다. 그 때는 이미 그가 죽은 뒤, 30여 년이 지난 후였다. 축정은 그 후 서울에 이르러, 이 사실을 도인과 속인들에게 전하였다.
03) 축법혜(竺法慧)
법혜는 본래 관중(關中) 사람이다. 성품이 바르고 곧으며 계율의 행실이 있었다. 숭고산(嵩高山)에 들어가 부도밀(浮圖密)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진(晋) 강제(康帝)의 건원(建元) 원년(343)에 양양(襄陽)에 이르렀다. 양숙자사(羊叔子寺)에 머물면서, 따로 공양을 받지 않았다.
걸식할 때마다 새끼로 맨 걸상을 갖고 다니면서, 마음가는 대로 한적하고 넓은 길에서 이를 펼치고 앉았다. 때로 혹 비를 만나면 기름을 먹인 배자[油?]로 자신을 덮었다. 비가 그치면 오직 새끼로 맨 걸상만이 보이고, 법혜가 있는 곳은 알 수 없었다. 묻고 찾는 와중에, 법혜는 이미 승상에 앉아 있었다.
늘 제자인 법조(法照)에게 말하였다.
“너는 과거 시절에 닭의 다리를 부러뜨린 일이 있다. 그에 대한 재앙이 곧 이르리라.”
갑자기 법조는 어떤 사람에게 발길로 차여서, 마침내 영구히 다리를 못 썼다. 나중에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신야(新野)에 한 늙은이가 있다. 막 숨이 넘어가려 하여, 내가 그를 제도하고자 한다.”
곧 밭두렁 사이를 걸어갔다. 과연 한 늙은이가 소를 끌어 밭을 가는 것이 보였다. 법혜가 그 늙은이에게 소를 달라고 구걸하였다. 늙은이가 주지 않자, 법혜는 앞으로 나아가 소의 고삐를 잡았다. 이에 늙은이는 그의 범상치 않음을 두려워하였다. 마침내 그에게 소를 시주하였다. 법혜는 소를 끌고 와서 주문을 외우며 발원하였다. 그런 후에 일곱 발자국을 걸어가서는, 다시 되돌아와서 소를 늙은이에게 돌려주었다. 그로부터 며칠 안 되어 노인은 죽었다.
그 후 정서장군(征西將軍) 유치공(庾稚恭)이 양양에 주둔하였다. 그는 본래 법을 받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다 법혜에게 비상한 자취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이를 몹시 질투하였다. 법혜는 미리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나의 전생의 빚을 갚을 자가 곧 이곳에 이를 것이다. 그대들에게 권유하고 경계하노니, 정성껏 복과 선행을 닦도록 하라.”
이틀 뒤에 과연 그를 붙잡아 처형하였다. 그 때 나이는 58세이다. 죽음에 즈음하여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죽은 후 사흘이 지나면,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질 것이다.”
그 날이 되자 과연 한 길 가까이 성문이 잠길 정도로 홍수가 져서, 물에 빠져 죽은 주민들이 많았다.
범재(范材)
당시 범재가 있었다. 파서(巴西) 낭중(?中) 사람이었다. 처음 그는 사문이 되어 하동(河東)의 저잣거리에서 점을 쳤다. 맨발로 겨울이나 여름이나 낡은 옷 한 벌만으로 지냈다. 말하는 것이 때로는 제법 영험이 있었다. 후에 마침내 도에서 물러나서, 세속에 물들어 장릉(張陵)1)의 가르침을 익혔다고 한다.
04) 안혜칙(安慧則)
안혜칙은 성씨와 족속이 확실하지 않다. 어려서부터 늘 하는 성격이 없었고, 탁월하여 보통 사람과 달랐다. 또한 바른 글씨[正書]를 쓰는 데 솜씨가 있고 이야기를 잘하였다.
진(晋)의 영가(永嘉) 연간(307~313)에 천하에 돌림병이 유행하였다. 그러자 주야로 정성껏 기도하였다. 천신(天神)에게 약을 내려서 만민을 치유하게 해 달라고 발원하였다. 어느 날 절문을 나서다가 항아리처럼 생긴 두 개의 돌을 보았다. 기이한 물건이라 의아해하여 집어서 이를 보았다. 과연 신비한 물이 그 안에 있었다. 음복한 병자들이 모두들 치유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후 낙양의 대시사(大市寺)에 머물렀다. 손수 가는 글씨로 노란 비단에『대품경(大品經)』 한 부를 베껴 썼다. 그것을 합쳐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글자는 작은 콩알과 같았으나,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모두 10여 본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본을 여남(汝南)의 주중지(周仲智)의 처인 호모(胡母)씨에게 주어 공양하게 하였다.
호모씨는 양자강을 넘어올 때 경을 갖고 따라왔다. 그 후 재화로 불길이 번져감에 따라, 창졸간에 경을 취할 여가가 없었다. 슬피 울면서 오뇌에 싸여 있었다. 불길이 잡힌 후에 잿더미 속에서 이를 발견하였다. 첫머리 축(軸)부터 모습에 하나도 훼손된 것이 없었다. 이 때 이를 보고 들은 사람들은 삿됨을 돌려서 믿음을 고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 경은 지금 서울의 간정사(簡靖寺)의 수니(首尼)의 처소에 있다.
강혜지(康慧持)
당시 낙양에는 또 강혜지가 있었다. 그도 신이하게 영적으로 통한 사람이라 한다.
05) 섭공(涉公)
섭공은 서역 사람이다. 텅 비어 기를 마시고, 오곡을 먹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하루에 5백 리를 갈 수 있고, 미래의 일을 손바닥 가리키듯 영험 있게 예언하였다.
부견(符堅)의 건원(建元) 12년(376)에 장안에 이르렀다. 비밀주문을 외워 신룡(神龍)을 내려오게 할 수 있었다. 가뭄이 들 때마다 부견이 항상 그를 초청하여, 용이 내려오는 주문을 외우게 하였다. 그러면 갑자기 용이 발우 속으로 내려왔고, 하늘에서는 곧 큰 비가 쏟아졌다. 부견과 뭇 신하들이 직접 발우를 들여다보고, 모두 그 기이함에 감탄하였다. 이에 부견은 그를 받들어 나라의 신(神)으로 삼았다. 선비와 서민들도 모두 엎드려 그의 발에 예를 올렸다. 이 때부터 다시는 심한 가뭄으로 인한 근심이 없었다.
건원 16년(380) 12월에 이르러 병 없이 세상을 떠났다. 부견은 매우 슬프게 곡하였다. 죽은 후 7일이 되어, 부견이 그의 신이(神異)함 때문에 시험 삼아 관을 열어 보았다.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염할 때 덮은 것[殮被]만이 남아 있었다.
건원 17년(381)에 이르자 정월부터 비가 내리지 않아 6월까지 이르렀다. 부견은 반찬을 줄이고 현판을 거둬들여 조화로운 기운을 맞아들였다. 그러자 7월에 이르러 비가 내렸다.
부견이 중서령(中書令) 주융(朱?)에게 말하였다.
“섭공이 만약 살아 있다면, 짐이 어찌 이와 같이 하늘에 대하여 마음을 태웠겠느냐? 그 분은 큰 성인이시다.”
주융이 말하였다.
“그 술법은 그윽하고 아득하여, 실로 예전에 없었던 기이한 술법이었습니다.”
06) 석담곽(釋曇?)
담곽이 어디 사람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푸성귀를 먹고 고행하였다. 항상 무덤 사이나 나무 밑에 거처하면서, 오로지 신력으로써 중생들을 교화하였다. 당시 하서(河西)의 선비족(鮮卑族)인 투발리록고(偸髮利鹿孤)가 악한 마음을 품고, 서평(西平)에 자리 잡고서 스스로 왕이라 자칭하였다. 그리고는 연호를 건화(建和)라 하였다.
건화 2년(401) 11월에 담곽은 하남(河南)으로부터 서평에 이르렀다. 지팡이 하나를 짚었다. 사람들을 그 앞에 무릎 꿇고 절하게 하면서 말하였다.
“이것은 지혜의 눈을 지닌 지팡이다. 이것을 받들면 득도할 수 있다.”
사람들이 그에게 옷과 물건을 보냈다. 그러면 받아서는 땅에 팽개치거나 혹 강물 속에 버렸다. 얼마 후에 옷 등은 저절로 본 주인에게 되돌아갔다. 조금도 더러워진 곳이 없었다.
바람과 같이 빠르게 걸었다. 힘있는 사람이 뒤쫓아가도, 항상 고단하기만 하고 미치지는 못하였다.
어떤 사람의 생사와 부귀함과 천해짐을 말하면,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었다. 사람들이 혹 그의 지팡이를 숨겨놓으면, 담곽은 잠시 눈을 감아 그 자리에서 그것이 있는 곳을 알았다. 모두가 그의 신이함을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끝내 아무도 그의 경지를 추측할 수는 없었다. 이로 인하여 부처님을 섬기는 사람이 매우 많아졌다.
투발리록고의 아우 중에 누단(?檀)이 있었다. 거기(車騎)장군에 임명되었다. 그 권력이 나라를 기울어뜨릴 만하였다. 천성적으로 시기심이 많아, 도적질하고 남을 해치는 일이 많았다. 담곽은 늘 누단에게 말하였다.
“마땅히 선한 업을 닦아, 도를 행하여 후세의 징검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누단이 말하였다.
“나는 선대 이래로 천지와 명산대천을 공경하고 섬겨왔다. 이제 하루아침에 부처를 받든다면, 선인들의 뜻에 어긋날까 두렵다. 그대가 만약 7일 동안 먹지 않아도 얼굴빛이 여느 때와 같을 수 있다면, 이는 불도의 신명(神明)함 때문이니, 나도 마땅히 이를 받들겠다.”
곧 사람을 시켜 보이지 않게 7일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담곽은 배고프고 목마른 기색이 없었다. 누단은 사문 지행(智行)을 시켜, 몰래 떡을 지니고 가서 담곽에게 주게 하였다. 담곽이 말하였다.
“내가 일찍이 누구를 속였던가? 나라의 임금을 속이라는 것이냐?”
누단은 이를 깊이 기특하게 생각하여, 두텁게 우러러 공경하기를 더하였다. 이로 인하여 믿음을 돌이키고, 살생을 절제하며 자비심을 일으켰다. 나라 안 사람들이 이렇게 그의 도움을 입자, 모두가 그를 큰 스승님[大師]이라 불렀다. 거리나 마을에 출입할 때면 백성들이 모두 영접하여 그에게 예를 올렸다.
누단에게 딸이 있었다. 병이 매우 위독하여 담곽을 초청하여, 목숨을 구해 달라 하였다. 담곽이 말하였다.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려 있습니다. 성인도 바꿀 수 없는 일인데, 내가 어떻게 수명을 연장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일찍 죽느냐, 늦게 죽느냐를 알 수 있을 따름입니다.”
누단이 굳게 요청하였다. 그 때 궁전의 뒷문이 닫혀 있었다. 담곽이 말하였다.
“급히 뒷문을 여십시오. 때맞추어 열면 살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죽을 것입니다.”
누단이 명하여 이를 열게 하였다. 그러나 미치지 못하여 죽었다.
진(晋)의 의희(義熙) 3년(407)에 누단이 발발(勃勃)에게 격파되었다. 서량(西凉) 땅에 전쟁으로 인한 난리가 일어나자, 그가 간 곳을 알지 못했다.
07) 사종(史宗)
사종이 어디 사람인지는 알지 못한다. 항상 삼베옷을 입었고, 혹 이를 겹쳐서 납의(納衣)로 삼기도 하였다. 그런 까닭에 세상에서는 그를 마의도사(麻衣道士)라 불렀다.
몸에 부스럼이 많았고, 성격도 일정하지가 않았다. 항상 광릉(廣陵)의 백토(白土) 광산에서 품팔이를 하였다. 노래를 부르고 밧줄을 잡아당기면서, 스스로 흐뭇하고 화창하게 생각하였다. 품삯을 받으면 받는 대로 사람들에게 보시하였다. 깃들고 쉬는 것은 정해진 장소가 없었다. 어느 때에는 숨었다가 불쑥 나타나기도 하였다.
당시 고평(高平)의 단기(檀祇)가 강도(江都)의 수령이 되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불러 응대하니, 기연에 민첩하여 구애되고 막히는 것이 없었다. 학문에 널리 통달하여, 예전 일을 상고하였다. 또한 변설이 깊은 선비였다. 이에 시 한 수를 지었다.
욕심 있으면 부족한 것이 괴로우나
욕심 없으면 근심 또한 없어라.
아직 맑게 마음 비운 것이 아니라서
새끼 띠 두르고 검은 갖옷 입었네.
한 세상 떠돌며 흐르기를
매어 두지 않은 배와 같이 하라.
번뇌 다할 때를 맞아
산 구릉에 깃들이리라.
有欲苦不足 無欲亦無憂
未若淸虛者 帶索被玄?
浮遊一世間 汎若不繫舟
方當畢塵累 栖志且山丘
단기는 비상한 사람임을 알았다. 그를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면서, 무명 서른 필을 보냈다. 사종은 이를 모두 걸인들에게 주었다.
후에 성명을 알지 못하는 어떤 한 도인이 있었다. 항상 지팡이 하나와 상자 하나를 가지고 다녔다. 어느 날 해가 저물 무렵에 해염령(海鹽令)을 찾아와 말하였다.
“며칠 동안 길을 가고자 하여, 잠깐 사람 하나를 쓸까 합니다. 줄 수 있습니까?”
해염령이 마음대로 취해 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는 곧 거위와 오리를 지키는 어린아이 가운데, 가장 못생기고 복장이 남루한 아이를 골라 거느리고 길을 떠났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한 산 위에 이르니, 그곳에는 집이 있었다. 집 안에는 세 사람의 도인이 있었다. 서로 만나자 기뻐 함께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이해하지 못하였다. 점심 때가 되자 시장해져 도인은 어린아이를 위하여 주인에게 나아가 먹을 것을 빌었다. 작은 사발에 음식을 얻어 왔다. 모양이 익힌 쑥과 같았다. 이것을 먹으니, 배고픈 것이 멎었다. 어둠이 서리자 도인은 그곳을 떠나 돌아가려고 하였다. 집 안 사람의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는 사종이 있는 곳을 아는가? 그의 유배생활은 언제쯤이나 끝나는가?”
그러자 도인이 말하였다.
“서주(徐州) 강북의 광릉 백토 광산에 있으며, 그의 유배기간을 헤아려보니 모두 마쳤습니다.”
집 안의 사람은 곧 편지를 썼다.
“부탁하노니 그대가 전해주게나.”
도인은 편지를 어린아이에게 부탁하였다. 새벽 무렵에 곧 현(縣)에 이르러 해염령과 만나서 말하였다.
“며칠 이곳에 머물고자 합니다.”
그러자 현령은 매우 좋다고 하면서 물어보았다.
“상자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느냐?”
도인이 대답하였다.
“책과 소(疏)뿐입니다.”
도인은 꼭 관청 일을 보는 청사에서 잠을 잤다. 상자와 지팡이는 침상머리에 붙여 두고 지녔다. 현령이 때를 노려, 사람을 시켜 이것을 훔쳐서 보고자 하였다. 도인은 미리 그것을 알고 해가 저물자마자, 상자와 지팡이를 높이 매달아놓고 바로 그 아래에 누웠다. 그러므로 영영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 후 현령 곁을 떠나면서 말하였다.
“제가 잠시 머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항상 남의 물건을 훔치려 하므로, 바로 그것 때문에 곧 떠나는 것입니다.”
현령은 앞서 따라갔던 어린아이를 불렀다. 그간에 경유한 곳을 물어보니, 어린아이가 말하였다.
“도인은 나에게 지팡이를 잡게 하고 바람처럼 떠나자, 혹 발 밑에 파도와 물결소리가 들려왔을 뿐입니다.”
아울러 산 속의 사람이 보낸 편지가 아직도 자신의 옷 허리띠에 있다고 말하였다. 이에 현령은 그 편지를 열게 하여 이를 보았다. 그러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에 그 편지를 베껴 써서 취하고, 본래의 편지는 봉하여 사람을 시켜 어린아이를 전송하였다. 백토 광산에 이르러, 사종에게 편지를 보내주게 하였다. 사종은 편지를 열어보고 크게 놀랐다.
“네가 어떻게 봉래(蓬萊) 도인의 편지를 얻었느냐?”
그 후 사종은 남쪽 오(吳)나라 회계(會稽) 지방을 노닐었다. 어느 날 어량(漁梁)을 지나다가, 고기잡이들이 마구잡이로 고기를 잡는 것을 보았다. 사종이 곧 상류(上流)에서 목욕을 하니, 고기 떼가 모두 흩어졌다. 몰래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그 후 상우(上虞)의 용산(龍山) 대사(大寺)에서 쉬었다. 『장자』와 『노자』이야기를 잘하고, 『논어(論語)』와 『효경(孝經)』을 탐구하여 밝혔다. 그러면서도 빛을 감추고 자취를 숨겼기에, 세상에서는 그를 알지 못했다.
회계의 사소(謝邵)·위매지(魏邁之)·위방지(魏放之) 등은 모두 그의 돈독한 논리가 깊고 넓다 하여, 모두 스승으로 모시고 수업하였다.
그 후 함께 머물던 사문이, 사종이 밤에 누군가와 함께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자못 봉래의 일을 말하였다. 새벽이 되자 문득 사종이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도연명(陶淵明)의 기록에 “백토 광산에서 세 사람의 색다른 법사를 만났다”고 하였는데, 그가 그 가운데 하나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였다.
“어떤 장사꾼이 바다를 건너 가다가, 외따로 떨어진 섬 위에서 한 사문을 만났다. 편지를 맡기면서 사종에게 전하라고 하였다. 편지를 배 안에 두었다. 동료가 그 편지를 보려고 하였다. 그러자 편지가 배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배가 백토 광산에 이르자 편지가 날아서 사종에게로 나아가니, 사종이 갖고 떠났다.”
08) 배도(杯度)
배도는 성명을 알지 못한다. 항상 나무 술잔을 타고 강물을 건너 다녔으므로[木杯度水], 이로 인하여 배도라 일컬었다. 처음 나타난 곳은 기주(冀州)였다. 세밀한 행은 닦지 않았다. 그러나 신비한 힘이 탁월하여, 세상에서 그 유래를 헤아리지 못하였다.
어느 날 북방에서 한 집에 기숙하였다. 그 집에는 한 구의 금불상이 있었다. 배도가 훔쳐서 떠나자, 집주인이 알아차리고 뒤쫓았다. 배도가 천천히 걸어가는 것을 보고, 말을 달려 뒤쫓았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맹진강[孟津河]에 이르렀다. 나무 술잔을 물 위에 띄우고, 여기에 올라 타 강을 건너갔다. 바람과 노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가볍고 빠르기가 나는 것과 같았다. 이윽고 둑을 건너서 서울에 도달하였다. 겉보기에 당시 그의 나이는 40세 정도였다. 새끼로 띠를 두르고, 남루한 차림으로서 겨우 몸을 가릴 수
있을 지경이었다. 말도 또한 들쭉날쭉하며, 기쁨과 노여움이 고르지 않았다.
때로는 엄동설한에 얼어붙은 얼음을 깨고, 그 속에서 목욕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신발을 신고 침상에 오르기도 하며, 때로는 맨발로 걸어서 저자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오직 꼴망태 하나만을 멜 뿐, 다른 물건은 없었다. 잠시 연현사(延賢寺)의 법의(法意) 도인의 거처를 찾아가니, 법의는 특별한 방을 주어 접대하였다.
그 후 연보강(延步江)을 건너고자 하여 강가에서 배를 찾았다. 그러나 사공은 배도를 실어줄 수 없다고 알려왔다. 다시 발을 술잔 속에 포개서 사방을 돌아보며 시를 읊조렸다. 그러자 술잔이 저절로 흘러가, 곧바로 강을 건너 북쪽 둑에 다다랐다. 그곳에서 광릉(廣陵)을 향하여 갔다.
마을의 이(李)씨 집안에서 행하는 팔관재(八關齋)를 만났다. 전에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하지만 곧바로 재당(齋堂)에 들어가 앉으면서, 꼴망태는 뜰 가운데 놓아두었다. 여러 사람들은 그의 모습이 누추하므로, 공경하는 마음이 없었다. 이씨는 꼴망태가 길을 가로막는 것을 보고, 담장 밑으로 옮겨 놓으려고 하였다. 몇 사람을 시켜 들어올리려 하였으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배도는 식사를 마치고, 이를 집어 들고 떠나면서 웃으며 말하였다.
“사천왕(四天王)이니라. 이가야!.”
이 때 심부름하는 한 아이가 있었다. 그가 망태 속을 엿보았더니, 네 명의 작은 아이가 있었다. 모두 키가 몇 치 가량 되었다. 얼굴 생김이 단정하고, 옷이 선명하고 깨끗하였다. 이에 뒤쫓아가며 찾았으나, 소재를 알지 못하였다.
사흘이 지나서, 서쪽 경계의 몽롱(蒙籠) 나무 밑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이씨는 꿇어 엎드려 절하였다. 청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날마다 공양드렸으나, 배도는 재계를 지키는 데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다. 술도 마시고 고기도 먹었다. 심지어 매운 생선회에 이르기까지 먹어, 속인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바치는 것이 있으면, 받기도 하고 받지 않기도 하였다.
패국(沛國)의 유흥백(劉興伯)이 연주(袞州) 자사가 되어, 사신을 보내 맞아들였다. 망태를 걸머지고 왔다. 유흥백이 사람들에게 들어올려 보라 했다. 그러나 10여 명이 이겨내지 못하였다. 유흥백이 직접 망태 속을 보니, 오직 다 떨어진 납의 한 벌과 나무 술잔 하나만이 보였다.
그 후 이씨 집으로 돌아와 다시 30여 일을 있었다. 날이 맑은 어느 날 새벽 문득 말하였다.
“가사 한 벌을 얻고 싶은데, 점심때까지 마련해 놓게.”
곧 일을 시작하였으나, 점심때까지 이루지 못하였다. 배도가 말하였다.
“잠시 나갔다가 오겠네.”
집을 나가 날이 어둡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온 경내에 이상한 향기가 감돌아 깔려 있었다. 이를 의아해하며 이상하다 생각하고는 곳곳으로 배도를 찾아다녔다. 마침내 북쪽 바위 밑에서 다 떨어진 가사를 땅에 깔고, 그 위에 누워서 죽은 것을 발견하였다. 머리의 앞부분과 다리의 뒤편에는 모두 연꽃이 피어 있었다. 그 꽃은 극히 선명하고 향기로웠다. 하루 저녁이 지나자 시들었다. 이에 고을 사람들이 함께 시신을 장례 치렀다.
며칠이 지났다. 어떤 사람이 북쪽에서 이곳에 와서 말하였다.
“배도가 망태를 지고, 팽성(彭城)을 향해 가는 것을 보았다.”
곧 함께 관을 열어보니, 오직 미투리 신발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팽성에 이른 다음 속인인 황흔(黃欣)이란 사람을 만났다. 황흔은 깊이 불법을 믿었다. 배도를 만나자 예배드리고 초청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 집은 몹시 가난하여 다만 보리밥만이 있을 뿐이었다. 배도는 이를 달게 먹고, 느긋해하였다. 반년을 그 집에 머무르다가, 어느 날 문득 황흔에게 말하였다.
“꼴망태 서른여섯 장을 찾았으면 좋겠네. 내가 꼭 써야 하겠다.”
황흔이 대답하였다.
“이곳에 바로 열 장 가량은 있을 것입니다. 가난해서 살 수가 없으니, 아마도 다 마련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배도가 말하였다.
“자네는 다만 집안을 조사해서 찾아 보라. 아마도 있을 것이야.”
황흔이 곧 샅샅이 찾아보니, 과연 서른여섯 장을 얻었다. 이것을 뜰 가운데 줄지어 놓았다. 비록 그 수는 갖췄지만, 역시 대부분이 찢어지고 떨어졌다. 황흔이 물건을 차례로 자세히 볼 즈음, 모두가 이미 새 것으로 완전했다. 배도는 이것을 밀봉하고, 이어 황흔에게 봉한 것을 열게 하였다. 곧 돈과 비단이 모두 그 속에 가득하였다. 거의 백만 냥쯤 되었다. 알 만한 이들은 이것을 배도의 분신이 다른 땅에서 얻은 선물과 보시를 회향하여서, 황흔에게 보시한 것이라 말하였다. 황흔은 이것을 받아 모두 공덕을 위하여 썼다.
1년 가량 지나, 배도는 이 집을 떠났다. 황흔이 양식을 마련하여 주었다. 이튿날 아침 양식이 모두 그대로 있는 것만 보이고, 배도의 소재는 알지 못하였다.
한 달 가량 지나서, 다시 그는 서울에 이르렀다. 당시 조구(潮溝)의 주문수(朱文殊)는 어려서부터 불법을 받들었다. 배도는 자주 그 집에 찾아왔다. 주문수가 배도에게 말하였다.
“제자가 만약 죽어서 고통에 빠지거든, 원컨대 구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죽어서 좋은 곳에 있게 된다면, 불법을 같이 닦는 벗[法侶]이 되기를 원합니다.”
배도가 대답하지 않자, 주문수가 기뻐하며 말하였다.
“불법에서 묵연히 말이 없는 것은 이미 허락한 것입니다.”
그 후 동쪽 지방을 노닐어 오군(吳郡)에 들어갔다. 길에서 낚시꾼을 만났다. 그에게 나아가 물고기를 구걸하였다. 그러니 낚시꾼이 썩은 물고기 한 마리를 보시하였다. 배도가 손으로 반복해서 그것을 갖고 놀다가 도로 물 속으로 집어던졌다. 그러자 물고기는 헤엄치며 떠나갔다.
또한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사람을 만났다. 다시 그에게도 물고기를 구걸하였다. 투망꾼[網師]은 성을 내고, 욕을 하며 주지 않았다. 이에 그는 두 개의 돌멩이를 주워서 물 속에 던졌다. 그러니 갑자기 두 마리의 물소가 나타나 그의 그물 속에서 싸웠다. 그물이 찢어지고 망가지자, 물소도 보이지 않았고, 배도도 이미 사라졌다.
걸어 송강(松江)에 이르렀다. 곧 물 위에 삿갓을 뒤집어놓고[仰蓋], 올라타서 강둑으로 건너갔다. 도중에 회계(會稽)의 섬현(剡縣)을 지나서 천태산에 올라갔다. 몇 달이 지나서야 서울로 돌아왔다.
당시 승가타(僧??)라는 외국 도인이 서울 아랫녘의 장간사(長干寺)에 머물렀다. 객승인 승오(僧悟)가 거타와 같은 방에 묵었다. 어느 날 창문 틈으로 엿보았다. 가타가 사찰을 취하여 이를 받쳐들고,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가 곧 다시 내려오려 하였다. 승오는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다만 깊이 공경하고 우러러보기만 할 뿐이었다.
당시에 또 성이 장(張)씨이며, 이름은 노(奴)라 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디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음식을 많이 먹지 않으면서도, 항상 스스로 살이 찌는 것을 흐뭇해하였다. 겨울이나 여름이나 단벌의 무명옷만을 입었다. 승가타가 길을 가다가 장노를 만나자, 기뻐하여 웃으며 말하였다.
“저는 동쪽에서 채돈(蔡?)을 보았고, 남쪽에서는 마생(馬生)에게 안부를 물었으며, 북쪽에서는 왕년(王年)을 만났습니다. 이제 배도를 찾아가려 합니다. 그건 그렇고 당신과 만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장노는 곧 회화나무[槐樹]를 제목으로 노래를 지었다.
어둡디 어두운 큰 우주 안에
빛 비춤 실로 뚜렷이 나타나건만
무슨 일이 그대 혼미케 하여
멋대로 재앙을 부르시는가?
즐거운 곳 찾는 이 없고
주머니 뒤집듯 변하는 인정의 쓰디쓴 길에
소나무 잣나무의 지조 없다면
무엇으로 바람서리 이겨내리오.
한가로이 붉은 노을 밖에 깃들어
길이 파란 하늘 벗어나 노래 불러라.
맑디맑은 영혼 무색계 밖에서
인연 있는 고을을 만나리.
빛나는 세월 한후(漢后)를 돕고
아름다운 시대 은왕(殷王)을 도운
구방에 자취를 감추었던
그대와 나는 두 신선 아니랴.
세속을 떠도는 그대 만남에
보는 족족 시리고 상한 일일세.
간략히 품은 생각 노래했으나
어찌 삼가는 글 다했다 하리.
??大象內 照曜實顯彰
何事迷昏子 縱惑自招殃
樂所少人往 苦道若?囊
不有松柏操 何用擬風霜
閑預紫煙表 長歌出昊蒼
澄靈無色外 應見有緣鄕
歲曜毘漢后 辰麗輔殷王
伊余非二仙 晦跡於九方
亦見流俗子 觸眼致酸傷
略謠觀有念 寧曰盡矜章
승가타가 말하였다.
“이전에 선생님을 뵈었을 적에는, 선의 사유가 그윽이 높아 한 번 앉으면 백 년을 앉으셨습니다. 큰 자비로움이 제 마음에 배어드니, 마음을 텅 비워 마른 해골을 생각하겠습니다.”
역시 같은 제목의 게송을 지었다.
흐르고 흐르는 세상사
손해와 이익도 넘쳐나
정신에 먼지 끼려 하고
멋대로 흐뭇하고 기쁜 마음 생기네.
오직 우리 밝은 님만은
깊은 깨달음과 선견지명 있어
형상을 뜬 거품으로 생각하고
그림자를 빠른 번개처럼 보네.
번번이 화려한 소리를 넘어뜨리고
문장과 언변 멸시하고 추하게 보며
색을 보고 공함을 깨달아
중생을 어루만지며 변화함을 가슴 아파 하네.
분분한 일 버리고 유(有)를 끊으며
습기는 자르고 연모도 없애
푸른 가지 구비진 그늘에서
깨끗한 띠풀로 자리 삼았네.
밭두둑에 의지하며 마즙을 마시고
절벽을 이웃하여 흘러드는 물 마시네.
지혜와 선정으로 헤아려 비추어 보아
미묘한 진여로 권속을 삼네.
자비심 증장하여
깊이 생각함에 게으름 없어라.
悠悠世事 或滋損益
使欲塵神 橫生悅?
惟此哲人 淵覺先見
思形浮沫 ?影?電
累?聲華 蔑醜章弁
視色悟空 翫物傷變
捨紛絶有 斷習除戀
靑條曲蔭 白茅以薦
依畦?麻 ?崖飮?
慧定計照 妙眞曰眷
慈悲有增 深想無倦
말을 마치자 각기 떠났다. 그 후의 세월 속에서 다시는 이 두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전하는 사람이 말한다.
“승오를 데리고 함께 남악(南岳)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장노와 배도가 서로 만났다. 그들이 나눈 말은 매우 많았으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였다.
배도는 여전히 도읍지에 머물렀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떠돌아다녀서 머무는 곳이 일정하지 않았다. 초청하면, 혹 가기도 하고 혹 가지 않기도 하였다.
이 때 남주(南州)에 진(陳)씨 일가가 있었다. 자못 의식이 넉넉한 집안이었다. 배도가 그 집에 가자 매우 성대한 대접을 받았다. 서울의 아랫녘에 또 한 사람의 배도가 있다고 하였지만, 진씨 집의 부자 다섯 사람은 모두 믿지 않았다. 짐짓 서울의 아랫녘으로 내려가 그를 보았다. 과연 그의 집에 있는 배도와 형체나 모습이 같았다.
진씨는 그를 위하여, 한 홉의 꿀에 잰 생강과 작은 장도칼·훈륙향(熏陸香)·수건 등을 마련하였다. 배도는 곧 꿀에 잰 생강을 다 먹어 치우고, 나머지 물건은 그대로 무릎 앞에 두었다. 그들 부자 다섯 사람은 혹 그가 그의 집에 있는 배도가 아닌가 하였다. 그래서 곧 두 아우는 그곳에 남아 머물면서 지켜보게 하였다. 나머지 세 사람은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안의 배도는 여전히 그대로 있고, 무릎 앞에도 역시 향과 작은 칼 등이 있었다. 다만 꿀에 잰 생강을 먹지 않은 것만이 다를 따름이었다. 이어 그는 진씨에게 말하였다.
“칼이 무디니, 갈아놓는 것이 좋겠소.”
두 아우가 도읍지에서 돌아와서 말하였다.
“그곳의 배도는 이미 영취사(靈鷲寺)로 떠났습니다.”
그의 집에 있던 배도가 문득 두 폭의 노란 종이를 구하여 글을 썼다. 쓰는 것이 문자는 아니었다.
두 폭의 종이를 합쳐보니, 그 뒤쪽도 같았다. 진씨가 물었다.
“상인(上人)께서는 무슨 문권(文券)을 만드십니까?”
배도가 대답하지 않아, 끝내 그 이유를 헤아릴 수 없었다.
당시 오군(吳郡)의 백성으로 주영기(朱靈期)란 사람이 고려(高驪)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면서 바람을 만나 배가 표류하였다.
9일이 지나서야 한 섬에 이르렀다. 그 섬에는 산이 있었다. 매우 높고 큰산이었다. 산에 들어가 땔감을 채집하다가, 사람 다니는 길을 발견하였다. 주영기는 곧 몇 사람을 시켜 길을 따라가 구걸하게 하였다. 10리 남짓 가니, 경쇠소리가 들려오고 향을 사르는 냄새가 났다.
이에 그들이 함께 부처님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다. 그러자 잠깐 사이에 한 절이 나타났다. 매우 빛나고 화려하여 대부분 7보(寶)로 장엄되어 있었다. 10여 명의 승려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모두가 돌로 만든 사람으로서 움직이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았다. 이에 모두 함께 예배를 드리고 돌아왔다.
조금 걷자니 창도(唱導)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돌아가 다시 보았으나 여전히 그들은 돌로 만든 사람이었다. 이에 주영기 등은 서로 생각하였다.
‘이 분들은 성승(聖僧)이며, 우리들은 죄인이어서 만나볼 수 없는 분들이다.’
그래서 함께 정성을 다하여 참회하고, 다시 가서 보았다. 그랬더니 진인(眞人)이 나타나 주영기 등을 위하여 음식을 마련하여 놓았다. 음식은 채소였으나, 향과 맛이 세속의 음식과 같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는, 함께 머리를 조아려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는 속히 고향에 돌아가게 하여 달라고 빌었다. 그 중 한 승려가 말하였다.
“여기서 서울까지의 거리는 20여 만 리나 됩니다. 그렇지만 지극한 마음만 있다면, 속히 돌아가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어 주영기에게 물었다.
“배도도인을 아십니까?””매우 잘 압니다.”
그러자 북쪽 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바랑이 있고 석장과 발우가 걸려 있었다. 그 승려가 말하였다.
“이것이 배도의 물건입니다. 이제 그대들에게 부탁드립니다. 발우를 그에게 전해주십시오.”
아울러 편지를 써서 함 속에 넣었다. 따로 푸른 대나무 지팡이가 하나 있었다. 그가 말하였다.
“이 지팡이를 뱃전 앞 물 속에 던져 놓고, 뱃문을 닫고 고요히 앉아 있기만 하십시오. 힘들이지 않고도 반드시 속히 고향에 이를 것입니다.”
이에 하직인사를 올리고 헤어졌다. 한 사미를 시켜 산문까지 전송하게 하면서 말하였다.
“이 길로 7리를 가면 곧 배 있는 곳에 이를 것입니다. 먼저 온 길을 따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말대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7리 가량을 가자 배 있는 곳에 닿았다. 곧 그가 가르쳐 준 대로 하였다. 오직 배가 산꼭대기 나무 위를 지나가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 물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사흘이 지나서 석두회(石頭淮)에 이르러 머물렀다. 또한 다시는 대나무 지팡이가 있는 곳도 보이지 않았다.
배는 회수(淮水)로 들어가서 주작문(朱雀門)에 이르렀다. 곧 그곳에서 배도를 만났다. 그는 큰 배의 난간에 올라타고, 지팡이로 뱃전을 때리면서 말하였다.
“말아, 말아, 어째서 가지 않니.”
구경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주영기 등이 배 멀리에서 그에게 예를 올렸다. 그러자 배도는 곧 스스로 배에서 내려왔다. 편지와 발우를 취하여 편지를 열어보았다. 아무도 그 글자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배도는 크게 웃으면서 말하였다.
“나를 돌아오게 하려는구나.”
발우를 집어 구름 속으로 던졌다가, 도로 이를 거두어들이면서 말하였다.
“내가 이 발우를 보지 못한 지가 4천 년이나 되었군.”
배도는 연현사(延賢寺) 법의(法意)의 처소에 있을 때가 많았다. 당시 세상 에서는 이 발우가 기이한 물건이라 하여, 다투어 찾아가서 이를 구경하였다. 일설에는 말한다.
“주영기의 배가 표류하다가 한 궁벽한 산에 이르렀다가 우연히 그곳에서 한 승려를 만났다. 그가 말하였다.
‘나는 배도의 상수 제자로서 예전에 스승의 발우를 지닌 채 치성사(治城寺)에서 죽었습니다. 지금 그대에게 부탁하여 발우를 스승님께 돌려드립니다. 다만 한 사람이 이 발우를 뱃전에서 받쳐 들고, 한 사람은 배의 키를 바로잡기만 하면, 저절로 편안히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영기가 가르치는 대로 하니, 과연 온전하게 건너올 수 있었다.”
당시 남주의 배도는, 배의 난간에 올라탔던 그 날, 일찍 집을 나가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진씨가 이튿날 아침에 보니 문짝[門扇] 위에, 푸른 글씨로 여섯 자가 씌어 있었다.
‘복과 덕의 출입구이니, 신령한 분께서 내려오시네[福德門 靈人降].’
글자는 서툴렀으나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집에 있던 배도는 마침내 자취가 끊어졌다. 그리고 서울의 배도는 여전히 산과 고을을 오갔다. 그는 신비한 주문을 많이 행하였다.
당시 유상(庾常)의 노비가 물건을 훔치고, 주인을 배반하였다. 사방으로 추적하였으나, 사로잡지 못하였다. 마침내 배도에게 물었더니, 배도가 말하였다.
“이미 죽어서 금성(金城)의 강변, 빈 무덤 속에 있다.”
가서 보니, 과연 그의 말과 같았다.
공녕자(孔寧子)가 당시 황문시랑(黃門侍郞: 宦官)으로 있었다. 관청에서 설사병을 앓다가, 심부름꾼을 보내서 배도를 초청하였다. 배도는 주문 외우기를 마치고 말하였다.
“고치기 어렵습니다. 귀신 넷이 보입니다. 모두 다치거나 절단되었군요.”
공녕자가 울면서 말하였다.
“예전에 손은(孫恩)이 난리를 일으켰을 때, 집이 군인들에게 파괴당하고, 양친과 숙부가 모두 참혹한 고통을 당했다네.”
공녕자가 과연 죽었다.
또 제해(齊諧)의 처 호모(胡母)씨가 병이 들었다. 갖가지 치료를 해도 고치지 못하였다. 그 후 승려를 초청하여 재를 마련하였다. 재를 올리는 자리에는 승총(僧聰)도인이란 사람이 있어, 주인에게 권하여 배도를 초청하였다. 배도가 그곳에 이르러, 한 번 주문을 외우자 병자가 즉각 나았다. 제해가 엎드려 섬기면서 스승으로 모셨다. 배도를 위하여 그의 전기를 만들었다. 그 전기에 나오는 신이(神異)한 일은 대략 위에서 말한 내용과 같다.
원가(元嘉) 3년(426) 9월에 이르러, 제해의 집을 떠나 서울로 들어갔다. 1만 냥의 돈과 물건을 남기며, 제해에게 맡겨서 재(齋)를 열라고 시켰다. 이에 작별하고 떠났다. 길을 가다가 적산호(赤山湖)에 이르자, 이질(痢疾)을 앓아 죽었다. 제해가 곧 재를 마련하였다. 아울러 시신을 수습하여 돌아와서, 건업(建業)의 복주산(覆舟山)에 묻었다.
원가 4년(427)에 이르러 오흥(吳興)에 소신(邵信)이란 사람이 있었다. 불법을 매우 받드는 사람이었다. 상한병(傷寒病)에 걸렸다. 그러나 아무도 감히 간병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슬피 울면서 관세음보살을 염불하였다. 문득 한 승려가 나타나 그에게 와서 말하였다.
“나는 배도의 제자다.”
그리고 또 말하였다.
“근심하지 말라. 스승께서 곧 오셔서 보실 것이다.”
그가 대답하였다.
“이미 죽었거늘, 어떻게 올 수 있습니까?”
배도 도인이 나타나 말하였다.
“오는 것에 다시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곧 옷의 허리띠 머리에서 한 홉 가량의 가루를 꺼내, 그에게 주어 복용하게 하였다. 곧 병에 차도가 있었다.
또 두승애(杜僧哀)란 사람이 남강(南岡) 아랫녘에 살았다. 그는 예전에 배도 앞에 엎드려 섬긴 일이 있었다. 아이의 병이 매우 위독하였다. 그러자 곧 배도에게 신비한 주문을 익히는 일을 터득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며 한탄하였다. 다음날 문득 배도가 오는 것이 보였다. 말도 보통 때와 같았다. 그가 주문을 외우니, 아이의 병이 곧 나았다.
원가 5년(428) 3월 8일에 이르자, 배도는 다시 제해의 집으로 왔다. 여도혜(呂道慧)·제자 달지(?之)·두천기(杜天期)·수구희(水丘熙) 등도 모두 함께 보았다. 크게 놀라 곧 일어나서 예배를 드렸다. 배도는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올해는 아마도 큰 흉년이 들 것이야. 정성되게 복업을 닦아야 하네. 법의(法意)도인은 매우 덕이 있는 승려이지. 그를 찾아가 옛 절을 수리하여 세워서, 재앙과 화를 물리치는 것이 좋을 것이네.”
잠깐 사이에 위에서 한 승려가 배도를 불렀다. 배도는 곧 그곳을 떠나면서 말하였다.
“빈도는 곧 교주(交州)·광주(廣州) 사이로 향할 것이며,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네.”
제해 등은 정중하게 절하며 그를 전송하였다. 여기에서 그의 자취는 끊어졌다. 요즘에 이르러서도 때로 그를 본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그 일은 정확한 일이 아닌 까닭에, 전할 만한 것이 아니다.
09) 석담시(釋曇始)
담시는 관중(關中) 사람이다. 출가한 이래로 많은 기이한 자취를 남겼다. 진(晋)의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연간(376~396) 말기에 경과 율장 수십 부를 가지고, 요동(遼東)으로 갔다. 교화를 베풀면서, 뚜렷하게 3승을 전수하여 계에 귀의하는 길을 세웠다. 무릇 이것이 고구려에서 불도를 듣게 된 시초이다.
의희(義熙) 연간(405~418) 초기에 다시 관중으로 돌아왔다. 조정의 세 대신을 깨우쳐서 이끌었다.
담시의 발은 얼굴보다 더 희다. 비록 맨발로 진흙탕 물을 건너가더라도, 전혀 흙물이 발에 달라붙거나 물에 젖는 일이 없었다. 그러기에 세상에서는 모두 그를 발이 흰 스승[白足和上]이라 부른다.
당시 장안에 왕호(王胡)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삼촌이 죽은 지 몇 해 후에 홀연히 모습을 나타내 돌아왔다. 왕호를 데리고 두루 지옥을 유람하면서, 여러 가지 과보를 보여주었다. 왕호가 지옥에서 떠나 집으로 돌아올 때, 삼촌이 왕호에게 말하였다.
“이미 인과를 알았을 것이니, 다만 백족화상의 암자에서 섬기고 받들어야 한다.”
왕호는 두루 많은 승려들을 찾아갔다. 오로지 담시만이 발이 얼굴보다 더 흰 것을 보았다. 이로 인하여 그를 섬겼다.
진(晋)나라 말기에 삭방의 흉노족인 혁련발발(赫連勃勃)이 발흥하였다. 관중 땅을 파괴하고 휘저어, 무수한 사람을 죽였다. 당시 담시도 역시 살해될 위기를 만났다. 그러나 칼로 그를 상하게 할 수 없었다. 혁련발발이 감탄하여 두루 사문들을 사면하고, 모두 죽이지 않았다. 담시는 이에 산속 못가에 깊이 은둔하여 두타행을 닦았다.
그 후 척발도(拓跋燾)가 다시 장안을 차지하여, 관중과 낙양에 위세를 떨쳤다. 당시 박릉후(博陵侯) 최호(崔皓)가 어려서부터 도교를 익혀서, 불교를 시기하고 질투하였다.
그가 나라의 재상이라는 벼슬자리를 잡자, 척발도가 믿고 기대었다. 이에 천사(天師) 구(寇)씨2)와 더불어 척발도를 설득하였다. 불교는 이로움이란 없고, 백성들의 이익을 손상케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불교를 폐지하기를 권고하였다.
척발도는 그의 말에 미혹되어, 태평(太平) 7년(446)에 마침내 불교를 훼멸(毁滅)시켰다. 그리고 군병을 곳곳에 파견하여, 절집을 불태우고 약탈하였다. 통치권 안의 비구와 비구니들에게 모두 도를 그만두게 하였다. 그 가운데 도망가고 숨은 사람은 모두 군사를 내어 뒤쫓아가서 잡아오게 하였다. 잡으면 반드시 목을 자르는 참형에 처하였다.
온 경내에 다시는 사문이 없었다. 담시는 오직 그윽이 깊은 곳에서 문을 닫고, 세상과의 인연을 끊었다. 그러므로 군병들이 이를 수 없는 곳에 있었다.
태평 연간(440~451) 말기에 이르러, 담시는 척발도의 죽을 날이 곧 미치리라는 것을 알았다. 정월 초하루에 문득 지팡이를 짚고, 궁궐 문에 이르렀다. 담당 관리가 상주하였다.
“한 도인이 있는데, 발이 얼굴보다도 더 흰 사람으로, 문으로부터 들어왔습니다.”
척발도가 영을 내렸다. 군법에 의하여, 여러 번 칼로 담시의 목을 베게 하였으나 상하지 않았다. 급히 이 사실을 척발도에게 아뢰었다. 척발도는 크게 노하여, 스스로 차던 검(劒)으로 담시의 몸을 베었다. 그러나 몸에 다른 이상이 없었다. 오직 검이 닿은 곳에, 천의 실과 같은 흔적이 있을 뿐이었다.
당시 척발도의 궁전, 북원(北園)의 우리 속에서 호랑이를 길렀다. 척발도는 명령하여 담시를 호랑이 먹이로 주었다. 호랑이들이 모두 숨고 엎드려, 끝내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다. 시험 삼아 천사(天師: 寇謙之)를 호랑이 우리에 가까이 가게 하였다. 호랑이는 곧 표효하며 으르렁거렸다.
척발도는 비로소 부처님의 교화가 존귀하고도 높아, 황로(黃老: 道敎)가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곧 담시를 초청하여 궁전에 오르게 하고, 발 밑에 머리를 조아려 절하였다. 그러고는 자신의 허물과 잘못을 뉘우쳤다. 담시가 그를 위하여 설법하고, 인과를 밝게 말하였다. 그러자 척발도는 대단히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마침내 문둥병에 감염되었다. 최호와 구씨 두 사람도 차례로 몹쓸 병에 걸렸다.
척발도는 자신의 허물이 그들 두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아 생긴 것이라 여겼다. 이에 두 사람의 집안을 모두 다 주살하고, 그들의 문중 족속도 다 쓸어버렸다. 나라 안에 선포하여, 다시 정교를 부흥하게 하였다. 갑자기 척발도가 죽자, 그의 손자인 척발준(拓跋濬)이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비로소 크게 불법을 홍교하여 그 성대함이 지금까지 이른다. 담시는 그 후 세상을 마친 곳을 알지 못한다.
10) 석법랑(釋法朗)
법랑은 고창(高昌)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행실을 잘 잡고 정진하고 고행하여, 여러 가지 상서로운 징험이 많았다. 빛을 감추고 덕을 쌓아, 사람들은 아무도 그가 이른 단계를 추측하지 못하였다.
법랑의 스승인 석법진(釋法進)도 행이 높은 사문이었다. 어느 날 법진이 문을 닫고 홀로 앉아 있었다. 문득 법랑이 나타나 그의 앞에 있는 것을 보았다.
“어디서 왔는가?””문의 자물쇠 구멍을 통해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말하였다.
“먼 곳의 승려들과 함께 왔습니다. 해가 곧 점심때가 되려 합니다. 원컨대 그들을 위하여 식사를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법진은 곧 그들을 위하여 음식을 마련하였다. 오직 숟가락과 발우의 소리만 들릴 뿐, 끝까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예전에 여산(廬山)의 혜원이 가사 한 벌을 법진에게 보냈었다. 법진은 곧 이것을 그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법랑이 말하였다.
“여러 승려들은 이미 떠났습니다. 다른 날 아마도 이것을 취할 것입니다.”
그 후 부뚜막을 맡은 사람[執?者]이 법진에게 나아가 옷을 취하려 하였다. 법진은 곧 가사를 그에게 주었다. 늘 부뚜막을 맡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모두가 자기들은 취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비로소 이것은 앞서 온 성인께서 방편으로 자취를 나타내어 취한 것임을 알았다.
북위(北魏)의 군대가 불법을 훼멸하기에 이르렀다. 법랑은 서쪽 구자국(龜玆國)으로 갔다. 구자국의 왕은 자기 나라 대선사 결약(結約)에게 말하였다.
“만약 득도한 사람이 이르면, 곧 나를 위하여 말해 달라. 마땅히 공양을 드려야 한다.”
법랑이 그곳에 이르자, 곧 이를 임금에게 아뢰었다. 왕은 성인에 대한 예우로 접대하였다. 그 후 그는 구자국에서 세상을 마쳤다. 시신을 불태우던 날, 두 눈썹에서 샘물이 솟아올라 곧바로 하늘로 올라갔다. 대중들이 있기 드문 일이라고 찬탄하며, 뼈를 거두어 탑을 세웠다. 그 후 서역 사람이 북쪽 나라에 와서, 자세히 이 일을 전하였다.
지정(智整)
당시 양주(凉州)에 또 사문 지정이 있었다. 역시 마음이 곧고 굳었다. 기이한 행이 있어서 요주(?主) 양난당(楊難當)이 섬겼다. 그 후 그는 한협산(寒峽山)의 바위 동굴 속으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
11) 소석(邵碩)
소석의 본래 성은 소(邵)씨고 이름은 석(碩)이며, 시강(始康) 사람이다. 일정한 장소에 거처하지 않았다. 황홀하여 미친 사람과 같았다. 사람이 입이 크고, 눈썹과 눈이 추하고 못났다. 어린아이들이 좋아라 따라다니면서 그를 희롱하였다. 때로는 술집에 들어가 사람들과 함께 취하도록 술을 마시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불법을 좋아하여, 부처님의 형상을 볼 때마다 예배하고 찬탄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슬픔에 젖어 눈물을 흘렸다.
소석에게는 본래 아들 셋, 딸 둘이 있었다. 큰아들 혜생(惠生)도 출가하였다. 소석은 전송(前宋) 초기에 역시 출가하여 도에 들어, 자칭 석공(碩公)이라 하였다. 드나들고 오고 감에 밤낮을 가리지 않았고, 익부(益部)의 여러 고을을 두루 다녔다.
만중(蠻中) 땅에 가자 모두 일에 인연하여 우스갯소리를 하며, 착한 일을 권유하여 화합시켰다. 사람들 집에 이르러, 맨땅에서 잠자면 집에 반드시 죽는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을 찾아가, 가는 돗자리[細席]를 구걸하면 반드시 어린아이가 죽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예언이라 여겼다.
4월 초파일이 되었다. 그러자 성도(成都)에서 불상을 모시고 걸어가는 행사를 하였다. 소석은 대중 가운데로 엉금엉금 기어가면서 사자의 모습을 지어보였다. 그 날 비현(?縣)에서도 소석이 사자의 모습을 흉내내는 것을 보았다고들 하였다. 그러니 곧 그것이 그의 분신(分身)임을 깨달았다.
자사(刺史) 소혜개(蕭惠開)와 유맹명(劉孟明) 등이 모두 고개 숙여 그를 섬겼다. 유맹명은 남자 옷을 두 첩에게 입히고 소석을 시험하였다.
“이 두 사람을 공급하여 그대의 측근으로 두고 싶은데 괜찮겠나?”
소석은 사람됨이 운자(韻字)를 달아 말하기를 좋아했다. 곧 유맹명에게 말하였다.
“차라리 스스로 술을 구걸하여 술독에 잠겨 술을 마실지언정[지연-漬嚥], 기둥서방이 되어 남은 생애를 마칠 수는 없습니다[잔연-殘年].”
그 후 어느 날 아침 문득 베로 만든 모자를 쓰고, 유맹명을 찾아갔다. 잠깐 뒤에 유맹명이 죽었다.
이에 앞서 유맹명 휘하에서 장사(長史) 벼슬에 있는 심중옥(沈仲玉)이 죄인을 매질하고, 곤장을 때리는 격식을 고쳤다. 그리고는 일상적인 규정보다 엄중하게 하였다. 소석이 심중옥에게 말하였다.
“천지가 시끄러워질 일이 이로부터 일어날 것입니다. 만약 매질하는 격식을 없앤다면, 자사가 될 것입니다.”
심중옥이 그 말을 믿고 격식을 제거하였다. 유맹명이 죽자, 과연 심중옥이 그 고을의 일을 맡아 행하였다.
전송(前宋)의 원휘(元徽) 1년(473) 9월 1일 민산(岷山)의 통운사(通雲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죽음에 즈음하여 도인 법진(法進)에게 말하였다.
“나의 해골을 맨땅에 버리되, 서둘러 신발을 단단히 발에 신겨 두어라.”
얼마 지나서 유언대로 시신을 절 뒤에 버렸다. 이틀이 지나자 시신이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어떤 사람이 비현(?縣)에서 와서, 법진을 방문하여 말하였다.
“어제 석공이 저자 가운데서 한쪽 발에만 신발을 신은 것을 보았습니다. 장난말로 말하기를, ‘어린아이가 제대로 하지 못하여, 나의 신발 한쪽을 잃어버렸네’라고 하였습니다.”
법진이 놀라서 사미에게 따져 물으니, 사미가 대답하였다.
“근간 시신을 낼 때 무섭고 두려워서, 오른발 한쪽 신발은 제대로 신기지 못하다가, 마침내 잃어버렸습니다.”
그의 자취의 괴이함은 아무도 추측할 수 없었다. 그 후 마침내 돌아가신 곳은 알지 못한다.
12) 석혜안(釋慧安)
혜안은 어디 사람인지 확실하지 않다. 어려서 포로가 되어 형주(荊州) 사람의 노예가 되었다. 맡아 하는 일이 빈틈없고 부지런하였다. 그러기에 주인이 몹시 그를 사랑하였다. 나이 열여덟 살에 출가하는 것을 들어주어, 강릉(江陵)의 비파사(琵琶寺)에 머물렀다. 풍모가 평범하고 내세울 것이 없어 자못 모두 그를 가벼이 여겼다.
당시 사미로서, 대중 승려들이 줄지어 앉으면, 곧 물을 나누어주는 일을 하였다. 혜안이 항상 빈 병을 손에 잡고, 윗자리부터 아랫자리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물은 항상 마르지 않았다. 당시 모두가 이를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구족계를 받자 조금씩 신령한 자취가 나타났다. 한번은 그믐날 저녁에 동학인 혜제(慧濟)와 함께 법당에 올라가 포살(布薩)을 하였다. 법당 문이 채 열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혜안은 곧 혜제의 손을 잡아 벽 틈으로 들어갔고, 나올 때도 그렇게 하였다. 혜제는 매우 놀라고 두려워서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그 후 혜제와 더불어 탑 아래에 앉아서는, 문득 혜제에게 말하였다.
“나는 먼 길을 떠나니, 이제 그대와 헤어져야겠네.”
잠깐 사이 문득 보니, 천인(天人)의 악기 연주 소리와 향기로운 꽃이 공중에 가득히 깔렸다. 혜제는 오직 놀라고 두렵기만 하여 끝내 말할 수가 없었다. 혜안은 다시 말하였다.
“나의 전후의 일들일랑 삼가하여 함부로 발설하지 말게. 말하면 반드시 허물이 있을 것이야. 오직 서남쪽에 속인 한 사람이 있네. 이 사람은 새로 발심한 보살이니, 그에게는 자세히 말하여도 되네.”
이에 헤어져 떠났다. 곧 장사꾼의 행렬에 섞여 상천(湘川)으로 들어가다가, 도중에 이질(痢疾)병을 앓아 매우 위독하였다. 그는 배의 주인에게 말하였다.
“나의 명이 다 되었소. 다만 들어내서 강둑 가에 놓아두시오. 관이나 나무는 필요 없소. 숨이 끊어진 후에는 곧 벌레와 새들에게 보시할 터이니.”
장사꾼은 그의 말대로 들어내서, 강둑 옆에 눕혀 놓았다. 밤에 불꽃이 그의 몸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괴이하고 두렵기도 하였다. 가서 살펴보니, 이미 숨이 끊어졌다.
장사꾼들이 길을 떠나 상동(湘東)에 이르렀다. 혜안도 이미 먼저 와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갑자기 간 곳을 알지 못했다.
혜제가 그 후 척기사(陟?寺)에 이르렀다. 은사(隱士)인 유규(劉?)를 찾아가, 자세히 그 일을 말하였다. 그러니 유규는 곧 일어나 멀리 그(혜안)에게 예배드리며, 혜제에게 말하였다.
“이는 득도한 분으로,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든 분이십니다.”
승람(僧覽)·법위(法衛)
당시 촉중(蜀中)에도 또 승람과 법위가 모두 기이한 자취가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역시 성과(聖果)를 얻지 않았나 생각하였다.
13) 석법궤(釋法?)
법궤의 본래 성은 완(阮)씨이며, 오흥(吳興) 어잠(於潛)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서울 지원사(枳園寺) 법해(法楷)의 제자가 되었다. 법해는 본래 배움에 힘쓴 이로 특히 경전과 역사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낭야(瑯?)의 왕환(王奐)과 왕숙(王肅)이 나란히 함께 스승으로 섬겼다.
법궤는 성품이 공손하고 말이 적고 순박하였다. 스스로를 지키며, 세상 사람들의 일에 넘나들지 않았다. 그러고는 『법화경』 한 부를 외웠다.
절의 상좌인 진승(塵勝) 법사가 늙고 병이 들었다. 그러나 법궤는 그를 따라 의지하여 매우 지극하게 보살피고 간호하였다. 진승 법사가 죽자 장례를 법답게 치렀다. 재(齋)를 할 때마다 대가를 얻은 것을 모아, 전단(?檀) 불상을 만들었다. 불상이 조성되자 스스로 큰 모임을 마련하였다.
그의 본집은 서울의 대시(大市)에 임시로 붙어살았다. 이 날 아침에는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정림사(定林寺)에 이르고, 다시 지원사로 돌아왔다. 그 후 세 곳을 다시 조사해보니, 법궤가 와서 점심을 먹는 것을 모두 보았다고 한다. 실로 동시에 세 곳을 찾아간 것이다.
그 날 늦게 방으로 돌아와 누워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시신은 매우 향기롭고 부드러우며, 두 손가락을 굽혔다. 대중들은 모두 그가 2과(果: 斯陀含果)를 터득했음을 깨달았다. 당시 그는 아직도 사미로 있었다.
신령한 자취가 특별하고 기이해, 마침내 이를 무제(武帝)에게 알렸다. 그랬더니 황제께서 친히 납시어, 그를 위하여 승려들을 모아 공양을 마련하였다. 문혜왕(文惠王)과 문선왕(文宣王)도 모두 방에 이르렀다. 이마가 닿게 예를 올리고, 그를 위하여 장례와 염을 경영하여 관리하였다. 백성들이 구름같이 찾아와 선물과 보시가 겹겹이 쌓였다. 여기서 얻은 공양물로 지원사에 탑을 세웠다. 이 해는 북제(北齊)의 영명(永明) 7년(489)이다.
14) 석승혜(釋僧慧)
승혜의 성은 유(劉)씨이며, 어디 사람인지는 모른다. 형주(荊州)에서 수십 년을 살았다. 남양(南陽)의 규(?)가 척기사(陟?寺)를 세워 초청해서, 거기에 거처하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본 것이 이미 5, 60년이 지났는데도, 끝내 늙지 않았다.
행동거지가 가볍고 빠르며, 대단히 위엄 있는 거동을 하였다. 병든 사람의 집에 이르러, 그가 노여워하는 이는 반드시 죽었다. 그리고 그가 기뻐하는 이는 반드시 나았다. 당시 사람들 모두 이것을 예언으로 여겼다. 그가 아직 서로 모르는 모든 사람들이라도, 모두 자신의 친근함을 다하여 사느냐, 죽느냐를 드러내었다.
어느 날 승혜는 강변에 이르렀다. 나루터의 관리에게 건너가기를 청하였다. 관리를 재촉하였으나, 배가 작아 미처 그를 건네주지 못하였다. 잠깐 사이에 승혜가 이미 건너편 둑에 있는 것이 보였다. 양쪽 둑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신이(神異)함에 감탄하였다.
중산(中山)의 견염(甄恬)과 남평(南平)의 차담(車曇)이 같은 날 승혜를 초청하였다. 승혜는 두 사람의 집으로 다 갔다. 후에 두 집에서 조사해서 따져보고, 비로소 그것이 분신임을 알았다.
제(齊)의 영명 연간(483~493)에 문혜왕(文慧王)이 요청하여 서울로 내려갔다. 가다가 보지(保誌)를 방문했다. 보지가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하였다.
“붉은 용의 새끼로다[赤龍子].”
다른 말은 없었다. 승혜는 그 후 형주로 돌아왔다.
우연히 진서 장사(鎭西長史) 유경유(劉景?)를 만났다. 문득 슬피 통곡하면서 그의 집에 투숙하였다. 며칠이 지나자 과연 유경유가 자사(刺史)에게 살해당하였다. 후에 상주성(湘州城)의 남쪽에 이르러 문득 말하였다.
“땅 속에 비석이 있다.”
여러 사람이 시험 삼아 파보니, 과연 두 장의 비석이 발견되었다. 승혜는 그 후 세상을 마친 곳을 알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영원(永元) 연간(499~500)에 강릉에서 죽었다고 한다.
혜원(慧遠)
당시 강릉에 있는 장사사(長沙寺)의 혜원은 본래 사문 혜인(慧印)의 종이다. 혜인이 그에게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출가시켰다. 이어 반주삼매(般舟三昧)를 수행하였다. 몇 해를 부지런히 고행하였다. 마침내 신이한 능력을 가져 분신하여, 초청하는 집에 갈 수도 있었다. 또한 미리 흥망을 점치기도 했다.
15) 석혜통(釋慧通)
혜통이 어디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전송(前宋)의 원가(元嘉) 연간(424~453)에 수춘(壽春)에 있었다. 의복이 추레하고, 자는 곳도 일정한 곳이 없었다.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마실 것이라면 마시고 먹을 것이라면 먹어서,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늘 자기가 정나라의 산기장군[鄭散騎]이라고 하였다. 미래의 일을 예언하여 자못 그때마다 영험이 있었다.
강릉의 변두리에 사는 승귀(僧歸)라는 자가 수춘을 떠돌며 장사를 하였다. 그러다가 곧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형편이 되었다. 길에서 혜통을 만났는데, 이름을 부르면서 물건을 맡기려고 하였다. 승귀는 이 때 자신이 지는 짐도 무거운 까닭에 완강하게 거절하였다. 마침내 억지로 짐 위에 얹어놓았다. 그런데도 조금도 무거운 줄 몰랐다. 몇 리쯤 가다가 곧 헤어져 떠나면서, 승귀에게 말하였다.
“나의 누님이 강릉에 계시오. 비구니로서 이름은 혜서(惠緖)이며, 삼층사(三層寺)에 머물러 있소이다. 그대가 나를 위하여 소식을 알려줄 수 있다면, 곧 찾아간다고 말해주시오.”
말을 마치자마자 문득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짐 위에 얹은 것을 돌아보니, 맡겼던 물건 역시 없었다. 승귀는 강릉에 돌아와 곧 혜서를 찾을 수 있었다. 자세히 그 내용을 말해 주었지만, 혜서에게는 그런 아우가 없었다. 또한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였는지도 알지 못하였다. 이에 스스로 수춘을 왕래하면서 그를 찾았으나, 끝내 만나지 못하였다.
그 후 혜통이 스스로 강릉으로 갔으나, 혜서는 이미 죽었다. 그녀의 방안에 들어가 모든 것을 자세히 물어보고는, 잠깐 동안 강릉에 머물렀다.
길을 가다가 무덤 앞을 지나가면, 그들의 씨족과 사망한 연·월·일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이를 전하여서 물어 보면, 모두가 그의 말과 같았다. 때로는 먼 옛날의 겁탈하고 훔친 일을 지적하여, 그의 죄상을 말하기도 하였다. 이에 뭇 도적들이 멀리서 혜통을 보기만 하면, 곧 샛길로 피해 달아났다.
또 강진(江津)으로 가다가 길에서 어떤 사람을 만났다. 문득 지팡이로 그를 때리며 말하였다.
“빨리 말을 달려 돌아가, 너의 집이 어찌 되었는지 보아라.”
이 사람이 집에 이르러 보니, 과연 화재가 번져 집과 재물이 다 타버렸다. 제(齊)의 영원(永元) 초년(499)에 문득 서로 아는 임양(任?)이란 사람을 찾아가 술을 구하며, 매우 다급하게 말하였다.
“지금 곧 먼 길을 떠나야 하니,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하네. 여러 아는 분들에게 이별을 알리시게. 모두들 정성껏 부지런히 착한 일을 닦는 데 앞장서야 할 것이네.”
술을 다 마시고, 담장 가에 이르러 땅에 누웠다. 살펴보니 이미 죽었다.
수십 일이 지나서, 다시 어떤 사람이 저자 가운데에서 그를 만났다. 뒤따라가서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한참 후에 사라졌다.
16) 석보지(釋保誌)
보지의 본래 성은 주(朱)씨이며, 금성(金城)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서울의 도림사(道林寺)에 머물렀다. 사문 승검(僧儉)에게 사사하였다. 그를 스승[和上]으로 모시며, 선업(禪業)을 닦고 익혔다.
전송(前宋)의 태시(太始) 연간(465~471) 초기에 이르자, 문득 괴벽스럽고 기이해졌다. 거처하고 머무는 것에 일정한 곳이 없었다. 또한 먹고 마시는 것에도 일정한 때가 없었다. 머리카락의 길이가 몇 치나 자라나고, 마을의 거리를 늘 맨발로 걸어 다녔다. 지팡이 하나를 손에 잡았다. 그 꼭대기에는 수염을 자르는 칼과 거울을 걸어 놓았다. 때로는 한두 필의 비단을 걸어 놓기도 하였다.
제(齊)의 건원(建元) 연간(479~482)에 조금씩 기이한 자취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며칠씩 음식을 먹지 않고도 얼굴에 배고픈 기색이 없었다. 또 사람들과 말을 나누면, 처음에는 깨닫기 어려운 것 같았지만 후에는 모두 효험이 나타났다. 때로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그런데 말이 예언하는 기별과 같았다. 서울의 선비와 서민들이 모두 함께 그를 섬겼다.
제(齊)의 무제(武帝)는 그가 대중을 미혹시킨다 생각하여 수감하여, 건강(建康)에 머무르게 하였다. 이튿날 아침 사람들이 보니, 그가 저자 가운데로 들어갔다. 돌아와 감옥 안을 조사해 보았다. 보지는 아직도 그곳에 있었다. 보지는 감옥의 관리에게 말하였다.
“문 밖에 두 개의 가마에서 음식을 갖고 오리라. 금 발우에 밥을 담았을 것이니, 네가 그것을 취하는 것이 좋겠다.”
이윽고 제(齊)의 문혜(文慧)태자와 경릉왕(竟陵王) 소량(蕭良)이 나란히 음식을 보지에게 보내왔다. 과연 그의 말과 같았다. 건강(建康)의 수령인 여문현(呂文顯)이 이 사실을 무제에게 아뢰었다. 그러자 무제는 곧 그를 맞아들여 뒤채[後堂]에 머물게 하였다.
같은 시각에 병제(屛除)의 안에서 연회(宴會)를 거행하게 하였다. 보지 또한 대중을 따라나갔다.
얼마 뒤 경양산(景陽山) 위에, 또 한 사람의 보지가 일곱 승려들과 함께 있었다. 이에 황제는 노하여 사람을 파견하여 조사하게 하였다. 그러자 있던 곳에서 사라져 버렸다. 궁궐 문을 지키는 관리가 상계하여 말하였다.
“보지는 오래 전에 성(省)에 나가 있었으며, 지금 막 먹물을 몸에 바릅니다.”
당시 승정(僧正) 법헌(法獻)이 옷 한 벌을 보지에게 보내주고자 하였다. 심부름꾼을 용광사(龍光寺)와 계빈사(?賓寺) 두 절에 보내서 그를 찾았다. 그랬더니 모두 말하였다.
“어제 이곳에서 묵고는 아침에 떠났소.”
다시 그가 늘 찾아가는 여후백(?侯伯)의 집에 이르러 그를 찾았다. 여후백이 말하였다.
“보지는 어제 여기에서 도를 수행하다가, 아침잠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
심부름꾼이 돌아와 법헌에게 알리니, 비로소 분신이 세 곳에서 묵었음을 알았다.
엄동에도 늘 한쪽 어깨를 드러내고 걸어 다녔다. 사문 보량(寶亮)이 납의(衲衣)를 주고자 하였다. 채 말도 하기 전에, 보지가 문득 와서 납의를 끌어넣고 떠났다.
또한 때때로 사람들을 찾아가 살아 있는 물고기의 회를 구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찾아 마련해주면, 배부르게 먹고서야 떠났다. 문득 그릇 안을 보면, 물고기는 여전히 살아서 놀았다.
그 후 보지는 무제에게 신통력을 빌려주어, 고제(高帝)를 땅 아래에서 만나게 하였다. 저승에서 고제는 항상 송곳으로 찔리고 칼로 목 잘리는 고통을 받았다. 무제는 이 때부터 길이 송곳과 칼을 폐하였다.
제의 위위(衛尉) 호해(胡諧)가 병을 앓았다. 보지를 초청하였다. 보지는 소(疏)에 주석을 달다가 말하였다.
“내일은 굽히겠소[明屈].”
다음날이 되어도 끝내 가지 않았다. 이 날 호해가 죽어 시신을 싣고 집에 돌아오니, 보지는 말하였다.
“명굴(明屈)이란 내일[明日]이면 시신이 나간다[屍出]는 뜻이라오.”
제의 태위(太尉)이며 사마벼슬에 있던 은제지(殷齊之)가 진현달(陳顯達)을 따라 강주(江州)에 주둔하였다. 보지에게 이별의 인사를 하니, 보지는 종이에 나무 한 그루를 그려 주었다. 그런데 그 나무 위에는 까마귀가 있었다 이어 말하였다.
“급할 때는 이 나무에 오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 후 진현달이 반역을 일으켜 강주의 주둔지에 은제지를 남겼다. 진현달이 패배함에 이르러 은제지도 반역자로 몰려 여산(廬山)에 들어갔다. 추격하는 기병이 곧 그에게 이르렀다. 은제지가 보니 숲 속에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나무 위에는 까마귀가 있었다. 보지가 그려준 그림과 같았다. 이에 깨닫고 나무에 올라갔더니, 까마귀는 끝까지 날아가지 않았다. 추격하던 사람들이 까마귀를 보고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여 되돌아가서 마침내 화를 면하였다.
제의 둔기장군(屯騎將軍) 상언(桑偃)이 반역을 꾀하려 하여 보지를 찾아갔다. 보지는 멀리서 그를 보고는 달아나면서 크게 부르짖었다.
“대성(臺城)을 포위해서 반역하고자 하지만, 머리가 쪼개지고 배가 갈라질 것이오.”
열흘이 되지 않아서 사실이 발각되었다. 상언은 반역자로 몰려 주방(朱方)으로 달아났다. 그러다가 사람들에게 사로잡혔다. 과연 머리가 쪼개지고 배가 갈라졌다.
양(梁)나라 때 파양(?陽)의 충렬왕이 어느 날 보지에게 예를 굽혀, 집의 모임에 오게 했다. 그를 만나자 문득 매우 다급하게 곤장을 찾았다. 얻고 나서는 그것을 문 위에 놓았다. 아무도 그 이유를 헤아리지 못하였다. 얼마 후에 충렬왕은 곧 외지로 나가서 형주자사(荊州刺史: 荊은 곤장)가 되었다. 그의 미리 비추어보는 밝음으로서 이와 같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보지는 대부분 흥황사(興皇寺)와 정명사 두 절을 오갔다. 금상폐하가 제왕의 자리에 오르자, 더욱 높은 예우를 받았다.
이에 앞서 제나라 때는 보지의 출입을 금지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금상폐하가 즉위하자, 곧 조서를 내려 말씀하셨다.
“보지의 자취는 티끌세상의 더러움에 구속받으나, 그 정신은 어둡고 고요한 세계에서 노닌다. 물과 불도 태우거나 적실 수 없고, 뱀과 호랑이도 덮쳐 두렵게 할 수 없다. 불교의 이치로 말한다면 성문(聲聞) 이상의 경지에 있다. 숨겨둔 경륜으로 이야기한다면 은둔한 신선보다 높은 경지에 있다. 어찌 속가 선비의 보통 심정으로 헛되이 구속하고 제재할 수 있는가? 어찌 비루하고 편협함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지금부터 행도하고 내왕하는 일은 뜻에 따라 출입하게 하고, 다시는 금지시키지 말도록 하라.”
보지는 이 때부터 궁중에도 자주 출입하였다. 천감(天監) 5년(506) 겨울에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두루 갖추어 지냈다. 그러나 아직 비가 내리지 않았다. 보지가 문득 황제에게 상계하였다.
“저의 병이 낫지 않아, 관에 나아가 치료를 구걸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가 상계하지 않으면, 백관(百官)이 아마도 매질과 곤장을 맞을 것입니다. 원컨대 화광전(華光殿)에서 『승만경』을 강의하여, 비를 청하게 하소서.”
주상은 곧 사문 법운(法雲)을 시켜 『승만경』을 강의하게 하였다. 강의가 끝나자, 밤에 곧 큰 눈이 내렸다. 이에 보지는 또 말하였다.
“한 쟁반의 물을 가져다, 그 위에 칼을 얹어 놓으소서.”
갑자기 비가 크게 내려, 높은 사람이건 낮은 사람이건 모두 만족하였다.
어느 날 주상께서 보지에게 물었다.
“제자는 번뇌와 헷갈림을 아직 제거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다스려야 합니까?”
그가 대답하였다.
“열둘[十二]로 다스려야 합니다.”
알 만한 이들이 ’12인연이 헷갈림을 다스리는 약이다’라고 생각하였다.
또 열둘이란 말의 뜻을 물으니 대답하였다.
“그 뜻은 글자를 쓸 때의 시절과 시각 가운데 있습니다.”
알 만한 이들이 ‘글 서(書)’ 자의 획수 가운데 있는 12를 말한다고 생각하였다.
또 물었다.
“제자는 어느 때면 고요한 마음으로 닦고 익힐 수 있겠습니까?”
대답하였다.
“안락금(安樂禁)입니다.”
알 만한 이들이 ‘금(禁)’이란 것은 멈춘다[止]는 뜻이니, 안락정토에 이르면 마침내 멈추게 된다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 후 법운이 화림사(華林寺)에서 『법화경』을 강의하였다. 그러다가 ‘가사흑풍(假使黑風)’이라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 보지가 문득 물었다.
“바람이 있는가, 없는가?”
법운이 대답하였다.
“세간의 이치[世諦]로 보자면 짐짓 있다고 하겠지만, 최상의 진리[第一義]로 따지자면 없는 것입니다.”
보지는 세 번 네 번 주고받다가, 이내 웃으며 말하였다.
“만약 이 가유(假有)의 경지를 체득한 경지에서 본다면, 이것은 또한 해득할 수도 없거니와 해득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의 말뜻이 깊이 숨은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진어로(陳御虜)란 사람이 있었다. 그의 온 집안이 보지를 섬기기를 매우 도탑게 하였다. 어느 날 보지는 그를 위하여 진실한 형상을 나타냈다. 그런데 빛나는 모습[光相]이 보살상과 같았다. 보지의 이름이 알려지고 기적을 나타낸 지 40여 년 동안에, 공손히 섬긴 선비와 여자들의 수는 이루 다 일컬을 수 없다.
천감 13년(514) 겨울에 이르러 대(臺)의 뒤채에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보살이 떠나려 한다.”
열흘이 되지 않아 병 없이 세상을 마쳤다. 시신은 향기롭고 부드러우며, 형체와 모습은 밝고 기쁜 모습이었다.
죽음에 즈음하여 촛불 하나를 불태워서, 후원 전각에 있던 사인(舍人) 오경(吳慶)에게 넘겨주었다. 오경이 곧 나라에 상계하여 알렸다. 주상은 탄식하였다.
“대사께서는 더 이상 머무시지 않을 것이다. 촛불이라는 것은 훗날의 일을 나에게 부탁하시는 뜻일 것이다.”
그러고는 후하게 장례 전송하기를 더하여, 종산(鍾山)의 독룡(獨龍) 언덕에 묻었다. 이어 묘소에 개선정사(開善精舍)를 세웠다. 육수(陸?)에게 명령하여 무덤 안에 기리는 글을 짓게 하였다. 그리고 왕균(王筠)이 비문을 절문에 새겼다. 그 돌아가실 때의 형상[遺像]을 후세에 전하게 하였다. 곳곳에 그것이 남아 있다.
처음 보지가 기적을 나타내기 시작할 때는 나이가 5, 60세 가량이었다. 세상을 마칠 때에도 역시 늙지 않아, 사람들은 아무도 그의 나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서첩도(徐捷道)라는 사람이 서울의 구일대(九日臺) 북쪽에서 살았다. 스스로 말하였다.
“나는 보지의 처삼촌으로 보지보다 나이가 네 살 적다. 그러므로 보지가 죽을 때의 나이를 따져보면 97세일 것이다.”
도향(道香)·승랑(僧朗)
당시 양(梁)나라 초기에 촉중(蜀中)에는 또한 도향·승랑이 있었다. 그들 역시 모두 신비한 힘이 있다고 한다.
【論】신묘한 도의 조화[神道之爲化也]란 뽐내고 강한 것을 억누르고, 모멸하고 오만한 것을 꺾으며, 흉악하고 날카로운 것을 분질러서, 티끌세상의 어지러움을 푸는 데 있다.3)
수레바퀴를 날려 보물을 실어 가는 것과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착한 믿음을 지닌 자들도 귀의하여 엎드리게 한다. 험한 절벽에서 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것과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힘이 넘치는 사람들도 숨어 엎드리게 한다. 마땅히 알라. 지극한 다스림은 작위적이지 않은 무심함으로서, 단단함과 부드러움을 조화시키는 데 있음을.
진(晋)나라 혜제(惠帝)가 정사를 제대로 베풀지 못하면서부터 회제(懷帝)가 서울을 옮겼고, 중국은 오랑캐가 짓밟으며 뭇 갈족(?族)이 어지럽게 교차하였다. 사마연(司馬淵)과 사마요(司馬曜)는 앞에서 포악하게 제왕의 자리를 찬탈하였다. 석륵(石勒)과 석호(石虎)는 뒤에서 흉악한 마음을 숨겨왔다. 고을과 나라가 나누어지고 무너져, 백성들은 죽거나 하얀 재를 뒤집어썼다.
불도징(佛圖澄)은 바야흐로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 가엾고, 형벌과 살해가 아직 끝나지 않는 것이 가슴 아파, 마침내 신의 조화를 갈파(葛陂)에서 나타내었다. 까마득한 미래의 예언을 양양(襄陽)과 업도(?都)에서 드러내었다. 비밀스런 주문의 힘에 기대어 곧 다하려는 운명을 구제하고, 향기로운 기운에 의지해 위태함을 만난 이를 건져내었다. 방울을 올려다보거나 손바닥에 비추어보아, 앉은 자리에서 길흉을 정하여, 끝내 두 석(石)씨로 하여금 머리를 조아리게 하였다. 황량한 오랑캐의 자식으로 왔지만, 창생들을 윤택하게 함에서는 참으로 더 비교할 것이 없다.
그 후 불조(佛調)와 기역(耆域)과 섭공(涉公)과 배도(杯度) 등은 혹 빛을 감추고, 그림자를 숨기며, 머리를 숙여서, 헷갈린 속인들과 함께 하였다. 때로는 신기한 일을 뚜렷이 나타내거나, 먼 훗날의 징조를 예언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기도 하였다. 때로는 묘지에 묻힌 후에 관 안이 텅 빈 일도 있었다. 신령한 자취는 괴상하고 기이하여, 그 연유를 헤아릴 길이 없다. 다만 그들의 법칙이 같지 않고, 취하고 버리는 것 또한 달랐을 따름이다.
심지어 유안(劉安)4)·이탈(李脫)과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역사에서는
유안은 어려서부터 책 읽기와 비파 타기를 좋아하고 문재(文才)를 타고났다. 수렵이나 승마와 같은 무협적인 것을 싫어했다. 남에게 음덕(陰德)을 베풀고 백성들을 잘 어루만져 명성을 천하에 떨치려 하였다. 다만 아버지 유장이 죽은 데 대하여 원망을 품고, 기회가 있으면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다 자살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했다.
유안은 『회남자(淮南子)』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회남자』는 형이상학적인 도(道)를 말하여 세속을 초월한 관념적 경지를 강조한 도가의 저작물이자, 도가 외에도 유가나 법가 등의 제가(諸家)의 설을 총망라한 잡가(雜家)의 저작물이기도 하다.
유안은 빈객과 방술지사(方術之士) 수천 명을 동원하여 이 책을 지었다. 이 책은 한나라 건국 70년 무렵의 한나라에 존재한 모든 방면의 사상을 집대성한 위대한 철학서이다. 동시에 그 이전과 이후의 사상계를 가르는 전환점이자 새로운 출발점을 예고한 책이기도 하다.
그들을 모반(謀叛)하고 질서를 어지럽힌, 요망하고 방탕한 인물이라 하였다. 신선의 기록에는 그들을 우화등선(羽化登仙)하여 구름 위를 날아다닌 인물이라 하였다. 무릇 진리의 세계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은 도와 합치하는 것이다. 현상의 세계에서 귀중히 여기는 것은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방편이란 영구불변한 진리에는 반대되더라도, 도와 합치하는 것이자 쓰임을 이롭게 하여 일을 완성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 시대의 전기들에 기록된 것만으로는 그 상세한 내용을 끝까지 규명할 길이 없다. 혹 법신(法身)으로 말미암아 감응한 경우도 있고, 혹 은둔한 신선의 드높이 빼어난 경지인 경우도 있다. 다만 한 가지라도 남까지 아우른다면 충분한 것이다.
혜칙(慧則)은 향기로운 항아리에 감응하여 고질병을 고치고, 사종(史宗)은 어량(漁梁)을 지나면서 곧 물 속에 노닐던 물고기의 목숨을 구하였다. 백족화상(白足和尙)이 칼날 아래에서도 몸이 상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부처님께서 남기신 법이 다시 시작된 것이라고 하겠다. 보지(保誌)가 분신으로 집집마다의 욕구를 원만히 충족시켜, 황제가 이것으로 믿음을 더하게 된 것과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광명이 비록 조화를 이루지만 그 바탕이 더럽혀지지 않고, 먼지와 비록 함께 하더라도 그 참다움은 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런 까닭에 선대의 글과 기록[文紀]이 모두 불가의 기록[宗錄]에 보이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방술과 작은 재주[方伎]를 자랑하여 그것에 도취된 사람들이라면, 이는 좌도(左道: 道敎)로 시대를 어지럽히거나, 신비한 약에 인연하여 높이 하늘을 날거나, 향기로운 지초[芳芝: 靈芝]에 기대서 오래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무릇 닭이 구름 속에서 울고, 개가 하늘 위에서 짖으며, 뱀과 고니가 죽지 않고, 거북과 신령이 천 년을 산다고 해서, 일찍이 이것을 신이한 일이라 하였던가?
찬(贊)하노라.
땅은 물의 도움 받아 못이 되고
쇠는 불로 말미암아 달구어지듯
힘 센 이 따라 교화하여
일시나마 위엄과 권세 드러내었지.
양양 땅 비추신 불도징(佛?澄)
불법의 시내로 인도하신 단도개(單道開)
이 두 분의 은혜로움으로
저 사방 끝까지 평안하였네.
만약 이에 힘입지 않았더라면
백성들 목숨 어찌 보전했겠나.
土資水澤 金由火煎
强梁扈化 假見威權
澄照襄土 開導蓄川
惠?兩葉 綏彼四邊
如不?賴 民命何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