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전 제08권
2. 의해 ⑤
01) 석승연(釋僧淵)
승연의 본래 성은 조(趙)씨이며 영천(穎川) 사람이다. 위(魏)나라 사공(司空) 조엄(趙儼)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였다. 구족계를 받은 후에는 오로지 불교 교리만을 공부하였다.
처음 서주(徐州)에서 노닐다가 백탑사(白塔寺)에 머물렀다. 승숭(僧崇)으로부터 『성실론』과 아비담을 전수받았다. 배운 지 3년이 안되었으나, 그 공업은 10년 배운 사람을 뛰어넘어 슬기로운 이해력의 명성이 멀고 가까운 지방에 치달렸다.
승연은 고상한 자태가 크고 우람하여 허리띠가 열 아름이나 되었다. 정신과 기개가 맑고 넉넉하며, 자유자재하여 속된 기가 없이 깨끗하였다.
은둔하는 선비 유인지(劉因之)가 머물던 산을 희사하여 승연에게 주어 정사로 삼았다.
혜기(慧記)·도등(道登)
담도(曇度)·혜기·도등도 모두 승연으로부터 수업 받았다. 혜기는 논리를 따지는 데 뛰어나고, 도등은 『열반경』과 『법화경』에 빼어났다. 모두 위왕(魏王)·원굉(元宏)의 존중을 받으면서 위나라에 명성을 날렸다. 승연은 위조(僞朝)의 태화(太和) 5년(481)에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68세이다. 이때는 바로 제(齊)나라의 건원(建元) 3년(481)이다.
02) 석담도(釋曇度)
담도의 본래 성은 채(蔡)씨이며, 강릉(江陵)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경건하여 행동거지를 삼가고, 평소 계율의 모범으로 칭송을 받았다. 마음이 민첩하고 슬기로워 꿰뚫어 보는 안목이 보통 사람을 넘었다.
그 후 서울에 유학하여 두루 많은 경전을 꿰뚫었다. 『열반경』·『법화경』·『대품경』·『유마경』에 대하여 모두 미세하게 숨어있는 뜻을 탐색하였다. 그리하여 생각이 말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일어났다.
이어 각기병 때문에 서쪽으로 노닐다가, 마침내 서주(徐州)에 이르러 승연(僧淵) 법사로부터 다시 『성실론』을 전수 받았다. 끝내 이 논에 정통한 당시의 독보적 존재가 되었다.
위(魏)의 임금인 원굉(元宏)이 그의 도풍을 듣고, 멀리서 머리 숙여 사신을 보내 모시기를 청하였다. 평성(平城)에 이르자마자 크게 강석을 열었다. 원굉이 공경을 표하여 아랫자리에 앉아 몸소 진리의 맛을 관장하였다.
이에 위나라의 서울에 머물며 불법 교화를 이어나갔다. 배우는 무리들이 먼 곳에서 찾아와 1천여 명이나 되었다.
위위(僞魏) 태화(太和) 13년(489)에 위나라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해는 곧 제(齊)의 영명(永明) 7년(489)이다. 『성실론대의소(大義疏)』 8권을 지었는데 북쪽 나라에서 성대히 전한다.
03) 석도혜(釋道慧)
도혜의 성은 왕(王)씨이며, 여요(餘姚) 사람이다. 건업(建?)에 머물러 살았다. 열한 살에 출가하여 승원(僧遠)의 제자가 되었고, 영요사(靈曜寺)에 머물렀다.
열네 살이 되어 여산 혜원(慧遠)의 문집을 읽었다. 마침내 안타깝게 탄식하면서, 늦게 태어난 것을 한탄하였다. 마침내 친구인 지순(智順)과 함께 천 리 길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서는 혜원의 유적을 구경하였다. 이에 여산의 서사(西寺)에 머물면서 3년 동안 두로 섭렵하였다. 이 후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당시에 왕혹(王或)이 3상(相)의 뜻을 말하면서 크게 학승을 모았다. 도혜는 그 때 17세였다. 그러나 몇 번 질문하는 말이 현미하며, 따지는 것이 조리가 있었다. 대중들이 모두 기특하게 생각하였다. 그 후 도맹(道猛)·도빈(道斌) 두 법사에게서 수업하였다.
어느 날 도맹이 『성실론』을 강의하였다. 장융(張融)이 어려운 질문을 몇 겹으로 겹치게 하자, 도맹은 병을 핑계로 그 많은 질문을 받을 수 없다 하였다. 곧 도혜로 하여금 이것에 대답하게 하였다. 장융은 이 때 도혜의 나이가 적으므로 자못 가볍게 보는 마음을 품었다. 도혜는 기회를 틈타 날카로움을 꺾었으며, 말하는 것마다 반드시 이치에 닿았다. 이렇게 말을 주고받음이 거듭하면서도 여유가 넘쳤다.
대승의 경전에 빼어났고, 논리를 따지는 데 밝았다. 계속되는 강설에 배우는 무리들이 매우 성황을 이뤘다. 그는 내용의 종류를 구별하여 처음으로 단(段)·장(章)을 만들었다.
저징(?澄)·사초종(謝超宗)은 당시 명망이 두터운 인물들이었다. 그를 만나보고는 모두 추대하고 예우하였다.
도혜는 어머니가 늙었으므로, 봉양할 밑천을 남겨드리고자 마침내 자리를 장엄사(莊嚴寺)로 옮겨가 쉬었다. 어머니는 그의 뜻을 어여삐 생각해 다시 출가하여 도를 위했다. 집을 희사하여 복전으로 삼았다. 이곳은 도혜의 정사와 멀지 않았다.
도혜는 제의 건원 3년(481)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31세이다. 임종에 사람을 불러 털이개를 가지고 오게 하여 친구인 지순(智順)에게 물려주었다. 지순이 통곡하였다.
“이와 같은 사람이 40세에도 이르지 못하다니 가슴 아픈 일이로다.”
그러고는 털이개를 관(棺) 속에 넣어 염하고 종산(鍾山)의 양지바른 곳에 묻었다. 진군(陳郡)의 사초종은 그를 위하여 비문을 지었다.
현취(玄趣)·승달(僧達)
당시 장엄사의 현취·승달도 모두 경학의 이해로 칭송을 받았다. 현취는 많은 경전에 두루 빼어나고, 아울러 내외의 학문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게다가 석상의 토론에 빼어나 그 도풍과 법도는 기뻐할 만한 것이었다. 승달은 어려서부터 머리털이 하얗게 희어, 당시 사람들이 백두달(白頭達)이라 불렀다. 그 역시 많은 경전을 널리 해득하였다. 질의응답을 주고받는 데 더욱 정밀하게 뛰어났다. 그러나 성품이 강직하여 여러 사람의 비위에 거슬려 장사(長沙)로 쫓겨났다.
04) 석승종(釋僧鍾)
승종의 성은 손(孫)씨이며, 노군(魯郡) 사람이다. 열여섯 살에 출가하여 가난하게 살면서 도를 실천하였다. 어느 날 수춘(壽春)에 이르렀다. 승도(僧導) 법사가 그를 보고 기특하게 여겼다. 초군(?郡)의 왕업(王?)이 그의 지조를 존중하여 네 가지 공양물을 공급하고, 후에 초청하여 『백론(百論)』을 강의하게 하였다. 승도 법사가 그곳에 가서 강의를 듣고는 곧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후생이 두렵다는 말이 진실로 빈 말이 아니군요.”
승종은 미묘하게 『성실론』·3론·『열반경』·『십지론』 등에 빼어났다. 그 후 남쪽 서울로 노닐다가 중흥사(中興寺)에 머물렀다.
영명(永明) 연간(483~493)의 초기에 위(魏)나라에서 이도고(李道固)를 사신으로 보내서 그를 초빙하였다. 때마침 절 안에서 있었다. 승종이 공덕과 명성이 있다 하여, 황제가 칙명으로 이도고와 응대하게 하였다. 말을 주고받으며 시간이 흘러가도 말에 실수하는 일이 없었다. 해 그림자가 조금씩 기우는데도 승종이 음식을 먹지 않았다. 이에 이도고가 물었다.
“왜 먹지 않는가?””예전 불도의 법에는 오시(午時)가 지나면 먹지 않았습니다.”
이도고가 말하였다.
“어떻게 소리로 들은 것[聲聞]만 갖고 일삼는가?”
그는 대답하였다.
“소리로 들어 득도(得度)한 사람은 짐짓 성문승(聲聞僧)으로 나타나는 법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명답(名答)이라 하였다.
그 후 그곳에서 소요하며 강설하니, 묻고 듣는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제의 문혜태자(文惠太子)와 경릉(竟陵) 문선왕(文宣王)이 자주 청하여 남쪽으로 얼굴을 두어 앉았다.
제(齊)의 영명(永明) 7년(489)에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60세이다.
담참(曇懺)·담천(曇遷)·승표(僧表)·승최(僧最)·민달(敏達)·승보(僧寶)
당시 승종과 명성을 나란히 하며 덕도 비슷한 이로 담참·담천·승표·승최·민달·승보 등이 있었다. 모두 경론에 빼어나 문선(文宣)왕이 존경하여 번갈아가며 강석을 일으켰다.
05) 석도성(釋道盛)
도성의 성은 주(朱)씨이며, 패국(沛國)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배움에 힘써서 『열반경』·『유마경』에 빼어나며, 아울러 『주역』에도 뛰어났다. 처음에 상주(湘州)에 주석하였다. 전송(前宋)의 명제(明帝)가 그의 도풍을 듣고는 칙명을 내렸다. 서울로 내려와 팽성사(彭城寺)에 머물렀다.
사초종(謝超宗)은 그를 한 번 만나보고는 마침내 스승의 예로 존경하였다. 이어 『술교론(述交論)』 및 『생사본무원론(生死本無源論)』 등을 지었다. 그 후 천보사(天保寺)에서 쉴 때 제(齊)의 고제(高帝)가 칙명을 내려, 담도(曇度)와 교대하여 승주(僧主)로 삼았다.
단양윤(丹陽尹) 심문계(沈文季)는 평소 도교(道敎)를 받들고, 부처님을 배격하고 질시(嫉視)하였다. 마침내 부승국(符僧局)에 건의하여 승려의 승적(僧籍)을 책문하여, 비구와 비구니를 가려내서 숙청하려 하였다. 그러나 도성이 기강있게 이끌어 공적이 있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이 건의는 잠잠해져 편안해졌다.
그 후 문계(文季)가 천보사에 모임을 마련하여, 육수정(陸修靜)으로 하여금 도성과 논의하게 하였다. 도성은 이미 이론에서 그보다 앞서 있었다. 게다가 말과 기개가 우뚝 드러나, 조롱과 해학을 주고받아 말하면서도 잠시도 어지러운 기색이 없었다. 육수정은 생각을 다 말할 수 없어 부끄러운 얼굴로 물러났다.
도성은 제(齊)의 영명 연간(483~493)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0여 세이다.
06) 석홍충(釋弘充)
홍충은 양주(凉州)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지조와 힘이 있었다. 『노자』와『장자』에 뛰어나며 경전과 율법을 해득하였다. 대명(大明) 연간(457~464)의 말기에 양자강을 넘어왔다. 처음에는 다보사(多寶寺)에 머물렀다. 어려운 질문에 빼어나 고승들이 대부분 그에게 굴복하였다.
그 후 그가 법석을 열면서부터 날카로운 공격들이 번갈아 일어났다. 홍충은 이미 생각이 그윽하고 미묘한 경지에 들어갔고, 말주변은 하늘에서 내려준 뛰어난 솜씨였다. 그런 까닭에 의문을 통하게 해주고, 막힌 것을 풀어주어 빈틈이 없었다. 매양 『법화경』과 『십지론』을 강의할 때마다 청중이 강당을 메웠다.
전송의 태재(太宰)인 강하(江夏)의 문헌왕(文獻王) 의공(義恭)도 평소 그를 존중하였다. 명제(明帝)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상궁사(湘宮寺)를 세워 홍충을 초청하여 강령으로 삼았다. 이에 그곳으로 옮겨 살았다.
법선(法鮮)
당시 상궁사의 법선도 총명하고 비상한 사고력이 있었다. 홍충과 명성을 나란히 하였다.
홍충은 제(齊)의 영명(永明) 연간(483~493)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2세이다. 『문수문보리경(文殊問菩提徑)』과 『수능엄경(首楞嚴徑)』에 주석을 달았다.
07) 석지림(釋智林)
지림은 고창(高昌) 사람이다. 처음 출가하여 도량(道亮)의 제자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교리를 숭상하고 배움을 좋아하여, 책 보따리를 걸머지고 장안으로 나갔다. 강주(江州)·예주(豫州) 지방에 지팡이를 떨치면서, 뭇 경전의 이치를 널리 캤다. 특히 『잡심론(雜心論)』에 빼어났다.
그 후 도량이 배척당하자, 제자 열두 사람이 모두 그를 따라 영외(嶺外)로 나갔다. 이에 지림은 곧 발걸음을 번우(番?)에 멈추어, 바닷가 마을을 맑게 교화하였다.
전송(前宋)의 명제(明帝) 초기에 이르러서는 그가 있던 곳에 칙명을 내려, 노자를 지급하였다. 서울로 내려와 영기사(靈基寺)에 머물렀다.
강설을 이어가니, 묻고 감복하는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2제(諦)의 내용에 3종(宗)의 다른 점이 있음을 밝혔다. 당시 여남(汝南)의 주옹(周?)도 또한 『삼종론(三宗論)』을 지었다. 이미 그것은 지림의 생각과 서로 부합되어, 깊이 흐뭇한 위안을 받았다. 그리하여 곧 주옹에게 편지를 보냈다.
“근간에 시주께서 2제의 새로운 뜻을 서술하고, 3종에서 취하고 버릴 점을 진술하여, 그 명성이 보통 음률과 다르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비록 남을 나아가게 하는 데 있어서는 빠르지 않다 해도, 그 내용은 빈도가 품었던 생각과 같습니다. 천하의 이치라 할 만한 것은 오직 여기에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이와 같지 않은 것은 이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까닭에 속히 이것을 종이와 붓으로써 짓기를 권유하였습니다. 요즘 그곳을 왕래하는 사람을 만나 지은 논문이 이미 완성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기뻐하는 마음이 두루 충만하여, 특별히 비상하게 중히 여겼습니다.
또 들었습니다. 시주께서는 혹 현세의 이론과 다른 이론을 내세울 경우, 학인·대중들의 생각을 침범할까 두려워하여, 비록 논문을 짓는 일이 이루어지더라도, 결코 반드시 세상에 내놓지는 않으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들으니 마음이 두려워져, 나도 모르게 일어났다 누웠다 안절부절합니다.
이 논의 취지는 처음 개진하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미묘한 가르침이 도중에 단절된 지 67년이나 되었습니다. 이론이 보통 운치보다 높아서 전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빈도는 나이 스무 살 때 분수에 넘치게 이 논을 얻었습니다. 여기에 의지하여 미미하게라도 깨달으면, 득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늘 생각하였습니다. 가만히 매양 환희에 젖어 있지만, 이 기쁨을 함께 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젊은 시절에 장안의 나이 드신 승려들을 만나면, 흔히 관중의 도가 높고 뛰어난 승려 가운데, 옛날에는 이러한 논의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막상 불법이 결집되는 성대할 때를 맞아, 이 취지를 깊이 터득한 사람은 본래부터 많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인 심정을 뛰어넘는 이론인지라, 후진들 중에도 이를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매우 적었습니다. 이를 전하여 강남 지방으로 넘어가게 한 사람은 아예 없었습니다.
빈도는 털이개를 손에 잡은 이래로 지금까지 40여 년이 되었습니다. 동이니 서니 이쪽저쪽에서 강설하여, 한 시대의 존중을 그릇되게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논리 이외의 계통들은 자못 이런저런 가르침이나 기록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오직 이 길만은 도인과 속인을 막론하고, 한 사람도 그 취지를 터득한 사람이 없습니다.
빈도는 나이가 들면서 마침내 이것 때문에 병이 생겼습니다. 이미 병들고 노쇠한 말년의 목숨인데다, 또 아침저녁 사이에 서쪽으로 돌아가야 할 몸입니다. 다만 이 도를 되돌아볼 때마다, 지금부터는 영원히 단절되어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시주께서 기연을 일으키어, 유래 없이 홀로 세상의 테두리 밖에서 이 논리를 제창하셨습니다. 뜻밖에도 이 소식이 찾아와, 외람되게 저의 귀까지 들어왔습니다. 한편 기쁘고 한편 위안이 되어, 실로 무어라고 정황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 논리를 세워 밝힌다면, 전법의 등불에 유종의 미가 있을 것입니다. 비로소 이것은 진실한 도의 실천으로 제일의 공덕이 될 것입니다.
비록 나라와 성과 처자까지도 부처님과 승단에 보시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얻는 복덕과 이익은 이 공덕으로 얻는 복리를 넘어설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 다행스럽게도 생각을 궁극적으로 가려내어 기술하셨으니, 마땅히 널리 베풀어 말씀을 감상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하셔야 합니다. 법의 이론을 논하고 밝혔으니, 어진 일을 만나기를 사양하지 마십시오. 어찌 대중들의 마음을 돌아보고 아낌으로써, 기특한 취지를 잃어서야 되겠습니까?
만약 이 논을 이미 이루었으면서도 마침내 다시 중간에서 잠재운다면, 시주께서 장래에 혹시 이 일 때문에 커다란 장애가 생길까 두렵습니다. 제가 앞에서 한 말들은 간절한 말이며, 우스갯소리가 아닙니다. 생각건대 곧 한 권을 베껴 쓰게 하여 이 빈도를 위하여 베풀어 주신다면, 이것을 갖고 서쪽으로 돌아가 곳곳에 널리 펴도록 하겠습니다. 요즘은 조금 몸을 끌고 다닐 만하기 때문에, 산에 들어가 서술하여 깊이 이를 부탁드리고자 꾀했습니다.”
주옹(周?)은 이로 인하여 논을 출판하였다. 그런 까닭에 3종의 취지가 전술되어 지금까지 이른다.
지림은 키가 8척이나 되고, 타고난 자태가 아름답고 우아하였다. 법좌에 오르면 부르짖는 소리가 법당을 쩌렁쩌렁 울렸고, 토해내는 이야기는 물 흐르듯 유창하였다.
그 후 서울을 떠나 고창(高昌)으로 돌아갔다. 제(齊)의 영명 5년(487)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9세이다. 『이제론(二諦論)』과 『비담잡심기(毘曇雜心記)』를 지었다. 아울러 『십이문론(十二門論)』과 『중론(中論)』 등에 주석을 달았다.
08) 석법원(釋法援)
법원의 성은 신(辛)씨이고, 농서(?西) 사람이다. 신비(辛毘)의 후예이다. 맏형인 신원명(辛源明)은 위위(僞魏)에 벼슬하여 대상서(大尙書)가 되었다. 둘째 형인 법애(法愛)도 사문이 되어 경론을 해석하고, 아울러 논리를 따지는 데 빼어났다. 예예국(芮芮國)의 국사가 되어 3천 호의 봉록을 받았다.
법원은 어릴 때부터 성격이 활달하고 우뚝 뛰어나 뭇 아이들과 달랐다. 길에서 가난하여 추워 떠는 사람을 만나면, 곧 옷을 벗어 베풀어 주었다.
처음 출가하여 양주(梁州)의 사문 축혜개(竺慧開)를 섬겼다. 혜개는 아름다운 덕이 신과 통하여, 당시 사람들은 그가 초과(初果: 須陀洹果)를 터득했다고 일컬었다.
혜개가 법원에게 말하였다.
“네 마음의 슬기로움이 이와 같으니, 반드시 말세 교화의 강령이 되고 총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마땅히 힘을 아끼지 말고 널리 견문을 넓혀, 홀로 착해 지는 것만을 힘써서는 안 된다.”
이에 그는 혜계에게서 떠나 유학길에 올랐다. 연(燕)·조(趙)를 거쳐 업성(?城)과 낙양(洛陽)을 오가면서 수행하였다. 마침 오랑캐들이 종횡무진 날뛰어, 관중과 농서지방이 가마솥에 물 끓듯 시끄러운 때를 만났다. 법원은 험난함을 무릅쓰고 위태로운 길을 밟아가며, 학업에 게으름이 없었다.
원가(元嘉) 15년(438) 양주로 돌아왔다가, 곧 성도(成都)로 나아갔다.
그 후 동쪽 건업(建?)으로 갔다. 도량사(道場寺)의 혜관(慧觀)을 의지하여 스승으로 섬겼다. 뜻을 대승의 경전에 도탑게 하고, 한편으로 논리를 따지는 것을 탐구하였다. 또한 불경 외의 고전들도 자못 펼쳐 보았다. 그 후 여산(廬山)으로 들어가 고요함을 지켰다. 선(禪)을 맛보면서 생각을 5문(門)에서 맑게 하고, 마음을 3관(觀)에서 노닐었다. 얼마 후 자사(刺史) 유등지(庾登之)가 초청하여 산을 나가 강설하였다.
그 후 문제(文帝)가 도생(道生)의 돈오(頓悟)의 논리를 진술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라고 하였다. 마침내 칙명으로 서울로 내려가니, 돈오의 취지가 송대(宋代)에 거듭 밝혀졌다.
하상지(何尙之)가 그의 강의를 듣고 감탄하였다.
“도생이 죽은 후에는 미묘한 말씀이 영원히 끊어졌다고 늘 생각하였다. 오늘 다시 생각 밖의 이야기를 들었으니, 하늘이 아직 불교를 없애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구나.”
황제는 칙명으로 남평목왕(南平穆王) 유삭(劉?)을 위해 5계를 내려주는 스승이 되도록 하였다.
효무제(孝武帝)가 즉위하자, 칙명으로 서양왕(西陽王) 자상(子尙)의 벗이 되었다.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감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랜 뒤에야 이를 면할 수 있었다. 이어 방산(方山)에 집을 마련하여 『승만경(勝?徑)』과 『미밀지경(微密持徑)』에 주석을 달았다. 논의하다 틈이 나면, 때때로『효경(孝經)』과 상복(喪服)에 관한 이야기를 하곤 하였다.
그 후 천보사(天保寺)의 구조를 고치고, 법원을 초청하여 머무르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산을 떠나 고을로 나와서, 절의 기강을 맡는 강유(綱維)가 되었다. 자사(刺史) 왕경문이 찾아가서 문안을 드리려 하였다. 그러다가 바로 법원이 상복제도를 강의하는 시간을 만나서, 몇 번 묻고 토론하고는 훌륭하다고 하면서 물러갔다.
명제(明帝)가 상궁사(湘宮寺)를 지어 새로 절이 이룩되자, 크게 강석을 열었다. 미묘하게 영준한 승려를 가려내고, 칙명으로 법원을 초청하여 법주(法主) 자리를 맡겼다. 이어 황제가 법석에 참석하고, 공경대부들도 자리에 모였다. 한 시대의 성대한 일인지라 보는 이들마다 영화롭게 여겼다.
그 후 제(齊)의 문혜왕(文惠王)이 또 초청해서 영근사(靈根寺)에 머물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 절로 자리를 옮겼다.
태위(太尉)인 왕검(王儉)은 번잡한 교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오직 법원에 대한 대우만은 스승과 같이 하여, 글과 말에 공경을 다하였다.
제의 영명(永明) 7년(489)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81세이다.
법상(法常)·지흥(智興)
당시 영근사에 또 법상과 지흥이 있었다. 모두 경론에 두루 뛰어나 자주 강설을 담당하였다. 법상은 극렬하게 담판 짓기에 몹시 빼어나서, 당시 이름난 이들마저 꺼려했다. 게다가 성품까지 매우 강경하여 사람들의 풍속과 어울리지 못했다.
09) 석현창(釋玄暢)
현창의 성은 조(趙)씨이며, 금성(金城) 사람이다. 어려서 가문이 오랑캐들에게 멸문당하여, 화가 곧 현창에게까지 미쳤다. 오랑캐의 장수가 현창을 보고는 제지시켰다.
“이 아이는 눈빛이 밖까지 쏘아보는구나. 범상한 아이가 아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화를 면하였다.
이어 곧 양주(凉州)로 가서 출가하였다. 본명은 혜지(慧智)이다. 그 후 현고(玄高) 법사를 만나서 섬겨 제자가 되었다. 현고는 늘 그를 기특하게 생각하고 무슨 일이든 반드시 함께 상의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름을 현창이라 고쳤으며, 이것으로 현고가 부촉하는 뜻을 드러내었다.
그 후 잔악한 오랑캐들이 불법을 잘라 멸망하게 하고 모든 사문들을 해쳤다. 그러나 오직 현창만은 달아날 수 있었다. 원가(元嘉) 22년(445) 윤 5월 17일 평성에서 출발하였다. 도중에 대군(垈郡)·상곡(上谷)을 경유하여, 동쪽 태행산맥(太行山脈)을 넘었다. 도중에 유주(幽州)·기주(冀州)를 거쳐 방향을 남쪽으로 틀어, 곧 맹진(孟津)에 이르렀다.
오직 손에는 한 다발의 버들가지와 한 움큼의 파 잎사귀를 쥐었을 뿐이다. 오랑캐의 기병들이 추격하여 뒤쫓아 와서, 곧 그의 몸까지 이르렀다. 곧 그가 버들가지로 모래를 쳤다. 모래가 일어나면서 하늘이 어두워져, 사람과 말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얼마 후 모래가 가라앉고 기병들이 다시 그의 가까이에 이르렀다. 이에 그는 강물에 몸을 던졌다. 오직 파 잎사귀를 콧구멍 속에 넣어 공기를 통하게 하고 강물을 건넜다. 8월 1일에 양주(楊州)에 도달하였다.
경전과 율법을 환하게 깨우치고, 깊이 선(禪)의 요체에 들어갔다. 길흉을 점쳐서 예언하면, 참으로 영험하여 들어맞지 않음이 없었다. 그 밖에 많은 고전들과 제자백가(諸子百家)도 대부분 해박하게 섭렵하였다. 심지어 세간의 기술과 잡무에 이르기까지, 모두 갖추지 않은 것이 거의 없었다.
과거 『화엄경』의 대부(大部)가 글 뜻이 넓고 멀어서, 아주 먼 옛날부터 해석을 제대로 베푼 것이 없었다. 이에 현창은 곧 생각을 다하여 연구하고 탐색하며, 장구를 들고 비교하였다. 강설로 전해 지금에 이르렀으니, 이는 현창이 그 시초가 된다. 또한 그는 3론(論)에 빼어나 학자들의 종사(宗師)가 되었다.
전송의 문제가 깊이 찬탄과 존중을 더하여 초청해서 태자의 스승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가 두 번 세 번 굳게 사양하니, 제자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법사께서는 도를 넓히고 중생을 제도하여 불교를 널리 베풀고자 하셨습니다. 지금 제왕이 자기 마음을 비우고 초청하였습니다. 황태자도 예를 갖추어 공경하기를 생각합니다. 만약 도로써 성스러운 임금을 드높인다면, 사해가 그 공덕에 귀의할 것입니다. 지금 우뚝이 높이 앉아 사양만 하신다면, 장차 성문(聲聞)이란 소리를 듣지 않겠습니까?”
현창은 말하였다.
“이 일은 지혜 있는 사람과 더불어 말할 수 있는 일이다. 속인들과는 말하기 어려운 일이니라.”
태초(太初)의 사고가 일어나자, 비로소 그가 먼저 알고서 스스로 그렇게 처신하였음을 알았다. 이에 자리를 옮겨 형주에서 쉬다가 장사사(長沙寺)에 머물렀다.
당시 사문 공덕직(功德直)이 『염불삼매경(念佛三昧徑)』 등을 번역하였다. 현창이 그 문자를 교정하여 바로잡으니, 글 뜻이 매끄럽고 절묘하였다.
또한 그는 손을 펴면 향기가 감돌고, 손바닥 안에 물이 흘렀다. 그러나 아무도 그 이유를 헤아릴 수 없었다.
전송의 말년에 이르자 곧 배를 띄워 멀리 거동하여 서쪽 성도(成都)로 갔다. 처음에는 대석사(大石寺)에 머물렀다. 그러면서 곧 손수 그림을 그려 금강밀적(金剛密迹) 등 16신장상(神將像)을 만들었다.
승명(昇明) 3년(479)에 이르자 다시 서쪽 경계로 노닐었다. 민령(岷嶺)을 멀리서 구경하고, 이어 민산군(岷山郡)의 북부 광양현(廣陽縣)의 경계에서 제후산(齊后山)을 보았다. 마침내 그곳에서 세상을 마칠 뜻을 가졌다.
이어 바위를 의지하여 골짜기를 옆에 둔 곳에, 풀을 엮어 암자를 만들었다. 제자인 법기(法期)가 신인(神人)이 말을 타고 푸른 홑옷을 입고, 산을 한 바퀴 돈 다음 돌아와 탑을 조성할 자리를 지시하는 것을 보았다.
제(齊)의 건원(建元) 1년(479) 4월 23일에 사찰을 건립하고 이름을 제흥사(齊興寺)라 지었다. 바로 이 날이 제의 태조황제가 천명(天命)을 내려 받던 날이다.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만 리 떨어진 먼 곳에서 일치한 것이다.
당시 부염(傅琰)이 서쪽 성도에서 주둔하였다. 현창의 도풍과 법도를 흠모하여 스승으로 대우하며 공경하였다. 현창은 절을 세운 뒤에 곧 부염에게 편지를 보냈다.
“빈도가 형주(荊州)에 깃든 것이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노쇠하고 병은 오래되었으며, 독한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싫었습니다. 그 까닭에 멀리 민산의 경계에 몸을 의탁하여, 이 언덕을 집터로 삼았습니다.
이곳은 광양현의 동쪽에 있으며, 성과의 거리가 천 걸음입니다. 구불구불한 길이 길게 뻗어 중첩한 잿마루와 이어진 곳으로, 잿마루는 네 곳의 개울이 관문을 이루었습니다. 다섯 개의 봉우리가 줄지어 뻗어서 고을과 성곽을 품속에 안고, 세 방면을 돌아가며 바라볼 수 있습니다. 높은 산봉우리를 등에 얹어, 멀리 아홉 갈래 물줄기를 바라보는 곳입니다.
지난해 4월 23일에 처음으로 준공하여 삼태기를 엎었습니다. 지난해 겨울 이곳에 이른 방문객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날이 바로 폐하께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신 날이라 하였습니다.
무릇 들었습니다.
‘도가 태극과 배합하면 아름다운 상서[嘉瑞]가 저절로 나타나고, 덕이 양의(兩儀)와 같으면 신의 감응이 반드시 나타난다.’
그런 까닭에 하도낙서(河圖洛書)1)에는 주(周)나라가 천하를 가질 조짐이 있었고, 영석(靈石)에는 대진(大晋)의 징조가 표시되었던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해 보면, 이 산이 징험에 부합되는 것도 어찌 제나라 황제의 신령한 감응이 아니겠습니까?
시주께서 나라를 받드는 정이 깊으시어, 천운이 속하는 시대라는 징조가 있게끔 이르게 한 것을 마음에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찌 이 일을 내버려둘 수 있겠습니까? 문득 산찬(山贊) 한 편을 지어 어리석은 회포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산찬에서 찬한다.
우뚝한 제나라며 이곳의 산이여,
숨겨진 상서로움은 그 어느 옛날인가.
그윽하고 어두운 곳에서 탄생하였네.
황제의 호칭으로 밝아졌어라.
묏부리 성스런 공간을 실어
나라의 복된 조짐 드러낸 아름다운 이름
묏부리 구름은 평탄하고
뫼에 서린 노을은 화평하다.
바위 다듬어 절을 지으려고
재고 묶고 하였더니
처음 일 시작하는 날
자미궁(紫微宮)의 용 날랐어라.
도는 천지와 짝 이루어
사해가 고루 맑아졌으니
하늘과 함께 할 왕조의 운세
묏부리 신령함을 드러내었네.
峨峨齊山 誕自幽冥
潛瑞幾昔 帝號仍明
岑載聖宇 兆祚休名
巒根雲坦 峰岳霞平
規巖擬刹 度嶺締經
創工之日 龍飛紫庭
道?二儀 四海均淸
終天之祚 岳德表靈
부염이 곧 자세히 표를 올려 나라에 알렸다. 칙명으로 100호의 조세를 줄여, 현창의 봉록으로 공급하였다.
제의 표기장군(驃騎將軍)인 예장왕(豫章王) 의(?)가 형주(荊州) 삼협(三峽)에 주둔하면서, 사신을 파견하여 초청하였다. 하남(河南) 토곡혼(吐谷渾)의 임금도 멀리서 마음으로 경모하다가, 마침내 기병(騎兵) 수백 명을 보내 제산(齊山)에서 영접하려 하였다. 이미 동쪽으로 간 후라서 서로 만나지 못하였다.
제의 무제(武帝)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사도(司徒)인 문선왕 유계(劉啓)가 강릉에서 서울로 돌아왔다. 문혜(文惠)태자도 사람을 파견하여 불러 영접하였다. 이렇게 이미 칙령이 중첩하자 사양했으나, 이를 면할 수 없었다. 이에 배를 띄워 동쪽으로 내려갔다. 도중에 병이 나서 병을 지닌 채 서울에 이르니, 성이 기울 만큼 대중이 길을 막고 바라보았다.
영근사(靈根寺)에 머물다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9세이다. 이 해는 제의 영명(永明) 2년(484) 11월 16일이다. 곧 종부(鍾阜) 독룡산(獨龍山) 앞에 묻었다. 임천(臨川)의 헌왕(獻王)이 비를 세우고, 여남(汝南)의 주옹(周?)이 비문을 지었다.
10) 석승원(釋僧遠)
승원의 성은 황(皇)씨이며, 발해(渤海)의 중합(合)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북쪽 나라의 황보(皇甫)씨이다. 바다 모퉁이로 피난 온 까닭에, ‘보(甫)’자는 없애고 황(皇)자만 남겨 성씨로 삼은 것이다.
어려서부터 도를 즐겨 나이 열여섯에 출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부모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푸성귀를 먹으며, 새벽에서 밤까지 참회와 독송을 그치지 않았다. 열여덟 살 때 비로소 도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 받았다.
당시 사문 도혜(道慧)가 높은 재주와 빼어난 덕으로 명성이 높아, 바다와 태산을 덮을 정도였다. 승원은 그를 따라 수학하였다. 논리를 따지는 데 뛰어나게 밝고, 대승과 소승을 꿰뚫었다.
전송의 대명(大明) 연간(457~464)에 양자강을 건너서 팽성사(彭城寺)에 머물렀다. 승명(昇明) 연간(477~479)에는 소단양(小丹陽)의 우락산(牛落山)에 정사를 세워, 용연정사(龍淵精舍)라 이름 지었다.
승원은 나이 서른한 살 때 비로소 청주(靑州)의 손태사(孫泰寺)에서 남쪽에 얼굴을 두어 강설하였다. 말과 논리가 맑고 유창하며, 풍채와 용모가 빼어나게 반듯하였다. 앉아서 강설을 듣는 4백여 명의 사람이 기뻐 감복하지 않음이 없었다.
낭야(瑯?)의 왕승달(王僧達)은 재능이 당세에 희귀한 인물이었다. 승원의 평소의 도풍을 듣고는 초청해서 중조사(衆造寺)에 머물렀다.
승원은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하여, 자기 몸을 위해 남겨두는 재물이 없었다. 현소(玄紹)라는 비구가 늘 돈과 패물을 공급하였다. 그러나 승원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한번은 청원(靑園)으로 가다가, 마을 안에 당시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불쌍하게 생각하여 그들을 찾아갔다.
시체와 함께 병을 앓은 사람도 몇 사람 있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가까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승원은 깊이 가슴이 아프고 슬픈 생각이 더하였다. 그리하여 차마 떠나지 못하고 그곳에 머물렀다. 인하여 마을에서 구걸하며 죽은 사람들을 염하였다.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을 어루만지니, 참으로 은혜가 골육보다 더하였다.
전송의 신안(新安) 효경왕(孝敬王) 유자란(劉子鸞)이 자기를 낳다가 죽은 어머니인, 은귀비(殷貴妃)를 위하여 신안사(新安寺)란 절을 지었다. 세 고을에서 영명하고 현철한 이들을 선발하여 초청하도록 명하였다.
승원은 소산사(小山寺)의 법요(法瑤)와 남간사(南澗寺)의 현량(顯亮)과 함께 부름을 받았다. 모두가 승원을 추천하여 우두머리로 삼게 하였다.
대명(大明) 6년(462) 9월에 담당 관리가 나라에 아뢰었다.
“신이 듣기로는 깊은 곳에서 팔짱을 끼고 웅크리는 사람에게, 크게 빼어난 공덕을 기대할 것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먹 쥐고 꿇어앉아 땅에 납작 엎드린다고, 어찌 그것만이 공경하는 것이겠습니까?
장차 사방을 밝게 열어 펼치고, 팔방을 묶어 제어하여야 합니다. 그 까닭으로 비록 유교와 법가의 지파라든가, 명가나 묵가의 조류라 할지라도, 어버이를 숭상하고 윗사람에게 엄숙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그 실마리에 어김이 없습니다.
오직 불교만이 그 가르침의 유래가 임금의 아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종지가 아득히 멀고 미묘한 말씀이 깊은지라, 글에 구애되면 도를 가리므로, 말세가 되어서는 더욱 이런 현상을 부채질합니다. 마침내 나라의 모범적인 제도를 능멸하고 뛰어넘어, 존귀한 왕족에 대해서도 누워서 대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방편을 따르는 묘한 자취를 잃고, 제도와 교화의 깊은 아름다움을 헛갈리게 합니다.
무릇 불법이란 겸손함과 검약함으로 스스로를 다스리고, 은혜로움과 경건한 마음으로 도를 위합니다. 불경비구(不輕比丘)는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절하고, 목련(目連) 사문도 어른을 만나면 예를 올렸습니다. 어찌 사부대중에게는 무릎을 꿇으면서 양친에게 절을 생략하거나, 나이 많은 승려에게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만승천자에게는 곧바로 마주 꼿꼿하게 서 있거나 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런 까닭에 함강(咸康) 연간에 처음 논의를 제기하고, 원흥(元興) 연간에 이를 이어받았으나, 편파적인 무리들에게 굴복당하여 남아 있던 도마저 좌절되었습니다.
지금은 큰 원천의 물이 먼 곳까지 씻어내어 뭇 흐름이 거울처럼 우러러보며, 아홉 신선이 보물을 선사하고 온갖 신이 직분을 따릅니다. 그런데도 궁성 가까이 있는 곳에서마저 신하의 예를 거부하는 백성이 포함되어 있고, 제왕의 섬돌과 자리 사이에도 예법에 항거하는 손님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범되는 위엄을 투명하게 하나로 통일하여, 큰 법칙을 소상하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서 두렵습니다. 저희들은 논의하여 승려들이 접견할 때도 모두 마땅히 경건한 예의와 공경하는 모습을 다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본래 풍속에 의하면 아침 예불에도 차례가 있거니와, 대승의 방편에서는 불교에서 먼 곳까지도 아울러 겸한다고 합니다.”
황제는 비록 자못 불법을 믿기는 하였다. 그러나 오랫동안 스스로 교만하고 방종하였다. 그런 까닭에 상주문이 올라가던 날, 곧 조서를 내려 재가[可]하였다.
승원은 이때 탄식하였다.
“내가 머리를 깎고 사문이 된 것은, 본래 출가하여 도를 구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제왕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그 날로 병을 핑계대고 사퇴하였다. 이어 자취를 상정림산(上定林山)에 숨겼다.
경화(景和) 연간(465)이 되어 이 제도가 점점 가라앉자, 옛 법[舊章]으로 되돌려 따랐다.
전송의 명제(明帝)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승원을 초청하여 스승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끝내 이룰 수 없었다. 그 후 산에 살면서 자취를 감춘 손님들과, 세간에 오만하여 구름 밖에 사는 선비들이, 그의 산문을 찾아와 우러르고, 그의 선실에 공경함을 펼쳐 마지않았다.
여산의 하점(何點)·여남(汝南)의 주옹(周?)·제군(齊郡)의 명승소(明僧紹)·복양(?陽)의 오포(吳苞)·오국(吳國)의 장융(張融) 등도 모두 몸을 던지고 발길을 이어, 그에게 불경을 자문 받았다.
그 후 전송의 건평왕(建平王) 유경소(劉景素)가 생각하였다.
“서현사(栖玄寺)는 선왕이 시작해서 지은 절이지만, 이 절은 인간세계 밖의 존재이다.”
그리하여 승원을 그곳에 거처하게 하고자, 정중하게 두 번 세 번 초청하였다. 그러나 끝내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제(齊)의 태조(太祖)황제가 제왕의 자리에 올랐을 때, 산에 들어와 승원을 찾았다. 그러나 승원은 늙고 병들어, 발을 걸상 아래로 드리울 수 없다고 굳게 사양하였다. 태조황제는 몸소 스스로 예를 낮추어 방문하여, 소상하게 자문 받았다.
제왕의 자리를 물려받기에 이르자, 다시 제왕의 가마가 행차하여 곧 승원의 방을 찾아보고자 하였다. 승원의 방과 불전이 협소하여 큰 가마 덮개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태조황제가 승원을 만나고자 하였다. 승원은 지조를 지키고 움직이지 않았다. 태조는 사람을 보내 눕고 일어나는 근황을 물어본 다음에야, 발길을 돌려 절을 떠났다. 그렇지만 승원은 일찍이 한번도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병으로 눕자 문혜왕(文惠王)·문선왕(文宣王)이 스승의 예를 갖추어 받들며, 자주 찾아가 안부를 물었다. 당시의 귀족 공경대부와 선비들도 찾아가고 돌아오는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
승원은 50여 년을 푸성귀를 먹으며, 일관하여 20여 년간 개울물을 마셨다. 마음은 법의 뜨락에서 노닐고, 멀리 인간 세계 밖을 생각하였다. 높이 산문을 걸어 다니면서, 쓸쓸히 세상 밖에서 살았다.
제의 영명(永明) 2년(484) 정월에 정림상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1세이다. 황제는 사문 법헌에게 편지를 보냈다.
“승원 스승[和尙]이 세상을 떠난 것을, 나는 밤중에 이미 나름대로 알았다. 승원 스승이 이번 간 곳은 매우 좋은 곳이다. 모든 아름다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다시 더 슬퍼할 일이 없다. 늦게나마 한두 번 법사를 만나서, 비로소 상서로운 꿈을 막 펼치려 하였다. 지금은 바로 그를 위하여 공덕을 지어야 할 때이다. 필요한 물건은 자세히 상소문에 갖추어 보내는 것이 좋겠다.”
또 경릉(竟陵)의 문선왕(文宣王)도 편지를 보냈다.
“승원 법사는 일대의 명덕으로 뜻과 절개가 맑고 높았다. 산에 숨어 아름다움을 심어 사해가 그의 도풍을 맛보았다. 나는 어리석은 사람으로 외람되게 스승으로 모시는 은혜를 입었다. 바야흐로 우러러 어진 교화를 물어보고, 번뇌의 생각을 씻어내고자 하였다. 뜻밖에 이번 병으로 갑자기 다른 세상의 사람이 되셨으니, 비통한 마음을 너무나 참을 수가 없구나.
승원 스승[和尙]은 일과 행실이 원만히 통하여, 오랜 겁 가운데서도 찾아보기 드문 분이다. 나는 그 분이 남긴 형체와 그림자의 자취를, 대중 승려의 묘 가운데 섞어 안치하고 싶지 않다. 따로 다른 땅을 점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바야흐로 사찰을 세워 그 기이함을 표시하고, 돌에 새겨 공덕을 빛내야 마땅하다.”
이에 곧 산의 남쪽에 분묘를 경영해 조성하고, 비를 세워 공덕을 칭송하였다. 태위(太尉) 낭야왕(瑯?王) 유검(劉儉)이 비문을 지었다.
법령(法令)·혜태(慧泰)
당시 정림상사의 법령·혜태가 있었다. 모두 경론에 빼어나 승원의 명성을 이어갔다.
11) 석승혜(釋僧慧)
승혜의 성은 황보(皇甫)씨이다. 본래는 안정현(安定縣) 조나(朝那) 사람으로, 덕이 높은 선비인 황보밀(皇甫謐)의 후예이다. 그의 선조가 피난 와서 양양(襄陽)에 깃들어 살면서, 대대로 으뜸가는 족속이 되었다. 승혜는 어려서 출가하여 형주(荊州)의 죽림사(竹林寺)에 머물렀다. 담순(曇順)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담순은 여산 혜원(慧遠)의 제자로서 본래부터 높은 명성이 있었다. 승혜는 그를 받든 이후로 교리의 이해에 마음을 오로지했다. 나이 25세에 이르자 『열반경』·『법화경』·『십주론(十住論)』·『유마경』·『잡심론(雜心論)』 등을 강의할 수 있었다. 천성적으로 기억력이 뛰어나며, 도강(都講)의 자리를 번거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문구를 가려내 분석하여, 펼쳐내는 말은 물 흐르듯 유창하였다.
또한 『노자』와 『장자』를 잘하여 불교를 위한 스승으로 삼았다. 덕이 높은 선비인 남양(南陽)의 종병(宗炳)·유규(劉?) 등과도 친구로서 좋은 사귐이 있었다. 종병은 늘 찬탄하였다.
“서하(西夏)에 법륜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아마도 승혜에게 달려 있을 것이다.”
오국(吳國)의 장창(張暢)도 서쪽 나라를 지나며 노닐었다. 곧 승혜를 찾아가 사귀기를 청하였다.
제(齊)나라 초기에 칙령으로 형주(荊州)의 승주(僧主)가 되었다. 고상한 풍모가 빼어났다. 또한 도로써 세상을 바로잡는 데 협조하여 도운 공 때문에, 멀고 가까운 곳에 명망이 있었다. 노쇠하자 항상 가마를 타고 강석을 찾아갔다. 이를 보는 사람들이 그를 대머리 관리[禿頭官家]라 불렀다. 현창(玄暢) 법사와 동시대의 인물이었으므로, 당시에 그들을 흑의이걸(黑衣二傑)이라 말하였다.
제의 영명(永明) 4년(486)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9세이다.
혜창(慧敞)
그 후 혜창도 지조가 본래 곧고 반듯하였다. 승혜를 대신하여 승주(僧主)가 되어, 계속 공덕의 효능이 있었다.
승수(僧岫)
승혜의 제자 승수도 역시 배움으로 드러났다. 정진에 힘쓰다가, 피와 관련한 질병으로 세상을 마쳤다.
12) 석승유(釋僧柔)
승유의 성은 도(陶)씨이며, 단양(丹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고결하여 티끌세상을 벗어날 지조가 있었다. 아홉 살에 숙부를 따라 유학하였다. 집안이 대대로 가난하여 나물밥·콩국으로도 배를 채울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두터운 뜻은 더욱 견고하여, 곤궁함 속에 살아도 뜻을 고치지 않았다.
그 후 출가하여 홍칭(弘稱)의 제자가 되었다. 홍칭은 성이 여(呂)씨이며, 낙양 임위(臨渭) 사람이다. 그의 배움은 경론에 뛰어나, 명성이 일찍이 세상에 드러났다. 승유는 그를 받든 이후로 곧 계율에 부지런히 정진하였다. 선정과 지혜도 자세히 힘썼다. 대승의 많은 경전과 대승·소승의 모든 책의 그윽한 근원을 철저히 비추어 보고, 가르침의 요체를 다 꿰뚫었다.
나이 스물이 넘어서자 곧 강석에 올랐다. 한 시대의 이름난 유생들이 모두 몸을 던져 북쪽으로 얼굴을 두어 바라봤다. 그 후 동쪽 우혈(禹穴: 會稽)로 노닐다가 혜기(慧基) 법사를 만났다. 그의 초청으로 성방사(城傍寺)에 머물면서 하안거 내내 강론하였다.
그 후 섬주(剡州) 백산(白山)의 영취사(靈鷲寺)로 들어갔다. 그가 아직 그곳에 이르지 않은 날 밤에, 승서(僧緖)라는 사문이 꿈에 신인(神人)을 만났다. 붉은 깃발과 흰 갑옷을 입은 신장이 산에 가득히 나왔다. 이에 승서가 그 까닭을 물으니 신인이 대답했다.
“법사가 곧 이곳에 들어오기 때문에, 나와서 받들어 맞이하는 것이다.”
그 이튿날 아침 사람이 오기를 기다렸다. 과연 승유가 그곳에 이르렀다.
이윽고 그는 그곳의 산문을 쓸고 꾸며, 거기에서 세상을 마칠 뜻을 가졌다. 경전을 부양하고 학문을 따르려는 선비들이 숲의 나무처럼 많이 모였다.
제(齊)의 태조황제가 창업한 첫날과 세조(世祖)황제가 황제자리를 이어받던 날, 모두 사찰을 건립하고, 한편으로 교리를 전공한 승려를 구하였다. 승유가 나이가 많고 평소 세상에 알려져 있으므로, 부르는 편지가 해마다 이르렀다.
문선왕(文宣王) 등 여러 왕족들도 두 번 세 번 초청하였다. 마침내 다시 서울로 나와 정림사(定林寺)에 머물렀다. 몸소 우두머리가 되자, 사방 먼 곳에서도 흠모하고 감복하며 사람과 신마저 찬미하였다. 문혜왕(文慧王)과 문선왕(文宣王)도 모두 그를 받들어 입실제자가 되었다.
승유는 덕을 지니고 종사의 자리에 올라, 이를 맡아 사양하지 않았다. 그리고 항상 안양정토의 나라에 태어나기를 소원하였다. 매양 퇴임관리들이 죽었다는 소식[西次]을 접할 때마다, 곧 얼굴을 찡그리고 합장하였다.
죽음에 이르러 몸에 병이 없었다. 오직 제자들에게만 말하였다.
“나는 아마도 떠날 것이다.”
이어 땅에 자리를 깔고, 서쪽을 향해서 경건하게 절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 해는 제(齊)의 연흥 1년(494)이다. 그 때 나이는 64세이다. 곧 산의 남쪽에 묻었다.
사문 승우(僧祐)는 승유와 어릴 때 산에서 자라, 함께 긴 세월을 머물렀다. 자주 도가 깃든 마음에 고개 숙이고 미리 불법의 맛에 참여한 이이다. 그가 승유를 위하여 묘소에 비를 세웠다. 동완(東莞) 유협(劉?)이 비문을 지었다.
승유의 제자 승소(僧紹)도 역시 곧고 바르며 학업이 있었다.
승발(僧拔)·혜의(慧熙)
당시 종산(鍾山)의 산자정사(山茨精舍)에는 승발과 혜의가 있었다. 모두 어린 나이에 빼어나게 나아가서, 어려서부터 높은 명성이 드러났다. 그러나 아름다운 일에 나아가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승발은 『칠현론(七玄論)』을 지었다. 지금 세상에 행한다.
13) 석혜기(釋慧基)
혜기의 성은 우(偶)씨이며, 오(吳)나라 전당(錢塘)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마음이 빼어나고, 기민한 슬기로움이 보통 사람을 넘어섰다. 처음 기원사(祇洹寺)의 혜의(慧義) 법사에게 의지하여 따랐다. 나이 열다섯 살이 되자, 혜의 법사는 그의 정신과 풍채를 아름답게 여겼다. 전송의 문제(文帝)에게 계(啓)를 올려 도첩(度牒)을 구하여 출가하게 하였다.
이에 문제가 그를 불러 보고 좌우에 물어 보고는 좋다고 여겼다. 곧 기원사에 명령하여 그를 위한 법회를 열어 출가하게 하였다. 황제의 가마가 친히 행차하니, 공경대부들도 모두 모여들었다.
혜기는 이미 뜻을 법문에 두었으므로, 수행에 힘쓰는 것이 정성되고 간절하였다. 새벽에서 밤까지 아울러 열심히 공부하여 많은 경전을 환히 해득하였다.
그 후 서역의 법사인 승가발마(僧伽跋摩)가 선(禪)과 율(律)을 널리 돕고자 송나라 경내에 찾아왔다. 이에 혜의 법사가 혜기에게 명령하여, 그의 입실제자가 되어 공양하고 섬기게 하였다.
나이 만 20세가 되자 채주(蔡州)로 건너가서 구족계를 받았다. 이 때 승가발마가 혜기에게 말하였다.
“너는 곧 강남 지방의 도의 왕[道王]이 될 것이다. 오래도록 서울에 머물 필요가 없다.”
이에 4·5년간을 강석을 떠돌아다니면서, 많은 법사들을 두루 방문하였다. 『소품경』·『법화경』·『사익경』·『유마경』·『금강반야경』·『승만경』 등에 빼어났다. 그 현묘한 진리를 생각하고 탐구하여, 그윽하게 엉킨 진리를 투철하게 비춰 보았다. 문장을 제시하고 문구를 비교함에, 그 아름다움이 옛날을 뛰어넘었다.
혜기의 스승인 혜의는 이미 덕이 있어, 사람들의 종사 자리에 있었다. 형주(荊州) 땅의 도의 왕[道王]이라서, 선비와 서민들이 귀의하였다. 이롭게 공양을 하려는 사람들이 분분히 모여들었다. 그는 혜기의 아름다운 덕이 칭찬할 만하다 하여, 곧 손잡고 함께 생활하였다.
혜의 법사가 죽은 뒤에 이르러, 생활을 뒷받침하는 여러 물건들이 거의 백만 냥에 가까웠다. 혜기는 법으로 보아 마땅히 그 절반을 얻었지만, 모두 복을 위하여 희사하였다. 오직 더럽고 낡은 옷과 그릇만을 취하여, 그것을 겨드랑이에 끼고 동쪽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전당(錢塘)의 현명사(顯明寺)에 머물다가, 얼마 후 회계(會稽)로 가서 산음(山陰)의 법화사(法華寺)에 머물렀다. 학문을 숭상하는 학도들이 그의 발자취를 따라와서 도를 물었다. 이에 삼오(三吳)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경전의 가르침을 강론하였다. 그러니 학도로 찾아오는 사람이 1천여 명에 이르렀다. 전송의 태종황제가 사신을 파견하여 영접하려고 초청하였다. 그러나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원휘(元徽) 연간(473~477)에 다시 부름을 받았다. 비로소 길을 떠나 절강(浙江)을 건너다가, 다시 병이 도져서 돌아왔다.
이어 회계(會稽) 구산(龜山)에 보림정사(寶林精舍)를 세웠다. 손수 벽돌을 포개고 자신이 공사를 지휘하였다. 까마득히 높은 곳에 나무를 걸쳐서 험한 지세를 타고 지으니, 산의 형상을 더욱 지극하게 하였다. 처음에 3층으로 세웠다. 그러나 장인의 솜씨가 조금 서툴러서 뒤에 하늘의 벼락을 맞아 허물어졌다. 허물어진 곳에 다시 보수를 가하고 꾸며서, 마침내 그 곱고 아름다움을 다하였다.
혜기는 일찍이 꿈에 보현보살을 만나, 보현보살에게 스승[和上]이 되어 달라고 요청한 일이 있었다. 절이 준공된 뒤에 이르러, 보현보살상과 아울러 여섯 이빨 난 하얀 코끼리의 형상을 조성하였다. 곧 보림정사에서 21일간의 참회하는 재를 마련하였다. 선비와 서민이 물고기 비늘처럼 빽빽이 모여들어, 헌납하고 봉양하는 것이 뒤를 이었다.
그 후 주옹(周?)이 섬주(剡州)를 다스리자, 혜기를 초청하여 강설하였다. 주옹은 본래 배움에 공이 있었다. 특히 불교 교리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혜기를 만나 찾고 파헤치자, 날로 새롭고 남다름이 있었다.
유헌(劉?)·장융(張融)도 나란히 스승의 예로 섬기고, 교리의 가르침을 숭상하였다. 사도(司徒)인 문선왕(文宣王)도 그의 도풍을 흠모하고 덕을 그리워하였다. 그리하여 정중한 편지를 보내, 『법화경』의 근본 되는 가르침을 물었다.
이에 혜기는 곧 세 권의 『법화의소(法華義疏)』를 지었다. 『문훈의서(門訓義序)』 33과(科)를 짓는데 이르러서는, 간략하게 방편의 가르침을 펼쳐 서술하였다. 공(空)·유(有)라는 두 말을 회통하였다. 그리고 『유교경(遺敎徑)』 등에 주석을 달았다. 모두 세상에 행한다.
혜기의 덕이 이미 삼오(三吳) 지방을 덮고, 명성이 나라 안에 치달렸다. 그러자 곧 황제의 칙명으로 승주(僧主)가 되어 10성(城)을 맡았다. 이것이 곧 우리 동쪽 나라에 승정(僧正)이란 제도가 생긴 시초였다.
이에 그는 조용히 강의하고 이끌면서, 선정과 지혜를 가르쳐 힘쓰게 하였다. 그러니 사방 먼 곳에서도 그의 도풍을 따랐다. 오부대중이 귀의하고 복종 하였다.
혜기는 성품이 매서우면서도 따뜻하고, 기개는 맑으면서도 온화하였다. 그런 까닭에 문인으로 참여한 사람 모두가 전전긍긍하지 않음이 없었다.
제(齊)의 건무(建武) 3년(496) 11월에 성방사(城傍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85세이다.
처음 혜기가 병으로 눕자, 제자의 꿈에 몇 사람의 범승(梵僧)이 섬돌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물었다.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대승국(大乘國)에서 혜기 스승[和尙]을 받들어 맞이하기 위해서 왔다.”
그 후 며칠 만에 혜기가 죽었다. 법화산 남쪽에 묻었다. 특진관(特進官)인 여산(廬山)의 하윤(何胤)이 그를 위하여 비문을 보림사에서 지어, 그의 남긴 덕을 새겼다.
승행(僧行)·혜욱(慧旭)·도회(道恢)
혜기의 제자인 승행·혜욱·도회 등도 모두 학업이 넉넉하고 깊었다. 차례로 강론을 부양하여 각기 문도들을 거느리고, 스승의 법도가 남긴 앞 자취를 이어갔다.
혜영(慧永)
그 후 사문 혜량(慧諒)이 승정의 임무를 이어받아 관장하였다. 혜량이 죽은 후에는 사문 혜영이 이었다. 혜영은 고상한 풍모가 아름답고 청아하였다. 또한 덕스런 행실이 맑고 엄숙했다. 그리하여 많은 경전을 마음대로 요리하여, 당시 강설의 임무를 맡았다.
혜심(慧深)·법홍(法洪)
혜영의 뒤로는 사문 혜심이 승정이 되었다. 그 역시 혜기의 제자이다. 혜심은 동학인 법홍(法洪)과 더불어 모두 맑게 계율을 지킨다고 존중받았다. 혜심의 뒤로는 사문 담흥(曇興)이 승정이 되었다. 그도 침착하게 살피는 재간과 도량이 있었다.
14) 석혜차(釋慧次)
혜차의 성은 윤(尹)씨이며, 기주(冀州) 사람이다. 처음 출가하여 지흠(志欽)의 제자가 되었다. 후에 서주(徐州)의 법천(法遷)을 만났다. 법천은 당시 세상에서 이해력으로 꿰뚫었다. 지흠이 곧 혜차를 그에게 부탁하여, 법천을 따라가 남쪽 경구(京口)에 이르러 죽림사(竹林寺)에 머물렀다.
나이 열다섯 살이 되자 법천을 따라 팽성으로 돌아왔다. 비록 사미(沙彌)의 나이에 불과하였지만 배움을 다스림에 게으름이 없었다. 맑게 보는 것이 무리를 통하여 홀로 우뚝 빼어났다.
나이 열여덟이 되자 경론에 대한 이해가 뛰어나, 이름이 서주 땅에 자자하였다. 구족계를 받기에 이르자, 일과 지조가 더욱 깊어졌다. 자주 『성실론(成實論)』 및 3론을 강의하였다. 대명(大明) 연간(457~464)에 서울로 나와, 사사(謝寺)에 머물렀다.
전송의 말기와 제나라의 초기(478~479)에 이르자, 덕에 귀의하는 이들이 점차 넓어졌다. 강석을 한 번 열 때마다, 곧 도인과 속인들이 달려서 찾아갔다.
사문 지장(智藏)·승민(僧旻)·법운(法雲) 등은 모두 어린 나이에 준수하고 명랑하여, 지혜의 슬기로움이 천연적으로 일어난 사람들이다. 모두 혜차를 찾아가 수업을 청하였다. 문혜왕(文慧王)·문선왕(文宣王)도 모두 스승의 예로 그를 공경하여, 네 가지 공양물을 공급하였다.
영명 8년(490)에 『백론(百論)』을 강의하다, ?파진품(破塵品)?에 이르러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57세이다.
승보(僧寶)·승지(僧智)·법진(法珍)·승향(僧嚮)·승맹(僧猛)·법보(法寶)·혜연(慧淵)
당시 사사(謝寺)에는 또 승보·승지가 있고, 장락사(長樂寺)에는 법진·승향·승맹·법보·혜연 등이 있었다. 모두가 한 시대의 영명하고 현철한 인물들로, 당시 논의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15) 석혜륭(釋慧隆)
혜륭의 성은 성(成)씨이며, 양평(陽平) 사람이다. 어려서 가난하게 살아 배움에 스승과 벗이 없었지만, 우뚝하게 스스로 깨달았다. 나이 스물세 살에 비로소 출가하였다. 십여 년 동안 마음을 불법에 집중시켜 수많은 경전을 뛰어나게 꿰뚫었다. 전송의 태시 연간(465~471)에 서울로 나와 하원사(何園寺)에 머물렀다.
혜륭은 이미 생각이 말의 테두리 밖에 사무쳤다. 맑은 논의를 잘해, 기회를 타서 대항하고 견주었다. 한 번 답변하면 반드시 상대의 경계를 꺾었다. 전송의 명제(明帝)가 초청하여 상궁사(湘宮寺)에서 『성실론』을 개강하니, 책을 걸머지고 도를 묻는 사람이 8백여 명이었다.
그 후에도 왕후(王候) 귀족들이 여러 번 초청하여 강설하였다. 옛날의 여러 논리에서 그 자리를 맴돌며 막혀 있던 곳을, 혜륭은 다시 밝혀내서 열고 펼쳐, 환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어 그는 참다운 법으로 번뇌를 끊는 이해[實法斷結義] 등을 세웠다.
여남(汝南)의 주옹(周?)은 그를 지목하여 말하였다.
“혜륭은 조용하고 한가하여 오싹하고 성근 것이, 마치 서리 아래에 서 있는 소나무나 대나무와 같다.”
영명(永明) 8년(490)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2세이다.
지탄(智誕)
당시 강서(江西)에 지탄이 있었다. 역시 경론에 빼어나 혜륭과 덕이 비등하고 명성을 나란히 하였다. 각기 이름을 양자강의 두 언덕에서 날렸다.
승변(僧辯)·승현(僧賢)·도혜(道慧)·법도(法度)
당시 하원사에는 또 승변·승현·도혜·법도 등이 있었다. 모두 경론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공업이 칭찬할 만하였다.
16) 석승종(釋僧宗)
승종의 성은 엄(嚴)씨이며, 본래 옹주(雍州)·빙익(憑翌) 사람이다. 진(晋) 나라가 망하고 어지러워지자, 그의 4대 조부가 진군(秦郡)으로 옮겨 살았다. 아홉 살 때 도원(道瑗)의 제자가 되어, 지혜의 일을 묻고 들었다. 나중에 다시 도빈(道斌)·승제(僧濟) 두 법사에게서 도를 전수받았다.
『대열반경』 및 『승만경』·『유마경』 등에 빼어났다. 강설을 베풀 때마다, 듣는 사람이 거의 천여 명에 가까웠다. 미묘한 말솜씨는 다함이 없고, 임기응변도 끝이 없었다. 그러나 천성에 맡겨 방탕하여, 자주 의식 법규를 뛰어넘어 마음에 들면 곧 행하는 등 구애받지 않았다. 율법을 지키고 절조를 오로지 지키는 사람들 모두가 옳고 그르다는 논의를 일으켰다.
문혜태자는 곧 죄를 물어 쫓아내서 다른 곳으로 추방하려 하였다. 그러나 꿈을 통하여 감응이 있어, 이에 생각을 고쳐 그에게 귀의하였다.
북위(北魏)의 황제 원굉(元宏, 471~499)은 멀리서 그의 덕스런 풍모에 고개 숙였다. 여러 번 편지를 보내고는 초청하여 개강하게 하였다. 그러나 제(齊)의 태조(太祖)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승종은 『열반경』·『유마경』·『승만경』 등의 강론을 거의 백 번 가까이 두루 강의하였다. 그를 따라 찾아오는 신도들의 보시로 태창사(太昌寺)를 지어 그곳에 머물렀다.
건무(建武) 3년(496) 머무르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59세이다.
담준(曇准)·법신(法身)·법진(法眞)
이에 앞서 북쪽 나라의 담준 법사가 승종이 특히 『열반경』에 빼어나다는 말을 듣고, 곧 남쪽으로 노닐어 그의 강론을 보고 들었다. 그러나 이미 남쪽과 북쪽은 사정이 다르고, 생각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 이에 곧 따로 다시 강의하여 많은 북쪽 선비들의 스승이 되었다. 그 후 담준은 상궁사(湘宮寺)에 거처하면서, 같은 절의 법신·법진과 더불어 당시의 종사가 되었다.
혜령(慧令)·법선(法仙)·법최(法最)·승경(僧敬)·도문(道文)·승현(僧賢)
당시 안락사(安樂寺)에는 혜령·법선·법최 등이 있고, 중흥사(中興寺)에는 승경·도문이 있으며, 천축사(天竺寺)에는 승현이 있었다. 모두 논리를 따지는 데 빼어나, 나라[上國]에서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17) 석법안(釋法安)
법안의 성은 필(畢)씨이며, 동평(東平) 사람이다. 위(魏)의 사예(司隸) 교위(校尉) 필궤(畢軌)의 후예이다. 일곱 살에 출가하여 백마사(白馬寺)의 혜광(慧光)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혜광은 어려서부터 시원하게 빼어나고, 내외의 학문에 두루 뛰어나, 이치를 참구하여 아는 것이 많았다.
법안은 사미의 나이에 있었으나, 곧 정신이 빼어나게 뛰어났다. 당시 장영(張永)이 도빈(道斌) 법사를 초청하여 강설을 청하였다. 아울러 몸을 굽혀 이름난 학자를 불렀다. 이 때 장영이 도빈에게 물었다.
“서울에 다시 탁월한 젊은이가 있습니까?”
그러자 도빈이 대답하였다”사미인 도혜(道慧)·법안(法安)·승발(僧拔)·혜희(慧熙)가 있습니다.”
장영은 곧 요청하여 도혜에게 『열반경』 강의를 되뇌게 하고, 법안에게 『불성론(佛性論)』을 진술하게 하였다. 신색이 여유로워 서두부터 쏟아 내림에 남김이 없었다. 장영이 물어보았다.
“나이가 몇 살이냐?”
도혜는 열아홉 살이라고 대답하고, 법안은 열여덟 살이라고 대답하였다. 장영은 이에 감탄하였다.
“예전에 부풍(扶風)의 주발(朱勃)이 열두 살에 책을 읽고 시를 읊어, 당시 사람들이 재간둥이라고 불렀다. 오늘 이 두 도인은 이해력이 뛰어난 소년들인, 의소(義少)라 할 만하다.”
이에 그들의 명성이 서울 조정에 밝혀져, 이름이 사방 먼 곳까지 흘러갔다. 그 후 서른 살에 이르자, 전문적으로 법을 강의하는 자리를 맡았다.
왕승건(王僧虔)이 외지로 나가 상주(湘州)에 주둔하자, 손잡고 함께 동행하였다.
그 후 남쪽 번우(番禹)로 옮겼다. 바로 승유(僧攸)의 『열반경』 강의를 만났다. 법안이 그와 몇 번 묻고 논의하니, 승유는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하여 법석을 양보하였다. 그곳에 머무는 2년 동안 법사를 서로 이어갔다. 그러다가 영명 연간(483~493)에 서울로 돌아와, 중사(中寺)에 머물렀다.
『열반경』·『유마경』·『십지론』·『성실론』 등을 강의하여, 끊임없이 강설을 이어갔다. 사도(司徒) 문선왕(文宣王)과 장융(張融)·하윤(何胤)·유회(劉繪)·유헌(劉?) 등이 모두 그의 글과 논리에 마음으로 복종하여 함께 법의 친구가 되었다.
영태 1년(498) 중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45세이다. 그는 『유마경』과 『십지론』의 의소(義疏)를 짓고, 아울러 『승전(僧傳)』 다섯 권을 지었다.
경도(敬道)·광찬(光贊)·혜도(慧韜)·도종(道宗)
당시 영기사(靈基寺)에는 경도·광찬·혜도가 있고, 와관사(瓦官寺)에는 도종이 있었다. 이들 역시 당시의 이름난 인물들로 배우는 이들이 사모하였다.
18) 석승인(釋僧印)
승인의 성은 주(朱)씨이며, 수춘(壽春)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마음이 침착하고 소상하여, 고행을 편안히 여기며 배움에 힘썼다. 처음 팽성(彭城)에 노닐며, 담도(曇度)로부터 3론을 전수받았다. 담도는 이미 한 시대의 독보적인 존재로서, 사방 먼 곳에서 그에게 의지하여 모여들었다. 승인은 그의 가르침을 받고 맛보며 닦아서, 그윽이 깊은 뜻을 궁구하였다.
그 후 여산(廬山)으로 나아가서 혜룡(慧龍)으로부터 『법화경』을 묻고 전수받았다. 혜룡도 역시 당시 세상에 이름이 드러나, 『법화경』의 종지를 전파하였다. 승인은 유달리 공부를 구축함에 철저하여, 홀로 새롭고 특이한 것을 표출하였다. 이에 동쪽 서울로 가서 중흥사(中興寺)에 머물렀다. 이에 다시 『열반경』과 그 밖의 경전에 관하여 생각을 다져나갔다.
전송의 대명 연간(457~464)에 징군(徵君) 하점(何點)이 승려들을 초대하였다. 큰 집회를 열고 승인을 초청하여 강사로 삼았다. 강설을 듣는 사람이 7백여 명이었다
사도(司徒)인 문선왕(文宣王)과 동해의 서효사(徐孝嗣)도 나란히 그의 고상한 풍모에 고개 숙여 공경하며, 여러 번 불러서 강설을 요청하였다. 승인은 계율의 행실이 맑고 엄격하며, 품성이 화목하였다. 용서하는 마음을 머금고 인욕에 안주하여,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당시 기백을 뽐내는 무리들이 질문하고 논의하는 도중에, 혹 멋대로 비웃고 우스갯소리를 하였다. 그러나 승인은 정신과 풍채가 평안하여, 한 번도 생각이 밖으로 벗어난 일이 없었다. 비록 배움에서 수많은 경전을 섭렵하였지만, 특히 『법화경』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법화경』의 강의를 모두 252차례나 두루 강의하였다.
제(齊)의 영원(永元) 1년(499)에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65세이다.
19) 석법도(釋法度)
법도는 황룡(黃龍)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북쪽 나라에 유학하면서, 두루 많은 경전을 종합하였다. 그러면서도 오로지 간절한 절조를 이루기를 힘썼다.
전송의 말기에는 서울을 노닐었다. 덕이 높은 선비인 제군(齊郡)의 명승소(明僧紹)는 인간 세상 밖에 자취를 드높여, 낭야(瑯?)의 섭산(?山)에 은거하였다. 법도의 맑고 아름다운 정신에 고개 숙여, 스승과 벗으로 공경하는 대접을 하였다. 그가 죽음에 이르러 산을 희사하여 서하정사(栖霞精舍)라 하고, 법도를 초청하여 그곳에 살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도사들이 절 땅을 도관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그 곳에 머물던 사람은 곧 죽어 버렸다. 그 후 절이 되기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무서운 움직임이 있었다. 그렇지만 법도가 그곳에 머무른 후로는 뭇 요망한 일들이 모두 멎었다.
그곳에 머문 지 일년 가량 지났을 무렵이다. 갑자기 사람과 말과 나팔과 북소리가 들려오더니, 한 사람이 나타났다. 명함을 적은 종이를 건네어 법도에게 성명을 통하면서, 자기는 근상(?尙)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법도가 앞으로 나아갔다. 근상은 모습이 매우 우아하고, 보좌하는 사람들도 매우 엄숙하
였다. 그는 공경을 표시한 다음 이어 말하였다.
“제자는 이 산의 왕으로 산을 소유한 지 7백여 년입니다. 신의 길에도 법이 있어, 남들이 함부로 간여하여서는 안 됩니다. 전에 이곳에 기탁하여 깃들던 여러 사람들은, 혹 참되고 올바른 인물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죽음과 병이 이어졌으니, 그것 역시 그들의 운명입니다. 법사께서는 귀의할 만한 도와 덕을 갖추신 분입니다. 삼가 이 산을 희사하여 받들어 공급하겠습니다. 아울러 5계를 받기를 원하오니, 길이 내세의 인연을 맺고자 합니다.”
이에 법도가 말하였다.
“사람과 신은 길이 다르니, 서로 굽힐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시주께서는 피 흘리는 음식으로 세간의 제사를 받는 몸입니다. 이것은 5계에서 가장 금지하는 일입니다.”
근상이 말하였다.
“만약 문도들을 정비하면, 곧 먼저 살생을 없애겠습니다.”
이에 하직 인사를 하고 떠나갔다.
이튿날 아침 법도가 보니, 어떤 사람이 돈 1만 냥과 향·초·작은 칼 등을 보내왔다. 설명서에 쓰여 있었다.
“제자 근상이 받들어 공양드립니다.”
그 달 보름날에 이르러, 법도는 그를 위하여 모임을 마련하였다. 근상이 다시 찾아왔다. 대중들과 함께 예배하고 행도하면서 계를 받고는 떠났다.
섭산의 사당을 지키는 무당의 꿈에 신이 나타나 말하였다.
“나는 이미 법도 법사에게서 계를 받았으니, 나의 제사에는 생명을 죽인 희생물을 올리지 말아라.”
이로 말미암아 이 사당에서 신에게 음식을 올릴 때는, 오직 채소와 말린 포만을 쓰는 데 그쳤다.
어느 날 법도는 움직임이 흐트러지면서, 땅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근상이 밖에서 찾아와서, 손으로 머리와 발을 쓰다듬어 주고 떠나는 것을 보았다. 얼마 후 다시 유리 병 하나를 지니고 왔다. 병 속에는 물과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이것을 법도에게 바쳤다. 그 물은 맛이 달고 차가웠다. 이것을 마시니 법도의 괴롭던 곳이 사라졌다. 신이 감응해 보이는 것이 이와 같았다.
법소(法紹)
당시 사문 법소(法紹)가 일이 맑고 고행하여, 명성을 법도와 가지런히 하였다. 그러면서 배움과 이해는 법도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런 까닭에 당시 사람들은 북산이성(北山二聖)이라고 불렀다.
법소는 본래 파서(巴西) 사람이다. 여남(汝南)의 주옹(周?)이 성도를 떠나자, 함께 내려와 산자정사(山茨精舍)에 머물렀다.
법도는 법소와 더불어 제(齊)의 경릉왕(竟陵王) 자양(子良)과 시안왕(始安王) 요광(遙光)으로부터 공손히 스승의 예로 모시는 대우를 받았고, 네 가지 공양물을 자급 받았다. 법도는 항상 안양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한 까닭에, 유달리 『무량수불경(無量壽佛徑)』을 강의하기를 여러 차례 하였다.
제의 영원(永元) 2년(500)에 산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4세이다.
승랑(僧朗)
법도의 제자 승랑이 돌아가신 스승의 발길을 이어, 다시 산사(山寺)의 기강을 세웠다. 승랑은 본래 요동(遼東) 사람이다. 널리 배우고 생각하는 힘이 두루 해박하였다. 모든 경전과 율장을 강설하는 데 뛰어났다. 『화엄경』과 3론에서는 가장 대가(大家)의 자리에 있었다. 금상폐하(今上陛下)께서 깊이 그릇이라 보고 존중하여, 모든 불교 교리를 공부하는 승려들에게 명령하여 그 산에서 수업하게 하였다.
혜개(慧開)
당시 팽성사(彭城寺)의 혜개는 어려서부터 정신과 기개가 높고 밝으며, 지조와 배움이 매우 깊었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명예로운 이름이 드러나고, 서른 살이 되자 곧 강설하였다.
법개(法開)·승소(僧紹)
또 여항현(杭縣)의 법개도 맑고 시원한 성품이 빼어나며, 담론에 뛰어났다.
서울로 나와 선강사(禪岡寺)에 머물렀다. 같은 절의 승소와 더불어 당시 세상에 알려졌다.
20) 석지수(釋智秀)
지수의 성은 구(?)씨이며, 경조(京兆) 사람이다. 건업(建業)에 깃들어 살았다.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여 일찌감치 출가할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양친이 사랑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비밀리에 혼인할 곳을 구하였다. 곧 결혼할 날이 다가오자, 지수는 마침내 샛길로 피하여 달아났다. 장산(蔣山)의 영요사(靈耀寺)에 몸을 던져,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구족계를 받을 나이가 차자, 일과 지조가 더욱 굳어졌다. 많은 스승을 찾아가 묻고 배우며, 새롭고 특이한 것을 찾아 점검하였다. 이에 대승·소승에 아울러 밝고 논리를 따지는데도 정밀하고 익숙하였다. 게다가 『대반열반경』·『소열반경』·『유마경』·『반야경』에 빼어났다. 한번 강설의 자리를 건립하면, 곧 왕후와 귀족들의 가마들이 줄을 이었다. 뿐만 아니라 책 보따리를 진 사람들도 어깨를 밀치며 찾아왔다.
사람됨이 정신과 풍채가 세밀하고, 생각은 그윽하고 미묘한 경지에 들어갔다. 문구의 그윽이 숨겨진 것을 모두 보고 펼쳐 해석하였다.
천감(天監) 연간(502~519)의 초기에 치성사(治城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3세이다. 장례를 치르던 날에는 도인과 속인들이 달려서 찾아와, 거리와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선비와 서민들은 슬픔을 머금어 영예와 애도로써 예를 갖추었다.
승약(僧若)·도승(道乘)·승선(僧璿)
당시 치성사에 또 승약·도승이 있었다. 도승은 당시에 높은 명성이 알려졌다. 승약은 그의 형인 승선(僧璿)과 더불어, 나란히 모든 경전과 경전 외의 다른 고전에도 빼어났다. 승약은 『법화경』을 외웠으며, 초서·예서에도 솜씨가 있었다. 후에 오(吳)나라의 승정(僧正)이 되었다. 도승도 역시 뜻한 바 일에 밝고 민첩하였다. 그리고 특히 아비담에 빼어났다.
21) 석혜구(釋慧球)
혜구의 본래 성은 마(馬)씨이며, 부풍군(扶風郡) 사람이다. 대대로 높은 족속이었다. 열여섯 살 때 출가하여 형주(荊州) 죽림사(竹林寺)에 머물렀다. 도형(道馨)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스승의 훈계를 받아 이어서, 실천 수행함이 맑고도 맑았다.
그 후 상주(湘州)의 녹산사(麓山寺)로 들어가 선도(禪道)에 전업하였다. 얼마 후 동학인 혜도(慧度)와 함께 서울로 가서 경전을 묻고 찾았다. 그 후 다시 팽성사(彭城寺)로 가서 승연(僧淵) 법사로부터 『성실론』을 전수 받았다.
서른두 살에 이르자 다시 형주 땅으로 돌아왔다. 오로지 강사의 자리를 맡아, 강의하는 모임을 이어갔다. 배우려는 승려들이 무리를 이루었으며, 형주·초(楚) 사이에서는 예전을 통틀어 최고라 일컬었다. 서하(西夏)의 교리를 공부하는 승려들이, 서울의 승려들과 겨루어 형평을 이루게 한 것은 혜구의 힘이다.
중흥(中興) 원년(501)에 칙명으로 형주 땅의 승주(僧主)가 되었다. 가르쳐 도운 공으로 당세에 명성이 있었다.
천감(天監) 3년(504)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4세이다. 유명에 따라 시체를 소나무 아래에 뼈를 노출시키게 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이 차마 행하지 못하였다.
22) 석승성(釋僧盛)
승성의 본래 성은 하(何)씨이며, 건업(建?)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마음이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이에 더하여 뜻한 학문에 발돋움하며 노력하였다. 마침내 크게 논리를 따지는 데 밝고, 아울러 많은 경전에 빼어났다. 강설에서는 당시의 으뜸가는 강사가 되었다.
또한 특히 불경 외의 고전에 정밀하게 뛰어나, 뭇 선비들이 두려워하였다. 그런 까닭에 학관의 모든 유생들이 항상 승성과 서로 몸을 맞대고 다녔다.
천감(天監) 연간(502~519)에 영요사(靈曜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50여 세이다.
법흔(法欣)·지창(智敞)·법경(法?)·승호(僧護)·승소(僧韶)
당시 송희사(宋熙寺)에는 법흔이 있고, 연현사(延賢寺)에는 지창·법경이 있으며, 건원사(建元寺)에는 승호·승소가 있었다. 모두 덕이 비등하여 명성을 함께 하였다. 법흔과 지창은 모두 경론에 빼어나고, 법경은 율부에 정밀하게 뛰어나며, 승소·승호는 아비담으로 저명하였다.
23) 석지순(釋智順)
지순의 본래 성은 서(徐)씨이며, 낭야(瑯?)의 임기(臨沂) 사람이다. 열다섯 살 때 출가하여, 종산(鍾山) 연현사(延賢寺)의 지도(智度)를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고 두터운 지조가 보통 사람을 넘었다. 비록 사미의 나이에 있었지만, 배움의 공덕은 이미 쌓여 있었다. 구족계를 받자 금하는 계율을 따름에 흠집이 없었다. 뭇 경전을 도야하고 연마하면서, 『열반경』과 『성실론』에서는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가 강설할 때는 문도 대중이 항상 수백 명이었다. 한번은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겨 자못 좌절을 이룬 일도 있었다. 그러나 곧고 결백함이 확연하여 그의 아름다움에는 오점이 없었다.
제(齊)나라의 경릉(竟陵) 문선왕은 특히 깊이 남다른 예우를 하였다. 그를 위하여 치성사(治城寺)를 수축하여서 머물렀다.
사공(司空)인 서효사(徐孝嗣)도 역시 그의 행실과 깨우침을 숭배하였다. 스승으로 받들어 공경하였다.
동혼왕(東昏王)이 덕망을 잃으면서 서효사는 사형을 당하였다. 그의 아들 서곤(徐?)은 도망쳐서 화를 피하였다. 지순이 몸소 그를 보호하여 끝내 화를 면하였다.
그 후 서곤은 거듭 자품과 녹봉을 더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도 받지 않았다. 한번은 밤에 도적이 지순의 물건을 훔친 일이 있었다. 청소부가 뒤쫓아 가서 이를 사로잡았다. 지순은 도적을 자기 방안에 유숙하게 하였다. 이튿날 아침 돈과 비단을 주며 타일러서 보냈다. 그의 어진 마음의 흡족함과 용서하는 마음의 두터움이 이와 같았다.
그 후 동쪽 우혈(禹穴, 會稽山)에 노닐다가, 운문정사(雲門精舍)에서 머물렀다. 그러니 법륜의 성대함을 다시 강남 지방에서 보게 되었다.
지순은 사람됨이 겸허하고 공손하며 삼갔다. 겉모습은 신과 같았으며, 법다운 풍모가 엄격하여 움직임에 조금도 일에 실수가 없었다. 그런 까닭에 선비와 서민들이 우러러보고 절하며, 항상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천감(天監) 6년(507)에 산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1세이다.
처음 지순의 병이 심하여 여러 날 음식을 먹지 않다가 어느 때 중간에 끝나면서, 갑자기 재에 올린 음식을 찾았다. 제자인 담화(曇和)가 지순이 곡식을 끊은 지 오래되었다 하여, 비밀히 반 홉의 쌀을 섞어 끓여서 이것을 지순에게 바쳤다. 지순은 목구멍으로 삼키다가 다시 토해냈다. 물을 찾아 말끔히 양치질을 하고는, 담화에게 말하였다.
“너는 영원히 운문정사를 떠나거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다.”
그의 절조를 지키는 마음의 맑고 애씀이 모두 이와 같았다. 임종하던 날에는 방안에서 자못 기이한 향기가 감돌았다. 또한 하늘을 가리는 닫집을 본 사람도 있었다.
유명에 따라 시신을 공지에 뼈를 드러내게 하여, 벌레와 새들에게 보시하게 하였다. 그러나 문인들이 차마 이를 행하지 못하였다. 곧 절 옆에 묻고 제자 등이 비를 세워 공덕을 칭송하였다.
진군(陳郡)의 원앙(袁昻)이 비문을 짓고, 법화사의 혜거(慧擧)가 다시 묘지(墓誌)를 지었다. 지순이 지은 『법사찬(法事贊)』과 『수계홍법기(受戒弘法記)』 등의 기록은 모두 세상에 전한다.
24) 석보량(釋寶亮)
보량의 본래 성은 서(徐)씨이며, 선조는 동완(東莞)의 귀족이다. 진(晋)나라가 패배하자 동래(東萊)의 현현(弦縣)으로 피해왔다. 보량은 열두 살 때 출가하였다. 청주(靑州)의 도명(道明) 법사를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도명도 역시 교리를 공부한 승려로 이름이 당세에 높았다. 보량은 학업에 나아가 오로지 정성을 모아, 한 번 들은 것은 잊지 않았다.
구족계를 받은 후에는 문득 사방을 구경하며 널리 교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늘 가르치고 기름[訓育]에는 근본이 있어, 아직 인연에 얽매인 허물을 멀리 끊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도명 법사가 말하였다.
“사문이 되어 속가를 떠나면, 널리 펼치는 일을 도리로 삼아야 한다. 어찌 이러한 사랑의 그물에 구애받아, 우리의 도가 동쪽나라에 행해지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보량은 느껴 깨달아, 이로 인하여 나그네가 되어 떠돌았다. 스물한 살 때 서울에 이르러 중흥사에 머물렀다. 원찬(袁粲)이 한 번 만나보고는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하였다. 그 후 도명 법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자주 보량을 만나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다. 요즘 아직까지 듣지 못하였던 것을 들으니, 이 해가 저물어 가는 것도 깨닫지 못하겠다. 진주는 합포(合浦)에서 생산되었지만, 위(魏)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취하여 수레를 비추어 보았다. 구슬[和氏璧]은 한단(邯鄲)에서 있었지만, 진(秦)나라 임금이 청하여 나라를 빛나게 했다. 천하의 보물은 마땅히 천하와 더불어 이를 함께 하여야 한다. 상인이 머무는 고을에서만 오로지 소유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로부터 학문의 명성이 조금씩 번성하였다. 어버이의 상을 맞았으나, 길이 막혀 북쪽으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그러자 인하여 문을 닫고 홀로 거처하여, 선(禪)의 생각에 잠기며 강설을 그만두고 인사를 단절하였다.
경릉(竟陵)의 문선왕이 몸소 그가 거처하는 곳에 이르러, 초청해서 강사로 삼으려 하였다. 보량이 마지못하여 찾아갔다. 문선왕(文宣王)은 그의 발에 머리를 대고 공손히 절하고, 깨달음을 위한 사부대중의 인연을 맺었다.
그 후 영미사(靈味寺)로 자리를 옮겨 쉬면서 많은 경전의 강설을 계속하니, 서울보다 더 성대하였다. 『대열반경』을 모두 여든네 차례, 『성실론』을 열네 차례, 『승만경(勝?徑)』을 마흔두 차례, 『유마경』을 스무 차례, 그 밖에 『대품경』·『소품경』을 열 차례, 『법화경』·『십지론』·『우바새계경(優婆塞戒徑)』·『무량수불경』·『수능엄경』·『유교경』·『미륵하생경』 등도 역시 열 차례 가까이 두루 강의하였다. 도인과 속인의 제자가 3천여 명이고, 묻고 배우는 문도들만도 항상 수백 명이 꽉 찼다.
보량은 마음이 시원하고 높으며, 우뚝한 기개가 씩씩하고 빼어났다. 경전의 장구를 열고 명하면[開章命句], 날카로운 언변이 종행하였다. 혹 질문과 논의가 있을 때나, 혹 미리 겹친 관문을 쌓아 두었다가도, 보량이 해석을 펴면 곧 종지를 깨달았다. 마치 얼음 녹듯이 풀려서 본래 쌓였던 의문을 잊었다.
금상폐하2)께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시자 정도를 높이고 숭앙하시어, 보량의 덕망이 시대의 여망에 자리 잡고 있다 하여, 자주 초청하여 담론하였다. 보량은 성품에 맡겨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늘 빈도(貧道)라고 자기를 호칭하였다. 주상께서는 비록 마음에 무언가 틈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의 정신의 뛰어남에 고개를 숙이셨다.
천감(天監) 8년(509)에 처음으로 보량에게 칙명을 내려, 『열반경의소(涅槃經義疏)』 10여 만 글자를 짓게 하였다. 주상께서 서문을 지어 말씀하셨다.
“말이 아니면, 그 무엇으로도 말에 기여할 길이 없다. 말이란 곧 말의 허물이 없는 것을 말한다. 말에 허물이 있으면, 말을 멈추는 것이 좋다. 말이 멎으면, 여러 가지 견해가 다투어 가며 일어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본분의 서원을 타고, 태어남에 의탁하시어, 자비의 힘을 나타내고 교화에 응하셨다.
문자를 떠나서 가르침을 마련하셨고, 심상(心相)을 잊음으로써 도에 통하셨다. 민옥(珉玉)으로 하여금 값을 다르게 하고, 경수(經水)와 위수(渭水)의 흐름을 나누듯이, 여섯 외도들의 주장[六師]을 제어하고, 네 가지 거꾸로 된 것[四倒]을 멎게 하셨다. 여덟 가지 삿됨[八邪]을 되돌려, 하나의 맛[一味]으로 귀결시켰다.
세속 알음알이의 뿔을 꺾고 이상한 사람의 입을 막아, 진주를 구하려는 마음을 인도하고 코끼리를 살펴보는 눈을 열게 하였다[開觀象之目]. 불난 집[火宅]에서 불에 타죽는 사람들을 구제하고, 물결치는 바다[浪海]에서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올렸다. 그런 까닭에 법의 비가 내리면서, 타죽어 가던 씨앗[?種]이 꽃피는 일을 당하였다.
지혜의 태양이 솟아오르면서 긴긴 밤이 새벽을 맞았으며, 가섭(迦葉) 존자의 울분을 일으키게 하여 진실로 정성스런 말을 토해내게 하였다. 비록 두 가지 보시[二施]가 앞에서 평등하고 5대(大)가 뒤에서 베풀어져서, 서른네 가지 질문이 들쑥날쑥 다른 말을 한다 하더라도, 방편으로 권유하고 인도하여 각기 그 사람의 뜻에 따라 대답하였다.
경론의 요점을 들어 올리면, 두 길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불성론』은 그 본유의 근원을 열었고, 『열반경』은 그 극치로 돌아가는 종지를 밝힌 것이다. 이는 인연도 아니고 과보도 아니며,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작용하는 것도 아니다.
교리는 온갖 착함보다도 높고, 일은 온갖 그릇됨을 단절하였다. 공하고도 공하여 그 진실한 끝을 헤아릴 수 없고, 그윽하고도 그윽하여 그 미묘한 출입구를 궁구할 수 없다. 스스로 덕이 고르고 평등하며, 마음이 더 이상 날 것이 없는 경지에 합치된 사람[心合無生]이 아니라면, 금으로 된 담장과 옥으로 된 방[金牆玉室]에 어찌 쉽게 들어갈 수 있겠는가?
청주(靑州) 사문 석보량은 조화로운 기운이 상쾌하게 뛰어나고, 정신의 움직임은 우뚝 빼어나다. 어려서는 곧고 간절한 절조를 지키고, 장성해서는 불법의 진리에 안주하고, 늙어서는 더욱 독실하다. 늙은 나이에 다시 난 이빨은 쇠하지 않듯, 선각자의 글을 유통하여 쉬지 않고 노력하니, 후배들과 뒤늦게 공부한 이들이 우러러 귀의하지 않음이 없다.
천감 8년(509) 5월 8일에 곧 보량에게 칙명을 내려, 『대열반경의소』를 짓게 하여 9월 20일에 끝마쳤다. 이 책은 현미한 말을 빛나게 표현하고 정도를 찬양하였다. 이어진 고리가 이미 풀렸고 의심의 그물이 제거되었다. 조목의 흐름이 밝고 소상하여 요약된 말을 얻을 수 있다.
짐은 조용히 여가 있는 날에 곧 이 책을 보고자 한다. 잠시 몇 줄의 글을 써서, 이것으로 의소에 대한 기억[記?]으로 삼으려 한다.”
보량은 그의 복덕으로 감응을 불러, 공양과 보시가 누적되었다. 그러나 돈을 저축하지 않는 성품이라서 모든 복업을 경영하였다. 몸이 죽은 뒤에, 그의 방에 남겨진 재물은 없었다.
천감 8년(509) 10월 4일에 영미사(靈味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6세이다. 종산(鍾山) 남쪽에 묻고, 묘소에 비를 세웠다. 진군(陳郡)의 주흥사(周興嗣)와 광릉의 고상(高爽)이 나란히 비문을 지어 양면에 새겼다. 또 제자 법운(法雲) 등이 절 안에 비를 세우고, 문선왕(文宣王)이 보홍사(普弘寺)에 그의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다.
승성(僧成)·승보(僧寶)
당시 고좌사(高座寺)의 승성과 광야사(曠野寺)의 승보도 또한 모두 제(齊)나라의 강사이다. 승보는 또한 삼현(三玄)에 뛰어나 귀족들이 존중하였다.
25) 석법통(釋法通)
법통의 본래 성은 저(?)씨이며, 하남(河南) 양적(陽翟) 사람이다. 진(晋)의 안동장군(安東將軍)이자 양주도독(楊州都督)이었던 저략(??)의 8대손이다. 집안 대대로 의관과 예의를 이어받았다.
법통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총명하며, 슬기로워 무리에서 빼어났다. 열한 살에 출가하여 떠돌아 다녔다. 삼장을 배우고 대승의 경전에 오로지 정성을 모았다. 『대품경』과 『법화경』에 더욱 깊은 연구가 있었다. 30세가 되기 전에 곧 강사가 되었다. 배우는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천 리 밖에서도 반드시 찾아왔다.
그 후 그의 발길로 서울의 땅을 밟았다. 처음에는 장엄사(莊嚴寺)에 머물다가, 그 후 정림상사(定林上寺)에서 쉬었다. 한가롭게 살면서 숨은 것을 찾고, 도의 실천에만 오직 노력하였다. 그의 도풍을 바라고 그의 그림자에 붙으려는 사람들이, 다시 산의 방에 가득하였다.
제(齊)의 경릉(竟陵) 문선왕과 승상 문헌왕(文獻王)은 모두 자신의 귀한 신분을 굽혀, 그의 덕을 사모하여 친히 이마를 조아려 예를 받들었다. 진군(陳郡)의 사거(謝擧)·오국(吳國)의 육고(陸?)·심양(?陽)의 장효수(張孝秀) 등도 모두 걸음을 산문에 채찍질하여, 그에게서 계법(戒法)을 받았다. 도인과 속인의 제자가 7천여 명이었다.
그가 종산(鍾山)의 언덕에 자취를 숨긴 지, 30여 년 동안 좌선(坐禪)과 염송으로 예참에 간절한 정성을 쏟았다. 천감(天監) 11년(512) 6월 10일 문득 몸이 좋지 않음을 느끼고,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바로 9월 20일까지만 살 따름이다.”
9월 14일에 이르자 두 사람의 거사(居士)가 나타났다. 모두 흰 털이개[白拂]3)를 잡고 책상 앞으로 나아가다가, 문득 차례로 밖으로 나갔다. 9월 17일에 이르자 문득 헛소리를 하였다.
“시주와는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인데, 어디서 왔습니까?”
제자인 담지(曇智)가 그 말의 까닭을 물어보니, 대답하였다.
“주홍빛 옷을 입은 한 사람이, 두건을 머리에 쓰고 나무상자를 받쳐 들고 걸상 앞에 엎드려 있구나.”
9월 20일에 이르자 불상이 두 줄을 지어 찾아오는 것이 보였다. 법통은 한참 동안 합장을 하였다. 간병하는 사람들은 다만 기이한 향기가 감도는 것을 맡았을 뿐, 끝내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이에 법통은 비밀리 뜻을 같이하는 혜미(慧彌)에게 그 내용을 설명하였다.
21일에 이르자 향탕(香湯)을 찾아서 목욕을 마쳤다. 이어 예불을 하고 돌아와 누워서, 두 손을 교차시켜 가슴에 얹고 정오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0세이다. 이어 절 남쪽에 장사지내고, 제자인 정심(靜深) 등이 비를 묘 옆에 세웠다. 진군(陳郡)의 사거(謝擧)와 난릉(蘭陵)의 소자운(蕭子雲)이 나란히 비문을 지어 양면에 새겼다.
지진(智進)
당시 정림상사(定林上寺)에는 또 사미인 지진이 있었다. 본래 환관(宦官: 宮刑을 당한 사람)이었다. 맑은 믿음이 독실하여 마침내 출가하여 간절하게 절조를 지켰다. 어느 날 두타행(頭陀行)을 하다가, 동산(東山)에 이르러 나무 밑에서 자려 하였다. 호랑이가 와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진이 단정하게 앉아 동요되지 않는 것을 보고,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가 떠나갔다. 그 후로도 늘 홀로 걸어가거나 홀로 앉아 있을 때마다, 항상 푸른 말 한 필이 나타나 그의 좌우를 호위하였다.
26) 석혜집(釋慧集)
혜집의 본래 성은 전(錢)씨이며, 오흥(吳興)의 어잠(於潛) 사람이다. 18세 때 회계(會稽) 낙림산(樂林山)에서 출가하였다. 혜기(慧基) 법사를 따라다니며 수업하였다. 성품됨이 의젓하고 진실하여 화려한 비단처럼 수식하는 말이 없었다. 새벽에서 밤까지 배움에 부지런하여, 한 번도 게을리 한 일이 없었다.
그 후 서울로 나와서 초제사(招提寺)에서 머물렀다. 그러다가 다시 많은 스승들을 두루 찾아다녀, 다른 논설들을 융화하고 다스렸다. 삼장과 대승의 경전들을 모두 종합하여 통달하였다.
널리 대비바사(大毘婆沙) 및 『잡심론(雜心論)』·건도(?度)4) 등을 찾아서 서로 비교하며 교정했다. 그런 까닭에 아비담(阿毘曇) 한 부에 있어서는 당시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어려운 문제와 굳은 의문점은 모두 펼쳐 풀이하였다. 나라 안의 학문하는 손님들이 반드시 찾아오지 않음이 없었다. 한 번 개강할 때마다, 책을 걸머지고 찾아오는 사람이 천 명이었다.
사문 승민(僧旻)·법운(法雲) 등도 모두 명성이 한 시대에 높은 이들이다. 그들도 역시 책을 손에 잡고 가르침을 청하였다. 금상폐하께서도 깊이 칭찬하고 접견하였다.
천감 14년(515)에 오정(吳程)에 돌아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0세이다. 『아비담대의소(阿毘曇大義疏)』 10여 만 글자를 지었다. 세상에서 성행한다.
27) 석담비(釋曇斐)
담비의 본래 성은 왕(王)씨이며, 회계의 섬현(剡縣)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혜기(慧基) 법사에게서 수업하였다.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여, 일찍부터 잘 깨우친다는 일컬음으로 알려졌다. 대승의 깊은 경전을 모두 종합하여 통달하고, 노자와 장자·유교·묵자도 자못 많이 펴 보았다. 그 후 이쪽저쪽 찾아다니며 경론의 종지를 두루 궁구하였다. 고향 고을의 법화사(法華寺)에 자리 잡고 강설을 이어가니, 배우는 무리들이 줄을 이루었다.
담비는 마음이 상쾌하게 트였으며, 뜻으로 품은 것도 맑고 그윽하였다. 그런 까닭에 『소품경』과 『유마경』에서 더욱 독보적인 존재를 이루었다. 게다가 토해내는 이야기와 쌓아온 조예로 문장과 말재주가 높고 빛나서, 강석에서의 풍모로 당대의 존중을 받았다.
양(梁)나라 형양(衡陽)의 효왕(孝王)인 소원간(蕭元簡)과 은사(隱士)인 여강(廬江)의 하윤(何胤)도 모두 멀리서 그의 아름다운 계책에 고개 숙이고, 초청해서 강설하였다.
오국(吳國)의 장융(張融)과 여남(汝南)의 주옹(周?), 주옹의 아들 주사(周捨) 등도 모두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친교를 맺었다.
천감(天監) 17년(518)에 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6세이다. 그가 지은 글과 문장은 자못 세상에 알려졌다.
이보다 앞서 담비가 강남 지방에서 명성이 있다 하여, 칙명을 받아 10성(城)의 승주(僧主)로 삼았다. 임명장과 교지를 갖고 간 것을 엎드려 받기도 전에, 문득 돌아가셨다. 그 땅의 비구와 비구니들은 가슴 속에서 그의 덕을 그리워함이 갑절이나 더하였다.
법장(法藏)
담비와 같은 고을의 남암사(南巖寺)에 법장이 있었다. 그도 계율을 잘 지키고, 소박한 것으로 칭송을 받았다. 왕성하게 생명을 놓아 살려주고 구조하였다. 또한 불화와 불상을 일으켜 세웠다.
명경(明慶)
당시 여요현(餘姚縣)에는 명경이 있었다. 담비와 동시대의 사람으로 명성이 있었다.
명경의 본래 성은 정(鄭)씨이다. 계율의 행실이 엄격하고 정결하며, 학업이 맑고 아름다웠다. 본래 승염(僧炎)에게 사사하다가, 다시 홍실(弘實) 법사의 제자가 되었다. 이 스승과 제자 세 명 모두 동남 지방에서 존중을 받았다.
【論】이상을 통틀어 논하면 무릇 지극한 이치란 말이 없고, 그윽한 귀결점이란 아득하고 고요하다. 아득하고 고요한 까닭에 마음이 움직이는 곳이 끊어지고, 말이 없는 까닭에 말하는 길이 끊어진다. 말하는 길이 끊어질 때 말을 하면 그 참뜻을 다치고, 마음이 움직이는 곳이 끊어질 때 생각을 일으키면 그 참됨을 잃는다. 그런 까닭에 유마거사는 방장실(方丈室)에서 입을 다물고, 석가모니는 쌍수에서 침묵하셨다. 바야흐로 이치의 깊고 고요함을 아는 까닭에 성인들은 말씀을 하지 않으신 것이다.
다만 멀고 먼 꿈의 경계는 진리와의 거리가 특히 멀리 떨어져 있다. 꿈틀거리는 무리들[蠢蠢之徒]에게 가르침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길을 열어주겠는가? 그런 까닭에 성인은 신령하고 미묘함을 빌려서 중생들에게 응하시고, 어둡고 고요함을 체득하여 신과 통하신다. 미묘한 말을 빌려 도로 가는 나루터로 삼고, 형상에 의지하여 진실을 전한다. 그런 까닭에 말씀하신다.
“병법이란 상서롭지 않은 도구이지만 어쩔 수 없어 이를 쓴다.5) 말이란 참된 물건이 아닌데도 어쩔 수 없어 이를 베푼다.”
그러므로 처음 녹야원(鹿野苑)에서 4제(諦)로써 말의 시초로 삼기 시작하여, 마지막 곡림(鵠林)에서 3점(點: 伊字三點)으로 원(圓)의 극치로 삼기에 이르신 것이다.
그 사이에 말과 문장을 펴신 수효는 8억을 넘어, 코끼리와 낙타가 업고 가도 다 하지 못하며, 용궁의 물이 넘치더라도 다하지 못한다. 장차 올가미를 빌려서 토끼를 잡고자 하고, 손가락에 기대서 달을 알고자 한 것이다. 그러니 달을 알면 손가락은 치워야 하고, 토끼를 잡으면 올가미는 잊어야 한다.
경에서 ‘진리에 근거하고 말에 근거하지 말라[依義莫依語]’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도 교에 막혀 있는 사람들은 지극한 도란 경전의 편장(篇章)에서 극에 달한다 생각한다. 형상에 마음을 둔 사람들은 법신을 장륙(丈六)의 불상으로 규정하려고 한다. 그런 까닭에 모름지기 그윽하고 은미한 종지를 끝까지 통달하려면, 묘한 이치를 말의 테두리 밖에서 터득해야 한다[妙得言外]. 4무애변(無?辯)으로 장엄하여 사람들을 위해 널리 설하여, 이익됨과 아름다움을 가르쳐 보이는 것은 법사에게 달려 있는 것이리라[示敎利熹 其在法師乎].
그러므로 주사행(朱士行)은 경전을 우전국(于?國)에서 찾아 서원하였다. 경이 불타지 않게 하여, 끝내 『반야경』으로 하여금 동쪽 낙수에서 성행케 하여, 생각조차 잊음[忘想]을 말세에 전하였다. 이어 차례로 축잠(竺潛)·지둔(支遁)·우란(于蘭)·법개(法開) 등은 모두 고상한 기개가 높고 빛나며 도의 풍모가 맑고 넉넉하여, 교화를 전한 아름다운 공덕 또한 버금갔다.
중간에 석도안(釋道安)이 제자로서 성스러운 스승 축불도징(竺佛圖澄)에게서 배움을 받았다. 도안도 학업을 제자 혜원(慧遠)에게 전수하였다. 오직 이 3대의 세상에서만은 현인이 결핍되지 않았다. 아울러 계율과 절조도 엄숙하고 밝으며, 지혜의 보배도 불꽃같이 성대하였다. 저 햇빛 같은 지혜의 남은 광휘로 하여금, 거듭 천 년 뒤에 빛나게 하였다. 저 향기 높은 땅의 남은 향기로 하여금, 거푸 염부제주(閻浮提州)의 땅을 물씬 향기가 감돌게 하였다. 솟아오르는 진리의 샘물이 여전히 흘러들어 오는 것은, 참으로 이 세 분에게 힘입은 결과이다.
혜원은 거주지를 호계(虎溪)에 국한하였다. 거꾸로 스승인 도안은 마침내 제왕과 가마를 같이 탔으니, 저 고상한 도에 비해 마치 의혹됨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말하고 입 다물고 움직이고 머무는 것은 오직 시대에 따라 마땅함이 있는 것이다. 네 사람의 노인이 한(漢)나라 궁실을 찾아간 것은 그들을 등용하여 간 것이다. 삼려대부(三閭大夫: 屈原)가 초(楚)나라를 떠난 것은 그를 버리므로 몸을 숨긴 것이다. 불경에서는 말한다.
“만약 정법을 건립하고자 한다면, 임금과 지팡이를 지닌 늙은이의 말을 친근하게 들어야 한다.”
도안은 비록 한때 제왕과 함께 가마를 타기는 하였으나 마침내 백성들을 위하여 간언(諫言)하였다. 그런 까닭에 마지막에는 아라한과에 감응하여 구름이 열리며 보응이 나타난 것이다.
그 후 형주(荊州)·삼협(三峽) 일대에서 이름이 드러난 이로는 도익(道翼)·도우(道遇)를 첫 번째로 말하며, 여산(廬山)에서 맑고 검소하게 산 이로는 혜지(慧持)·혜영(慧永)을 으뜸으로 삼아야 한다.
도융(道融)·도항(道恒)·승영(僧影)·승조(僧肇)는 덕이 관중에서 무겁고, 도생(道生)·승예(僧叡)·법창(法暢)·법원(法遠)은 종사로서 건업을 이끌었다. 담도(曇度)와 승연(僧淵)은 홀로 강서의 보물을 독차지하였다. 초진(超進)과 혜기(慧基)는 곧 절동(浙東)의 성대함을 드날렸다.
비록 세대와 사람이 바꾸어 가며 융성하였지만, 모두가 도술에 있어서는 멀리 시대를 초월하여 일치하였다. 그런 까닭에 불교 운세의 나머지를 일으킨 것이 햇수로 따지면 거의 5백 년이 된다. 공덕의 효능의 아름다움도 참으로 아름답다고 할 만하다. 이를 찬양하여 말하노라.
남은 기풍 아득하고 멀기만 하여
법의 물결 머뭇거렸으니
저 밝은이들 아니시면
무너지는 불법 뉘 떨쳤으랴.
축잠(竺潛)과 도안(道安)이 구슬이라면
혜원(慧遠)과 승예(僧叡)는 구슬을 꿰었다네.
굽고 뒤틀린 것 도끼로 깎고
빗긴 먼지 털고 씻어내듯
흰 실 이미 물들었어도
앞으로는 길이 변하리라.
遺風?漫 法浪??
匪伊釋哲 孰振將頹
潛安比玉 遠叡聯?
?斧曲戾 彈沐斜埃
素絲旣染 承變方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