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전 제07권
2. 의해 ④
01) 축도생(竺道生)
도생의 본래 성은 위(魏)씨이다. 거록(鉅鹿) 사람으로 팽성(彭城)에서 거주하였다. 집안은 대대로 벼슬한 문족이며, 아버지는 광척(廣戚) 수령이었다. 고을에서 선량한 사람이라 칭송했다.
도생은 어려서부터 빼어나게 훌륭하고, 총명하고 명철함이 신과 같았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비범한 그릇임을 알고 사랑하며 기이하게 여겼다.
그 후 사문 축법태(竺法汰)를 만나, 마침내 속가를 벗어나 불법에 귀의하였다. 법태에게 엎드려 가르침을 가슴에 담아 수업하였다.
이미 법문(法門)을 밟게 되자, 영준한 사고가 기발하였다. 문구의 뜻을 연구하고 음미하여, 곧 스스로 슬기로운 이해력을 열었다. 그런 까닭에 열다섯 살의 나이에 곧 강좌에 올랐다. 토하고 받아들이며 묻고 말하는 것이 주옥과 같이 맑았다. 비록 오랜 덕망이 있는 학승이나 당세의 명사라 하더라도, 모두 생각이 좌절되고 언변이 궁해져서 감히 대항하여 응수하지 못하였다.
나이가 구족계를 받을 시기에 이르자 비추어보는 안목이 날로 깊어졌다. 성품과 도량이 기민하고 삼가며, 정신과 기개가 맑고 꿋꿋하였다.
처음에는 여산(廬山)에 들어가 7년 동안 숨어살면서 자신이 일삼는 뜻을 구하였다. 항상 도에 들어가는 요체로써 슬기로운 이해력을 근본으로 삼았다. 그런 까닭에 수많은 경전을 우러러 숭상하고 잡론(雜論)을 참작하였다. 그러면서 만 리 먼 길이라도 법을 따라, 피곤함과 괴로움을 꺼려하지 않았다.
그 후 혜예(慧叡)·혜엄(慧嚴) 등과 함께 장안에 노닐었다. 구마라집을 따라 수업하니, 관중의 대중승려들이 모두 신과 같이 깨닫는다고 일컬었다.
그 후 서울로 돌아와 청원사(靑園寺)에 머물렀다. 이 절은 진(晋)의 공사황후(恭思皇后) 저씨(?氏)가 세운 절이다. 본래 푸른 나무를 심은 곳이기에 이것으로 이름을 삼은 것이다. 도생은 이미 당시의 불법의 장인이었으므로 초청되어 머물렀다. 전송(前宋)의 태조(太祖)와 문제(文帝)가 깊이 감탄과 존중을 더하였다.
그 후 태조황제가 법회를 마련하여, 황제가 친히 대중과 함께 땅바닥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식사를 하사하고 한참이 지나자, 대중들은 모두 이러다가 해가 저물지 않을까 의심하였다. 이 때 황제가 말하였다.
“비로소 일중(日中)이 되었다.”
도생이 말하였다.
“밝은 해가 하늘에 빛나고 천자의 말씀이 비로소 일중이라 하시니, 어찌 일중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마침내 발우(鉢盂)를 취하여 음식을 먹었다. 이에 온 대중들이 모두 그를 따랐으며, 그가 황제의 속마음을 얻은 일에 감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왕홍(王弘)·범태(范泰)·안연지(顔延之)도 모두 그의 덕스런 풍모를 공경하여, 그를 좇아 그에게 도를 물었다.
도생은 이미 사유에 잠긴 지 오래되어 언어 밖의 진리를 철저히 깨달았다. 마침내 한숨을 쉬고 탄식하였다.
“무릇 형상으로써 생각을 다하지만 참뜻을 얻으면 형상은 잊는 것이다. 말로써 이치를 추구하지만 진리에 들어가면 말은 쉬는 것이다. 경전이 동쪽 나라에 들어오면서부터 번역하는 사람이 거듭 막히고, 막힌 문구만을 많은 사람이 지키니, 원만한 참뜻은 보기 드물다. 만약 그물을 잊어버리고 고기를 취할 수 있다면, 비로소 더불어 도를 말할 만하다.”
이에 진제(眞諦)와 속제(俗諦)를 교열하고, 인과(因果)를 연구하고 사유하였다. 비로소 선(善)은 응보를 받지 않고, 몰록 깨우치면 성불한다는 설을 건립하였다. 또한 『이제론(二諦論)』·『불성당유론(佛性當有論)』·『법신무색론(法身無色論)』·『불무정토론(佛無淨土論)』·『응유연론(應有緣論)』 등을 지었다. 예전 학설을 그물 속에 가두어 버리는 오묘하게 깊은 취지가 있었다.
그러나 문구만을 고집하는 무리들 사이에는 혐오와 질투심이 많이 생겨나, 주거나 빼앗는 소리가 다투어 일어났다.
또한 여섯 권으로 된 『니원경(泥洹經)』이 이보다 앞서 서울에 도착하였다. 도생은 경의 이치를 해부하고 분석하여, 훤하게 깊고 미묘한 진리 속으로 들어갔다. 이에 곧 일천제(一闡提)도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설을 세웠다.
당시 『열반경』의 대본(大本)은 아직 중국에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외롭게 선발로 밝힌 혼자만의 견해는 대중들의 마음에 거슬렸다. 이에 구학(舊學)들은 그의 말이 삿된 주장이라고 비난하며 분개함이 매우 심하였다. 마침내 대중들에게 사실을 밝히고, 그를 승단에서 쫓아내었다.
도생은 대중 가운데서 얼굴빛을 바로하고 서원하였다.
“만약 내가 말한 것이 경의 논리에 어긋난다면, 청컨대 현재 이 몸에서 곧 문둥병이 나타나게 하소서. 만약 실상과 서로 위배되지 않는다면, 원컨대 목숨을 버리는 날 사자좌(師子座)에 앉게 하소서.”
말을 마치자 옷을 털고 일어나, 떠돌아다녔다.
처음에 오(吳)의 호구산(虎丘山)으로 들어갔다. 열흘 사이에 배우는 무리가 수백 명이었다. 그 해 여름에 청원사의 불전에 우레가 진동하면서 용이 하늘로 승천하였다. 서쪽 벽에 빛나는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로 인하여 절 이름을 용광사(龍光寺)로 고쳤다.
당시 사람들이 탄식하였다.
“용이 이미 떠났으니, 도생도 반드시 떠날 것이다.”
갑자기 여산으로 자취를 옮겨 바위 산 깊숙이 그림자를 숨기니, 산중의 대중 승려들이 모두 공경하고 승복하였다.
그 후 『열반경』의 대본이 남쪽 서울에 도착하였다. 과연 “천제(闡提: 성불할 성품이 없는 사람)에게도 모두 불성이 있다”고 설하여서, 전에 그가 말한 내용과 약속을 맞춘 것처럼 딱 들어맞았다.
도생은 이 경을 얻자 곧 이 경을 강설하였다. 전송의 원가(元嘉) 11년(434) 11월 경자(庚子)일에 여산정사에서 법좌에 올랐다. 정신과 얼굴빛은 밝게 열리고, 덕스런 음성은 빼어나게 나왔다. 여러 번 논의하면서 이치를 궁구함에 오묘함을 다하니, 보고 듣는 대중들이 깨닫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법석이 곧 끝나려 할 즈음에 털이개[拂子]가 어지럽게 흔들리면서 땅에 떨어졌다. 얼굴을 바로 세우고 단정히 앉아, 책상에 기대어 돌아가셨다. 얼굴빛은 달라지지 않은 채 마치 선정에 들어간 듯하였다. 이에 도인과 속인들이 놀라고 감탄하였다.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슬피 울었다.
이에 서울에 있는 모든 승려들이 마음속으로 스스로의 병폐를 부끄러워하면서, 추모하여 믿고 복종하였다. 그의 신같이 내다보는 지극함이 상서롭게 증명됨이 이와 같았다. 이어 여산의 언덕에 묻었다.
과거 도생은 혜예(慧叡)·혜엄(慧嚴)·혜관(慧觀)과 동학으로 명성을 나란히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렇게 평하였다.
“도생과 혜예는 천진함이 나타나고, 혜엄과 혜관은 깊은 흐름을 얻고, 혜의(慧義)는 교만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구연(寇淵)은 조용히 지켰다.”
도생과 혜예만이 천진하다는 지목을 받을 만큼 여러 사람 가운데 우뚝 빼어났다.
과거 관중(關中)에서 승조(僧肇)가 비로소 『유마경』을 주석하였다. 이 때 세상에서는 모두 이를 음미하였다. 도생은 다시 깊은 뜻을 발굴하여 새롭고 다른 내용을 드러내었다. 여러 경전의 의소(義疏)도 지었다. 세상에서 모두 보물로 삼았다.
왕징(王徵)은 도생을 곽림종(郭林宗)에 비유하였다. 그를 위해 전기를 써서 그가 남긴 덕을 밝혔다.
당시 사람들은 도생이 추리한 ‘천제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에 대하여 근거가 있다고 여겼으며, ‘돈오(頓悟)하면 과보를 받지 않는다’는 등등의 주장도 역시 법의 문장으로 삼았다.
전송의 태조가 언젠가 도생의 돈오의 의미를 진술하였다. 사문 승필(僧弼) 등이 모두 거세게 비난하자 황제가 말하였다.
“만약 저 세상으로 간 사람(도생)을 다시 일어나게 한다면, 어찌 여러분에게 굴복당하겠는가?”
보림(寶林)
그 후 용광사 사문 보림이 처음에는 장안을 거쳐 수학하였다. 그러다가 후에 도생의 여러 논리를 이어받았다. 이에 당시 사람들이 ‘그윽함에 노니는 도생’이라는 유현생(遊玄生)으로 불렀다. 『열반기(涅槃記)』·『이종론(異宗論)』·?격마문(檄魔文)? 등을 지었다.
법보(法寶)·혜생(慧生)
보림의 제자인 법보도 역시 배움이 내외의 경전을 겸한 사람이다. 『금강후심론(金剛後心論)』 등을 지어 역시 도생의 논리를 이어받았다. 근대에는 또 석혜생(釋慧生)이 역시 용광사에 머물렀다. 푸성귀를 먹으며 많은 경전에 빼어나고, 아울러 초서와 예서(隸書)에 솜씨가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가 같은 절에서 업을 이어받았다 하여, 그들을 대소이생(大小二生: 道生·慧生)이라 불렀다.
02) 석혜예(釋慧叡)
혜예는 기주(冀州)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절조를 지키고, 엄하게 정진하였다. 그러면서 항상 사방을 떠돌며 배웠다. 어느 때 그는 촉(蜀)의 서쪽 경계를 지나다가 사람들에게 붙잡혀 가서 양치는 목동이 되었다.
그 때 나그네 장사꾼 가운데 불법을 믿고 공경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상하게 여겨 ‘이 사람은 사문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다. 그리하여 초청하여 경전의 뜻을 물어보았다. 통달하지 않은 경전이 없었으므로, 상인이 곧 그의 몸값을 주고 그를 풀어주었다.
돌아와서 다시 승복을 입었다. 배움에 도탑게 힘씀이 더욱 지극하여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녔다. 마침내 남천축국(南天竺國)에 이르렀다. 발음과 뜻의 훈고라든가, 여러 나라의 다른 뜻을 반드시 깨우치지 아니함이 없었다.
그 후 돌아와 여산에서 잠시 쉬었다. 갑자기 다시 관중으로 들어가 구마라집을 따라 자문을 받았다. 그 후 서울로 가서 오의사(烏衣寺)에 머물면서 많은 경전을 강설하였다. 모든 사유는 말의 테두리 밖까지 뛰어나고, 논리는 융통자재하게 들어맞았다.
전송(前宋)의 대장군(大將軍)인 팽성왕(彭城王) 의강(義康)이 그를 스승으로 삼고자 두 번 세 번 초청하므로 마침내 허락하였다. 이에 왕이 자신의 저택에서 계를 받고자 하였다. 혜예가 말하였다.
“예(禮)에서 갖추고 찾아와 배운다는 말은 들었으나, 찾아가서 가르친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왕은 크게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곧 절에 들어가 경건하게 절하고 공손히 계법을 받들었다. 뒤에 담비 가죽으로 만든 갖옷을 바쳤다. 승예가 입지 않고 늘상 깔고 앉았다. 왕은 몰래 측근에게 30만 냥을 지불하여 사도록 시켰다. 혜예는 말하였다.
“비록 내가 입지는 않더라도, 이미 대왕께서 보시한 것이라서 애오라지 편의에 따라 썼을 뿐이오.”
진군의 사령운(謝靈運)도 독실하게 불교 논리를 좋아하였다. 풍속이 다른 언어를 통달하여 잘 이해하였다. 곧 혜예에게 경전 가운데의 여러 문자와 아울러 많은 발음의 다른 뜻을 물어보았다. 이에 혜예는 『십사음훈서(十四音訓敍)』를 지었다. 조목별로 범어와 중국어를 나열하여 밝게 깨달을 수 있게 하였다. 이로써 문자들이 의거할 바가 있게 되었다.
혜예는 전송의 원가(元嘉) 연간(424~452)에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85세이다.
03) 석혜엄(釋慧嚴)
혜엄의 성은 범(范)씨며 예주(豫州) 사람이다. 열두 살에 학생이 되어 시(詩)와 서(書)에 두루 밝았다. 열여섯 살에 출가하여 다시 불교 논리를 상세히 연구하였다. 서른 살에 이르자 뭇 서적을 훤하게 모두 익혀, 소문과 명성이 사방 먼 곳까지 퍼졌다. 더욱이 다른 나라까지 교화로 흠뻑 적셨다.
구마라집이 관중에 있다는 말을 듣고 다시 그에게서 수학하였다. 소리와 뜻을 찾아 바로잡는 등 남달리 들은 바가 많았다. 그 후 서울로 돌아와 동안사(東安寺)에 머물렀다.
전송(前宋)의 고조황제는 평소 그를 알아주고 중히 여겼다. 그 후 고조황제가 장안을 정벌하고자 하여 그와 함께 가기를 요구하였다. 혜엄이 말하였다.
“시주의 이번 행차가 비록 죄지은 자를 토벌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빈도는 그 일 밖에 있는 사람이라 감히 명령에 따를 수가 없습니다.”
황제가 간절히 요구하므로 마침내 함께 떠났다. 문제(文帝)가 자리에 오르자, 좋아하는 정이 더욱 진해져서 만날 때마다 크게 찬양하고 불법을 물었다.
이에 앞서 황제가 아직 그다지 불법을 숭상하여 믿지 않을 때인 원가(元嘉) 12년(435)에 이르러서의 일이다. 경윤(京尹) 소모지(蕭摹之)가 계문(啓文)을 올려 절을 세우고, 불상을 주조할 수 있는 제도를 주청하였다. 황제는 시중(侍中) 하상지(何尙之)와 이부랑중(吏部郞中) 양현보(羊玄保) 등과 이 일을 논의하면서 하상지에게 말하였다.
“짐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경전을 많이 읽지 못하였다. 요즘에 와서는 더욱 여가가 없어서 삼세(三世)의 인과(因果)에 관해서 아직 마음에 두어야 할지 어떨지 가려내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감히 이 일에 대해서 이의를 내세우는 사람이 없다. 바로 경들이 이 시대의 뛰어난 사람들인데도, 대부분 불법을 공경하여 믿기 때문이다.
범태와 사령운(謝靈運)은 항상 말하였다.
‘6경(經)의 글은 본래 세속을 구제하여 다스리는 데 있다. 반드시 신령한 본성의 진실로 오묘함을 구하고자 한다면, 어찌 불경으로 나침반을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근래 안영지(顔迎之)의 『추달성론(推達性論)』과 종병(宗炳)의 『난백흑론(難白黑論)』을 보았다. 넓고 깊게 불법을 밝혀 더욱 이름난 이론이었다. 모두가 사람의 생각을 열고 장려할 만한 것이다. 만약 온 나라 구석구석까지 모두 이 교화로 두텁게 할 수 있다면, 짐은 앉아서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무슨 할 일이 있겠는가? 근간에 소모지가 청한 제도는 아직 완전히 경전에 통하는 내용이 아니다. 그러므로 곧 서로 살펴보아라. 경들에게 더함과 줄임을 맡기노라. 반드시 천박하고 경솔하며 음란한 일을 경계하고 막아서, 불법을 널리 펴는 데 손상됨이 없게 하라. 곧 마땅히 명령대로 이 일에 착수할지어다.”
이에 하상지가 대답하였다.
“한가한 무리들은 대부분 불법을 믿지 않습니다. 저는 평범하여 윗사람의 총명을 막아 가리는 인물로서 홀로 어리석은 정성만을 지켜왔습니다. 모자라고 엷은 덕으로 불법의 큰 가르침에 오점을 남길까 두려워하였습니다. 지금 이와 같이 포상하여 떨치라는 지시를 받으니, 제가 감히 감당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이 전(前) 시대의 뭇 영명한 인물들과 같았다면, 밝은 조서를 저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중간의 왕조 시대도 이미 먼 옛날이라 다시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양자강을 건너온 이래로 왕도(王導)·주의(周?)·유량(庾亮)·왕몽(王?)·사상(謝尙)·극초(?超)·왕탄(王坦)·왕공(王恭)·왕밀(王謐)·곽문(郭文)·사부(謝敷)·대규(戴逵)·허순(許詢) 및 죽은 고조황제의 형제인 왕원림(王元琳)·곤계인 범왕(范汪)과 손작(孫綽)·장현(張玄)·은의(殷?)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혹은 재상으로서 권좌를 보필한 우두머리였고, 혹은 인륜의 모범이 되었으며, 혹은 뜻을 하늘과 사람 사이에 두었고, 혹은 안개와 노을 밖의 신선의 세계에 높이 자취를 두었습니다. 모두가 불법에 귀의하는 뜻을 품거나, 마음으로 불법을 숭앙하여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 사이 대비할 만한 인물로는 축법란, 우법개, 축법잠, 강승연, 지둔, 축법숭, 우도수입니다. 이들은 모두 자취가 부처님에 버금가서 때로는 헤아릴 수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근세의 도인과 속인들을 펼쳐 이야기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만약 당장 두루 오랑캐와 중국[夷夏]의 인물들을 모두 거론하라 하신다면, 멀리는 한(漢)·위(魏)나라에 이르기까지, 기재(奇才)와 이덕(異德)들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혜원(慧遠) 법사는 일찍이 말했습니다.
‘석(釋)씨의 교화는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 도(道)를 향해 가는 것은 본래 교(敎)의 근원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속세를 구제하는 것도 또한 중요한 임무이다.’
가만히 이 말뜻을 찾아보니 진리의 깊은 곳과 일치하는 바가 있습니다. 왜냐 하면 만약 집집마다 계율을 지키게 한다면, 온 나라에 형벌이 종식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불도징(佛圖澄)이 조나라로 가자 두 석씨[石勒 父子]의 사나움이 줄어들고, 신령한 탑에서 광명이 뻗치자 부건(符健)의 포악함이 줄어들었습니다. 따라서 신의 도리로서 왕의 교화를 도운 것은 그 유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모지가 아뢴 바도 모두 잘못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도인과 속인을 좀먹고 손상케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수행이 잘못된 비구와 비구니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정과 모습은 분별하기 어려워서, 버리고 취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또한 금·동·토목공사가 비록 소요되는 비용이 점점 커진다 하더라도, 반드시 복업을 기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갑자기 단숨에 단절시키기도 어렵습니다. 제가 요즘 이리저리 짐작해 보느라, 나아가거나 물러가거나 편안하기 어려웠습니다. 오늘 친히 덕스런 말씀을 받드니, 참으로 깊이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양현보(羊玄保)가 앞으로 나아가 아뢰었다.
“이 이야기는 하늘과 인간세계의 즈음을 오가는 것이라 어찌 제가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건대, 진(秦)·초(楚)는 강병(强兵)의 술책을 논하고, 손자(孫子)와 오자(吳子)는 다른 나라를 평정하여 자신의 세력권에 넣으려는 계책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니 장차 여기에서 취할 것은 없겠습니까?”
이에 황제가 말하였다.
“불교는 전국(戰國)시대의 도구는 아니라서, 자못 경의 말과 같다.”
이에 하상지가 말하였다.
“무릇 숨어사는 도인을 예우하면 싸우는 병사는 태만해집니다. 어질고 덕 있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면 군병의 사기가 쇠퇴합니다. 만약 손자·오자의 뜻만을 가지고 조금이라도 다른 나라를 삼키는 일이 있게 된다면, 또한 요순의 도에서는 취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어찌 오직 불교에서만 취할 것이 없겠습니까?”
황제는 기뻐하였다.
“불문에 경과 같은 사람이 있는 것은 마치 공자에게 자로(子路)가 있던 일과 같다. 이른바 ‘악한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惡言不入於耳]’ 함이 이것이구나.”
황제는 이 때부터 신심이 일어나 비로소 생각을 불경에 두었다. 그 후 혜엄·혜관 두 승려를 만나자 곧 도의 뜻을 논하였다.
당시 안연지(顔延之)는 『이식관(離識觀)』과 『논검(論檢)』을 지었다. 황제는 혜엄에게 명하여 그 같고 다른 점을 가려내게 하여서, 하루 종일 문답을 주고받았다. 이 때 황제는 웃으면서 말하였다.
“그대들의 오늘은 예전 지둔(支遁)과 허순(許詢)의 논쟁1)에 부끄럼이 없구나.”
혜엄은 그 후 『무생멸론(無生滅論)』 및 『노자약주(老子略注)』 등을 지었다. 당시 동해(東海)의 하승천(何承天)은 모든 것에 박식하기로 이름이 난 사람이었다. 그가 혜엄에게 물었다.
“부처의 나라에서는 무슨 달력을 사용하는가?”
혜엄이 말하였다.
“천축국에서는 하지(夏至)날 방중(方中) 때가 되면 그림자가 없어진다. 이른바 천중(天中)이 이것이다. 오행에 있어서 토(土)에 해당하고, 색은 황색을 숭상하며, 숫자로는 5를 숭상한다. 여덟 치가 한 자에 해당하고, 열 냥은 이 땅의 열두 냥에 해당한다. 월건(月建)이 진월(辰月)이 되는 달(음력 3월)을 세워서 한 해의 첫 달로 삼는다.”
춘분·하지·추분·동지를 찾아 파헤쳤다. 달의 엷어짐과 월식을 미루어 살피는 데 이르기까지, 빛과 그림자의 옮겨감을 헤아리는 법이 매우 자세하였다. 또한 별자리로 해마다의 연기(年紀)를 헤아림에 있어서도 모두 조목마다 예를 갖추었다. 그러므로 하승천은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 후 바리국(婆利國)의 사람이 중국에 왔다. 과연 혜엄의 말과 같았다.
황제는 임예(任豫)에게 명령하여 이를 받아들였다.
『대열반경』이 처음 송나라 땅에 도착하였을 때 글과 말은 잘 되어 있었다. 그러나 품목의 수가 빠지고 간략하여, 처음 배우는 사람이 마음에 담아두기 어려웠다.
이에 혜엄은 혜관·사령운 등과 함께 『니원경』 원본에 근거하여 품목을 추가하였다. 글도 원본의 바탕보다 지나친 것은 고쳐 바로잡으니, 비로소 몇 개의 판본이 세상에 유행하였다.
혜엄은 곧 꿈에 형상이 극히 우람한 어떤 한 사람을 만났다. 그가 성난 목소리로 혜엄에게 말하였다.
“존귀한 『열반경(涅槃經)』에 무엇 때문에 경솔하게 그대의 짐작을 가하였는가?”
혜엄은 꿈을 깬 뒤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곧 승려들을 모아, 앞서 출간한 책을 회수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당시 알 만한 이들이 모두 말하였다.
“이는 아마도 후세 사람들을 경계하고 격려하고자 할 따름일 것이오. 만약 반드시 응할 만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책이 나온 즉시로 꿈에 나타났겠소?”
혜엄도 그렇게 여겼다. 얼마 후 다시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났다.
“그대가 경전을 널리 펴낸 힘으로 인해 반드시 부처님을 만날 것이다.”
혜엄은 전송의 원가(元嘉) 20년(443) 동안사(東安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81세이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전하였다.
“혜엄 법사는 그릇이 크고 학식이 깊어, 도를 배우는 사람들의 종사이다. 갑자기 돌아가시니 가슴이 아프고 슬프구나. 돈 5만 냥과 베 50필을 공급하라.”
법지(法智)
법지는 혜엄의 제자이다. 어려서부터 신통한 이해력이 있었다. 스물네 살 때 강릉에 갔다가, 법아(法雅)의 강론을 들었다. 곧 몇 차례 논의를 거듭하니, 법아가 더 이상 손쓸 여지가 없었다. 법아는 사부대중을 돌아보면서 말하였다.
“이 젊은 사람은 찬란하게 문장을 이룰 사람이다.”
법지는 웃으면서 말하였다.
“그것은 『시경』의 ?변풍(變風)?과 ?변아(變雅)?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이에 그의 명성은 초(楚)와 영(?) 지방에 퍼지고, 칭송의 소리는 서울과 오나라를 적셨다. 그는 『성실론(成實論)』과 『대품경(大品經)』·『소품경』에 빼어났다.
04) 석혜관(釋慧觀)
혜관의 성은 최(崔)씨며 청하(淸河) 사람이다. 열 살 때부터 박식한 견해로 이름을 날렸다. 스무 살에 출가하여 사방을 떠돌면서 수업하였다. 만년에는 여산으로 가서, 다시 혜원(慧遠)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구마라집이 관중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 남쪽에서 북방으로 가서, 새 경과 옛 경의 같고 다른 점을 찾아 그 차이를 상세히 가려냈다. 그는 풍모와 정신이 빼어나고 청아하며, 생각이 그윽하고 미묘한 경지에 들어섰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칭송하였다.
“정취를 통하기로는 도생(道生)과 도융(道融)이 가장 으뜸이며, 힐난을 정밀하게 하기로는 혜관과 승조(僧肇)가 제일이다.”
이어 법화종요서(法華宗要序)를 짓고, 구마라집에게 살펴보게 하였다. 구마라집이 말하였다.
“선남자야, 그대가 논한 내용은 매우 통쾌하다. 그대가 조금 물러나 있으면 곧 남쪽 양자강와 한 수 사이로 노닐 것이다. 잘 널리 유통시키는 것을 힘쓰도록 하라.”
구마라집이 죽은 후에 곧 남쪽 형주(荊州)로 갔다. 고을의 장군인 사마휴지(司馬休之)가 공경하고 중히 여겨, 그곳에 고리사(高?寺)란 절을 세웠다. 무릇 형(荊)과 초(楚)의 백성들로 하여금, 삿됨을 돌이켜 올바름으로 돌아오게 한 것이 십 중 다섯이나 되었다.
전송의 무제(武帝)가 남방의 사마휴지를 정벌하면서 강릉에 이르자, 혜관과 서로 만났다. 무제가 마음을 기울여 대접하기를 이전과 다름없이 하니 마치 친구와 같았다. 이어 칙명으로 서중랑(西中郞)과 교유하게 하였다. 이 사람이 곧 훗날의 문제(文帝)이다. 이윽고 서울로 돌아와 도량사(道場寺)에 머물렀다.
혜관은 이미 미묘하게 불교 논리에 빼어나고, 다시 『노자』와 『장자』를 탐구하였다. 또한 『십송률(十誦律)』에 정밀하게 뛰어나고, 여러 경전의 이치를 널리 캐내었다. 그런 까닭에 법을 찾고 도를 묻는 이들이 모여들어, 하루도 자리가 비는 날이 없었다.
원가(元嘉) 3년(426) 3월 상사일(上巳日: 첫 번째 巳日)에 황제의 수레가 곡수의 연회[曲水宴: 3월 3일에 베푸는 잔치]에 임하였다. 혜관과 조정의 선비들에게 시를 지으라고 명하였다. 혜관이 곧 앉은 자리에서 먼저 지어 바쳤다. 글 뜻이 맑고 은근하며 사리가 당시의 사정과 일치하였다. 이 때 낭야(瑯?)의 왕승달(王僧達)·여강(廬江)의 하상지도 모두 맑고 우아한 말로 기쁨을 이루어, 티끌세상 밖의 감상을 나누는 교우관계를 맺었다.
전송의 원가 연간(424~452)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1세이다. 『변종론(辯宗論)』과 『논돈오점오의(論頓悟漸悟義)』 및 ?십유서찬(十喩序贊)?과 여러 경전의 서문 등을 지었다. 모두 세상에 전한다.
승복(僧馥)
당시 도량사의 승복은 본래 풍천(?泉) 사람이다. 오로지 교리 이해[義學]에 정진하여 『승만경(勝?經)』에 주석을 달았다.
법업(法業)
또 법업도 본래 장안(長安) 사람이다. 『대품경』·『소품경』과 『잡심론(雜心論)』에 빼어났다. 푸성귀를 먹으며 몸을 절제하였다. 그런 까닭에 진릉공주(晋陵公主)가 그를 위하여 남림사(南林寺)를 지었다. 후에 그곳에서 머물렀다.
05) 석혜의(釋慧義)
혜의의 성은 양(梁)씨며 북쪽나라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였다. 격조 있는 풍모가 빼어나게 드러나고, 뜻한 바 일에서 굳세고 올곧았다. 처음 팽성(彭城) 과 송나라 사이에서 유학하고, 두루 경전의 논리에 뛰어났다. 그 후 경사로 나와서 곧 말하였다.
“기주(冀州)에 법칭도인(法稱道人)이 있었다. 임종 때 제자인 보엄(普嚴)에게 전하기를, ‘숭고산의 영험한 신이 말하기를 강동에 유장군(劉將軍)이 있다. 아마도 천명을 받아 제왕이 될 것이다. 나는 서른두 개의 큰 보석과 병 하나를 가득 메운 금으로 신표를 삼겠다’고 하였다.”
마침내 송왕(宋王)에게 알려지자 송왕이 혜의에게 말하였다.
“비상한 상서로움 역시 비상한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다음에야 이것이 이루어진다. 만약 법사가 스스로 그곳에 가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 보물을 얻을 길이 없을 것이다.”
혜의가 마침내 길을 떠났다. 진(晋)의 의희(義熙) 13년(417) 7월에 숭고산으로 가서 찾아보았으나 얻지 못하였다. 지극한 마음으로 향을 사르고 도를 행하였다. 7일째 되는 날 밤, 꿈에 수염이 긴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나타났다. 혜의를 데리고 보배구슬이 있는 곳으로 가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이 바위 밑이다.”
혜의가 다음날 곧 산중을 두루 다니다가 한 곳을 보니, 환하게 꿈에서 본 곳과 같았다. 산신령 사당의 돌 제단 아래에서 과연 크고 작은 구슬 서른두 개와 황금 한 병을 얻었다. 이 상서로움은 『송사(宋史)』에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그 후 혜의는 서울로 돌아왔다. 송의 무제(武帝)는 접대에 존중을 더욱 더하였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예우가 더욱 깊어졌다.
송의 영초(永初) 원년(420) 거기장군(車騎將軍) 범태(范泰)가 기원사(祇洹寺)를 세우고자 하였다. 혜의의 덕이 높아 세상 사람들의 종사가 될 만하다 여겼다. 절 공사를 시작해주기를 굳게 요청하였다. 혜의는 범태의 맑은 믿음이 지극하다 하여, 의궤와 규칙을 지시하여 주었다. 당시 사람들은 혜의를 사리불(舍利弗)에 비교하고, 범태를 수달(須達)장자에 비유하였다. 그런 까닭에 기원사라는 호칭이 그 일컬음에 잘 어울렸다.
그 후 서역의 많은 명승들이 이 절에 머물렀다. 혹 경전을 번역하거나, 혹 선법(禪法)을 가르쳐 전수하였다.
전송의 원가(元嘉, 424~452) 초기에 서선지(徐羨之)·단도제(檀道濟) 등이 조정의 정치에 전권을 행사하였다. 범태는 불평하는 기색을 품었다. 언젠가 한 번은 말을 마음껏 하여 이들을 꾸짖으니, 서선지 등이 깊은 유감을 품었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범태가 추측할 수 없는 위기에 처했다고 모두들 근심하였다. 범태도 역시 화가 미칠까 염려하였다. 곧 자기 몸을 안전하게 할 방법을 혜의에게 물었다. 혜의가 대답하였다.
“충성과 순종을 잃지 않음으로써 그 윗사람을 섬기는 까닭에, 위아래가 서로 가까울 수 있는 것이니, 무슨 근심할 만한 염려가 있겠습니까?”
이어 범태에게 권유하여 과죽원(果竹園) 60무(畝)를 절에 시주하여, 보이지 않는 신의 도움을 받으라 하였다. 범태가 이에 따랐으므로 끝까지 그의 복을 누렸다.
범태가 죽자 셋째 아들 범안(范晏)이 혜의에게 말하였다.
“예전에 저의 아버님이 위험함을 틈타 설득하여, 과죽원의 땅을 요구한 일은 두고두고 유감스럽습니다.”
마침내 이 땅을 빼앗고 주지 않았다. 혜의는 범태의 유소(遺疏)를 증거로 삼아 분규를 일으켜 시끄러워지자, 세상 사람들의 이목에 드러났다.
이에 혜의는 마침내 자리를 옮겨 오의사(烏衣寺)에 머물면서 혜예(慧叡)와 함께 머물렀다.
전송의 원가 21년(444) 오의사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3세이다. 그 후 범안도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범안의 아우 범엽(范曄)은 공희선(孔熙先)의 역적 모의에 가담해 그 일족이 함께 괴멸되었다.
석승예(釋僧叡)
그 후 기원사에 석승예가 있었다. 삼론(三論)에 빼어나 송 문제(文帝)의 존중을 받았다.
06) 석도연(釋道淵)
도연의 성은 구(寇)씨며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출가하여 서울의 동안사 (東安寺)에 머물렀다. 어려서부터 계율을 지키고 오랫동안 교학을 익혀, 많은 경전과 논리를 따지는 데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빛을 숨기고 덕을 숨겨, 세상에서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 후 동안사에서 개강하였다. 그윽하고 미묘한 논리를 해부 분석하고, 깊숙이 숨어 있는 진리를 모두 훤하게 밝혔다. 예전부터 적체되어 온 문제점들을 빛나게 얼음 녹듯 풀이하였다. 이에 배우는 무리들이 그를 다시 보고, 성대하게 그의 덕에 의지하였다.
그 후 팽성사(彭城寺)로 자리를 옮겨 머물렀다. 전송의 문제(文帝)는 도연의 행실이 많은 사람들의 규범이 된다 하여, 칙명을 내려 절의 주지로 머물렀다.
그 후 주지하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8세이다.
혜림(慧琳)
도연의 제자인 혜림은 성이 유(劉)씨며, 진군(秦郡) 사람이다. 여러 경전과 『노자』와 『장자』에 빼어나고, 해학과 농담을 좋아하였다. 글을 짓는데 뛰어나기 때문에 열 권의 문집을 지었다.
그러나 성품이 오만하고 방종하여 자못 스스로의 자긍심으로 남을 얕보았다. 어느 날 도연이 부량(傅亮)을 찾아갔다. 혜림이 먼저 와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도연을 보고도 예를 갖추지 않았다. 이에 도연이 얼굴빛에 노함을 나타내었다. 부량이 마침내 그 벌로 혜림에게 곤장 20대를 때렸다.
전송의 세조(世祖)황제도 자못 혜림을 존중하여 불러들여 만나곤 하였다. 그 때마다 항상 홀로 앉는 걸상에 올라앉았다. 안연지(顔延之)가 늘 이를 비난하니, 황제도 곧 좋아하지 않았다.
그 후 『백흑론(白黑論)』을 지었지만, 불교의 도리에 어긋났다. 형양태수(衡陽太守) 하승천(何承天)이 혜림과 가까이 친교를 맺어 평소 서로를 격양시켰다. 그는 『달성론(達性論)』을 지었다. 모두가 일방적으로 막히고 치우쳐 불교를 꾸짖고 나무랐다. 안연지와 종병(宗炳)이 이 두 논설을 따져 반박하기를, 각기 만여 글자로 하였다.
혜림은 이미 스스로 그의 법을 허물었기에, 교주(交州)로 배척당하여 유배 되었다. 세상에서 이르기를 “도연이 마성(麻星)을 만났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을 두고 한 말이다.
07) 석승필(釋僧弼)
승필은 본래 오(郡)나라 사람이다. 텅 비운 성품과 간결한 도량에다, 행동거지가 방정하고 곧았다. 어려서 용광사의 담간(曇幹)과 함께 장안에 노닐어 구마라집에게서 수학하였다. 날을 아끼고 힘을 아껴 자못 깊은 생각이 있었다. 구마라집의 칭찬이 더해져서 그를 경전의 번역에 참여시켰다.
그 후 이름난 나라를 떠돌아다니며, 풍속과 교화를 두루 구경하였다. 당시 어떤 사람이 승필에게 절의 주인이 되어 달라고 청하였다. 승필이 그에게 말하였다.
“지극한 도[至道]를 널리 펴지 않으면, 순박한 기풍이 날로 멀어집니다. 스스로 선정과 지혜를 아울러 구족한 사람이 아니라면, 아름다운 도풍을 세워서 다스릴 수 없습니다. 게다가 마땅히 인연 따라 이익을 가져와야 하거늘, 어찌 홀로 한 절만을 좋게 할 수 있습니까?”
그 후 남쪽 초(楚)나라 영읍(?邑)에 자리잡았다. 10여 년 동안 경전과 계율을 가르치고 권유하여, 크게 강남 지방을 교화하였다. 하서왕(河西王) 저거몽손(沮渠蒙遜)이 멀리서 이름난 풍모에 고개 숙였다. 사람을 보내어 공경하는 마음을 전하여, 보내오는 보시가 줄을 이었다.
그 후 서울로 내려와 팽성사에 머물렀다. 문제(文帝)가 그의 그릇됨을 존중하여 늘 초청해서 강설하게 하였다.
전송의 원가(元嘉) 19년(442)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8세이다.
08) 석혜정(釋慧靜)
혜정의 성은 왕(王)씨며 동아(東阿) 사람이다. 어렸을 때 이수(伊水)와 낙수(洛水) 지방에서 유학하였다. 만년에는 서주(徐州)와 연주(袞州)를 유력하였다. 얼굴은 매우 검으나, 빼어난 식견이 맑고 멀리까지 미쳤다.
당시 낙양 안의 도경(道經)도 슬기로운 이해력이 당세(當世)에 높아, 혜정과 명성을 나란히 하였다. 그의 귀가 매우 크고 길었던 까닭에 당시 사람들은 말하였다.
“낙수에는 귀가 크고 긴 인물이 있고, 동아에는 먹처럼 검은 얼굴의 인물이 있다네. 묻는 말에 응수 못하는 것이 없고, 응수하면 막히지 않는 사람이 없다네.”
혜정은 지극하게 성품이 허통하고 맑으며, 소상하게 생각하는 힘이 있었다. 법륜을 한 번 굴릴 때마다 곧 책을 짊어지고 찾아오는 사람이 천 명이었다. 나라 안의 학문을 일삼는 이들이 반드시 모여들지 않음이 없었다.
『법화경』과 『소품경』을 외우고, 『유마경(維摩經)』과 『사익경(思益經)』에 주석을 달았다. 『열반약기(涅槃略記)』·『대품지귀(大品旨歸)』·『달명론(達命論)』을 지었다. 아울러 여러 법사들의 뇌문(?文: 弔文)을 지어 대부분 북쪽 땅에 유전되었다. 그러나 양자강을 넘어 전해진 것은 많지 않다.
그는 전송의 원가 연간(424~452)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0여 세이다.
09) 석승포(釋僧苞)
승포는 경조(京兆) 사람이다. 그는 어렸을 때 관중(關中)의 구마라집에게서 수학하였다. 전송의 영초 연간(420~422)에 북서(北徐) 지방을 유행하였다. 황산정사(黃山精舍)에 들어가 다시 정(靜)·정(定) 두 스승을 찾아가 학업에 매진하였다.
이어 그곳에서 21일간의 보현재참(普賢齋懺)을 행하였다. 7일째 되던 날 흰 고니들이 날아와, 보현보살의 자리 앞에 모여들었다. 중간에 이르러 향을 나누어 주는 의식을 마치자 고니들이 떠났다. 21일째 되던 날 해가 저물 무렵에, 또 노란 옷을 입은 네 사람이 탑을 몇 바퀴 돌더니 문득 사라졌다.
승포는 어려서 지조와 절개가 있었다. 더욱이 상서로운 일까지 감응한 까닭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이로 인하여 더욱 굳세졌다. 날마다 만여 글자의 경전을 외우고, 항상 수백 배씩 절을 올렸다.
그 후 동쪽 서울로 내려갔다. 때마침 기원사(祇洹寺)에서 강론을 여는 시기를 만났다. 법도들이 운집하고 선비와 서민들이 강석으로 달려왔다. 승포는 처음으로 그곳에 온 사람이라 그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나귀를 타고 가서 강론을 보았다. 의복은 더럽고 해어지며, 용모는 바람과 먼지에 시달린 모습이었다. 법당 안은 이미 좁아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나귀의 안장에 앉아 문 밖에서 강론을 들었다.
높은 자리에 앉은 법사가 강론을 끝내자, 승포가 비로소 몇 마디 말을 하려 하였다. 법사가 물었다.
“객승의 이름은 무엇인가?””포(苞)라 하오이다.””무엇을 모두 꾸러미에 쌌는가[苞]?””높은 자리에 앉은 법사도 꾸러미에 쌀 수 있소이다.”
이어 몇 차례 다른 질문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모두가 앞서 다다른 뛰어난 이의 생각과 힘인지라, 법사가 미칠 수 없는 경계였다. 높은 자리에 앉은 법사는 그의 말에 대항할 길이 없어, 마침내 자리를 내어 주고 물러났다.
당시 왕홍(王弘)과 범태(范泰)가 승포가 논의하는 말을 들었다. 그 재치 있는 생각에 감탄하여 더불어 말을 나누기를 청하였다. 이에 기원사에 머물면서 많은 경전의 강론을 열고, 불법의 교화를 이어나갔다.
이에 진군(陳郡)의 사령운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승포를 만났다. 그의 정신과 기개를 보고 더욱 깊이 탄복하였다. 어떤 사람이 승포에게 물었다.
“사령운은 어떤 사람인가?””사령운은 재주는 남음이 있으나 식견이 부족합니다. 어쩌면 몸에 닥치는 재난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느 날 승포는 길을 가다가 여섯 명의 도적들이 관리에게 붙잡힌 것을 보았다. 승포는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고, 관세음보살을 염송하기를 권유하였다. 여러 도적들이 위태한 지경에 처하자, 간절히 염불하고 또 염불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그들을 송치하던 관리가 술을 마시고 크게 취하였다. 도적들은 족쇄를 풀고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송의 원가 연간(424~452)에 세상을 떠났다.
법화(法和)
당시 와관사(瓦官寺)의 법화도 논리를 따지는데 정밀하게 뛰어났다. 그 시대에 명성을 이루어, 전송 고조(高祖)황제의 존중을 받아 칙명으로 승주(僧主)가 되었다.
10) 석승전(釋僧詮)
승전의 성은 장(張)씨며 요서(遼西) 해양(海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연(燕)·제(齊) 지방에 떠돌면서 두루 불전 이외의 경전을 배웠다. 스무 살 때 비로소 출가하였다. 다시 삼장을 정밀하게 닦아, 북쪽 땅 학자들의 종사가 되었다. 그 후 양자강을 넘어 서울에 머물렀다. 자리를 깔고 크게 강론을 펴니 교화가 강남 땅을 적셨다.
오군(吳郡)의 장공(張恭)이 오군으로 돌아와 강설하기를 청하였다. 고소(姑蘇) 일대의 선비들은 모두 그의 덕을 사모하여 마음으로 귀의하였다.
처음 한거사(閑居寺)에 머물다가 만년에는 호구산(虎丘山)에서 쉬었다. 이에 앞서 승전은 황룡국(黃龍國)에서 1장 6척의 금불상을 조성하였다. 오군으로 들어가자 다시 금불상을 조성하여, 호구산의 동사(東寺)에 안치하였다.
승전은 성품이 보시하기를 좋아하여,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두루 도왔다. 맑고 확고하게 자신을 지켜서, 거처하는 곳에 비단이나 돈이 없었다.
그 후 평창(平昌)의 맹의(孟?)가 여항(餘杭)에 방현사(方顯寺)를 세웠다. 승전을 초청하여 그곳에 머물렀다. 대중을 거두는 데 부지런하고, 좌선과 예불을 쉬는 일이 없었다. 더구나 보살피느라 지나치게 애쓰다 보니, 급기야는 앞을 못 보았다. 그러나 더욱 정성을 다해 책려하고, 강의도 그만두지 않았다.
오국(吳國)의 장창(張暢)·장부(張敷)와 초국(?國)의 대옹(戴?)·대발(戴勃)도 모두 덕을 사모하였다. 사귐을 맺고 숭배하여 스승으로 예우하였다.
그 후 승전은 잠시 임안현(臨安縣)으로 떠돌다가 동공조(董功曺)의 집에 투숙하였다. 그는 청신한 불제자였다. 승전이 그곳에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병에 걸려 몹시 위독하였다. 항상 그가 조성한 불상이 와서 서쪽 벽에 머무는 것을 보았다. 또한 여러 하늘의 동자(童子)들이 모두 와서 간병하는
것을 보았다.
제자 법랑(法朗)은 꿈에 몇 사람이 받드는 어떤 높은 대(臺)를 보고 물었다.
“어디로 떠나십니까?”
그들이 답하였다.
“승전 법사를 영접하러 가는 길이오.”
이튿날 아침 과연 승전이 세상을 떠났다. 현령(縣令) 완상지(阮尙之)가 백토산(白土山)에 있는 곽문거(郭文擧) 묘지의 바른 편에 장사지냈다. 예전에 양홍(梁鴻)을 요리(要離)의 묘 옆에 부장(附葬)한 고사를 본받은 것이다.
특진관(特進官) 왕유(王裕)와 덕이 높은 선비 대옹이 승전의 묘소에 이르렀다. 돌을 깎아 비를 세웠다. 당사현(唐思賢)이 비문을 지었으며, 장부가 조문을 지었다.
11) 석담감(釋曇鑒)
담감의 성은 조(趙)씨며 기주(冀州)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축도조(竺道祖)를 스승으로 섬겼다. 푸성귀를 먹고 거친 베옷을 입으며, 율행에 간절한 정성을 기울였다. 많은 경전을 배워 연구하였다. 아울러 논리를 따지는데도 빼어났다.
구마라집이 관중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지팡이를 짚고 찾아가 그를 따라 배웠다. 구마라집은 항상 말하였다.
“담감은 한 번 들으면, 들은 것을 잘 간직하는 사람이다.”
그 후 사방을 떠돌아다니며 두루 교화를 베풀었다. 형주(荊州)에서 강릉에 도달하여 신사(辛寺)에 머물렀다. 나이가 60에 들어서자, 힘껏 수행하기를 더욱 맑게 하였다. 항상 안양(安養)정토에 태어나기를 소원하여 아미타불을 우러러보았다.
그 후 제자인 승제(僧濟)가 그의 곁을 떠나 상명사(上明寺)로 가자, 담감이 말하였다.
“네가 떠나는 일이야 아름답기는 하다만, 아마도 다시 서로 만나지 못할 것이야.”
그러고는 간곡하게 조목조목 들어 법을 부촉하였다. 밤이 되자 모든 연로한 승려들과 함께 무상(無常)을 서술하였다. 그 말이 매우 간절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각각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담감은 홀로 낭하(廊下)를 서성거렸다. 삼경(三更)에 이르러 사미인 승원(僧願)이 방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담감이 말하였다.
“너는 돌아가 자거라. 다시 오지 말아라.”
이튿날 새벽에 이르러 제자인 혜엄(慧嚴)이 평상시처럼 문안을 드렸다. 그러나 담감이 합장하고 편안하게 앉아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피니, 사실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그의 신체는 부드럽고, 깨끗한 향기는 평상시보다 두 배나 더하였다. 이를 알리고 시신을 염하였다. 그 때 나이는 70세이다.
오군(吳郡)의 장변(張辯)이 전기(傳記)와 찬을 지었다. 그는 찬한다.
여지(?枝) 풀 향기 뿜듯
근옥(瑾玉) 구슬 맑게 드러나듯
심오하신 님이여,
물들지도 물들이지도 않네.
어려선 찬란한 빛이
늙어선 가지마다 울창함이
신의 세계 노닌다고
어찌 참된 헤어짐일까.
披?逞芬 握瑾表潔
渾渾法師 弗淄弗涅
暐曄初辰 條蔚暮節
神遊智往 豈伊實訣
도해(道海)·혜감(慧龕)·혜공(慧恭)·담홍(曇泓)·도광(道廣)·도광(道光)
당시 강릉의 도해·북주(北州)의 혜감·동주(東州)의 혜공·회남(淮南)의 담홍·동원산(東轅山)의 도광·홍농(弘農)의 도광 등이 있었다. 모두 안양정토에 태어나기를 소원하였다. 임종 때 상서로운 감응이 있었다.
12) 석혜안(釋慧安)
혜안은 어디 사람인지 확실하지 않다.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간절한 정성을 기울여 배움이 경전의 논리에 통달하였다. 아울러 설법을 잘하였다. 또한 오로지 계율을 지켜 칭송을 받았다. 40여 만 글자의 경전을 암송하였다. 여산(廬山)의 능운사(陵雲寺)에 머물렀다. 배우는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고, 천 리 밖에서도 바람처럼 따랐다.
항상 지팡이 하나를 손에 쥐고 말하였다.
“이것은 서역의 승려가 보시한 지팡이다.”
지팡이의 빛과 색깔은 현란하였다. 또한 자못 향기도 감돌았다. 지팡이 위쪽에 범어로 된 글[梵書]이 새겨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글 뜻을 아는 이가 없었다.
그 후 관중에 들어가 구마라집을 찾아뵈었다. 쥐던 지팡이도 스스로 그를 따라왔다. 구마라집이 그 지팡이를 보고 놀랐다.
“이 지팡이가 여기에 있었나?”
이어 그 범어 글자를 번역하였다.
“본래 천축국의 사라림(娑羅林)에서 태어났다. 남방이 어지러워지면 초야에 의지하여 일어나리라. 후에 구마라집을 만나면 도의 가르침이 융성해질 것이다.”
혜안은 그 후 지팡이를 외국 승려 바사나(波沙那)에게 선물하였다. 바사나는 이것을 가지고 서역으로 돌아갔다. 혜안은 전송의 원가(元嘉) 연간(424~452)에 산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13) 석담무성(釋曇無成)
담무성의 성은 마(馬)씨며 부풍(扶風) 사람이다. 집안 어느 대[家世]인가에 피난하여 황룡(黃龍)으로 옮겨 살았다. 열세 살에 출가하였다. 실천하는 업이
맑고 바르며, 빼어난 영특함에 짝이 없었다. 아직 구족계를 받기도 전에 곧 문답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구마라집이 관중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책 보따리를 등에 지고 그를 찾아갔다. 그곳에 이르러 구마라집을 만나니, 구마라집이 물었다.
“사미가 어떻게 먼 곳에서 올 수 있었는가?”
그가 대답하였다.
“도를 듣고자 찾아왔습니다.”
구마라집이 그를 매우 좋아하였다. 이에 길 떠나길 멈추고 배움에 힘쓰니, 지혜와 학업이 더욱 깊어졌다. 요흥(姚興)이 담무성에게 말하였다.
“마계장(馬季長)은 고명한 석학이었으나, 당시 세상에서 교만하였네. 법사는 아마도 그렇지는 않겠지?”
그가 대답하였다.
“도로써 마음을 굴복시키는 것은 그러한 허물을 제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요흥은 그를 매우 남다르게 생각하여 공급하는 것이 크게 두터웠다. 요흥의 운수가 장차 기울려 하자, 관중은 위태하고 어지러워졌다. 담무성은 곧 회남(淮南)의 중사(中寺)에서 휴식하면서, 『열반경』과 『대품경』을 항상 바꾸어가며 강설하였다. 그러자 수업하는 사람이 2백여 명이었다.
안연지(顔延之)·하상지(何尙之)와 함께 실상을 논하면서 새벽까지 토론을 계속하였다. 담무성은 『실상론(實相論)』과 『명점론(明漸論)』을 지었다.
전송의 원가 연간(424~452)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4세이다.
담경(曇?)
당시 중사에는 또한 담경이 있었다. 담무성과 동학(同學)으로 이름을 나란히 하여, 전송의 임천강왕(臨川康王) 의경(義慶)의 존중하는 인물이 되었다.
14) 석승함(釋僧含)
승함은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경전과 역사와 천문과 산수에 뜻을 두텁게 하였다. 장성하여서는 불교 논리에 뛰어났으며, 아울러 논리를 따지는데도 밝았다. 더욱이 『대열반경』에 빼어나 항상 강설하여 그만두지 않았다.
원가(元嘉) 7년(430) 신흥태수(新興太守) 도중조(陶仲祖)가 영미사(靈味寺)를 세웠다. 승함의 도풍과 규범을 흠모하였다. 그를 초청하여 이곳에 머물렀다. 승함은 대중을 도우며 맑고 삼가하여, 3업(業)에 어긋남이 없었다.
그 후 서쪽 역양(歷陽)에 떠돌며 불법을 널리 알렸다. 그러자 강남의 도인과 속인들이 소문을 듣고는, 따르는 사람들이 숲을 이루었다.
당시 임성(任城)의 팽승(彭承)이 『무삼세론(無三世論)』을 지었다. 이에 승함은 곧 『신불멸론(神不滅論)』을 지어 대항했다. 무릇 보고 들은 사람들치고, 곧 땅에 떨어지려 하는 불법을 다시 일으켰노라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또 『성지원감론(聖智圓鑑論)』과 『무생론(無生論)』·『법신론(法身論)』·『업보론(業報論)』 및 『법화종론(法花宗論)』 등을 지었다. 모두 세상에 전한다. 얼마 후 남쪽 구강(九江)에 노닐면서 크게 경법을 떨쳤다.
낭야의 안준(顔峻)이 당시 남중랑(南中郞)의 기실참군(記室參軍)이 되었다. 따라서 심양(?陽)에 주둔하였다. 승함과 서로의 그릇됨을 존중하여, 만나면 반드시 종일토록 지냈다.
어느 날 승함은 가만히 안준에게 말하였다.
“만약 예언이 허망한 것이 아니라면, 서울에 곧 재앙과 난리가 있을 것이오. 진인(眞人)의 부신[符]은 응당히 전하에게 속해 있으니, 시주께서는 이 일에 입을 다물어야 하오.”
그런데 갑자기 원흉이 역모를 일으켰다가 세조(世祖)가 황제가 되었으니, 과연 그의 말과 같았다.
그 후 평안하고 건강하여 병이 없었다. 문득 대중들에게 고별의 인사를 알렸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천명(天命)을 아는 이라 하였다.
석도함(釋道含)
당시 석도함도 학문과 깨우침에 공부가 있어 『석이십론(釋異十論)』을지었다.
15) 석승철(釋僧徹)
승철의 성은 왕(王)씨며, 본래 태원(太原) 진양(晋陽) 사람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형제 두 사람이 양양에서 임시로 살았다. 승철은 열여섯 살에 여산으로 혜원을 찾아갔다. 혜원은 그를 보고 남다르게 생각하여 물었다.
“차라리 출가할 생각은 없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번뇌를 멀리하고 속세를 떠나는 일은 원래 저의 본심입니다. 먹줄을 놓는다거나 쇠를 달구는 일에서는 종장의 뜻대로 하소서.”
혜원이 말하였다.
“그대가 도에 입문한다면, 곧 더 이상의 두려움이 없는 법문을 얻을 것이다.”
이에 관에 꽂는 비녀를 벗어버렸다. 몸을 맡겨 혜원을 따라 수업하여, 두루 수많은 경전을 배웠다. 더욱이 『반야경』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또한 그는 도를 묻는 가운데 여가가 있으면, 마음을 문장과 시를 짓는 일에 두었다. 한 편의 문장이나 한 수의 시를 짓는데, 바로 붓을 대자마자 문장을 완성하였다[落筆成章].
어느 날 여산의 남쪽에 있는 소나무에 올라가 휘파람을 불었다. 맑은 바람이 먼 곳에서 모여들고, 뭇 새들이 이에 화답하며 울었다. 이처럼 그에게는 세속을 벗어난 빼어난 기운이 있었다. 물러나 절에 돌아와서 혜원에게 물었다.
“율법에는 음악을 규제하고, 계율에는 노래와 춤을 끊으라 하였습니다. 노래를 한 번 부르고 휘파람을 한 번 부는 것은 해도 괜찮습니까?”
혜원이 말하였다.
“산란해지는 점으로 말한다면 모두가 위법이다.”
이로 말미암아 곧 중지하였다. 스물네 살이 되자 혜원은 그에게 『소품경』을 강의하게 하였다. 당시 같은 동년배들에게는 아직 허락하지 않았던 일이다. 자리에 오르자 글 뜻을 분명하게 분석하여, 듣는 사람이 그의 칼날 같은 기세를 꺾을 길이 없었다. 이에 혜원이 그에게 말하였다.
“전에 너와 겨루며 대적하던 사람들은 모두 남은 힘이 없어졌다. 너의 방어벽은 엄중하고 견고하여, 공격하던 사람들이 군병을 잃고 수레바퀴를 돌리게 하였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자못 쉬운 일은 아니다.”
이로써 문인들이 그를 추대하고 감복하였다.
혜원이 죽은 뒤에는 남쪽 형주로 떠돌다, 강릉성 안의 오층사(五層寺)에 머물렀다. 만년에는 비파사(琵琶寺)로 자리를 옮겼다.
팽성왕(彭城王) 의강(義康)과 의동(儀同) 소사화(蕭思話) 등도 모두 그에게서 계법을 받기 위해, 그를 초청하여 재를 마련하고, 몸소 음식을 상에 내려놓았다.
전송의 원가 29년(452)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0세이다. 자사(刺史) 남초왕(南?王) 유의선(劉義宣)이 그를 위하여 분묘를 조성하였다.
승장(僧莊)
당시 형주의 상명사에 있는 승장도 『열반경』과 논리를 따지는 데 빼어났다. 전송의 효무황제 초기에 칙명으로 서울에 내려오라 하였다. 그러나 병을 핑계로 가지 않았다.
16) 석담제(釋曇諦)
담제의 성은 강(康)씨이다. 선조들은 강거(康居) 사람이다. 한(漢)의 영제(靈帝) 때 자리를 옮겨 중국에 가까이하였다. 헌제(獻帝) 말기의 난리로 인해 오흥(吳興)에 머물렀다. 담제의 아버지 강융(康?)은 일찍이 기주(冀州)의 별가(別駕: 벼슬이름)가 되었다.
담제의 어머니 황(黃)씨가 낮잠을 자다가, 꿈에 한 승려를 만났다. 그가 황씨에게 어머니라 부르며, 하나의 털이개와 철루(鐵鏤: 무쇠에 조각한 것)로 된 서진(書鎭: 文鎭) 두 개를 주었다. 잠을 깨서 보니 두 가지 물건이 모두 있었다. 이어 잉태하여 담제를 낳았다.
담제의 나이 다섯 살 때 어머니가 털이개 등을 그에게 보여주니, 담제가 말하였다.
“진왕(秦王)이 선물한 것입니다.”
어머니가 물었다.
“너는 어디에 두었었느냐?””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열 살이 되자 출가하였다. 스승을 따라 배우지 않았으나, 깨달음이 천연적으로 일어났다.
그 후 그는 부친을 따라 번주(樊州)와 등주(鄧州) 지방으로 갔다. 가는 길에 우연히 관중의 승략(僧?) 도인을 만났다. 문득 승략의 이름을 부르니, 승략 도인이 말하였다.
“동자가 어떻게 이 늙은이의 이름을 부르시나?”
담제가 말하였다.
“조금 전에 불쑥 부른 것은, 그대가 전에 이 담제의 사미였기 때문입니다. 대중 승려를 위해 나물을 캐다가 멧돼지에게 몸을 다친 일이 있어, 나도 모르게 잘못 소리친 것입니다.”
승략은 전에 홍각(弘覺) 법사의 제자로서, 승려들을 위해 나물을 캐다가 멧돼지에게 몸을 다친 일이 있었다. 승략은 처음에는 이 일을 기억하지 못하여, 곧 담제의 부친을 찾아갔다. 부친이 담제가 태어날 때의 시말을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아울러 털이개와 서진 등을 보여주니, 승략이 이에 깨닫고 울면서 말하였다.
“이 분은 돌아가신 저의 스승, 곧 홍각 법사이십니다. 선사께서는 전에 요장(姚?)을 위하여 『법화경』을 강의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제가 도강직(都講職)을 맡아 보았습니다. 요장이 이 두 가지 물건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홍각 법사께서 돌아가신 날을 계산해보니, 바로 이 물건을 맡기신 날이었습니다. 다시 나물 캐던 일까지 기억이 나니, 더욱 슬픔이 북받칩니다.”
그 후 담제는 경전을 두루 편람하면서, 눈에 지나가는 것은 곧 기억하였다.
만년에는 오군(吳郡)의 호구사(虎丘寺)로 들어갔다. 『예기(禮記)』와 『주역(周易)』·『춘추(春秋)』를 각기 일곱 번씩 강의하였다. 『법화경』·『대품경』·『유마경』을 각기 열다섯 번씩 강의하였다. 또한 글을 잘 지어, 여섯 권의 문집이 있다. 역시 세상에 전한다.
성품이 숲과 개울을 사랑하여, 후에 오흥(吳興)으로 돌아갔다. 고장(故章) 곤륜산(崑崙山)에 들어가서, 20여 년간 개울물을 마시며 한가롭게 살았다.
전송 원가 연간(424~452)의 말기에 산의 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60여 세이다.
17) 석승도(釋僧導)
승도는 경조(京兆) 사람이다. 열 살에 출가하여 스승을 따라 수업하였다. 스승이 『관세음경』을 그에게 주었다. 그것을 다 읽고는, 그가 스승에게 물었다.
“이 경은 모두 몇 권이 있습니까?”
스승은 그를 시험해보고자 말하였다.
“오직 이 한 권뿐이다.”
승도가 말하였다.
“처음에 ‘그 때 다 하지 못한 뜻’이라 하였기 때문에, 그 이전에 이미 상응하는 어떤 일이 있음을 알겠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크게 기뻐하여 『법화경』 한 부를 주었다. 이에 밤낮으로 그것을 보고, 뜻을 찾아 거칠게나마 의미를 해득하였다. 가난하여 기름과 촛불이 없었으므로, 항상 땔감을 주워서 책을 비춰보곤 하였다[採薪自照].
열여덟 살이 되자 다방면에 읽은 것이 더욱 많아졌다. 원기의 바탕이 씩씩하고 용감하며, 영묘한 작용이 빼어나게 드러났다. 행동거지가 올바르고 고상하며, 거동이 또한 사람들의 마음을 거슬리게 하는 일이 없었다. 승예가 그를 보고 기특하게 여겨 물었다.
“그대는 불법에서 무엇이 되고자 원하는가?”
승도가 대답하였다.
“법사가 되어 도강(都講)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에 승예가 말하였다.
“그대는 바야흐로 곧 만인의 불법의 우두머리가 될 사람이다. 어찌 자잘한 승려들을 상대로 하여 부양시키는 정도에서 그치겠는가?”
구족계를 받음에 이르러 식견이 더욱 깊어져서, 선(禪)·율·경론이 저절로 마음속에 들어앉을 만큼 통달하였다.
요흥(姚興)이 그의 덕업을 흠모하여 벗으로서 사랑하였다. 절에 들어오면 찾아가서, 가마를 타고 함께 궁전으로 돌아갔다. 구마라집이 경론을 번역해 내려 하였다. 그러자 그도 함께 하여, 참조하고 의논하며 자세하게 내용을 바로잡았다.
승도는 이미 본래부터 풍채가 좋은데다 관중(關中)의 성대한 모임을 만났다. 이에 많은 경전을 계획하고, 널리 진제와 속제의 이치를 캐내었다. 곧 『성실(成實)』과 삼론(三論)의 의소(義疏)와 『공유이제론(空有二諦論)』 등을 지었다.
그 후 전송의 고조(高祖) 황제가 서쪽 장안을 토벌하였다. 군주 노릇하던 자[僞主]를 사로잡아 관내(關內)를 쓸어버리고 깨끗이 하였다. 그는 이미 평소 자자하게 승도의 명성을 들었다. 그러므로 곧 요청하여 상견하더니, 승도에게 말하였다.
“서로 멀리서 바라본 지 오래인데, 어쩌면 그리도 풍속이 다른 곳에서 지체하였는가?”
승도가 대답하였다.
“명공께서 천하를 소탕하여 말발굽소리가 황하와 낙수에 울렸습니다. 이 때에 서로 만나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고조황제가 깃발을 돌려 동쪽으로 돌아가면서, 아들인 계양공(桂陽公) 의진(義眞)을 그곳에 남겨두어, 관중 지방에 주둔하게 하였다.
헤어질 때 고조가 승도에게 부탁하였다.
“나이 어린 것을 이곳에 남겨 주둔하게 하였다. 원컨대 법사가 때때로 돌아보고 마음에 품어주기를 바란다.”
그 후 의진은 서쪽 오랑캐 발발혁련(勃勃赫連)에게 핍박당하였다. 관남(關南)을 향해 가다가 중도에서 어지럽게 패배하였다. 그러자 추한 오랑캐들이 흉포한 기세를 타고 추격하였다. 기병이 곧 그의 몸 가까이 당도하였다. 승도는 제자 수백 명을 거느리고, 중간에서 오랑캐들을 가로막았다. 의진을 추격하는 기병들에게 말하였다.
“유공(劉公)이 아들을 부탁한 일이 있소. 빈도는 지금 곧 죽음으로써 그를 전송하려 하오. 반드시 잡지도 못할 것이니, 번거롭게 추격할 필요가 있겠소이까?”
뭇 오랑캐들은 그의 신비한 기운에 놀라, 마침내 칼날을 되돌려 돌아갔다.
의진은 달아나 풀밭에 숨어 있었다. 때마침 그의 중병(中兵) 단굉(段宏)을 만나 끝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이는 무릇 승도의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고조황제는 이 일에 감격하여, 아들과 조카 내외로 하여금 그를 스승으로 섬기게 하였다.
그 후 수춘(壽春)에 절을 세웠다. 곧 동산사(東山寺)가 그곳이다. 항상 경론을 강설할 때마다 수업하는 문도들이 천여 명이었다. 그 당시 오랑캐들이 갑자기 불법을 멸하였다. 그러니 사문들이 난을 피해 이곳에 투신하는 사람이 수백 명이었다. 그들 모두에게 옷과 음식을 공급하였다. 오랑캐에게 죽음을 당한 모든 사람을 위해서 모임을 마련하였다. 향을 나누어 주고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였다.
효무제(孝武帝)가 제왕의 자리에 오르자 사신을 파견하여 불러들였다. 생각을 돌이키어 조서에 응하여 서울의 중흥사(中興寺)에 머물렀다. 황제의 가마가 이곳을 찾아오자, 몸소 나가서 영접하고 안부를 물었다.
승도는 효건(孝建) 연간(454~456) 초기에 3강(綱)이 다시 시작되었다 하여, 이 일에 감격하고 가슴에 품어, 스스로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황제도 역시 목이 메어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였다. 곧 와관사에 칙명을 내려 『유마경』의 강론을 열도록 명령하였다. 황제가 친히 그곳으로 거동하니, 공경대부들도 모두 다 모여들었다. 승도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 말하였다.
“예전에 부처님께서 왕궁에 탄생하시고 쌍수(雙樹)에서 입멸을 보이신 이래로, 천 년의 세월이 넘었습니다. 그 때의 순후한 근원은 영원히 떠나갔어도, 경박한 풍속은 뒤따라오지 않았습니다. 급고독원은 폐허가 되고, 녹야원은 허물어진 풀밭이 되었습니다.
아흔 다섯 종류의 삿된 견해를 지닌 자들은 아래로 나아가는 길을 높은 곳으로 오르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삼계의 중생들은 불이 난 집을 청정한 불국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들이 어찌 주상전하께서 눈물을 흘리고, 보살들 이 서성거리며 방황하는 것을 알겠습니까?”
이어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사부대중들이 이 일 때문에 얼굴빛을 바꾸었다. 다시 황제에게 말하였다.
“법을 보호하는 일과 도를 널리 펴는 일을 제왕보다 더 앞서 할 사람은 없습니다. 폐하께서 만약 네 가지 평등심(平等心)을 움직이시어, 위태로운 사람을 가엾게 여기시고 착한 일을 권유하실 수 있다면, 모래밭과 기왓장이 흩어져 있는 이 세계가 곧 자재천궁(自在天宮)이 될 것입니다.”
황제는 오래도록 훌륭하다고 칭송하였다. 앉아 있는 사람들도 모두 기뻐하였다.
그 후 하직하여 수춘으로 돌아와 석간사(石澗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96세이다.
승인(僧因)
당시 승인도 당시 세상에 이름난 이로 승도와 버금갔다. 어떤 사람이 승인에게 물었다.
“법사와 승도 가운데서 누가 더 훌륭한가?”
그는 대답하였다.
“나와 승도는 같이 구마라집에게 사사받았습니다. 공자의 문인에 기준해서 말한다면, 승도는 입실(入室) 제자에 해당하고 나는 승당(升堂) 제자라 할 만합니다.”
승위(僧威)·승음(僧音)
승도의 제자에 승위와 승음 등이 있었다. 모두 『성실론(成實論)』에 빼어났다.
18) 석도왕(釋道汪)
도왕의 성은 반(潘)씨며 장락(長樂) 사람이다. 어릴 때 숙부를 따라 서울에 있었다. 열세 살에 여산의 혜원(慧遠)에게 투신하여 출가하였다. 경전과 계율을 종합적으로 연구하였다. 특히 『열반경』에 빼어났다. 수십 년 동안 거친 음식으로 일관하였다.
한번은 양주(梁州)로 갔다. 길에서 강(羌)족 오랑캐 도적들에게 포위되어, 의복과 발우를 빼앗겼다. 도왕(道汪)과 제자 몇 사람이 마음으로 서원하며, 함께 관세음보살을 염불하였다. 잠시 후 구름과 안개 같은 것이 도왕 등의 몸을 덮는 것을 느꼈다. 이에 도적 무리들이 쫓아오며 찾았으나, 보이지 않아 재난을 면하였다.
그 후 하간(河間)의 현고(玄高) 법사가 선(禪)과 지혜가 깊고 넓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그곳에 가서 이를 따르고자 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토곡혼(吐谷渾)의 난을 만나, 그곳에 가는 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성도(成都)로 돌아왔다. 조정에서 부른 적이 있는 학덕이 높은 선비[徵士] 비문연(費文淵)이 처음으로 그를 따라 수업하였다. 곧 고을 성의 서북쪽에 절을 세워 기원사(祇洹寺)라 이름 지었다. 그곳에서 파촉(巴蜀) 지방에 교화를 행하여 명성이 조정과 재야를 적셨다.
양주(梁州)자사 신탄(申坦)은 도왕과 구면이었다. 그 후 신탄이 사고를 당하자, 도왕은 그곳에 가서 그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그러자 신탄이 그곳에 도왕을 머물게 하고자 하였다. 이에 비문연이 자사(刺史) 장열(張悅)에게 글을 올렸다.
“도왕 법사는 학식과 수행이 청백하고, 뜻과 기개[風霜]가 매우 준엄합니다. 탁연히 무리 짓지 않고 확고하여 뽑아내기 어려운 지조가 있습니다. 근간에 들으니 양주에서 그를 맞아들이려고 교지를 보내자, 그가 떠나가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합니다. 온 경내의 여론이 모두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 고을은 변방의 황량한 고을로서 비구와 비구니의 수효가 만 명이 넘습니다. 하지만 선(禪)과 계율에 힘입는 바는 그 한 사람에게 의지합니다. 어찌 강물이 갖은 진주를 잃게 하고, 산이 갖은 옥을 잃게 하여서야 되겠습니까? 원컨대 도인과 속인들의 정성을 비추어 보시고, 사부대중의 무리들로 하여금 기댈 곳이 있게 하여 주십시오.”
이에 장열이 곧 정중하게 만류하였다. 마침내 양주로 가는 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장열이 서울로 돌아가, 전송의 효무황제에게 자세히 도왕의 덕행을 진술하였다. 황제는 곧 칙명을 내려, 그를 영접하여 중흥사(中興寺)의 사주(寺主)로 삼고자 하였다. 이에 도왕은 장열에게 병을 이유로 굳게 사양하니, 그곳으로 가는 일을 면하였다. 이로써 병을 사칭하여 휘장을 내리고, 인간세계를 엿보는 일을 끊었다.
그 후 유사고(劉思考)가 고을에 다다라 크게 불법의 제사를 마련하였다. 도왕에게 강설을 청하니, 곧 그의 청에 응낙하였다. 이에 어떤 사람이 물었다.
“법사는 항상 고요함을 지키기로 맹서하였소. 무엇 때문에 절개를 훼손시키는가?”
그가 대답하였다.
“유공은 불교를 독실하게 믿어 바야흐로 불법이 이에 기대려고 합니다. 그렇거늘 어떻게 작은 노고를 마다하겠습니까?”
이에 앞서 3협(峽) 안의 사람들이 매일 밤마다 바위 언덕 옆에서 신비한 광명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유사고는 대명(大明) 연간(457~464)에 도왕에게 청해서 광명이 일어나는 곳에 절을 세우게 하였다. 즉각 절벽에 불상을 새기고, 험한 지점에 방[室]을 세웠다. 길을 가다가 우러러 바라보면, 모두가 청정한 마음이 일어났다.
그 후 왕경무(王景茂)가 초청하여, 무담사(武擔寺)에 머물러 승주(僧主)가 되었다. 대중을 도와 맑고도 삼가하니, 도인과 속인이 귀의하였다.
전송의 태시(泰始) 원년(465)에 머물던 절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명에 따라 화장하였다. 유사고는 그를 위하여, 무담사의 절 문 오른쪽에 탑을 세웠다.
경화(景和) 원년(465)에 소혜개(蕭慧開)가 서쪽으로 나아가 성도에 주둔하였다. 도왕의 높은 명성을 듣고 함께 도를 강론할 생각으로 찾아가다가, 중도에서 도왕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 탄식하였다.
“애석하구나. 내가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으니. 그러니 곽문거(郭文擧)가 강성(康成)을 뒤쫓아 간 일 따위야, 어찌 말할 만한 꺼리나 되겠는가?”
당시 현인들이 애석하게 여겼음이 이와 같았다.
보명(普明)·도은(道誾)
당시 촉(蜀)의 강양사(江陽寺)의 보명과 장락사(長樂寺)의 도은도 모두 계율과 덕망이 높고 밝았다. 거친 음식을 먹으며 경전을 읽고, 어떤 고난에도 굳건한 절개로 감통(感通)을 얻었다. 도은은 배움이 내외의 경전을 겸하고, 더욱 담론과 토론에 빼어났다. 오(吳)나라의 장유가 초청하여 계를 내리는 스승으로 삼았다.
19) 석혜정(釋慧靜)
혜정의 성은 소(邵)씨며 오흥(吳興)의 여항(餘抗) 사람이다. 가난하게 살면서 지조를 지키고, 힘써 수행함에 정성이 간절하였다. 풍모 있는 자태가 수려하고 반듯하여 행동거지가 볼 만하였다. 처음 여산(廬山)에 유학하였다. 만년에는 서울로 돌아와 학업을 계속하였다. 지혜롭게 내외의 경전을 겸하고, 특히 『열반경』에 빼어났다.
처음에는 치성사(治城寺)에 머물렀다. 안연지(顔延之)와 하상지(何尙之) 등이 모두 덕스런 풍모를 흠모하였다. 안연지는 늘 찬탄하였다.
“형산(荊山)의 구슬이라면 오직 혜정, 그 사람뿐이다.”
아들 안준(顔竣)이 나가 동주(東州)에 주둔하자, 손잡고 동행하였다. 이로 인하여 천주산사(天柱山寺)에 깃들어 살았다. 대명(大明) 연간(457~464)에 다시 섬주(剡州) 법화대(法花臺)로 거처를 옮겼다.
그 후 동앙산(東仰山)에서 쉬었다. 곳곳에서 소요하며 노닐었다. 아울러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힘썼다. 나이가 50세를 넘자, 뜻과 절개가 더욱 굳건하였다.
전송의 태시(泰始) 연간(465~471)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58세이다. 지은 문한(文翰)과 문집(文集) 열 권이 있다.
20) 석법민(釋法愍)
법민은 북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도를 사모하여 뜻을 경전에 도탑게 가졌다. 열여덟 살에 출가하였다. 곧 고을과 나라들을 밟아보고, 풍속을 구경하며 도를 음미하였다. 그는 『반야경』과 논리를 따지는 것과 경장과 율장을 모두 마음껏 요리하였다.
그 후 강하군(江夏郡)의 오층사(五層寺)에서 쉬었다. 당시 사문 승창(僧昌)이 강릉 성 안에 탑을 세웠다.
자사인 사회(謝晦)가 이를 허물고자 하였다. 법민이 이 소식을 듣고 일부러 그를 찾아가 사회에게 충고하였다. 그러나 사회의 뜻을 꺾을 수 없었다. 법민은 이에 장사(長沙)의 녹산(麓山)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는 죽을 때까지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사회는 곧 부하들을 거느리고 절에 이르러, 후하게 술과 고기를 두텁게 내려주었다. 엄중하게 북을 치고 위엄을 떨치면서, 불상의 목을 자르고 부셔버렸다. 그러자 갑자기 구름과 안개로 하늘이 어두워지고, 바람과 먼지가 사방에서 일어났다. 사회는 놀라고 무서워 달아났다.
그 후 그는 반역죄로 죽임을 당하였다. 그들의 무리였던 정법성(丁法成)과 사승쌍(史僧雙)은 몸에 문둥병이 나타났으며, 나머지 대부분도 법을 범해 죽었다.
이에 법민은 『현험론(顯驗論)』을 지어서 인과를 밝히고, 아울러 『대도지경(大道地經)』에 주석을 달았다.
그 후 산중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83세이다. 제자 승도(僧道)가 비를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승종(僧宗)
당시 시흥군(始興郡) 영화사(靈化寺)의 승종이라는 비구도 경론을 널리 섭렵하였다. 『법성론(法性論)』과 『각성론(覺性論)』이라는 두 논을 지었다.
21) 석도량(釋道亮)
도량은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서울의 북쪽 다보사(多寶寺)에 머물렀다. 빼어난 깨달음이 짝이 없을 만큼 뛰어나고 행동거지가 볼 만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강직하여 여러 사람의 비위를 거슬렀다. 마침내 이 사실이 대중들에게 드러나자, 원가(元嘉) 연간(424~452) 말기에 남월(南越) 지방으로 옮겨가는 벌을 받았다.
당시 사람들은 혹 그가 몸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라 조롱하였다. 이에 도량이 말하였다.
“업보의 이치로 가는 것이지, 특별히 사람이 시켜 된 일은 아니오.”
이에 승려들에게 명하여 밤을 세워가며 남쪽 광주(廣州)로 떠났다. 제자인 지림(智林) 등 열두 사람이 그를 따라갔다.
남쪽에 머물면서 6년 동안 강설로 대중을 인도하였다. 영외(嶺外) 지방을 교화로써 도야하다가, 대명(大明) 연간(457~464)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성대하게 법석을 열고, 『성실론의소(成實論義疏)』 여덟 권을 지었다.
전송의 태시(太始) 연간(465~471)에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69세이다.
정림(靜林)·혜륭(慧隆)
당시 다보사에 또한 정림과 혜륭이 있었다. 정림은 『대열반경』에 빼어나, 전송의 효무황제로부터 큰 그릇으로 존중받았다.
혜륭도 많은 경전과 논리를 따지는 데 빼어났다. 또한 어떤 고난에도 굳건한 절개로 신령하게 통하였다. 혜륭이 심기(心氣)병을 오래 앓았다. 밤에 사람이 아닌 어떤 존재가 나타나 탕약을 보내주면서 말하였다.
“말릉령(?陵令)이 보낸 것이다.”
약그릇을 주고는 갑자기 사라졌다. 혜륭이 이것을 취하여 한 번 복용하자 고통 받던 것이 곧 치료되었다.
22) 석범민(釋梵敏)
범민의 성은 이(李)씨며 하동(河東) 사람이다. 어릴 때 관중·농서(壟西)지방에서 유학하였다. 장성하여서는 팽성(彭城)과 사수(泗水) 지방을 두루 다녔다. 내외의 경서 모두를 마음의 구비에서 조용히 움직였다.
만년에는 단양(丹陽)에서 쉬면서 자주 강설하는 법회를 세웠다. 사장(謝莊)·장영(張永)·유규(劉?)·여도혜(呂道慧)가 모두 그의 도풍을 이어받았다. 흔쾌히 기뻐하면서 서로 칭탄하며 존중하였다.
여러 번 『법화경』과 『성실론』을 강의하였다. 또한 『요의백과(要義百科)』에 서문을 써서, 간략하게 불교의 강령을 표방하였다. 그런 까닭에 글은 이 한 권에 그친다. 구사한 내용에서 생략된 점이 보이지만 당시에 존중받았다. 그 후 단양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0여 세이다.
승약(僧?)
당시 승약은 본래 상당(上黨) 사람이다. 『열반경』에 빼어나 장창(張暢)의 존중을 받았다.
23) 석도온(釋道溫)
도온의 성은 황보(皇甫)씨며, 안정현(安定縣) 조나(朝那) 사람이다. 덕이 높은 선비인 황보밀(皇甫謐)의 후예이다. 어려서부터 거문고와 책을 좋아하였다. 그리고 어버이를 섬김에 효로써 알려졌다.
열여섯 살 때 여산(廬山)에 들어가 혜원에게 의지하여 수학하였다. 그 후 장안에 노닐어 다시 동수(童壽: 구마라집)에게 사사하였다. 전송의 원가(元嘉) 연간(424~452)에 돌아와 양양의 단계사(檀溪寺)에 머물렀다. 대승의 경전에 빼어나고, 아울러 논리를 따지는 데 밝았다. 번주(樊州)와 등주(鄧州)의 학도들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당시 오(吳)나라의 장소(張邵)가 양양에 주둔하자, 그의 아들 장부(張敷)도 따라왔다. 장부가 도온의 강론을 듣고서 돌아오자, 장소가 그에게 물었다.
“도온은 어떻더냐?”
장부가 대답하였다.
“논리의 해석은 세세한 것까지 분석하는구나 느꼈지만, 도에 깃든 마음은 쉽게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장소가 몸소 찾아가 안부를 물었다. 비로소 그의 정신이 매우 빼어남에 고개 숙였다. 그 후 조용히 도온에게 말하였다.
“법사께서 만일 환속할 수만 있다면, 곧 별가(別駕) 벼슬로 대우하겠소.”
도온이 말하였다.
“시주께서는 형틀과 수갑으로 사람을 유인하시려 합니까?”
그 날로 그곳을 떠나 강릉으로 갔다. 장소가 뒤쫓았으나 미치지 못하자 한탄하였다.
효건(孝建) 연간(454~456)의 초기에 칙명을 받고 서울로 내려왔다. 중흥사(中興寺)에 머물렀다.
대명(大明) 연간(457~464)에 칙명으로 서울의 승주(僧主)가 되었다. 노소(路昭) 황태후가 대명(大明) 4년(460) 10월 8일에 보현보살의 상을 조성하였다. 상이 완성되자 중흥사의 선방에 재를 마련하였다. 초청한 승려가 모두 2백 명이다. 이름을 열거해서 함께 모이게 하여, 사람의 수효를 일찍이 정해놓았다.
그 당시 절은 새로 지어 호위가 매우 장엄하고 엄숙하였다. 문득 한 승려가 늦게 와서 자리에 앉았다. 풍채와 용모가 모두 청아하였기에, 온 법당의 승려들이 그를 눈여겨보았다. 재주(齋主)와 함께 백여 마디의 말을 나누고는 문득 사라졌다. 문을 지키는 이들을 샅샅이 검문하였다. 그러나 모두가 그의 출입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대중들은 그가 신인(神人)이었음을 깨달았다.
당시 도온은 이미 승주였으므로 말릉(?陵)의 고사(故事)를 예로 들어 아뢰었다.
“황태후께서는 슬기롭게 비추어 보는 기운이 높고 밝으시어, 성스러운 상서로움이 그윽하게 적셨습니다. 청정한 도량에서 생각을 씻어내고, 지극한 경계에서 옷깃을 가다듬으셨습니다. 본래부터 궁성 안에 명성이 자자하시고, 일마다 부처님의 경계 밖에 허통하십니다[事虛梵表].
마침내 처음으로 쇠를 녹이고 자를 것을 생각하셨습니다. 곧 신비하고 화려한 모습을 묘사하여, 보현보살이 오시는 모습의 성대한 불상을 조성하였습니다. 우주의 진귀한 보배를 기울여, 그 묘함은 하늘의 장식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니 마련하신 재와 강론은 이 달 8일로 끝났습니다. 보시하신 모임에는 제한이 있고 명부도 본래부터 정해져 있어서, 차례대로 인도하여 자리에 앉게 하니, 수효가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돌아가며 경을 읽는 것이 절반 가량 진행되려 할 즈음에, 시각은 사시(巳時)가 되었습니다. 홀연히 이상한 승려가 나타나 좌석 안에 참여하였습니다. 얼굴과 행동거지가 단엄하고 기개와 모습이 빼어나게 드러나, 온 대중들이 놀라고 감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에 재주(齋主)가 물었습니다’상인의 이름은 무엇이오?”혜명(慧明)이라 합니다.”어느 절에 주석합니까?”천안사(天安寺)에서 왔습니다.’
말하고 대답하는 사이에 홀연히 사라져서,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송구하고 부끄러워하면서 생각을 숙연히 하였습니다. 이는 밝은 상서로움의 드러남이며, 보이지 않는 감응이 펼쳐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붉은 묏부리는 눈으로 볼 수 있고 화려한 누마루도 멀지 않습니다만, 대저 저는 이와 같이 들었습니다.
‘지성으로 감응하면 해[景]를 되돌려 놓고 달[緯]을 움직이며, 맑은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면 기적은 바위를 일으키고 샘을 열게 한다.’
하물며 황제의 덕은 천운을 받아들이고, 황제의 공은 온 백성을 흡족하게 적셔줍니다. 어진 정치로 먼 하늘 끝까지 밝히고, 이치로서 어둠의 세계 밖까지 뻗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상왕 때의 번성하던 선비들은 크게 밝은 조정을 보여줄 수 있었고, 신께서는 발심을 권유하는 오묘한 몸으로 황제의 방으로 나투었습니다.
만약 때맞추어 폐하가 바다 구석까지 지혜로 비추신다면, 그 빛남이 일월보다도 밝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 사람의 이름을 혜명이라 하였습니다. 하늘의 뜻을 이어 천복을 일으켜 끝없는 곳까지 드리우실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 절 이름을 천안사(天安寺)라 칭하였습니다. 신(神)의 기반이 더욱 멀리 이어지고 도의 정치가 바야흐로 응결되어, 온 천하가 태평하고 만물이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삼가 소속된 고을에 이 사실을 줄지어 이야기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서상을 밝히고자 합니다.”
현에서는 이 사실을 군(郡)에 말하였다. 당시 경조윤(京兆尹)의 공령부(孔靈符)는 이 사실을 표를 지어 나라에 아뢰었다. 이어 조서가 내려와, 선방을 고쳐서 천안사(天安寺)라 하여 상서로움을 기렸다.
그 후 도온은 여러 번 강의를 맡았다. 듣고 음미하는 손님이 강당을 메우고, 서로 마음을 기울였다. 정성을 다해 부지런하게 여러 사람들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자주 신비한 이적(異跡)에 감응하였다. 황제는 이를 기뻐하여 돈 50만 냥을 하사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말하였다.
“제왕은 재물을 하사하고 도온은 법칙을 이끌어서, 저 위의 하늘에서 감동을 느껴 신령(神靈)한 덕을 내리셨다.”
전송의 태시(太始) 연간(465~471)의 초기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9세이다.
승경(僧慶)·혜정(慧定)·승숭(僧嵩)
당시 중흥사에 승경·혜정·승숭이 있었다. 모두 교리의 이해력으로 명성을 드러내었다. 승경은 3론(論)에 빼어나 당시 학도들의 종사가 되었다. 혜정(慧定)은 『열반경』과 아비담에 뛰어나서 역시 여러 번 으뜸가는 자리를 맡았다. 승숭도 아울러 논리를 따지는 데 밝았다. 그러나 말년에 편벽된 고집이 생겨 주장하였다.
“부처는 마땅히 상주(常住)하는 것이 아니다.”
임종하던 날 혀의 뿌리가 먼저 썩었다.
24) 석담빈(釋曇斌)
담빈의 성은 소(蘇)씨며 남양(南陽) 사람이다. 열 살 때 출가하여 도위(道褘)를 스승으로 섬겼다. 처음에는 강릉의 신사(新寺)에 머물면서, 경론의 강의를 듣고 선도(禪道)를 배웠다. 깊이 있는 생각이 깊은 곳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성정을 아직 다 통달하지 못하였다. 어느 날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담빈에게 말하였다.
“네가 의심하는 내용은 두루 떠돌아다니면 저절로 풀리리라.”
이에 지팡이를 떨치고 옷을 껴입고, 다른 나라에서 도를 묻기로 하였다. 처음 서울로 내려갔다가 이어 오군(吳郡)에 머물렀다. 때마침 승업(僧業)의 『십송률(十誦律)』 강의를 만나 음미하여 들었다. 얼마 되지 않아 깨달음이 깊은 경지로 들어갔다.
그 후 서울로 돌아와 정림(靜林) 법사에게 『열반경』을 자문 받았다. 다시 오흥(吳興) 소산사(小山寺)의 법진(法珍)을 찾아가 『열반경』·『승만경』을 연구하였다. 만년에는 남림사(南林寺)의 법업(法業)에게서 『화엄경』과 『잡심론(雜心論)』의 강의를 받았다.
이미 두루 많은 스승들을 거쳐오면서 색다른 풀이들을 갖추어 들었다. 그러자 곧 오랫동안 사유한 것들이 그때마다 쌓였다. 게다가 그 묘함을 끝까지 추구하고, 여러 사람들의 주장을 녹여 다듬어서 모든 경전을 꿰뚫었다.
이에 다시 번주(樊州)와 등주(鄧州) 지방으로 돌아와 머물면서, 자리를 열어 강설하였다. 그러니 사방 먼 곳의 이름 있는 손님들이 책을 등에 지고 갖옷을 걸치고서 모두 이르렀다.
효건(孝建) 연간(454~456)의 초기에 이르자 왕현모(王玄模)에게 조칙을 내렸다. 그곳을 떠나 서울로 나오게 하였다.
처음에는 신안사(新安寺)에 머물면서 『소품경(小品經)』과 『십지론(十地論)』을 강의하였다. 아울러 돈오(頓悟)와 점오(漸悟)의 취지를 펼쳤다.
당시 마음속으로 경합하려는 무리들이 끈질기게 문답을 주고받으며 비교하려 하였다. 그러나 담빈의 언사가 이치에 맞고 이론에 밝았으므로, 끝내 아무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진군(陳郡)의 원찬(袁粲)은 당시에 명망이 높은 인물로서, 담빈의 행실과 깨우침을 가상하게 생각하였다. 한번은 중서사인(中書舍人) 소상개(巢尙介)를 시켜 그를 시험해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담빈이 굴복당하지 않았다. 마침내 원찬이 몸소 스스로 그를 찾아가서 안부를 물었다. 원찬은 늘 담빈에게 천자를 찾아가 보라고 자주 권하였다. 담빈이 그에게 말하였다.
“빈도는 세상 테두리 밖의 사람인데, 어찌 천자와 취향을 같이 해서야 되겠습니까?”
원찬은 더욱 그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 후 청해서 그의 어머니의 스승이 되었다. 전송의 건평왕(建平王) 경소(景素: 劉景素)도 그에게 계율의 모범이 되는 것을 물었다.
전송의 원휘(元徽) 연간(473~477)에 장엄사(莊嚴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67세이다.
담제(曇濟)·담종(曇宗)
당시 장엄사에는 담제·담종이 있었다. 모두 학업과 재주의 능력으로 한시대의 존중을 받았다. 담제는 『칠종론(七宗論)』을 짓고, 담종은 경목(經目)및 『수림(數林)』을 지었다.
25) 석혜량(釋慧亮)
혜량의 성은 강(姜)씨이고, 아버지의 이름은 현량(顯亮)이다. 동아(東阿)의 도정(道靖)의 제자이다. 어려서부터 맑은 명성이 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불렀다.
“도정은 큰 스승이고, 혜량은 작은 스승이다.”
비록 나이와 명망에서는 도정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도풍과 규범은 그를 이어받았다.
그 후 임치(臨淄)에 절을 세우고 『법화경』과 『대품경』·『소품경』·『십지론』 등을 강의하였다. 그러니 학도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고, 천 리 밖에서도 가마를 준비했다.
그 후 양자강을 건너 하원사(何園寺)에 머물렀다. 안연지(顔延之)와 장서(張緖)가 그의 덕을 그리워하여 계속 그곳에 머물도록 하였다. 그들은 늘 찬탄하였다.
도안(道安)과 법태(法汰)는
전 시대에 주옥같은 말씀을 토해내고
담빈과 혜량은
후세에 금 같은 소리를 떨치니
맑은 말과 오묘한 실마리
끊어지려 하다가 다시 일어났어라.
安汰吐珠玉於前 斌亮振金聲於後
淸言妙緖將絶復興
태시(太始) 연간(465~471)의 초기에 장엄사(莊嚴寺)에서 큰 모임을 열었다. 교학에 정통한 뛰어난 승려 천 명을 가려내어 교열하였다. 황제의 칙명으로 혜량과 담빈을 바꾸어가며 우두머리로 삼았다. 당시의 종사로서 이들과 더불어 경합할 사람은 없었다.
전송의 원휘(元徽) 연간(473~477)에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63세이다. 『현통론(玄通論)』을 지었다. 지금도 세상에 전한다.
26) 석승경(釋僧鏡)
승경의 성은 초(焦)씨이다. 본래는 농서(?西) 사람으로, 오군(吳郡) 땅에 옮겨 살았다. 지극한 효도는 보통 사람을 넘었다. 재물을 가볍게 생각하여 보시하기를 좋아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어머니가 죽자, 태수(太守)가 돈 5천 냥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간곡하게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곧 스스로 흙을 지고 와서 소나무·잣나무를 심었다. 묘소에서 움막살이를 하면서 3년간 피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3년 상을 마치고 출가하여 오현(吳縣)의 화산(華山)에 머물렀다. 후에 관중·농서 지방으로 들어가, 스승을 찾아 법을 전수 받았다. 여러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돌아왔다. 서울에 머물면서 크게 경론을 펼쳤다.
사공(司空) 벼슬에 있던 동해의 서담지(徐湛之)는 그의 소박한 풍모를 존중하여, 온 문중의 스승으로 삼았다. 그 후 동쪽 고소(姑蘇)로 돌아가 다시 전념하여 종사의 자리를 맡았다. 대사(臺寺)의 사문(沙門)과 도를 공부하던 사람들이 요청해서 1년 가량 그곳에 머물렀다. 다시 동쪽 상우(上虞)의 서산(徐山)으로 가니, 따라간 학도들이 백여 명이었다. 교화가 삼오(三吳) 지방을 적셔 명성이 나라[上國]에까지 퍼졌다.
진군(陳郡)의 사령운(謝靈運)과도 편지로써 친교를 나누었다. 전송의 세조(世祖)황제는 그의 소박한 도풍에 의지하였다. 칙명으로 서울로 나와 정림하사(定林下寺)에 머물렀다. 자주 법회를 열자, 덕망 있는 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법화경』·『유마경』·?열반경의소(涅槃經義疏)?와 아울러 『아비담현론(阿毘曇玄論)』을 지었다. 교리의 종류를 구별하여 일관된 조리가 있었다.
전송의 원휘(元徽) 연간(473~477)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7세이다.
담륭(曇隆)
이에 앞서 상우의 서산(徐山)에 담륭 도인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법석을 잘하였다. 만년에는 문득 고결한 절개가 보통을 넘었다. 역시 사령운의 존중을 받았다. 항상 함께 우승산(??山)을 노닐었고, 죽은 후에는 사령운이 조문[?]을 지었다.
27) 석승근(釋僧瑾)
승근의 성은 주(朱)씨며 패국(沛國) 사람이다. 숨어사는 선비 주건(朱建)의 넷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노자』·『장자』와 『시경』·『예기(禮記)』를 잘하였다. 그 후 길을 가다가 광릉(廣陵)에 이르러 담인(曇因) 법사를 만났다. 처음 만나자마자 머리를 숙이고, 도(道)를 위하여 조아려 가르침을 가슴에 새겼다. 두루 돌아다니며 내전(內典)을 배우고, 널리 삼장을 섭렵하였다.
그 후 서울에 이르러 용광사(龍光寺)의 도생(道生) 법사를 만났다. 다시 그에게 의지하고 기대어 수업하였다.
처음에는 치성사(治城寺)에 머물렀다. 전송의 효무(孝武)황제가 칙명을 내려 상동왕(湘東王)의 스승이 되었다. 승근은 병을 이유로 간곡하게 사양하였다. 하지만 끝내 면할 수는 없었다. 왕은 그를 따라 5계(戒)를 받기를 청하고, 매우 넉넉한 예우를 더하였다.
이에 앞서 지빈(智斌)이 초대 승정(僧正)인 담악(曇岳)과 교대하여 승정이 되었다. 지빈도 덕이 대중의 종사가 될 만 하였다. 삼론(三論)과 『유마경』·『사익경』·『모시』·『노자』와 『장자』 등에 빼어났다.
후에 의가(義嘉)가 음흉한 계획을 꾸몄을 때, 당시 사람들이 지빈을 참소하여 말하였다.
“지빈은 의가를 위하여 도를 행했다.”
마침내 교주(交州)로 쫓아냈다.
이 때 상동왕이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가 바로 명제(明帝)이다. 승근에게 칙명을 내려 그를 천하의 승주(僧主)로 삼았다. 법기(法伎) 일부와 친신자(親信者) 20명을 공급하고, 한 달에 돈 3만 냥씩을 지급하였다. 겨울과 여름 등 사계절에 하사품을 내렸다. 아울러 수레와 가마와 관리를 하사하였다. 모든 외진(外鎭)에 명령하여 모두들 공여하라고 하니 승근은 사양하였다. 사방에서 받들어 헌납하면서 모두들 말했다.
“승정의 마음을 얻었는가, 못 얻었는가?”
그가 존중받았음이 이와 같았다.
승근은 돈을 감추어 두지 않는 성품이었다. 모두를 복 짓는 일에 채워 영근사(靈根寺)와 영기사(靈基寺) 두 절을 세워서, 선정과 지혜를 닦는 이들이 머무는 곳으로 삼았다.
명제의 말년에 이르러 황제가 자못 기피하고 꺼리는 것이 많아졌다. 그런 까닭에 열반이나 멸도와 같은 번역은 여기에서 잠시 쉬었다. 모든 사망·환란·쇠약하고 머리가 희게 쇠는 따위의 말들은 모두 황제와 상대해서 말할 수 없었다. 이 법을 범하여서 황제의 마음을 거슬려 살육을 당한 사람이 열에 일곱·여덟 사람이나 되었다. 승근이 늘 이것을 바로잡으려고 간언하니, 은혜와 예우도 엷어졌다.
당시 여남(汝南)의 주옹(周?)이 황제의 장막에서 모셨다. 어느 날 승근은 주옹에게 말하였다.
“폐하께서 요즘 행하시는 일은 절대로 임금다운 거동이 아닙니다. 속가의 일로써 풍자하고 간언하여도 도움되는 바가 없으니, 오묘한 진리의 깊은 이야기야 더욱 멀기만 합니다. 오직 삼세(三世)의 괴로운 과보만이 가장 인정에 가깝고 절실한 말이 될 것입니다. 시주께서 혹 기회를 엿볼 인연이 있으시면, 바로 이것만을 말씀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 후 황제가 중풍을 앓아 자주 침과 뜸을 더하였다. 그러나 고통과 괴로움이 조금도 변함 없었다. 이에 곧 주옹과 은홍(殷洪) 등을 불러 귀신과 잡스런 일에 관한 것 등을 말하게 하여, 답답한 가슴을 풀고자 하였다.
주옹은 곧 『법구경(法句經)』과 『현우경(賢愚經)』 등 두 경을 익숙하도록 읽었다. 매양 알현하여 이야기할 때마다, 곧 말에 앞서 이 경들의 내용을 말하였다. 황제는 왕왕 놀라며 말하였다.
“응보라는 것이 진실로 이와 같은 것이라면,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로 인하여 죄를 범하고 황제의 뜻에 거슬렸던 무리들이 여러 번 사면을 받았다. 이는 대개 승근이 인연이 되어 제대로 된 사람을 얻었기 때문이다.
승근은 송(宋)의 원휘 연간(473~477)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9세이다.
담도(曇度)
다시 담도가 승근의 뒤를 이어 승주가 되었다. 담도는 본래 낭야 사람으로 삼장과 『춘추』·『노자』·『장자』·『주역』에 빼어났다. 전송의 세조(世祖)·태종(太宗) 황제가 모두 흠모와 칭송을 더하였다.
그 후 젊은 황제가 예에 어긋나자, 담도도 행함과 감춤에 마땅한 바를 얻어, 거동이 황제의 마음에 거슬리지 않았다. 그는 신안사(新安寺)에 머물렀다.
현운(玄運)
같은 절에 또 현운이 있었다. 그도 대·소승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장영(張永)과 장융(張融)이 모두 승당 제자가 되어 도를 물었다.
28) 석도맹(釋道猛)
도맹은 본래 서량주(西凉州)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연(燕)·조(趙) 지방을 두루 떠돌아, 풍속과 교화를 모두 구경한 후 수춘(壽春)에 머물렀다. 정력을 쏟아 부지런히 배우니, 삼장과 9부(部)의 대승·소승·논리를 따지는 것 등에 모두 생각이 깊고 미세한 경지에 들어갔다. 거울같이 투철하게 비추어보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특히 『성실론』 하나만은 가장 독보적이었다. 이에 크게 강서 지방을 교화하니 학인들이 줄을 이루었다.
원가(元嘉) 26년(449)에 이르러 동쪽 서울로 노닐었다. 동안사(東安寺)에 머물면서 다시 강석을 열어 이어갔다. 전송의 태종황제가 상동왕(湘東王)으로 있을 때 깊이 숭앙하고 추천하였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갑절로 예우와 대접을 더하였다. 그리고 접대비로 돈 30만 냥을 하사하였다.
태시(太始) 연간(465~471)의 초기에 황제는 건양문(建陽門) 밖에 절을 창건하였다. 도맹에게 조칙을 내려 기강을 이끌게 하면서 말하였다.
“무릇 사람이 도를 널리 펴고 도는 사람에 의거하여 넓혀지는 것이다. 지금 법사를 얻은 것은 오직 도가 창생들에게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또한 세상의 바람에도 광명이 있게 된 일이다. 절 이름을 흥황사(興皇寺)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이로 말미암아 흥황사가 이 절의 이름이 되었다.
절을 창건하는 공사가 끝나자 조칙을 내려, 도맹에게 절에서 『성실론』의 강론을 개강하게 하였다. 처음 개강하는 날에는 황제가 친히 거둥하였다. 그러니 공경대부들이 모두 모였고, 사방 먼 곳의 학자와 손님들이 책을 등에 업고 나란히 찾아왔다.
도맹의 고상한 운치는 사람들의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없었다. 토해내고 받아들이는 말이 소상하고 세밀하니, 황제는 오래도록 거룩하다고 칭송하였다. 이로 인하여 조서를 내렸다.
“도맹 법사는 고상한 인격으로 중생 구제를 많이 하였다. 짐도 평소부터 손님 같은 벗으로 대해 왔다. 한 달에 돈 3만 냥, 관리 네 사람, 장부를 정리하는 자 20명, 수레와 가마 각 한 대를 하사하여, 가마를 타고 찾아오는 손님을 돌보게 하라.”
도맹은 얻는 것이 있으면,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모두 보시하거나, 절을 짓는 데 썼다.
전송의 원휘(元徽) 3년(475)에 동안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5세이다.
도견(道堅)·혜란(慧鸞)·혜부(慧敷)·혜훈(慧訓)·도명(導明)
그 후 도견·혜란·혜부·혜훈·도명 등이 모두 흥황사에 머물렀다. 교리를 이해하는 명성 또한 도맹에 버금갔다.
29) 석초진(釋超進)
초진의 성은 전욱(?頊)씨며, 장안 사람이다. 확고한 지조가 있으며 정성스럽고 부지런하였다. 어려서부터 배움에 돈독하여, 대승·소승의 여러 경전을 모두 전체적으로 훑어보기를 더하였다. 정신과 성품이 온화하고 기민하며, 계율의 행실이 엄격하고 깨끗하였다. 그런 까닭에 나이가 서른 살이 되기 전에 명성을 관중 지방에 떨쳤다.
서쪽 오랑캐 발발혁련(勃勃赫連)이 장안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사람들의 마음이 위태하고 어지러워져서 불법의 일도 피폐해졌다.
이 때 초진은 난을 피하여 동쪽으로 내려와 서울에 머물렀다. 그러면서 더욱 경문의 뜻을 정밀하게 찾아보고 강설을 열었다. 얼마 후 초진은 고소(姑蘇)로 가서 다시 불법을 널리 폈다.
당시 평창(平昌)의 맹의(孟?)가 회계(會稽) 태수로 있었다. 그의 고상한 풍모에 깊이 의지하고자, 곧 사람을 보내서 영접하여 산음(山陰)의 영가사(靈嘉寺)로 편안하게 모셨다. 이에 절동(浙東)에 머물면서 강론을 이어갔다. 그러니 고을과 외곽의 비구·비구니 및 청신도의 남녀들이 모두 보살의 인연을 맺고, 계율의 모범에 조아려 가슴에 새겼다.
전송의 태시(太始) 연간(465~471)에 부름을 받고 서울로 나아갔다. 『대법고경(大法鼓經)』을 강의하였다. 잠시 뒤 다시 회계로 돌아와 법으로써 중생을 교화해 나아갔다.
『대열반경』이 궁극적인 진리의 가르침이라 여겼다. 그래서 늘 생각에 남겨 두어 머뭇거리다가, 여러 번 강설을 더하였다.
무릇 재(齋) 모임을 결성하는 사람치고 반드시 초청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만약 다른 곳에 먼저 가기로 허락한 경우가 있으면, 곧 날짜를 옮겨서 재를 열었다. 그 후 노쇠하여 다리에 병이 생겼다. 외부로 찾아가는 일을 감당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모두들 음식을 방으로 보내서, 그것으로 보이지 않는 도움이 있기를 바랐다.
초진은 성품 됨됨이가 경전을 독실하게 믿고 좋아하였다. 보고 찾는 데 지극히 간절하였다. 늙어서 앞이 보이지 않자, 제자를 시켜 열흘에 한 번씩 『열반경』을 소리 높여 읽게 하였다. 그가 경전을 탐독하고 좋아함이 이와 같았다.
전송의 원휘 연간(473~477)에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94세이다.
담기(曇機)
당시에 또 담기 법사가 있었다. 본래 성은 조(趙)씨며, 역시 장안 사람이다. 관중에서 오랑캐의 난리를 만나자, 그곳을 피하여 동쪽으로 내려갔다. 산수를 두루 구경하면서 회계 고을에 이르렀다. 『법화경』과 아비담에 빼어났다. 당시 세상에서 종사로 받들어서 초진과 서로 버금갔다.
군수인 낭야왕(瑯?王) 유곤(劉琨)이 초청하여, 고을 서쪽 가상사(嘉祥寺)에 머물렀다. 이 절은 본래 유곤의 조부인 유회(劉?)가 창건한 절이다.
도빙(道憑)
당시에 도빙도 세상에서 뛰어난 이였다. 그러나 집착하는 성품이 강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거슬렸으므로, 그를 논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30) 석법요(釋法瑤)
법요의 성은 양(楊)씨며 하동(河東)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만 리 밖이라도 찾아가 물었다. 전송의 경평(景平) 연간(423~424)에 연주(袞州)와 예주(豫州) 지방으로 와서, 많은 경전을 끝까지 꿰뚫었다. 한편으로는 불교 외의 다른 경전[異部]에도 뛰어났다.
그 후 동아(東阿)의 도정(道靜)이 그의 강론을 들었다. 대중들이 여러 번 다시 강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도정은 한탄하였다.
“나는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
그 후 원가(元嘉) 연간(424~452)에 양자강을 넘어왔다. 오흥(吳興)의 심연지(沈演之)가 특별히 깊이 그릇이라고 존중하였다. 초청해서 오흥(吳興) 무강(武康)의 소산사(小山寺)로 돌아왔다.
시종 19년 동안 기원하기를 요청하는 법사가 아니면, 한 번도 산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무강산에서 기거하였다. 그러면서 해마다 강론을 열었다. 책 보따리를 등에 업고 찾아오는 삼오(三吳)의 학자들이 거리를 메웠다.
이에 『열반경』·『법화경』·『대품경』·『승만경』 등의 의소(義疏)를 지었다. 대명(大明) 6년(462)에는 황제가 오흥군(吳興郡)에 칙명을 내려 예를 갖추어 서울로 오르게 하였다. 도유(道猷)와 함께 신안사(新安寺)에 머물렀다.
그리하여 돈오(頓悟)와 점오(漸悟)의 두 깨달음의 내용에 관하여 각기 종사(宗師)가 되었다. 이르자마자 곧 강석에 나아갔다. 황제의 가마가 도착하였다. 그리고 모든 관료들이 자리에 배석하였다.
법요는 나이가 비록 노년이 되어서도 거친 음식과 고난 속에서 굳건한 절개를 고치지 않았다. 계율을 지키는 절도가 청백하였기에 도인과 속인이 귀의하였다.
전송의 원휘 연간(473~477)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6세이다.
담요(曇瑤)
당시 전송 희제(熙帝) 때에 담요가 있었다. 『유마경』·『십주론(十住論)』및 『노자』와 『장자』에 빼어났다. 또한 초서·예서에 솜씨가 있어, 전송의 건평(建平) 선간왕(宣簡王) 유굉(劉宏)의 존중을 받았다.
31) 석도유(釋道猷)
도유는 오군(吳郡) 사람이다. 처음에는 도생(道生)의 제자가 되어 스승을 따라 여산(廬山)으로 갔다. 스승이 죽은 후에는 임천(臨川)의 군산(郡山)에 은거하였다. 이어 새로 번역한 『승만경』을 보자, 책을 펼쳐 탄식하였다.
“돌아가신 스승께서 내신 옛날의 이해는 어둡기가 옛날 번역한 경과 똑같았다. 다만 세월이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 경이 새로운 이해를 거친 뒤에야 새로 결집하여 번역하였으니, 자못 슬픈 일이다.”
이로 인하여 『승만경』에 주석을 달아 스승이 남긴 유훈을 거듭 베풀었다. 이 주석서는 모두 다섯 권이 있었다. 그러나 글은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
전송(前宋)의 문제(文帝)가 혜관(慧觀)에게 물었다.
“돈오(頓悟)의 내용을 다시 누가 익혔는가?”
혜관이 대답하였다.
“도생의 제자인 도유입니다.”
이에 곧 임천군에 조칙을 내려, 도유가 서울로 나왔다. 서울에 이르자 곧 맞아들여 궁중에 들게 하였다. 교리 이해를 공부하는 승려들을 크게 모아놓고, 도유에게 돈오에 관해서 진술하여 펼치게 하였다.
당시 말재주를 다투는 무리들로부터, 돈오에 관련된 질문이 바꾸어가며 일어났다. 도유는 이미 생각을 쌓아 현오한 경지에 들어가 있었다. 또한 가르침의 근원에 바탕을 두었다. 그러므로 기회를 타서 날카로움을 꺾고, 답변하면 반드시 상대방의 칼날을 꺾었다. 이에 황제는 책상을 어루만지며 통쾌하다고 칭찬하였다.
효무제(孝武帝)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더욱 찬탄하고 존중하였다. 곧 칙명으로 신안사(新安寺)로 가서, 절의 법도를 다스리는 불법의 주인[鎭寺法主]이 되었다.
황제는 늘 찬탄하였다.
도생은 홀로 우뚝 솟아 빼어나게 비추었다면
도유는 곧바로 말고삐를 잡아 홀로 올라탔다.
훌륭하게 스승을 밝혔다고 일컬을 만하니
그 어떤 아름다운 소리도 덧붙일 것이 없구나.
生公孤情絶照 猷公直?獨上
可謂克明師 匠無?徽音
전송의 원휘(元徽) 연간(473~477)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71세이다.
도자(道慈)
그 후 예주(豫州)에 도자가 있었다. 『유마경』과 『법화경』에 빼어나 도유의 논리를 이어갔다. 도유가 지은 『승만경』의 주석본을 간추려 정리하여 두 권으로 만들었다. 지금 세상에 행한다.
혜정(慧整)·각세(覺世)
이 무렵 다보사(多寶寺)의 혜정과 장락사(長樂寺)의 각세도 모두 명성과 덕을 나란히 하였다. 혜정은 특히 3론(論)에 정밀하게 뛰어나 학자들의 종사가 되었다. 각세는 『대품경』과 『열반경』에 빼어나 불공가명(不空假名)에 대한 논리를 세웠다.
32) 석혜통(釋慧通)
혜통의 성은 유(劉)씨며 패국(沛國)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마음이 시원하게 트이고, 우뚝한 기개가 텅 비고 그윽하였다. 치성사(治城寺)에 머물렀을 때 매양 털이개를 한 번 흔들면, 그때마다 높은 이들이 탄 가마가 거리를 메웠다.
동해의 서담지(徐湛之)와 진군(陳郡)의 원찬(袁粲)은 스승과 벗의 예로써 공경하였다. 효무황제는 총애와 봉록(俸祿)을 도탑게 더하였다. 칙명으로 회릉(悔陵)과 소건평(小建平) 두 왕의 벗으로 삼았다.
원찬(袁粲)이 『거안론(?顔論)』이란 책을 지어 혜통에게 보여주었다. 혜통은 어려운 질문을 주고받았다. 그 글이 세상에 알려졌다.
또한 그는 『대품경』·『승만경』·『잡심론』·『아비담』 등의 의소(義疏)를 지었다. 아울러 『박이하론(?夷夏論)』·『현증론(顯證論)』·『법성론(法性論)』·『효상기(爻象記)』 등을 지었다. 모두 세상에 전한다.
전송의 승명(昇明) 연간(477~479)에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는 63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