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전 제03권

고승전 제03권

1. 역경 ③

01) 석법현(釋法顯)

석법현의 성(姓)은 공(?)씨로 평양(平陽) 무양(武陽) 사람이다. 법현의 세 형이 모두 7·8세의 어린 나이에 죽었다. 아버지는 재앙이 법현에게도 미칠까 두려워, 세 살 되던 해에 바로 승적(僧籍)에 올려 사미(沙彌)가 되게 하였다.

몇 년 동안 집에 머무르다가 병이 위독해져 곧 죽을 듯했다. 사찰로 돌려보내니, 이틀 만에 병이 나았지만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를 만나보고 싶어도 만날 수 없었다. 후에 사찰의 문 밖에 작은 집을 짓고 서로 왕래하는 것에 비겼다. 열 살 때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작은 아버지는 그의 어머니가 늙은 데다 자식도 없이 홀로 지내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억지로 환속(還俗)시키려고 했다.

법현이 말하였다.

“본래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에 출가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티끌세상을 멀리 여의고자 불도에 들어왔을 뿐입니다.”

작은 아버지는 그 말을 옳게 여기고 곧 그만두었다.

얼마 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지극한 성품이야 보통사람을 훨씬 넘어섰지만, 장례를 마치고는 곧바로 절로 돌아왔다.

언젠가 같이 공부하는 이들 수십 명과 논에서 벼를 베었다. 그 때 굶주린 도적들이 그 곡식을 탈취하려고 하였다. 여러 사미들은 모두 달아나 버렸지만, 법현만은 홀로 남아 도적에게 말하였다.

“만일 곡식을 원한다면 뜻대로 가져가도 좋다. 그러나 그대들은 과거에도 보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배고프고 가난하게 된 것이다. 지금 또 남의 것을 빼앗으면, 내세에는 배고픔과 가난이 더욱 심해질 것이다. 빈도(貧道)는 미리 그대들을 위하여 걱정할 따름이다.”

말을 마치자 즉시 돌아서니, 도적들은 곡식을 버리고 갔다. 수백 명의 대중 승려들이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구족계를 받기에 이르러서는 지조와 행실이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기거의 동작과 범절도 바르고 엄숙하였다. 항상 불경과 율장이 어긋나고 빠진 것을 개탄하고는, 맹세코 찾아 구하겠다는 뜻을 품었다.

동진(東晋) 융안(隆安) 3년(399) 같이 공부하는 혜경(慧景)·도정(道整)·혜응(慧應)·혜외(慧嵬) 등과 함께 장안(長安)을 출발하여 서쪽으로 고비사막을 건넜다. 하늘에는 날아다니는 새도 없고, 땅에는 뛰어다니는 짐승도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아득히 넓고 끝없이 멀어서 가야 할 곳을 헤아릴 수 없었다.

오직 해를 보고 동쪽과 서쪽을 짐작하고, 죽은 사람의 해골로 길의 표지를 삼을 뿐이었다. 자주 뜨거운 바람이 불고 악귀가 나타났다. 이것을 만나면 반드시 죽었다. 법현은 인연에 맡기고 목숨을 내던져, 곧바로 위험하고 어려운 곳을 지났다.

얼마 후 파미르 고원에 이르렀다. 고원은 겨울이나 여름이나 눈이 쌓여 있었다. 악룡이 혹독한 바람을 토하여 비바람에 모래와 자갈이 날렸다. 산길은 험하고 위태로우며,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천 길이나 되었다.

옛 사람들이 돌을 뚫어 길을 내었다. 그리고 그 곁에 사다리를 걸쳐 놓은 곳이 7백여 군데나 되었다. 그곳을 건넜다. 또 조교(弔橋)를 딛고 강물을 건너기 수십여 차례였다. 이 모두가 한(漢)나라의 장건(張騫)1)이나 감보(甘父)도 이르지 못한 곳이었다.

다음에는 소설산(小雪山)을 넘었다. 찬바람이 매섭게 불어 닥쳐왔다. 혜경은 입을 다물고 벌벌 떨며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 법현에게 말하였다.

“저는 죽을 것입니다. 당신은 앞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함께 죽어서는 안 됩니다.”

말을 마치자 숨을 거두었다. 법현은 그를 어루만지며 울면서 말하였다.

“원래의 계획을 이루느냐 이루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천명이니, 어찌하겠습니까?”

다시 혼자 힘으로 외로이 나아갔다. 마침내 험준한 산을 넘어 모두 30여 국을 두루 돌아다녔다.

차츰 천축국(天竺國)에 이르렀다. 왕사성(王舍城)과의 거리가 30여 리 되는 곳에 한 절이 있었다. 어두워질 무렵에 그 절을 방문하였다. 법현은 다음 날 새벽에 기사굴산(耆??山)에 가려고 하였다. 그 절의 승려가 말렸다.

“길이 매우 험준하고 외집니다. 게다가 검은 사자들이 많아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자주 벌어집니다. 그런데 어떻게 갈 수 있겠습니까?”

법현이 말하였다.

“멀리 수만 리를 건너온 것은 맹세코 영취산(靈鷲山)에 이르고자 함입니다. 목숨은 기약할 수 없습니다. 숨쉬는 것조차 보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해 동안의 정성을 들여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렇거늘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제 아무리 험난하다 하더라도,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대중들은 그를 만류할 수 없자, 두 승려를 딸려 보냈다.

법현이 산에 이르렀을 때는 땅거미 지는 저녁 무렵이었으므로, 거기서 하룻밤을 묵으려고 하였다. 따라온 두 승려는 위태로움으로 무서워하면서 법현을 버려두고 돌아갔다. 법현만 홀로 산중에 남아 향을 피우고 예배하였다. 부처님의 옛 자취에 가슴 설레며 상상의 나래를 펴, 마치 부처님의 거룩한 모습을 뵙듯이 했다.

밤이 되자 세 마리의 검은 사자가 왔다. 법현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입술을 핥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법현은 경문 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부처님을 염하였다. 그러자 사자는 머리를 숙이고 꼬리를 내리더니, 법현의 발 앞에 엎드렸다. 법현은 손으로 사자들을 쓰다듬으며 주문을 외웠다.

“만일 나를 해치고자 하거든, 내가 경문 외우기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다오. 만일 나를 시험해 보는 것이라면, 바로 물러가는 것이 좋으리라.”

사자들은 한참 있다가 가 버렸다.

이튿날 새벽 다시 돌아올 적에는 길이 다하여 으슥하게 막혀 있었다. 다만 하나의 좁은 길로만 통행할 수 있었다. 미처 1리 남짓 가지 못했을 때, 홀연히 한 도인(道人)을 만났다. 나이는 90세 정도이다. 용모와 복장은 누추하고 소박하나, 신령스런 기운이 우뚝하고 높았다.

법현은 비록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고상하다는 것을 느꼈으나, 그 분이 신인(神人)인 줄은 깨닫지 못하였다. 뒤에 또 한 젊은 승려를 만나자, 법현이 물었다.

“아까 그 노인장은 누구십니까?”

젊은 승려가 대답하였다.

“부처님의 대제자(大弟子)인 두타(頭陀) 가섭(迦葉)이십니다.”

법현은 비로소 크게 한탄하고는 다시 급히 뒤쫓아 그 장소에 갔다. 그렇지만 가로지른 돌이 굴 입구를 막아 끝내 들어갈 수 없었다. 법현은 눈물을 흘리며 그곳을 떠나갔다.

앞으로 나아가 가시국(迦施國)에 이르렀다. 이 나라에는 흰 귀를 가진 용이 있었다. 매양 대중 승려들과 약속하여 나라에 풍년이 들게 하였다. 그때마다 모두 효험이 있었다. 사문들은 용을 위하여 용이 사는 집을 지었다. 아울러 좋은 먹이를 베풀었다.

매번 하안거(夏安居)를 마칠 무렵이면, 문득 용은 한 마리 작은 뱀으로 변하였다. 양쪽 귀가 모두 흰 빛이다. 대중들은 모두 이것이 그 용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구리 쟁반에 낙(酪)을 가득 담아서, 용을 중앙에 두고 상좌(上座)에서부터 하좌(下座)에 이르기까지 두루 예를 행하면, 곧 용으로 변화하여 사라진다. 해마다 한 번씩 출현한다. 법현도 이 용을 친견하였다.

뒤에 중천축국(中天竺國)에 이르렀다. 마갈제국(摩竭提國) 파련불읍(波連弗邑) 아육왕탑(阿育王塔)의 남쪽 천왕사(天王寺)에서 『마하승기율(摩訶僧祇律)』을 얻었다. 또 『살바다율초(薩婆多律抄)』·『잡아비담심론(雜阿毘曇心論)』과 연경(?經)2)·『방등니원경(方等泥洹經)』 등을 얻었다.

법현은 그곳에서 3년 동안 체류하면서 범어(梵語)와 범서(梵書)를 배워서, 비로소 직접 글씨를 베껴 쓸 수 있었다. 이에 불경과 불상을 지니고, 상인(商人)들에게 의탁하여 사자국(師子國)에 도착하였다.

법현과 함께 동행했던 10여 명의 동료들은 곳곳에 남기도 하고, 혹은 죽기도 하였다. 머리 돌려 바라보아도 자신의 그림자만 비치는, 오직 자기 혼자뿐이어서 늘상 슬픔과 탄식을 품었다. 때마침 옥으로 된 불상 앞에 한 상인이 중국 땅에서 생산된 둥근 모양의 흰 비단 부채를 공양하는 것을 보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슬퍼서 눈물을 흘렸다.

2년간 머무르고 다시 『미사색률(彌沙塞律)』·『장아함경(長阿含經)』·『잡아함경(雜阿含經)』·『잡장(雜藏)』을 얻었다. 모두 중국 땅에는 없는 것들이다.

그러고 나서 상인들의 배를 타고 해로를 따라 돌아왔다. 배에는 2백여 명의 사람들이 탔다. 폭풍을 만나 배에 물이 들어찼다. 사람들은 모두 정신없이 두려워하였다. 즉시 하찮은 여러 가지 물건들을 가져다 던져 버렸다.

법현은 그들이 불경과 불상을 던져 버릴까 두려워하였다. 오직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면서, 중국의 대중 승려들 사이에서 목숨을 마치게 해달라고 빌었다. 바람에 실려 항해하였으나, 배는 파손된 곳이 없었다.

10여 일 정도 지나 야바제국(耶婆提國)에 도착하였다. 다섯 달 동안 머물렀다. 다시 다른 상인들을 따라 동쪽 광주(廣州)로 나아갔다. 돛을 올린 지 20여 일 만에 밤중에 갑자기 큰바람이 불었다. 온 배 안이 두려워 벌벌 떨었다. 대중들이 모두 의논하였다.

“이 사문(沙門)을 태운 죄에 연루되어 우리들이 낭패(狼狽)를 당하는 것이다. 한 사람 때문에 우리 모두가 같이 죽을 수는 없다.”

그리하여 모두 법현을 밀어내려고 하였다.

그러자 법현의 시주가 성난 목소리로 상인들을 꾸짖었다.

“당신들이 만약 이 사문을 내려놓겠다면, 나도 함께 내려놓으시오. 아니면 나를 죽이시오. 중국의 제왕(帝王)은 부처님을 받들고 승려들을 공경하오. 내가 중국에 이르러 왕께 고하면, 반드시 당신네들에게 벌을 내릴 것이오.”

상인들끼리 서로 쳐다보며 낯빛이 변하여 고개를 숙이고는, 곧 그만두었다.

이미 먹을 물도 떨어지고 양식도 다 없어졌다. 오직 바람에 실려 바다를 떠내려갈 뿐이었다. 뜻밖에 어떤 해안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명아주 풀[藜藿菜]을 발견하고는 짐짓 이곳이 바로 중국 땅인 줄을 알았다. 다만 아직 어느 곳인지를 헤아리지 못했다.

곧 작은 배를 타고 포구로 들어가 마을을 찾다가, 사냥꾼 두 사람을 발견하였다. 법현이 물었다.

“이곳은 어느 지역입니까?”

사냥꾼이 대답하였다.

“이곳은 청주(靑州) 장광군(長廣郡) 뇌산(牢山)의 남쪽 해안입니다.”

사냥꾼이 돌아가 태수(太守) 이억(李?)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이억은 평소 불법을 공경하여 믿었다. 뜻밖에 사문이 멀리에서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몸소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법현은 불경과 불상을 모시고, 그를 따라서 돌아갔다.

얼마 후 법현은 남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청주자사(靑州刺史)가 법현이 더 머물러 겨울나기를 청하였다. 하지만 법현은 말하였다.

“빈도(貧道)가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땅에 몸을 던진 것은, 부처의 가르침을 세상에 크게 유통시키는 데에 뜻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기약하는 바를 아직 이루지 못했으므로, 여기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마침내 법현은 남쪽 서울로 갔다. 외국 선사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에게 나아가 도량사(道場寺)에서 『마하승기율』·『방등니원경』·『잡아비담심론 (雜阿毘曇心論)』을 번역해 내었다. 거의 백여 만 글자나 된다.

그러고 나서 법현은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을 세상에 내어 널리 유통시키고 교화시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보고 듣게 하였다.

어떤 한 집이 있었는데, 그 성명(姓名)은 전하지 않아 알지 못한다. 주작문(朱雀門) 근처에 살았으며 대대로 바른 교화를 받들었다. 스스로 『대반니원경』 한 부를 베껴서 독송하고 공양하였다. 별도로 경실(經室)이 없어, 그 경을 잡서(雜書)들과 함께 방에 놓아두었다.

후에 갑자기 바람과 불길이 일어나서 그의 집까지 미쳤다. 재물이 죄다 타버렸다. 그렇지만 오직 『대반니원경』만은 엄연히 그대로 보존되었다. 그을음도 묻지 않았고, 책의 빛깔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서울에 전해지자, 모두들 신통하고 영묘한 일이라고 감탄하였다. 그 나머지 경장과 율장은 아직 번역하지 않았다.

뒤에 형주(荊州)에 이르러 신사(辛寺)에서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는 86세이다. 대중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기고 서러워하였다. 그가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답사한 것에 대해서는 별도로 대전(大傳)이 있다.

02) 석담무갈(釋曇無竭)

석담무갈은 중국말로는 법용(法勇)이라 한다. 성(姓)은 이(李)씨이고 유주(幽州) 황룡(黃龍) 사람이다. 어려서 사미가 되어 곧 고행(苦行)을 닦았다. 계율을 지니고 경전을 독송하여 은사가 소중히 여겼다.

일찍이 법현(法顯) 등이 몸소 부처의 나라로 갔다는 소문을 듣고는, 슬퍼서 몸을 돌보지 않으리라는 서원[忘身之誓]을 세웠다.

마침내 유송(劉宋) 영초(永初) 원년(420)에 뜻을 같이하는 사문 승맹(僧猛)과 담랑(曇朗) 등의 무리 25명을 불러모았다. 번개(幡蓋)와 공양(供養) 도구를 갖추고, 북쪽 지방을 출발하여 멀리 서쪽 방향으로 나아갔다.

처음에는 하남국(河南國)에 이르렀다. 이어서 해서군(海西郡)으로 나와 고비 사막으로 진입하여, 내처 들어가 고창군(高昌郡)에 도착하였다. 구자국(龜玆國)과 사륵국(沙勒國) 등의 여러 나라들을 경유하여, 파미르 고원에 올라 설산(雪山)을 넘었다. 장기(障氣: 毒氣)는 천 겹이고, 층층이 쌓인 빙설 은 만 리요, 아래로는 큰 강이 쏜살같이 흘렀다.

동쪽과 서쪽의 두 산허리에 굵은 줄을 매어 다리로 삼았다. 열 사람이 일단 건너가 저쪽 기슭에 도착하면, 연기를 피워 표지로 삼았다. 뒷사람은 이 연기를 보고 앞사람이 이미 도착했음을 알아, 비로소 다시 나아갈 수 있었다. 만일 오랫동안 연기를 보지 못하면, 사나운 바람이 그 줄을 흔들어 사람이 강물 속으로 떨어졌음을 알았다.

설산을 넘은 지 3일이 지나 다시 대설산(大雪山)에 올랐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는 어디에도 발 디딜 곳이 없었다. 절벽에는 모두 곳곳에 오래된 말뚝 구멍이 서로 마주 대하고 늘어 서있었다.

한 사람이 각각 네 개의 말뚝을 쥐었다. 먼저 아래의 말뚝을 뽑아, 손으로 위의 말뚝을 더위잡고 기어올랐다. 계속해서 서로 바꿔가며 기어 올라갔다. 하루를 지내고야 가까스로 넘어왔다. 평지에 도착하여 서로 점검해 보니, 동료 열두 명을 잃었다.

계속 나아가 계빈국(?賓國)에 이르러 부처님의 발우에 예배하였다. 1년 남짓 계빈국에 머무르는 동안 범서와 범어를 배웠다. 이곳에서 범문(梵文)으로 된 『관세음수기경(觀世音受記經)』 한 부를 구했다.

다시 사자의 입[師子口]이라 해석하는 신두나제하(辛頭那提河)에 이르렀다. 하천을 따라 서쪽으로 월지국(月氏國)에 들어가 부처님의 육계(肉?)와 불정골(佛頂骨)에 예배하였다. 저절로 물이 끓어오르는 목방(木舫)을 친견하였다.

그 후 단특산(檀特山) 남쪽에 있는 석류사(石留寺)로 갔다. 그 곳에서 머무르는 승려 3백여 명은 모두 3승(乘)의 교학을 배웠다. 담무갈은 이 절에 머물러 구족계를 받았다. 천축국의 선사 불타다라(佛馱多羅)는 중국말로 각구(覺救)라 한다. 그 지방에서는 모두 말하였다.

“이미 도과(道果)를 증득하셨다.”

담무갈은 불타다라를 초청하여 화상(和上)으로 삼고, 중국 사문 지정(志定)을 아사리(阿?梨)로 삼았다.

이 석류사에서 머물며 석 달 동안 하안거를 하였다. 다시 길을 떠나 중천축국(中天竺國)으로 향했다. 길은 텅 비고 광활하였다. 다만 벌꿀만을 가지고 식량을 삼았다. 동행자 열세 명 가운데 여덟 명이 길에서 죽고, 나머지 다섯 명이 같이 다녔다. 담무갈은 비록 자주 위험을 겪었지만, 모시는 『관세음경(觀世音經)』에 생각을 집중하여 잠시도 그만둔 적이 없었다.

차차 사위국(舍衛國)에 이를 무렵, 들판에서 산 코끼리[山象] 한 떼를 만났다. 담무갈은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고 신명을 다하여 가르침에 귀의하였다. 곧 수풀 속에서 사자가 튀어 나와, 코끼리떼가 놀라 어쩔 줄을 모르며 달아났다.

뒤에 항하(恒河)를 건넜다. 또 들소 한 떼를 만났다.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어 막 사람을 해치려 하였다. 담무갈은 귀의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였다. 이윽고 커다란 솔개가 날아오니, 들소들이 놀라 흩어져서 드디어 벗어날 수 있었다. 그의 정성스러운 마음에 감응하여, 위험에 처하여 구제 받은 것이 모두 이러한 종류였다.

뒤에 남천축국(南天竺國)에서 배를 타고 바닷길로 광주(廣州)에 도착하였다. 그가 겪은 일의 자취는 별도로 전기(傳記)가 있다. 그가 번역한 『관세음수기경(觀世音受記經)』은 오늘날 서울에 전한다. 후에 그가 돌아가신 곳은 알지 못한다.

03) 불타집(佛馱什)

불타집은 중국말로 각수(覺壽)라 하며 계빈국 사람이다. 어려서 미사색부(彌沙塞部)의 승려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율품(律品)에 오로지 힘을 써서 정밀하게 뛰어났다. 겸하여 『선요(禪要)』에도 빼어났다.

송(宋)나라의 경평(景平) 원년(423) 7월에 양주(楊州)에 이르렀다. 앞서 사문 법현(法顯)이 사자국(師子國)에서 『미사색률(彌沙塞律)』의 범본(梵本)을 얻었다. 그러나 미처 번역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서울의 여러 승려들은 불타집이 이미 이러한 학문을 잘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에 그에게 청하여 번역하게 하였다.

그 해 겨울 11월에 용광사(龍光寺)에 모여 34권으로 번역하였으며, 『오분율(五分律)』이라 일컬었다. 불타집은 범문(梵文)을 잡고, 우전국(于?國) 사문 지승(智勝)이 번역하였다. 용광사의 도생(道生)과 동안사(東安寺)의 혜엄(慧嚴)이 함께 붓을 들고 대조하여 교정하였다.

송(宋)나라의 시중(侍中) 낭야왕(瑯?王) 연(練)이 시주가 되었다. 다음해 4월에 비로소 마쳤다. 대부(大部)에서 계(戒)의 핵심과 갈마문(?磨文) 등을 추려내어 베낀 것이 모두 세상에 유행한다. 뒤에 불타집이 돌아가신 곳은 알지 못한다.

04) 부타발마(浮陀跋摩)

부타발마는 중국말로 각개(覺鎧)라 하며 서역(西域)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품행(品行)이 분명하고 곧았으며, 총명함이 무리에서 뛰어났다. 삼장(三藏)을 배우고 익혔다. 특히 『비바사론(毘婆沙論)』을 잘했다. 항상 이 부(部)를 수지하고 독송하여 마음의 요체[心要]로 삼았다. 송나라의 원가(元嘉) 연간(424~452)에 서량(西凉)에 도착하였다.

이보다 앞서 사문 도태(道泰)는 뜻이 굳세고 과단성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파미르 고원의 서쪽 지역을 두루 돌아다녔다. 널리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녔다. 범본(梵本) 『비바사(毘婆沙)』 3만여 게송(偈頌)을 얻어 가지고 고장으로 돌아왔다. 그는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마음을 비운 채, 눈 밝은 장인을 발돋움하고 기다렸다. 부타발마가 이 논을 공부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번역할 것을 청하였다.

그 당시 저거몽손(沮渠蒙遜)이 이미 세상을 떠나, 그의 아들 무건(茂虔)이 왕위를 물려받았다. 무건이 재위에 있던 승화(承和) 5년(437) 정축년 4월 8일, 곧 송나라 원가(元嘉) 14년(437)에 양주성(凉州城) 안에 있는 한예궁(閑預宮)에서 부타발마를 청하여 번역하였다. 도태가 붓으로 받아 적고, 사문 혜숭(慧嵩)과 도랑(道朗)이 교리를 공부하는 승려[義學僧] 3백여 명과 더불어, 문장의 뜻을 바로잡기를 거듭 두 차례나 하여 비로소 마쳤다. 모두 1백 권이다. 사문 도연(道挻)이 서문을 지었다.

얼마 후 위(魏)나라의 오랑캐 탁발도(託跋燾)가 서쪽으로 와서 고장(姑臧)을 정벌하였다. 양(凉)나라가 멸망하는 난리통에 경서와 온갖 도구들이 불타버려서 40권이 없어졌다. 오늘날에는 60권만 남아 있다. 부타발마는 난리를 피하여 서역으로 돌아갔다. 그가 돌아가신 곳은 알지 못한다.

05) 석지엄(釋智嚴)

석지엄은 서량주(西凉州) 사람이다. 스무 살에 출가하였다. 부지런함과 정성스러움으로써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납의(納衣)만을 입고 좌선하며, 오래도록 나물밥으로 살았다. 늘 자기 나라가 텅 비어 황량하다고 생각하였다. 널리 이름난 스승을 섬기고 경전의 가르침을 많이 구하고자 뜻을 세웠다.

마침내 서역의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녔다. 계빈국(?賓國)에 도달하여 마천타라정사(摩天陀羅精舍)로 들어갔다. 계빈국에서 불타선(佛馱先) 비구에게 선법(禪法)을 묻고 배웠다. 점차로 깊이를 더하여 3년이 지나자, 그 공은 10년 세월을 넘어섰다.

불타선은 그가 선정(禪定)에 조예가 있음을 알고는, 특별히 그의 재능을 남다르게 여겼다. 여러 승려와 세속인들은 그 소문을 듣고는 감탄하여 말하였다.

“중국 땅에도 도를 구하는 사문이 있구나.”

그제야 중국인들을 경시하지 않고 먼 곳에서 온 중국 사람들을 공경히 대접하였다.

그 당시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라는 비구 역시 그 나라 선(禪)의 종장(宗匠)이었다. 지엄은 곧 법을 중국에 전하고자 하여, 그에게 동쪽으로 가자고 요청하였다. 불타발타라는 그의 지극히 간절한 뜻을 가상히 여겼다. 마침내 함께 동쪽으로 떠났다.

이리하여 사막을 건너고 위험을 넘어 관중(關中)에 도착하였다. 항상 불타발타라를 따라 장안대사(長安大寺)에 머물렀다. 얼마 후 불타발타라가 뜻밖에 중국 승려들에게 축출을 당하였다. 지엄도 헤어져서 산동(山東)의 정사(精舍)에서 쉬면서 좌선하고 경을 외우며, 힘써 정진하여 배움을 닦았다.

동진(東晋)의 의희 13년(417)에 유송(劉宋)의 무제(武帝)가 장안을 공략하여 승리하였다. 개선하는 도중에 산동을 통과하였다.

당시 시흥공(始興公) 왕회(王恢)가 무제의 어가를 호종하고 산천을 유람하다가, 지엄이 있던 정사에 왔다. 함께 거주하는 세 사람의 승려가 각기 새끼로 맨 의자[繩牀]에 앉아 고요히 선정에 든 것을 보았다. 왕회가 다가가 한참 동안 있어도 깨닫지 못하였다. 이에 손가락을 튀기자 세 사람이 눈을떴다. 그렇지만 잠시 후 도로 눈을 감아버려,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왕회는 마음속으로 그들의 기이함을 존경하여 여러 노인들을 찾아가 묻자, 모두들 말하였다.

“이 세 분 승려는 숨어살면서 뜻을 추구하는 고상하고 깨끗한 법사들입니다.”

왕회는 즉각 송 무제(武帝)에게 이 일을 아뢰었다. 무제는 그들을 맞이하여 도읍으로 올라오기를 요청했으나, 아무도 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여러 번 간청한 뒤에야 두 사람이 지엄을 추천하여, 지엄이 무제를 따라갔다.

왕회는 도를 생각함이 평소 독실하고, 예로써 섬김이 매우 성대하였다. 지엄이 도읍에 올라오자 즉시 시흥사(始興寺)에 머물렀다. 지엄은 성품이 텅 비어 고요함을 사랑하여, 시끄러운 티끌세상을 피하고 싶어하였다. 왕회는 그를 위하여 동쪽 성문 밖 끝에 다시 정사를 건립하니, 곧 지원사(枳園寺)이다.

지엄은 전에 서역에서 가져 온 범본(梵本)의 여러 경전들을 미처 번역하지 못했다. 원가 4년(427)에 사문 석보운(釋寶雲)과 함께 『보요경(普曜經)』· 『광박엄정경(廣博嚴淨經)』·『사천왕경(四天王經)』 등을 번역했다.

지엄은 절에 있으면서 별다른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항상 탁발하여 생활하니, 도력의 교화가 이승과 저승까지 끼쳐서 모두 다 감복하였다. 어떤 귀신을 본 자가 말하였다.

“서주(西州)의 태사(太社)에서 귀신들이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엄공(嚴公)이 오면 피하여 숨어야 한다’고 하더라.”

이 사람이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정확히 못하였다. 갑자기 지엄이 이르렀다. 그의 성명을 묻자, 과연 지엄이라고 하였다. 묵묵히 그를 알아보고는 남몰래 특별히 예우하였다.

의동(儀同) 난릉(蘭陵) 소사화(蕭思話)의 부인 유씨(劉氏)가 병이 들었다. 늘 귀신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 무서워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 때 지엄을 맞이하여 설법을 청하였다. 지엄이 처음 사랑채에 도착하자마자, 곧 유씨는 떼 귀신들[群鬼]이 흩어져 달아나는 것을 보았다.

지엄이 나아가 유씨 부인을 위하여 경을 설하니, 병이 곧 나았다. 이 때문에 5계(戒)를 받고, 온 가문이 불법을 소중히 받들었다.

청렴하고 소박하여 욕심이 적었던 지엄은 보시를 받으면, 그것을 그대로 남에게 베풀었다. 어려서부터 사방을 행각하여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살지 않았다. 타고난 성품이 허심탄회하고 겸손하였다. 스스로 밝혀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아름다운 행실이 많았지만 세상에 모두 전해지지 않았다.

전에 지엄이 아직 출가하지 않았을 때에 5계를 받았지만, 계율을 범한 적이 있었다. 그 후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으나, 항상 계를 받지 못했다고 의심하였다. 번번이 그 때문에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여러 해 동안 선관(禪觀)을 닦았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했다.

마침내 재차 바다를 건넜다. 또 한번 천축국에 가서 지혜가 밝게 통달한 분들에게 여쭈었다. 나한(羅漢) 비구를 만나 그 일을 갖추어 물었다. 나한은 감히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 곧 지엄을 위해 선정에 들어, 도솔궁에 가서 미륵에게 여쭈었다. 미륵은 대답하였다.

“계를 받았노라.”

지엄은 크게 기뻐하였다. 이리하여 도보로 돌아오다가, 계빈국에 이르러서 병 없이 돌아가셨다. 그 때가 78세이다.

그 나라의 법도는 평범한 승려와 득도한 승려의 화장 장소를 각기 달리 했다. 지엄이 비록 계행에 대한 지조로 고명하기는 했지만, 실지의 수행은 아직 판별되지 않았다.

처음에 시신을 평범한 승려의 묘지로 옮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시신이 무거워서 들어올릴 수가 없었다. 변경하여 성인의 묘지로 향하자, 바람에 날리듯 저절로 가벼워졌다.

지엄의 제자인 지우(智羽)와 지원(智遠)이 짐짓 서역에서 돌아와, 이 상서로운 조짐을 알리고는 모두 외국으로 돌아갔다. 이 일을 가지고 지엄이 참으로 득도한 사람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다만 아직 4향(向)3)과 4과(果)4) 중간에서 얼마나 깊고 얕은지를 모를 뿐이다.

06) 석보운(釋寶雲)

석보운의 씨족(氏族)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전하는 말에 양주 사람이라고 한다. 어려서 출가하였다.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워 배움의 행실이 있었다. 뜻이 운치 있고 굳세며 깨끗해서 세상과 어울리지 못했다.

그러므로 어려서부터 바르고 곧으며 순수하고 깨끗함으로 이름이 났다. 법을 구하는 데에 간절하였다. 도를 위해 죽을 각오로 몸을 희생해서라도 몸소 부처의 신령스런 자취를 보고, 널리 중요한 불경들을 구하고자 하는 뜻을 두었다.

마침내 동진(東晋) 융안(隆安, 397~401) 초에 멀리 서역으로 떠났다. 법현(法顯)·지엄(智嚴)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서로를 따랐다. 고비사막을 건너고 설령(雪嶺)을 넘으면서, 온갖 괴로움과 위험을 겪으면서도 어려움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마침내 우전국(于?國)과 천축국의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두루 신령스러운 이적을 보았다. 곧 나찰의 들을 지나면서 하늘의 북소리를 들었다. 석가모니께서 남긴 자취를 우러러 예배한 것이 많았다. 보운은 외국에 있으면서 두루 범서를 배워, 천축국 여러 나라의 말과 글의 뜻을 모두 갖추어 알았다. 뒷날 장안으로 돌아와 불타발타라 선사를 따라 선(禪)을 일삼아 도(道)로 나아갔다.

얼마 되지 않아 불타발타라 선사가 뜻밖에 후진의 승려들에게 축출 당하였다. 그의 제자들도 모두 그 허물을 같이 하여, 석보운도 달아나 흩어졌다. 그 때 마침 여산(廬山)의 석혜원(釋慧遠)이 불타발타라가 추방당한 일을 해결하였다. 불타발타라와 함께 서울로 돌아가 도량사에 편안히 머물렀다.

대중 승려들은 보운의 뜻과 힘이 굳고 단단해서, 죽음의 지경[絶域]인 아주 먼 외국까지 가서 도를 널리 폈다고 생각하였다. 흉금을 터놓고 의견을 물으면서 존경하고 사랑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보운은 『신무량수경(新無量壽經)』을 번역해 냈다. 후기에 나온 여러 경전들은 대부분 보운이 바로잡아 정리한 것이다. 중국어와 범어에 모두 뛰어나, 음과 뜻이 알맞고 올곧아서, 보운이 정리한 것은 대중들이 모두 믿고 따랐다.

과거 관중(關中)의 사문 축불념(竺佛念)은 선역(宣譯)을 잘하여, 부견(符堅)과 요흥(姚興)의 2대에 걸쳐 여러 경전들을 번역하였다. 그런 강북과 상대적으로, 강남에서의 범어 번역은 보운보다 나은 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동진(東晋)과 송나라의 시기에 법장(法藏)을 크게 유통시켰다. 사문 혜관(慧觀) 등이 모두 벗으로 여기고 친하게 지냈다.

보운의 성품은 그윽한데 머물기를 좋아하여, 한적(閑寂)함을 늘 유지하였다. 마침내 육합산(六合山)5)의 절로 가서 『불본행찬경(佛本行贊經)』을 번역해 내었다. 산에는 기근에 굶주리는 백성들이 많았다. 습속이 좀도둑질을 좋아하였다. 보운이 설법하여 잘 이끌어 가르쳤다. 그러자 대부분 허물을 고쳐서, 예로써 섬기고 공양하는 자가 열 집에 여덟이나 되었다.

얼마 후 도량사(道場寺)의 혜관(慧觀)이 죽음에 임하여, 보운에게 서울로 돌아와 절 일을 맡아 다스려 줄 것을 청하였다. 보운은 어쩔 수 없이 돌아가서 1년 남짓 도량사에 머물렀다. 다시 육합산으로 돌아갔다.

원가 26년(449)에 산사에서 돌아가셨다. 이 때 나이는 74세이다. 그가 외국을 돌아다닌 것에 대해서는 따로 전기가 있다.

07) 구나발마(求那跋摩)

구나발마는 중국말로 공덕개(功德鎧)라고 한다. 본래 찰리종(刹利種)6) 출신으로 여러 대에 걸쳐 왕이 되어 계빈국(?賓國)을 다스렸다. 조부인 가리발타(呵梨跋陀)는 중국말로 사자현(師子賢)이라 한다. 강직한 성격으로 인해 유배를 당하였다. 아버지인 승가아난(僧伽阿難)은 중국말로 중희(衆喜)라 한다. 산림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구나발마의 나이 14세가 되자, 예리한 식견으로 사물의 이치를 환히 알고, 깊이 원대한 도량이 있었다. 어질고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흐르고, 덕을 숭상하며 착함에 힘썼다. 그의 어머니가 일찍이 들짐승의 고기를 장만하여 구나발마에게 이를 요리하도록 하였다. 구나발마가 말하였다.

“생명이 있는 무리는 살기를 바라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목숨을 요절시키는 일은 어진 사람의 할 일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화를 내며 말하였다.

“설령 죄를 짓는다손 치더라도, 내가 마땅히 너를 대신하겠다.”

구나발마가 훗날 기름을 끓이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을 데었다. 이 일로 인하여 그의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저를 대신하여 고통을 참아 주소서.”

그의 어머니가 말하였다.

“너의 몸에 있는 고통을 내가 어떻게 대신할 수 있느냐?”

구나발마가 말하였다.

“눈앞의 고통도 오히려 대신할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삼도(三塗)7)의 길에서입니까?”

어머니가 이에 잘못을 뉘우쳐 깨달아, 죽을 때까지 살생을 하지 않았다.

18세가 되자 점을 치는 사람이 보고 말하였다.

“그대의 나이 30세가 되면, 큰 나라에 군림하여 어루만지고 남면(南面)8)하여 제왕의 존귀함으로써 일컬어질 것이다. 만약 세상의 영화를 즐기지 않는다면, 마땅히 성인의 과보[聖果]를 얻을 것이다.”

나이 20세에 이르러 출가하여 계(戒)를 받았다. 9부를 밝게 꿰뚫고 4아함[含]에 두루 밝았다. 그리고 백여만 글자에 이르는 경전을 암송하였다. 율품(律品)에 깊이 통달하였으며, 선(禪)의 요의(要義)에 있어서도 신묘한 경지에 들어섰다. 당시에 다들 삼장법사(三藏法師)라고 불렀다. 그의 나이 30세에 이르러 계빈왕이 죽었다. 왕을 계승할 후사가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의논하였다.

“구나발마는 왕실의 맏아들이며, 재주가 밝고 덕이 높다. 환속시켜서 국왕의 자리를 계승하도록 청하자.” 그리하여 신하들 수백 명이 두세 차례 간곡하게 청하였다. 그러나 구나발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법사의 자리를 사양하고 무리들을 피하였다. 산간에 들어가서 계곡물을 마시고, 산과 들에 홀로 노닐면서 인간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후에 사자국(師子國)에 이르러 풍속을 살피고 교화를 넓혔다. 진리를 아는 무리들이 모두 말하였다.

“이미 초과(初果)를 터득했다.”

몸가짐과 차림새로도 남들을 감화시켜, 그를 본 자들은 마음을 내어 불법에 의지하였다.

후에 사바국(?婆國)에 이르렀다. 처음 도착하기 하루 전에 사바왕의 어머니가 밤에 꿈을 꾸었다. 한 도사가 하늘을 나는 배를 타고[飛舶] 나라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다음 날 아침 과연 구나발마가 와서 이르렀다. 왕의 어머니가 성스러운 예식으로 공경하고, 이어 5계(戒)를 받았다. 왕의 어머니가 왕에게 권하였다.

“전생에 맺은 인연으로 해서 어미와 아들의 관계가 되었다. 나는 이미 계를 받았다. 그렇지만 네가 믿지 않는다면, 후생의 인연에는 오늘의 관계가 영원히 끊어질까 두렵다.”

왕은 어머니의 간곡한 당부에 시달려, 곧바로 명을 받들어 계를 받았다. 차차 감화에 젖어듦이 오래되자, 정신을 전념하여 점점 독실해졌다.

얼마 지나서 이웃 나라의 군대가 국경을 침범하였다. 왕이 구나발마에게 말하였다.

“외적이 힘을 믿고 침범을 하려 합니다. 만약 상대해서 전투를 한다면 반드시 다치고 죽는 자가 많을 것입니다. 만약 이를 막지 않는다면 장차 위태로워져 멸망에 이를 것입니다. 지금 오로지 존귀하신 스승님의 명을 따르고자 합니다. 무슨 계책이 있으십니까?”

구나발마가 말하였다.

“포악한 적이 공격을 하면, 의당 그 사나움을 방어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마땅히 자비심을 일으켜서, 해치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할 뿐입니다.”

왕이 스스로 병사를 거느리고 겨루었다.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문득 적들이 물러나 흩어졌다. 왕이 빗나간 화살을 맞아 다리를 다쳤다. 구나발마가 그를 위하여 주문을 외운 물로 상처를 씻어 주었다. 이틀이 지난 뒤 평상시처럼 회복되었다. 왕의 공경스러운 믿음이 더욱 충만해졌다.

이에 출가하여 도를 닦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법문에 몸을 의탁하려 한다. 경들은 다시 총명한 임금을 뽑도록 하라.”

군신들이 모두 절을 하고 엎드려 청하였다.

“왕께서 만약 나라를 버리신다면, 자식 같은 우리 백성들은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또한 적국이 흉악하고 강성해서, 험한 형세를 의지하여 대치하는 상황입니다. 만일 왕께서 보호해 주시는 은혜를 잊는다면, 우리 백성들은 어떤 처지에 놓이겠습니까?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하늘 같은 자비로움으로 가엾게 여기지 않으십니까? 감히 죽기로 청하노니, 그 진실한 마음을 펴도록 하옵소서.”

왕이 차마 굳이 거역하지 못하였다. 이어 군신들에게 나아가서 세 가지 바람을 청하였다.

“만약 허락한다면, 마땅히 머물러서 나라를 다스리겠다. 첫 번째 바람은 무릇 왕국의 경계 안에서는 똑같이 스승님[和尙]을 받드는 것이다. 두 번째 바람은 다스리는 경내 안에서는 모두 일체의 살생을 금하는 것이다. 세 번째 바람은 소유한 재물을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나누는 것이다.”

군신들은 기뻐하여 모두가 한결같이 공경하며 받아들였다. 이에 온 나라가 모두 따라서 계를 받았다. 왕이 후에 구나발마를 위하여 정사(精舍)를 건립하였다. 몸소 건축에 쓸 재료를 끌고 가다가, 왕이 발가락을 다쳤다. 구나발마가 또다시 주술로 치료해 주었다. 얼마 안 되어 회복되었다. 인도하고 교화하는 소문이 원근으로 퍼져나갔다. 이웃 나라에서 풍문을 듣고는 모두 사신을 보내어 요청하였다.

당시에 서울에는 덕으로 이름 높은 사문 혜관(慧觀)과 혜총(慧聰)이 있었다. 멀리에서 훌륭하시다는 소문을 듣고 직접 가르침을 받고자 생각하였다. 원가(元嘉) 원년(424) 9월에 문제(文帝)에게 직접 아뢰어, 구나발마를 맞이해 오기를 청하였다.

문제가 곧바로 교주(交州) 자사에게 칙명을 내려, 배를 띄워 맞이하여 들이도록 하였다. 혜관 등이 또 사문 법장(法長)·도충(道沖)·도준(道雋) 등을 보내어, 그에게 가서 보살펴 주기를 청하였다. 아울러 구나발마와 사바왕인 파다가(婆多加) 등에게 편지를 보내어, 송나라 국경에 왕림하여 불도의 가르침을 퍼뜨려주기를 희망하였다. 구나발마는 성스러운 교화를 마땅히 넓히고자 함에 있어서, 먼 곳으로 가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이에 앞서 이미 상인 축난제(竺難提)의 배를 타고서, 어떤 작은 나라로 향하고자 하였다. 마침 순풍을 만나 드디어 광주(廣州)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그의 유언장[遺文]에서 말하였다.

“업행(業行)의 바람에 나부끼어 인연 따라 송나라에 이르렀구려.”

이 말은 바로 이것을 가리킨다.

문제(文帝)는 구나발마가 이미 남해(南海)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주군(州郡)에 칙명을 내려 비용을 내어 서울로 오게 하였다. 시흥(始興)을 경유하는 길에서 멈추어 1년쯤을 보내었다. 시흥에는 호시산(虎市山)이 있는데 형세가 우뚝 솟고 봉우리와 산마루가 높고 가파랐다. 구나발마가 그것이 기사(耆?)9)와 방불하다고 하여, 그 이름을 영취산(靈鷲山)이라고 바꾸었다.

영취산 절의 바깥에는 별도로 선실(禪室)을 지었다. 선실은 절에서 몇 리쯤 떨어져 있어 경쇠 소리[磬音]가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매양 건치[椎]소리가 이를 때마다 구나발마가 이미 이르렀다. 간혹 비를 무릅쓰고 왔지만 젖지 않았다. 혹은 진흙을 밟고 왔지만 습기가 차지 않았다. 당시에 많은 도인과 속인이 숙연하게 더욱 공경하지 않음이 없었다.

절에는 보월전(寶月殿)이 있었다. 구나발마가 보월전 북쪽 벽에 손수 나운상(羅云像)10)과 정광(定光)11)·유동포발(儒童布髮)12)의 형상을 그렸다. 형상을 그려 놓은 뒤로 매일 저녁에 빛을 발하였다. 빛을 발하기를 오래한 뒤에야 그치었다.

시흥(始興)의 태수인 채무지(蔡茂之)가 깊이 더욱더 존경하여 우러렀다. 후에 채무지가 장차 죽음에 이르자, 구나발마가 몸소 가서 보고는 설법을 하여 편안하게 위로하였다. 후에 채무지의 집사람이 꿈속에서, 채무지가 절 안에서 여러 승려와 함께 법을 강론하는 것을 보았다. 참으로 구나발마가 교화하여 인도한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 산에는 본래 호랑이로 인한 재앙이 많았다. 구나발마가 이곳에 거주한 이후로는 밤낮으로 오갔다. 그러면서 혹시 호랑이를 만나더라도, 지팡이로 호랑이 머리를 두드리며 희롱하고 지나갔다. 이에 산길을 가는 나그네와 물길을 가는 객들이 오가는 데 막힘이 없었다. 구나발마의 덕에 감동하여, 교화에 귀의하는 자들이 열에 일곱 여덟이나 되었다.

구나발마가 일찍이 별실에서 선정(禪定)에 들었다. 여러 날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다. 절의 승려가 사미를 보내어 살펴보았다. 사미는 한 마리 흰 사자가 기둥을 타고 올라가고, 하늘 끝까지 가득히 푸른 연꽃이 널리 퍼지어 피어나는 것을 보았다. 사미가 놀라고 두려워 큰 소리로 외치며 달려가서 사자를 쫓았으나, 휑하니 보이지 않았다. 그의 신령하고 기이함에 견줄 것 없음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후에 문제(文帝)가 거듭 혜관(慧觀) 등에게 칙명을 내려서 다시 정성을 다하여 청하였다. 이에 배를 타고 서울로 갔다. 원가(元嘉) 8년(431) 정월에 건업(建?)에 도착하였다. 문제가 불러들여 만나보고 은근하게 위문하였다.

“제자는 항상 재계하며 살생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몸으로 남을 죽이는데 내몰려서 뜻을 따르지 못하였습니다. 법사께서 이미 만 리를 멀다 않고 이 나라에 와서 교화를 펴시니, 장차 무엇을 가지고 가르치겠습니까?”

구나발마가 말하였다.

“대저 도란 마음에 있는 것이지 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법이란 자기로부터 말미암는 것이지 남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제왕과 범부는 수양하는 바가 각기 다릅니다. 범부의 경우는 몸이 비천합니다. 이름 또한 하잘것없어 말과 명령을 떨치지 못합니다. 만약 자신을 이겨서 몸으로 애쓰지 않는다면,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러나 제왕은 사해(四海)를 집으로 삼고, 만 백성을 자식으로 삼습니다. 한 마디 좋은 말을 하면 선비와 여인네[士女]들이 함께 기뻐합니다. 한 가지 훌륭한 정치를 펴면 신과 사람[人神]마저 함께 화합합니다. 생명을 죽이지 않는 형벌을 쓰고, 힘을 지치게 하지 않는 사역을 시키십시오. 그리 하시면 바람과 비로 하여금 때에 맞고, 춥고 따뜻한 기후가 절기에 고루 알맞아서, 온갖 곡식이 무성하게 번성하고, 뽕과 삼[桑麻]이 빽빽하게 우거질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가지런히 하신다면[持齋] 가지런함 역시 크다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살생을 하지 않는다면 덕 역시 많다 할 것입니다. 어찌 반나절의 음식을 덜어서 한 마리 짐승의 목숨을 온전히 한 뒤에야, 바야흐로 널리 구제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문제가 이에 책상[机]을 어루만지며 찬탄하였다.

“대저 속인은 고원한 원리에 미혹되고, 사문은 가까운 가르침에 막히고 맙니다. 고원한 이상에 미혹된다는 것은 지극한 도를 허탄한 말로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가까운 가르침에 막힌다는 것은 문장[篇章]에 구애되어 사로잡히는 것을 말합니다. 법사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깨우침을 열어 밝게 다다랐다고 일컬을 만합니다. 그러니 천인의 경지를 더불어 말할 만하다고 하겠습니다.”

이에 기원사(祇洹寺)에 머물도록 하여 공양을 융숭하고 후하게 해 주었다. 공경·제후왕과 뛰어난 선비들이 높여서 받들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얼마 뒤에 절에서 『법화경(法華經)』과 『십지경(十地經)』을 개강하였다. 법석을 여는 날 수레와 일산이 거리에 가득 찼다. 구경을 하며 오가는 사람들로 어깨가 서로 맞닿고 발꿈치가 서로 이어졌다. 구나발마의 정신은 자연스럽고 웅변은 빼어났다. 혹 때로는 통역하는 사람을 빌어서 말이 오가는 사이에 깨닫게 하였다.

후에 기원사의 혜의(慧義)가 청하여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을 내었다.

처음에 28품을 내고, 후에 제자가 대신 2품을 내어서 30품을 이루었다. 하지만 미처 옮겨 베끼기 전에 ?서품(序品)?과 ?계품(戒品)?을 잃어버렸다. 그 때문에 지금까지도 오히려 두 가지의 판본이 있다. 혹은 『보살계지경(菩薩戒地經)』이라고도 한다.

과거 원가(元嘉) 3년(426)에 서주(徐州) 자사 왕중덕(王仲德)이 팽성(彭城)에서 외국의 이엽바라(伊葉波羅)에게 『잡심(雜心)』을 번역할 것을 청하였다. 그렇지만 품(品)을 선택함에 미쳐서는, 장애로 말미암아 드디어 일을 그만두고 말았다.

이 때에 이르러 구나발마에게 다시 청하여 후품(後品)을 번역하여 13권을 이루었다. 앞서 내었던 『사분갈마(四分?磨)』·『우바새오계략론(優婆塞五戒略論)』·『우바새이십이계(優婆塞二十二戒)』 등과 아울러 모두 26권이다. 모두 글의 뜻이 자세하고 신실하여 범어와 한어의 차이가 없었다.

당시 영복사(影福寺)의 여승 혜과(慧果)와 정음(淨音) 등이 함께 구나발마에게 청하였다.

“6년 전 여덟 명의 사자국(師子國) 여승이 서울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송나라 땅에는 아직 여승이 있던 적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2중(衆)13)을 수계하는 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계품이 온전하지 못할까 염려된다’고 하였습니다.”

구나발마가 말하였다.

“계법(戒法)은 본래 많은 승려들이 있어서 나온 것이다. 설사 그러한 지난날의 사실과는 맞지 않더라도, 계를 얻는 데에 문제가 없음은 대애도(大愛道)비구니14)의 인연과 같다.”

여러 승니들이 또 연월이 차지 못함을 두려워하여 굳이 다시 받으려 하니, 구나발마가 일러 말하였다.

“좋다. 진실로 더욱 밝히고자 하니, 이것은 크게 수희공덕(隨喜功德)을 돕는 것이다. 다만 서역국 승니의 승랍(僧臘)이 차지 못하고, 또한 열 사람이 되지 못한다. 게다가 송나라의 말을 배우게 해야 한다. 별도로 서역의 거사(居士)를 통하여, 다시 외국에서 승니를 청하여 오게 해서 열 명의 수를 채워야 할 것이다.”

그 해 여름 정림하사(定林下寺)에서 안거하였다. 당시에 신자들이 꽃을 꺾어서 자리에 깔았다. 오직 구나발마가 앉은 자리만 꽃의 빛깔이 더욱 싱싱하였다. 무리들이 모두 성스러운 예로 숭배하였다.

하안거를 마치자 기원사로 돌아갔다. 그 해 9월 28일 점심이 끝나기 전에 먼저 일어나서 각(閣)으로 돌아갔다. 그의 제자가 뒤에 이르러 보니 갑작스레 이미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는 65세이다.

아직 입적하기 전에 미리 게송 36행을 유언장으로 지어서, 자신의 인연에 대해 설하였다.

“이미 제2과(果)를 증득하였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봉함하고 제자 아사라(阿沙羅)에게 부탁하였다.

“내가 죽은 후에 이 글을 가지고 돌아가서 천축국의 승려에게 보여 주고, 이 나라의 승려들에게도 보여 주어라.”

입적한 뒤 곧바로 새끼로 맨 의자[繩牀]에 붙들어 앉혔다. 얼굴 모습이 입정(入定)에 든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달려 온 도인과 속인이 수천 명에 이르렀다. 모두 향기가 강렬하게 감돌아 풍겨 나오는 것을 맡았다. 뱀이나 용처럼 생긴 한 필쯤 되는 길이의 물체 하나가, 시신 옆에서 일어나 곧바로 하늘 위로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무어라 이름 지를 수 없었다.

곧 남림(南林)의 계단(戒壇) 앞에서 외국법에 의해서 사비(?毘)하였다. 사부대중이 빽빽하게 모였다. 향과 섶나무를 쌓아 놓고 향유를 뿌려 시신을 불살랐다. 오색의 불꽃이 일어나서 불기운이 왕성하게 타올라 하늘까지 빛났다. 이 때에 하늘은 맑고 환하여, 도인이나 속인이나 모두 슬퍼하며 탄식하였다.

이에 그곳에 백탑(白塔)15)을 세웠다. 거듭해서 계를 받고자 하던 여러 비구니들은 바라던 일이 끊어지자, 슬픔으로 흐르는 눈물을 스스로 이겨낼 수 없었다.

과거 구나발마가 서울에 이르자, 문제가 그를 좇아 보살계를 받고자 했다. 때마침 오랑캐가 국경을 침범하여, 미처 그 일을 물어 명을 받들기까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런데 구나발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나니, 본래의 생각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인해 상심하여 한스러움이 더욱 심하였다. 이에 여러 승려에게 명하여 그의 유언장을 번역하였다.

그의 유언장은 다음과 같다.

먼저 삼보(三寶)와 청정한 계를 지니신
여러 상좌(上座)께 절 올리나이다.


탁한 세상엔 아첨과 간사함 많아
헛되고 거짓되어 참된 마음 없고

어리석고 미혹되어 참됨을 알지 못하여
시기심으로 덕 있는 사람 질투하니
이 때문에 여러 성현께선
지금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시었네.



나 구나발마는
목숨이 다할 때 되어
그 동안 얻은 착한 공덕을
이제 그대로 말해 보리다.



아첨과 간사한 마음으로
명리 구하기 바라지 않고
대중의 게으름 타이르고 권하여
불법을 더욱 자라나게 했네.



크나큰 법력 이와 같아
모두 들어보오, 어진이여.


옛날 광야에서 나는
처음 죽은 시체를 보았소.



살찐 살벌레 잔뜩 들끓고
악취에다 피고름 흘러 내렸지.


마음 매어 그곳에 정신 모으니
이 몸의 본성도 이와 같아서

항상 이 몸의 모습을 보았네.


나방이 불을 두려워 아니함과 같음을
이같이 헤아릴 수 없는 방법으로
사시관(死尸觀)을 닦아 익혀서

밖으로 들으려는 생각[聞思] 던져 버리고
나무 수풀 사이에 의지해 머물렀다오.


이 밤 오로지 정진하여
바르게 관할 것을 늘 잊지 않아서

경계가 늘 앞에 있음이
맑은 거울을 대함과 같으니
저와 같이 나 역시 그러하여
이로써 마음 고요하고 편안하여

지극히 맑은 몸이 정토라면
청량한 마음은 극락일세.


큰 환희심이 자라나면
집착 없는 마음이요

골쇄상(骨鎖相)을 이룬다면
백골이 눈앞이라
썩고 무너져서 뼈마디도 흩어지고
백골마저 가루 되지만

티 없는 지혜는 타올라서
사법상(思法相)16)을 굴복시켰어라.


때때로 이 같은 경지 터득하여
몸이 편안하고 매우 유연하여

이 같은 방편의 수행이
훌륭하게 나아지고 더욱 더 늘어나니
미세한 티끌 찰나찰나 소멸하여
색이 무너진 정념(正念)의 법(法)이여,

이것이 바로 마침내 도달할 곳이거늘
무슨 까닭으로 탐욕 일으키는가.


알아라, 여러 감각에서 생기는 것이
고기가 미끼를 탐하는 것과 같음을.



그 감각이 헤아릴 수 없이 무너지고
찰나찰나 닳아 없어짐 관한다면
알리라, 저 감각이 의지하는 곳
원숭이처럼 날뛰는 마음에서 일어남을.


업과 업의 과보란
인연에 의지하여 찰나찰나 사라짐을
마음이 아는 가지가지
이것을 별상법(別相法)이라 이름하니

별상법은 사(思)와 혜(慧)와 염(念)을
차례로 만족하게 닦는 것이네.


여러 가지 법상 관하면
그 마음 더욱 밝아져서

내가 그 지혜[爾焰]17)속에서
4념처(念處)18)를 분명하게 보니
이로써 율행(律行)이 다해
마음을 거둬 잡아 인연 가운데 머물렀어라.



괴로움은 달구어진 칼 같으니
이는 갈애(渴愛)19)로 구르는 것이네.


갈애 다하여 열반에 들어
두루 저 삼계를 굽어보니

죽음의 불꽃 활활 타올라
형체 쇠약하여 바짝 수척하지만
장난을 멈추고 방편을 좋아하면20)
몸 다시 점점 충만해지고

수승하고 묘한 뭇 상(相) 생하니
정위(頂位)와 인위(忍位)도 이와 같아라.


이는 나의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진실로 바른 방편으로

점점 경계 약해져
적멸의 낙이 늘어나고
세제일법(世第一法) 얻으면
순일무구한 한 생각 진제를 반연하고

차례로 법인(法忍)이 생하여
무루도(無漏道)라 하나니
망상과 모든 경계와
이름마저 다 멀리 여의어

경계의 진제의(眞諦義)는
번뇌를 없애 버리고 청량함 얻음이어라.


삼매의 과보 성취하면
번뇌 떠난 청량한 연(緣)이어서

솟거나 가라앉지도 않아
맑고 지혜롭기 밝은 달이요
고요히 안주하니
순일무구한 적멸의 상이라

이는 내가 말로 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오직 부처님께서만 아시는 경지일러라.


나바아비담(那波阿毘曇)에
다섯 인연과(因緣果)를 설했으니
참된 뜻이란 알아 닦고 행함이요
이름이란 아무 짝에 쓸모없는 것
여러 논마다 각기 이단(異端)이 있지만
수행에는 두 가지 이치 없으니

치우치게 집착하면 시비가 있되
통달한 자야 어그러지거나 다툼 없도다.


수행의 여러 묘한 상을
내 지금 설하지 않음은

사람들이 망상을 일으켜
세간을 미혹시킬까 두렵기 때문이네.


경지 따라 중생에 이익 되는 법을
내 이미 약간 설했으니

눈 밝은 지혜인은
이 연기를 잘 알 것이오.


마라바국(摩羅婆國) 경내에서
비로소 초성과(初聖果)를 터득했고

정사와 산사에서
수도한 자취는 멀리 여읨을 닦았으며
뒤에 사자국(師子國)의
겁파리(劫波利)라는 마을에서

더욱 닦아 나아가 제2과를 증득하니
이름하여 사다함이라
이로부터 어려움 많아
이욕도(離欲道)를 닦는 장애되어서
내 멀리 여읨 닦음을 보는 이나
이 곳이 한적함을 알은 이나
모두 희유한 마음 내어
이양(利養)하러 다투어 모여들었네.



내 이를 불타는 독같이 여겨
꺼려 여의는 큰마음 내었어라.


난리를 피하여 바다를 건너
사바국(?婆國)과 임읍(林邑)을 지나

업행(業行)의 바람에 나부끼어
인연 따라 송나라에 이르렀구려.


이에 여러 나라 안에서
힘닿는 대로 불법 일으켰나니

물어야 할 바를 묻지 마시고
진실관을 살펴 닦으소.


지금 이 몸 멸하여 없어짐은
고요히 등불 꺼지는 것과 같다오.



前頂禮三寶 淨戒諸上座
濁世多諂曲 虛僞無誠信
愚惑不識眞 懷嫉輕有德
是以諸賢聖 現世晦其跡
我求那跋摩 命行盡時至
所獲善功德 今當如實說
不以諂曲心 希望求名利
爲勸衆懈怠 增長諸佛法
大法力如是 仁者咸諦聽
我昔曠野中 初觀於死屍
?脹蟲爛壞 臭穢膿血流
繫心緣彼處 此身性如是
常見此身相 貪蛾不畏火
如是無量種 修習死屍觀
放捨餘聞思 依止林樹間
是夜專精進 正觀常不忘
境界恒在前 猶如對明鏡
如彼我亦然 由是心寂靖
輕身極明淨 淸?心是樂
增長大歡喜 則生無著心
變成骨鎖相 白骨現在前
朽壞肢節離 白骨悉磨滅
無垢智熾然 調伏思法相
我時得如是 身安極柔軟
如是方便修 勝進轉增長
微塵念念滅 壞色正念法
是則身究竟 何緣起貪欲
知因諸受生 如魚貪鉤餌
彼受無量壞 念念觀磨滅
知彼所依處 從心??起
業及業果報 依緣念念滅
心所知種種 是名別相法
是則思慧念 次第滿足修
觀種種法相 其心轉明了
我於爾焰中 明見四念處
律行從是竟 攝心緣中住
苦如熾然劍 斯由渴愛轉
愛盡般涅槃 普見彼三界
死焰所熾然 形體極消瘦
喜息樂方便 身還漸充滿
勝妙衆生相 頂忍亦如是
是於我心起 眞實正方便
漸漸略境界 寂滅樂增長
得世第一法 一念緣眞諦
次第法忍生 是謂無漏道
妄想及諸境 名字悉遠離
境界眞諦義 除惱獲淸?
成就三昧果 離垢淸?緣
不涌亦不沒 淨慧如明月
湛然正安住 純一寂滅相
非我所宣說 唯佛能證知
那波阿毘曇 說五因緣果
實義知修行 名者莫能見
諸論各異端 修行理無二
偏執有是非 達者無違諍
修行衆妙相 今我不宣說
懼人起妄想 ?惑諸世間
於彼修利相 我已說少分
若彼明智者 善知此緣起
摩羅婆國界 始得初聖果
阿蘭若山寺 道跡修遠離
後於師子國 村名劫波利
進修得二果 是名斯陀含
從是多留難 障修離欲道
見我修遠離 知是處空閑
咸生希有心 利養競來集
我見如火毒 心生大厭離
避亂浮于海 ?婆及林邑
業行風所飄 隨緣之宋境
於是諸國中 隨力興佛法
無問所應問 諦實眞實觀
今此身滅盡 寂若燈火滅
08) 승가발마(僧伽跋摩)

승가발마는 중국말로 중개(衆鎧)라 하며 천축국 사람이다. 어려서 속세를 떠났으며, 맑고 준수하게 계율을 잘 지키는 덕이 있었다. 삼장을 잘 해석했다. 그 중에서도 『잡심론(雜心論)』에 정통했다.

송 원가(元嘉) 10년(433)에 고비사막을 지나 서울에 이르렀다. 재간이 넓고 인품이 맑아서, 도인과 속인들이 그를 공경하고 특별하게 대우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그를 종사로서 받들어 섬겨 삼장법사(三藏法師)라고 불렀다.

일찍이 경평(景平) 원년(423)에 평륙(平陸)의 수령인 허상(許桑)은 집을 허물어 절을 지었다. 이 때문에 평륙사(平陸寺)라고 이름 붙였다. 후에 도량사(道場寺)의 혜관(慧觀)이 승가발마의 도행이 순수하고 치밀하다고 여겼다. 그에게 절에 머물러 달라고 청하고, 공양을 높이 받들어 그의 덕을 드러내었다.

승가발마는 혜관과 함께 탑을 3층으로 올렸다. 오늘날의 봉성(奉誠)탑이 바로 그것이다. 승가발마는 도를 행하고 경을 암송하기를 밤낮으로 그치지 않았다. 대중 승려들이 모여들어 불도의 교화가 널리 퍼졌다.

과거 구나발마(求那跋摩) 삼장법사는 계품(戒品)에 밝아서, 영복사(影福寺)의 비구니 혜과(慧果) 등을 위해 거듭 구족계(具足戒)를 받게 하려고 하였다. 이 때에 이부대중이 아직 갖춰지지 않았는데, 삼장이 입적하고 말았다. 얼마 지나서 사자국(師子國)의 비구니 철살라(鐵薩羅) 등이 서울로 왔다. 이에 대중들이 모두 청하여 승가발마를 스승으로 삼아, 삼장의 자취를 이어받도록 하였다.

기원사(祇洹寺)의 혜의(慧義)는 서울에서 제멋대로 돌아다니면서 말하였다.

“이상한 것을 바로잡아야 하니, 뜻을 집행하는 것이 같지 않다.”

혜원은 직접 승가발마와 논의를 겨루어 엎치락뒤치락 하였다. 승가발마는 종지를 표방하고 법다움을 환하게 드러냈다. 이치로서 증명함이 분명하고 진실하여, 이미 덕에 귀의(歸依)하는 바가 있었다.

혜의는 마침내 완고함과 편협함을 돌리고, 수그려서 추앙하여 복종하였다. 제자 혜기(慧基) 등으로 하여금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공경하여 섬기도록 하였다. 계를 받은 비구와 비구니는 수백 명이나 되었다.

송나라 팽성왕(彭城王) 의강(義康)은 그의 모범적인 계율[戒範]을 높이 받들고 재 올리는 공양을 널리 설치하였다. 그러자 사부 대중들의 수가 너무 많아져서 서울이 기울어질 정도였다.

혜관(慧觀) 등은 승가발마가 오묘하게 『잡심론』을 이해하여, 그 의미를 꿰뚫어 암송한다고 여겼다. 앞서 구나발마 삼장이 비록 번역했다고는 하나, 아직 책으로 엮지 못했다.

즉시 그 해 9월 장간사(長干寺)로 학사(學士)들을 불러들였다. 다시 승가발마를 청해 번역하게 했다. 보운(寶雲)이 말을 풀고, 혜관(慧觀)이 붓으로 받아 적었으며, 자세히 고증하고 교감하기를 한 번씩 두루 하여 끝마쳤다.

이어서 『마득륵가경(摩得勒伽經)』·『분별업보략(分別業報略)』·『권발제왕요게(勸發諸王要偈)』 및 『청성승속문(請聖僧俗文)』 등을 펴냈다.

승가발마는 돌아다니면서 교화하는 데에 뜻을 두었으므로, 한 군데에 머무르지 않았다. 불경 번역하는 일을 끝내고 난 뒤에 작별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대중들이 모두들 만류했으나, 그를 머무르게 할 수 없었다.

원가(元嘉) 19년(442) 서역 상인의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다.

09) 담마밀다(曇摩蜜多)

담마밀다는 중국말로 법수(法秀)라 하며 계빈국 사람이다. 일곱 살이 되자 정신이 깨끗하고 올곧았다. 불법의 일을 볼 때마다 저절로 뛸 듯이 기뻐하였다. 그의 부모는 사랑하기는 했지만 특이하게 여겨서, 마침내 그를 출가시켰다.

계빈국에서는 많은 성인과 통달한 이를 많이 배출하였다. 그러므로 담마밀다는 자주 훌륭한 스승을 만나 많은 경을 널리 꿰뚫었다. 특히 선법(禪法)에서 깊이가 있었다. 그가 터득한 경지는 지극히 정미하고 몹시 심오하였다 사람됨이 마음이 침착하고 생각에 깊이가 있으며, 총명하여 사리를 잘 해득하였다. 의식과 규범을 세밀하게 바로잡았다. 태어날 때부터 두 눈썹이 붙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연미(連眉) 선사라고 불렀다. 어려서부터 세상을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여 교화를 펼칠 뜻을 맹세하였다.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다가, 드디어 구자국(龜玆: 신강 위구르 자치구)에 이르렀다.

구자국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구자왕의 꿈에 신이 말하였다.

“큰 복덕이 있는 분이 내일 입국할 것이다. 그대는 반드시 공양해야만 한다.”

다음 날 아침 곧바로 외교를 담당하는 관리[外司]에게 칙령을 내렸다. 만일 이채로운 분이 국경에 들어오면, 반드시 달려와 아뢰라고 하였다. 얼마 있다가 과연 담마밀다가 이르렀다. 왕은 몸소 교외로 나가 담마밀다를 맞이하였다. 궁으로 들어갈 것을 청하고, 마침내 그를 따라 계(戒)를 받고, 네 가지 공양물로 시주하는 예를 다했다.

담마밀다는 편안하게 옮겨 다닐 수 있으므로, 재물로 봉양 받는 것에는 구애받지 않았다. 몇 년을 머물자 떠날 마음을 가졌다. 그러자 다시 신(神)이 왕의 꿈에 내려와 말했다.

“복덕 있는 분이 왕을 버리고 떠난다.”

왕은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났다. 이윽고 왕과 신하들이 극구 말렸으나, 그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결국 고비사막을 지나 돈황에 이르렀다. 여유 있는 넓은 땅에 정사(精舍)를 건립하였다. 벚나무 천 그루를 심어서 정원 백 이랑을 조성하였다. 방각(房閣)과 못[池沼]은 매우 엄숙하고 깨끗하였다. 얼마 지나서 다시 양주(凉州)로 가서 공부(公府)의 옛 절에서 다시 절을 수리하였다. 배우려는 문도(門徒)들도 많이 찾아들어 선업(禪業)이 몹시 성하였다.

항상 강남의 천자 땅에 불법을 전하려고 뜻을 두었다. 송 원가(元嘉) 원년(424)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촉(蜀: 四川省)에 이르렀다. 이윽고 협주(峽州)를 나와 형주(荊州)에 머물렀다. 장사사(長沙寺)에다 선각(禪閣)을 조성하여 세웠다.

지극히 간절하고 지성스럽게 사리(舍利) 얻기를 기도하면서 청하였다. 10여 일이 지나 마침내 한 매를 감응하였다. 그릇에 부딪쳐 소리를 내면서 빛을 내뿜어 온 방 안에 가득하였다. 승려와 속인 제자들이 더욱 열심히 용맹정진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사람들마다 그 마음을 백 곱절 더하였다.

얼마 후 양자강(揚子江)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와 서울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중흥사(中興寺)에 머물렀다. 나중에는 기원사(祇洹寺)에서 휴식을 취했다. 담마밀다의 불도에 대한 명성은 본래부터 드러나서 교화가 여러 나라에 미쳤다. 서울에 이르자, 처음부터 온 도읍이 다 기울어질 만큼 예우하고 가르침을 얻고자 하였다.

송의 문애(文哀)황후로부터 황태자, 공주에 이르기까지 후궁에서 재(齋)를 설치하지 않음이 없었다. 초액(椒掖)21)에서 계 받기를 청하였다. 건강을 여쭈는 심부름꾼들이 열흘을 멀다 않고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곧 기원사(祇洹寺)에서는 『선경(禪經)』·『선법요(禪法要)』·『보현관(普賢觀)』·『허공장관(虛空藏觀)』 등을 번역하여 펴냈다. 항상 선도(禪道)를 가르쳐서, 때로는 천 리 먼 곳에서 가르침을 받으러 오기까지 하였다. 멀거나 가까운 곳의 사부 대중들이 모두 그를 대선사(大禪師)라고 불렀다.

회계(會稽: 浙江省) 태수 평창(平昌) 사람 맹의(孟?)는 깊이 불법을 믿어, 삼보(三寶)를 섬기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았다. 평소부터 선(禪)의 묘미를 좋아하여 공경하는 마음이 매우 두터웠다. 절우(浙右)에 부임하면서 담마밀다를 청하여 함께 돌아다니고, 무현(?縣)에 있는 산에다가 탑과 절을 건립하였다.

동쪽 나라의 옛 습속은 대부분 무당을 따르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지만 오묘한 교화가 퍼지면서부터는 집집마다 바른 곳으로 귀의하였다. 그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동안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

원가 10년(433)에 담마밀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종산(鐘山)의 정림하사(定林下寺)에 머물렀다. 담마밀다는 타고난 성품이 단정하고 맑아서 평소 산과 시내를 사랑하였다. 종산(鐘山)이 자리한 산다움의 아름다움은 숭산(嵩山)이나 화산(華山)과 겨룰 만하다 생각하였다. 정림하사의 전체적 틀 잡음이 시냇가의 옆으로 낮게 자리한 것을 항상 한탄했다.

이에 높은 곳에 올라 땅을 살펴보고, 산세(山勢)를 헤아려서 살 만한 곳을 정하였다. 원가 12년(435)에 돌을 자르고 나무를 깎아 상사(上寺)를 지었다.

선비들과 서민들이 그의 풍모를 흠모하여 봉헌한 것이 가득 쌓여, 선방(禪房)과 전우(殿宇)를 빽빽하게 여러 층으로 세웠다. 이에 사문(沙門)의 무리들이 만 리 먼 곳으로부터 몰려들었다. 엄숙하고 온화하게 불경을 암송하면서, 교화를 기울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정림(定林)의 달(達) 선사는 달마밀다의 수제자[神足弟子]로, 당신의 가르침을 넓혀서 명성이 도인과 속인들을 진동시켰다. 그 때문에 청정하게 교화가 오래 지속되고 변하지 않을 수 있었다. 뛰어난 업적은 높이 받들어져서 바뀌지 않았으니, 이는 담마밀다가 남긴 강렬한 가르침[遺烈] 때문일 것이다. 이리하여 서역에서 남쪽 나라에 이르기까지 돌아다닌 곳마다, 선을 닦는 모임[檀會]을 다시 일으켜서 가르침을 널리 펼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과거에 담마밀다가 계빈국을 떠날 때에 가비라(迦毘羅)의 신왕(神王)이 호위하여 전송하였다. 마침 구자국에 이르렀을 때, 도중에 돌아가려 하여 이에 신왕은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담마밀다에게 작별인사를 하였다.

“그대의 신이한 힘은 변통 자재하여 여러 곳들을 돌아다닐 터이니, 앞으로 그대를 따라 남방으로 함께 가지 않겠나 싶소.”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그림자를 거두어 드러내지 않았다. 마침내 먼 곳으로부터 따라와 서울에 이르렀다. 곧 상사(上寺)에서 가비라 신왕의 초상화를 벽에 그렸다. 지금까지도 소리하는 그림자의 효험[聲影之驗]이 있다. 몸을 깨끗이 하고 정성들여 복을 빌면, 소원을 이루지 않는 이가 없다.

원가 19년(442) 7월 6일 상사(上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때의 나이가 87세이다. 도인과 속인들의 사부 대중이 곡을 하면서 뒤를 따랐다. 이어서 종산(鐘山) 송희사(宋熙寺) 앞에 묻었다.

10) 석지맹(釋智猛)

석지맹은 옹주(雍州) 경조군(京兆郡) 신풍(新豊) 사람이다. 성품이 단정하고 분명하며, 행실을 닦기를 맑고 깨끗이 하였다. 어려서부터 법복(法服) 을 입고 학업을 닦는 데에 전념하여, 경을 암송하는 소리가 밤낮으로 이어졌다.

매양 외국 도인이 천축국 나라에 석가의 남긴 자취 및 대승 경전이 있다고 설하는 것을 들었다. 그럴 때마다 항상 탄식하여 느낌이 일어나, 마음을 멀리 밖으로 돌려서 생각하였다.

‘만 리도 지척이고 천 년의 세월도 따라잡을 수 있다.’

드디어 위진(僞秦) 홍시(弘始) 6년(404) 갑진년에 같은 뜻을 품은 사문 15명을 불러, 결의하고 장안(長安)을 떠났다. 강을 건너고 골짜기 넘기를 서른여섯 번을 하고, 마침내 양주성(凉州城)에 이르렀다. 양관(陽關)을 떠나 서쪽 고비사막으로 들어가서, 위험을 무릅쓰고 험난한 곳을 넘어갔다. 이전에 전해 들었던 것보다 그 어려움이 배나 지나쳤다.

마침내 선선국(??國)·구자국(龜慈國)·우전국(于?國) 등 여러 나라를 거치면서, 풍속을 두루 보았다. 우전국으로부터 서남으로 2천 리를 가서 비로소 파미르 고원에 올랐다. 그러나 아홉 명은 중도에 그만두고 돌아갔다.

석지맹은 남은 도반과 함께 천 7백 리를 나아가서 파륜국(波倫國)에 이르렀다. 같이 가던 축도숭(竺道嵩)이 목숨을 잃어 화장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갑자기 시신이 있는 곳을 찾지 못했다. 석지맹은 비탄에 젖어 놀라고 이상하게 여겼다. 이에 스스로 힘써 나아가, 남은 네 명과 함께, 설산(雪山)을 넘어 신두하(辛頭河)를 건너 계빈국에 이르렀다.

이 나라에는 오백 나한이 항상 아뇩달지(阿?達池)를 왕래하였다. 큰 덕을 갖춘 나한이 있었다. 석지맹이 온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석지맹이 도인들에 대해서 물었다. 그를 위하여 사천자(四天子)의 일을 말해 주었다. 이것이 자세하게 ?석지맹전(釋智猛傳)?에 나와 있다.

석지맹은 기사국(奇沙國)에서 부처님의 글이 새겨진 석타호(石唾壺)22)를 보았다. 또한 이 나라에서 부처님의 발우를 보았다. 광채 나는 빛깔이 자줏빛을 띈 검푸른 색이었다. 네 곳 가장자리가 모두 그러했다. 석지맹은 향과 꽃을 공양하고, 발우를 이마로 모시며 발원하였다.

“발우가 만약 감응한다면 가벼워질 수도 있고 무거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윽고 점점 발우가 무거워져서 끝내는 힘으로 견딜 수 없었다. 상[案]에 내려놓았을 때, 다시 그 무게를 느낄 수 없었다. 그의 도심(道心)이 감응한 바가 이와 같았다.

다시 서남쪽으로 1천 3백 리를 가서 가유라위국(迦有羅衛國)에 이르렀다. 부처님의 머리카락과 치아 및 육계골(肉?骨)을 친견하였다. 부처님의 그림자 자취[影迹]가 찬란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또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빽빽한 숲과 마구니를 항복시킨 보리수를 보았다. 석지맹은 기쁨이 마음속에 가득 차서 하루 동안 공양하였다. 아울러 보배 일산[寶蓋]과 대의(大衣)23)로, 부처님께서 악마를 항복시킨 상(像)을 덮었다. 그는 두루 돌아다니면서 신령스러운 변이(變異)를 샅샅이 살폈다. 하늘 사다리[天梯]나 용의 못[龍池]을 본 일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

후에 화씨국(華氏國) 아육왕(阿育王)의 옛 도읍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큰 지혜가 있는 바라문(婆羅門)이 있었다. 나열가(羅閱家)라고 불렸다. 그는 모든 족속에게 법을 전파하였다. 왕에게 흠모와 존경을 받아, 순은으로 만든 3장(丈) 높이의 탑을 세웠다. 그는 석지맹이 그곳에 이른 것을 보고 물었다.

“중국에는 대승(大乘)의 학문이 있는가, 없는가?”

석지맹이 대답하였다.

“모든 것이 대승의 학문입니다.”

나열(羅閱)이 놀라 찬탄하였다.

“드문 일이로다. 드문 일이로다[希有]. 아마 보살께서 나타나신 것이 아닐런지?”

석지맹은 그에게서 범본(梵本) 『대니원(大泥洹)』 1부를 얻었다. 또 『승기율(僧祇律)』 1부, 여러 경의 범본을 얻었다. 유통시킬 것을 서원하고, 이에 되돌아왔다.

갑자년에 천축국을 출발하여 동행한 세 명의 도반은 길에서 죽었다. 석지맹과 담찬(曇纂)만이 함께 돌아왔다. 양주에서 니원본(泥洹本)을 펴내어 20권을 얻었다.

원가(元嘉) 14년(437) 촉(蜀) 땅에 들어갔다. 16년(439) 7월에는 전기를 지어 돌아다닌 곳을 기록했다. 원가(元嘉, 424~452) 말년에 사천성 성도(成都)에서 세상을 떠났다.

내가 여러 곳을 돌아다녔던 사문에 대하여 두루 찾아보았다. 행로를 기록하여 열거한 것이 때로는 간혹 서로 같지 않다. 부처님의 발우와 정골(頂骨)이 있는 장소도 어긋난다. 아마도 천축국으로 가는 길이 단지 한 길만이 아니며, 정골과 발우가 신령스럽게 옮겨 다녀 때로 다른 곳에 이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전기에 서술한 견문을 증거로 삼기에는 어렵다.

11) 강량야사(畺良耶舍)

강량야사는 중국말로 시칭(時稱)이라 하며 서역 사람이다. 성격이 강직하고 욕심이 거의 없었다. 아비담(阿毘曇)을 잘 외우고, 율장의 책[律部]을 두루 섭렵하였다. 그 밖의 여러 경전에 대해서도 대부분 해박하였다. 삼장에도 아울러 밝지만 선문(禪門)에 전력을 기울였다. 한 번 선정의 관문에 들 때마다, 간혹 7일 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항시 삼매정수(三昧正受)로써 교화를 여러 나라에 전하였다.

원가(元嘉, 424~452) 초기에 멀리 고비사막을 무릅쓰고 건너왔다. 서울에 다다르니 태조(太祖) 문황제(文皇帝)가 매우 특이하다고 더욱 찬탄하였다. 처음에 종산(鐘山) 도림정사(道林精舍)에 머물렀다.

사문인 보지(寶誌)가 그의 선법(禪法)을 숭배하였다. 사문 승함(僧含)의 청으로 『약왕약상관(藥王藥上觀)』과 『무량수관(無量壽觀)』을 번역하였다. 승함이 곧 붓을 들어 받아 적었다. 이 두 경전은 번뇌의 장애를 건너는 비밀한 술법[轉障之秘術]이자, 정토를 이루는 크나큰 바탕[淨土之洪因]이었다. 그러므로 조용히 읊조리고 음미되어 송나라에 널리 퍼졌다.

평창(平昌) 사람 맹의는 소문을 들었다. 삼가 공경해서 필요한 물자를 넉넉하고 후하게 제공하였다. 맹의가 회계(會稽)의 수령으로 나가면서, 그에게 떠나지 말 것을 진정으로 간청하였다. 후에 강릉(江陵)으로 옮겨가 쉬었다.

원가(元嘉) 19년(442년) 서쪽으로 민촉(岷蜀)을 유람하며 곳곳에서 도를 펴니, 선을 배우는 이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후에 돌아와 강릉에서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가 60세이다.

승가달다(僧伽達多)·승가라다(僧伽羅多)

이 때에 또 천축국의 사문 승가달다와 승가라다는 모두 선학(禪學)에 매우 밝았다. 송나라에 들어와서 머물렀다.

승가달다가 일찍이 산중에 있으며 좌선(坐禪)을 하였다. 해가 마침 저물어서 식사를 거르고자 하였다. 그런데 새가 무리를 지어 과일을 물고 날아가다가 내려 주었다. 승가달다가 생각하였다.

‘원숭이가 꿀을 바치자 부처님께서도 받아 잡수셨다. 지금 날아가는 새가 내려준 음식이라고 해서 어찌 안 되겠는가.’

그러고는 받아서 먹었다.

원가 18년(441년) 여름에 임천(臨川)의 강왕(康王)의 청을 받아들여, 광릉(廣陵)에서 집을 지어 거처하였다. 뒤에 건업에서 돌아가셨다.

승가라다는 중국말로 중제(衆濟)라 한다. 송나라 경평(景平, 423~424) 말에 송의 서울에 이르렀다.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구걸하며 나무 아래에서 좌선하였다. 본래의 그윽함과 한가함을 닦으며 세상에 나서지 않았다.

원가 10년(433)에 종부(鍾阜)의 양지쪽에 살 곳을 정하였다. 가시나무를 베어내고 정사를 건립하였다. 곧 송희사(宋熙寺)가 이것이다.

12)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구나발타라는 중국말로 공덕현(功德賢)이라 하며 중천축국(中天竺國) 사람이다. 대승(大乘)을 배웠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마하연(摩訶衍)이라 부른다. 본래는 바라문(婆羅門) 출신이다. 어려서 5명(明)의 여러 논을 익혔다. 천문(天文)·서산(書算)·의방(醫方)·주술(呪術)에도 해박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후에 우연히 『아비담잡심론(阿毘曇雜心論)』을 읽었다. 깜짝 놀라 깨달아 불법을 깊이 숭봉하였다. 그의 집안에서는 대대로 외도(外道)를 섬겨 사문(沙門)을 끊어 막았다. 이에 집을 버리고 잠적하여 멀리에서 스승과 벗을 구하였다.

곧바로 비녀를 뽑아버린 뒤 머리를 깎고, 정신을 전념하여 배움에 뜻을 두었다. 구족계(具足戒)를 받을 무렵에는 삼장(三藏)에 두루 뛰어났다. 사람됨이 자상하고 화순하며, 공경하고 삼가는 마음이 있었다. 스승을 섬김에는 예를 극진히 하였다.

얼마 뒤 소승(小乘)의 스승을 사양하고, 대승에 나아가 배웠다. 대승의 스승이 시험 삼아 경전이 담긴 상자를 찾아 선택하게 하자, 『대품(大品)』과 『화엄(華嚴)』을 얻었다. 스승이 기뻐하며 칭찬하였다.

“너는 대승과 소중한 인연이 있다.”

이윽고 독송과 강의에서 겨룰 자가 없었으니, 더 나아가 보살계법을 받았다. 이에 부모에게 편지를 띄워 불법에 귀의할 것을 권하였다.

“만약 오로지 외도(外道)만을 지키신다면, 비록 제가 돌아간다 하더라도 무슨 이익 됨이 있겠습니까? 만약에 삼보를 믿어 귀의하신다면, 길이 서로 뵙겠지요.”

그의 부모는 그의 편지가 온 것에 감격하여, 드디어 외도를 버리고 불법을 따랐다.

구나발타라가 이전에 사자국(師子國)의 여러 나라에 이르니, 모두들 필요한 물건을 전해 보내왔다. 일찍이 동방에 인연이 있음으로 해서, 이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중도에 바람이 그치고 마실 물마저 떨어졌다. 배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구나발타라가 말하였다.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해 시방불(十方佛)을 염송하고 관세음을 칭한다면, 어디를 가든 감응하지 않겠는가?”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주경(呪經)을 외우고, 간절하게 예참하였다. 조금 있다가 신풍(信風)24)이 갑자기 이르렀다. 짙은 검은 색의 구름이 끼어 비를 내려, 온 배 안의 사람이 구제되었다. 그의 정성스런 감응이 이와 같았다.

원가(元嘉) 12년(435) 광주(廣州)에 이르렀다. 자사(刺史)인 차랑(車郞)이 표문을 올려 보고하였다. 송나라 태조는 사신을 보내 영접하였다. 이윽고 서울에 이르자, 명승(名僧) 혜엄(慧嚴)과 혜관(慧觀)에게 칙령을 내려 신정(新亭)의 교외에서 위로하였다. 그의 정신과 마음이 맑고 투철한 것을 보고는, 경건하게 우러르지 않음이 없었다.

비록 통역을 하여 서로 말을 나누었으나, 길거리에서 반갑게 만나 일산을 기울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傾蓋如故]25)같이 기뻐하였다. 처음에는 기원사(祇洹寺)에 머물렀다. 얼마 있다가 태조가 청하여 맞이하고, 더욱 깊이 숭배하여 존경하였다. 낭야(瑯?) 안연지(顔延之)는 뛰어난 재주와 큰 학식을 지닌 석학인데도, 의관을 갖추고 문하에 들어갔다.

이에 이르러 서울과 원근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갓과 일산들이 서로 줄을 이었다. 대장군인 팽성왕(彭城王) 의강(義康)과 승상인 남초왕(南?王) 의선(義宣)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얼마 뒤에 뭇 승려들이 모두 경전을 번역할 것을 요청하였다. 기원사에서 불교 교리[義學]에 밝은 여러 승려들을 모아 『잡아함경(雜阿含經)』을 번역하여 냈다. 동안사(東安寺)에서는 『법고경(法鼓經)』을 번역하였다.

후에 단양군(丹陽郡)에서 『승만경(勝?經)』과 『능가경(楞伽經)』을 번역하였다. 이 때에는 참여한 무리가 7백여 명이었다. 보운(寶雲)이 전역(傳譯)을 하고, 혜관(慧觀)이 붓을 잡았다. 말이 오가며 자문하고 분석하여 오묘한 본지를 터득했다.

후에 초왕이 형주(荊州)를 평정하였다. 함께 신사(辛寺)로 가서 머물 것을 청하므로 방과 전각을 다시 세웠다. 곧 신사에서 『무우왕경(無憂王經)』·『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무량수경(無量壽經)』 1권·『니원경(泥洹經)』·『앙굴마라경(央掘魔羅經)』·『상속해탈바라밀요의경(相續解脫波羅蜜了義經)』·『현재불명경(現在佛名經)』 3권·『제일의오상략경(第一義五相略經)』·『팔길상경(八吉詳經)』 등의 여러 경전을 내었다. 이전에 펴낸 것과 아울러 백여 권에 이르렀다. 항시 제자 법용(法勇)으로 하여금 번역을 옮겨 말을 헤아리도록 하였다.

초왕(?王)이 청하여 『화엄(華嚴)』 등의 경전을 강의하게 하였다. 구나발타라가 스스로 아직 송나라 언어에 익숙하지 못하다고 여기고서, 부끄럽고 안타까운 생각을 품었다. 곧바로 아침저녁으로 예배하고 참회하며 관세음에게 청하여, 신명이 응해 주기를 빌었다.

드디어 꿈속에 흰 옷을 입고 손에 칼을 든 사람이 나타났다. 한 사람의 머리를 받쳐들고, 그의 앞에 이르러 물었다.

“무엇 때문에 걱정을 하는가?”

구나발타라가 갖추어 사실대로 아뢰었다.

그가 대답하였다.

“크게 걱정할 것 없다.”

곧바로 칼을 가지고 머리를 바꾸어 새 머리로 얹히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돌려보라고 하였다.

“아프지 않은가?”

구나발타라가 대답하였다.

“아프지 않습니다.”

갑자기 환히 트이면서 깨달아, 마음과 정신이 희열에 젖었다. 새벽에 일어나니, 도의 의미를 송나라의 말로 갖추어 이해할 수 있으므로, 그제야 강의를 하였다.

원가(元嘉, 424~452) 말기에 이르러 초왕이 자주 괴이한 꿈을 꾸었다. 구나발타라가 말하였다.

“서울에 장차 화란이 있을 것입니다.”

1년이 되지 않아서 원흉(元凶)이 역모를 꾸몄다.

효건(孝建, 454~456) 초기에 이르러 초왕이 몰래 역적질을 도모하였다. 구나발타라가 얼굴에 근심을 띠고 말을 하지 않았다. 초왕이 그 까닭을 물으니, 구나발타라가 간절하게 간언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반드시 바라는 바는 아니지만, 저는 호종하고 싶지 않습니다.”

초왕은 세상 물정과 소신 때문에 그를 핍박하여 함께 내려갔다.

양산(梁山)에서의 패배로 큰 배가 뒤집혀 상황이 급박하였다. 강기슭까지 너무 멀어서 온전히 구제될 방법이 전혀 없었다. 오직 일심으로 관세음을 부르며, 손에는 대나무 지팡이를 잡고 강물로 뛰어들었다. 물이 겨우 무릎에 찼다. 지팡이를 가지고 물을 짚어 보니, 물의 흐름이 매우 깊고 빨랐다.

한 어린아이가 뒤쪽에서 따라와 손을 내밀었다. 돌아보며 어린아이에게 말하였다.

“너는 어린 아이인데, 어찌 나를 건너게 할 수 있겠는가?”

이렇듯 어지러워하는 사이에 10여 보나 나갔음을 느꼈다. 이렇게 해서 강기슭으로 올라왔다. 곧바로 납의(納衣)를 벗었다. 어린아이에게 보상코자 둘러보며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면서, 바야흐로 신령의 힘이었음을 알았다.

당시에 왕현모(王玄謨)가 양산의 군사를 지휘하였다. 세조가 군중에 칙명을 내렸다. 구나발타라를 찾으면 좋은 음식으로 대접하고, 역의 사자 편에 부쳐 궁궐로 보내도록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찾아내어, 배를 태워 서울로 보냈다.

세조가 곧바로 접견하여 곡진하게 돌아보며 여쭈었다.

“만나기를 고대한 날이 오래 되었지만, 이제야 비로소 서로 만났다.”

구나발타라가 말하였다.

“이미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분수로 헤아려 보면, 죽어 잿가루로 날려야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지금 접견을 하시니, 거듭 살아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칙명으로 물었다.

“누구누구와 더불어 역모를 하였는가?”

대답하였다.

“출가한 사람은 군사(軍事)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창(張暢)과 송영수(宋靈秀) 등이 모두 빈도에게 핍박하여 몰아댔습니다. 확실한 것은 단지 제가 예기치 못한 전생의 인연으로 인해, 이 일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세조가 말하였다.

“두려워 할 것 없다.”

이 날 칙명으로 후당(後堂)에 거주하였다. 옷과 물건을 제공하여 베풀고, 하인과 수레를 지급하였다.

이에 앞서 구나발타라가 형주(荊州)에 있은 지가 10년이 되었다. 매번 초왕(?王)에게 보낸 편지와 상소를 기록해 두지 않은 것이 없었다. 군대가 패하기에 이르러서 서찰을 검사해 보니, 군사(軍事)에 관해서는 한 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세조(世祖)가 그의 순수하고 근실함을 알고는 더욱더 예로써 대우하였다.

후에 한가하게 말을 나누다가 희롱 삼아 물었다.

“승상(丞相)을 생각하지 않는가?”

대답하였다.

“공양을 받은 것이 10년입니다. 어찌 덕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는 폐하를 좇아 간절히 비나이다. 바라건대 승상을 위하여 3년간 향을 사르고자 합니다.”

세조가 섭섭한 마음이 들어 안색을 찌푸렸으나, 의롭다고 여겨 허락하였다.

중흥사(中興寺)가 완성됨에 이르러 칙령으로 옮겨서 거주하게 하고, 그를 위하여 세 칸의 방을 마련해 주었다.

후에 동부(東府)에서 연회(?會)를 열어, 왕공(王公)들이 모두 모였다. 칙명으로 구나발타라를 불러서 만나 보았다. 이 때 미쳐 머리를 말끔하게 깎지 못한 터라서 흰머리가 희끗하였다. 세조가 멀리서 바라보고는 상서(尙書) 사장(謝莊)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마하연(摩訶衍)은 총명하고 기미를 아는 자인데, 단지 늙음이 이미 이르렀군. 짐이 시험 삼아 늙음에 대해 물어본다면, 그는 반드시 우리들의 의도를 꿰뚫어 볼 것이오.”

그리하여 구나발타라가 계단을 올라오자, 그를 맞이하면서 말하였다.

“마하연은 멀리서 온 뜻을 저버리지 않았소. 그러나 다만 오직 한 가지 남아있는 일이 있다오.”

곧바로 소리에 응하여 답하였다.

“제가 멀리 황제의 서울에 와서 30년이 되었습니다. 천자의 은혜로운 대우에 부끄러움을 머금기가 끝이 없습니다. 다만 70살이 되어 늙고 병들어서, 오직 죽음 한 가지가 남아 있습니다.”

세조가 그의 임기응변을 가상하게 여겼다. 칙명으로 자신의 자리 가까이에 앉도록 하여 온 조정의 눈길이 쏠렸다.

후에 말릉(?陵) 경계에 있는 봉황루(鳳皇樓) 서쪽에 절을 세웠다. 매일 한밤중이 되면 문득 문을 두드리며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살펴보면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이 번번이 악몽을 꾸며 시달리곤 하였다.

구나발타라가 향을 살라 주문을 외우며 기원하였다.

“너희들은 묵은 인연으로 이곳에 머물러 있다. 내가 지금 절을 세웠으니, 항시 너희들을 위하여 도를 행하고 예참을 하겠다. 만약 머물고자 한다면 절을 호위하는 선한 귀신이 되어라. 만약 머물 수 없다면, 각기 편안한 바를 따르도록 하라.”

이윽고 도인과 속인 10여 명이 같은 날 저녁에 꿈을 꾸었다. 천여 명의 귀신이 모두 짐을 꾸려 옮겨가는 것을 보았다. 절 안의 대중이 드디어 편안해졌다. 현재 도후저(陶後渚)에 있는 백탑사(白塔寺)가 바로 그 곳이다.

대명(大明) 6년(462) 천하에 지독한 가뭄이 들어 산천에 기도를 올렸다. 여러 달이 지나도록 효험이 없었다. 세조(世祖)가 청하여 비를 빌도록 하였다.

“반드시 감응이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만일 감응을 얻지 못한다면,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할 것이다.”

구나발타라가 말하였다.

“우러러 삼보와 폐하의 하늘같은 위엄에 의지한다면, 반드시 은택이 내릴 것입니다. 만약 감응을 얻지 못한다면, 다시는 뵙지 않겠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북호(北湖)의 조대(釣臺)로 가서 향을 사르고 빌었다. 다시 먹거나 마시지도 않았다. 조용히 경을 외우며, 마음속으로 비밀스런 주술을 더 하였다.

다음 날 저녁이 되자, 서북쪽에서 마치 일산과 같은 구름이 일어났다. 해가 서쪽에 떠 있었다. 바람과 우레가 일고 구름이 합쳐지더니, 비가 연이어 내렸다. 다음 날 새벽에 공경(公卿)들이 들어와 축하를 하였다. 칙명을 내려 노고를 위로하고, 하사품을 뒤이어 내려 주었다.

구나발타라는 어려서부터 종신토록 거친 음식만을 먹었다. 항상 향로를 잡고는 손에서 놓지 않았다. 매번 식사를 끝내고 나면 번번이 날아다니는 새들 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새들이 모여들어 그의 손바닥에서 먹을 것을 취하였다.

태종(太宗) 대에 이르러 예로써 공양함이 더욱 융숭하였다.

태시(泰始) 4년(468) 정월에 이르러 몸이 편안하지 못함을 느끼고는, 문득 태종과 공경들에게 작별을 고하였다.

임종하던 날 오래도록 우두커니 서서 무엇인가를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성스런 모습이 나타났다. 우중(?中: 오전 10시경)에 드디어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는 75세이다. 태종은 헤어지는 아픔이 몹시 더하여 부조를 매우 융성하게 하였다. 공경(公卿)들도 모두 장례에 모여들어, 영예로움과 애도함을 함께 갖추었다.

아나마저(阿那摩低: 寶意)

당시에 또 사문 보의(寶意)라는 자가 있었다. 범어(梵語)로는 아나마저라고 한다. 본래의 성은 강(康)씨로 강거(康居) 사람이다. 대대로 천축국에서 살았다. 송(宋)나라 효건(孝建) 연중(454~456)에 서울에 와서 와관선방(瓦官禪房)에 머물렀다.

항시 절 안에 있는 나무 아래에서 좌선을 하였다. 또한 불경과 율장에 밝아 당시 사람들이 삼장(三藏)이라고 불렀다. 평소 수백 개의 조개껍데기의 방향을 이리저리 바꾸어 보아, 곧바로 길흉(吉凶)을 알았다. 신령스런 주술을 잘하였다. 손바닥에 향을 칠하여 사람의 지나간 과거의 일도 알아보았다.

송나라 세조가 높이 두 자쯤 되는 동으로 만든 타호(唾壺) 하나를 내려주었다. 항상 탁상 앞에 놓아두었다. 홀연 어떤 사람이 이것을 도둑질하였다. 보의가 돗자리 하나를 속이 빈 채로 둘둘 말고는, 위를 향해 여러 차례 주문을 외웠다. 3일 저녁이 지나자 타호가 돗자리 안에 되돌아와 놓여 있었다. 그 까닭은 알 수 없었다. 이에 사방 원근의 도인과 속인들이 모두 공경하며 기이하게 여겼다.

제나라의 문혜왕(文惠王)·문선왕(文宣王)과 양나라 태조(太祖)가 모두 그를 스승의 예로써 공경하였다. 영명(永明) 연간(483~493) 말년에 머무른 곳에서 돌아가셨다.

13) 구나비지(求那毘地)

구나비지는 중국말로 안진(安進)이라 하며, 본래 중천축국(中天竺國)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도를 좇아 천축국의 대승법사(大乘法師)인 승가사(僧伽斯)를 스승으로 섬겼다.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기억력이 뛰어났다. 부지런히 경을 암송하고 대소승(大小乘)을 연구하여, 꿰뚫은 것이 거의 20만 글자나 되었다. 외전(外典)을 겸하여 공부하여 음양(陰陽)을 자세히 터득하였다. 시간을 점치고 일을 시험하여, 조짐을 증명한 것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제(齊)나라 건원(建元, 479~482) 초에 서울에 와서 비야리사(毘耶離寺)에 머물렀다. 지팡이를 짚고 따르는 무리들의 위엄서린 자태가 엄숙하고 단정하여, 왕공(王公)과 귀족들이 번갈아가며 서로 공양을 청하였다.

과거 승가사는 천축국에서 수다라장(修多羅藏) 가운데 긴요하고 절실한 비유들을 뽑아 한 부(部)로 편찬하였다. 무릇 온갖 일의 배움에서 새롭게 가르쳤다. 구나비지는 그것들에 모두 뛰어난데다, 겸하여 뜻과 취지에도 밝았다.

영명(永明) 10년(492) 가을에 이것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모두 10권이다. 『백유경(百喩經)』이라고 이른다. 뒤에 다시 『십이인연경(十二因緣經)』과 『수달장자경(須達長者經)』 각 1권을 내었다. 대명(大明) 연간(457~464) 이후부터 경전을 번역하는 일이 거의 끊어졌다. 이것이 세상에 유통되자, 세상에서 모두들 훌륭하다고 칭찬하였다.

구나비지는 사람됨이 매우 도량이 넓고 도타웠기 때문에, 만 리나 되는 먼 곳에서 모여들었다. 남해(南海)의 상인들은 모두 그를 종사로써 섬겼다. 바치는 물건은 모두 받아들여 불법을 영위하는 데 사용하였다. 건업(建業)의 회수(淮水) 옆에 정관사(正觀寺)를 지어 이곳에 거주하였다. 2층 누각과 층문(層門)으로 전당(殿堂)을 정돈하여 꾸몄다.

중흥(中興) 2년(502) 겨울, 머무르는 곳에서 돌아가셨다.

승가바라(僧伽婆羅)

양(梁)나라 초기에 승가바라라는 자가 있었다. 역시 외국에서 온 불학을 공부한 승려[學僧]이다. 거동과 모양이 신중하고 깨끗하며, 상대하여 담론을 잘 하였다. 서울에 이르러 역시 정관사(正觀寺)에 머물렀다. 지금의 왕이 매우 예를 갖추어 대우하였다.

정관사와 수광전(壽光殿)·점운관(占雲館)에 칙명을 내려, 『대육왕경(大育王經)』·『해탈도론(解脫道論)』 등을 번역하였다. 석보창(釋寶唱)과 원담윤(袁曇允) 등이 붓을 들고 받아 적었다.

【論】불경을 번역한 공이 드높아서 참으로 무어라 찬양할 말이 없다. 옛날에 여래께서 돌아가신 후, 장로인 가섭(迦葉)과 아난(阿難)과 말전지(末田地) 등이 팔만 법장(八萬法藏)26)을 함께 갖추어 가지고 주지[具足住持]하셨다. 도를 넓혀 사람을 구제하여 그 일과 쓰임[功用]이 더욱더 넓었다. 그러니 성스러운 지혜가 해처럼 빛나서, 남은 빛이 아직도 숨겨지지 않는다.

이후로 가전연자(迦?延子)와 달마다라(達磨多羅)와 달마시리제(達磨尸利帝) 등이 함께 이론(異論)을 널리 찾아서 각각 그 언설(言說)을 지었다. 모두 4아함[含]27)을 근본으로 이어받고, 삼장(三藏)을 종주(宗主)로 삼은 것이다.

용수(龍樹)와 마명(馬鳴)과 바수반두(婆藪盤豆) 같은 사람들에 이르러서는, 대승 경전을 법칙 삼아 그 핵심이 되는 요점을 잘 추슬렀다. 그 근원은 반야(般若)28)에서 나오고, 흐름은 쌍림(雙林)29)을 꿰뚫는다. 비록 낮은 곳이나 높은 곳이나 두루 화합하여 적셨다고 하지만, 또한 그 본성까지 함께 터득했다. 그래서 삼보로 하여금 책에 실려 전하게 하고, 법륜(法輪)으로 하여금 끊어지지 않게 한다. 이 때문에 5백 년 동안에 오히려 정법(正法)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일컫는다.

무릇 신성한 교화가 접하는 곳마다, 먼 곳이건 가까운 곳이건 여기로 모여든다. 한결같은 소리와 한결같은 빛으로 문득 다른 나라를 진동시키고, 한결같은 대(臺)와 한결같은 일산으로 인도를 뒤덮은 것이다.

중국과 가유(迦維)30)는 왕래하는 길이 파미르고원과 강으로 끊어져서 수만 리를 넘어야 한다. 하지만 만약 성인(聖人)의 신비한 힘을 이용한다면, 반걸음이나 한 걸음의 사이와 같을 뿐이다. 그런데도 보고 듣는 것이 제한되고 막혀 있음은 어찌 시절의 운수[時運]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 인연과 운수가 장차 감응하여 불교의 가르침에 잠기어 젖어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부도(浮圖)31)의 왕이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들은 서역(西域)의 큰 신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한(漢)나라 명제(明帝)는 조서를 내려 초왕(楚王) 영(英)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미묘한 말을 외우고, 부도(浮圖)의 인자한 제사를 숭상한다.”

꿈에 금인(金人)이 나타난 것을 해몽하기에 이르러서는, 사신을 서역에 보냈다. 그리하여 섭마등(攝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 도를 품고 와서 교화를 하였다.

그들은 책을 옆에 끼고 외로이 길을 떠났다. 어렵고 괴로운 중에도 반드시 도달할 것을 기약하였다. 까마득히 높은 절벽을 기어올라서는 깊은 연못에 다다랐다. 나르는 듯한 동아줄을 잡고서는 험한 나루를 건넜다. 자신의 몸을 헌신짝처럼 여겨 돌보지 않았으므로, 어려움을 만나서도 태연할 수 있었다. 불법을 전하고 불경을 펼쳐, 처음으로 동쪽 나라 중국을 교화하여 후학들이 배우게 된 것은, 모두 그들의 힘 덕분이다.

안청(安淸)과 지참(支讖)과 강승회(康僧會)와 축법호(竺法護) 등에 이르 러서는, 모두 다른 왕조에 한 시기씩, 앞사람의 발꿈치를 뒤이어서 크게 도왔다. 그러나 인도와 중국은 말이 매우 다르다. 스스로 훈고에 정밀하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뒤이은 지겸(支謙)과 섭승원(?承遠)과 축불념(竺佛念)과 석보운(釋寶雲)과 축숙란(竺叔蘭)과 무라차(無羅叉) 등도, 모두 범어(梵語)와 중국말을 매우 잘해서 번역의 일을 다 할 수 있었다. 한 마디 말도 세 번씩 반복하여 말의 뜻을 분명히 하였다. 그런 다음에야 다시 우리 중국의 음률을 사용하고 윤색하여 완성하였다.

논(論)에서 일컫는다.

“외국의 세속 말을 따라서 바른 뜻을 보이려 했고, 바른 뜻 속에서도 더욱 뜻이 바른 말을 썼다.”

논의 일컬음은 대개 이런 상황을 언급한 것이다.

그 후에 구마라집이 석학(碩學)으로서 깊은 의미를 찾아내고, 신묘한 식견으로서 그윽하고 심원한 이치를 알았다. 그리하여 중국을 두루 돌아다니고 외국 여러 나라의 말을 모두 잘 알았다. 다시금 지겸과 축불념 또는 축숙란 등이 번역한 문장이 예스럽고 투박하며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다시 거듭 범본(梵本)을 대조하여 번역하였다. 그래서 금본(今本)과 고본(古本)의 두 경전이 말은 다르나 뜻에서는 같다.

이 때에 도생(道生)과 도융(道融)과 도영(道影)과 승예(僧叡)와 혜엄(慧嚴)과 혜관(慧觀)과 도항(道恒)과 승조(僧肇) 등이 있었다. 모두 말하기 전에 뜻을 깨닫고 글이 구슬처럼 매끄러웠다. 붓을 잡아 뜻을 이어 글을 다듬는 임무는 바로 이 사람들이 맡았다. 그래서 장안(長安)의 번역이 왕성하여 으뜸이 된다고 일컫는 것이다.

이 때 요흥(姚興)32)이 천자의 칭호를 쓰면서 서울을 차지하였다. 삼보를 사랑하고 숭상하여 불법을 성곽과 참호로 둘러치듯 보호하였다. 그래서 도를 사모하여 찾아와 위의를 갖춘 이들이 멀고 가까움 없이 연기가 끼듯 모여들었다. 삼장(三藏) 법문과 인연이 있는 것은 반드시 보았다. 그러므로 불교의 기운이 동쪽 중국으로 옮겨온 이래 여기에서 가장 융성하였다.

불현(佛賢) 비구가 강남에서 번역한 『화엄경(華嚴經)』의 큰 책과 담무참(曇無讖)이 하서(河西)에서 번역한 『열반경』의 오묘한 가르침과 여러 승려들이 번역한 4아함경(阿含經)·5부(部)33)·건도(?度)34)·『바사(婆沙)』35) 등은 모두 내용이 법의 근본에 부합되고 이치가 3인(印)36)에 맞는다.

그러나 동수(童壽: 구마라집)는 첩을 둔 허물이 있고, 불현(佛賢: 불타발타라)은 물리쳐 내쫓긴 자취가 남아 있다. 실록을 고찰해 보아도 상세히 구명하기가 쉽지 않다. 혹시 시절의 운수[時運]가 경박하여 도를 잃고 사람들은 흩어졌기 때문에, 보고 느끼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른다. 만약 본래의 자취에 가깝게 더듬는다면, 아마도 또한 구슬에 생긴 하나의 흠집 정도일 것이다.

또 안세고(安世高)·담무참(曇無讖)·법조(法朝)37)·법조(法祚)38) 등은 생각이 조리에 맞고 박학하여 어진 은택을 안개처럼 이루었다. 그러나 모두 편안한 죽음을 맞지 못하니, 갚아야 할 전생의 업보나 피할 수 없는 의로움으로 말미암아서이다. 그러므로 나한(羅漢)은 비록 모든 번뇌가 다하였는데도 오히려 골이 터지는 액운을 만났다. 비간(比干)39)은 충간(忠諫)하면서 정성 을 다했으나 오히려 칼을 받는 화를 당하였다. 그렇지 않은가.

도중에 축법도(竺法度)라는 사람이 있었다. 스스로 오직 소승(小乘)을 고집한다고 말하여 삼장과는 어그러졌다. 밥을 먹을 때도 구리로 된 발우를 사용하니 본래 계율이 허락한 바가 아니다. 땅에 엎드려 서로 향해서 절하니, 이 또한 참법(懺法)40)에 없는 것이다.

또 축법도가 태어난 곳은 남강(南康)41)이어서 천축국에 노닌 것은 아니다. 만년에 담마야사(曇摩耶舍)를 만났으나, 그 또한 소승(小乘)을 전공한 스승은 아니다. 다만 자신의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을 채우려고 한 것이기 때문에 일부러 대중(大衆)들과 다른 행동을 하였다. 그러나 도량이 통달한 군자들은 일찍이 돌아서서 가버리지 않았다. 다만 여승의 무리들만 쉽게 따라서 비로소 그 교화를 받았다.

무릇 여인들에 대한 이치의 가르침은 흡족 시키기가 어려워서 일의 자취가 쉽게 뒤집어진다. 인과(因果)를 들으면 소홀히 금방 등져 버리고, 변화하는 술수[變術]를 보면 앞을 다투어 따라간다. ‘따라서 타락한다’는 뜻이 바로 이것을 일컫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니, 불법의 연못은 넓어서 숫자가 8억(億)에 이르지만, 번역하여 얻은 것은 천여 권에 그친다. 모두들 가로막는 사막을 넘어서고, 절벽의 끊긴 길을 넘어 왔다. 혹은 안개를 바라보며 험난한 곳을 건너고, 혹은 말뚝을 붙잡고 몸을 밀어 나오는 고생들을 겪었다.

그러고 나서 서로 모여 헤아려 찾아보니, 모두 열 중에 여덟 내지 아홉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 때문에 법현(法賢)·지맹(智猛)·지엄(智嚴)·법용(法勇) 등이 출발할 때는 많은 사람을 모아 무리를 이루었다. 그러나 돌아올 때는 다만 오직 돌아보는 자신의 그림자만 유일하였다. 그러니 참으로 마음 아픈 일이라 하겠다.

하나의 경전이 이곳에 이르게 된 것은, 경전에 다시 수명을 부여한 것이 어찌 아니겠는가. 그런 점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지금 세상의 배우는 무리[學徒]들은 오직 한 가지 경전만을 연구하여 익히기를 좋아한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넓게 읽으면 많이 미혹된다’고 한다. 이것은 대개 배움을 타락시키는 말이다. 옳은 방법을 총괄한 가르침은 아니다. 어째서인가?
무릇 이치의 참맛을 찾고 법문(法門)을 바르게 판단하고자 한다면, 어찌 억측으로 판단하여 여러 경전을 널리 찾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그리하여 마침내 옮겨 베낀 수고로움이 수포로 돌아가고, 경전이 영원히 상자 속에 감추어진다. 단 이슬과 같은 바른 설법을 끝내 펼쳐서 찾아보지 않아, 더할 나위 없는 보배 구슬을 숨겨두고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어찌 안타깝지 않으리오.

만약 선정(禪定)과 계율을 통괄하여 캐내고, 경장(經藏)과 논장(論藏)을 융합하여 배울 수 있다면, 비록 다시 기수(祇樹)의 그늘이 없어지더라도 그윽하고 미묘한[玄妙] 바람은 오히려 불 것이다. 그리고 사라수(娑羅樹)의 잎이 변하더라도 불성(佛性)은 오히려 빛날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멀리는 석가의 은혜에 보답하고, 가까이는 불경을 번역한 이들의 은덕을 칭송하는 것이 되리라. 아마도 하늘이 자신에게 부여한 천명[身命]을 얻을 것이니, 어찌 힘쓰지 않을손가?
찬(贊)하노라.

빈바(頻婆)42)가 노래를 멈추나
거듭된 가르침이 베풀어지고
5승(乘)43)이 마침내 굴러서
팔만법문(八萬法門) 두루 가득 차네.



뭇 별들 북두성 둘러싼 고요한 밤
한(漢)나라 황제 꿈에 신령이 통하는구나.


섭마등·축법란·지참·구마라집이
도를 위해 목숨 바쳐 모여드네.



자애로운 구름이 그늘을 옮기고
지혜로운 물이 나루를 전하니
저 말세로 하여금
바야흐로 큰 인연을 심는도다.



頻婆?唱 疊敎攸陳
五乘竟轉 八萬彌綸
周星曜魄 漢夢通神
騰蘭讖什 殉道來臻
慈雲徙蔭 慧水傳津
?夫季末 方樹洪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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