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전 제04권
2. 의해(義解) ①
01) 주사행(朱士行)
주사행은 영천(穎川) 사람이다. 뜻과 행동이 바르고 곧아서 어떤 기쁨이나 어떤 막음으로도 그 지조를 꺾을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멀리까지 생각을 품고 깨달아, 티끌세상을 벗어나 출가한 후로는 오로지 경전의 연구에 힘썼다.
예전 한(漢)나라 영제(靈帝) 때에 축불삭(竺佛朔)이 『도행경(道行經)』을 번역했다. 이는 곧 소품(小品)의 옛 판본으로서 문구가 간략하여 내용의 뜻이 두루 미치지 못하였다. 사행은 일찍이 낙양에서 『도행경』을 강의하였다. 그러다가 문장의 뜻이 잘 드러나지 않고 투박하여, 대체로 미진함을 깨닫고는 매양 탄식하였다.
“이 경은 대승의 요체인데 번역의 이치를 다하지 못하였다. 맹세코 뜻을 세워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멀리 가서 대본(大本)을 구하여야 하겠다.”
마침내 위(魏)나라 감로(甘露) 5년(257)에 옹주(雍州)를 출발하였다. 서쪽 고비 사막을 지나 우전국(于?國)에 이르렀다. 과연 범서(梵書)로 된 정본(正本) 90장(章)을 얻었다. 제자인 불여단(不如檀)을 보내 [불여단은 중국어로 법요(法饒)라는 의미이다.] 범본의 불경과 함께 낙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제자가 아직 출발하지 않고 있을 즈음에, 우전국의 소승을 배우는 여러 무리들이 마침내 그곳 왕에게 아뢰었다.
“한나라 땅의 사문이 바라문의 책으로 불법을 미혹하여 어지럽힙니다. 왕은 이 땅의 주인이십니다. 만약 이것을 금지하지 않으면 장차 불법이 끊어져, 한나라는 귀머거리와 소경의 땅처럼 될 것입니다. 이럴 경우 임금님의 허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자 왕은 경전을 갖고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사행은 깊이 원통한 마음을 품었다. 마침내 경을 태우는 일로 증명해 보이고자 하였다. 왕이 곧 이를 허락하였다. 사행이 궁전 앞에 장작을 쌓아 불태우며, 불 곁에 나아가 서원하였다.
“만약 불법이 한나라 땅에 유통할 것이라면, 불경은 곧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 그와 같은 가호가 없다면, 이는 운명일 터이니 어찌 하겠는가?”
말을 마치고 경을 불 속에 집어던졌다. 불은 이내 꺼졌는데, 한 글자도 손상되지 않았다. 가죽을 덧댄 책표지[皮牒]도 본래 것과 같았다. 이에 대중들이 놀라고 감복하여 모두 그 신비한 감응을 칭송하였다. 마침내 경전을 진류(陳留) 창원(倉垣)의 수남사(水南寺)로 보낼 수 있었다.
축숙란(竺叔蘭)
이 때 하남 땅에 축숙란이란 거사가 있었다. 본래는 천축국 사람이다. 아버지 대에 피난을 와서 하남 땅에 거주하였다. 숙란은 어렸을 때 사냥을 좋아하였다. 훗날 잠시 죽었다가 깨어나는 일을 겪고 나서, 두루 업과 과보를 보았다. 이로 인해 생각을 바꾸어, 오로지 정성을 다해 힘써서 깊이 불법을 숭상하였다. 그는 여러 나라 언어를 널리 연구하여, 범어와 중국어에 빼어났다.
무라차(無羅叉)
또한 무라차란 승려가 있었다. 서역의 도사로서 옛 서적을 참구하고 배운 것이 많았다. 이들이 곧 손에 범본을 잡으면, 축숙란은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이를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이라 부른다. 가죽을 덧댄 책 표지[皮牒]로 된, 옛 원본은 지금 예장(豫章)에 남아 있다.
태안(太安) 2년(303)에 이르러 지효룡(支孝龍)이 축숙란을 찾아갔다. 한꺼번에 다섯 부를 베껴 쓰고 교정하여, 이를 정본으로 삼았다. 당시에는 아직 품목으로 정리되지 않았으므로, 열네 필의 비단에 쓰인 옛 원본은 오늘날의 필사권 20권 분량이다.
사행은 마침내 나이 80세에 우전국에서 세상을 마쳤다. 서방의 법에 의하여 그를 다비하였다. 땔감이 다 타서 불이 꺼졌지만 시신은 오히려 온전하였다. 대중들이 모두 놀라고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곧 주문을 외웠다.
“만약 진실로 득도하셨다면, 법으로 보아 마땅히 시신이 썩어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 소리에 응하여 시신이 부스러져 흩어졌다. 이에 뼈를 거두어 탑을 세웠다. 그 후 제자인 법익(法益)이 그 나라에서 돌아와 친히 이 일을 전하였다. 그런 까닭에 손작(孫綽)이 『정상론(正像論)』에서 “사행은 우전국에서 형체를 흩뿌렸다”고 이른 것은,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02) 지효룡(支孝龍)
지효룡은 회양(淮陽)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풍모 있는 자태가 있어 무겁게 여겨졌다. 이에 다시 더하여 고상한 풍채가 탁월하고, 높은 이론이 시대에 적합하였다. 항상 소품(小品)을 펴놓고 음미하면서, 이를 마음의 요체로 삼았다.
진류(陳留)의 완첨(阮瞻), 영천(穎川)의 유개(庾凱)와 나란히 지음(知音)1)의 교류를 맺었다. 세상 사람들이 이들을 8달(達)이라 불렀다. 당시에 혹자가 그를 조롱했다.
“우리 진나라에서 용 같은 천자가 일어나시어[龍興] 천하를 한 집안으로 만드셨네[天下爲家]. 가사와 오랑캐 옷을 벗어버려야 하거늘, 사문은 어찌하여 머리카락과 피부를 온전히 하여 비단을 걸치지 않는 것인가?”
효룡이 말하였다.
“하나(도)를 잡는 것으로써[抱一]2) 소요(逍遙)하고, 오직 적멸로써 정성을 이루고자 합니다. 머리카락을 잘라 모습을 허물고 옷을 바꾸어 형상이 변했다고 하여, 저들은 나를 욕되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저들의 영화를 버렸습니다. 그런 까닭에 고귀함에 무심(無心)하면 할수록 더욱더 귀하고, 풍족함에 무심하면 할수록 더욱더 풍족한 법입니다.”
그의 때맞춘 임기응변은 모두 이와 같았다.
당시 축숙란이 처음으로 『방광반야경』을 번역하였다. 효용은 이미 평소 무상(無相)을 즐기던 터였다. 이에 이를 얻자마자 곧 10여 일 동안 펴서 읽어보고는, 문득 나아가 강의를 열었다. 그 후 그가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 모른다.
손작(孫綽)이 찬(贊)하였다.
작고 모난 것은 견주어 보기 쉬우나
크나큰 그릇이란 상상하기조차 어려워라.
굳세고 굳센 님이여,
높고 넓은 곳으로 매진하기에
중생들이 다투어 삼가 귀의하고
사람들은 사모하여 본받아 우러르네.
찰랑이는 샘물 가득 구름을 담고
난초는 풍성한 향기를 바람에 싣는구나.
小方易擬 大器難像
桓桓孝龍 剋邁高廣
物競宗歸 人思效仰
雲泉彌漫 蘭風?嚮
03) 강승연(康僧淵)
강승연은 본래 서역 사람으로 장안에서 태어났다. 모습은 비록 인도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중국말을 하였다. 얼굴과 행동이 자상하고 바르며, 뜻과 행동이 넓고 깊었다. 『방광(放光)』·『도행(道行)』 등 두 반야경을 외웠다. 곧 대품과 소품의 두 경전이다.
강법창(康法暢)·지민도(支敏度)
진(晋)나라 성제(成帝) 때에 강법창·지민도 등과 더불어 양자강을 건넜다. 법창도 역시 재주와 생각이 넘쳐 나서 서로 자주 오고가고 하였다. 『인물론(人物論)』과 『시의론(始義論)』 등을 지었다. 법창은 늘 주미(?尾: 拂子, 털이개)를 손에 쥐고 걸어 다녔다. 이름난 손님을 만날 때마다 청담(淸談)으로 하루해를 다 보냈다. 이에 유원규(庾元規)가 법창에게 말하였다.
“이 털이개를 왜 항상 쥐고 다니는가?”
법창이 말하였다.
“(당신 같이) 청렴한 사람은 갖지 않고, (나 같이) 탐욕스런 사람은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항상 가지고 다니게 된다.”
지민도도 역시 총명하며 명석하다고 이름이 났었다. 『역경록(譯經錄)』을 지었는데, 지금도 세상에 유행한다.
승연은 비록 덕이 법창과 민도보다 더 높았지만 그들과 달리 청렴하고 검약하게 자처하여 항상 구걸로 생활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미처 그를 알지 못하였다.
그 후 어느 날 걸식(乞食)을 하다가 진군(陳郡)의 은호(殷浩)를 만났다. 은호가 처음으로 불경의 심원한 이치에 대해 물었다. 즉각 세속 책의 성정(性情) 같은 내용으로 답하면서, 낮부터 해가 질 때까지 계속하였다. 은호는 그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를 다시 보았다.
또 낭야(瑯?)의 왕무홍(王茂弘)이 코가 높고 눈이 깊다 하여 그를 희롱하였다. 승연은 말하였다.
“코가 얼굴의 산이라면, 눈은 얼굴의 못[淵]이랍니다. 산이 높지 않으면 신령스럽지 못하고, 못이 깊지 않으면 맑지가 않다.”
당시 사람들이 명답이라 여겼다.
그 후 예장산(豫章山)에 절을 세웠다. 읍과의 거리가 수십 리이다. 강물을 두르고 높은 재를 옆에 끼며, 대나무 숲이 울창하고 무성하였다. 이름난 승려와 뛰어난 달인들이 메아리가 답하듯 달려와 무리를 이루었다.
항상 『심범천경(心梵天經)』을 수지하여, 공의 논리에 그윽하고 원대하였다. 유달리 강설을 잘 하기에, 배움을 숭상하는 문도들이 오가며 가득 찼다. 그 후 그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04) 축법아(竺法雅)
법아는 하간(河間: 황하 부근) 사람이다. 올곧고 올바르며 법도와 기량이 있었다. 어려서는 외도의 학문을 좋아하였다. 장성해서는 불교의 논리에 통달하였다. 그러자 의관을 갖춘 선비들이 모두 의지하여 가르침을 받고 명을 받들었다.
당시 그에게 의지한 제자들 모두 세간의 학문을 공부했다. 그러나 불교의 논리는 잘 알지 못하였다. 이에 곧 강법랑(康法朗) 등과 더불어 경전 가운데 나오는 일을 헤아렸다. 이것을 외도의 서적과 짝 맞춰 비교함으로써 이해를 돕는 사례로 삼았다. 이것을 격의(格義)라고 말한다.
비부(毘浮)·담상(曇相)
아울러 비부·담상 등도 역시 격의를 말하여 문도들을 가르쳤다. 법아는 풍채가 깨끗하고 시원하였다. 요점의 해설[樞機]에 뛰어나, 외전과 불경을 번갈아가며 강설하였다. 도안(道安)·법태(法汰) 등과 더불어 늘 불경을 펼쳐 해석하되, 의문 나는 것을 모아서 함께 경의 요점을 연구하였다.
그 후 고읍(高邑)에 절을 세웠다. 대중 승려가 백여 명에 이르렀으나, 가르쳐 이끄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
담습(曇習)
법아의 제자 담습이 스승을 이어받아, 강론하는 말솜씨가 훌륭하였다. 위조(僞趙)의 태자 석선(石宣)의 존경을 받았다.
05) 강법랑(康法朗)
강법랑은 중산(中山) 사람이다. 어릴 때 출가하여 계율을 절도 있게 잘지 켰다. 한 번은 경을 읽다가 쌍수(雙樹)·녹원(鹿苑: 鹿野苑)의 부분을 보고는 울적하여 탄식했다.
“내가 과거의 성인이야 만나지 못한다 하지만, 어찌하여 성인께서 계셨던 곳을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맹세코 가이(迦夷: 카필라)로 가서 유적을 우러러보기로 하였다. 곧 같이 공부한 네 사람과 함께 장액(張掖)을 떠나, 서쪽으로 고비 사막을 지났다. 걸어서 사흘이 지나자, 길에는 사람의 자취가 끊어졌다.
홀연히 한 옛 절이 길가에 있는 것을 보았다. 초목이 사람을 덮어 가린, 다 쓰러져 가는 집에 두 칸의 방이 있었다. 방 가운데 각기 한 사람씩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경을 외우고, 한 사람은 이질(痢疾)을 앓았다. 두 사람의 방이 나란히 있으나 서로 돌보지 않았다. 사방에 똥오줌뿐이어서 온 방안이 냄새나고 더러웠다. 법랑이 그의 동료들에게 말하였다.
“출가한 사람은 가는 길이 같아서 불법으로써 친척이 됩니다. 보지 않았으면 모르되, 보고서야 어찌 버려두고 가겠습니까?”
법랑은 이에 6일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씻고 세탁하며 공양하였다. 7일째가 되자 이 방안 전체가 향화(香華)로 꾸며졌다. 이를 보고는 이윽고 그가 신인(神人)임을 깨달았다. 그가 법랑에게 말하였다.
“방은 우리 스승님[和上]의 방입니다. 그 분은 이미 더 이상 배울 게 없는 경지를 터득하신 분입니다. 찾아가 문안을 드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법랑이 찾아가 문안을 드렸다. 그가 법랑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의 정성이 들어맞아 모두가 곧 도에 들어갈 것이오. 멀리 여러 나라로 떠돌아다닐 필요가 없소. 그러한 일은 무익하오.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도를 수행하여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하오. 다만 법랑 그대는 공업(功業)이 작고 정순하지 못하여 아직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나, 중국[眞丹國]으로 돌아가서는 대법사가 될 것이오.”
이에 네 사람은 다시 더 서쪽으로 가지 않았다. 계속 이곳에 머물면서 오로지 정성을 다하여 도를 닦았다. 오직 법랑만은 다시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니면서, 경론을 찾아 연구하였다. 그 후 중산(中山)으로 돌아왔다. 제자 수백 명이 불법의 강설을 이어나갔다. 후에 돌아가신 곳을 알지 못한다.
손작(孫綽)이 찬을 지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아름다운 것과 흠집은 숨길 수 없다고 하지만
법랑은 환히 빛났으나
그 빛남을 숨겼다.
끝을 공경히 하되 시작은 신중하며
미세함을 추구하되 빛남을 찾아냈다.
무엇으로써 증명을 삼는가.
서리를 밟으면 얼음이 단단하게 얼 것을 아노라.
人亦有言 瑜瑕弗藏
朗公?? 能韜其光
敬終愼始 硏微辯章
何以取證 ?堅履霜
영소(令韶)
법랑의 제자 영소는 아버지가 안문(雁門) 사람이다. 성은 여(呂)씨다. 어렸을 때에는 사냥을 즐겼으나, 훗날 발심하여 출가하였다. 법랑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생각과 배움에 공이 있었다. 특히 선 수행에 뛰어나서, 입정(入定)할 때마다 혹은 며칠씩 일어나지 않았다. 그 후 유천산(柳泉山)으로 거처를 옮겨 동굴을 뚫고 좌선하였다. 법랑이 세상을 마친 후에는, 나무로 법랑의 상을 조각하여 아침저녁으로 예배하며 섬겼다.
손작(孫綽)이 『정상론(正像論)』에서 “여소(呂韶)가 중산에서 정신을 집중했다”고 한 것은, 곧 이 사람을 말한 것이다.
06) 축법승(竺法乘)
축법승은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어려서부터 빼어난 슬기로움으로 훌쩍 뛰어났다. 멀리 비추어 보는 능력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었다. 축법호(竺法護)에게 의지하여 사미가 되었다. 맑고 진실한 뜻과 기개가 있어, 법호가 매우 아름답게 여겼다.
법호의 도가 관중(關中) 지방을 덮자, 재산까지 성대하게 불어났다. 당시 장안의 으뜸가는 집안 출신으로 불법을 받들고자 하는 누군가가, 법호의 도덕을 시험해 보려고 하였다. 법호를 찾아가 거짓으로 다급한 사정을 알리고, 돈 20만 냥을 요구하였다. 법승이 당시 열세 살의 나이로 스승의 옆에서 모시다가, 법호가 채 대답하기도 전에 곧 말하였다.
“스승님[和尙]께서는 마음에서 이미 허락하셨습니다.”
손님이 돌아간 후에 법승이 말하였다.
“이 사람의 얼굴색을 보아하니 실지로 돈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스승님의 도덕이 어떠한지를 관찰하려고 온 것입니다.”
법호가 말하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다음날 그 손님은 종중 사람 백여 명을 거느리고 법호를 찾아와 계를 받기를 청하였다. 그러면서 돈을 요구한 것을 사과하였다. 이에 스승과 제자의 이름이 멀고 가까운 곳에 두루 퍼졌다.
후에 법승은 서쪽 돈황(燉煌)에 이르러, 절을 세워 배우는 이들을 맞아들였다. 몸을 잊고 도를 위하여 가르치면서 게으르지 않았다. 무릇 이리·승냥이 같이 사나운 족속들의 마음을 바꾸어, 오랑캐 무리들로 하여금 예의를 알게 하였다. 큰 교화가 서쪽 땅에 행해지게 된 것은 법승의 힘이다. 그 후 머물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손작은 『도현론(道賢論)』에서 법승을 왕준충(王濬沖)에 비유해 논하였다.
“법승과 안풍(安豊)은 어려서부터 슬기로운 예지력으로 거울처럼 비추었다. 그러니 비록 승려와 속인이라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논두렁 밭두렁 같이 서로 비슷하다 하겠다.”
덕이 높은 선비 계옹(季?)이 그를 위하여 찬과 전기를 지었다.
축법행(竺法行)·축법존(竺法存)
법승과 같이 공부한 축법행과 축법존이 있다. 그들도 나란히 산중에 깃들어 지조를 지킨 것으로 당세에 이름이 알려졌다.
07) 축법잠(竺法潛)
법잠의 자(字)는 법심(法深)이다. 왕(王)씨로 낭야(瑯?) 사람이다. 진(晋)나라 승상 무찬군공(武昌郡公) 왕돈(王敦)의 아우이다. 열여덟 살에 출가하여 중주(中州) 유원진(劉元眞)을 섬겨 스승으로 삼았다. 유원진은 일찍부터 재주와 지혜로서 명성이 있기 때문에 손작이 찬탄했다.
삼가하여 마음을 비우고
어슴푸레 한가롭게 머무름을
그 누가 체득했나.
우리 유원진일세,
이야기는 아로새길 만하고
비춤은 어리석은 이를 깨우칠 만하며
가슴 속은 탁 트여
매양 밝아라.
索索虛衿 ??閑沖
誰其體之 在我劉公
談能彫飾 照足開?
懷抱之內 豁爾每融
법잠은 유원진에게 배운 뒤로 경박함과 화려함을 자르고 깎아냈다. 근본을 숭상하고 배움에 힘쓰더니, 미묘한 말로 교화를 일으켜 명성이 서쪽 조정을 적셨다. 그는 풍모와 자태, 용모가 당당하였다.
스물네 살에 이르자 『법화경』과 『대품』을 강의하였다. 이미 깊은 이해를 쌓아 올렸을 뿐 아니라 강설마저도 훌륭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의 풍모를 살피고 도를 음미하는 사람이 항상 5백 명을 채웠다.
진(晋) 영가(永嘉) 연간(307~313)의 초기에 난을 피하여 양자강을 건넜다. 중종(中宗) 원제(元帝)·숙조(肅祖) 명제(明帝)·승상 왕무홍(王茂弘)·태위(太尉) 유원규(庾元規) 등이 모두 그의 풍모와 덕을 공경하여 벗으로서 공경하였다.
건무(建武) 태녕(太寧, 317~325) 연간 중에 법잠은 항상 궁전 안에 나막신을 신고 들어왔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세상 밖의 사람이라 일컬었으니, 그의 덕을 무겁게 여겼기 때문이다.
중종·숙조가 세상을 떠나고 왕무홍·유원규도 죽자, 마침내 자취를 섬산(剡山)에 숨겨 당시의 세상으로부터 피하였다. 그러나 그의 발자취를 뒤쫓아서 도를 묻는 사람들이 이미 다시 산문에 모여들었다.
법잠은 30여 년 동안 강석을 유유자적하였다. 때로는 대승의 법을 펴기도 하고, 때로는 『노자』와 『장자』를 풀기도 하였다. 투신한 제자 모두가 내전·외전에 두루 뛰어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애제(哀帝, 562~563)가 불법을 좋아하고 존중하였다. 자주 두 명의 사신을 파견하여 정성을 다해 모시기를 청하였다. 법잠은 부름의 뜻이 중하다 하여 잠시 궁궐로 나아갔다. 어전에서 『대품경』을 개강하니, 주상과 조정의 선비들 모두가 훌륭하다고 칭송하였다.
당시 간문제(簡文帝: 司馬煜)가 재상으로 있었다. 조정과 재야에서는 사실상 그를 군주[至德: 至尊을 뜻함]로 여겼다. 법잠은 승려와 속인의 영수로서 선대의 조정에서는 벗으로 공경하고 존중하였다. 그리하여 읍 받는 예와 절 받는 예를 늘상 겸하였다. 간문제가 왕이 되자 경건히 하는 예가 더욱 도타워졌다.
법잠은 어느 날 간문제의 처소에서 패국공(沛國公) 유담(劉?)을 만났다. 유담이 조롱하였다.
“도사가 무엇 때문에 붉은 문이 있는 궁전에서 노니는가?”
법잠이 답하였다.
“당신은 붉은 문이라 보십니까? 제가 보기에는 그저 오막살이일 뿐입니다.”
사공(司空) 하차도(何次道)는 아름다운 덕을 지녔다. 순수하고 소박하여 경전을 독실하게 믿었다. 매양 공경하고 숭상하는 마음이 더해서 스승과 제자로서의 예를 따랐다. 그러더니 자주 초청하여 여러 번 법사를 일으켰다. 법잠은 비록 그들을 따라 다시 동서로 움직였지만, 마음속으로 이것을 즐거워하지 않았다.
마침내 나라에 아뢰고 섬주(剡州)의 앙산(仰山)으로 돌아와, 그가 먼저 가졌던 뜻을 이루었다. 여기에서 숲과 언덕을 소요하다가 남은 여생을 마쳤다. 이때 지둔(支遁)이 심부름꾼을 보내, 앙산 옆에 있는 옥주(沃州)의 작은 산을 사서 고요히 머물 곳으로 삼고자 하였다. 법잠이 대답하였다.
“오려고만 한다면 곧 주겠습니다. 어찌 소유(巢由: 上古時代의 仙人)가 산을 사서 은둔한다는 말을 듣겠습니까?”
지둔은 뒤에 어떤 고구려(高句麗) 도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상좌(上座) 축법심은 중주(中州) 유원진의 제자입니다. 체득한 덕이 곧고 우뚝하여 도인과 속인을 모두 다스립니다. 지난날 서울에서 불법의 기강을 유지하여, 나라 전체에서 모두 우러르는 도를 넓히신 뛰어난 분입니다.
근자에 도업이 더욱 깨끗해져서 티끌세상의 더러움을 참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방을 산 속 물가에 꾸며 덕을 닦으면서 한가로이 지내자 생각하셨습니다. 지금은 섬현(剡縣)의 앙산에 계십니다. 같이 노니는 이들과 함께 도의를 논설하십니다. 조용히 사는 삶이 하도 깨끗하여, 멀거나 가깝거나 모두들 영탄합니다.”
진의 영강(寧康) 2년(374)에 앙산의 집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89세이다.
열종(烈宗) 효무제(孝武帝)가 조서를 내렸다.
“법심 법사는 진리를 깨닫고 마음을 멀리 비우며, 거울 같은 풍모로서 맑고 곧았다. 재상의 영화를 버리고 물들인 옷의 검소함을 이어받아, 인간 세상 밖의 산에 살면서 독실하고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았다. 바야흐로 그가 펼친 도에 힘입어 창생을 구제하려 하였다. 갑자기 돌아가시니 가슴이 아프다. 돈 10만 냥을 부조한다. 급히 말을 달려 보내도록 하라.”
또 손작은 법잠을 유백륜(劉伯倫)에 비유해 논하였다.
“법잠은 도의 소양이 깊고 무거우며 원대한 기량(器量)이 있었다. 유령(劉伶, 유백륜)은 방탕하게 뜻을 멋대로 하여 우주를 작다고 여겼다. 비록 속세를 떠나 조용히 사는 일에서는 유령이 미치지 못하지만, 넓고 큰 바탕의 면에서는 같다고 하겠다.”
축법우(竺法友)
당시 앙산에는 또한 축법우가 있었다. 의지가 굳세고 행동이 바르며 뭇 경전에 널리 뛰어났다. 어느 날 법잠에게서 아비담(阿毘曇)을 받았다. 하룻밤 만에 곧 이를 외웠다. 이에 법잠이 말하였다.
“한번 눈을 거친 것을 외우다니, 옛날 사람들에게도 칭찬받을 일이다. 만약 부처님께서 다시 이곳에서 불법을 일으키신다면, 반드시 너를 5백 나한의 하나로 삼으리라.”
스물네 살 때 곧 강설을 할 수 있었다. 그 후 섬현성 남쪽에 대사(臺寺)를 세웠다.
축법온(竺法蘊)
축법온은 깨달음과 슬기로운 이해력으로 그윽한 경지에 들어간 사람이다.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에 더욱 빼어났다.
강법식(康法識)
강법식도 역시 의학(義學)의 공부가 있었다. 또한 초서(草書)와 예서로 이름이 알려졌다. 어느 날 강흔(康昕)을 만났다. 강흔은 스스로 서예에서는 법식을 능가한다고 말하였다. 이에 법식과 강흔은 각기 왕우군(王右軍: 王羲之)의 초서를 썼다. 옆 사람이 훔쳐서 돈벌이를 하려 했다. 그러나 누구의 것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또 많은 경을 베껴 썼는데, 매우 중하게 여겨졌다.
축법제(竺法濟)
축법제는 어릴 때부터 글 짓는 재주가 있어 『고일사문전(高逸沙門傳)』을 지었다. 무릇 이러한 여러 사람들 모두가 법잠의 제자들이다. 손작은 이들을 위하여 나란히 찬을 지었으나, 다시 갖추어 적지는 않겠다.
08) 지둔(支遁)
지둔의 자는 도림(道林)이다. 관(關)씨로 진류(陳留) 사람이다. 혹은 하동(河東)의 임려(林慮) 사람이라고도 한다.
어릴 때부터 신통한 이치가 있고 총명함이 몹시 빼어났다. 처음 서울에 이르자 태원왕(太原王) 사마몽(司馬?)이 그를 매우 중히 여겨 말하였다.
“미묘한 경지에 이른 공부는 재상감으로도 손색이 없다.”
진군(陳郡)의 은융(殷融)이 일찍이 위개(衛?)와 교류하였다. 그러면서 위개의 정신의 빼어남은 후진으로서 아무도 그를 이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지둔을 만나자 다시 위개와 같은 사람을 만났다고 탄식하였다.
집안 대대로 부처를 섬겼으며, 어려서부터 비상한 이치를 깨달았다. 여항산(餘杭山)에 은거하여 도행품(道行品)에 대해 깊이 사유하고, 『혜인경(慧印經)』을 자세히 공부하였다. 우뚝하니 홀로 빼어나 스스로 하늘의 뜻을 터득했다.
스물다섯 살에 출가하여 강의하는 곳에 이를 때마다 근본적인 가르침을 잘 드러냈다. 그러나 문장 구절을 간혹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당시 글만을 고수하는 사람들에게 거칠다고 평가받았다. 사안(謝安)이 이 소식을 듣고 훌륭하게 여겨 말하였다.
“이것은 곧 구방인(九方?)이 말의 관상을 보는 일과 같다. 병들어 피로한 말은 버리되, 그 중에서 뛰어나고 빠른 말을 취하는 것이다.”
왕흡(王洽)·유회(劉恢)·은호(殷浩)·허순(許詢)·극초(?超)·손작(孫綽)·환언표(桓彦表)·왕경인(王敬仁)·하차도(何次道)·왕문도(王文度)·사장하(謝長遐)·원언백(袁彦伯) 등은 당대의 이름난 사람들이다. 모두가 속세를 벗어난 허물없는 사귐을 나눈다고 알려졌다.
지둔이 백마사(白馬寺)에 있을 때이다. 유계지(劉系之) 등과 『장자』의 ?소요편(逍遙篇)?을 담론하였다. 어느 날 유계지가 말하였다.
“각기 성품에 맞게 하는 것이 소요하고 생각한다.”
지둔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무릇 걸(桀)과 도척(盜?)은 목숨을 잔혹하게 해치는 성품이었습니다. 만약 성품에 맞게 하는 것이 소요라면, 저들 또한 소요하는 것이 됩니다.”
이에 물러나서 ?소요편?에 주석을 달았다. 이 때에 오랫동안 공부한 유생들이 탄복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 후 오(吳: 江蘇省)로 돌아와 지산사(支山寺)를 세웠다. 만년에 섬현(剡縣)으로 들어가고자 하였다. 사안(謝安)이 오흥(吳興)의 태수(太守)가 되어 지둔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대를 그리워하는 날들이 쌓이고 쌓여, 때를 헤아리고 마음을 기울여서 기다렸습니다. 그렇거늘 섬현으로 돌아가 스스로를 다스리려 하신다니 몹시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인생이란 잠시 깃드는 것일 뿐인지라, 근자엔 풍류를 마음껏 즐기는 일조차 거의 다한 듯합니다. 종일토록 근심스럽기만 하고, 하는 일마다 실망하여 탄식할 따름입니다.
오직 기다림은 그대가 오시어 툭 터놓고 이야기하여 시름을 푸는 일입니다. 하루가 천년이 흐르는 것 같군요. 이곳은 대부분 산마을인지라, 한가하고 고요하며 병을 치료할 만한 곳입니다. 일이야 어디라고 섬현과 다르겠습니까만은 의약품에서 같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런저런 인연을 생각해서, 쌓이고 쌓인 저의 그리는 정을 이루어주셨으면 합니다.”
왕희지는 당시 회계(會稽) 태수로 있었다. 평소 지둔의 명성을 들었다. 그러나 아직 믿지 않아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한 차례 지나가는 기운이니, 무어 말할게 있겠는가?”
그 후 지둔이 섬현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우군(于郡)을 경유하였다. 이 때 왕희지는 짐짓 지둔을 찾아가 그의 감화력을 살펴보았다. 지둔에게 이르자 왕희지는 말하였다.
“?소요편?에 대해 들려줄 수 있겠는가?”
지둔은 곧 수천 어구의 글을 지어 새로운 이치를 펴서 드러내었다. 글 짓는 솜씨가 놀랍고 절묘하였다. 왕희지는 마침내 옷깃을 열고 허리띠를 풀었다. 지둔에게 정신이 팔려 돌아가기를 잊었으나, 그만 둘 수 없었다. 이어 영가사 (靈嘉寺)에 주석하기를 청하니, 가까이에 두고 싶어서였다.
얼마 안 되어 다시 자취를 섬산으로 돌려 옥주(沃州)의 작은 잿마루에 절을 세워 도를 행하였다. 백여 명에 달하는 대중 승려가 늘 따르며 가르침을 받았다. 때로 혹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도 있었다. 지둔은 이에 좌우명을 지어 이들에게 힘쓰도록 하였다.
부지런할지어다, 부지런할지어다.
지극한 도란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어찌하여 쉬고 머뭇거리어
신기함을 약하게 하여 잃게 하는가.
아득한 삼계에
오래도록 길이 시달려서
번뇌의 고달픔은 밖에서 모여들건만
어두운 마음은 안으로만 치달린다.
죽을 각오로 내달려 목마르게 흠모하면
아무리 아득해도 피로조차 잊는다.
인간의 한 세상은
떨어지는 이슬방울과 같다.
나의 몸도 나의 것이 아니니
누가 베푼다는 말인가.
덕을 품은 달인은
편안함이 반드시 위태로운 것임을 안다.
고요하게 맑은 거동으로
번뇌를 참선의 연못에서 씻어내라.
삼가하여 밝은 금계를 지켜서
우아하게 계율을 즐겨야 한다.
신묘한 도리에 마음을 편안히 하며
함이 없는 경지에 뜻을 높이도록 하라.
세 가지 가림을 가라앉혀 맑게 하고
여섯 가지 허물을 무르녹여 단련하라.
다섯 요소를 이룬 우리네 몸은 공한 것으로
우리네 사지도 텅 빈 것이라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킨다고 하여 손가락을 비유한 것은 아니니
끊되 떠나지 말아라.
미묘한 깨달음을 이미 베풀었으니
더욱 더 그 앎을 그윽하게 하라.
변화에 따라 그대로 맡겨
남과 더불어 옮겨가라.
앞으로는
생각하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아라.
이를 도탑게 한 이가 깨달음의 어버이니
갓난아기처럼 되도록 뜻을 두어라.
勤之勤之 至道非彌
奚爲淹滯 弱喪神奇
茫茫三界 ??長羈
煩勞外湊 冥心內馳
殉赴欽渴 緬邈忘疲
人生一世 涓若露垂
我身非我 云云誰施
達人懷德 知安必危
寂寥淸擧 濯累禪池
謹守明禁 雅翫玄規
綏心神道 抗志無爲
寮朗三蔽 融冶六疵
空同五陰 豁虛四支
非指喩指 絶而莫離
妙覺旣陳 又玄其知
婉轉平任 與物推移
過此以往 勿思勿議
敦之覺父 志在?兒
당시의 여론은 지둔의 재능이 세상을 경영하는 백성을 구제할 만한데도, 자신을 깨끗이 하려 세속에서 벗어나, 자신과 함께 남을 구제하는 일을 겸하는 겸인(兼人)의 도리에 어긋남이 있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지둔이 이에 『석몽론(釋?論)』을 지었다.
만년에는 석성산(石城山)으로 거처를 옮겨 다시 서광사(棲光寺)를 세웠다. 산문(山門)에서 좌선[宴坐]하여 마음을 선의 뜻에서 노닐고, 나무열매를 먹고 개울물을 마셨다. 뜻은 더 이상의 태어남이 없는 경지에서 물결쳤다.
이어 안반(安般: 數息)과 4선(禪)에 관한 여러 경전과 『즉색유현론(卽色遊玄論)』·『성불변지론(聖不辯知論)』·『도행지귀(道行旨歸)』·『학도계(學道誡)』 등의 책에 주석을 달았다. 이는 마명(馬鳴)의 발자취를 따른 것이자, 용수(龍樹)의 그림자를 밟아 오른 것이다. 이치가 법의 근본과 호응하여 실상과 어긋나지 않았다.
만년에는 산음(山陰)으로 나와서 『유마경』을 강의하였다. 지둔이 법사가 되고 허순(許詢)이 도강(都講)이 되었다. 지둔이 한 논리를 화통하면, 대중들은 허순이 문제점을 제기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다시 허순이 한 질문을 마련하면, 대중들은 또한 지둔이 회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강론이 끝날 때까지 두 사람의 논리는 다하지 않았다.
무릇 법문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말하였다.
“소상하게 지둔의 종지를 터득했다.”
그러나 돌아가 스스로 설명하기를 두세 번 하노라면, 도리어 문득 어지러웠다.
진(晋)의 애제(哀帝)가 즉위하였다. 그러자 자주 두 명의 사신을 파견하여 초청하므로 서울로 나갔다. 동안사(東安寺)에 머물면서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을 강의하였다. 승려와 속인이 함께 공경하고 숭배하였다. 조정과 재야에서도 기뻐 감복하였다.
태원왕(太原王) 사마몽(司馬?)은 일찍부터 정밀한 논리를 구축한 사람이다. 그런데 자기의 재주 넘친 글을 가려내어 수백 어구의 글을 만들고는, 스스로 생각하였다.
‘지둔이 겨를 수 없을 것이다.’
지둔을 찾아갔다. 지둔이 그것을 보고 천천히 말하였다.
“제가 당신과 헤어진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말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사마몽이 부끄러워하며 물러나서 곧 감탄하였다.
“참으로 승려의 왕이다. 어찌 내가 겨룰 수 있겠는가?”
극초(?超)가 사안(謝安)에게 물었다.
“지둔의 말솜씨를 혜중산(?中散)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사안이 말하였다.
“혜중산은 노력해야 겨우 쫓아갈 수 있을 뿐이지.”
극초가 다시 물었다.
“은호(殷浩)와 비교하면 어떠한가?”
사안이 말하였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논변에서는 아마도 은호가 지둔을 누르겠지. 그렇지만 솟구쳐 뛰어넘어 곧 바로 연원에 이르려는 점에서는, 은호가 참으로 부끄러움이 있을 것이다.”
그 후 극초는 벗에게 편지를 보냈다.
“지둔 법사는 신령한 이치에 뛰어나고 그윽한 경지에 빼어나서 홀로 깨달은 분일세. 참으로 수백 년 이래의 불법을 이어 밝혀, 진리를 끊어지지 않게 한 불법의 제왕이라네.”
지둔이 서울에 오랫동안 머물러 3년을 넘어서려 하자, 이에 동산(東山)으로 돌아갔다. 황제에게 글을 올려 하직 인사를 아뢰었다.
“지둔이 머리를 조아려 아뢰옵니다. 감히 재능 없는 사람이 바깥세상의 스승이 되려는 바람을 품었습니다. 그러나 미처 후진들을 채찍질하지 못하여, 신령한 다스림에 허물만 남겼습니다.
무릇 사문(沙門)의 길[義]에서의 법이란 부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순수함을 조각하면 질박함에 어긋나므로, 욕망을 끊어 종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텅 비어 그윽한 거리에서 노닐며, 안으로는 성인의 법칙을 지켜서 5계(戒)의 곧음을 가슴에 달고, 밖으로는 임금님의 다스림을 돕습니다. 소리 없는 음악으로 조화롭게 하되, 스스로의 깨달음으로 화음을 이루어서, 자애로운 효도를 도탑게 하여, 꿈틀거리는 중생들에게 상해가 없게 합니다.
어루만지며 구휼하는 애절한 마음을 머금고, 길이 어질지 못한 일을 슬퍼합니다. 조짐이 나타나지 않는 순리(順理)를 잡고, 멀리 숙명(宿命)의 재앙을 막습니다. 더 이상의 자리가 없는 경지의 절개를 끌어안고, 항(亢: 極上)의 땅을 밟아도 후회하지 않습니다.3)
이 때문에 어진 임금은 왕의 자리의 무거움에 나아가서 높은 절개를 공경하고, 뛰어난 법도로 편안히 합니다. 순리의 마음을 더듬어서 형식적인 공경을 생략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어받은 시대를 더욱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폐하께옵선 하늘이 성스러운 덕을 모아주신 데다, 우아하고 고상하여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도리를 신령한 규범에서 노닐어 해가 기울도록 돌아갈 것을 잊습니다. 이른바 새벽의 종과 북소리가 지극하듯이, 명성이 천하를 떨치어 맑은 교화의 바람이 이미 높으므로, 몹시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러러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수명을 하늘땅과 같이 하여 널리 지극한 교화를 떨치십시오. 진부한 믿음의 요망하고 거짓됨을 제거하여, 공자를 위해 기도한 드넓은 논의를 찾으십시오. 좁은 길에서 진흙 묻히는 일을 끊어, 평탄한 길에서 크나큰 말고삐를 떨치소서.
그리하시면 태산은 계씨의 산신 제사로 더렵혀지지 않고서도, 하나(도)를 얻어서 신령스러움을 이룹니다. 왕자는 둥근 언덕이 아닌 곳에서 하늘 제사를 지내지 않고서도, 하나(도)를 얻어서 길이 올곧습니다.4) 만약 올곧음과 신령스러움이 각각 하나(도)로써 사람(왕자)과 신(태산)이 서로를 잊는다면, 임금은 임금다워서 아래로 몸소 거동하는 일이 없으려니와, 신은 신다워서 주술로써 신령스러움을 더하지 않습니다. 왕자와 신의 그윽한 덕이 서로를 덮어주어 백성들이 그윽한 돌봄에 힘입고, 넓고 넓은 우주가 상서로운 집을 이룬다면, 크고도 큰 우리나라가 천도를 이루는 공간이 될 것입니다.
늘상 함이 없어야 만물이 근본으로 돌아가고,5) 크나큰 형상을 잡아야 천하가 저절로 찾아듭니다.6) 나라 법에는 형벌과 살육을 담당하는 관리가 있습니다. 만약 살려주되 그것이 베풂 때문이 아니라면, 상 받는 사람은 스스로 얻습니다. 만약 죽이되 그것이 노여움 때문이 아니라면, 벌받는 사람은 스스로 받을 것입니다. 관청을 넓혀서 귀신의 생각을 꺼려하고, 인사권을 공개하여 그윽한 도량을 지극히 하십시오. 그러신다면, 공자의 이른바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던가? 사계절이 흘러가는구나!(天何言哉 四時行焉)’가 될 것입니다.
빈도는 동산(東山)의 들에 숨어살며 세상의 영화와 달리하여, 긴 언덕의 푸성귀를 먹고 맑게 흐르는 계곡물로 양치질하며 지냈습니다. 남루한 옷을 입고 세상을 떠나려 하여, 황제의 섬돌 엿보기를 끊었사옵니다. 모르는 사이에 천자의 빛이 곡진하게 비추어, 외람되이 오막살이집까지 미쳐, 자주 밝으신 조서를 받들어 서울로 올라오게 하셨습니다. 나아가거나 물러가거나 어찌 할 수도 없어 몸둘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궁정에 이른 이래 누차 이끌어주심에 힘입었습니다. 빈객의 예로써 넉넉하게 대하시고, 미묘한 말씀으로 격려해 주셨습니다. 매양 부끄럽게도 재능이 막힌 곳을 뚫지 못하고, 논리는 새로움을 취하지 못하였습니다. 폐하의 그윽한 계획에 대답하여 그 뜻을 널리 백성에게 알리거나, 보고 들은 것을 성실하게 거짓 없이 하기에는 부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옆에서 모시면서 조심하고 삼갔으나, 흐르는 땀이 자리를 적셨습니다.
그 옛날 상산의 네 늙은이[商山四皓]는 한 고조 유방에게 나아갔고, 단간목(段干木)은 위문후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물러가고 나아감에 알맞은 때가 있었으니, 묵묵히 말하지 않더라도 임금과 신하 간에 서로 뜻이 어울렸습니다.
이제 덕은 옛 분들과 다르고 동정도 진심에서 어긋나, 궁궐에 온통 정신을 기울여서 황제를 선동합니다. 근거 아닌 것으로 지쳐버리니, 어떻게 할 만한 정치[有爲之治]를 하겠습니까? ‘아, 세월이 빠르게 흘러감이 이와 같구나!’ 하는 탄식이 나옵니다. 하물며 다시 뜻을 같이 한 동지들이 한가롭게 살면서 멀고 넓게 빠짐없이 익히니, 고개를 빼어들어 동쪽을 돌아보며 그리워함에, 누군들 품은 생각이 없겠습니까?
우러러 원하옵건대 이제 폐하께옵서 저를 내쳐 놓아주시는 은택을 내려주십시오. 숲으로 돌아가 새답게 새를 기르게 하여 주신다면, 그 입은 은혜가 두터울 것입니다. 삼가 봉하지 않은 글로써 아뢰어, 어리석고 좁은 소견을 말씀드립니다. 양식을 싸서 꾸려 놓고, 길을 바라보며 엎드려 자애하신 조서(詔書)를 기다립니다.”
조서를 내려 곧 이를 허락하여 노자를 지급하고, 사신을 보내서 일마다 풍성한 후대를 하였다. 당대의 이름난 인사를 모두가 떠나는 길에서 송별연을 베풀어 떠나보냈다.
채자숙(蔡子叔)이 먼저 와서 지둔 가까이에 앉아 있었다. 사안석(謝安石)은 뒤에 이르렀다. 채자숙이 잠깐 일어난 사이에 사안석이 곧 자리를 옮겨 그곳에 앉았다. 채자숙이 돌아와서는 요와 함께 사안석을 들어올려 땅바닥에 팽개쳤다. 그러나 사안석은 개의하지 않았다. 당시 명현들이 그를 사모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이윽고 섬산(剡山)에서 자취를 거두어 숲 우거진 물가에서 목숨을 마쳤다.
어떤 사람이 한번은 지둔에게 말을 보내 주었다. 지둔이 이를 거두어 길렀다. 당시 혹 이 일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에 지둔은 말하였다.
“그 뛰어나고 빠름을 사랑하여 잠시 기를 따름이오.”
그 후 어떤 사람이 학을 선물로 보내 왔다. 이 때 지둔이 학에게 말하였다.
“너는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생물이다. 그렇거늘 어찌 사람들의 귀와 눈의 노리개가 될 수 있겠느냐?”
그리고는 마침내 이를 놓아주었다. 지둔이 어릴 때의 일이다. 스승과 함께 사물의 종류를 논하다가, 계란은 날로 먹어도 살생이라 할 만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스승도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이어 스승이 죽은 뒤, 홀연히 스승의 형상이 나타나서 달걀을 땅에 집어던졌다. 껍질이 깨지면서 병아리가 걸어 나왔다가 잠깐 사이에 모두 사라졌다. 지둔은 곧 깨닫고, 이로 말미암아 몸을 마치도록 푸성귀만 먹었다.
지둔은 전에 여요(餘姚)의 오산(塢山)을 지나다 그곳에 머물렀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오히려 오중(塢中)으로 되돌아갔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어보자 그가 대답하였다.
“사안(謝安)이 예전에 자주 찾아와 만나면 곧 열흘씩 이곳에서 보냈소. 지금 감정에 부딪쳐 눈을 들어 바라보는 것마다 그 때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없군요.”
그 후 병이 심해지자 오중으로 돌아갔다. 진(晋)의 태화 원년(366) 윤4월 4일에 머물던 곳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53세이다. 곧 오중(塢中)에 묻었다. 아직 그 무덤이 남아 있다. 혹 어떤 사람은 섬주에서 죽었다고 하지만 아직 자세하지 않다.
그를 위하여 극초(?超)는 서전(序傳)을 지었고, 원굉(袁宏)은 명찬(銘贊)을 지었으며, 주담보(周曇寶)는 조문을 지었다. 손작의 『도현론(道賢論)』에는 지둔을 바로 상자기(向子期)에 견주어 표현하였다”지둔과 상수(向秀)는 장자와 노자를 숭상했다. 두 사람의 시대는 다르나 현담을 즐긴 기풍은 같다고 하겠다.”
또한 『유도론(喩道論)』에서 전한다.
“지둔은 의식이 맑고 바탕이 순하여 남을 상대하지 않았다. 현묘한 도가 깊고 성하여 정신과 더불어 맡은 바를 다하였다. 이것이 유학에 힘쓴 먼 곳의 무리들이 근본에 돌아가게 된 이유이자, 유유자적한 도가의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훗날 덕이 높은 선비인 대규(戴逵)가 길을 가다가 지둔의 묘 앞을 지나가다가 탄식하였다.
“덕스런 소리가 아직 멀어지지 않았거늘 아름드리 나무가 이미 무성하구나. 바라건대 신통한 이치가 면면히 이어져서, 기운과 함께 다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오.”
지법건(支法虔)
지둔과 함께 공부한 법건(法虔)은 이론에 정밀하게 뛰어나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둔보다 먼저 죽었다. 지둔이 탄식하였다.
“예전에 장석(匠石)7)은 자귀질을 영인(?人)에게서 그만두었고, 아생(牙生: 伯牙)은 종자기가 죽자 거문고 줄을 끊었다. 자기를 미루어서 남에게 미친다는 것은 참으로 허튼 것이 아니다. 보배롭게 사귄 벗이 이미 사라졌구나. 말을 해도 완상해 줄 사람이 없으니, 마음속에 답답한 것이 맺혀 나도 죽을 것이다.”
이에 절오장(切悟章)을 짓다가 죽음에 즈음하여 완성하였다. 붓을 떨어뜨리면서 세상을 마쳤다. 무릇 지둔이 지은 시문은 열 권으로 모아져 세간에 성행된다.
축법앙(竺法仰)
당시 동쪽 땅에 또 축법앙이 있었다. 지혜로운 이해력으로 세상에 알려져서 왕탄(王坦)이 소중히 여겼다. 죽은 뒤에 오히려 형상을 드러내어 왕탄을 찾아가 행실을 도왔다.
09) 우법란(于法蘭)
우법란은 고양(高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지조가 있었다. 열다섯 살에 출가하였다. 곧 부지런하게 정진하여 경전을 연구하고 외웠다. 밤낮으로 법을 구하고 도를 물음에 있어서 반드시 대중보다 앞섰다.
스무 살에 이르자 풍채가 빼어나게 뛰어났다. 도를 3하(河)8)에 떨쳐서 이름이 사방 먼 곳까지 유포되었다. 성품이 산천을 좋아하여 대부분 산 동굴에 머물렀다.
어느 겨울철, 산에 있을 때 얼음과 눈보라가 매우 사나웠다. 이 때 호랑이 한 마리가 법란의 방에 들어왔으나, 법란은 얼굴빛에 거부감이 없었다. 호랑이도 매우 순종하더니, 이튿날 눈이 그치자 곧 떠났다.
또한 산중의 신(神)들도 항상 찾아와 법을 받았다. 그의 덕이 정령(精靈)들에게까지 미치는 것이 모두 이러하였다.
그 후 강남의 산수(山水)로는 섬현(剡縣)이 가장 기이하다는 말을 들었다. 곧 천천히 동구(東?)를 걸어서 멀리 우승산(??山)이 바라보이는 석성산(石城山) 발치에 머물렀다. 지금의 원화사(元華寺)가 그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감화력을 유원규(庾元規)에 비유하였다. 손작(孫綽)의 『도현론(道賢論)』에는 그를 완사종(阮嗣宗)9)과 비교하여 논했다.
“법란이 남긴 묘한 자취는 매우 고상하여 거의 지인(至人)10)의 무리이다. 완보병(阮步兵)은 홀로 오만하여 무리 짓지 않았으니, 또한 법란과 짝한다 하겠다.”
섬현에 머문 지 얼마 안 되어 상심하여 탄식했다.
“불법이 비록 일어났지만 불경의 도리에 빠진 것이 많구나. 만약 한 번만이라도 원만한 가르침을 들을 수 있다면 저녁에 죽더라도 좋으리라.”
이에 멀리 서역으로 가서 남다른 가르침을 구하려고 하였다. 교주(交州)에 이르러 병이 들어 상림(象林)에서 세상을 마쳤다.
지둔(支遁)이 뒤쫓아가서 그의 상(像)을 세우고 찬(贊)을 지었다.
법란은 세속을 초월하여
현묘한 종지[玄旨]를 빠짐없이 체득하고
아름답게 산택에 숨어
호랑이·외뿔소를 두루 길들였다.
于氏超世 綜體玄旨
嘉遁山澤 馴洽虎?
별전에 이르기를, “법란도 감응하여 마른 샘에서 물로 양치질하였다. 그 일은 법호(法護)와 같다”라 하였다. 그러나 아직 자세하지 않다.
축법흥(竺法興)·지법연(支法淵)·우법도(于法道)
이 밖에 또 축법흥·지법연·우법도 등이 법란과 같은 시대에 살았으며, 덕이 비슷하였다. 법흥은 견문이 넓은 것으로 이름이 알려지고, 법연은 빛나는 재주로 칭송되며, 법도는 논리의 해석으로 명성을 날렸다.
10) 우법개(于法開)
법개는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우법란을 섬겨 제자가 되었다. 깊은 생각이 외롭게 일어나 고유한 견해를 말로 드러냈다. 『방광반야경』과 『법화경』에 빼어났다. 또한 기바(耆婆: 醫神)를 이어받아 오묘하게 의술에 뛰어났다.
어느 날 걸식을 하다가 한 집에 투숙하였다. 주인의 부인이 자리에 누워 병이 위급하였다. 온갖 치료로도 효험이 없어 온 집안이 당황하고 어지러웠다. 법개가 이르기를 “이 병은 쉽게 치료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주인은 바로 양(羊)을 죽여서 잡신(雜神)에게 제사를 올리려 하였다.
법개가 주인을 시켜 먼저 양고기를 조금 가지고 국을 끓여서 병자에게 주었다. 그런 다음에 그 기운을 타고서 침을 놓았다. 잠깐 사이에 양의 얇은 꺼풀에 아기가 쌓여서 나왔다.
승평 5년(361)에는 효종(孝宗)황제가 병에 걸렸다. 법개가 맥을 짚었다. 그는 황제가 일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다시는 들어가기를 기꺼워하지 않았다. 강헌(康獻) 황후가 명령하였다.
“황제께서 몸이 조금 좋지 않아 법개를 불러 맥을 짚어보게 하였다. 그랬더니 다만 문에 이르러 앞으로 나오지 않으면서 온갖 말로 기피하는구나. 마땅히 정위(廷尉)에게 넘겨 벌을 내리도록 하여라.”
갑자기 황제가 죽어서 죄를 면하였다. 섬현(剡縣)의 석성산으로 돌아왔다. 스승의 뒤를 이어 원화사(元華寺)를 수축하였다.
그 후 백산(白山)의 영취사(靈鷲寺)로 옮겨 늘 지도림(支道林: 支遁)과 색(色)과 공(空)의 의미를 다투었다. 이들의 논쟁에 여강(廬江)의 하묵(何?)이 법개의 비판을 밝게 펼치고, 고평(高平)의 극초(?超)가 도림의 해답을 잘 풀었다. 나란히 세간에 전한다.
우법위(于法威)
법개의 제자 법위(法威)는 맑고 총명하여 핵심을 찌르는 말솜씨가 있었다. 그런 까닭에 손작이 그를 찬하였다.
『주역』에서는 한백(翰白)11)을 찬양하고
『시전(詩傳)』에서는 빈조(?藻: 문장)를 찬미하네.
희고 날쌘 얼룩말이 마당에 있듯이
큰 비가 멈춘 때의 향기가 나는 듯하구나.
법위(法威: 于威)의 밝은 깨우침은
견고하여 멀리서도 검토하니
깨끗한 그 명예를
그리워함에 부끄러움이 없어라.
易曰翰白 詩美?藻
斑如在場 芬若停?
于威明發 介然遐討
有潔其名 無愧懷抱
법개가 어느 날 법위를 시켜, 서울을 벗어나 지둔이 『소품반야경(小品般若經: 道行經)』을 강론하는 산음(山陰)을 지나가게 하였다. 법개가 법위에게 일러두었다.
“도림의 강의는 네가 그곳에 이를 무렵에 어느 품(品)에 이를 것이다. 내가 가르쳐 준 말로 수십 번에 걸쳐 공박하고 논란하여라. 이 품에 있는 것은 예전에도 통하기 어려웠던 대목이다.”
법위가 그 고을에 이르자 바로 지둔의 강의를 만났다. 과연 법개의 말과 같았다. 여러 번 질의와 응답을 주고받았다. 마침내 지둔이 굴복하였다. 지둔은 이로 인해 성난 목소리로 말하였다.
“그대는 얼마만큼 반복해야 만족하겠는가? 누군가의 부탁을 받아서 온 것인가?”
그러므로 동산(東山)의 속담에 전한다.
“위없는 기량의 법심(法深: 竺法?), 독창적 생각의 우법개(于法開), 절륜한 말솜씨의 도림(道林: 支遁), 놀라운 기억력의 식스님12).”
애제(哀帝) 때에 여러 번 부름을 받았다. 마침내 서울로 나가서 『방광반야경』을 강의하였다. 모든 옛 불경 번역[舊學]에서 품었던 의문들이 그로 인하여 풀어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강의를 마치고 동산으로 하직하여 돌아왔다. 황제가 그의 덕을 그리워하여, 정중하게 돈과 비단 및 가마와 겨울·여름 옷들을 선물로 보냈다. 사안(謝安)과 왕문도(王文度) 등도 모두 좋은 친구가 되었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법사께서는 덕이 높고 밝으며 굳세고 대범하십니다. 그런데도 무엇 때문에 의술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계십니까?”
법개가 대답하였다.
“6육바라밀을 밝혀 네 가지 마구니의 병을 제거하고, 아홉 가지 조짐을 조리하여 풍한(風寒)의 병을 치료합니다. 이것은 자신에게도 이롭고 다른 사람도 이롭게 합니다. 그러니 또한 괜찮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60세에 산사에서 세상을 마쳤다. 손작이 그를 가리켜 말하였다.
“재주 있는 말솜씨로 종횡하고, 몇 가지 술법으로 널리 가르침을 편 것은, 법개공에게 달려 있던 일이어라.”
11) 우도수(于道邃)
도수는 돈황(燉煌) 사람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숙부가 그를 양육하였다. 도수는 효도와 공경으로 정성을 다하여, 마치 친어머니를 받들듯이 하였다. 열여섯 살에 출가하여 법란(法蘭)을 섬기고 제자가 되었다.
학업이 고명하여 내외의 전적을 해박하게 열람하였다. 의방과 약업[方藥]에 훌륭하며 서찰(書札)을 아름답게 썼다. 다른 풍속들을 훤하게 외우고, 더욱이 담론에 솜씨가 있었다. 법호가 항상 칭송하였다.
“도수는 고상하고 간결하며 우아하고 소박하여, 옛 어진 분들[고인]의 기풍이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바야흐로 불법의 대들보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후 법란과 더불어 양자강을 건너니, 사경서(謝慶緖)가 크게 미루어 중히 여겼다.
성품이 산과 시내를 좋아하여 동쪽에 있을 때, 대부분의 이름난 산을 노닐어 밟았다. 사람됨이 비방과 칭송에 개의하지 않으며, 세속과 가까이 할 뜻을 가슴에 품은 적이 없었다.
그 후 법란을 따라 서역(西域)으로 가다가 교지(交趾)에서 병에 걸려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가 31세이다.
극초(?超)가 그의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고, 지둔이 비명(碑銘)을 지어 찬양하였다.
영명하고 영명한 상인(上人)이시여,
지식은 뛰어나고 이론은 맑아라.
밝은 바탕은 옥같이 아름답고
덕스런 말씀은 난초처럼 향기로워라.
英英上人 識通理淸
朗質玉瑩 德音蘭馨
손작은 도수를 완함(阮咸)과 비교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에 대해 말하였다.
“완함은 여러 번 벼슬을 한 허물이 있고, 도수는 맑고 투명하다는 명성이 있습니다. 그렇거늘 어떻게 짝이 됩니까?”
손작이 말하였다.
“비록 자취에서는 우묵한 구덩이와 높은 땅으로 비교되는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고상한 기풍에서는 같다.”
『유도론(喩道論)』에 전한다.
“근간 낙양에 축법행이 있다. 담론자들은 그를 악령(樂令)에 견준다. 강남에 우도수가 있다. 알만한 이들은 그를 뛰어난 부류로 상대한다. 모두가 당시에 함께 보고들은 것으로, 동료들이 사사로이 칭찬한 말이 아니다.”
12) 축법숭(竺法崇)
법숭은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어려서 도에 들어와 계율로써 절도를 지켜 칭찬을 받았다. 게다가 민첩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뜻을 경전의 기억에 두텁게 두었다. 더욱이 법화 일승의 가르침[法華一敎]에 뛰어났다.
일찍이 상주(湘州)의 녹산(麓山)을 노닐 때에, 산의 정령[山精]이 부인으로 나타났다. 법숭을 찾아와 수계(受戒)를 청하고는, 머물던 산을 희사하여 절로 사용하게 하였다. 법숭이 머물러 조금 지나자, 교화가 상주 땅을 두루 적셨다.
그 후 섬현(剡縣)의 갈현산(葛峴山)으로 돌아왔다. 초가집 암자에서 개울물을 마시며, 선정(禪定)의 지혜로 기쁨을 취하였다. 동구(東?)의 학자들이 다투어 찾아와 모여들었다.
노국(魯國)의 은둔하는 선비 공순지(孔淳之)와 만나, 해가 다하도록 즐거이 노닐었다. 문득 이틀 밤을 묵으면 다시 돌아갈 것을 잊었다. 마음을 열어 몰록 들어맞으면 스스로 마음에 꼭 맞는 사귐이라 생각하였다. 이에 법숭은 한탄하였다.
생각을 인간 세상 밖으로 멀리한 지
30여 년이건만
일산을 기울여 머리를 맞댈 벗을 만나다니
늙음이 이르는 것도 알지 못하는구나.
緬想人外 三十餘年
傾蓋于? 不覺老之將至
그 후 공순지와 이별하여 떠돌았다. 법숭이 시를 읊었다.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아직도 마음과 눈에 남아 있거늘
산림의 선비는
가더니 돌아오지 않누나.
皓然之氣 猶在心目
山林之士 往而不反
이 시는 이와 같은 사람(공순지)을 일컬은 것이다.
법숭은 후에 산중에서 세상을 마쳤다. 『법화의소(法華義疏)』 네 권을 지었다고 한다.
석도보(釋道寶)
당시 섬현의 동쪽 앙산에 석도보가 있었다. 성은 왕(王)씨이며, 낭야 사람이다. 진(晋)의 재상인 왕도(王導)의 아우이다. 어린 나이에 불법을 믿고 깨달아, 세상을 피해서 영화를 마다하였다. 친구들이 충고하며 말렸으나 제지할 수 없었다. 향기로운 탕에서 목욕하고, 곧 나아가 머리카락을 깎으려 하였다. 이 때 시를 지어 읊었다.
만 리의 강물이 처음에는 술잔에 넘치는
작은 물에서 시작된 것임을 어찌 알랴?
후에 그는 배움의 행실로 세상에 드러났다.
安知萬里水 初發濫觴時
後以學行顯焉
13) 축법의(竺法義)
법의는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열세 살 때 법심(法深)을 만나 문득 물었다.
“어질음과 이로움[仁利]은 군자가 행하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공자님께서는 무슨 까닭에 거의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까?”
법심이 말하였다.
“사람으로서 잘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거의 말씀하시지 않은 것이다.”
법심은 그가 어리지만 뛰어나게 총명한 것을 보고 출가하기를 권유하였다.
이에 불문에 뜻을 깃들여 법심으로부터 배움을 받았다. 많은 경전을 섭렵하였다. 특히 『법화경』에 뛰어났다.
그 후 법심을 하직하여 서울을 떠나 다시 크게 강석을 열었다. 왕도(王導)와 공부(孔敷) 등도 모두 가르침을 따라 벗으로서 공경하였다.
진(晋)의 흥녕(興寧) 연간(363~365)에 이르러 다시 강남으로 돌아와, 시영(始寧)의 보산(保山)에서 쉬었다. 수업하는 제자가 항상 백여 명이었다.
함안(咸安) 2년(372)에 이르러 문득 심기(心氣)에 질병을 느끼자, 항상 생각을 관세음보살에 두었다. 어느 날 꿈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 씻어주었다. 꿈을 깨니 곧 병이 나았다. 부량(傅亮)은 늘 말하였다.
“나의 아버지가 법의와 교류하시던 곳에서는, 매양 관세음보살의 신령한 이적을 설법하는 것을 들었다. 어른이나 아이들이나 숙연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진(晋)의 영강(寧康) 3년(375) 효무(孝武)황제가 사신을 보내, 오시기를 청하였다. 서울로 나가 강설하였다.
진의 태원(太元) 5년(380) 서울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 때 나이는 74세이다. 이에 10만 냥으로 신정강(新亭崗)을 사서 묘지로 삼고, 3층의 탑을 세웠다. 법의의 제자인 담상(曇爽)이 묘소에 절을 세워 신정정사(新亭精舍)라 이름하였다.
그 후 송(宋: 南北朝 때의 前宋) 효무제(孝武帝, 454~465)가 남쪽으로 내려와 간흉을 토벌하였다. 황제의 깃발을 이곳에 멈추고서 이 절을 임시 궁전으로 삼았다. 효무제가 제왕의 자리를 선양받아 등극하자, 다시 선당(禪堂)에 행차하여 이곳을 개척하였다. 절 이름을 중흥사(中興寺)로 고쳤다. 그런 까닭에 원가(元嘉, 424~452) 말엽의 동요에 이르기를, “전당(錢塘)에서 천자가 나왔다”고 한 것은 곧 이 선당을 가리킨 말이다. 그런 까닭에 중흥사의 선방에는 아직도 용비전(龍飛殿)이 있다. 지금의 천안사(天安寺)가 그곳이다.
14) 축승도(竺僧度)
승도의 성은 왕(王)씨로 이름은 희(晞)이다. 자는 현종(玄宗)이고 동완(東莞) 사람이다. 비록 어릴 때는 매우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자랐으나, 타고난 자태가 빼어났다. 열여섯 살이 되자 정신이 시원하고 빼어나서 남다르게 뛰어났다. 성품과 도량이 온화하여 고을과 이웃 사람들이 부러워하였다.
당시에 홀로 어머니와 살면서 효성으로 섬기고 예를 다하였다. 같은 고을의 양덕신(楊德愼)의 딸에게 구혼하였다. 양덕신의 딸 역시 양반집의 규수로 이름은 소화(苕華)라 하였다. 용모가 단정하고 또한 고전공부도 잘하였다. 승도와 나이가 같았으므로 구혼한 날에 곧 서로의 결혼을 허락하였다. 미처 예식을 치루기 전에 소화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아버지 또한 죽고, 승도의 어머니 역시 돌아가셨다.
이에 승도는 마침내 세상의 무상함을 보고, 문득 느끼어 깨달은 바 있어, 곧 속세를 버리고 출가하였다. 이름을 승도라 바꾸고서, 속세 밖으로 자취를 옮겨 땅을 피해 유학하였다.
이에 소화는 부모상을 마치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여인이 좇는 세 가지 길[三從之義]에서 홀로 서는 도리란 없다.’
곧 승도에게 편지를 보냈다.
“우리 몸의 터럭이나 피부조차 다치거나 훼손시켜서는 안 되거니와, 종실의 제사를 갑자기 지내지 않아도 안 됩니다. 당신으로 하여금 세간의 가르침을 돌아보게 하고, 먼 뜻을 바꾸어 우뚝이 빛나는 자태를 성대하게 하여, 밝은 세상에 빛나게 하고자 합니다. 멀게는 조상들의 혼령을 편안히 쉬게 하고, 가깝게는 사람과 신들의 소원을 풀어 위로하고자 합니다.”
아울러 다섯 수의 시를 그에게 보냈다. 첫 수의 시는 다음과 같다.
크나큰 도리는 스스로 끝없고
하늘땅은 길고도 오래 가며
거대한 바위는 소멸되기 어렵고
겨자씨 또한 헤아리기 어려워요.
사람이 한 세간에 태어남은
회오리바람이 창문 사이를 지나는 것과 같아서
부귀영화가 어찌 무성하지 않으리오만
아침저녁 사이에 시들고 썩어가지요.
냇가에서 시를 읊조리다
해 저물 녘 술병 두드리는 일 생각만 해도
맑은 소리 귀를 간지럽히고
기름진 맛 입에 달라붙지요.
비단옷으로 몸을 치장하고
멋진 갓으로 머리를 꾸밀 수 있거늘
어찌 머리를 깎고 수염을 깎아
텅 빈 것에 탐닉하여 있는 것을 해치시나요.
저의 구구한 정 때문이 아니라
그대가 후세를 구휼케 하려구요.
大道自無窮 天地長且久
巨石故?消 芥子亦難數
人生一世間 飄忽若過?
榮華豈不茂 日夕就彫朽
川上有餘吟 日斜思鼓缶
淸音可娛耳 滋味可適口
羅紈可飾軀 華冠可曜首
安事自剪削 耽空以害有
不道妾區區 但令君恤後
이에 승도는 답서를 보냈다.
“무릇 임금을 섬겨서 한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도를 넓혀서 만방을 제도하는 일만 같지 못하오. 어버이를 편안히 모셔 한 집안을 이루는 것은 도를 널리 펴서 삼계를 제도하는 것만 같지 못하오. 신체발부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세속에서나 가까이 하는 말일 뿐이라오. 다만 나의 덕이 멀리 미치지 못하여 아직 두루 덮을 수 없으니 이것이 부끄러울 따름이오.
그러나 한 삼태기의 흙이 쌓여서 산을 이루는 것처럼, 또한 미약한 것에서부터 드러나기를 바랄 뿐이오. 이에 가사를 걸치고 석장을 잡고서, 맑은 물을 마시고 반야를 읊는 것이오. 비록 제후의 옷을 입고 여덟 가지 맛있는 반찬을 갖추어 먹으며, 황홀한 악기 소리를 듣고 휘황찬란한 빛깔을 드러내며 산다 할지라도, 뜻을 바꾸지는 않겠소.
만약 지난날의 약속에 매달린다면 곧 함께 열반을 기약할 뿐이라오. 또한 사람의 마음이 각기 다른 것은 그 얼굴이 각기 다른 것과 같듯이, 그대가 도를 즐기지 않는 것은 마치 내가 속세를 그리워하지 않는 것과 같소.
양씨여, 길이 이별하여 긴긴 전생의 인연을 이제는 끊소! 이 해도 저물어가고 시간은 나와 함께 하지 않는구려. 도를 배우는 사람은 나날이 덜어내는 것으로 뜻을 삼아야만 하고, 세속에 머무는 사람은 때맞추어 힘써야 하오.
그대는 나이와 덕이 모두 한창 때이니, 마땅히 사모하는 사람을 빨리 찾아야 할 것이오. 도사에게 마음을 뺏겨 좋은 시절을 놓쳐서는 안 되오.”
다섯 수의 시를 지어 여자의 시에 회답하였다. 그 첫 수의 시는 다음과 같다.
기회건 시운이건 멈추어 주지 않고
눈 깜짝할 사이 세월은 지나가며
큰 바위도 다할 때를 만나니
겨자씨도 어찌 많다 하겠소.
참으로 가는 것은 쉬지 않으므로
시냇가에서 탄식하였다오.13)
듣지 못했소, 영계기(榮啓期)가
흰머리가 되어서도 맑은 노래 부른 것을.
무명옷으로 따뜻하거늘
누가 비단 치장을 따지겠소.
금세에는 비록 즐겁다 하더라도
다음 생에는 어찌할 것이오.
죄와 복은 참으로 자신으로 말미암는 것
어찌 남을 구휼한단 말이오.
機運無停住 ?忽歲時過
巨石會當竭 芥子豈云多
良由去不息 故令川上嗟
不聞榮啓期 皓首發淸歌
布衣可暖身 誰論飾綾羅
今世雖云樂 當奈後生何
罪福良由己 寧云己恤他
승도의 품은 뜻이 돌처럼 견고하여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소화도 느끼고, 역시 깊은 믿음이 일어났다. 이에 승도는 오로지 정성을 불법에 쏟아 많은 경전을 펴서 음미하였다. 『비담지귀(毘曇旨歸)』란 책을 지었으며, 이 또한 세상에 유행한다. 그 후 어디에서 세상을 마쳤는지 모른다.
축혜초(竺慧超)
당시 하내(河內) 지방에 또 축혜초가 있었다. 역시 행실과 지혜를 겸비하여 드러냈다. 덕 높은 선비인 안문(雁門)의 주속지(周續之)와 좋은 벗으로,
『승만경(勝?經)』을 주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