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전 제02권

고승전 제02권

1. 역경 ②

01) 구마라집(鳩摩羅什)

구마라집(鳩摩羅什)은 중국말로 동수(童壽)라 하며 천축국(天竺國) 사람이다. 집안 대대로 나라의 재상(宰相)을 지냈다.

구마라집의 조부(祖父) 구마달다(鳩摩達多)는 뜻이 크고 기개(氣槪)가 있어 남에게 구속받지 않았다.

무리 가운데 매우 뛰어나 명성(名聲)이 나라 안에 높았다.

아버지 구마염(鳩摩炎)은 총명하고도 아름다운 지조가 있었다. 곧 재상의 지위를 이으려고 할 즈음에 사양하고 출가(出家)하여 동쪽으로 파미르 고원을 넘었다. 구자국(龜玆國) 왕은 그가 영화로움을 버렸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를 매우 존경하고 사모하여

몸소 교외(郊外)에 나가 영접하고, 청하여 그를 국사(國師)로 삼았다.

구자국왕에게는 누이동생이 있었다. 그녀의 나이는 갓 스무 살이었다. 사려 깊고 이치를 잘 알며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눈을 거쳐 간 것은 능숙하게 하고, 한 번 들은 것은 듣자마자 곧 외웠다. 또 몸에 붉은 사마귀가 있었다.

관상법에 의하면 슬기로운 자식을 낳을 것이라고 하였다. 여러 나라에서 그녀에게 장가를 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어느 곳이든 가기를 기꺼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구마염(鳩摩炎)을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 하였다.

구자국왕은 구마염을 핍박하여 그녀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얼마 후 구마라집을 잉태하였다. 구마라집이 뱃속에 있을 때의 일이다.

구마라집의 어머니는 신통한 깨달음과 빼어난 이해력이 평소의 배나 더하는 것을 자각(自覺)하였다.

작리대사(雀梨大寺)에 뛰어난 승려들이 많은데다, 도를 깨달은 승려가 계시다는 소문을 들었다.

곧 왕실(王室)의 귀부인들과 덕행(德行)이 있는 여러 비구니들과 함께,

여러 날 동안 공양을 베풀고 재(齋)를 청하여 법문(法門)을 들었다.

구마라집의 어머니는 갑자기 저절로 천축어(天竺語)에 능통하게 되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도

반드시 깊은 이치를 끝까지 다 궁구해 내니, 대중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그 곳에 달마구사(達摩瞿沙)라는 아라한이 있어 말하였다.

“이것은 필시 슬기로운 자식을 잉태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리불(舍利佛)이 뱃속에 있을 때의 증험(證驗)을 설법하였다.

구마라집이 출생한 뒤에 그녀는 곧 예전의 천축어를 도로 잊어버렸다.

얼마 후 구마라집의 모친은 즐거이 출가(出家)하기를 원하였다.

남편이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다시 아들 하나를 더 낳았다. 불사제바(弗沙提婆)라고 불렀다.

뒤에 성(城)을 나가 돌아다니면서 구경하였다. 무덤 사이에 마른 해골이 여기저기 흩어져 굴러다니는 것을 보았다.

이에 괴로움의 근본을 깊이 사유(思惟)하여 출가하기로 결심하였다. 만약 머리를 깎지 못한다면,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기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엿샛날 밤에 이르자 기력(氣力)이 실낱같이 쇠약해졌다. 자칫하면 다음 날 아침까지도 이르지 못할 듯했다.

이에 남편이 두려워 출가를 허락하였다. 그녀는 아직 삭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전히 음식을 먹지 않았다.

즉시 사람을 시켜 삭발을 해 주니 그제야 음식을 들었다. 다음 날 아침 계(戒)를 받았다.

선법(禪法)을 좋아하여 애오라지 정진하고 나태하지 않아, 초과(初果)를 배워 터득했다.

구마라집도 나이 일곱 살에 어머니와 함께 출가하여 스승에게 불경을 배웠다.

하루에 천 개의 게송(偈頌)을 암송(暗誦)하였다. 한 개의 게송(偈頌)이 32자(字)이니, 모두 3만 2천 글자인 셈이다.

비담(毘曇)을 암송한 뒤에, 스승이 그 뜻을 전수하였다. 즉시 통달하여 그윽한 이치를 펴지 않음이 없었다.

당시 구자국(龜玆國) 사람들은 구마라집의 어머니를 왕의 누이로서 대우하였다.

이 때문에 재물로서 공양하는 일이 매우 많았다. 이를 피하여 구마라집을 이끌고 떠났다.

구마라집의 나이 아홉 살에 어머니를 따라 신두하(辛頭河)를 건너 계빈국(?賓國)에 이르렀다.

이름난 덕을 지닌[名德] 법사(法師)인 반두달다(槃頭達多)를 만나니, 바로 계빈왕(?賓王)의 사촌 아우이다.

깊고 순수하여 큰 기량(器量)이 있었다. 재주가 있고 총명한데다 아는 것이 넓어 당시의 독보적(獨步的)인 존재였다.

삼장(三藏)과 구부(九部)를 해박하게 익히지 않음이 없었다. 아침부터 낮까지는 손수 천 개의 게송(偈頌)을 쓰고,

낮부터 밤까지는 천 개의 게송을 외웠다. 이름이 여러 나라에 퍼져서 멀거나 가깝거나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구마라집은 계빈국에 이르러 곧 그를 스승의 예로써 존숭하였다.

그에게서 『잡장(雜藏)』·『중아함경(中阿含經)』·『장아함경(長阿含經)』 4백만 글자를 배웠다.

반두달다(槃頭達多)가 매양 구마라집의 신통함과 빼어남을 칭찬하자, 마침내 명성이 왕에게까지 전해졌다.

왕은 즉시 구마라집을 궁중으로 초청하여, 외도(外道)의 논사(論師)들을 모아 놓고 서로 공격하여 힐난(詰難)하게 하였다.

논쟁이 처음 벌어질 때에, 외도(外道)들은 구마라집의 나이가 어리다고 깔보아 말투가 자못 불손(不遜)하였다.

구마라집이 틈을 타 기세를 꺾었다. 외도들이 기가 죽어 부끄러워 말을 못했다. 왕은 더욱 공경하고 특별히 대우하여,

날마다 말린 거위고기 한 쌍(雙), 멥쌀과 밀가루 각각 세 말[斗], 소(?) 여섯 되를 주었다.

이것은 외국(外國)에서는 상등(上等) 공양에 해당한다.

구마라집이 머물던 사찰의 주지(住持)도 이에 비구 다섯 명과 사미(沙彌) 열 명을 보냈다.

비로 쓸고 물 뿌리는 일을 맡겨, 구마라집의 제자같이 하게 하였다. 그를 존경하여 숭배함이 이와 같았다.

나이 열두 살이 되자 그의 어머니는 그를 이끌고 구자국(龜玆國)으로 다시 돌아왔다.

여러 나라에서 높은 벼슬로 그를 초빙하였다. 그러나 구마라집은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당시 그의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월지국(月氏國)의 북쪽 산(山)에 이르렀다. 그 산에는 한 나한(羅漢)이 있었다.

나한은 구마라집을 보자 남달리 여겨 그의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항상 이 사미(沙彌)를 지켜 보호해야만 한다. 나이 서른다섯 살이 될 때까지 계율을 깨뜨리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불법(佛法)을 크게 일으키고 무수한 중생들을 제도하는 것이 우바굴다(優婆掘多)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계율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다면 큰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재주가 밝고 슬기가 찌르는 법사(法師)가 될 뿐일 것이다.”

구마라집이 나아가 사륵국(沙勒國)에 이르러 부처님의 발우를 이마로 모셨다[頂戴].

마음속으로 ‘발우의 형태는 굉장히 큰데 어찌 이리도 가벼울까?’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무거워졌다.

감당할 수가 없어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곧 발우를 내려놓고 말았다.

어머니가 그 까닭을 물었다. “어린 제 마음에 분별(分別)함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발우에 가벼움과 무거움이 깃들었을 따름입니다.”

마침내 사륵국에 일년 간 머물렀다. 그 해 겨울 아비담(阿毘曇)을 암송하였다.

?십문품(十門品)?과 ?수지품(修智品)? 등 여러 품(品)에 대해 묻고 배운 것이 없었지만, 두루 그 절묘함을 통달하였다.

또 『육족론(六足論)』에 관한 모든 물음에 대해서도 막히거나 걸림이 없었다.

사륵국에 희견(喜見)이라는 삼장(三藏) 사문이 있었다. 그는 왕에게 말하였다.

“이 사미(沙彌)를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왕께서는 이 사미를 청하여 최초로 설법의 문을 열도록 하셔야 합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익이 있습니다.

첫째, 온 나라 안의 사문들이 구마라집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힘써 공부하는 것을 보실 것입니다.

둘째, 구자국(龜玆國) 왕은 필시 ‘구마라집이 우리나라 출신(出身)인데, 저들이 구마라집을 존경한다는 것은

곧 우리나라를 존경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반드시 와서 우호(友好)를 교환할 것입니다.”

왕은 곧 그것을 허락하였다. 즉시 큰 모임을 베풀었다.

구마라집을 청하여 높은 자리에 올라 『전법륜경(轉法輪經)』을 강설하도록 하였다.

과연 구자국 왕은 지위가 높은 사신을 파견하여 두터운 우호에 보답하였다.

구마라집은 설법하는 여가에 외도의 경전들을 탐색하였다.

『위타함다론(圍陀含多論, vedasastra)』을 잘 익혀서, 글을 짓고 묻고 답하는 따위의 일에 매우 밝았다.

또 사위타(四圍陀)의 전적들과 5명(明)의 여러 논(論)들을 널리 읽었다.

음양(陰陽)·성산(星算: 天文曆數)까지 모두 다 극진히 연구하여 길흉(吉凶)에도 미묘하게 통달하였다.

그의 예언은 부절(符節)을 합한 것과 같이 딱 들어맞았다.

성품이 소탈하고 활달하여 자잘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으니, 수행자(修行者)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그러나 구마라집은 자연스런 마음으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당시 사거왕자(莎車王子)와 참군왕자(參軍王子),

형제 두 사람이 나라를 버리고 사문(沙門)이 되었다. 형은 자(字)를 수리야발타(須利耶跋陀)라 하고,

아우는 자를 수리야소마(須利耶蘇摩)라고 하였다.

수리야소마는 재주와 기량이 남보다 월등하게 뛰어났다. 오로지 대승(大乘)으로써 교화하였다.

그의 형과 여러 학자들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구마라집도 역시 수리야소마를 존숭하고 받들었다.

가까이 하여 좋아함이 더욱 지극하였다. 수리야소마는 뒤에 구마라집을 위하여 『아뇩달경(阿?達經)』을 설해 주었다.

구마라집은 스승에게서 “음(陰)·계(界)·제입(諸入)은 모두 공(空)하고 무상(無相)하다”는 설법을 들었다.

괴이쩍게 여겨 질문하였다.

“이 경에는 다시 무슨 뜻[義]이 있기에, 모든 현상을 있는 족족 모두 파괴해 버립니까?”

수리야소마는 답하였다. “안(眼) 등의 모든 현상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구마라집은 이미 ‘안근(眼根)이 존재한다’고 집착하였다.

수리야소마는 ‘인과로써 이루어진 것일 뿐 실체는 없다’는 데에 의거하였다.

이 때문에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을 깊이 궁구하여 밝혀[硏?], 서로 주고받는 문답이 오랜 시일 동안 계속되었다.

구마라집이 비로소 이치의 돌아감을 알고는 마침내 오로지 대승 경전을 힘써 공부하였다. 이에 탄식하였다.

“내가 옛날에 소승(小乘)을 배운 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황금을 알지 못한 채

놋쇠를 가지고 가장 훌륭한 것으로 여긴 것과 같구나.”

그러고는 대승에서 중요한 것들을 널리 구하여,

『중론(中論)』·『백론(百論)』 두 논과 『십이문론(十二門論)』 등을 외웠다.

얼마 후 어머니를 따라 나아가 온숙국(溫宿國)에 이르렀다. 바로 구자국의 북쪽 경계였다.

당시 온숙국에는 한 도사(道士)가 있었다. 신묘(神妙)한 말솜씨가 빼어나서 명성을 여러 나라에 떨쳤다.

그는 제 손으로 왕의 큰 북을 치면서 스스로 맹세하여 말하였다.

“논쟁으로 나를 이기는 자가 있으면 내 목을 잘라서 사죄하겠다.”

구마라집이 이른 뒤에 둘이 서로 다른 논쟁을 벌여 따졌다.

도사는 헷갈리고 얼이 빠져 불교에 머리를 조아리고 귀의(歸依)하였다.

이리하여 구마라집의 명성이 파미르 고원 동쪽에 가득하였다. 명예가 황하[중국] 밖에서는 널리 퍼졌다.

구자국왕은 몸소 온숙국까지 가서 구마라집을 맞이하여 구자국으로 돌아왔다.

널리 여러 경들을 강설하니, 사방의 먼 지방에서 존숭하고 우러러 아무도 그를 대항할 자가 없었다.

그 당시 한 왕녀(王女)가 비구니가 되었다. 자(字)를 아갈야말제(阿軻耶末帝)라고 한다.

그 비구니는 많은 경전들을 널리 보았다. 특히 선(禪)의 크나큰 요체를 깊이 알았으며,

이미 2과(果: 사다함과)를 증득했다고 하였다. 그 비구니는 구마라집의 법문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하였다.

이에 다시 큰 모임을 마련하고, 대승 경전의 심오한 이치를 열어줄 것을 청하였다.

구마라집은 이 법회에서 모든 현상이 다 공하여 내가 없음[皆空無我]을 미루어 변론하였다.

음(陰)이나 계(界)는 임시 빌려 쓴 이름이지 실제가 아님[假名非實]을 분별하였다.

당시 모인 청중들이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하여 슬프게 느끼며, 깨달음이 뒤늦었음을 한탄해 마지않았다.

구라마집의 나이 스무 살에 이르자 왕궁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비마라차(卑摩羅叉)에게 『십송률(十誦律)』을 배웠다.

얼마 후 구마라집의 어머니는 구자국을 하직하고 천축국(天竺國)으로 갔다.

구자국왕 백순(白純)에게 말하였다. “당신의 나라는 얼마 안 되어 쇠망(衰亡)할 것입니다.

나는 이 곳을 떠납니다. 천축국에 가서 3과(果: 아나함과)를 증득하도록 해야겠습니다.”

구마라집의 어머니는 이별에 임하여 구마라집에게 말하였다.

“대승 경전의 심오한 가르침을 중국에 널리 떨치도록 하여라.

그것을 동쪽 땅에 전하는 것은 오직 너의 힘에 달려 있을 뿐이다.

다만 너 자신에게만은 아무 이익이 없을 것이니, 어찌 하겠니?”

구마라집은 대답하였다. “부처님의 도리는 중생의 이익(利益)을 위해 자신의 몸은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만약 반드시 불법의 큰 교화[大化]를 널리 퍼뜨려 몽매한 세속을 깨닫게 할 수만 있다면,

아무리 끓는 가마솥에 들어가는 고통을 당한다 하더라도, 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구마라집은 구자국에 체류하여 신사(新寺)에 거주하였다. 후에 절 곁의 오래된 궁중에서 최초로 『방광경(放光經)』을 얻었다. 즉시 책장을 펼쳐서 읽으려고 할 때에, 마라(魔羅, Mara)가 와서 경문(經文)을 가렸으므로 종이만 보일 뿐이었다. 구마라집은 이것이 마라의 소행인 줄 알고는, 서원하는 마음을 더욱 견고히 하자 마라가 사라지고 글자가 나타났다. 인하여 『방광경』을 익히고 암송하였다. 다시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대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어째서 이러한 것을 읽는 것인가?”

구마라집이 대답하였다.

“너는 바로 작은 마라이다. 속히 떠나라. 나의 마음은 대지와 같아 굴러가게 할 수 없다.”

구자국의 신사(新寺)에 머물렀다. 머무른 2년 동안 널리 대승의 경론(經論)들을 외우며, 그 비밀스럽고 심오한 뜻을 꿰뚫었다.

구자왕은 구마라집을 위하여 금사자(金師子)의 법좌(法座)를 만들었다. 중국의 비단으로 자리를 깔아, 구마라집으로 하여금 법좌에 올라 설법하도록 하였다. 구마라집이 말하였다.

“저의 스승님도 대승을 깨치지 못했습니다. 제가 직접 찾아가 스승님께 교화를 하고자 합니다. 이 곳에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스승인 반두달다(槃頭達多)가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구자국에 이르렀다.

왕이 말하였다.

“대사께서는 어찌 이리도 먼 길을 방문하셨습니까?”

반두달다가 대답하였다.

“첫째는 제자 구마라집의 깨달음이 범상(凡常)치 않다고 들었습니다. 둘째는 대왕께서 불도(佛道)를 널리 편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고생과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 신령스런 나라로 달려온 것입니다.”

구마라집은 스승의 방문으로 인해 본디부터 품던 회포를 풀 수 있게 된 것을 매우 기뻐하였다. 『덕녀문경(德女問經)』을 설법하여 모든 현상이 대부분 인연(因緣)·공(空)·가(假) 임을 밝혔다. 예전에 스승과 함께 모두 믿지 못하던 것이기 때문에 우선 그것을 강설한 것이다.

스승은 구마라집에게 말하였다.

“너는 대승에 대하여 무슨 특별한 현상을 보았기에 그렇게도 숭상하려고 하는가?”

구마라집이 대답하였다.

“대승은 심오하고도 맑아, 모든 존재하는 현상이 모두가 공(空)하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러나 소승은 한쪽으로 지나치게 치우쳐서 구분하여, 여러 가지 빠뜨려 잃어버린 것이 많습니다.”

스승이 말하였다.

“네가 말한 ‘모든 것은 다 공하다[一切皆空]’는 것은 심히 두려워할 만하구나. 어떻게 유법(有法)을 버리고 공(空)을 좋아할 수 있단 말이냐. 꼭 그 옛날 미치광이와 같구나.

그 미치광이가 실을 잣는 이에게, 실을 잣되 최대한으로 가늘면서도 보기 좋게 해 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실 잣는 이가 정성을 기울여 먼지처럼 가늘게 실을 자았다. 미치광이는 그것도 오히려 굵다고 원망하였다.

실 잣는 이는 크게 노하여 허공을 가리키며 ‘이것이 바로 가는 실입니다.’라고 하니, 미치광이는 ‘그렇다면 왜 보이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실 잣는 이는 ‘이 실은 너무 가늘어 우리 중의 솜씨 좋은 장인(匠人)조차 볼 수 없습니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미치광이는 크게 기뻐하였다. 보이지 않는 그 실로 베를 짜 달라고 베 짜는 이에게 부탁하였다. 베 짜는 이도 역시 실 잣는 이를 그대로 흉내내었다. 그들은 모두 많은 상(賞)을 받았지만, 그러나 실상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너의 현상이 공하다는 것도 역시 이것과 같구나.”

그러나 구마라집은 계속해서 비슷한 것끼리 연관지어[連類] 진술하였다. 서로 문답을 주고받은 지 한달 남짓 지나자, 스승이 마침내 믿고 받아들였다. 스승은 감탄하여 말하였다.

” ‘스승이 미처 도달하지 못한 것을 도리어 제자가 그 뜻을 열어 준다’고 하는 것을 바로 여기에서 증험하는구나.”

이에 스승은 구마라집에게 스승의 예를 올리고 말하였다.

“화상(和上)은 바로 나의 대승의 스승이고, 나는 화상의 소승의 스승이오.”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구마라집의 신통함과 빼어남에 엎드려 복종했다. 매년 강설(講說)할 때에는 왕들이 법좌(法座) 옆에 꿇어 엎드렸다. 구마라집으로 하여금 그 위를 밟고 오르게 하니, 그를 소중히 대우함이 이와 같았다.

이미 구마라집의 도는 서역에 퍼지고, 그의 명성은 동쪽 황하에까지 미쳤다. 그 당시 부견(符堅)이 관중(關中)에서 외람되이 천자라고 일컬었다[僭稱]. 외국(外國)의 전부왕(前部王)과 구자왕(龜玆王)의 동생이 모두 와서 부견에게 조회하였다. 부견이 두 왕을 알현하였다.

이 두 왕이 부견에게 진언하였다.

“서역에는 진기한 물건들이 많이 산출됩니다. 청컨대 군사를 이끌고 가 평정하여 속국이 되기를 요구하십시오.”

부견의 건원(建元) 13년(377) 정축년(丁丑年) 정월에 태사(太史)가 아뢰었다.

“어떤 별이 외국의 분야(分野)에 나타났습니다. 덕이 높은 슬기로운 사람이 우리나라로 들어와 보좌할 것입니다.”

부견이 말하였다.

“짐이 들으니, 서역에는 구마라집이 있고, 양양(襄陽)에는 사문 석도안(釋道安)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이들이 아니겠는가?”

즉시 사신을 파견하여 그들을 찾았다.

17년 2월에, 선선왕(?善王)과 전부왕(前部王) 등이 또다시 부견에게 군사를 청하여 서역을 정벌하자고 달래었다.

건원 18년(382) 9월, 부견은 효기장군(驍騎將軍) 여광(呂光)과 능강장군(陵江將軍) 강비(姜飛)를 파견하였다. 전부왕(前部王)과 거사왕(車師王) 등을 거느리고 군사 7만 명을 이끌어서 서쪽으로 갔다. 구자국(龜玆國)과 언기국(焉耆國) 등 여러 나라를 정벌하였다.

출발에 임하여 부견은 여광을 건장궁(建章宮)에서 전별(餞別)하면서 여광에게 말하였다.

“대저 제왕(帝王)은 천명(天命)에 응하여 다스리고 창생(蒼生)을 자식처럼 사랑하는 것[子愛]으로써 근본을 삼는다. 어찌 그 땅을 탐하여 정벌하는 것이겠는가. 바로 도의를 품는 사람[懷道] 때문에 정벌하는 것이다.

짐은 들으니, 서역에는 구마라집이라는 이가 있어 불법을 깊이 이해하고 음양(陰陽)을 익숙히 잘 알아 후학들의 으뜸이 된다고 한다. 짐이 깊이 생각하건대 어질고 밝은 이들은 나라의 큰 보배이다. 만약 구자국을 정복하거든 곧바로 역말을 급히 달려 구마라집을 후송하라.”

여광의 군대가 아직 이르지 않았을 때에 구마라집은 구자왕 백순에게 진언했다.

“구자국의 국운은 쇠하였습니다. 반드시 강한 적이 나타날 것입니다. 해 뜨는 곳의 사람들이 동방으로부터 오면 삼가 공손히 받들어야 합니다. 그들의 칼날에 대항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백순은 구마라집의 진언에 따르지 않고 전쟁을 하였다. 마침내 여광이 구자국을 격파하여 백순을 죽이고, 백순의 동생 백진(白震)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여광은 구마라집을 사로잡은 뒤, 아직 그의 지혜와 국량을 측량하지 못했다. 다만 그의 나이가 어린 것만 보고 곧 평범한 사람으로 여겼다. 그를 희롱하여 강제로 구자국의 왕녀를 아내 삼도록 하였다. 구마라집은 버티며 수락하지 않았으나, 사양하면 할수록 더욱더 괴롭혔다.

여광이 말하였다.

“도사의 지조라고 해봤자 당신 아버지보다 나을 것이 없지 않은가. 어찌 그리도 한사코 사양하는 것인가?”

구마라집에게 독한 술을 마시게 하고, 여자와 함께 밀실(密室)에 가둬 버렸다. 구마라집은 핍박을 당하는 것이 이미 지극하므로 마침내 그 절개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여광은 또 구마라집을 소에 태우기도 하고, 사나운 말에 태워 떨어뜨리기도 하였다. 구마라집은 항상 인욕(忍辱)의 마음을 품어 일찍이 안색이 달라지는 일조차 없었다. 여광은 부끄러워 그만두었다.

여광이 본국으로 귀환하는 도중에 군사를 산 밑에 주둔시켰다. 장졸들이 이미 휴식하자, 구마라집이 진언하였다.

“이 곳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낭패(狼狽)를 당할 것입니다. 군사를 언덕 위로 이동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여광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밤이 되자 과연 큰비가 내려 갑자기 홍수가 났다. 수심이 몇 길이나 되고, 죽은 사람이 수천 명이었다. 여광은 그제야 그를 비밀스럽고 남다르게 여겼다.

구마라집은 여광에게 진언하였다.

“이 곳은 흉망(凶亡)한 땅이므로 모름지기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돌아올 운수(運數)를 미루어 짐작하건대 마땅히 속히 돌아가야만 합니다. 중도에 반드시 머무를 만한 복된 땅이 있을 것입니다.”

여광은 구마라집의 진언을 따랐다.

양주(凉州)에 이르러 부견이 요장(姚?)에게 시해 당했다는 것을 들었다. 여광의 삼군(三軍)은 상복을 입고 양주성 남쪽에서 크게 곡하였다. 이리하여 여광은 관외(關外)에서 참칭(僭稱)하고, 연호를 태안(太安)이라 칭하였다.

태안(太安) 원년(385) 정월, 고장(姑臧)에 큰바람이 불었다.

구마라집이 말하였다.

“상서롭지 못한 바람입니다. 반드시 간특한 반란(叛亂)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평정될 것입니다.”

갑자기 양겸(梁謙)과 팽황(彭晃)이 잇따라 반란을 일으켰으나, 얼마 안 있어 모두 죽어 사라졌다.

여광의 용비(龍飛) 2년(396)에, 장액(張掖) 임송(臨松)의 노수호(盧水湖)에서 저거남성(沮渠男成)과 사촌아우 저거몽손(沮渠蒙遜)이 모반하여, 건강 태수(建康太守) 단업(段業)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다. 여광은 서자(庶子)인 진주자사(秦州刺史) 태원공(太原公) 여찬(呂纂)을 파견하여 군사 5만 명을 이끌고 그들을 토벌하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논하였다.

“단업(段業) 등은 까마귀떼처럼 규율이 없고, 여찬에게는 위세와 명망이 있으므로, 형세로 보아 반드시 이길 것이다.”

여광이 구마라집에게 상의하니, 구마라집이 말하였다.

“이번 출행을 관찰해 보건대 아직 그 이로움을 발견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이미 여찬은 합리(合梨)에서 크게 패하였다. 갑자기 또 곽형(郭馨)이 난리를 일으켰다. 여찬은 대군(大軍)을 내버리고 몇몇 군사들만을 데리고 귀환하다가, 다시 곽형에게 패배 당하였다. 겨우 자신의 몸만 벗어날 수 있었다.

여광의 중서감(中書監) 장자(張資)는 문필(文筆)이 있고 온화하며 아담하였다. 여광은 그를 매우 소중히 여겼다. 장자가 병이 들자, 여광은 널리 병을 낫게 할 훌륭한 의사를 구하였다. 외국의 도인 라차(羅叉)가 말하였다.

“장자(張資)의 병을 낫게 할 수 있습니다.”

여광은 기뻐하여 그에게 매우 많은 금품을 하사하였다.

구마라집은 라차가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았다. 장자에게 고하여 말하였다.

“라차의 병은 다스릴 수 없습니다. 한갓 번거롭게 재물을 낭비할 뿐입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은 알 수 없는 것이기는 하나, 시험해 볼 수 있습니다.”

구마라집은 오색실로 새끼를 만들어 매듭을 짓고 태워서 잿가루를 물 속에 던졌다.

“만약 재가 물에 떠올라도 도로 새끼 모양이라면 병은 나을 수 없습니다.”

잠시 후 재가 모여 물 위에 떠올랐다. 원래의 새끼 형태가 되었다. 이윽고 라차의 치료는 효험이 없이 며칠이 지나지 않아 장자는 세상을 떠났다. 얼마 후 여광도 죽었다[卒].

여광의 아들 여소(呂紹)가 왕위를 이었다. 수일이 지나자 여광의 서자 여찬이 여소를 시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어 연호를 함녕(咸寧)이라 일컬었다.

함녕 2년(400), 돼지가 머리 셋 달린 새끼를 낳았다. 용이 동쪽 곁채의 우물 속에서 나와 대전(大殿) 앞에 몸을 서렸으나, 다음 날 아침이 되자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여찬은 이것을 아름다운 상서로 여겨 대전을 용상전(龍翔殿)이라 불렀다. 얼마 후 또 검은 용이 당양(當陽)의 구궁문(九宮門)에서 승천했다. 여찬은 이 구궁문을 용흥문(龍興門)이라 개칭하였다.

구마라집이 상주하여 아뢰었다.

“요즈음 물 속에 잠겨 있는 용[潛龍]이 출몰하고 돼지도 괴이한 일을 보입니다. 용은 음한 생물로서 드나드는 일정한 때가[出入有時]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자주 나타나는 것은 재앙이 있을 징조입니다. 반드시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모반하는 변괴가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사욕을 극복하고[克己]덕을 닦아[修德], 하늘이 보여주는 타이름에 보답하도록 해야 합니다.”

여찬은 구마라집의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전에 여찬이 구마라집과 바둑을 두었다. 여찬이 구마라집의 바둑돌을 희롱하며 죽이고 말하였다.

“오랑캐 놈[胡奴]의 머리를 벨 것이다.”

구마라집은 말하였다.

“오랑캐 놈의 머리는 베지 못할 것입니다. 오랑캐 놈이야말로 사람의 머리를 벨 것입니다.”

이 구마라집의 말에는 의미가 담겨 있으나, 여찬(呂纂)은 끝내 깨닫지 못하였다.

여광(呂光)의 아우 여보(呂保)에게는 여초(如超)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다. 여초(如超)의 어렸을 적의 이름이 호노(胡奴)였다. 뒤에 과연 여찬(呂纂)의 목을 베고, 자기 형 여륭(呂隆)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당시 사람들이 비로소 구마라집의 예언을 증험하였다.

구마라집이 양주(凉州)에 체류한 지 수 년이 되었다. 여광(呂光) 부자가 도를 널리 펴지 않는 까닭에,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쌓아 두고도 선양하고 교화할 방법[弘道]이 없었다. 부견(?堅)은 이미 세상을 떠나 구마라집과 끝내 서로 만날 수가 없었다.

요장(姚?)이 관중(關中)을 참칭하고 소유하였다. 그도 역시 구마라집의 높은 명성을 듣고, 마음을 비워서 오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여러 여씨들은 구마라집이 지혜로운 계책과 많은 지식을 가지고 요씨들을 위해 도모할까 두려워하여, 동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요장(姚?)이 죽고 아들 요흥(姚興)이 자리를 잇자,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정성을 다해 요청하였다. 요흥(姚興)의 홍시(弘始) 3년(401) 3월, 궁중의 광정(廣庭)에 연리지(連理枝)가 나고, 소요원(逍遙園)의 파가 변하여 난초가 되었다. 이것을 아름다운 상서로 여겨 슬기로운 사람이 들어올 것이라고 하였다.

5월에 이르러 요흥(姚興)이 농서공(?西公) 요석덕(姚碩德)을 파견하여 서쪽으로 여륭(呂隆)을 정벌하게 하였다. 여륭(呂隆)의 군대를 크게 깨뜨리자, 9월에 여륭(呂隆)이 표문을 올리고 항복하였다. 비로소 구마라집을 맞이하여 관중(關中)에 들어올 수 있었다. 그 해 12월 20일에 장안(長安)에 도착하였다.

요흥(姚興)이 국사(國師)의 예로써 대우하여 구마라집은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마주 대하여 이야기하노라면[晤言] 머무르는 것이 오래 걸려 하루 해가 지나갔다. 미묘한 것을 연구하여 극진한 데까지 나아가니, 한 해를 다 보내도록 싫증나는 줄 몰랐다.

불법이 동방에 전해진 것은 후한 명제(明帝) 때에 비롯되었다. 그로부터 위(魏)와 진(晋) 시대를 경과하면서 경론(經論)이 점점 많아졌다. 그러나 지겸(支謙)과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해 낸 경론들은 대부분 문자(文字)에 막혀서, 뜻을 도가의 경전에서 빌려온 것이 대부분이었다. 요흥(姚興)은 어려서부터 불법승 삼보(三寶)를 공경하여, 경론을 결집하리라 날카롭게 뜻을 세웠다.

구마라집이 장안(長安)에 이른 뒤에 요흥(姚興)은 그에게 청하였다. 서명각(西明閣)과 소요원(逍遙園)에 들어오게 하여 여러 경전들을 번역해 냈다. 구마라집은 이미 경전들을 거의 다 암송하고, 경문의 뜻에 대해서도 연구하여 극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더욱이 중국말에도 빼어나 말소리도 유창하였다.

이전에 번역한 경전들을 살펴보니, 경문의 뜻이 지나치게 잘못된 곳이 많았다. 이전에 먼저 번역한 경전들이 바른 의미를 잃은 이유는 범본(梵本)과 대조하여 번역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요흥(姚興)은 사문 승략(僧?)·승천(僧遷)·법흠(法欽)·도류(道流)·도항(道恒)·도표(道標)·승예(僧叡)·승조(僧肇) 등 8백여 명을 시켜, 구마라집에게 뜻을 묻고 배우게 하여 다시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을 번역하였다.

구마라집은 범본(梵本)을 가지고, 요흥(姚興)은 이전에 번역한 경전을 들고, 서로 대조하고 교정하였다. 옛 번역을 새로운 번역어로 바꿔 놓으니, 뜻이 모두 원만하게 소통하였다. 대중들이 모두 마음으로 흡족하여 기뻐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요흥(姚興)은 불도(佛道)가 깊고 오묘하며, 그 착함을 실천하여 삼계의 고통을 벗어나는 좋은 나루이자, 세상을 다스리는 큰 법칙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요흥(姚興)은 뜻을 9경(經)에 의탁하고, 마음은 12부(部)에 노닐었다. 『통삼세론(通三世論)』을 지어 인과(因果)의 가르침을 밝혔다.

왕공(王公) 이하 모두가 그의 풍모를 흠모하고 찬탄하였다. 대장군(大將軍) 상산공(常山公) 요현(姚顯)과 좌군장군(左軍將軍) 안성후(安城侯) 요숭(姚嵩) 등은 모두 인연(因緣)과 업(業)을 독실하게 믿었다. 여러 번 구마라집을 장안 대사(長安大寺)로 청하여 새로 번역한 경전을 강설하였다.

계속해서 『소품반야경(小品般若經)』·『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십주경(十住經)』·『법화경(法華經)』·『유마힐경(維摩詰經)』·『사익경(思益經)』·『수능엄경(首楞嚴經)』·『지세경(持世經)』·『불장경(佛藏經)』·『보살장경(菩薩藏經)』·『유교경(遺敎經)』·『보리경(菩提經)』·『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보살가색욕경(菩薩呵色欲經)』·『자재왕경(自在王經)』·『십이인연관경(十二因緣觀經)』·『무량수경(無量壽經)』·『신현겁경(新賢劫經)』·『선경(禪經)』·『선법요(禪法要)』·『선법요해(禪法要解)』·『미륵성불경(彌勒成佛經)』·『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십송률(十訟律)』·『십송비구계본(十訟比丘戒本)』·『보살계본(菩薩戒本)』·『대지도론(大智度論)』·『성실론(成實論)』·『십주론(十住論)』·『중론(中論)』·『백론(百論)』·『십이문론(十二門論)』 등 3백 여 권을 번역해냈다. 어느 것이나 모두 신묘한 근원을 환하게 드러내고, 그윽한 이치를 발휘하였다. 당시 사방에서 교리를 공부하는 이[義學之士]들이 만 리를 멀다 하지 않고 모여들었다.

구마라집의 성대한 업적의 위대성은 오늘날까지도 모두 다 우러러보는 바이다. 용광사(龍光寺)의 석도생(釋道生)은 지혜로운 앎이 미묘한 경지에 들어가고, 현묘한 의미를 문자 밖까지 이끌어 내 놓을 정도의 인물이다. 그러나 항상 자신의 언어가 본뜻을 어그러뜨릴까 염려하여, 관중(關中)에 들어가 구마라집에게 해결해 주기를 청하였다.

여산(廬山)의 석혜원(釋慧遠)은 많은 경전들을 배워 꿰뚫었다. 석가 부처님께서 남기신 가르침을 펼치는 중요한 임무를 맡은 불교계의 동량과 같은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당시는 성인께서 가신 지가 아득히 멀고 오래되어, 의문스러운 내용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편지를 보내 구마라집에게 자문을 구한 내용이 ?혜원전(慧遠傳)?에 보인다.

과거에 사문 승예(僧叡)는 재능과 식견이 높고 밝았다. 항상 구마라집을 따라다니며 옮겨 베끼기를 담당하였다. 구마라집은 매양 승예(僧叡)를 위하여 서방의 말투를 논하고, 범어와 한자(漢字)의 같고 다름을 살피고 분별하여 말하였다.

“천축국의 풍속은 문장의 체제를 대단히 중시한다. 그 오음(五音)의 운율(韻律)이 현악기와 어울리듯이, 문체와 운율도 아름다워야 한다. 국왕을 알현할 때에는 국왕의 덕을 찬미하는 송(頌)이 있다. 부처님을 뵙는 의식은 부처님의 덕을 노래로 찬탄하는 것을 귀히 여긴다. 경전 속의 게송들은 모두 이러한 형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범문(梵文)을 중국어로 바꾸면 그 아름다운 문채(文彩)를 잃는 것이다. 아무리 큰 뜻을 터득하더라도 문장의 양식이 아주 동떨어지기 때문에 마치 밥을 씹어서 남에게 주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다만 맛을 잃어버릴 뿐만이 아니라, 남으로 하여금 구역질이 나게 하는 것이다.”

구마라집은 예전에 사문 법화(法和)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어준 적이 있었다.

마음 산(山)에서 밝은 덕을 길러
그 향내 일만 유연(由延)까지 퍼지고
오동나무에 외로이 깃든 슬픈 난새
청아한 울음소리 구천(九天)에 사무치네.



心山育明德 流薰萬由延
哀鸞孤桐上 淸音徹九天

커다란 게송 10게를 지었으니, 게송에서의 글의 비유가 모두 이러했다.

구마라집은 평소 대승(大乘)을 좋아하여, 대승(大乘)을 널리 펴는 데에 뜻을 두었다. 항상 한탄하였다.

“내가 붓을 들어 대승아비담(大乘阿毘曇)을 짓는다면 가전연자(迦?延子)에 비할 바가 아니겠지만, 지금 이 중국 땅에는 학식이 깊은 사람이 없어 여기에서 날개가 부러졌으니 무엇을 더 논하겠는가?”

이와 같이 한탄하면서 쓸쓸히 그만두었다. 오직 요흥(姚興)을 위하여 『실상론(實相論)』 두 권을 지었다. 아울러 『유마경(維摩經)』에 주를 내었다. 말을 내어 문장을 이룬 것[出言成章]은 깎아 내어 고칠 것이 없었다. 문장의 비유는 완곡하고 간명(簡明)하여, 그윽하고 깊숙하지 않음이 없었다.

구마라집의 사람됨은 맑은 정신이 밝고 투철(透徹)하며, 남에게 굽히지 않는 성품이 남달랐다. 또한 임기응변하여 깨달아 아는 것은 무리 가운데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돈독한 성격으로 인자하고 후덕하였다. 차별 없이 사람들을 두루 사랑하였다. 자신을 비우고 사람들을 잘 가르치며 종일토록 게으름이 없었다.

진나라 임금 요흥이 항상 구마라집에게 말하였다.

“대사의 총명과 뛰어난 깨달음은 천하에 둘도 없습니다. 만일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나시어 법의 씨앗이 될 후사가 없어서야 어찌 되겠습니까?”

그리하여 기녀(妓女) 열 명을 억지로 받아들이게 하였다.

이 이후로부터는 승방(僧坊)에 머물지 않고 따로 관사를 짓고 살았다. 모든 것을 풍부함이 넘칠 정도로 공급받았다. 매양 강설(講說)할 때에는 먼저 스스로 설하였다.

“비유하면 더러운 진흙 속에서 연꽃이 피는 것과 같다. 오직 연꽃만을 취하고 더러운 진흙은 취하지 말라.”

예전에 구마라집이 구자국(龜玆國)에 있을 때, 비마라차(卑摩羅叉) 율사(律師)에게 계율을 배웠다. 뒤에 비마라차가 관중(關中)에 들어왔다. 구마라집은 그가 왔다는 것을 듣고 기쁘게 맞이하여 스승을 공경하는 예를 극진히 하였다. 비마라차는 구마라집이 핍박당한 사실(파계한 사실)을 아직 몰랐다.

어느 날, 구마라집에게 물었다.

“그대는 중국 땅에 지중한 인연이 있네. 법을 전수 받은 제자는 몇 명이나 되는가?”

구마라집은 대답하였다.

“중국 땅에는 아직 경장과 율장이 갖추어지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경과 여러 논(論)들은 대부분 제가 번역해냈습니다. 3천 명의 학도들이 저에게 법을 배웁니다. 그렇지만 저는 업장(業障)에 깊이 얽매여 있어서 스승으로서의 존경은 받지 못합니다.”

또 비구 배도(杯渡)가 팽성(彭城)에 있었다. 구마라집이 장안(長安)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곧 탄식하였다.

“그대와 내가 장난처럼 이별한 지 어언 3백여 년이다. 그렇건만 이 생에서는 아득히 기약이 없구려. 더디지만 내생에서나 만날 수 있을 뿐이라오.”

구마라집이 아직 임종하기 전 어느 날, 약간 온몸이 상쾌하지 못함을 깨달았다. 이에 곧 입으로 세 번 신주(神呪)를 외웠다. 게다가 외국 제자들에게도 이 주문을 외우게 하여, 병을 나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주문의 효력이 미치지 않아, 한층 더 위독해졌음을 알았다.

이에 구마라집은 병을 참으면서 대중 승려들과 이별을 고하며 말하였다.

“불법을 인연으로 서로 만났거늘 아직 내 뜻을 다 펴지 못하였다. 이제 세상을 뒤로 하려니, 이 비통함을 무슨 말로 다하겠는가. 나는 어둡고 둔한 사람인데도 어쩌다 잘못 역경을 맡았다. 모두 3백여 권의 경과 논을 역출하였다.

오직 『십송률(十誦律)』 한 부만은 미처 번잡한 것을 깎아내어 다듬지 못하 였다. 『십송률』의 근본 뜻을 보존한다면 반드시 크게 어긋나는 곳은 없을 것이다. 아무쪼록 번역한 모든 경전들이 후세까지 흘러가서 다 같이 널리 퍼지기를 발원한다. 지금 대중 앞에서 성실하게 맹서한다. 만약 내가 번역하여 옮긴 것에 잘못이 없다면, 화장한 후에도 내 혀만은 불에 타지 않을 것이다.”

위진(僞秦: 前秦) 홍시(弘始) 11년(409) 8월 20일 장안(長安)에서 돌아가셨다. 이 해는 바로 진(晋)나라 의희(義熙) 5년(409)이다.

곧바로 소요원(遡遙園)에서 외국의 의식에 따라 화장하였다. 장작이 다 타고 시신이 다 타 없어졌건만 오직 그의 혀만은 재가 되지 않았다[焚身之後 舌不?爛]. 후에 어떤 외국 사문이 와서 말하였다.

“구마라집이 암송한 것 중 열에 하나도 번역해 내지 못했다.”

과거 구마라집은 일명 구마라기바(鳩摩羅耆婆)였다. 외국의 이름짓는 법은 대부분 부모의 이름을 근본으로 삼는다. 구마라집의 아버지는 구마염(鳩摩炎)이었고, 어머니의 자(字)는 기바(耆婆)였기 때문에 둘을 취하여 이름을 지은 것이다.

그러나 구마라집이 죽은 때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같지 않다. 혹자는 홍시(弘始) 7년(405)이라 하기도 하고, 혹자는 8년, 혹자는 11년이라고도 한다. 고찰해 보건대, 칠(七)자 와 십일(十一)자는 혹 글자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경록(譯經錄)』의 전(傳) 속에도 1년으로 된 것이 있는 것을 보면, 이 세 가지 주장의 어느 쪽에도 부화뇌동(附和雷同)할까 두려워 딱히 바로잡을 도리가 없다.

02) 불야다라(弗若多羅)

불야다라는 중국말로 공덕화(功德華)라 하며 계빈국(?賓國)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계율을 잘 지키는 행실로 칭찬 받았다. 두루 삼장(三藏)에 통달하였다.

특히 『십송률(十誦律)』 부(部)1)에 정통하여 외국에서 으뜸가는 스승이 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이르기를 “이미 성인의 경지에 올라갔다”고 하였다.

위진(僞秦)의 홍시(弘始) 연간(399~416)에 지팡이를 짚고 관중(關中)에 들어왔다. 진나라 임금 요홍(姚泓)은 으뜸가는 손님의 예로 대우하였다. 구마라집도 역시 그 계행의 본보기에 절하며 두터이 존경하였다. 이에 앞서 비록 경법(經法)이 전해지기는 했지만 율장(律藏)은 아직 널리 퍼지지 않았다.

이미 불야다라가 이 율부에 빼어나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모두 다 사모하였다. 위진(僞秦) 홍시 6년(404) 10월 17일에 장안(長安)의 중사(中寺)에서 교리를 공부하는 승려 수백여 명을 모아 놓고 불야다라를 청하여 맞이했다.

불야다라가 『십송률』의 범본을 외우고, 구마라집은 이것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3분의 2를 끝냈을 때 불야다라가 병에 걸려 갑작스러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큰 일이 미처 성취되지 않았을 때 뛰어난 분이 돌아가셨으므로, 대중들이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깊이가 보통의 아픔을 넘어섰다.

03) 담마류지(曇摩流支)

담마류지는 중국말로 법락(法樂)이라 하며 서역(西域) 사람이다. 집을 버리고 불도에 들어가서는 오로지 율장(律藏)으로 명성을 날렸다.

홍시 7년(405) 가을에 관중(關中)에 도착하였다.

과거 불야다라가 『십송률』을 외워 내다가 끝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여산의 석혜원은 달마류지가 비니(毘尼: 율장)에 빼어나다는 말을 듣고 율부를 완성하기를 희망하였다. 곧 그에게 편지를 띄워 교유(交遊)를 통하였다.

“불교가 흥기하여 먼저 그대의 나라에서 행해지다가 갈래가 나뉘어져 흘러들어온 이후로 4백여 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문의 계율에 있어서는 빠진 것이 대단히 많습니다. 지난번 서역의 도사 불야다라는 계빈국 사람입니다.

그는 『십송률』의 범본을 외웠습니다. 구마라집 법사는 뛰어난 재주와 박학한 지식을 가지고 이것을 옮겨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십송률』의 글이 막 절반을 넘기 시작할 때 불야다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큰일을 중도에 그쳐서 완성할 수 없자, 개탄스럽고 한스러움이 참으로 깊었습니다.

이제 ‘어진 분께서 이 경을 가지고 몸소 이르렀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만날 수 있게 된 것을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운수가 이른 것입니다. 어찌 사람이 일삼아서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스님께서는 중생을 위하여 도를 널리 펴고자 때에 감응하여 움직이셨으니, 도를 묻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인색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계율을 배우는 무리들을 위하여 이 경본을 완성시켜서, 청정한 행을 열어 보여 그들의 눈과 귀를 씻어주시고, 처음 번뇌의 물결을 건너려는 이들로 하여금 위없는 나루를 헤매지 않게 해주십시오. 만약 그렇게 하신다면 수승(殊勝)한 업에 참여하기를 희망하는 자들이 해와 달보다 더욱 밝아질 것입니다. 이것은 곧 은혜가 깊고 덕이 두터운 것이니, 사람이나 신(神)이나 다 함께 감동할 것입니다.

부디 자비를 드리우시어, 제가 이 편지를 보내는 뜻을 천에 하나나 만에 둘이라도 어기지 않으셔서, 여러 도인들이 아뢰는 뜻을 살펴 주기를 원합니다.”

담마류지는 혜원의 편지를 받은 데다 요흥(姚泓)의 도타운 요청을 받자, 구마라집과 함께 『십송률』을 함께 번역하여 모두 끝마쳤다.

자세하게 연구하고 엄격하게 고증하여 계율의 조목을 자세히 정했다. 구마라집은 문장이 번잡하여 훌륭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구마라집이 입적하여, 깎아 내어 다듬을 수 없었다.

담마류지는 장안의 대사(大寺)에 머물렀다. 혜관(慧觀)이 강남의 서울인 건강(建康)으로 오도록 초청하였다. 담마류지는 말하였다.

“그 땅에는 그럴 만한 사람도 있고, 그럴 만한 법도 있어서, 충분히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마땅히 계율의 가르침이 없는 곳으로 다시 가야 합니다.”

이에 다른 지방으로 돌아다니면서 교화하였다. 그가 돌아가신 곳을 알지 못한다. 혹자는 양주[凉土]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하나 자세하지 않다.

04) 비마라차(卑摩羅叉)

비마라차는 중국말로 무구안(無垢眼)이라 하며 계빈국 사람이다. 침착하고 조용하며 뜻을 이루고자 하는 힘이 있었다. 이 때문에 출가해서 도를 실천하여 괴로움 속에서도 절개를 지켜 힘써 이루었다. 그는 전에 구자국에 있으면서 율장을 널리 선양하였다. 사방의 학자들이 다투어 와서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당시 구마라집도 역시 거기에 참여하였다.

구자국이 함락당하자 비마라차는 그 곳을 피하였다. 얼마 후 구마라집이 장안에 있으면서 크게 경장(經藏)을 널리 알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한 비마라차 자신도 비니(毘尼: 율장)의 수승한 품(品: 가르침의 내용)을 동쪽 나라에 두루 미치게 하고 싶었다.

이리하여 지팡이 짚고 고비 사막을 건너 위험을 무릅쓰고 동쪽으로 들어왔다. 위진 홍시 8년(406)에 관중에 도착하였다. 구마라집은 스승의 예로써 공경하여 대접하고, 비마라차도 먼 땅에서 제자와 만나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

구마라집이 세상을 떠나자 비마라차는 관동(關東) 지역으로 떠났다. 수춘(壽春)에 체류하여 석간사(石澗寺)에 머물렀다.

율학을 배우는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성대하게 비니(毘尼)를 떨쳤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십송률』 본(本)은 58권이다. 그 최후의 한 게송[訟]은 ‘명수계법 급제성선법사(明受戒法 及諸成善法事)’이다. 그 뜻의 요점을 좇아 줄여서 선송(善誦)이라 이름한다. 비마라차는 그것을 석간사에 가지고 갔다. 선송을 더 늘려서 58권을 61권으로 만들고, 최후의 한 게송의 이름을 고쳐서 ‘비니송(毘尼誦)’이라 하였다. 지금까지도 선송과 비니송이라는 두 가지 이름이 그대로 쓰인다.

그 후 남쪽 강릉(江陵)으로 가서 신사(辛寺)에서 하안거를 지내면서 『십송률』을 개강하였다. 비마라차는 이미 중국말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더 이상 할래야 할 수 없는, 무위(無爲)의 이 신묘한 판본이 당시에 크게 유행하였다. 문장을 분석하고 이치를 구하는 자들이 숲처럼 모여들었다. 계율의 조목에 밝고 금계(禁戒)를 아는 자의 수도 아주 풍성해졌다. 율장이 크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비마라차의 힘이다.

도량사(道場寺)의 혜관(慧觀)이 깊이 종지(宗旨)를 총괄하여, 비마라차가 제정한 내금(內禁: 계율)의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을 기록하고 편찬해서, 2권을 만들어 서울로 올려 보냈다. 비구와 비구니들이 읽고 익히면서 다투어 서로 옮겨 베꼈다.

당시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속어로 말하였다.

“비마라차의 촌스러운 말을 혜관이 재치 있게 기록하니, 온 장안 사람들이 베껴 적느라 종이값이 구슬같이 귀해졌다.”

오늘날까지도 세상에 행하여 후학들의 법이 되었다.

비마라차는 덕을 기르고 조용한 것을 좋아하여, 시끄러움을 버리고 세속을 떠났다. 그 해 겨울 다시 수춘의 석간사(石澗寺)로 되돌아가 그 절에서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는 77세이다.

비마라차는 눈이 파래서 당시 사람들이 푸른 눈[靑眼]의 율사라고 하였다.

05) 불타야사(佛陀耶舍)

불타야사는 중국말로 각명(覺明)이라 하며 계빈국 사람이다. 바라문 종족으로서 대대로 외도를 섬겼다. 한 사문이 그의 집에 와 걸식하였다. 불타야사의 아버지는 성을 내며 사람들을 시켜 사문을 구타하였다.

갑자기 아버지의 수족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에 무당에게 물었더니, 대답하였다.

“어진 분을 범하는 죄에 걸려서 귀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즉시 이 사문을 청하여 정성을 다하여 참회하니, 며칠 후 문득 병이 나았다. 이로 인하여 불타야사를 출가시켜 그 사문의 제자가 되게 하였다.

당시 불타야사의 나이는 13세이다. 항상 스승을 따라 멀리 행각하였다. 어느 날 광야에서 호랑이를 만난 적이 있었다. 스승은 빨리 달아나 피하려고 하였다. 불타야사는 말하였다.

“이 호랑이는 이미 배가 부릅니다. 필시 사람을 건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잠시 후 호랑이는 사라졌다.

앞으로 가다 보니 과연 호랑이가 먹다 남긴 것이 보였다. 스승은 속으로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15세가 되어 경을 외우자 하루에 2, 3만 글자를 암송하였다. 그러나 거주하는 사찰에서는 항상 밖으로 탁발(托鉢: 걸식)을 나갔다. 이 때문에 읽고 외우는 일을 중지하였다. 그러자 한 나한이 그의 총명함과 민첩함을 소중히 여겨, 항상 밥을 빌어다 그를 공양하였다.

19세가 되자 대소승(大小乘) 경전 수백만 글자를 암송하였다. 그러나 타고난 성품이 대범하고 오만하였다. 꽤 지견(知見)이 있다고 자처(自處)하였다. 자기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드물다고 여겼기 때문에, 여러 승려들에게서 존중을 받지 못하였다. 다만 행동거지가 아름답고 담소(談笑)를 잘하여, 그를 만나 본 사람들은 그에 대한 깊은 원한을 잊어버렸다.

구족계를 받을 나이가 되어도 계단(戒壇)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삼십을 바라보는 나이[向立之歲]에도 여전히 사미(沙彌)였다. 외삼촌에게 5명(明)의 여러 논(論)들을 배우고 세간의 법술(法術)을 많이 익혔다. 27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구족계를 받았다.

항상 독송을 일삼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언제나 단정히 앉아서 뜻을 사유하였다. 오히려 “알지 못하는 사이에 헛되이 시간을 보내었구나”라고 말하였다. 그의 애오라지 정진함이 이와 같았다.

뒤에 사륵국(沙勒國)의 국왕 불여(不?)는 3천 명의 승려들을 청하여 재를 베풀었다. 마침 불타야사도 그 법회에 참석하였다. 그 당시 태자는 달마불다(達摩弗多)로 중국어로는 법자(法子)라 했다. 불타야사의 용모와 복장이 말끔하고 우아한 것을 보고 불타야사에게 지내온 내력을 물었다. 불타야사의 응답이 깨끗하여 태자가 기뻐하였다.

이로 인하여 궁궐 안으로 청하여 머무르게 하고 공양하는 대우를 융숭히 하였다. 구마라집이 뒤에 사륵국에 이르러 불타야사에게 수학하면서 그를 대단히 존경하였다. 구마라집은 어머니를 따라 구자국으로 돌아갔으나 불타야사는 그대로 사륵국에 머물렀다. 얼마 후 사륵왕이 붕어하여 달마불다 태자가 임금 자리에 올랐다.

그 당시 부견(符堅)은 여광(呂光)을 파견하여 서쪽으로 구자국을 정벌하였다. 구자왕이 급히 사륵국에 구원병을 요청하므로, 사륵왕은 몸소 군대를 거느리고 출병하였다. 불타야사에게는 남아서 태자를 보필하도록 하고 뒷일을 맡겼다. 구원병이 아직 도착하기도 전에 구자국이 함락되었다. 사륵왕은 귀국하여 구마라집이 여광에게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자세히 알렸다.

불타야사는 탄식하였다.

“내가 구마라집과 서로 만난 지는 오래이지만 아직 회포(懷抱)를 다 풀지 못했다. 그가 갑자기 포로가 되어 버렸으니, 어찌 서로 다시 만나기를 기약할 수 있겠는가.”

불타야사는 사륵국에 10여 년을 머물렀다. 뒤에 동쪽으로 구자국에 가서 불법으로 매우 성대하게 교화하였다.

그 때 구마라집은 고장(姑臧)에 있었다. 편지를 보내 불타야사를 청하였다. 양식을 싸 가지고 떠나려고 하자, 나라 사람들이 만류하여 다시 1년 가량 더 머물렀다. 뒤에 제자에게 말하였다.

“나는 구마라집을 찾아야겠다. 비밀리 행장을 꾸려 밤중에 출발해서 사람들이 모르게 해야 한다.”

제자는 말하였다.

“내일 추격해 와서 다시 송환되는 것을 면치 못할까 두렵습니다.”

불타야사는 곧 맑은 물 한 사발을 가져다 약을 풀었다. 수십 글자의 주문을 외운 뒤 제자와 더불어 그 물로 발을 씻었다. 곧바로 야밤에 출발하여 다음 날 아침까지 수백 리를 갔다.

제자에게 물었다.

“무엇을 느꼈느냐?”

제자가 대답하였다.

“오직 몹시 센 바람소리만 들리고, 눈에서 눈물이 나올 뿐입니다.”

불타야사는 또 주문을 외운 물을 주어 발을 씻기고는 머물러 쉬었다. 다음 날 아침 나라 사람들이 그들을 추격하였지만, 거리가 이미 수백 리나 떨어져 미치지 못했다. 걸어서 고장(姑臧)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구마라집은 이미 장안(長安)으로 들어간 뒤였다.

요홍(姚泓)이 구마라집을 핍박하여 여자를 두어 정법에 어긋나는 일을 하게 권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불타야사는 탄식하였다.

“구마라집은 고운 솜과 같은 존재이다. 어찌하여 그를 가시덤불 속에 들어가게 한단 말인가.”

구마라집은 그가 고장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요홍(姚泓)에게 권하여 그를 맞이하게 하였다.

요홍이 아직 구마라집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얼마 후 요홍은 구마라집에게 명하여 경장(經藏)을 번역하게 하였다. 구마라집은 아뢰었다.

“대저 불교의 교법(敎法)을 널리 선양하려면, 글 뜻을 두루 통달해야 합니다. 빈도(貧道)는 비록 경전의 글은 외울 수 있지만, 아직 그 이치를 잘 알지 못합니다. 오직 불타야사만이 그윽한 이치를 깊이 통달하였습니다. 지금 고장에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조서를 내려 그를 부르십시오. 한 마디 말을 세 번 상세하게 살핀 뒤에 붓을 대어, 교법의 미묘한 말씀을 망실하지 않아, 천 년의 오랜 세월 뒤에도 신뢰를 받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요홍은 구마라집의 말을 따라 즉시 사신을 파견하여, 불타야사에게 후한 선물을 주어 초빙하였다. 그러나 불타야사는 모두 다 받지 않고 웃으며 말하였다.

“임금의 밝으신 말씀이 내려져, 수레 가득 싣고 사신이 달려 이르렀습니다. 그러니 시주께서 소승을 대우하심이 이미 후하십니다. 다만 현재 구마라집이 처해 있는 것을 보니, 감히 명을 받지 못하겠습니다.”

사신이 돌아가서 그대로 자세히 아뢰었다. 요홍은 그의 기미를 살피고 삼가함에 탄복하여 거듭 편지를 보내 돈독히 타일렀다. 바야흐로 장안에 도착하였다. 요홍이 몸소 나가 방문하여 안부를 물었다. 별도로 소요원(逍遙園)에 신성(新省)을 세우고 네 가지 공양물[四事]로 공양하였다. 그러나 모두 받지 않고 때가 되면 탁발하여 하루에 한 끼니를 들 뿐이었다.

당시 구마라집은 『십주경(十住經)』을 번역하였다. 한 달 남짓 동안 의문이 나서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느라 미처 붓을 잡지 못하였다. 불타야사가 이르고 나서는 함께 명백하게 따져서 해결하였다. 문장의 조리가 방정하게 바로잡혀서, 승려와 속인 3천여 명이 모두 그 요점에 딱 들어맞는다고 감탄하였다.

불타야사는 코밑수염이 붉고 『비바사(毘婆沙)』를 능숙하게 해석했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그를 ‘붉은 코밑수염의 비바사’라고 불렀다. 구마라집의 스승이었기 때문에, 또한 대비바사(大毘婆沙)라고도 호칭하였다.

의발(衣鉢)과 와구(臥具) 등의 네 가지[四事] 공양이 삼칸 집에 가득하였다.

그렇지만 불타야사는 관심(關心)을 기울이지 않았다. 요홍은 그 공양물들을 팔아서 성 남쪽에 절을 지었다.

전에 불타야사가 『담무덕률(曇無德律)』을 암송하므로, 위사례교위(僞司隸校尉) 요상(姚爽)이 불타야사에게 청하여 번역하게 하였다. 요홍은 누락되거나 잘못된 것이 있을까 의심하였다. 불타야사에게 시험 삼아 오랑캐들이 기록한 약방문 5만 글자 가량을 외우게 하였다. 이틀 후 그것을 암송하게 하였는데, 옆에서 책을 잡고 책장을 덮을 때까지,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대중들은 모두 그의 기억력이 뛰어남에 탄복하였다.

곧바로 홍시 12년(410)에 『사분율(四分律)』 44권과 『장아함경(長阿含經)』 등을 번역하여 내었다. 양주(凉州) 사문 축불념(竺佛念)이 중국어로 번역하고, 도함(道含)이 붓으로 받아 적었다. 15년(413)에 이르러 역장(譯場: 번역하는 곳)을 해산하였다. 요홍은 불타야사에게 비단 만 필을 보시했지만 모두 받지 않았다. 도함과 축불념에게는 각각 비단 천 필을 보시하고, 이름난 사문 5백 명에게도 모두 후하게 보시하였다.

불타야사는 뒤에 하직하고 외국으로 돌아갔다. 계빈국에 이르러 『허공장경(虛空藏經)』 한 권을 구해서 상인에게 부쳐, 양주의 여러 승려들에게 전했다. 후에 그가 어느 곳에서 돌아가셨는지 알지 못한다.

06)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

불타발타라는 중국말로 각현(覺賢)이라 한다. 본래의 성은 석씨(釋氏)이고 가유라위국(迦維羅衛國) 사람으로서 감로반왕(甘露飯王)의 먼 후예이다. 할아버지는 달마제바(達摩提婆)로서 중국에서는 법천(法天)이라 한다. 일찍이 북천축국(北天竺國)에 장사하러 갔다가 그대로 거기에 거주하였다. 아버지는 달마수리야(達摩修利耶)로서 중국에서 법일(法日)이라 하며 젊어서 죽었다.

각현은 세 살에 고아가 되어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다섯 살에 또 어머니를 잃고 외갓집에서 자랐다. 종조부(從祖父) 구바리(鳩婆利)는 각현이 총명하고 민첩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게다가 어버이를 여의고 고아가 되어 이슬 맞는 것을 가엾게 여겼다. 데려다가 득도시켜 사미(沙彌)가 되게 하였다.

17세가 되어 함께 공부하는 여러 사람들과 경전을 익히고 암송하기를 일삼았다. 대중들에게 한 달 걸리는 것을 각현은 하루 만에 암송하여 마쳤다. 그 스승이 감탄하여 말하였다.

“각현의 하루는 서른 사람의 하루에 필적하는구나.”

구족계를 받고 나서는 더욱 부지런히 수업에 정진하고, 많은 경전들을 널리 배워 대부분 통달하였다. 어려서부터 선(禪)과 율(律)로써 명성을 날렸다. 함께 수학한 승가달다(僧伽達多)와 계빈국(?賓國)에 노닐며 같은 장소에서 여러 해를 보냈다. 승가달다는 비록 각현의 재주에 감복하지만, 아직 그 사람 됨됨이는 측량하지 못하였다.

뒤에 밀실에서 문을 닫고 좌선을 할 때, 홀연히 각현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승가달다는 놀라서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각현이 대답하였다.

“잠깐 도솔천에 가서 미륵보살님께 예경을 드리고 왔다.”

말을 마치자 문득 사라졌다. 이에 승가달다는 각현이 성인(聖人)인 줄은 알았지만, 아직도 그 깊고 낮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뒤에 여러 번 각현의 신비한 변화를 보고 경건한 마음으로 물어보았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각현이 불환과(不還果)를 증득했음을 알았다.

각현은 항상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널리 교화하고, 두루 각 나라의 풍속을 관찰하기를 원하였다. 마침 전진(前秦)의 사문 지엄(智嚴)이 서쪽으로 와서 계빈국에 이르렀다. 대중들의 청정하고 수승한 모습을 보고, 이에 탄식하면서 동쪽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우리 동료들은 모두 도를 구하려는 뜻을 가졌습니다. 그렇지만 참다운 스승을 만나지 못해 깨달음을 트이지 못하였습니다.”

곧 계빈국의 대중들에게 물었다.

“어느 분이 동쪽 땅에 교화를 널리 펼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말하였다.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천축국의 나가리성(那呵利城)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석씨(釋氏)성을 이어받았고, 대대로 도학 (道學)을 준수하였습니다. 이갈이 할 무렵의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이미 경론(經論)을 통달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대선사 불대선(佛大先)에게 수업을 받았으며, 전부터 계빈국에 있었습니다.”

다시 또 지엄에게 이르기를 “여러 승려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선법(禪法)을 베풀어 줄 수 있는 사람은, 불타발타라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

지엄이 간절히 요청하므로 각현은 마침내 딱하게 여겨 허락하였다. 이에 대중들을 떠나 스승에게 하직하고, 양식을 싸 가지고 동쪽으로 갔다. 걷고 달린 지 3년 동안에 추위와 더위를 연이어 겪었다. 이미 파미르 고원을 넘어 도중에 여섯 나라를 경유하였다. 여섯 나라의 군주들이 멀리 떠나는 교화자를 기꺼워하며, 마음을 기울여 물자를 바쳤다.

교지국(交趾國)에 이르러 배를 타고 해로를 따라 갔다. 배가 어떤 섬을 지나갈 때 각현은 손으로 산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여기에서 머무는 것이 낫겠습니다.”

선장은 말하였다.

“길을 떠난 사람은 하루의 시간이라도 아낍니다. 순조로운 바람을 만나기 어려우니 정박할 수 없습니다.”

그러고는 2백여 리쯤 나아갔다. 그리고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배가 도로 그 섬으로 향했다. 여러 사람들이 그의 신통력을 깨닫고 모두 스승으로 섬겼으며, 배의 진퇴를 물었다. 뒤에 순풍을 만났으므로 동행하는 배들은 모두 출발하였다. 그러나 각현은 말하였다.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선장은 곧 멈췄다. 이미 앞에 출발한 배들은 모두 일시에 전복되어 버렸다.

뒤에 어느 날 한밤중에 갑자기 선박들을 모두 출발하게 하였다. 아무도 기꺼이 따르려는 자가 없었다. 각현은 스스로 일어나서 닻줄을 풀었다. 이 배 한 척만이 출발하였다. 얼마 후 해적들이 쳐들어와, 남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약탈당하였다.

얼마 후 청주(靑州)의 동래군(東萊郡)에 이르렀다. 구마라집이 장안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즉시 찾아가 그를 따랐다. 구마라집은 크게 기뻐하며 함께 불법을 논하면서 심오하고 미묘한 이치를 계발하여, 깨달아 터득한 것이 많았다. 그래서 구마라집에게 물었다.

“그대의 해석은 보통사람의 뜻보다 뛰어난 것이 아닌데도, 높은 명성을 얻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구마라집이 말하였다.

“저의 나이가 많기 때문입니다. 어찌 반드시 말이 훌륭해서 칭찬하는 것이겠습니까.”

구마라집은 항상 의심스러운 뜻이 있으면, 반드시 각현에게 물어서 결정하였다.

당시 후진(後秦)의 태자 요홍(姚泓)은 각현의 설법을 듣고자, 많은 승려들에게 명하여 동궁에 모여 논의하였다. 구마라집과 각현의 논의가 여러 차례 오갔다.

구마라집이 물었다.

“현상이 어째서 공(空)입니까?”

각현은 대답하였다.

“많은 극미(極微)가 모여 색(色)이 성립되었으므로 색에는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에, 비록 색이라고는 하더라도 항상 공입니다.”

구마라집은 다시 물었다.

“이미 극미를 가지고 색을 파하여 공이라 한다면, 어째서 또 극미를 파합니까?”

각현은 대답하였다.

“많은 승려들은 하나의 극미를 부셔 쪼개지만, 내 생각에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자 구마라집은 또 물었다.

“극미는 바로 상(常)입니까?”

각현은 대답하였다.

“하나의 극미에 의하기 때문에 많은 극미는 공(空)이며, 많은 극미에 의하기 때문에 하나의 극미도 공입니다.”

당시에 보운(寶雲)이 이 대화를 통역하였다. 보운 자신도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승려와 속인들은 모두 ‘각현이 헤아리는 미진(微塵) 은 바로 상(常)이다’라고 생각하였다.

그 후 어느 날 장안의 학승들은 다시 해석해 주기를 청하였다. 각현이 말하였다.

“무릇 법은 스스로 생하지 않으며, 연(緣)이 모이기 때문에 생하는 것입니다. 일미진(一微塵)에 인연하기 때문에 많은 미진이 있으며, 미진에는 자성이 없으므로 공입니다. 어찌 일미진을 파하지 않고, 상(常)이어서 공이 아니라고 말해서야 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문답의 분명한 뜻이었다.

후진(後秦)의 임금 요홍은 오로지 불법에 마음을 써서 3천여 명의 승려들을 공양하였다. 모든 승려들이 궁궐에 왕래하면서 성대하게 인간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오직 각현만은 고요함을 지켜 대중들과 함께 하지 않았다.

그는 뒤에 제자에게 말하였다.

“나는 어젯밤 고향에서 배 다섯 척이 출발하는 것을 보았노라.”

제자는 그것을 외부 사람들에게 전하여 알렸다. 관중(關中)의 기존 승려들은 모두 각현이 괴이한 일을 나타내어 대중을 현혹시킨다고 생각하였다.

또 각현이 장안(長安)에 있으면서 선업(禪業)을 크게 홍포하자, 사방에서 선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두 소문을 듣고 이르렀다. 다만 배움에 젖어듦에 깊고 얕음이 있고, 법을 얻음에 짙고 연함이 있었다. 그 중 경박하고 속이는 무리가 이를 빙자하여 교활하게 속이는 일도 있었다.

한 제자가 약간 관행(觀行)을 닦고 스스로 말하였다.

“아나함과(阿那含果: 不還果)를 터득했다.”

각현이 아직 가까이하여 조사하고 묻기도 전에, 마침내 이 근거 없는 소문이 퍼졌다. 대단한 원망과 비방을 받아서, 장차 예측할 수 없는 화가 있을 듯하였다.

이리하여 각현의 제자들 중에 어떤 이는 이름을 감추고 잠적해 버렸으며, 어떤 이는 야밤에 담을 넘어 달아났다. 반나절 사이에 대중들이 거의 다 흩어져 버렸다. 그런데도 각현은 평안을 유지하여 마음에 거리끼지 않았다.

당시 기존 승려인 승략(僧?)과 도항(道恒) 등은 각현에게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도 오히려 자기가 터득한 법을 설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으셨 습니다.

당신이 전에 다섯 척의 배가 온다고 예언한 것은 허황하여 사실이 아닙니다. 또한 당신의 문도가 속이고 홀려서 서로 같지 않다고 일을 일으킨 것은 이미 계율에 위배됩니다. 그러므로 이치상 함께 머무를 수 없습니다. 응당 속히 떠나서 여기에 머무르지 마십시오.”

각현은 말하였다.

“나 자신은 물 위에 뜬 부평초와 같아서, 떠나고 머무르는 것은 매우 쉽습니다. 다만 회포(懷抱)를 다 펴지 못하는 것이 유감이어서, 그것을 개탄스럽게 여길 뿐입니다.”

이에 제자 혜관(慧觀) 등 40여 명과 함께 떠났다. 그의 정신과 뜻이 조용하여, 처음과 다른 낯빛이 전혀 없었다.

진실을 아는 대중들은 모두 다 탄식하고 애석하게 여겼으며, 승려와 속인 천여 명이 전송하였다. 요홍도 각현이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탄하며 도항(道恒)에게 말하였다.

“불타발타라 각현 사문은 도(道)와 한마음이 되어, 이곳으로 와서 부처님께서 남기신 교법을 선양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다문 입을 벌려 아직 말을 토해내지 못하였다. 참으로 깊이 개탄스럽다. 어찌 한마디 말을 허물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인도할 수 없게 해서야 되겠는가.”

그러고는 요홍이 칙명을 내려 각현의 뒤를 급히 뒤따르게 했다. 그러나 각현은 사신에게 대답하였다.

“진실로 은혜로운 임금의 뜻은 압니다만, 칙명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승려들을 이끌고 밤에도 길을 걸어, 남쪽 여산(廬山)으로 향했다.

사문 석혜원(釋慧遠)은 오랫동안 그의 풍모와 명성을 사모하였다. 그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쁘게 맞이하니 마치 오래 사귄 벗과 같았다. 혜원은 각현이 배척당한 것은 그 허물이 문인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며, 다섯 척의 배를 예언한 것 같은 것은 단지 그 주장에 동의하느냐 아니냐에 달려있을 뿐이어서, 계율에 대해서는 범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제자 담옹(曇邕)을 파견하여, 후진(後秦) 임금인 요홍과 관중(關中)의 대중 승려들에게 편지를 보내, 그를 배척한 사건을 해결하였다. 그리고 혜원은 각현에게 여러 편의 『선경(禪經)』을 번역할 것을 청하였다.

각현은 돌아다니면서 교화하는 데 뜻을 두었기 때문에, 거처할 때 안락함을 구하지 않았다. 여산에 일 년 가량 머무르고 다시 서쪽 강릉(江陵)으로 갔다. 마침 외국 선박이 들어왔다. 얼마 있다가 찾아가서 물어 보았다. 과연 천축국에서 온 다섯 척의 배로서, 각현이 미리 내다본 바 그대로였다.

온 나라의 사대부와 서민들이 다투어 와서, 예를 올리고 받들어 보시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각현은 모두 받지 않았다. 발우를 들고 탁발하면서 귀천을 따지지 않았다.

당시 진군(陳郡)의 원표(袁豹)는 송(宋)나라 무제(武帝)가 태위(太尉)로 있던 시절에 장사(長史) 벼슬을 하였다. 송나라 무제가 남쪽으로 유의(劉毅)를 토벌할 때, 관청의 부서를 따라 주둔했다.

각현은 제자 혜관과 함께 원표에게 나아가 걸식하였다. 원표는 평소 불교를 신앙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박하게 대접하였다. 미처 배부르기 전에 물러날 것을 고하자, 원표가 말하였다.

“아직 만족하지 않은 듯하니 잠시 더 머물러 주십시오.”

각현이 말하였다.

“시주께서 보시하는 마음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만든 음식이 이미 바닥이 났습니다.”

원표가 즉시 측근에게 호령하여 음식을 더 올리게 하였다. 그러나 음식이 과연 다했으므로 원표가 크게 부끄러워하였다. 이에 혜관에게 물었다.

“이 사문은 어떤 사람인가?”

혜관은 말하였다.

“덕행과 기량이 고매하여, 보통 사람이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원표는 각현의 남다름에 깊이 매우 감탄하여 태위(太尉) 유유(劉裕)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태위가 청하여 만나보고는 매우 높이고 공경하여, 필요한 물자를 공양하여 빠짐없이 올렸다. 얼마 후 태위는 서울로 돌아갔다. 각현에게도 함께 돌아가자고 청하여 도량사(道場寺)에 머물도록 하였다.

각현의 몸가짐은 솔직하고 진실하여 중국의 풍속과 달랐다. 그리고 뜻과 운치가 맑고 원대하여 평소 고요한 분위기를 띄었다. 서울의 법사 승필(僧弼)은 사문 보림(寶林)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다.

“투장사(鬪場寺, 즉 도량사)의 선사(禪師)는 크나큰 마음을 소유하고 계신 분입니다. 이 분은 바로 천축국의 왕필(王弼)이나 하안(河晏)과 같은 풍류인(風流人)입니다.”

칭송을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이보다 앞서 사문 지법령(支法領)은 우전국(于?國)에서 『화엄경(華嚴經)』의 앞부분 3만 6천 게송(偈頌)을 구하였다. 그러나 미처 번역하지 못하였다. 의희(義熙) 14년(418)에, 오군(吳郡)의 내사(內史) 맹의(孟?)와 우위장군(右衛將軍) 저숙도(?叔度)가 각현을 초청하여 번역하는 우두머리로 삼았다.

각현은 손에 범문(梵文)을 쥐고, 사문 법업(法業)·혜엄(慧嚴) 등 1백여 인과 함께 도량사에서 번역했다. 문장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여 정하고, 한문(漢文)과 범문(梵文)을 회통하여 미묘하게 경전의 뜻을 살렸다. 그러므로 도량사에는 아직까지도 화엄당(華嚴堂)이 남아 있다. 또 사문 법현(法顯)은 서역에서 구한 『승기율(僧祇律)』 범본(梵本)을 다시 각현에게 부탁하여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이 내용은 ?법현전(法顯傳)?에 실려 있다.

각현이 선후로 번역한 경전은 『관불삼매해경(觀佛三昧海經)』 6권, 『니원경(泥洹經)』 및 『수행방편론(修行方便論)』 등 모두 15부 117권이다. 어느 것이나 그윽한 의미를 궁구하여, 미묘하게 문장의 뜻을 극진히 하였다.

각현은 원가(元嘉) 6년(429)에 돌아가셨다. 그 때 나이는 71세이다.

07) 담무참(曇無讖)

담무참은 담마참(曇摩讖)이나 담무참(曇無懺)이라 하기도 한다. 대개 범음(梵音)을 취한 것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본시 중천축국(中天竺國) 사람이다. 여섯 살에 부친상을 당하고, 어머니와 함께 모직 담요를 짜는 품을 팔아 그것을 생업으로 삼았다.

사문 달마야사는 중국어로 법명(法明)이라 한다. 승려와 속인들이 숭앙하여 재물로 공양하는 것이 풍부하였다. 담무참의 어머니는 그것을 아름답게 여겼다. 이 때문에 담무참은 그의 제자가 되었다.

열 살에 같이 공부하는 몇 사람과 함께 주문을 읽었다. 총명함과 민첩함이 무리에서 뛰어났으며, 하루에 경전을 만여 글자나 암송하였다.

처음에는 소승을 배우고, 5명(明)의 여러 논들을 두루 보았다. 그의 강설(講說)은 변론이 정밀하여, 응답하여 겨룰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뒤에 백두 선사(白頭禪師)가 담무참을 만나 논의를 한 일이 있다. 익힌 공부가 서로 달라 논쟁한 지 백여 일이나 되었다. 아무리 담무참이 공박하고 힐난하여 날카롭게 들고 일어나도, 백두선사는 끝내 수긍하거나 굽히지 않았다.

담무참은 그의 정밀한 논리에 굴복하였다. 백두 선사에게 말하였다.

“제가 경전을 좀 볼 수 있겠습니까?”

선사는 곧 나무껍질에 쓰인 『열반경(涅槃經)』을 주었다. 담무참은 즉시 이 경전을 읽고는 놀라서, 잘못을 깨닫고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뉘우쳤다.

“좁은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그토록 넓은 세상이 있는 줄 모르고 오랫동안 헤매었다.”

이에 대중들을 모아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마침내 대승에 전념하였다. 나이 스무 살이 되자 대소승의 경전 2백만 글자를 암송하였다.

담무참의 사촌 형은 코끼리를 잘 조련하였다. 그는 왕이 타던, 귀가 흰 큰 코끼리를 타다가 실수로 코끼리를 죽여 버렸다. 왕은 진노하여 사촌형을 주벌하고 명령을 내렸다.

“감히 유해를 돌보는 사람이 있으면 삼족(三族)을 멸할 것이다.”

그의 친척들은 어느 누구도 감히 가서 보는 자가 없었으나, 담무참은 곡을 하고 그를 장사지냈다. 왕이 진노하여 담무참을 주벌하려고 하자 담무참은 말하였다.

“왕께서는 법에 의거했기 때문에 그를 죽였고, 나는 친척이기 때문에 그를 장사지냈습니다. 어느 쪽이나 대의(大義)를 어기지 않은 것입니다. 어찌하여 진노하시는 것입니까?”

곁에 있는 사람들은 그 때문에 간담이 서늘했으나, 담무참의 안색은 태연자약하였다.

왕은 그의 의지와 기개를 진귀하게 여겨, 마침내 그를 머물게 하고 공양하였다. 담무참은 주술(呪術)에 밝아 향하는 곳마다 모두 영험이 있었다. 서역 에서는 그를 대주사(大呪師)라고 불렀다.

뒤에 왕을 수행하여 산에 들어갔다. 왕은 목이 말라 물을 찾았으나 구할 수 없었다. 담무참은 은밀히 주문을 외워 돌에서 물이 나오게 하였다. 그런 후에 찬탄하여 말하였다.

“대왕의 은택에 감응하기 때문에 마른 돌에서 샘물이 솟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웃 나라에서 그 소문을 들은 자들이 모두 왕의 덕을 찬탄하였다. 때에 알맞게 내리는 비의 혜택으로 매우 조화로워져서, 백성들은 노래를 불렀다.

왕은 담무참의 도술을 기뻐했으며, 매우 특별한 은총을 베풀었다. 얼마 후 왕의 마음이 점차 시들해져, 그를 대우하는 것이 점점 박해졌다.

담무참은 오랫동안 머문 것이 싫증을 부른다고 생각하여 곧 하직하고 계빈국(?賓國)으로 갔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앞부분 열 권과 『보살계경(菩薩戒經)』, 『보살계본(菩薩戒本)』 등을 휴대하였다. 그 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소승만 배우고, 『열반경』을 신봉하지 않았다. 이에 동쪽 구자국으로 갔다.

얼마 후 다시 나아가 고장(姑臧)에 도착하여 여관에서 쉬었다. 그는 경을 잃어버릴까 염려하여 경을 베개삼아 잤다. 누군가 이 경을 끌어당겨 땅 위에 두었다. 담무참은 놀라서 잠에서 깨어 이것을 도둑의 소행이라 생각했다.

이 같은 일이 사흘 밤 동안 계속되자 공중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 경은 여래의 해탈(解脫)을 담은 것인데 어찌하여 그것을 베개로 삼는가?”

부끄러워 깨우치고 경본을 특별히 높은 곳에 두었다.

그날 밤 그것을 훔치려는 자가 있었다. 몇 번이나 경본을 들어 올리려 하나 끝내 들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담무참이 경을 받들면서 조금도 무거워 하지 않았다. 도둑은 이것을 보고, 담무참을 성인이라 여기고 모두 와서 엎드려 사죄하였다.

그 당시 하서(河西) 국왕 저거몽손(沮渠蒙遜)은 양(凉) 지방을 참람히 점거하고 스스로 왕이라 참칭하였다. 담무참의 명성을 들었다. 불러서 상면하고는 매우 후하게 대접하였다.

저거몽손은 평소 불법을 받들어 널리 펴는 일에 뜻을 두었다. 저거몽손은 담무참을 청하여 경본을 번역하고자 하였다. 담무참은 아직 중국어를 잘 알지 못했다. 또 그를 도와 줄 전역자(傳譯者)도 없었다. 이 때문에 이치를 어그러뜨릴까 염려하여 즉시 번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담무참은 중국어를 삼 년 동안 배우고서야 비로소 『열반경』 첫 부분 열 권을 번역하여 필사(筆寫)하였다.

당시 사문 혜숭(慧嵩)과 도랑(道朗)은 하서(河西) 지방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담무참이 경장(經藏)을 펴내자 깊이 추앙하여 존중히 여겼다. 범문(梵文)을 옮겨 바꾼 것을 혜숭공이 받아 적었다. 승려와 속인 수백 명이 의문 나는 것을 종횡으로 거침없이 힐난하였다. 그러나 담무참은 그때그때 응하여 막힌 것을 풀어내며 청아한 변론을 물 흐르듯 하였다. 겸하여 문장솜씨도 풍부하여 문장이 화려하고 치밀하였다.

혜승과 도랑 등이 거듭 널리 여러 경전들을 번역하기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차례로 『방등대집경(方等大集經)』·『방등대운경(方等大雲經)』·『비화경(悲華經)』·『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우바새계(優婆塞戒)』·『금광명경(金光明經)』·『해룡왕경(海龍王經)』·『보살계본(菩薩戒本)』 등 60여만 글자를 번역하였다.

담무참은 『열반경』 경본의 품수(品數)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외국으로 돌아가서 구하여 찾았다. 그 때 그의 모친상을 당했으므로 1년 가량 더 머물렀다. 뒤에 우전국(于?國)에 가서 경본의 가운데 부분을 구하고, 다시 고장에 돌아와서 번역하였다.

뒤에 또 우전국에 사신을 보내어 뒷부분을 찾았다. 이리하여 계속해서 번역하여 33권이 되었다. 위현시(僞玄始) 3년(414)에 처음 번역을 시작하여, 현시 10년(421) 10월 23일에 이르러서 비로소 세 질(帙)을 끝마쳤다. 바로 송(宋)나라 무제(武帝) 영초(永初) 2년(421)이다.

담무참은 이르기를 “이 『열반경』의 범본(梵本)은 본래 3만 5천 게송(偈頌)이다. 이쪽 지방에서 백만 글자 가량을 덜어내어, 지금 번역한 것은 단지 1만 여 게송(偈頌)뿐이다”라고 하였다.

담무참은 일찍이 저거몽손에게 고하였다.

“귀신이 마을에 들어오면, 반드시 많은 재앙과 돌림병이 일어날 것입니다.”

저거몽손은 믿지 않고 몸소 자신이 귀신을 보고 증험하기를 원하였다. 담무참이 즉시 저거몽손에게 주술을 걸었다. 저거몽손은 귀신을 보고 놀라 두려워하였다.

담무참이 말하였다.

“마땅히 정결하고 정성스럽게 재계(齋戒)하고, 신주(神呪)를 외워 돌림병을 쫓아내야 합니다.”

이에 주문을 외운 지 3일 만에 저거몽손에게 말하였다.

“귀신들이 이미 떠났습니다.”

그 때 변경에서 귀신을 본 자가 말하였다.

“수백 마리의 돌림병 귀신들이 달려 도망가는 것을 보았다.”

나라 안이 평안을 얻은 것은 담무참의 힘이다. 저거몽손은 더욱 공경스럽게 섬겼다.

저거몽손의 위승현(僞承玄) 2년(429)에 이르러, 저거몽손은 황하를 건너 포한(抱罕)에서 진(秦)나라 임금 걸복모말(乞伏暮末)을 정벌하려 세자인 흥국(興國)을 선봉으로 삼았다. 그러나 도리어 걸복모말의 군대에게 패배당하여 흥국은 사로잡혔다.

뒤에 걸복모말은 수비에 실패하였다. 걸복모말도 흥국과 함께 혁련정정(赫蓮定定)에게 사로잡혔다.

후에 혁련정정도 토곡혼(吐谷渾)에게 격파당하여, 흥국은 마침내 반란병에게 살해당하였다. 저거몽손은 크게 성내었다.

“부처를 섬겨도 영험이 없다.”

사문 50여 명을 내쫓고 그 나머지는 모두 환속시켰다.

예전에 저거몽손이 자기 어머니를 위하여 장륙(丈六)의 석상을 조성하였다. 석상이 눈물을 흘린 데다 담무참도 간하는 말로 바로잡아주니, 이에 저거몽손이 마음을 고치고 뉘우쳤다.

그 때 북위(北魏)의 오랑캐 탁발도(託跋燾: 太武帝, 재위 424~452)가 담무참의 도술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사자를 파견하여 맞아들이려 했다. 탁발도는 또 저거몽손에게 고하여 알렸다.

“만약 담무참을 보내지 않으면 즉시 공격하겠다.”

그러나 저거몽손은 담무참을 섬긴 지 이미 세월이 오래된지라, 차마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못하였다.

탁발도는 뒤에 또 위태상(僞太常) 고평공(高平公) 이순(李順)을 파견해서, 책명(策命)으로 저거몽손에게 관작을 수여하였다. 사지절시중도독(使持節侍中都督) 양주서역제군사(?州西域諸軍事) 태부표기대장군(太傅驃騎大將軍) 양주목(?州牧) 양왕(?王)으로 삼고 구석(九錫)의 예를 하사하였다.

또한 저거몽손에게 명하여 말하였다.

“내 들으니, 담무참의 박학다식은 구마라집과 같은 정도이고, 비밀스런 주문과 신비한 영험은 불도징과 짝할 만하다고 한다. 짐이 도를 연구하고자 하니 빠른 역말에 태워 그를 보내도록 하라.”

저거몽손은 이순에게 신락문(新樂門)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저거몽손은 이순에게 말하였다.

“서번(西蕃)의 늙은 신하인 이 저거몽손은 조정을 받들어 섬겨, 감히 그 뜻을 거스르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천자께서는 아첨하는 말을 믿고 받아들여, 독촉하고 핍박만 하고 계십니다.

전에는 표문을 내려 담무참이 머물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번에는 사자를 보내 그를 데려가려고 하십니다. 담무참은 바로 저의 스승님이므로 응당 그분과 죽음을 함께 해야만 합니다. 진실로 저의 남은 여생이야 아깝지 않습니다. 인생은 한 번 죽기 마련이지요. 다만 언제인지를 어찌 깨닫겠습니까?”

이순은 말하였다.

“왕께서는 남보다 먼저 정성을 나타내시어 사랑하는 자식을 보내 입시(入侍)토록 하셨습니다. 조정에서는 왕의 충성스러운 공적을 공경하기 때문에 특별한 예우를 드러내 베풀었습니다. 그런데도 왕께서는 이 오랑캐 도인 한 사람 때문에 산악(山岳) 같은 공을 무너뜨렸습니다. 하루아침의 성냄을 참지 못하여 이제까지의 아름다움을 손상시킨다면, 이것이 어찌 조정에서 후하게 대우하는 뜻이겠습니까? 마음속으로 대왕을 위하여 취하지 마시기를 빕니다. 주상(主上)께서 마음을 비우심이 지극함은 홍문(弘文)이 아는 바입니다.”

홍문은 저거몽손이 파견하여 위(魏)나라에 보낸 사신이다.

저거몽손이 말하였다.

“태상의 구변이 아름다움은 소진(蘇秦)과 같습니다. 아마도 속마음은 그 말씀과 들어맞지 않는 것 같군요.”

저거몽손은 이미 담무참을 아껴서 보내지 않았으므로, 위나라의 강력함에 더욱 시달렸다.

저거몽손의 의화(義和) 3년(433) 3월에, 담무참은 다시 서역에 가서 『열반경』의 뒷부분을 구하겠다고 굳이 청하였다. 저거몽손은 그가 떠나기를 원하는 것에 분노하여 비밀리에 담무참을 살해할 것을 꾀하였다. 거짓으로 물자와 양식을 보내고 후하게 보물과 재화를 선사하였다.

출발하는 날에 임하여 담무참은 눈물을 흘리며 대중들에게 작별하였다.

“내 업의 갚음이 장차 이르려 한다. 뭇 성인들께서도 이것을 구제할 수는 없다. 본래 마음에 서원을 새긴 것이라서 도의상 여기에 머무를 수 없다.”

저거몽손은 과연 그의 출발에 미쳐 자객을 보내 길에서 그를 살해하였다. 그 때 나이는 49세이다. 이 해는 송나라 원가(元嘉) 10년(433)이다. 멀거나 가깝거나 승려와 속인들이 모두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였다. 얼마 후 저거몽손의 좌우에는 항상 대낮에도 귀신이 나타나 칼로 찌르는 것이 보였다. 4월에 저거몽손은 병으로 죽었다.

과거에 담무참이 고장(姑臧)에 있을 때, 장액(張掖: 감숙성 장액현)의 사문 도진(道進)이 담무참에게 보살계(菩薩戒)를 받으려 하였다. 담무참이 말했다.

“우선 허물을 참회하라.”

도진은 7일 낮 7일 밤 동안 정성을 다하고, 8일째 되는 날 담무참에게 나아가 계를 구하였다. 담무참은 갑자기 크게 성을 냈다. 도진은 다시 생각하였다.

‘이것은 나의 업장이 아직 녹지 않았기 때문이다.’

3년 동안 죽을힘을 다하여 좌선하고 참회하였다.

도진은 곧 선정 중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여러 보살들과 함께 나타나 자기에게 계법을 주시는 것을 보았다. 그 날 밤 같은 장소에 있던 10여 명의 사람들이 모두 도진이 본 것과 같은 꿈을 꾸었다. 도진이 담무참에게 나아가 그 일을 말하려고 하였다. 아직 수십 걸음 앞에 이르기도 전에 담무참이 놀라 일어나 외쳤다.

“훌륭하고도 훌륭하도다. 이미 계를 감득(感得)하였구나. 내 응당 다시 너를 위하여 증명(證明)을 할 것이다.”

그러고는 불상 앞에서 차례로 계율의 차별상을 설하였다.

그 당시 사문 도랑(道朗)은 관서(關西) 지방에서 명예를 떨쳤다. 도진이 계를 감득한 그 날 밤에 도랑도 역시 똑같은 꿈을 꾸었다. 이에 도랑은 자신의 계랍(戒臘: 수계 연령)을 낮다고 여겨 도진의 법제자가 되기를 구하였다. 이리하여 도진에게서 계를 받은 사람들이 천여 명이나 되었다. 이 계법이 전수되어 마침내 지금까지 이른 것은 모두 담무참이 남긴 법도(法度)이다.

별기(別記)에 말하였다.

“『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은 반드시 이파륵보살(伊波勒菩薩)이 이 땅에 전래(傳來)할 것이다.”

이 경을 뒤에 과연 담무참이 전하여 번역하니, 아마도 담무참은 어쩌면 보통 사람이 아닌 듯하다.

안양후(安陽侯)

저거몽손의 사촌 아우로 저거안양후(沮渠安陽侯)가 있다.

사람됨이 의지가 강하고 소탈하며 책을 두루 섭렵(涉獵)하였다. 담무참이 하서(河西)지방에 들어와 불법을 널리 폈다. 그러자 안양후는 불경에 뜻을 기울이고 5계[五禁]를 받들어 지녔다. 많은 경전들을 읽자마자 곧 소리 높여 암송할 수 있었다.

항상 혼자서 생각하였다.

‘배움에 힘써서 많이 들어 아는 것이야말로, 불보살께서 성대하게 여기는 일이다.’

어렸을 때 불법을 구하러 고비 사막을 건너 우전국으로 갔다. 구마제대사(瞿摩帝大寺)에서 천축국의 법사 불타사나(佛馱斯那, Buddhasena)를 만나서 가르침을 받았다.

불타사나는 본디 대승을 배웠으며, 천재로서의 빼어남을 드러내었다. 하루에 5천만 글자를 암송하고 선법(禪法)을 밝게 통달하였다. 그러므로 서방의 여러 나라에서는 그를 ‘사람 속의 사자[人中師子]’라고 불렀다. 안양후는 그에게 『선비요치병경(禪秘要治病經)』을 배웠다. 또한 그 경의 범본을 소리 내어 외우는 데 뛰어났다.

이윽고 동쪽으로 고창(高昌)에 돌아와서 『관세음경(觀世音經)』과 『관미륵경(觀彌勒經)』을 각각 한 권씩 얻었다. 또한 하서 지방으로 돌아와 즉시 『선요(禪要)』를 한문으로 번역했다.

위위(僞魏)가 서량(西?)을 병탄(倂呑)하자 남쪽 송(宋)나라로 도망하였다. 뜻을 감추고 몸을 낮추어 세상 사람들과 교제하지 않았다. 항상 탑사(塔寺)에 노닐며 거사의 몸으로 세상을 마쳤다.

과거에 안양후가 『관미륵보살생도솔천경(觀彌勒菩薩生兜率天經)』과 『관세음경(觀世音經)』을 번역하였다. 단양 윤(丹陽尹) 맹의(孟?)가 이것을 보고 훌륭하게 여겨 후한 상을 베풀었다.

뒤에 죽원사(竹園寺)의 비구니 혜준(慧濬)은 다시 그에게 『선경(禪經)』을 번역할 것을 청하였다. 안양후는 이미 오랫동안 익혀서 뛰어나므로 글을 써 나감에 막힘이 없었다. 17일 만에 번역하여 다섯 권을 만들었다. 얼마 후, 종산(鍾山) 정림사(定林寺)에서 『불모반니원경(佛母般泥洹經)』 1권을 번역했다.

안양후의 거처는 처자식과의 번잡함을 끊었으며, 영예와 이득에 욕심이 없었다. 조용히 불법의 동료들과 소요하며, 불법을 선양하고 유통시켰다. 그러므로 승려와 속인들이 모두 공경하고 아름답게 여겼다. 뒤에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도보(道普)

담무참이 번역한 여러 경전들은 원가(元嘉) 연간(424~452)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건업(建業)에 전해졌다. 도량사(道場寺)의 혜관(慧觀) 법사는 다시 『열반경』의 뒷부분을 찾기를 원하였다.

이에 송(宋)나라 태조(太祖)에게 아뢰어 물자를 공급받았다. 사문 도보를 보내 서리(書吏) 열 명을 거느리고 서역으로 가서 경을 구하였다. 도보는 장광군(長廣郡)에 이르러 배가 난파되어 다리를 다치고, 병으로 입적하였다. 도보는 임종에 임하여 탄식하였다.

“『열반경』 뒷부분은 송나라 땅과는 인연이 없구나.”

도보는 원래 고창 사람이다. 그런데 서역을 경유하여 여러 나라들을 두루 돌아다녔다. 부처님의 존영(尊影)에 공양하고, 부처님의 발우를 이마로 모셨다. 사탑(四塔)·보리수·부처님의 발자취·부처님의 형상(形象) 등을 우러러 뵙지 못한 것이 없었다. 범서(梵書)를 잘 알았다. 여러 나라의 언어에 두루 뛰어나, 특이한 지경을 여행하며 돌아다녔다. 별도로 대전(大傳)이 있다.

법성(法盛)

당시 고창에는 또 사문 법성(法盛)이 있었다. 역시 외국에 다녀왔다. 모두 네 권의 전기가 있다.

축법유(竺法維)·석승표(釋僧表)

또 축법유와 석승표가 있다. 모두 부처의 나라에 다녀왔다고 한다.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