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3 장
01. 시간은 존재하는가
왕은 물었다.
그대는 오랫 동안(長時間)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랫 동안이라는 (시간)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대왕이여, 과거 현재 미래를 말합니다.
도대체 시간이란 존재합니까.
존재하는 시간도 있고, 존재하지 않는 시간도 있습니다.
어떤 시간은 존재하고, 어떤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까.
대왕이여, 지나가 버렸거나, 끝나 버렸거나, 없어져 버린 과거에 대해서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결과를 낳거나(異熟法) 결과를 낳는 선천적인 가능성을 갖거나(異熟法), 딴 곳에 다시 태어나게 될 사상(事象)에 대해서 존재합니다. 죽어서 딴 곳에 다시 태어날 존재(有情)에는 시간이 존재하며, 죽어서 딴 곳에 다시 태어나지 않을 존재에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자유롭게 된(완전한 열반-般涅槃-에 도달한)존재에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해탈(완전한 열반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잘 알겠습니다.
02. 영원한 시간은 어떻게 성립하는가
왕은 물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과거 시간의 근거는 무엇이고, 현재 시간의 근거는 무엇이며, 미래 시간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과거 현재 미래 시간의 근거는 무명(無明 진리에 대한 무지)입니다. 무명을 반연하여 형성력(形成力=行)이 생기고, 형성력을 반연하여 식별작용(識別作用=識)이 생기고, 식별작용을 반연하여 명칭 형태(名色)가 생기고, 명칭 형태를 반연하여 6개의 감관(六處)이 생기고, 6개의 감관(感官)을 반연하여 감관과 대상과 식별작용과의 접촉(觸)이 생기고, 접촉을 반연하여 감수(感受=受)가 생기고, 감수를 반연하여 갈애(渴愛=愛)가 생기고, 갈애를 반연하여 집착(執着=取)이 생기고, 집착을 반연하여 생존 일반(有)이 생기고, 생존 일반을 반연하여 태어남(生)이 있고, 태어남을 반연하여 늙음과 죽음과 비애와 비통과 쓰라림과 괴로움과 절망 등이 생깁니다. 이 모든 시간의 과거의 궁극점(최초의 시작)은 분명히 인식되지 않습니다.
잘 대답하셨습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03. 시간의 시원(始源)은 인식되지 않는다
왕은 물었다.
그대는 모든 시간의 근원적 시작(始源)은 인식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비유를 들어주십시오.
대왕이여, 어떤 사람이 조그마한 씨알 하나를 땅에 심는다고 합시다. 그 씨알은 싹이 터서 점차로 성장하고 무성하여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 사람이 씨알을 받아 다시 땅에 심으면 또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이 종자(個體)의 연속에 끝이 있겠습니까.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시간의 근원적 시작은 인식되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비유를 들어주십시오.
닭이 알을 낳고, 그 알에서 닭이 생기고 또, 그 닭에서 알이 생겨납니다. 이 연속에 끝이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끝이 없습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시간의 근원적 시작은 인식되지 않습니다.
또 비유를 들어주십시오.
그때 나아가세나 존자는 땅에 원을 그려놓고 왕에게 물었다.
이 원둘레에 끝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대왕이여, 이와 같은 순환(循環)을 세존께서는, 눈(眼)과 형태(色)에 의하여 눈의 식별작용(眼識)이 생기고, 이들 셋이 화합했을 때 접촉(觸)이 생기고, 접촉을 연유하여 감수(受)가 생기고, 감수를 연유하여 갈애(愛)가 생기고, 갈애를 연유하여 갈구하는 행동(取 와 業)이 생기고, 행동(業)으로부터 또 다시 눈이 생겨난다.’고 하셨습니다. 연속에 끝이 있겠습니까.
끝이 없습니다.
나아가세존자는 그 밖의 감각 기관(귀,코,혀,몸,마음)의 하나 하나에 대해서 거기 알맞은 순환을 들어 반문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왕의 대답은 언제나 꼭 같았으므로 존자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대왕이여, 그와 같이 시간의 근원적 시작은 인식되지 않습니다.
잘 대답하셨습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04. 윤회하는 생존은 시작이 없다
왕은 물었다.
그대가 근원적 시작은 인식되지 않는다고 할 때, 그 ‘근원적 시작’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대왕이여, 사라져 버린 과거 시간은 모두 근원적 시작입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근원적 시작은 인식되지 않는다고 할 때, 그 근원적 시작은 어느 것이나 인식되지 않습니까.
어떤 것은 인식되고, 어떤 것은 인식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은 인식되고 어떤 것이 인식되지 않습니까.
대왕이여, 그 이전에는 무명이 어떤 형태나 양태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는, 그러한 근원적 시작은 인식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지금은 생겨나고, 생겨나기 시작하자마자 또 다시 사라져 가는, 그러한 시작은 인식됩니다.
존자여,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 것이 이제 생겨나고, 생겨나자 마자 곧 다시 사라져 간다면, 전후 양 끝에서 끊겨 없어지는 것입니까.
대왕이여, 만일 그것이 양 끝에서 끊겨 없어진다면, 끊겨진 것은 증대(增大)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증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묻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끊긴 지점(끝)에서 다시 증대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증대할 수 있습니다.
비유를 들어주십시오.
존자는 나무와 씨알의 비유를 되풀이 하고, 5온(五蘊)들이 모든 괴로움을 낳는 씨알이라고 설명했다. 왕은 아주 만족해 했다.
05. 윤회하는 생존이 성립하는 근거
왕은 물었다.
생겨나는 형성력(形成力=諸行)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입니까.
눈(眼)과 형태(色)가 있는 곳에 눈의 식별작용(識)이 있고, 눈의 식별작용이 있는 곳에 눈의 접촉(觸)이 있고, 눈의 접촉이 있는 곳에 감수(受)가 있고, 감수가 있는 곳에 갈애(渴愛=愛)가 있고, 갈애가 있는 곳에 집착(取)이 있고 집착이 있는 곳에 생존 일반(有)이 있고, 생존 일반이 있는 곳에 생겨남(生)이 있고, 생겨남이 있는 곳에 늙음과 죽음과 비애와 비통과 쓰라림과 괴로움과 실망 등이 있습니다. 이리하여 모든 괴로움이 생겨납니다. 이에 반하여 눈과 형상이 없는 곳에 눈의 식별작용이 없고, 눈의 식별작용이 없는 곳에 눈의 접촉이 없고, 눈의 접촉이 없는 곳에 감수가 없고, 감수가 없는 곳에 갈애가 없고, 갈애가 없는 곳에 집착이 없고, 집착이 없는 곳에 생존 일반이 없고, 생존 일반이 없는 곳에 생겨남이 없고, 생겨남이 없는 곳에 늙음과 죽음과 비애와 비통과 쓰라림과 괴로움과 실망 등이 없습니다. 이리하여 모든 괴로움에 종말이 옵니다.
잘 알겠습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06. 개인 존재의 형성력
왕은 물었다.
점차로 생성됨이 없이 생겨나는 형성력(諸行)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형성력은 모두 점차로 생성합니다.
비유를 들어주십시오.
대왕이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가 지금 앉아 있는 이 집은 갑자기 생겨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존자여, 갑자기 생겨난 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이 집의 각 부분은 점차적으로 생성되었습니다. 즉 집의 재목은 숲에서 나왔고, 진흙은 땅에서 나왔으며, 사람들의 노동에 의하여 이 집은 건축되었습니다.
대왕이여, 그와 같습니다. 점차적인 생성이 없이 생겨나는 형성력(諸行)은 하나도 없습니다. 형성력은 발전 과정에 의하여 생겨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비유를 들어주십시오.
모든 나무와 식물은 씨알이 땅에 심어지고 점차로 자라고 무성하고 성장하여 꽃이나 열매를 맺습니다. 그것들은 점차적인 생성이 없이 생겨 나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존재하는 발전 과정에 의하여 생겨나는 것입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점차적인 생성이 없이 생겨나는 형성력이란 없습니다. 형성력은 발전의 한 과정에 의하여 생겨납니다.
또, 비유를 들어주십시오.
옹기장이(陶工)는 땅 속에서 진흙을 파 가지고 여러가지 옹기를 만듭니다. 그 옹기들은 형성함이 없이 생겨난 것이 아니오, 현재 존재하는 발전 과정을 거쳐 생겨난 것입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점차적인 생성이 없이 생겨나는 형성력이란 없습니다. 형성력은 발전 과정을 거쳐 생겨납니다.
또, 비유를 들어주십시오.
대왕이여, 가령 만돌린에 줄 받침과 가죽과 빈 공간이 없고, 몸체(器體)와 목(頸部)과 줄과 활이 없고, 또 그것을 타는 사람의 알맞은 연주가 없다면 음악이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존자여.
그러한 모든 것이 있다면 소리가 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물론입니다.
대왕이여, 꼭 그와 같습니다. 점차적인 생성이 없이 생겨나는 형성력이란 없습니다. 형성력은 발전 과정을 거쳐 생겨납니다.
또 비유를 들어주십시오.
대왕이여, 가령 불을 일으키는 막대(鑽木)와, 비비 돌리는 막대(小鑽木)와, 돌리는 막대의 줄과, 매트릭스(上鑽木)와, 부시깃(火絨)이 없으며, 또 사람의 불을 일으키기에 적합한 노력이 없다면 불이 일어나겠습니까.
안 납니다.
그 모든 조건이 구비된다면 불이 일어나겠습니까.
일어납니다.
대왕이여, 꼭 그와 같습니다. 점차적인 생성이 없이 생겨나는 형성력이란 없습니다. 형성력은 발전 과정을 거쳐 생겨납니다.
비유를 더 들어주십시오.
대왕이여, 가령 불을 일으키는 돋보기와 태양열과 말린 쇠똥이 없다면, 불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안 납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것이 구비되면 불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일으킬 수 있습니다.
대왕이여, 꼭 그와 같습니다. 점차적인 생성이 없이 생겨나는 형성력은 없습니다. 형성력은 발전과정을 거쳐 생겨납니다.
또 하나 비유를 들어주십시오.
대왕이여, 가령 거울도 광선도 없으며 거울 앞에 오는 얼굴이 없다면 얼굴 모습(相)이 나타나겠습니까.
안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주어진다면 얼굴 모습이 거울에 비치겠습니까.
대왕이여, 꼭 그와 같습니다. 점차적인 생성이 없이 생겨나는 형성력은 없습니다. 형성력은 발전의 한 과정에 의하여 생겨납니다.
잘 알겠습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07. 베다구우(靈的인 것)에 관하여
왕은 물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베다구우(靈的인 것)가 있습니까.
장로는 반문했다.
대왕이여, 베다구우란 대체 무엇입니까.
왕은 말했다.
안에 있는 생명 원리(個我)는, 눈에 의하여 형상(色)을 보고, 귀에 의하여 소리를 듣고, 코에 의하여 냄새를 맡고, 혀에 의하여 맛을 보고, 몸(身)에 의하여 촉감을 느끼고, 마음(意)에 의하여 사상(事象 즉 法)을 식별합니다. 마치 여기 궁전에 앉아 있는 우리가 동, 서,남,북,어느 창문으로든 내다보고 싶은 창문으로 내다 볼 수 있는 것처럼, 안에 있는 생명 원리는 내다 보고 싶은 어느 문으로든지 내다 볼 수 있습니다.
장로는 대답했다.
대왕이여, 5개의 문에 관해서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잘 주의해 들어주십시오. 만일 안에 있는 생명원리가 대왕이 말씀하신 것처럼, 창문을 마음대로 고르듯이 눈에 의하여 형상을 볼 수 있다면, 눈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그 밖의 5개의 감관의 하나 하나에 의해서도 형상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소리를 듣는 것, 냄새를 맡는 것, 맛을 보는 것, 촉감을 느끼는 것, 사상(法)을 식별하는 것에 있어서도 다른 5개의 감관(感官)의 어느 것에 의해서나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즉 한 경우만이 아니라 모든 경우를 다 지적해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말한 것(창문과 감관을 비교하는 것)은 앞 뒤가 잘 들어 맞지 않습니다. 여기 궁전에 앉아있는 우리가 창문을 모두 열어 제치고 얼굴을 밖으로
내밀어 큰 허공을 본다면 모든 대상을 보다 분명하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눈의 문이 제거(除去)될 때 안에 있는 생명 원리는 모든 대상을 보다 더 명백하게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뿐 아니라 소리를 듣는 것, 냄새를 맡는 것, 맛을 보는 것, 촉감을 느끼는 것, 사상을 식별하는 것 등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 문들이 제거될 때 역시 그렇지 않겠습니까.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말한 것은 앞 뒤가 잘 들어 맞지 않습니다. 대왕이여, 여기 딘나(사람 이름)가 밖에 나가 문간에 서 있다고 합시다. 대왕은 딘나가 밖에 나가 문간에 서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딘나가 다시 돌아와 대왕 앞에 서 있다고 합시다. 대왕은 딘나가 다시 돌아와 대왕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알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어떤 맛을 지닌 것이 혀 위에 놓여졌을 때, 식별하는 생명 원리(個我)는 그것이 시다던가 짜다든다 쓰다던가 맵다던가 떫다던가 달다든가 하는 사실을 알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러나, 맛을 지닌 것이 위(胃) 속으로 들어갔을 때도 생명 원리(個我)는 맛을 알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대왕이여, 그대 말은 앞뒤가 잘 들어맞지 않습니다.
대왕이여, 가령 어떤 사람이 백 개의 꿀 접시를 꿀통에 쏟은 다음, 어떤 사람의 입을 틀어막고 꿀이 가득들어 있는 그 통 속에 던졌다고 합시다. 통속에 던져진 사람은 단맛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겠습니까.
존자여, 그는 꿀맛을 모릅니다.
어째서 모릅니까.
꿀이 그 사람의 입속으로 들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왕이여, 그대의 말은 앞 뒤가 잘 들어맞지 않습니다.
존자여, 나는 그대와 같은 논자에게는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 도리를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래서 장로는 아비담마 론으로부터 도출된 이론으로 써 밀린다 왕을 설득시켰다.
대왕이여, 눈과 형상(色)에 의하여 눈의 식별작용이 생기고 그 밖에 접촉(觸)과 감수(感受 )와 표상(表象態)과 의사(思)와 통일작용(作意 즉 추상)과 생명감과 주의력 등이 함께 생겨납니다. 그리고 이것들과 유사한 인과(因果)의 연속은 감각 기관이 작용하게 될때 일어납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사상(事象=法)은 연(緣)을 따라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베다구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08. 감각(感覺)과 통각(統覺)에 관하여
왕은 물었다.
눈의 식별작용(眼識)이 일어나는 곳에는 어디나 마음의 식별작용(意識)도 일어납니까.
그렇습니다. 대왕이여, 눈의 식별작용(眼識)이 일어나는 곳에는 어디나 마음의 식별작용(意識)도 일어 납니다.
둘 중 어느 것이 먼저 일어납니까.
안식(眼識)이 먼저 일어나고 의식(意識)이 다음에 일어납니다.
그러면 안식이 의식에게 ‘내가 일어나는 곳에 너도 일어나라’고 명령합니까. 아니면, 의식이 안식에게 ‘네가 일어난 곳에 나도 일어나겠다’고 일러줍니까.
대왕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상의(相議)도 없습니다.
그러면, 존자여, 안식이 일어나는 곳에 어떻게 하여 의식이 일어납니까.
경향(傾向=下行)과 문(門=向門)과 습관(習慣)과 습숙(習熟)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여 그러합니까. 경향이 있기 때문에 안식이 생기는 곳에 의식이 생기는 비유를 들어주십시오.
대왕이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비가 내릴 때 물은 어디로 흘러갑니까.
지면의 경사를 따라 흐릅니다.
비가 또 내린다면 그 물은 어디로 흘러 갑니까.
첫 번째 물이 흘러간 것과 같은 길로 흘러갑니다.
그러면, 어째서 그러합니까. 첫 번째 물이 두 번째 물에게 ‘내가 흘러가는 곳으로 너도 흘러가라’고 명령합니까. 아니면 두 번째 물이 첫 번째 물에게 ‘네가 흐르는 곳으로 나도 흐르겠다’고 일러줍니까.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상의도 없습니다. 각자가 지면의 경사(傾斜)를 따라 흘러갑니다.
대왕이여, 꼭 그와 같습니다. 안식이 일어나는 곳에 의식이 일어나는 것은 경향성(傾向性) 때문입니다. 안식이 의식에게 ‘내가 일어난 곳에 너도 일어나라’고 명령하지도 않으며, 의식이 안식에게 ‘네가 일어난 곳에 나도 일어나겠다’고 상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도 없습니다. 그와 같이 일어나는 것은 모두가 경향성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러면 안식이 생기는 곳에 의식이 생기는 것은, 문이 있기 때문이라는 비유를 들어주십시오.
대왕이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가령 어떤 왕에게 변방 도성(都城)이 있는데, 그 성은 망탑(望塔)과 성벽으로 튼튼하게 쌓여 있고 문이 단 하나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그 도성으로부터 나가려고 한다면 어떻게 나가겠습니까.
그 성문으로 나가겠습니다.
만일 딴 사람이 또 그 도성을 떠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또 어떻게 나가겠습니까.
첫 번째 사람과 꼭 같은, 성문으로 나가겠습니다.
어째서 그러합니까. 먼저 사람이 다음 사람에게 ‘너는 내가 나가는 곳으로 나가라’고 일러주었습니까. 아니면 다음 사람이 먼저 사람에게 ‘네가 나가는 곳으로 나도 나가겠다’고 말했습니까.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성문이 있기 때문에 그 곳으로 나갑니다.
대왕이여, 안식과 의식에 있어서도 꼭 그러합니다.
그러면, 안식이 생기는 곳에 의식이 생기는 것은 습관이 있기 때문이라는 비유를 들어주십시오.
대왕이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한 수레가 앞서 갔다면 다음 수레는 어느 길로 가겠습니까.
처음 수레와 똑같은 길로 가겠습니다.
앞수레가 뒷수레에게 ‘자기가 간 곳으로 가라’고 말했습니까. 아니면, 뒷수레가 앞수레에게 ‘내가 간 곳으로 가겠다’고 말했습니까.
존자여, 그렇지 않습니다. 두 수레 사이에는 아무런 통화도 없었습니다. 다음 수레가 습관성에 의하여 처음 수레를 따라 갑니다.
대왕이여, 안식과 의식에 있어서도 꼭 그러합니다.
그러면 습숙(習熟)이 있기 때문에 안식이 생기는 곳에 의식도 생긴다는 것을 비유로 설명해 주십시오.
대왕이여, 부호술(符號術 또는 印術) 산술(算術), 목산(目算), 습자(習字)의 기술에 있어서 초보자는 처음에 서투르지만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세심한 주의와 연습에 의하여 숙달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습숙에 의하여 안식이 일어나는 곳에 의식도 일어납니다.
존자는 그 밖에 청각이나 미각이나 후각이나 촉각들의 식별작용이 있는 곳에 마음의 식별 작용(意識)도 일어난다는 것을 같은 방법으로 설명했다. 다시 말하면 의식(통각)은 어느 경우에나 감각에 이어 일어나지만, 양자 사이에는 교제나 통신이 있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언명했다.
왕은 또 물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의식(통각)이 있는 곳에 언제나 감수도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의식이 일어나는 곳에는 접촉(觸)과 감수(受)와 표상(想)과 의향(思)과 성찰(省察)과 고찰(考察)들이 있습니다.
09. 접촉(接觸=觸)의 특징에 관하여
왕은 물었다.
존자여, 접촉(觸 팟사)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대왕이여, 맞부딪침입니다.
비유를 들어주십시오.
대왕이여, 두 마리 숫양이 (뿔)싸움을 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눈(眼)은 한편의 숫양으로 볼 것이오, 형상(色)은 딴 편의 숫양으로 볼 것이며, 접촉(觸)은 두 양의 맞부딪침으로 볼 것입니다.
다시 한번 비유를 들어주십시오.
그것은 두 개의 심벌로 (악기 이름 婆羅)마주치는 경우와 같습니다. 눈은 한 쪽의 심벌로 볼 것이오, 형상은 다른 한 쪽의 심벌로 볼 것이며, 접촉은 두개의 심벌이 마주치는 것으로 볼 것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10. 감수(感受=受)의 특징에 관하여
존자여, 감수(受)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경험함으로 고락을 향수하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어주십시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왕의 정무(政務)를 맡아 처리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왕은 그 사람이 마음에 들어 정무를 맡겼습니다. 그는 정무를 수행하는 동안 5가지 욕망을 달성하고 만족하여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즉 ‘왕은 나에게 만족하여 정무를 맡기셨고, 나는 정무를 처리해 왔다. 나는 정무를 수행함으로 지금 이러한 감수(受)를 경험하고 있다.’고. 또 이런 경우와도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선행(善業)을 짓고 죽어서 육신이 없어진 다음, 천국(天界)에 축복받는 행복한 상태로 왕생하여 천국의 5욕(五欲)을 이루고 만족하여,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즉, ‘나는 전생에 선행을 닦았으므로 지금 이러한 감수(受)를 경험하고 있다.’고. 대왕이여, 이와같이 경험함으로 고락을 향수하는 것이 감수의 특징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11. 표상(表象=相)의 특징에 관하여
나아가세나 존자여, 표상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대왕이여,인식함(認知)입니다. 즉 파랑, 노랑, 빨강, 백색, 갈색 등을 인식함과 같습니다.
비유를 들어주십시오.
대왕이여, 이를테면 왕의 재무관(守藏官)이 왕의 보물 창고에 들어가서 청,황,적,백,갈색의 보물을 보고, 그것들이 왕의 재보(財寶)라고 인식하는 것과 같습니다. 대왕이여, 이와 같이 인식함(認知)이 표상의 특징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12. 의사(意思=思)의 특징에 관하여
나아가세나 존자여, 의사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대왕이여, 그것은 마음 먹음(意思,思已)과 형성함(形成, 爲作)을 특징으로 합니다.
비유를 들어주십시오.
대왕이여,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독을 마련하여 자기 자신도 마시고, 남에게도 마시게 하면 자신도 고통을 받고, 남도 고통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나쁜 짓(不善行)을 하려고 마음먹고, 그렇게 하면 죽어서 육신이 없어진 다음, 지옥의 괴로움에 찬 불행한 상태로 다시 태어날 것이며, 그의 말을 따라간 사람들도 역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또, 이런 경우와도 같습니다. 대왕이여, 어떤 사람이 버터 기름과 버터와 기름과 벌꿀(蜂蜜)과 당밀(糖蜜)의 혼합물을 만들어 자기 자신도 마시고 남에게도 마시게 한다면, 자신도 즐겁고 남도 즐거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착한 일(善業)을 하려고 마음 먹고 그렇게 하면, 죽어서 육신이 없어진 다음, 천국(天界)에 축복받는 행복한 상태로 다시 태어날 것이며, 그 사람의 충고대로 따라간 사람들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대왕이여, 이와 같이 마음먹음과 형성함이 의사(意思)의 특징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13. 식별작용(識別作用=識)의 특징에 관하여
나아가세나 존자여, 식별 작용(識)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대왕이여, 구별해 앎(三別)입니다.
비유를 들어주십시오.
대왕이여, 이를테면, 도시의 수위가 도시 한 복판 네거리에 앉았을 때, 사람들이 동,서,남,북 4방 어디로부터 오는가를 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사람은 식별 작용에 의하여 눈으로 보는 대상물과 귀로 듣는 소리와, 코로 맡는 냄새와, 혀로 맛보는 맛과, 몸으로 닿는 접촉물과, 마음으로 인식하는 사상(事象=法)들을 압(三別)니다. 대왕이여, 이와 같이 구별해 알아봄이 식별작용의 특징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14. 성찰(省察=尋)의 특징에 관하여
나아가세나 존자여, 성찰(尋)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목적 수행을 특징으로 합니다.
비유를 들어주십시오.
대왕이여, 이를테면 목공이 잘 다듬어진 목재를 잇장(이음매)에다 고정시키는 목적을 수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목적 수행이 성찰의 특징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
15. 고찰(考察=伺)의 특징에 관하여
나아가세나 존자여, 고찰(伺)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계속해서 생각해 냄(繼續的 追思惟)입니다.
비유를 들어주십시오.
동라(징같이 생긴 타악기)를 칠 때, 계속 여운이 생기는 경우와 같습니다. 이때 동라를 치는 것은 성찰로 볼 것이며, 여운은 고찰로 볼 것입니다. 대왕이여, 이와 같이 계속해서 생각해 냄이 고찰의 특징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나아가세나 존자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