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라후라의 인연
나는 일찍이 들었다.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집을 떠나는 밤에 부처님의 아들 라후라(羅羅)가 비로소 어머니 태에 들었다.
실달보살(悉達菩薩:부처님)은 6년 동안 고행하여 보리수 밑에서 네 악마를 항복받고 온갖 가림덮개[陰蓋]를 없애고 활연히 깨달아 위없는 도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를 두루 갖추고, 18불공법(不共法)을 성취하고, 4변재(辯才)를 갖추어 모든 길에서 저 언덕에 이르게 되고, 여러 부처의 법을 밝게 알아 모든 성문과 연각에서 뛰어났다.
처음으로 성도한 밤에 라후라가 태어났다. 온 궁중의 궁녀들은 모두 창피하게 여겨 크게 걱정하고 번민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괴상한 큰 죄악이다. 야수타라(耶輸陀羅)는 옳고 그름을 생각하지 않고 경솔한 짓으로 스스로 삼갈 줄 몰라 우리 온 궁중을 모두 더럽혔다. 실달보살이 집을 떠난 지 이미 오래인데, 이제 갑자기 아이를 낳았으니, 이것은 큰 치욕이다.”
그 때 전광(電光)이라는 석씨의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바로 야수타라 이모의 딸이다. 그는 화를 내어 가슴을 치면서 야수타라를 꾸짖어 말하였다.
“너는 존장(尊長)의 친족으로서 왜 스스로 업신여기느냐? 실달 태자는 집을 떠나 도를 배운 지 이미 6년이 지났는데 이 아이를 낳았으니, 이것은 도저히 때가 맞지 않는다. 누구를 보았느냐? 너는 부끄럼도 없이 우리 종족을 욕되게 하였다. 종족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쁜 이름을 면하지 못한다.
실달보살은 큰 공덕이 있고 좋은 이름이 널리 퍼졌는데, 너는 왜 그를 아끼지 않고 이제 욕되게 하느냐?”
그 때 정반왕은 누각 위에 있다가 대지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면서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보살이 죽었다고 생각하고는, 근심 화살이 가슴을 찔러 심히 괴로워하면서 말하였다.
‘내 아들의 계율 향기는 사방에 가득 찼고, 상호는 장엄하여 연화만(蓮花?)과 같았다. 그런데 오늘 죽는 날에 그것은 모두 말라 버렸다.
계율의 깊고 든든한 뿌리와 부끄러움의 가지와 잎사귀며, 명예의 향기와 큰 자비의 두터운 그늘로서, 내 아들은 큰 나무와 같았는데, 이제 죽음의 코끼리에게 짓밟혔구나.
내 아들은, 크기는 금산과 같아서 온갖 보배로 장엄한 금산의 왕으로 상호가 장엄한 그 몸은 이제 무상(無常)의 금강저(金剛杵)에 모두 부서졌구나.
마치 큰 바다에 온갖 보배가 가득 찼을 때 저 마갈어가 바닷물을 휘젓는 것처럼, 내 아들의 큰 바다도 그와 같아서 죽음의 마갈어의 침노를 받았구나.
보름달이 뭇 별들에게 둘러싸인 것처럼, 내 아들도 그와 같이 한량없는 공덕과 장엄한 상호가 지금 무상의 라후라에게 먹히었구나.
우리 종족은 대장부에서 로월(盧越)·진정(眞淨) 등 이런 왕이 서로 이어 오늘에 이르렀는데, 장차 우리 종족이 끊어지지 않겠는가?
특히 내 아들이 전륜성왕이 되거나 혹은 불도를 이루기를 바랐는데, 과연 지금 죽었을까? 만일 내 아들을 잃는다면 나는 반드시 근심 끝에 쇠약하여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아들이 출가하여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다니면서 감로법(甘露法)을 널리 연설하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갖가지 일을 보지 못하게 되었구나.’
그는 아들을 생각하고 이와 같이 갖가지로 근심하였다.
그 때 궁중에서 소리를 높여 크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왕은 더욱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태자가 죽었다 생각하고, 앞으로 달려가는 하녀에게 물었다.
“저것은 곡성이냐? 내 아들이 죽지는 않았는가?”
하녀는 아뢰었다.
“태자님은 죽지 않고, 야수타라가 지금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온 궁중이 창피하다 하여 우는 것입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더욱 걱정하고 괴로워하면서 소리내어 울고 부르짖으며 외쳤다.
“괴상한 일이다. 아주 더럽고 욕된 일이다. 내 아들이 집을 떠난 지 이미 6년이 지났는데 이제 아이를 낳다니. 그 때 그 나라 법에는 북을 한 번 치면 모든 군사가 모이고, 9만 9천 석씨들이 모두 모이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모여 야수타라를 불렀다.
야수타라는 희고 깨끗한 옷을 입고 아이를 품에 앉고 있으면서 전연 놀라거나 두려워함이 없이 친족들 속에 서 있었다.
지팡이를 든 어느 석씨가 안색을 고치고 화를 내어 야수타라를 꾸짖었다.
“이 더러운 것아, 너무도 창피한 일이다. 우리 종족을 욕되게 해 놓고 무슨 낯짝으로 우리 앞에 섰느냐?”
비뉴천(毘紐天)이라는 석씨가 있었는데 그는 야수타라의 외삼촌이다. 그는 야수타라에게 말하였다
“더럽고 어리석기 너보다 더할 이가 없을 것이다. 외삼촌에게 사실대로 말하라. 너는 어떤 놈 한테서 그 아이를 얻었느냐?”
그러나 야수타라는 조금도 부끄럼이 없이 정직하게 말하였다.
“집을 떠난 종족 실달에게서 이 아이를 얻었습니다.”
정반왕은 이 말을 듣고 화를 내면서 말하였다.
“그 아이를 생각하지 않고 딴 말을 하는구나. 참이거나 거짓이거나 여러 석씨들은 다 안다.
내 아들 실달은 본래 집에 있을 때부터 5욕(欲)이 있다는 말을 귀로도 듣지 않았는데, 하물며 욕심이 있어 아이를 낳았겠느냐? 그 따위 말은 실로 야비하고 무례하다. 누구에게서 아이를 얻어 가지고 우리를 욕되게 하는가? 그것은 진실로 거짓이요 정직한 법이 아니다.
내 아들 실달은 옛날 집에 있을 때 어떤 보물이나 맛난 음식에도 조금도
집착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물며 지금 고행하면서 하루에 마미(麻米) 하나를 먹고 있을 때이겠느냐?”
그런 비방을 듣고 정반왕은 더욱 화를 내어 여러 석씨들에게 물었다.
“지금 저것을 어떻게 괴롭고 독하게 죽이면 좋을까?”
어떤 석씨는 말하였다.
“내 생각 같아서는 불구덩이를 만들고, 저 모자(母子)를 그 속에 던져 조금도 남는 것이 없게 하였으면 합니다.”
여러 사람도 모두 그것이 가장 좋다 하고, 곧 불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거타라(?陀羅) 나무를 쌓아 불을 붙이고는 야수타라를 끌고 그 곁으로 갔다.
야수타라는 그 불구덩이를 보고서야 비로소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마치 들사슴이 혼자 동산에 있을 때 아무 데도 의지할 곳이 없는 것처럼, 야수타라는 스스로 꾸짖되, 아무 죄도 없는데 이런 화를 받는다 하고, 여러 석씨들을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자기를 구원할 이가 없었다.
그래서 야수타라는 아기를 안고 길이 탄식하고는, 보살을 생각하면서 ‘당신은 자비가 있어 일체 중생을 가엾이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하늘과 귀신들도 모두 당신을 공경합니다.
지금 우리 모자는 복이 엷어 아무 죄도 없이 고통을 받는데, 보살은 왜 생각하지 않으며, 왜 우리 모자를 오늘의 이 액운에서 구하시지 않습니까? 어떤 하늘 선신도 우리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옛날 보살이 여러 석씨들 가운데 계실 때에는 마치 보름달이 뭇 별 가운데 있는 것과 같았는데, 지금은 다시 볼 수 없습니다’ 하고, 곧 부처님 계신 곳을 향하여 일심으로 경례하였다. 그리고 다시 여러 석씨들에게 절하고는 불을 향해 합장하고 진실한 말을 하였다.
“이 아이는 진실로 남에게서 생긴 것이 아니다. 만 6년 동안 내 태 안에 있은 사실이 진실이요 거짓이 아니라면 마침내 이 불은 우리 모자를 태워 죽이지 않고 스스로 꺼질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곧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자 그 불구덩이는 못으로 변하고 자기 몸은 연꽃 위에 있음을 보았다.
그녀는 조금도 두려움이 없이 온화하고 즐거운 안색으로 여러 석씨들을 향해 합장하고 말하였다.
“만일 내 말이 거짓이었더라면 곧 타 죽었을 것입니다. 이 아이는 진실로 보살의 아들입니다. 나는 진실한 말로 불의 화를 면하였습니다.”
어떤 석씨는 말하였다.
“그 형상을 보면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로 미루어 보아 그것이 진실인 것을 알 수 있다.”
또 어떤 석씨는 말하였다.
“불구덩이가 맑은 못으로 변하였다. 그것을 증험하여 그의 허물이 없음을 알겠다.”
그 때 여러 석씨들은 야수타라를 데리고 궁중으로 돌아가, 더욱 공경하고 찬탄하였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유모를 구하여 아들을 받들어 섬기게 하였는데 처음 낳은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할아버지 정반왕은 손자를 매우 사랑하고 소중히 여겨 라후라가 보이지 않으면 밥을 먹지 않았다. 그리고 보살 생각이 날 때에는 라후라를 안고 그 시름을 잊었다.
간략히 이 사실을 말하면, 6년이 지난 뒤에 정반왕은 부처님을 간절히 사모하여 사람을 보내어 부처님을 청하였다. 부처님께서는 가엾이 여겨 본국으로 돌아가셨다. 석씨 궁전에 이르시자 부처님께서는 1천 2백50 비구로 변하셨다. 그들은 모두 부처님 몸과 같았고, 빛나는 모양도 다름이 없었다.
야수타라는 라후라에게 말하였다.
“어느 분이 너의 아버지시냐? 그 곁으로 가라.”
그 때 라후라는 부처님께 나아가 예배하고, 부처님의 왼쪽 발 곁에 섰다. 부처님께서는 곧 한량이 없는 겁 동안 닦은 공덕으로 된, 바퀴 모양이 있는 손으로 라후라의 정수리를 어루만지셨다.
그 때 여러 석씨들은 모두 이렇게 생각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지금도 사사로이 사랑하는 마음이 있구나.”
부처님께서는 여러 석씨들의 마음 속 생각을 아시고, 다음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왕의 권속이나
또 낳은 아들을
치우치게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다만 손으로 정수리를 만졌다.
나는 갖가지 번뇌 다하여
사랑과 미움이 아주 다 없어졌다.
너희들은 의심을 가지지 말라.
아들에 대하여 망설이고 있다고.
이 애도 장차 집을 떠나게 하여
거듭 나의 법 아들로 만들 것이니
그의 공덕을 간단히 말하면
이 애는 집을 떠나 참도를 배워
반드시 아라한을 이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