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함경 25.자비(慈悲)

25. 자비(慈悲)

가르침의 도리를 잘 이해한 사람이

자유의 경지에 이른 다음에 할 일은 이것이니,

유능, 솔직하고 그리고 단정할 것,

좋은 말을 하고 유화하고 거만하지 않을 것.

족한 것을 알고 과욕(寡慾)할 것,

잡스러운 일에 매이지 않고 간소하게 살아갈 것,

오근(五根;다섯 가지 감각 기관. 눈, 귀, 코, 혀, 피부)이 청정하여 총명, 겸허할 것,

단월(檀越;시주. 즉 보시를 하는 사람)의 집에 가서 탐심을 내지 말 것.

더러운 짓을 하여 식자의 비난을 사지 말라.

오직 이런 자비심을 닦을지니,

일체의 생명 모든 사람에게

행복과 평화와 은혜 있으라고.

비록 어떤 사람이거나

두려움에 떠는 범부거나, 깨달아서 두려움 없는 성자거나

키 큰 사람이거나, 그 몸이 비대한 사람이거나

중간쯤 되는 사람이거나, 작은 사람이거나, 말하기에도 부족한 사람이거나

눈에 보이는 사람이거나, 보이지 않는 사람이거나

멀리 있는 사람이거나, 가까이 있는 사람이거나

이미 태어난 사람이거나, 앞으로 태어날 사람이거나

일체의 생명 모든 사람에게 행복 있으라고.

서로 남을 속이지 말며

어디의 누구에게라도 경멸하는 생각을 지니지 말라.

분하다든지 또는 밉다 하여

남이 고통에 빠질 것을 원하지 말라.

마치 어머니가 그 외아들을

자기 목숨을 걸어 지켜 가는 것처럼

일체의 생명 또는 사람에게

끝없는 자비심을 베풀라.

참으로 일체의 세간 위에

끝없는 존재 위에 그 마음을 베풀라.

높은 데 깊은 데 또 사방에 걸쳐

원한 없는 적의 없는 그 생각을 쏟아라.

설 때나 길을 갈 때나 앉을 때나 누울 때나

깊은 잠에 빠져 있지 않는 한

힘을 다해 이 생각을 지니라.

이에 ‘성스러운 경지’라 함은 이것이니라. ([小部經典] 經集 1:8 慈經)

매우 긴 인용이지만, 이것은 소부 경전에 속하는 [스타니파타(Suttanipata)]에 수록되어있는 ‘자경(Metta-sutta)’의 거의 전부에 해당한다(마지막의 한 게만을 뺀 것). 옛 주석에 의하면 설산 즉 히말라야산 기슭에서 저마다 따로 떨어져서 수도하고 있는 비구들이 자주 도깨비 같은 것 때문에 고생하다는 말을 들은 붓다가 그들을 위해 설한 것이 이 경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경은 흔히 자호주(慈護呪;Metta-paritta)라고도 불린 듯하다. 호주라고 하면 자칫 오해를 불러 일으킬 염려가 있기에 말해 두는 것이지만, 그것을 결코 주문이나 주술적인 것으로 알아서는 안 되겠다. 이성의 사람인 붓다에게는 그런 점이란 전혀 없었던 것이 사실이며, 대승 경전에 나타나는 주문이라든지, 심지어는 진언종(眞言宗)의 주장 같은 것은 붓다의 뜻에서 먼 것임을 명백히 해 두어야하겠다.

붓다는 자주 제자들이나 재가 신자들에게 게(운문)를 주어서, 그것을 되풀이하여 외게 함으로써 문제를 해결시킨 일이 있었다. 앞에도 나왔거니와 코사라 국의 파세나디 왕이 과식으로 말미암아 몸이 비대해지고 숨이 차서 고생하는 것을 보았을 때는

사람이란 스스로 헤아리어서

양을 알아 음식을 먹어야 하리.

그러면 괴로움도 적을 것이며

더디 늙고 수명도 보존하리라.

라는 게를 주었던 것이었다. 왕은 시중드는 아이를 시켜 끼니때마다 그 게를 부르게 하고 차차 음식의 양을 줄여 갔기 때문에 마침내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게 자체에 어떤 주술적인 신비한 힘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자꾸 그 게를 들음으로써 마음이 각성되어 드디어는 좋은 결과를 낳았다고 보아야 하리라.

또 하나 보기를 들면, 붓다가 전도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의 일이거니와, 라자가하(王舍城)의 젊은이들이 다투어 출가하여 붓다의 제자가 되었다. 그 때문에 라자가하의 주민들 사이에 불안한 공기가 떠돌아, 탁발하는 붓다의 제자들은 가끔 원성을 들어야 했다. 사문 고타마가 자기들의 자식을 뺏고 남편을 뺏는다는 불평이었다. 그런 비난으로 고민하는 재자들에게 붓다는 한 게를 설해 주었다.

여래는 법으로써 사람을 인도하거니

법에 오는 것을 시기함은 그 누구뇨.

그리하여 제자들은 원망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이 게를 외면서 탁발했다. 그랬더니 7일 뒤에는 잠잠해졌다고 한다. 이것 역시 그 게가 그 무슨 주술적인 구실을 했기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게가 듣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법에 대한 존경심을 불러일으킨 까닭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제 독거 생활을 하고 있는 수도승들에게 이 경의 게가 자호주(慈護呪)로서 받아들여졌다는 것도 역시 그것이 어떤 주술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유령이나 도깨비를 물리쳤다는 것은 아니리라. 도리어 그 게를 밤낮 없이 욈으로써 일체의 생명과 모든 사람에 대한 자비심으로 가슴이 가득 찬 비구들은 이미 독거에서 오는 고독감이나 공포도 느끼지 않게 되고, 히말라야의 황량한 위력 같은 것도 문제로 느끼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자비심이라는 것은 그럴 정도로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자경’의 내용을 따라 약간 그 요점에 대해 해설을 시도해 보겠다.

먼저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은 이 경의 전체적인 구성이다. 이 경은 말할 것도 없이 자비를 주제로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경은 우선 자기의 수행(修行)부터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무릇 붓다의 가르침이란 철두철미 하나의 행(行)이라고 할 수 있다. 가르침이라고 하면 왠지 학문적인 느낌이 들고, 이해하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생각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붓다가 설한 가르침이란 어디까지나 진리에 의해 살아갈 것을 말씀한 것이지, 결코 공리공론을 내세운 것은 아니었다. 붓다가 영원이니 내생이니 하는 문제에 대해 대답하기를 거부한 것도 그것이 수행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음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이른바 붓다의 깨달음이라는 것도 그것을 어떤 인식이라고 안다면 큰 오해를 범한 것이 된다. 그것은 인식을 넘어선 지행(知行) 일치의 세계, 아니 지행 이전의 더 근본적인 하나의 체험이었던 것이니, 불교가 행(行)으로써 근본을 삼는 것도 다 그 때문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불교인이란 먼저 그 가르침을 잘 이해해야 되겠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수행을 거듭하여 열반의 경지에 도달해야 된다. 열반이란 지식상의 문제가 아니라 위대한 체험의

세계이다. 여기에 이르지 못하고서는 일체의 언설과 지식이 소용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먼저 수행에 의해 열반, 즉 ‘자유의 세계’에 이를 것이 강조된 것이겠다.

그러나 여기서 자칫 오해가 생기기 쉽다. 열반에 도달하면 그것으로 만사가 끝난 듯 생각하는 착각이 그것이다. 과거에 위대했던 불교인 중에도 그런 함정에 빠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어떤 깨달음에 도달했다고 해서 그 순간부터 계율을 무시하고 엉뚱한 행동을 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은 으레 ‘대승’을 내세웠지만, 대승, 소승의 구별이 본래 무의미함을 우리는 앞에서 보았다. 어떤 명목에서건 비구가 자기의 청정한 행동을 포기한다는 것은 분명히 타락이라고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태도는 자유니 깨달음이니 하는 것에 도리어 얽매여 버린 것이어서, 진정한 자유도 아니요 진정한 깨달음일 수도 없다. 그러기에 붓다는 “자유의 경지에 이른 다음에 할 일은 이것이다.”라고 못 박고 계시는 것이다. 이 ‘자경’에서 볼 때 이 한 행의 말씀은 이제부터 설하려 하는 주문에 대한 하나의 전제 구실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거니와, 이것은 이것대로 모든 불교인에게 큰 경종이 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닌 줄 안다.

자유의 경지 즉 열반에 이르렀을 때, 해야 할 일은 더욱 많아지는 것이다. 지금껏 갖은 애를 다 써서 자기를 단련한 것은 목숨이 다할 때까지 이 삶을 훌륭히 살아가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 사회에 나와 훌륭한 사회인이 되고자 하는 소망 때문인 것과 같다. 대학을 졸업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그 사람의 인생이 끝나 버린다면, 그때까지 받은 교육이라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물론 열반의 경지를 대학 졸업에 비유한다는 것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물론 열반의 경지를 대학 졸업에 비유한다는 것은 적당하지가 못하다. 열반의 경지는 바라기만 하면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며, 피나는 노력을 했다고 해서 반드시 보장되는 길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열반의 획득이라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장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거기에서 그쳐도 좋다는 이론은 나올 수 없다. 백만 명에 하나도 얻기 어려운 것을 얻었기에 그 사람에게는 더욱 해야 될 일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 사람에게는 먼저 유능할 것이 요구된다. 깨달았다고 하여, 열반에 도달하였다고 하여, 그에게 그대로 어떤 방편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람을 바른 길로 인도할 자격과 능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대로 구제의 실현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시 여러 가지 일을 배워야 한다. 특히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그런 것에 통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어떻게 그들을 이끌어 가야 할지 그 방법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 이점에서도 붓다는 훌륭한 수범을 끼쳐 놓았다. 이미 앞에서 말한바 있지만, 붓다는 자기가 체득한 진리를 그대로 설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것을 체계화하고 몇 개의 조항으로 요약함으로써 누구나 알아듣기 쉽도록 만들었다. 또 그는 상대의 질문에 따라 그때마다 거기에 알맞은 설명을 해줄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인들이 본받아야 할 ‘유능’이리라.

다음으로 요구되는 덕목은 솔직이다. 두 점을 연결하는 가장 짧은 거리는 직선이라고 하거니와, 솔직처럼 위대한 힘을 발휘하는 것도 드물터이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힘에 대해서는 저항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지만, 이 솔직이라는 덕 앞에서는 아주 간단히 무릎을 꿇기 때문이다. 붓다는 어떤 경우에라도 책략을 쓴 적이 없다. 누구에게나 진정을 그대로 쏟아 놓았다. 그가 위로는 왕공으로부터 밑으로는 천민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귀의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솔직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말은 그의 수도 과정에 대해서도 할 수 있다. 붓다는 왕족 계급으로 태어났다. 비록 작은 나라이었을망정 그의 일생은 부귀가 약속되어 있었다. 그는 자기의 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출가가 필요하다고 느끼자, 서슴없이 그것을 단행하였다. 그것을 용기라고 하면 용기임에 틀림없겠으나, 그의 솔직한 성품이 발휘된 것이라고 보는 편이 낫겠다. 아니 솔직이야말로 더없는 용기임에 틀림없다.

그는 출가하자 전통적 종교의 관습에 따라 고행에 전념했다.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그리고 열심히. 그러나 그것이 그릇된 방법임을 자각한 순간, 헌신짝을 벗어 던지듯이 그것과 결별하기를 주저치 않았다. 이것도 후세에서 생각하기에는 당연한 일인 듯 여겨지지만, 당시의 사정에서는 여간 큰 결단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기실 옳고 그른 기준을 남에게 두고 살아간다. 그리하여 남이 칭찬하면 자기 행위가 옳은 것으로 알고, 한 사람이라고 비난할 때에는 꺼림칙하게 느끼는 것이 보통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정당하고 성스럽다고 여기고 있는 고행을 단호히 부정하고 나선다는 것은 여간해서 될 일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를 타락했다고 손가락질할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는 그것을 단행하였다. 그것도 그의 솔직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는 여기에서 붓다가 오로지 진리에만 기준을 두고 살아 왔음을 알게 되며, 솔직한 그의 태도도 거기에서 말미암은 것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솔직이란 진리에만 입각해서 행동하라는 말씀이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소리’들이 있다. 남의 일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말이 많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런 것에 신경을 쓰고 살아가며, 어떤 약삭빠른 사람들은 그런 ‘소리’들을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고의적인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것이 다름 아닌 위선이려니와, 자기나 남에게 솔직하지 못할 때에는 진리의 체독이란 불가능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일단 열반에 이른 사람이라고 해도 이 덕목을 상실하는 경우, 그는 급전직하 다시 범부의 경지로 떨어지고 말리라. 열반이란 마음의 상황이기에 마음이 바뀌면 상황도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또 붓다가 요구한 것은 단정해야 된다는 점이었다. 이미 열반의 경지를 얻은 성자에게 이것은 또 무슨 유치한 소리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단정하라는 것은 흔히 애들에게 부모나 선생이 훈계하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물론 붓다가 말씀한 단정도 그런 단정이며, 그 말에 다른 별 뜻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자에게까지 이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먼저 단정이라는 말의 뜻부터 따져 보자.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행동이 법도에 맞을 때, 우리는 그것을 일러 ‘단정’이라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바른 행위라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겠다. 그렇다면 이 덕목이 어린이들에게 요구되는 까닭도 알 수 있거니와, 한 편으로는 성자에게도 요구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 명백하지 않겠는가. 바른 행위란 누구에게나 필요한 덕목이며, 성자 또한 인간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神)을 설정하고 들어간다면, 신이란 모든 미덕을 구비한 절대자로 생각되므로, 신에게는 어떠한 과오도 있을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그러나 붓다는 그런 신의 관념을 배척하였다. 있는 것은 인간이며, 이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만이 문제가 된다고 할 때, 인간으로서 이제는 과오가 절대로 없다는 경지가 있을 수 있겠는가. 앞에서도 말한 바 있지만, 붓다는 명백히 그런 가능성을 부정하였다. 붓다도 끝없이 정진을 계속했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 어떤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여 그것으로 문제가 끝난 것일 수는 절대로 없다. 더욱이 이제부터는 어떤 짓을 하든 관계없다는 그런 경지가 있을 턱이 없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앞에 놓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후세 불교인들이 취했던 행동이다. 이른바 깨달았다는 사람 중에는 가끔 엉뚱한 짓을 하여 세상을 놀라게 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 그런 행위까지도 그것이 보살행인 까닭이라느니, 대승이기 때문이라느니 하여 변호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붓다의 생애를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붓다의 일생 중에 그 무슨 기행, 기언이 있었는가. 붓다가 저자에 나타나서 덩실덩실 춤을 춘 적이 있는가.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고 기방에 출입한 적이 있는가. 한시라도 수행을 그친 적이 있는가. 위의를 흐트러뜨리고 누군가와 농담이나 호언장담을 주고받은 적이 있는가. 우리는 그 분의 생애가 어느 비구보다도 진지하고 엄격한 그것이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어느 유명한 중이 아니라, 붓다 그 분이어야 한다. 깨달았다고 해서 단정한 행위가 필요치 않다는 논리는 결코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또 생각나는 것은 계율의 문제이다. 단정이란 결국 계율을 지키는 일이려니와, 지금의 불교계는 과연 어떤가? 승려가 아내를 얻고, 술과 고기를 먹고, 재물을 탐하고…. 그러면서 그들이 내세우는 것은 언필칭 ‘대승’이라는 한 마디 말이다. 즉 그들은 상구보리만 아는 소승과는 달리 하화중생을 하고 있는 대승이기 때문에 방편 상 그런 행위도 용인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리(진리)를 얻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남을 교화한다는 말인가. 또 열반에 이른 성자라고 해도 자칫하다가는 범부의 경지로 전락하기 쉬운 법인데, 범부인 주제에 어찌 남을 구하는 방편으로 계율을 파괴해도 마음의 청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인가. 술을 마시고 색에 빠지는 것이 중생을 구제하는 방편이 되고, 그러면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필시 붓다보다도 더한 성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기만에 누가 속는가. 세상 사람들은 그런 승려들을 볼 때, 비웃고 개탄하고 불교 자체까지도 의심하려고 든다. 그들이 어찌 그런 행위에 의해 교화되랴. 그러므로 이 단정이라는 덕목은 얼른 보기에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몸과 마음의 청정을 요구한다는 의미에서 불교의 안목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불교는 이것을 위해 있는 것이며, 이것이 상실될 때 불교는 죽는다고 해도 결코 과언은 아닐 터이다.

다음에 요구되는 것은 좋은 말을 할 것, 유화할 것, 거만하지 말 것 따위의 덕목이다. 이 중에서 특히 거만은 깊이 경계해야 할 일임에 틀림없다. 누구나 높은 경지에 이르고 나면 흔히 남을 내려다보기 쉬운 까닭이다. 이 점에서도 붓다는 영원한 본보기이다. 대중 앞에 나서서,

“그 동안 나의 언어와 행동에 그 무슨 잘못은 없었던가? 만일 조금이라도 그런 것을 보고 들은 사람이 있다면 벗들이여, 나를 가엾이 알아 부디 지적해 달라.”고 자자(自恣)할 때의 붓다를 생각하라. 조그만 것을 이해했고 깨달았다고 해서 어찌 거만할 수 있겠는가.

또 “족한 것을 알고 과욕(寡慾)할 것”이 요구되고 있다. 옛날 용어로 말한다면 지족(知足)과 이양(易養)이다. 내가 어릴 적에 나의 부친은 ‘지족사’라는 절의 주지로 있었다. 나는 그 절의 이름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조금도 그럴 듯한 맛, 절다운 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뜻 밖에도 매우 중대한 덕목임을 깨닫게 된 것은 요즘에 들어서의 일이다. 지족을 주장하는 데는 동서의 차이가 없는 줄 아나, 역시 이것을 가장 강조하는 것은 불교인 것 같다. 지족이니 과욕이니 하는 것은 결국 최소한도의 생활에 만족한다는 뜻이다. 생활에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것은 곧 탐심을 낸다는 말이 되는 까닭이다. 욕망이란 끝이 없으며, 말을 타면 경마 잡히고 싶은 것이 인간이다. 그런 욕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불교임에, 한 벌의 옷과 한 끼의 밥으로 만족할 수 없다면 그는 결코 진정한 도인은 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도의 유무를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으로서 그 사람이 얼마나 과욕할 수 있는지를 보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조금도 잘못이 아니라고 자처한다.

서두라고도 할 덕목에 대한 설명이 좀 장황해진 느낌이 없지 않거니와, 이 경은 결국 자비행에 앞서 불교인으로서의 자기를 확립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겠다. 대승이 주장하는 말을 빌린다면, 먼저 상구보리를 하여 진리를 확고히 파악하고 난 다음에 하화중생을 실천하라고 하는 것이 다름 아닌 붓다의 뜻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결코 자리(自利)가 이타(利他)보다 우월하다는 뜻은 아니다. 자리와 이타는 본래 경중을 따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리의 관계에 있는 것이어서, 정말 추호의 사심도 없는 자비행으로 남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확립이 반드시 선행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이 경의 주장인줄 안다.

여기서 본론으로 들어가서 자비란 무엇인가. 그 본질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 경의 도처에 그것이 언급되어 있지만, 그에 앞서 나는 이 말 자체의 뜻을 파헤쳐 보고 싶다.

‘자(慈)’라는 말을 팔리 어에서는 metta라고 한다. 산스크리트로는 maitrey라고 하며, 그 어원을 캐어 보면 mitra(벗)에서 온 것임을 알게 된다. 그것이 팔리 어에서 mitta(벗)가 되고, 다시 추상화되어 metts(우정)로 발전하여 그것이 ‘자(慈)’의 뜻을 지니기에 이른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어학적인 것을 장황히 늘어놓는 것은 물론 현학적인 취미 때문만은 아니다. 나도 그런 면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바이지만, 어떤 기회에 그런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것이 나에게 이 덕목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제공해 준 것뿐이다. 이리하여 재인식하게 된 ‘자’의 뜻을 말하기 위해 나는 그런 어학적인 면까지 언급하게 되었음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이 ‘자(慈)’라는 말은 ‘사랑’이라는 단어로 대치시켜도 무방하다. 현대인들에게는 이쪽이 훨씬 신선하고 매력이 있으며, 이해에 도움이 될는지도 알 수 없겠다. 내가 이 책에 ‘지혜와 사랑의 말씀’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慈)’를 ‘사랑’이라는 말로 바꾸어 놓기에 앞서 반드시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불교에서는 ‘사랑’의 쓰임새가 매우 다양할뿐더러, 부정적인 뜻으로도 자주 쓰인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카마(kama)란 사랑이라는 뜻이지만, 그것은 감각적인 욕망을 가리키고, 주로 성적인 사랑을 말한다. 또 탄하(tanha)도 사랑을 뜻하는 말이나, 그것은 격렬한 욕망을 가리키는 데 쓰이어, 거기서부터 병적인 집착이 생기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런 종류의 사랑에 대해 붓다는 대개의 경우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또는 전장(前章)에서 파세나디 왕과 왕비가 이야기한 것, 즉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다고 한 그 ‘사랑’의 원어는 피야(piya)인바, 그것은 자기를 중심으로 하여 혈연, 친척에 연결되는 사랑이다. 그러기에 그것을 더 높은 차원으로 지양시키라고 일렀을 때, 붓다는 명백히 그런 사랑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 것이 되는 줄 안다. 다시 [법구경]의 애품(愛品 ; piyavagga)에서는 그런 사랑을 나타내는 낱말들, 즉 piya, pema, rati, kama, tanha 따위를 나열하고 나서 그 하나하나에 대해 사랑에서 근심은 생기고 사랑에서 두려움은 생기나니

사랑을 넘어선 사람에겐 근심 없도다.

어디에 간들 두려움 있으랴. 라고 설하고 있다. 이렇게 불교에는 사랑에 대해 부정적으로 설한 말이 많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국 사랑을 더욱 높은 차원으로 지양시키고자 했기 때문임을 간과한다면, 붓다의 참뜻을 오해한 것이 될 터이다. 붓다는 남녀의 사랑,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 재물에 대한 사랑 따위를 근본에서부터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만일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인간이 인간 노릇함을 부정하는 것이 되는 까닭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목석과 같아지라고 요구하는 것이며, 인간성 자체를 말살하는 결과가 되고 말리라. 그러기에 붓다는 그런 것을 더 높은 사랑으로 지양하라고 가르치기 위해 그것 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점, 불순성을 부정했던 것이었다. 이것은 거듭거듭 주의할 필요가 있는 점인 줄 안다.

무릇 사랑이란 일종의 인력이다. 끌어당겨서 연결시키는 힘이다. 그러므로 이것 없이는 인간관계가 처음부터 성립되지 않는다. 남녀가 서로 만나 한 가정을 이루고, 남과 손을 잡아 친구가 됨으로써 서로 돕고, 부모와 자식이 서로 사랑하고, 제 조국을 사랑하고 세계의 평화를 염원한다는 것, 이것들은 모두 사랑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란 그런 뜻에서 선악 이전(無記) 생명의 본원적인 힘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본원적인 것이면 본원적인 것일수록 그 작용은 분방하고 거칠기 마련이어서, 그 자연적인 양상은 반드시 더할 나위 없이 착하고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다. 남녀의 사랑이라면 동물에게도 유사한 것이 있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은 조수에게도 있다. 가까운 것끼리 서로 끌고 맺어지는 것은 물리적 세계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므로 이런 본원적인 사랑만이라면 그것을 반드시 인류 특유의 것이라고 자랑할 수는 없는 것이겠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사랑의 이러한 본원적인 힘을 조정하고 지양시키고 확대해 가야 한다. 먼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도덕이니 종교니 일컬어지는 것들은 항상 그런 노력을 하여 왔던 것이라고 믿어진다. 그 중에서도 이런 사랑을 지양시켜서 일체의 생명과 모든 사람에게까지 확대할 것을 가르친 것은 불교와 기독교였다고 보여 진다. 그러나 이 두 종교가 이런 전 인류적인 사랑의 이념을 창조하기까지 이른 과정은 전혀 달랐다는 것을 나는 매우 흥미 있게 생각하는 바이다.

기독교에서의 사랑의 전 인류적인 확대는 신의 사랑의 모방으로서 제시되었다. 이른바 ‘산상 수훈’의 일절은 이런 말을 전하고 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이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

여기에 기독교적 사랑의 기본 구조가 그 전모를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본능적인 사랑의 양상은 자기를 사랑하는 이를 사랑하고, 자기에게 가까운 이를 사랑한다. 그리하여 자기 아내를 사랑하고, 자기자식을 사랑하고, 자기 형제를 사랑하고, 자기 이웃을 사랑한다. 그 사랑은 자기에게 가까울수록 짙어지고 멀어짐에 따라 엷어진다. 원수에 대해서는 증오하는 것이 옳고, 적과는 맹렬하게 싸울수록 칭찬을 받기마련이다.

그러나 예수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이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다. 그것은 완전히 인간의 본능적인 사랑에 역행하는 가르침이다. 그러면 무엇으로 말미암아 예수는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었던가? 또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신의 사랑을 모방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 기독교의 정신이다.

“하느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치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이와 불의한 이에게 내리우시나니,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이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오.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렇게 기원함으로써 사람은 비로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이며, 능히 인간 본능의 사랑으로부터 비약하여 신적인 사랑으로 지양될 수 있다고 그들은 본다. 이리하여 그들은 인간 본능의 사랑을 에로스(eros)라고 일컫는 데 대해, 이런 신적인 사랑을 아가페(agape)라고 불러서 구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사랑의 전 인류적 확대 과정은 어디까지나 인간 중심적이었다는 것에 그 특징이 있다. 그런 뜻에서 불교적인 사랑 즉 자비는 완전히 휴머니스틱(humanistic)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휴머니즘의 근본정신은 “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에 관계되는 일이라면 무엇이거나 나와 관계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homo sum; humani nihil a me alienum puto).”

고 한 데렌티우스(Terentius, ab. 195∼59 B.C)의 말 속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고들 한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붓다의 길은 자기에게 전념하고 자기의 깊은 내부를 향해 침잠해 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서, 얼른 보기에 인간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듯이도 보이리라. 그러나 매우 역설적인 말이긴 해도, 사람이란 자기의 내적 심층에 침잠했을 때에야 비로소 다른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기 마련이다. 아, 그들도 또한 나처럼 인간으로서의 무거운 짐을 걸머지고 있구나! 이런 사실을 진정으로 알게 되는 것은 오직 자기 침잠의 심층에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 몸의 진상을 투시하여 그 위에 눈물을 뿌릴 수 있는 사람만이 비로소 남의 처지에 대해서도 눈물을 뿌릴 수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동고 동비(同苦同悲)의 감정이라는 것도 이런 사실을 가리킨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비의 샘이 끊임없이 샘솟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자(慈 ; metta)’라는 말이 ‘우정’도 뜻한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매우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인간의 생존 양상이란 천차만별이다. 어떤 사람은 제왕으로서 만인 위에 군림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노예로서 일생을 매어 지내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억만 장자가 되어 주지육림에 파묻히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일간 두옥도 없어서 거리를 방황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단 인간성의 심층에 침잠하여 바라보면, 인간이란 똑같이 생로병사의 어쩔 수 없는 운명을 등에 걸머지고 언제 닥쳐올지도 모르는 죽음 앞에 벌벌 떨고 있는 가엾은 존재에 불과하다. 이러한 점에 눈뜰 때, 우리 앞에서는 제왕이니 노예니 가난뱅이니 부자니 하는 차별이 완전히 무의미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이란 본질적으로 평등하여 누구나 친구임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과 인간이 동고 동비의 정으로 연결될 때, 거기에서 솟아나는 사랑(慈)의 샘이란 우정 그것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는 여기에서 ‘자’가 ‘비(悲)’라는 글자와 만나 ‘자비’라는 숙어를 이루는 것이 상례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비’는 karuna의 역어이어서 본디 ‘신음’을 뜻하는 말이다. 남이 괴로워서 신음하는 모양을 보면 누구나 가엾은 생각을 지니게 되거니와, 이 공감이 바로 ‘비’의 내용이다. 중국의 주석가는 ‘자비’의 뜻을 설명하여 “애련(愛憐)을 ‘자‘라 하고 측창(側愴)을 ’비‘라 한다.”고 했고, 팔리 어 주석에서는 “자’란 복선(福善)을 주려고 하는 마음이요, ‘비’란 원고(怨苦)를 제거하려는 소원”이라고 했다. 어쨌든 ‘자’는 ‘비’와 결부됨으로써 그 적극적인 면과 소극적인 면을 구비하게 되는데, 내 사견으로 이 양면의 중량을 비교하자면, 그 비중은 오히려 ‘비’ 쪽으로 기우는 듯이 생각된다.

생각건대 우리 인간의 생존 양상이란 슬픔으로 차 있다. 평화를 갈구하면서도 불안에 떨어야 하고, 자유를 바라면서도 구속 속에서 허덕여야 하는 것이 인간이다. 천명을 다하고자 원하면서 자주 죽음의 위협 앞에 떨기도 하고, 생을 충실히 살아가고자 하지만 게으름이 우리의 나날을 좀먹기도 한다.

이런 자기의 슬픈 양상을 깊이 통찰하고 우연히 고개를 들어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때, 눈에 비치는 것은 역시 자기처럼 불안에 떨고 있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사실에 눈뜰 때 저절로 우리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생각이 동고 동비의 감정이다. “측창을 비라 한다.”는 말을 바로 이것을 이름이다. 그리고 이 슬픔의 감정이 이상한 힘을 발휘하여 우리 마음속에서 보편적인 사랑을 일깨우게 된다. 거기에 무엇인가 인간의 기미(機微)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옛 사람들이 인간을 가리켜 ‘비기(悲器)’라고 한 것도 이런 점을 말한 것이 아닌가 생각 된다. 오래된 경에

“삼세의 모든 세존은 대비(大悲)로 근본을 삼는다.”라고 한 것도 역시 같은 뜻이다. 이제 붓다는 이 ‘자경’에서 “일체의 생명 모든 사람에게 행복이 있으라, 평화가 있으라, 은혜가 있으라.”고 외도록 설하셨다. 그 목소리도 나에게는 눈물에 젖어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인간의 슬픔을 그 분은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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