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불해(不害)
사람의 생각은 어디로나 갈 수 있다.
그러나 어디로 가든 자기보다 더 소중한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와 같이 다른 사람에게도 자기는 더 없이 소중하다.
그러기에 자기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해해서는 안 된다.
([相應部經典] 3:8 末利)
‘말리’라는 경의 제목부터 설명해 두고자 한다. 그것은 중국에서 번역 할 때 ‘마리카(Mallika)’라는 팔리 어의 발음을 그대로 옮긴 것이지만, 어쩌면 일본에서 ‘말리(茉莉)’ 또는 ‘말리화(茉莉花)’라고 일컫는 관상용의 작은 관목이 그것에 해당할지도 모른다고 나는 혼자서 추측하고 있다. 이제 옆에 있는 사전을 펼쳐 보니, 말리화는 인도가 원산인 목서과의 상록수 관목이며, 잎은 타원형이고 여름 저녁에 백색 분형(盆形)의 향기 높은 다섯 개의 꽃이 핀다고 되어 있다. 어쨌거나 여기서 ‘말리’라고 한 것은 코사라국 파세나디 왕의 왕비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그 왕비가 이렇게 불린 까닭은, 그녀가 날마다 그 꽃으로 화관을 만들어 썼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한역에서는 승만이라고 하며, 일찍부터 열렬한 신자가 되었던 사람이어서 경전에도 자주 그 이름이 나온다.
그런데 이 경의 서술은 사바티 왕궁의 높은 다락에 오른 파세나디 왕과 그 옆에 자리한 마리카 왕비의 대화에서 시작된다. 그 다락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장관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북쪽으로부터 동북쪽에 걸쳐있는 눈에 뒤덮인 히말라야의 수많은 봉우리들이 아득한 원경으로 보였을 것이다. 또 서쪽으로부터 남쪽에 걸쳐서는 코사라의 평원이 끝없이 발밑에 펼쳐졌으리라. 그런 대자연 앞에 서게 될 때, 사람이란 번거로운 일상생활에서 벗어나서 무엇인가 엉뚱한 생각을 하기 쉬운 법이거니와, 그 날의 왕과 왕비의 대화에도 분명히 그런 점이 나타나 있는 것 같다.
잠시 조망을 즐기고 있던 왕이 갑자기 생각한 것은 이 넓고 넓은 세상에서 자기에게 가장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었다. 경전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자세한 경위에 대해 별로 말하고 있지 않으나, 왕의 생각은 대개 이런 경로를 더듬지 않았나 추측된다.
저 히말라야의 연봉은 참으로 장관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그것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가령 너는 히말라야를 바라보면서 하루를 살겠느냐, 아니면 히말라야가 없는 곳에서 백 년을 살겠느냐고 할 때 어느 누가 전자를 택하겠는가. 아니 한 끼의 밥과도 안 바꾸려고 할지도 모른다. 또 눈앞에 펼쳐지는 이 코사라의 평원! 그것은 얼른 보기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자기가 이 나라의 왕이기 때문인지도 알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자기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자기야말로 히말라야나 코사라 평원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나는 이 나라의 왕이다. 권세와 영화를 마음껏 누리고 있다. 그러기에 ‘나’라는 존재가 나에게 소중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저 땀을 흘리며 일하는 농부나 상인들은 어떨까? 그들은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하여야 한다. 그들은 자기에 대해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을까? 자기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을까? 아무래도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도 역시 자기를 더 없이 소중하게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무엇 때문에 그런 고생을 하면서 살아가느냐고 할 때, 역시 무엇보다도 자기의 몸이 소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왕은 마침내 옆에 있는 왕비를 바라보았다.
“중전, 그대에게는 자기 자신보다도 더 소중한 것, 더 사랑스러운 것이 있다고 생각하시오?”
뜻하지 않은 질문에 좀 놀랐지만, 마리카는 잠시 생각한 끝에 대답했다.
“대왕이시여, 저에게는 저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는 듯 생각됩니다. 대왕이시여, 대왕께서는 어떠십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묻는 말이오.”
왕도 이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하여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점에 두 사람은 완전히 동의하였다.
이런 그들의 결론은 정당하다고 보아야 되겠다. 저 고대에 왕과 왕비의 대화가 이런 결론을 이끌어 냈다는 것은 매우 있기 어려운 일이라고 하여야 될는지도 모른다. 이 결론은 현대의 우리에게까지 호소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는 에고(ego ; 자아)의 진상이 있으며, 이 에고이즘(egoism ; 자아 중심)을 무시한 사상이란 결국 인간관계의 원리로서는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 왕과 왕비는 그들의 결론에 대해 약간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붓다가 평소에 그들에게 가르친 것과 차이가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세나디 왕은 급히 마차를 달려 기원정사로 붓다를 찾아갔다. 무엇인가 모르는 것이 있을 때는 붓다에게 묻는 것이 이 왕의 버릇이었다.
급히 달려온 왕이 이야기하는 것을 흥미 있게 듣고 난 붓다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그들이 도달한 결론을 그대로 긍정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설해준 게가 이 장(章)의 첫머리에 인용한 일절의 운문이다.
그 내용은 그들의 결론을 일단 인정하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함을 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거니와, 구태여 해설을 붙이자면 대개 이런 뜻이 될 것이다.
사람의 생각이란 참으로 자유 자재한 것이어서 어디라도 달려갈 수가 있다. 여기 앉은 채 멀리 유럽이나 미국으로 날아갈 수도 있겠고, 달이니 금성이니 하는 것을 상상할 수도 있다. 백만장자가 되기를 꿈꾸고, 제왕의 영화를 부러워하는 것도 다 생각의 작용이다. 그러나 생각이 어디로 달리든 간에 자기보다 더 소중한 것이란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우리가 이리저리 생각을 달리어 많은 재물과 제왕 같은 권력을 꿈꾸는 것도 결국은 자기라는 존재가 더 없이 소중한 까닭이다. 자기가 소중한 까닭에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를 생각하고, 더 큰 권력과 명예를 획득함으로써 자기를 남보다 우월한 위치에 놓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붓다는 그 왕이나 왕비보다도 더 명확하게 그 사실을 긍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다시 한 걸음 나아가서 생각해야 된다는 것을 그 게의 후반에서 설명하였다.
그와 같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기는 더 없이 소중하다.
어쩌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리라. 사실 누구라도 마음속에서 생각할 수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매우 슬펐던 어떤 체험을 통해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의 심정을 공감해 줄 수 있다. 공감뿐이 아니라 함께 울 수도 있다. 이런 것은 다소간 누구에게나 있기에 동병상련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제 파세나디 왕과 그 왕비가 자기처럼 소중한 것은 다시없다고 생각한 데 대해, 붓다는 그것은 그렇다고 인정해 주고 나서 그런 생각을 남에게까지 확장시키라고 충고했다. 이것은 사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왜냐 하면 인간의 마음속에는 원래 그런 능력이 있는 까닭이다. 그것을 나는 ‘이성의 법칙’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성(理性)이라는 말은 왠지 차가운 데가 있다. 그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으며 능히 느낄 수 있다. 그리하여 이성의 그러한 점에 대해 혐오의 느낌조차 지니기 마련이다.
그러면 이성에 따르는 그 차가움이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이성 속에 무엇인가 우리를 떼밀어 버리는 성질이 있기 때문인 듯하다. 우리의 일상생활이란 애욕과 증오의 소용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소용돌이를 떠나 제 3 자의 입장에서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눈은 필연적으로 지성적인 맑음을 지닐 수밖에 없기에, 그 눈초리(이성)에서 받는 인상은 차가울 것이다. 또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이란 자타(自他)의 대립 속에 파묻혀 있는바, 그런 대립 속에서는 앞에서 말한 에고(自我)가 저마다 자기를 주장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성은 그 대립을 떼밀어 젖히고 냉정히 자아를 바라보는 것이기에 그 눈초리는 차가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차갑다고 해서 반드시 나쁘다고는 하지 못하리라. 열에 들떠 있는 소용돌이 속에서 인류를 건지는 것이 있다면, 그건 차갑고 맑은 이성의 작용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감히 말하거니와, 불교는 어딘지 차가운 데가 있다. 붓다 그 분의 말씀을 놓고 보아도 그런 차가움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이 인생이란 결국 괴로움이다. 너희는 먼저 이 사실을 확고히 인식해야 한다. 그렇게 가르치는 붓다의 말씀에는 우리로 하여금 섬뜩하게 만드는 무엇이 있다. 만약 그런 붓다의 말씀을 읽고도 아무렇지 않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글자의 표면만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또 붓다는 탐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마치 마른 풀로 만든 횃불을 들고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달리는 것과 같으며, 만약에 빨리 그 횃불을 던져 버리지 않는다면, 그 불은 그의 손과 그의 온몸을 태우고 말리라고. 적어도 진지하게 이 말씀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가 가슴이 섬뜩해 오지 않겠는가.
또 [법구경]의 한 게는 붓다의 가르침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제가 악을 행하여 스스로 더러워지고, 제가 악을 떠나서 스스로 청정해진다. 저마다 스스로 청정해지고 부정해지나니, 사람은 남을 청정하게 하지는 못하리.”
인과 필연(因果必然), 응보 무정(應報無情)! 그 도리에 틀림은 없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차갑게 말하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나 두루 사람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도록 말을 꾸민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의 구원은 될 수 없는 것이겠다. 적당히 얼버무리는 말을 좋아하는 이에게는 오직 전락의 길이 있을 뿐이다. 또는 가공(架空)에 취하고 환상을 뒤쫓는다면, 구제의 문은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붓다는 신(神)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러므로 붓다는 어떤 천국, 어떤 극락도 약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붓다는 자기만 의지하면 어떤 죄라도 소멸한다는 그런 계약을 남발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붓다는 영생을 제공함으로써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만족시켜 주려고도 하지 않는다.
붓다는 그런 환상과 오류와 비합리적인 것을 일체 부정하고 타파하였다. 그러고 나서 비정하리 만큼 냉철한 눈을 가지고 존재와 인간의 진상을 관찰하고 투시하였다. 그리고 그 위에 참다운 구제의 길을 세웠다. 그런 뜻에서 보면 붓다가 간 길은 어디까지나 이성의 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인간 구제의 대업을 신에게 의탁하지도 않았고 기적에 맡기지도 않았다.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이성, 그것에 의해 구제의 길을 발견하고 확립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붓다가 왕에게 설한 게의 문구를 상기해 볼 필요가 있겠다. 붓다는 그 왕과 왕비가 말하는 에고를 그대로 인정하고 나서, 그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기는 더 없이 소중하다고 가르쳤다. 그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말처럼 생각될지 모르나, 불교를 가능케 하는 ‘이성의 법칙’의 하나가 그것을 통해 설명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붓다가 구사한 이성의 영위에는 주로 두 가지 측면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 하나는 애욕과 증오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덕이고 있는 자기를 제 3 자의 처지에 서서 냉철하게 관찰하는 일이다. 무상, 고, 무아의 원리는 이런 작용 속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자타의 대립 속에 서 있는 자기를 떠나 그와 나의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나에게 내가 소중하듯이 그 에게도 그가 소중할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일이다.
만약 인간이 이러한 이성을 무시하고 오로지 자기 애(愛)의 주장에만 귀를 기울인다면, 아마도 인간의 세계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 대해 이리”가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붓다는 우리의 세계가 그런 수라장이 안 되게 하기 위해서는 저마다 이성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그러기에 자기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해해서는 안 된다.”
파세나디 왕에게 설해 준 게의 결구는 바로 그것을 말한다고 보여 진다. 즉 모든 사람이 서로 이해를 따라 아귀다툼하는 상태를 종식시키고, 이 세계를 진정한 평화의 고장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 ‘이성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아힘사(ahimsa) 즉 불해(不害)의 덕목이 생겨나는 것이며, 자비의 덕목이 생겨나는 것이다. 왕에게 다른 사람을 해해서는 안 된다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 아힘사(불해)의 덕목을 가리킨 것임을 알 수 있다.
아힘사는 ‘불해’라고 번역된다. 또는 ‘불살생(不殺生)’이니 ‘불상해(不傷害)’라고도 번역되는 수가 있다. 그 원어 역시 “해 한다” 또는 “죽인다”의 뜻인 himsa에 a라는 부정사가 붙은 말이다. 그러기에 아마도 이 덕목을 어딘지 소극적인 것인 양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전에 이 말로부터 그런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그것은 큰 오류임을 누구나 이해하게 될 것이다. 도리어 모든 덕목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불해임을 알게 될 줄 믿는다. 어째서 그런가?
지금껏 누누이 말해 온 바와 같이 이 덕목은 자타의 입장을 이성에 의해 조화시킬 때 생겨난다. 내가 나에게 가장 소중하듯이 남들도 저마다 자기가 소중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 덕목은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사람마다 자기에게 가장 요망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름을 드날리고도 싶으리라.
생활이 풍족했으면 하는 욕망도 있으리라.
또 자기와 가족의 건강도 당연히 바라리라.
그러나 그 어느 소원도 자기의 생존과는 바꾸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살고 싶다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이요 가장 강렬한 소망이며,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이 인간 최대의 비원임이 분명하다. 이런 자기의 비원을 남에게까지 확장시킨 것, 그것이 아힘사의 정신이다. 거기에서 사랑과 자비도 생겨나는 것이며, 평화와 번영도 그 위에 구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 핵무기의 위험으로부터 인류를 지키고자 하는 움직임도 이 이성의 소리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