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함경 14.나도 밭을 간다

14. 나도 밭을 간다.

믿음은 내가 뿌리는 씨

지혜는 내가 밭가는 모습.

나는 몸에서 입에서 마음에서

나날이 악한 업(業)을 제어하나니 <== 업(karma) ; 어떤 결과의 원인으로

그는 내가 밭에서 김매는 것. 생각되는 행위 일체.

내가 모는 소는 정진이니 이것을 행위와 말과 생각으로

가고 돌아섬 없고 나누어 신(身), 구(口), 의(意)의

행하여 슬퍼함 없이 ‘삼업’이라 한다.

나를 편안한 경지로 나르도다.

나는 이리 밭 갈고 이리 씨 뿌려

감로(甘露)의 열매를 거두노라.

([相應部經典] 7:11 耕田. 漢譯同本, [雜阿含經] 4:11 耕田)

이것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경중의 하나이다. 그때 붓다는 마가다국의 시골인 에카사라(一葦)라는 마을에 있었다. 그 마을 이름은 다른 경에도 나오는데, 붓다가 여러 신자들을 상대하여 법을 설하고 있을 때 악마가 도전해 왔다는 것도 그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것은 어쨌든, 붓다와 그 제자들은 어디에 살든지 간에 하루하루의 생활을 탁발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어서, 이런 탁발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것이 바로 이 경이다.

그 아침에도 붓다는 어느 집 앞에 서서 탁발을 했다. 그것은 바라문의 집이었는데, 마침 씨 뿌리는 철이었으므로 그 집 주인인 바라문은 마을 사람들을 시켜서 그 준비를 서둘고 있는 참이었다. 바라문이란 예전부터 내려오는 사제자(司祭者)여서 제사를 주관하는 것이 그 소임이었으나, 붓다 시대에는 아마도 바라문이 너무 많았기 때문인지 농사를 짓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그 바라문은 붓다가 탁발 온 것을 보자 앞으로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사문이여, 나는 밭 갈고 씨를 뿌려서 내가 먹을 양식을 마련하고 있소. 당신도 또한 스스로 밭 갈고 씨를 뿌려서 당신이 먹을 양식을 마련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이까?”

그것은 아마도 날카로운 어조의 도전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생각건대 그 바라문은 종교인의 생활을 청산하고 농사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므로, 그에게 새로운 인생관이 생겼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겠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 현대식으로 말한다면 이런 생각이 그 말 속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면 이 도전에 대해 붓다는 어떻게 응수했던가? 그것은 우리에게 매우 기이한 인상을 주는 말씀으로 나타났다.

“바라문이여, 나도 밭을 간다. 나도 밭 갈고 씨 뿌려서 먹을 것을 얻고 있느니라.”

그것을 들은 바라문이 자기의 귀를 의심하는 듯 어리둥절해 하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아마 그는 얼마 동안 붓다의 얼굴만 멍하니 보고 있었으려니와, 이윽고 다시 물었다.

“사문이여, 우리는 누구 하나 당신이 밭 갈고 씨 뿌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소. 대체 당신의 모습은 어디에 있소? 그리고 당신의 소는 어디에 있소? 당신이 밭을 간다고 한 것은 무슨 뜻인지 나는 묻고 싶소.”

그때 붓다가 대답한 말씀이 앞에 든 게(偈)로 표현되어 전해 오는 것이다.

거기서 붓다는 내가 뿌리는 씨는 믿음(信仰)이요, 내 모습은 지혜가 그것이라고 했다. 또 나날이 악업(惡業)을 제어하는 것은 곧 김매는 작업이며, 내 소는 무엇이냐 하면 정진(精進)이 그것인바, 이 소는 한 걸음 한 걸음 착실히 나아가 물러섬이 없고, 또 그 행한 결과에 대해 뉘우쳐야 할 일도 없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것이 내 농사요, 그 수확은 감로(amrta)의 열매라고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감로는 ‘불사(不死)’, ‘천주(天酒)’라고도 번역된다. 그것은 꿀같이 달고 향기가 높으며, 한번 먹으면 죽는 일이 없다는 전설이 있다. 고대 인도에서는 신(神)의 음식이라고 생각되었거니와, 불교에서는 이것으로써 그 궁극의 경지를 나타내는 일이 많다.

그런데 붓다가 “나도 밭을 간다.”고 대답한 것은 아마 그 순간에 떠오른 즉흥적인 말씀이었겠지만, 참으로 의미심장한 바가 있다고 하겠다. 그 뜻을 해명하면 붓다의 가르침의 기본적인 성격도 어느 정도 드러나게 된다고 여겨지므로, 이제 그것에 대해 얼마간 설명을 해 볼까한다.

대체로 인도 게르만 어족 계통의 언어에서는 대지를 개발하는 것과 인간의 정신을 계발하는 것이 같은 낱말로 표현되는 경향이 있다. 가령 영어에서 이것을 말할 때 cultivate가 그것이다. 또 문화와 농업이 어근을 같이하는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즉 문화가 cultute인 데 대해, 문화, 또는 인간 정신의 계발이 언어에서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만은 아닐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 하면 그 양자는 기본 구조를 같이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최근에 와서 문화를 논하는 학자 중에는 문화의 근본 원리가 경작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그것은 결코 근거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없다.

대지를 갈아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어떻게 경작하고, 어떻게 수확을 올리고 있는 것일까? 나에게는 그것을 논할 만한 자격이 없으나, 구태여 말한다면 그 기본적인 구조는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농사꾼에게 주어진 것은 거친 대지이며, 그것을 인간이 개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잡초와 잡목을 제거하고, 크고 작은 돌멩이들을 치워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보습을 대고 갈아야할 것이며, 토양이 곡식의 성장에 적당치 못하다면 그 개량도 꾀해야할 것이다. 또 물에서 떨어져 있을 때는 관개 시설도 서둘러야 하리라.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논밭이 이루어지고, 거기에 씨가 뿌려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적당한 비와 햇볕과 김매기, 거름주기 같은 것이 있음으로써 겨우 수확까지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이겠다.

그런데 문화니 교양이니 인간 정신의 계발이니 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것 또한 농사짓는 것과 비슷한 점이 있다. 생긴 대로의 인간이란 자연의 대지와 비슷한 것이라고 하여도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정신과 육체는 마치 잡초와 잡목에 뒤덮인 황무지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 잡초와 잡목을 뽑고, 크고 작은 돌멩이를 치우며, 토양도 개량해야 한다. 그 때 거칠던 인간은 비로소 아름다운 논밭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씨가 뿌려지고 적절한 손질이 베풀어질 때, 인간은 아름다운 땅으로서 훌륭한 수확을 올릴 수가 있는 것이다. 붓다도 기실 이런 일을 하고 있기에 “나도 밭을 간다.”고 대답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런 인간 개간의 일을 하자면 먼저 지혜의 보습으로 갈아야 한다. 즉 인간의 무지 몽매함을 제거하는 일이다. 거기에는 미망이 있고, 탐욕이 있고, 성냄이 있고, 전도가 있다. 그리고 잔인성이 있고, 극단을 즐기는 버릇이 있다. 붓다의 설법이야말로 이런 황무지를 지혜의 모습으로 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경전([상응부 경전] 42:1 포악. 한역 동본, [잡아함경] 32:6 악성)은 붓다가 어떤 촌장을 교화한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 사나이는 마을에서도 매우 소문이 나쁜 사람이었으며, 그것을 스스로 걱정하여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왔던 것이다.

“대덕이시여, 사람들은 나를 ‘포악하다, 포악하다.’ 말하고 있습니다. 대체 무슨 까닭에 그리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세상에는 같은 인간이면서도 ‘얌전하다.’는 평을 듣는 사람도 있거니와, 대체 어떤 이유로 그런 사람은 그런 말을 듣는 것이겠습니까?”

붓다는 거친 그 사람을 자비에 넘치는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씀했다.

“촌장이여, 여기에 탐욕을 지닌 사람이 있다 하자. 그는 탐욕 때문에 남의 노여움을 사야하며, 남이 노하는 것을 보면 그도 또한 노하게 되리라.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포악하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 아니냐? 또 여기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증오심에 불타고 있다고 치자. 그는 증오심 때문에 다른 사람의 노여움을 살 것이며, 다른 사람이 노하는 것을 보면 그도 또한 노하리라.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포악 하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 아니냐?

이런 논리의 전개는 붓다의 독특한 설명 방식이다. 간명하다고 하기보다는 좀 지루한 느낌이 없지 않다. 분석적이어서 단계에 따라 끌어올리는 수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명에 덮여 있는 눈을 뜨게 하는 데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촌장이여, 탐심, 증오심, 우매함을 떠나 버린 사람이 여기에 있다 하자. 그는 그런 것들을 떠난 까닭에 누구의 노여움도 사지는 않을 것이며, 따라서 남의 노여움에 자극되어 자기가 성내는 일도 없으리라. 그 때에는 모두 그를 일컬어 ‘얌전한 사람’이라고 할 것이 아니냐?”

이것은 바로 인간의 개간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무지 몽매에 덮여 있는 인간 정신의 황무지에서 탐욕을 갈아엎고, 증오심을 베어 내며, 어리석음을 뽑아내서, 거기에다 씨를 뿌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거기에 씨가 뿌려진대도 그것으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대지를 경작하는 데에도 적당한 비와 적당한 햇볕과 때에 맞는 거름과 때에 맞는 제초 작업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인간 정신의 경작 또한 더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런 일 중에서 앞에 나온 게(偈)가 들고 있는 것은 계율과 정진이다. 즉 나날이 신(身), 구(口), 의(意)의 삼업(三業)에서 악을 제어하는 일, 그것이 “내가 김매는 일”이라고 붓다는 말씀했다. 불교의 술어로 말한다면, 계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지를 경작할 때도 일단 개간한 땅이라고 하여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문제이다. 잠시라도 눈을 땅에서 뗀다면, 모처럼 자라던 곡식도 순식간에 잡초로 뒤덮여 버리리라. 그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정신도 어느 만 큼 계발되었다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일 그리하다가는 악성의 잡초가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신, 구, 의 삼업에 걸쳐 철저한 제초 작업이 나날이 되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계(戒)라는 말은 우리에게 별로 인기가 없는 것 같다. 어쩐지 강요된 규제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일까? 그러나 계를 강요된 규제 사항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 받아들이는 태도에 잘못이 있는 것 같다. 이 말의 원어인 ‘시라(si-a)’라는 말은 습관, 성격의 뜻이다. 예로부터 불교인들은 흔히 이것을 설명하여 소극적으로는 ‘악을 막는 일(防非止惡)’, 적극적으로는 ‘선을 향상시키는 일(諸善增上)’이라고 했다. 그것은 결국 나쁜 버릇을 없애고 좋은 생활 습관을 기르는 일이며, 바꾸어 말하면 좋은 방향으로 성격을 개조해 가는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행위(身)와 언어(口)와 생각(意)에서 나날이 악의 풀을 제거해 감으로써 뿌려진 진리의 씨를 잘 자라나도록 보살펴야 한다. 그것이 계요, 성격을 개조해 가는 불교적인 방식인 것이다.

무릇 모든 종교에는 성격을 전화시키는 그 나름의 방식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낡은 것은 이미 지나가고, 보라, 새롭게 되었도다!”

모든 종교인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불교에도 그런 방식이 있음을 우리는 보아 왔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어떤 경지로 뛰어오름으로써 만사가 끝나 버리는 그런 방식은 결코 아니다. 나는 깨달았기에 이제 부터는 수행할 필요도 없고, 계율을 지킬 필요도 없다는 그런 방식일 수는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경작의 방식인 것이다. 인간의 정신을 개간하고, 법의 씨를 뿌리는 것은 기실 그 출발에 지나지 않는다. 끊임없는 제초 작업으로 항상 성격 향상의 노력이 지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가고 돌아섬이 없고, 행하여 뉘우침이 없는” 정신의 지속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마침내 얻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는 그것에 대해 비유로밖에 설해져있지 않다. 감로, 즉 신들에게 바쳐지는 달콤한 술이라고. 이것은 이것대로 다른 항목에서 설명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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