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이는 고(苦)의 멸(滅)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멸진(滅盡)의 성제이다. 마땅히 알라. 이 갈애를 남김없이 멸하고 버리고 벗어나서, 더 이상 집착함이 없기에 이르는 일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의 성제이다. 마땅히 알라. 성스러운 팔지(八支)의 길이니,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이 그것이다.” ([相應部經典] 56:11 如來所說. 漢譯同本, [雜阿含經] 15:17 轉法輪)
이것이 사제 후반의 두 가지 성제에 대한 설법이다. 이제 전반의 두 명제와 후반의 두 명제를 따로 나눈 것은 붓다가 그렇게 구분하여 설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구조로 볼 때 일단 그런 분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앞에 든 ‘연기의 공식’을 여기에 적용시켜 본다면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다.” 또는 “이것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는 공식의 전반 부분이 쓰이고 있는 것은 사제 전반의 두 명제이다. 그리고 “이것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없다.” 또는 “이것이 멸함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는 후반의 공식이 응용 된 것은 이 후반 부분인 멸, 도의 두 명제라고 할 수 있다. 또는 그 전반은 고의 발생에 관한 이론적인 부분, 그 후반은 고의 멸진에 대한 실천적인 부분이라고도 나눌 수 있겠다.
어쨌든 “이는 고이다.”라고 인식하고, 그렇게 만드는 조건을 갈애라고 단정한 이상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되느냐는 것이 문제가 된다. 그래서 ‘연기의 공식’의 후반 부분이 응용되어 “무엇을 멸함으로 말미암아 고를 멸할 수 있는가?” 라고 추궁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대답이 “이 갈애를 남김없이 멸하여 더 이상 집착함이 없기에 이르는 일” 이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갈애 때문에 생긴 괴로움이니까 이것을 제거하면 된다는 이론이다.
그것은 참으로 간단명료한 답변이다. 너무 간단명료하여 도리어 싱겁다고 할는지도 모르겠다. 왜냐 하면 인생의 괴로운 양상이란 천차만별하고 다기 다양한 것이기에, 도저히 이처럼 간단하게 처리될 수는 없다고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다기 다양한 것을 쾌도로 난마를 베듯 풀어 버리는 것이 지혜라고 감히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나는 붓다의 정각을 말하면서 뉴턴이 만유인력을 깨닫던 순간을 보기로 든 바 있거니와, 그 후 뉴턴에 의해 정리된 인력의 법칙은 간명 했을지는 몰라도 저 밤하늘에서 반짝이는 어떤 멸 하나도 망라하지 못함이 없었던 것이니, 그것이 과학자의 지혜임에 틀림없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붓다에 의해 정비 된 사제의 명제 또한 간단명료하면서도 무릇 인생의 모든 양상에 적응해서 어느 하나라도 새어 나가는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붓다가 설하신 것을 지혜의 가르침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만 인생은 자연과 다르기에 그 법칙에 따라 실천하느냐 안 하느냐는 우리 인간에게 맡겨져 있다. 여기에서 실천의 문제가 중대
한 의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넷째 명제는 “이것이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의 성제이다.” 라고 되어있다. 나는 그렇게 번역했지만 더 원어에 가깝게 옮긴다면 “이것이 고의 멸(滅)에 따르는 길의 성제이다.” 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역에서 흔히 “순고멸도성제(順苦滅道聖諦)” 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고의 멸(제 3 성제)에 따르는 실천이라는 뜻이다. 어쩌면 그렇게 번역하는 쪽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제 3 성제와 제 4 성제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제 3 성제에서 실천의 원리가 수립 되었다면, 제 4 성제에서는 그 원리에 따르는 실천 항목이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이 항목이란 물론 ‘성스러운 팔지(八支)의 길’ 즉 팔정도(八正道)이다.
이미 말했듯이 이 사제는 연기의 원리에 입각해서 그것을 실천의 체계로까지 재조직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이론이 전개되고 있기는 하지만 중점은 실천 쪽에 놓여 있어서, 이론도 이런 실천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실천이란 인간의 선택에 매인 문제이므로 그 길을 가느냐? 안 가느냐? 는 우리의 자유의지에 맡겨져 있다. 자연 과학의 영역은 필연의 세계이다. 그러나 인간의 영역은 자유의 세계이기에 이로부터 실천의 무거운 의의가 생겨나는 것이겠다.
붓다가 그 실천 항목으로 열거한 ‘성스러운 팔지의 길’은 다음과 같은 여덟 개의 정도(正道)로 이루어져 있다.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 그것들이다. 제 4성제는 다만 이런 항목들을 열거했을 뿐이지만, 나는 그것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네 묶음으로 분류하고자 한다.
1) 정견 ———— 바르게 보는 것
2) 정사, 정어, 정업 — 바른 행위
3) 정명 ———— 바른 생활
4) 정정진, 정념, 정정 – 바른 수행
이런 분류 방식은 붓다의 말씀에 근거한 것도 아니며, 후세의 불교인들에 의해 시도된 바도 아니나,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렇게 나누고 볼 때, 붓다가 지시한 실천이라는 것이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 잘 나타나는 것 같다.
이것들 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것은 제 1 항목의 정견(正見)으로 보인다. 과거의 불교인들도 이것을 팔정도의 ‘기체(基體)’라고 불러 이것이 근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견’이란 관찰하고 선택한다는 뜻을 지닌 불교 용어로서 결국 인간의 오성(悟性)의 작용이라고 하겠으나, 그것이 실천을 재촉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정견은 다른 일곱 가지 정도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이것으로부터 바른 행위가 흘러나오고, 바른 생활 태도가 선택되며, 바른 수행이 선택되는 까닭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이런 여덟 가지 실천이 모두 ‘정(正)’ 이라는 형용사로 불리는 사실이다. 대체 ‘정’이란 무엇일까? 이 말을 우리는 당연히 알고 있는 것으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바르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조건을 구비하는 것이 “바르다”고 불리는가 하고 따지면, 정연한 이론으로 대답하기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알기는 알고 있으나 말하려 드니 말이 잘 안 나온다거나, 답변을 회피해야 될까? 그러나 이 말은 불교에서 매우 중대한 뜻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므로 어물어물 넘길 수는 없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 말에 대해서도 불교 쪽에서는 정연한 대답을 준비해 놓고 있는 것이다.
‘정’의 첫째 조건은 “망령됨을 떠나는 일”이라고 되어 있다. 망령됨(妄)이란 명석하지 않고 여실(如實)하지 않음을 이름이다. 이것을 ‘견(見)’에서 말한다면 허망한 관찰, 허망한 분별이 ‘망견(妄見)’이다. 또는 ‘어(語)’에 관련시켜 말한다면 진실에 어긋나고 명확하지 않은 발언이 ‘망어(妄語)’가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런 망령됨이 생겨나는가? 앞에서도 인용했거니와 붓다는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말씀한 적이 있다.
“여기에 물통이 있어서 물이 가득 채워져 있다 하자. 그러나 만약 그 물이 불에 데워져서 부글부글 끓고 있다든지, 또는 이끼나 풀로 덮여 있다든지, 또는 바람이 쳐서 물결이 일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사람은 그 물에 자기 얼굴을 비추어 있는 모습 그대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이 탐욕으로 어지러워진다든지, 노여움으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든지, 또는 어리석음이나 의심으로 덮여있다든지 할 때에는 무엇이거나 여실히 명석하게 관찰하고 판단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 경에서 붓다가 설한 가르침이었다. 이것을 더 추상적으로 나타내면 객체와 주관 사이에 여러 잡스러운 요소가 개재함으로써 ‘망령됨’이 생기는 것이어서, 그것을 불교에서는 복(覆;덮는 것) 또는 애(碍;장애가 되는 것)라고 일컫는다. 이런 개재물을 남김없이 떨쳐 버리고 맑은 주관을 가지고 객체를 대하는 것, 그것이 “망령됨을 떠나는 일” 이며, 그 때 일체의 존재는 진상대로 주관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주관에 의해 선택, 분별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여실 지견(如實知見)이요, 무애(無碍)의 정견(正見)이다 . 다시 말하면 이것이 언어로 표현될 때 ‘정어’가 되고, 행동으로 나타날 때 ‘정업’이 되는 것이다.
‘바른 것’의 둘째 조건은 “전도(顚倒)를 떠나는 일”이다. 여기서는 ‘정견’이 기초가 되므로 그것에 적용시켜 말한다면 “전도의 견(見)이 아닌 것을 정견이라 한다.”고 할 수 있다([승만경]).
전도란 관찰과 판단에 임해서 그 순서가 엇바뀌고 진상을 놓치는 일이다. 대(大)와 소(小)를 거꾸로 아는 것도 그것이요, 미와 추를 잘못 판단하는 것도 그것이다. 또 변화해 마지않는 것을 마치 영원불변한 듯이 착각하는 것도 그것이다. 붓다는 일찍이 이런 게를 설한일이 있다.
법에 의해 이익을 얻지 못함과
비법(非法)으로 이익을 얻는 그것은
어느 쪽이 낫다고 하여야 하랴.
법대로 행하여서 얻지 못함은
비법으로 얻음보다 훨씬 나아라.
깨달은 것 적으면서 높은 명성과
깨달은 것 많고도 낮은 명성은
어느 쪽이 낫다고 하여야 하랴.
지혜가 많고도 낮은 명성은
적고도 높음보다 훨씬 나아라.
그것이 바른 일인 줄 뻔히 알면서도, 우리의 일상적인 행위는 자칫하면 “비법으로 이익을 얻는 일”에 몰두하기 쉽고, “지혜가 적으면서 명성이 높기”를 바라기 일쑤이다. 그리하여 이런 전도된 사고방식은 인생의 모든 영역을 채워 버려서 사람들을 미망과 죄악 속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이런 것을 ‘사전도’라고 한다. 이것은 불교의 입장에 서서 인간이 빠지기 쉬운 잘못을 네 가지로 분류한 것이다.
첫째, 상(常)전도 — 이 무상한 존재를 영원한 것인 양 잘못 생각하는 것.
둘째, 낙(樂)전도 — 고(苦)라고 보아야 할 이 인생을 즐거운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것.
셋째, 정(淨)전도 — 이 부정한 인간 존재를 청정한 것인 듯 잘못 생각하는 것.
넷째, 아(我)전도 — 이 무아(無我)인 존재를 자아가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것.
그리고 이런 전도가 생기는 이유를 추궁할 때, 결국은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기에 이런 장애물을 불식하여 이 전도에서 떠나지 못한다면, 마침내 ‘정(正)’에는 이르지 못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조건이 되는 것은 “극단을 떠나는 일”이라고 지적된다. 한역 경전의 표현을 따른다면 “가를 떠나 한가운데에 서는 일(離邊處中;이변처중)”이다. 앞에서 인용한 첫 설법에 “비구들이여, 출가한 사람은 두 극단을 피해야 하느니라.” 고 나와 있던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극단’이라고 번역한 것은 팔리 어로 말한다면 anta(끝, 가)인바, 한역에서는 편(偏) 또는 변(邊), 단(端)이라고 번역되었다. 이 ‘변’을 떠나 ‘중(中)’에 서는 곳에 ‘정’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조건을 가지고 ‘정(正)’을 규정한다는 것은 다른 데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매우 불교적인 사고 방법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아마도 붓다의 절실한 체험으로부터 이런 조건들이 생겨났으리라고 생각된다. 그 체험이란 붓다가 정각을 이루기에 앞서 온 힘을 기울여서 고행에 매진하던 일을 말한다. 생각건대 극단으로 달린다는 것은 어딘가 인간의 깊은 데에 뿌리박고 있는 경향인 것 같다. 우리의 생각은 자칫하면 극단으로 달리기 쉽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자기가 위대해지기나 한 듯이 좋아하는 점이 없지 않다. 이를테면 정치적인 견해만 하더라도, 좌냐 우냐 확실히 그 입장을 가르려고 드는 것이 우리이다. 그리하여 그 노선을 일단 택하고 나면 그것에 대해 미심쩍은 일이 있든 말든 그것을 끝까지 밀고 가려 든다. 우리의 처지에 알맞은 융통성 있는 입장이라는 것은 어쩐지 기회주의처럼 생각되어 비위에 맞지 않는 것일까? 이렇게 어느 극단으로 달리는 것은 인간의 약함을 숨기려는 행동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붓다조차도 한때는 이런 인간적인 약점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붓다의 전기는 우리에게 똑똑히 밝혀 주고 있는 것이다. 고행에 열중하여 그것으로 길을 타개하려고 했던 사실이 그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이윽고 고행에 매달리는 것이 바른 길이 아님을 자각하여 경연이 그것을 버렸던 것이지만, 그 체험이 이제 여기에 ‘정(正)’의 조건으로서 알려진 것은 아니겠는가.
한 경([잡아함경] 9:30:20 억이. 팔리 어 동본, [증지부경전] 6:55소나)은 이와 관련하여 매우 흥미 있는 문답을 전해 주고 있다.
붓다의 제자 중에 소나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목숨을 걸고 아주 엄한 수행을 계속했건만 아무리 해도 깨달을 수가 없었다. 도리어 망상만이 일어나서 그를 괴롭혔다. 그것을 아신 붓다는 그를 찾아가서 물으셨다.
“너는 집에 있을 때, 무슨 일을 잘했느냐?”
“대덕이시여, 거문고를 좀 뜯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 소나야, 거문고 줄을 아주 팽팽하게 죄면 어떻더냐? 켜기에 좋더냐?”
“대덕이시여, 너무 팽팽하면 좋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소나야, 아주 허술하게 하면 어떻더냐?”
“대덕이시여, 그리해도 안 되나이다.”
“소나야, 네 말대로다. 거문고 줄이 너무 팽팽하거나 너무 허술해서는 좋은 소리를 내지 못할 것이다. 도(道)의 실천도 그와 같으니라. 쾌락에 빠지는 일이나 고행을 일삼는 것은 다 바른 태도는 아니다. 또 지나치게 서둔다면 고요한 심경을 기대할 수 없고, 너무 긴장을 푼다면 게을러지기 쉽다. 너는 그 중간을 취하도록 하여라.”
극단을 떠나 중도(中道)에 설 때 바른 실천이 이루어진다는 것, 이것이 불교의 실천의 핵심이 되는 이른바 ‘중도’의 가르침이다. 이리하여 ‘팔정도’란 이런 여러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바르게 보는 태도(정견), 바른 행위(정사, 정어, 정업), 바른 생활(정명), 바른 수행(정정진, 정념, 정정)임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