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이는 고(苦)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성제(聖諦)이다. 마땅히 알라. 생(生)은 고이다. 노(老)는 고이다. 병은 고이다. 죽음은 고이다. 미운 사람과 만나는 것도 고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고요, 욕심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고이다. 통틀어 말한다면 이 인생은 바로 고 그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의 발생의 성제이다. 마땅히 알라. 후유(後有)를 일으키고, 기쁨과 탐심을 수반하며, 이르는 곳마다 그것에 집착하는 갈애(渴愛)가 그것이다. 그것에는 욕애(欲愛)와 유애(有愛)와 무유애(無有愛)가 있다.”([相應部經典] 56:11 如來所說]. 漢譯同本, [雜阿含經] 15:17 轉法輪)
전장(前章)에서 나는 연기의 원리에 대해 누누이 설명한 바 있거니와, 아마도 무미건조하게 느껴져서 그런 이야기가 인생을 더 나아지게 하는데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생각했던 분도 있을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붓다는 그 원리를 깨달은 순간 ‘이젠 됐다.’고 생각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하기야 ‘이젠 됐다.’는 따위의 점잖지 못한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을 테지만, 붓다는 그것에 의해 인생의 모든 과제를 풀 수 있는 열쇠를 발견하게 된 것이므로 매우 기뻐했을 것은 사실이겠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하여 연기의 원리가 인생의 수수께끼를 풀어 헤치는 열쇠가 된다는 말인가?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연생(緣生)의 법’이라는 말 속에 설명되어 있다. ‘연생의 법’이란 조건이 있음으로써 발생한 것이라는 정도의 뜻이어서, 말하자면 실체(實體)로서의 존재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인가 있기 때문에 이것 또는 저것이 존재한다. 그러기에 영원, 불변하는 것이란 인정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조건에 의해 존재하는 까닭에 그 조건의 소멸은 바로 그 존재의 소멸도 뜻하게 된다는 것, ‘연생의 법’이란 이런 이치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붓다의 과제가 되었던 고(苦)니 생로병사니 하는 것은 어찌 될까? 일체의 존재가 조건에 의해 성립되었다면, 그런 존재의 성질에 불과한 고나 생로병사가 영원, 불변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바이다. 그러므로 붓다가 “고는 연생이다.”라고 할 때, 그것은 고의 고유성, 실재성의 부정이라고 보아야 되는 것이겠다. 고도, 생로병사도 어떤 조건에 의해 생겼다면, 그 조건을 변경시킴으로써 그런 것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런 뜻이 “고는 연생이다.”라는 말씀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그 말씀은 인생 문제를 해결한 붓다의 개가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이 장(章)의 첫머리에 인용한 글은 이른바 ‘사제’에 관한 설법의 전반 부분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사제설은 바라나시 교외 이시파타나 미가다야(鹿野苑)에서 행해진 첫 설법의 주제였고, 또 붓다의 일생을 통해서 그 사상의 골격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 사제 설법 중에서 먼저 그 전반의 두 절을 떼어내어 검토할 때, 거기에는 극히 명쾌한 표현으로 먼저 문제를 제시하고 난 다음 조건이 설명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苦)의 성제이다.”
붓다는 아마도 미리 네 가지 항목을 세워 놓은 다음 차례차례 그것에 대해 설명을 덧붙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 네 가지 항목이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1) 고의 성제.
2) 고의 발생의 성제.
3) 고의 멸진의 성제.
4)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의 성제이다.
또는 ‘제(諦)’라 함은 단언적 명제라는 뜻이므로, 그것은
1) “이는 고다.”
2) “이는 고의 발생이다.”
3) “이는 고의 멸진이다.”
4) “이는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이다.”라는 형식으로 제기되었던 것인지도 알 수 없다. 사실 그런 표현도 붓다의 말씀이라 하여 자주 여러 경전 속에 나오고 있다.
어쨌든 붓다는 먼저 문제부터 제시했다. 그것은 원래 붓다가 출가 당시에 지니고 있던 자신의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제는 붓다 개인의 과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과제임에 틀림없다. 하기야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과제로 자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것은 마땅히 만인의 과제가 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겠다. 이 당연한 것, 괴로움으로 자각하고, 인생을 있는 대로의 진상에서 파악한다는 것은 기실 불교의 기초임에 틀림없으리라. 이것 없이는 불교는 그 첫발조차도 내 디딜 수 없는 까닭이다. 이 자각이야말로 붓다를 몰아 진리 탐구로 달려가게 한 동기였다면, 그것은 전 인류에게도 인생을 대하는 기본자세이어야 할 것임에 틀림없다고 할 것이다. 그러기에 문제의 제시가 그대로 진리(성제)일 수 있는 것이겠다.
생(生)도 고(苦), 노(老)도 고(苦), 병도 고(苦), 죽음도 고(苦)! 과거의 불교인들은 이것을 합쳐서 사고(四苦)라고 불렀다. 이것만으로는 괴로움을 몇 가지 열거한 것뿐이어서 특별한 뜻이 없어 보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인간의 유한성을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교 용어로 말한다면 그것들은 모두가 ‘행고(行苦)’에 속한다. 즉 일체가 무상하여 변화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인 것이다. 이렇게 이해 할 때 비로소 노, 병, 사와 함께 생(生)까지도 고(苦)속에 넣은 뜻이 명료해 진다.
이런 사고(四苦)에 이어서 열거된 것은 예로부터의 한역으로 말한다. 면 원증회고(怨憎會苦)요, 애별리고(愛別離苦)요, 구불득고(求不得苦)이다. 이런 것들은 사고에 비길 때 좀 다른 범주에 속한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인간의 유한성과 관련된 것도 아니고, 행고 속에 포함될 성질의 것도 아니다. 구태여 그것들을 규정한다면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 체험을 세 가지 사항으로 대표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인생은 고(苦) 그것이다.”라는 말은 인생 전반에 대한 단안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예로부터 불교인들은 사고와 나중에 나온 네 가지 항목을 합쳐서 흔히 ‘팔고’라고 일컬었으나, 이것은 항목만을 나열한 데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오히려 붓다가 먼저 인간의 유한성에 대해 말하고, 그 다음으로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 체험을 설함으로써, 결국 이 인생이란 고(苦)가 아니냐는 결론으로 이끌어 간 그 설득의 교묘함을 잘 맛보는 것이 좋으리라 믿는 바이다.
그 두 번째는 “이것이 고의 발생의 성제이다.”라고 되어 있다. 더 단적으로 말한다면 “이는 고의 발생이다.”라는 명제다. 이것에 대해 앞서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은 제1명제에서 제2명제로 옮아가는 과정이다. 거기서는 ‘무엇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고가 있는 것일까?’라는 설문이 있어서 그 두 가지 명제를 연결시키고 있다. ‘연기의 공식’의 전반이 질문의 형식으로 양자 사이에 개재됨으로써 그 둘을 결합시킨 것이다. 물론 사제 설법의 말씀에는 그것이 나타나 있지 않으나, 정각 이후에 붓다가 펼친 논리에는 언제나 이 공식이 자유자재로 구사되고 있다. 그리고 이 설문에 대해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고가 있다.”고 대답하는 것이 이 제2명제인 것이다.
그러면 그런 고(苦)를 있게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갈애라고 대답되어 있다. 갈애(渴愛)라는 말의 원어는 팔리 어로 말한다면 tanha인데, 그것은 원래 ‘목마름’의 뜻이어서 목마른 이가 물을 바라 마지않듯이 사납게 타오르는 욕망의 작용을 가리키는 말이다. 갈애란 그 원어의 뜻을 살리고자 매우 애쓴 역어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여기서 붓다가 그 말에 부여하고 있는 뜻이다. 그것을 따져 볼 때 이 말은 불교를 이해하는 데 매우 미묘하고 중대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이제까지 좀 소홀하지 않았던가 싶다. 붓다가 욕망에 대해 언급할 경우 매우 조심스럽게 이야기하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그대로 보아 넘긴 점이 없지 않다고 생각되는 까닭이다. 갈애라는 말의 쓰임새도 그 좋은 보기가 될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붓다는 결코 욕망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가 부정한 것은 그 지나치게 사나운 작용이었다. 나는 일찍이 불교가 욕망의 완전한 포기를 요구하는 것이라면 나 같은 것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으리라고 낙담한 일도 있다.
또는 이런 가르침은 완전히 비인간적인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한 적도 있다. 그러나 깨닫고 보매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오해임이 밝혀졌다. 이리하여 나는 자신의 불민함을 부끄러워하면서 붓다가 사용한 욕망과 관계되는 술어를 주의 깊게 검토해 갔다. 그 결과로 나는 대략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첫째로 욕망 자체는 ‘무기(無記)’라고 보는 것이 붓다의 입장이었다고 이해된다. 무기란 ‘선악을 구별하기 이전의 상태’라는 뜻이다. 붓다는 욕망 자체를 일괄해서 그것을 선이라든지 악이라든지 단정한 적은 없던 것이다. 만약 그렇게 단정했다면 그것은 도리어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 되는 까닭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누구나 식욕이라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그 식욕에 따라 음식을 먹게 된다. 그리하여 적당히 먹어서 몸을 유지한다는 것은 어디로 보나 좋은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나치게 먹어 도리어 몸을 손상시킨다면 그것은 나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또는 자신의 식욕을 채우기 위하여 남의 것을 빼앗아 먹는다고 할 때, 그것 또한 나쁜 행위라고 하여야 될 것이다. 그러기에 욕망 자체는 무기라고 할 수밖에 없으며, 그 작용에 따라 처음으로 선악의 판단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소부 경전] ‘자설경(自設經)’ 6:8 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던 것이 생각난다.
“고행만이 청정한 행위라는 생각은 하나의 극단이다. 욕망에 아무 나쁜 점도 없다는 생각 역시 하나의 극단이다.”
금욕주의의 입장을 취하는 것은 욕망을 악이라고 보기 때문이려니와 붓다는 이 입장을 배격하였다. 고행을 포기한 것이 그 증거이다. 쾌락주의에 빠지는 것은 욕망을 선이라고 보는 것이겠으나 붓다는 이런 입장도 취하지 않았다. 출가의 단행이 무엇보다도 뚜렷한 그 증거이다. 이 두 가지 태도로 볼 때, 욕망에 대한 붓다의 견해는 ‘무기(無記)’였다고 아니할 수 없는 바이다.
둘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욕망을 언급하며 그 지나친 작용을 경계할 때 붓다는 언제나 신중하게 그 용어를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탐욕이라는 용어가 그것이다. 이것은 원래 raga라는 원어를 번역한 것으로 ‘붉음(赤)’ 또는 ‘연소’를 뜻하는 말이다. 그것을 붓다는 불꽃처럼 타오르는 맹렬한 욕망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한역에서는 이것을 ‘탐(貪)’이라는 말로 바꾸어 놓았거니와, 그 원어의 뉘앙스는 일단 상실된 채로 그래도 아직 욕망의 지나친 상태를 나타내고 있는 점에서는 다름이 없다고 하겠다. 그리고 여기에서 갈애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도 또한 이런 배려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붓다는 이런 괴로움을 있게 하는 조건으로 갈애를 지적하고, 그것에 대해 간명한 해설을 베풀어 갔다. 그 해설도 다시 두 부분으로 가를 수 있다. 갈애의 상황을 말한 것과 그 종류를 열거한 부분이 그것이다.
먼저 그 첫재 부분에 대해서는
“후유(後有)를 일으키고 기쁨과 탐심을 수반하며 이르는 곳마다 그 것에 집착한다.”고 설명했다. 이 중에서 “후유를 일으키고”라는 말은 현대인의 표현으로는 쉽게 나타내기 어려운 뜻을 내포하고 있다. 후유라는 말은 내생에서 윤회를 되풀이하는 존재라는 뜻이어서, 결국은 미망(迷妄)의 인생을 반복한다는 정도의 뜻이다. 그리고 그 씨(원인)가 되는 것이 다름 아닌 갈애라는 것이다. 왜냐 하면 기쁨과 탐심을 수반하며 이르는 곳마다 그것에 집착하기 때문이라고 설명된다. 이것을 한역에서는 “희탐구행(喜貪俱行) 수처환희(수處歡喜)”라고 했다. 그 대상을 가리지도 않고 욕심을 내어서 그칠 줄을 모르는 상태를 말한 것이라고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둘째 부분은
“그것에는 욕애(慾愛)와 유애(有愛)와 무유애(無有愛)가 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갈애의 분류인바, 그 분류의 솜씨는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그 하나는 성(性)에 관한 욕망(慾愛), 둘째로 지적된 것은 개체 존속의 욕망(有愛), 셋째 것은 명예, 권세에 대한 욕망(無有愛)인바, 이 분류 방법은 오늘에서도 근본적으로는 정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겠다. 그것은 이를테면 홉즈(1588∼1679)가 인간의 온갖 욕망을 세심히 검토한 끝에 그것들을 가장 소박한 형태로 환원시켜서 자기 보존의 욕망, 자기 연장의 욕망, 명예와 권세같이 남의 위에 서고자 하는 욕망 – 그는 그것을 허욕(vanity)이라고 했다. – 의 셋으로 나눈 것을 생각게 한다.
어쨌든 붓다는 여기에서 괴로움을 생기게 하는 조건을 발견하여 그것을 상세히 검토하였다. 그러면 그 조건이 되는 갈애를 어떻게 처리 하겠다는 것인가? 그것이 셋째와 넷째의 성제(聖諦)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