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함경 15.열반(涅槃)

15. 열반(涅槃).

“사리푸타(舍利弗)여, ‘열반, 열반’ 하고 말하지만, 대체 열반이란 무엇인가?”

“벗이여, 무릇 탐욕의 소멸, 노여움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 이것을 일컬어 열반이라 한다.”

“그렇다면 벗이여, 그 열반을 실현할 방법이 있는가? 거기로 갈 길이 있는가?”

“벗이여, 이 성스러운 팔정도야말로 그 열반을 실현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즉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이다.” ([相應部經典] 38:1 浬槃)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실천하여 불교인이 기어이 실현코자 하는 이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열반(nibbana)이라 일컬어지는 경지이다.

이상의 경지는 사람과 종교에 따라 각기 다르다. 죽어서 천국에 태어난다든지, 제천(諸天: 여러 신)이 있는 곳에 왕생한다든지 하는 것을 이상으로 그리는 종교도 있다. 또 현세에서의 번영이나 행복을 궁극의 소망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런 중에서 열반을 인간의 이상으로 여기는 불교의 사고방식은 반드시 그 유례가 전무하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그 시대의 인도에 그리 보편화되어 있던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느 경([중부 경전] 72 파차구다화유경. 한역 동본, [잡아함경] 34:24 견)에 의하면, 붓다는 바차(婆蹉)라는 외도의 방문을 받아 다음과 같은 문답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 먼저 그 외도는 여러 가지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해 붓다의 소견을 물었고, 붓다는 그런 문제가 해탈, 열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견해 표명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래서 바차는 문제를 바꾸어 그 해탈, 열반에 대해 따지고 들었다.

“대덕이시여, 그러면 그 해탈한 사람은 어디에 가서 태어나는 것입니까?”

“바차여, 그것은 어디에 가서 태어난다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디에도 안 간다는 것입니까?”

“가서 태어난다든지, 태어나지 않는다든지 하는 그런 것과는 다르다.”

그는 열반에 대해 물었던 것이지만, 그 착안점이 전혀 빗나가 있었기 때문에 토론 자체가 성립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붓다 쪽에서 그에게 질문을 던져 그의 생각을 유도해 갔다. 경전의 이런 서술로 보아도, 이 열반이라는 개념은 그 당시의 인도에서는 아직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개념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면 붓다는 어떤 질문으로 그 외도를 이끌어 갔는지 살펴보자.

“바차여, 그대가 알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냐 하면 이 가르침은 심히 깊고, 알기 어렵고, 미묘하여, 지혜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을 뿐, 다른 사상을 따르는 이나 다른 실천 법을 닦는 이에게는 쉽게 이해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다시 그대를 위해 설하리라. 바차여, 만약 여기에 불이 타고 있다 할 때, 그대는 그것을 불이 타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겠는가?”

독자들은 아마도 이상스런 질문을 한다고 여길지 모르나, 이런 데에도 현실을 직시해 가는 붓다의 사상적 자세가 보인다. 물론 바차는 알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바차가 아니더라도 이런 대답밖에는 할 수 없었으리라. 그러자 붓다의 이상한 질문은 다시 이어졌다.

“바차여, 그러면 그 불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타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그것은 나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옳은 말이다. 그런데 바차여, 그 불이 다 타고 꺼졌을 때, 그 불은 어디로 갔느냐고 묻는다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려는가?”

“대덕이시여, 그것은 적당한 물음이 아닙니다. 그 불은 나무가 있었으므로 탔던 것이요, 이제는 나무가 없어졌기에 꺼진 것입니다.”

이 이상스런 문답으로 붓다는 열반을 설명해 갈 터전을 닦았던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순순히 이런 말씀으로 타일렀다.

“이 인생은 괴로움으로 차있다. 그리고 그것은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 때문이다. 사람이 어리석어서 격정의 희롱하는 바가 되어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격정을 없애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 격정이 없어지고 보면 불안이니 괴로움이니 하는 것도 없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훨훨 타오르던 불도 그 땔감이 다하고 나면 꺼져 버리는 것과 같다. 그것을 나는 열반이라 하는 것이다.”

이런 설명을 듣고 난 바차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그로부터 일생을 통해 충실한 불교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어쨌든 여기에 전개된 문답은 불교의 이상인 열반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더욱이 거기에 사용된 비유는 단순한 비유로만은 보기 어려울 정도로 열반의 개념에 밀착되어 있음을 느끼게 한다. 대저 열반이란 그 원어(Pali, nibbana ; Skt.,nirva -na )의 뜻을 캐어 볼 때 ‘불이 꺼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런 술어를 붓다는 어디로부터 가져왔던 것일까? 이런 문제를 캐기란 쉽지 않겠지만, 요컨대 그 출처는 붓다의 사상 자체에 있었던 것이라고나 해야 될 것 같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이나 아주 초기에 속하는 붓다의 설법 중에 ‘연소’라는 제목으로 전해지는 경이 있다. 유럽의 불교 학자들은 이것을 예수의 ‘산상 수훈’에 비교하여 ‘산상 설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것은 붓다가 전도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의 일이었다. 바라나시의 교외에 있는 이시파타나 미가다야(鹿野苑)로부터 다시 마가다국의 우루베라 – 정각한 곳 – 로 돌아온 붓다는 거기서 많은 제자를 얻었다. 그 수효는 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 제자들을 이끌고 붓다는 다시 그 나라의 수도인 라자가하(王舍城)로 떠나갔던 것이지만, 그 출발에 즈음하여 그는 제자들과 함께 가야시사(象頭山)에 올라간 일이 있다. 산상에 올라서 바라보매, 추억 많은 땅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동북쪽으로는 아득히 가야(伽耶)의 거리가 보였다. 그리고 그 동쪽에서 흐르는 것은 네란자라 강임에 틀림없었다. 다시 그것을 따라 멀리 남녘으로 눈을 옮기니 정각을 성취했던 고장이 보였다. 이 장한 조망을 발아래 놓고 붓다는 새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비구들이여, 모든 것은 타고 있느니라. 활활 타오르고 있느니라.

먼저 이 사실을 너희는 알아야 한다. 그것은 어떤 뜻인가?

비구들이여, 눈이 타고 있다. 마음도 타고 있다. 모두 그 대상을 향해 활활 타오르고 있다.

비구들이여, 그것들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타는 것이랴.

탐욕의 불꽃에 의해 타고. 노여움의 불꽃에 의해 타고, 어리석음의 불꽃에 의해 타고 있느니라.”

그것은 붓다의 새로운 설명 방식이었다. 이제까지 붓다는 고조된 욕망을 말하는 데 ‘갈애’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마찬가지로 욕망의 고조된 상태를 나타내면서 ‘연소’라는 말을 썼던 것이다. 그 새로운 용어는 불교의 흐름을 따라 오래도록 큰 영향을 미쳤다. 후세의 불교인들이 흔히 ‘욕망의 불꽃’이라 했을 때, 그것도 이 계열에서 생겨난 용어로 보아야 하리라. 그리고 붓다가 말하고자 한 것은 이 비유적인 표현을 따라 이야기한다면 결국 그 연소하는 욕망을 가라 앉혀야 한다는 것일 터이다. 그리고 번뇌의 불꽃이 완전히 꺼질 때, 거기에 나타나는 시원하고 편안한 경지, 그것이 열반임에 틀림없다. 열반이라는 술어는 이런 인생의 현실에 대한 생각을 배경으로 하여, 이상의 경지를 뜻하는 말로서 생겨났던 것이리라.

열반이라는 말은 그 성립 과정에서 본다 해도 어디까지나 소극적인 표현이다. 깊은 생각 없이 이를 대하면 천국이니 극락이니 지복(至福)이니 하는 말에 비겨 매우 매력이 없는 말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후세의 불교인 중에는 이것을 소극 무위의 경지라고 잘못 생각한다든지, 회신멸지(灰身滅智 ; 육체적, 정신적 작용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의 경계로 판단한다든지 하여 마침내는 열반으로써 죽음을 뜻하게까지 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이 가당치 않은 해석임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그러면 눈을 돌이켜 이 장(章)의 첫머리에 인용해 놓은 글을 검토해 보자.

그것은 자푸카다카(閻浮車)라는 외도가 사리푸타를 찾아와서 벌인 문답이다. 그 사람은 낡은 주석에 의하면 사리푸타의 조카라고 되어 있거니와, 어쨌든 두 사람은 잘 아는 사이인 듯해서, 잔푸카다카가 불교의 기본적인 개념에 관해 꼬치꼬치 물은 데 대하여 사리푸타는 하나하나 명쾌하게 대답하고 있다. 그 대답은 붓다의 설명 방식과는 약간 달라서 정의적, 주석 적인 점은 있으나, 역시 붓다의 수제자답게 참으로 명쾌하다고 하여야겠다. 그런 질문과 대답이 열여섯 개의 경에 기록되어 그것들이 일련의 경군(經群;염부거상응)을 이루고 있거니와, 그 첫째 경의 내용이 이 열반에 관한 문답이다.

흔히들 열반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대체 무엇을 말함이냐는 것이 이 외도의 질문 내용이었다.

“벗이여, 무릇 탐욕의 소면, 노여움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 이것을 일컬어 열반이라 한다.”

그러면 거기에 이르는 방법은 무엇이냐고 다시 질문을 받은 사리푸타는 이렇게 대답했다.

“벗이여, 이 성스러운 팔정도야말로 그 열반을 실현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즉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이다.”

그리고 사리푸타는

“벗이여, 이것은 선한 길이다. 노력할 만한 값어치가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참으로 명쾌한 주석이어서, 열반에 관한 설명은 이것으로 충분한 것 같다. 여기에 딴 말을 덧붙인다는 것은 오직 그 개념을 애매모호하게 만들 뿐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현대의 학자로서 한 가지만 거기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그러나 나는 현대의 학자로서 한 가지만 거기에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에 의해 현대인들은 어쩌면 열반의 개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런 인간의 이상을 생각해 낸 것은 결코 불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만약 이런 이상이 불교만의 주장이었다면, 우리는 도리어 의심스러운 마음으로 다시 한 번 그 관념을 검토해 보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널리 세계의 온갖 사상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현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결코 불교만의 전유물일 수는 없는 것이라 하겠다.

그 중에서도 언어 표현상 가장 비슷한 것은 스토아(Stoa)의 철인들이 인간의 이상적인 경지라고 생각한 ‘아파테이아(Apatheia)’의 관념이다.

그들도 또한 인간의 불행은 격정(pathos)에 의해 이성이 방해되고 영혼이 구속됨으로써 생긴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격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상태를 최고의 이상이라 여겨, 그것을 아파테이아라고 불렸다.

또 그리스의 에피쿠로스(Epikouros)가 ‘아타락티아(ataraktia)’라고 부른 경지도 그것에 가깝다. 그것은 어지러움이 극복된 내적 평화의 상태를 말한다. 저 쾌락주의자들이 그려 낸 인간의 최고 경지가 이런 것이었다는 것은 퍽 재미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다시 근대에 와서 칸트(Dant)가 말한 ‘자유’의 개념 또한 같은 계열에 속한다고 생각된다. 그는 실천 이성(의지)이 자기 법칙을 따를 때 그것이 자율적 자유요, 이와 반대로 자연적 욕망에 지배될 때 그것은 방종의 타율이라고 했다. 그런 것에서 우리는 열반의 생각과 입장을 같이하는 사고 방법을 발견할 수 있을 터이다.

일찍이 붓다는 어떤 경([상응부 경전] 1:63 갈애)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세상은 갈애에 의해 인도되고

갈애에 의해 괴로움을 당하는 것.

갈애야말로

일체를 예속시키도다.

붓다가 열반을 말씀할 때, 결국은 이런 예속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공적 무위(空寂無爲)의 소극적인 경지라고 할 수 없다. 거기서 불이 꺼지듯이 소멸되어야 하는 것은 갈애이다. 그리고 번뇌의 불꽃이며,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일 뿐이다. 인간 자체가 여기에서 “소멸하여” 어딘가에 가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여기 이 땅에 있는 것이다. 그를 예속하던 갈애가 소멸됨으로써, 그는 완전한 자유와 안온 속에서 여전히 살아가는 것이다. 진리의 길, 평화의 길을. 그리고 그것이 열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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