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현실적으로 증험(證驗)되는 것
“법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나이다. 즉 이 법은 현실적으로 증험되는 성질의 것이며, 때를 격하지 않고 과보(果報)가 있는 성질의 것이며,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며, 잘 열반에 인도하는 성질의 것이며, 또 지혜 있는 이가 저마다 스스로 알 수 있는 성질의 것입니다.” ([相應部經典] 55:1 王. 漢譯同本, [雜阿含經] 30:7 王)
이것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 제자나 신자들이 그 귀의(歸依 ; 돌아가 의지함. 붓다, 법, 승가에 자기를 맡기는 것)를 고백하는 말이다. 이 또한 여러 아함부 경전에 나오는 점으로 볼 때 이미 유행되었던 문구인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붓다 재세 시부터 지금까지 연면히 이어오는 ‘삼귀의’의 원형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삼귀의라고 하면, 이 앞과 뒤에 붓다와 교단(僧)에 대한 신앙 고백이 있어야 한다. 이 삼귀의, 즉 불(佛), 법(法), 승(僧)에 대한 귀의는 불교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왜냐 하면 그것 없이는 불교가 성립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여기에 인용한 것은 이런 삼귀의 중의 ‘법’에 대한 부분이거니와, 여기에는 붓다의 가르침이 지니는 기본적이 성격이 아주 단적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므로 이것을 실마리로 하여 우리는 붓다가 설하신 사상의 성격을 구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나는 여기서 좀 머뭇거리게 된다. 그것은 여기에 나타나 있는 붓다의 가르침의 성격이 세상의 그 많은 종교의 상식과는 꽤 거리가 먼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종교란 내세(來世)에 관한 것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 종교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이다. 특히 후세의 불교 중에는 얼른 보기에 사후의 일이나 내세의 운명 같은 것에만 관심을 쏟는 듯한 종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여기서는 붓다가 설한 법이 “현실적으로 증험되는 성질의 것”이며, “때를 격하지 않고 과보가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지적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세상 일반의 종교적인 상식을 떠나 새로이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 검토할 필요가 있겠다.
앞서 명심해 두어야 할 일은 붓다의 제자들은 무엇보다도 붓다의 가르침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진 다음에 귀의하게 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붓다의 설법을 듣고 그 가르침을 이해하여 그것이 진리임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출가하여 사문이 되거나, 신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귀의의 심정은 이를테면 예수가 “나를 따르라.”고 하자 곧 예수를 따라 나섰던 열 두 제자들의 그것과는 전혀 성격이 달랐다고 해야겠다. 또 후세의 정토종(淨土宗 ; 아미타불의 서방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종파. 혜원(慧遠)이 창시자)신자들처럼 그 도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대로 불지(佛智)와 본원(本願 ; 붓다가 보살 적에 중생 구제를 위해 세운 서원)의 불가사의함을 믿으려 들었던 태도와도 다르다고 아니할 수 없다. 붓다의 제자들이 붓다를 따르게 된 동기는 결코 단순히 붓다의 인격적인 권위 앞에 머리를 숙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하물며 보지 않고 믿는다든지, 불합리한 까닭에 믿는 다든지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경전이 되풀이하여 말하고 있는 것에 의하면 그들은 “이미 법을 보고, 법을 얻고, 법을 알고, 법을 깨닫고, 의혹을 풀어서” 이것 아니고는 내가갈 길이 없다고 확신함에 이르러 비로소 붓다를 따른 것이다. 즉 그들의 귀의는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 납득, 확신 위에 입각한 귀의였다.
그러면 그 가르침은 어떤 성격을 띠고 있었던가? 이장의 첫머리에 인용한 글은 그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조건들을 열거하였다.
1) 현실적으로 증험되는 것.
2) 때를 격하지 않고 과보(果報)가 있는 것.
3)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4) 잘 열반에 인도할 수 있는 것.
5) 지혜 있는 사람이면 각기 스스로 알 수 있는 것.
첫 번 째의 “현실적으로 증험되는 것”이란 말은 흔히 ‘현견(現見)’이라고도 번역되듯이, ‘현실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단적으로 말한다면 붓다의 가르침은 철두철미하게 이 현실에 입각하고 있다는 뜻이다. 붓다가 “이는 고이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현실임에 틀림없다. 보이지 않는 신을 믿어라, 또는 천국이 가까웠다고 하는 따위의 말과는 다르다. 또 “이는 고의 멸진이다.”라고 말하고, “이는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할 때, 그것들은 모두 현실의 문제이니까 눈을 떠서 그 진상을 직시한다면 누구라도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현실적으로 볼 수 있고, 현실적으로 증험할 수 있는 것이겠다. 만약 붓다가 어떤 환상 속에서 말했던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현실에서 보고 증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는 그 설하는 내용이 사후의 문제와 관련이 되고 미래의 일에 미치는 것이었다면 우리는 오직 “보지 않고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혹은 “불합리 하므로 믿는다.”고 고백하여야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붓다를 따르는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보고 증험함으로써 그 가르침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붓다의 가르침이 지니는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성격을 볼 수 있다.
또 두 번째의 “때를 격하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이라는 표현은 흔히 ‘즉시적(卽時的)’ 혹은 ‘현생적(現生的)’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그것은 과보 즉 성과가 나타나는 시기에 관한 문제이다. 만약 붓다가 설한 것이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것이었다면, 그 성과는 그것이 도래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또 그것이 내세 왕생(往生 ; 천상세계에 가서 태어남)에 대한 가르침이었다면, 그 과보는 유명을 달리하는 날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은 때를 격하지 않고 바로 현재에 과보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 다행히 이에 관해서 언급한 경이 있다. [상응부 경전]에 ‘우파바나’라는 것이 있는데, 거기에서 우파바나라는 제자가 그것에 대해 물었던 것이다.
“대덕이시여, 현생적인 법, 현생적인 법 합니다만, 대체 어떤 것이 현생적인 법이겠습니까?”
이에 대해 붓다는 인간의 감각 기관과 그 대상 그리고 그 사이에서 생기는 집착을 보기로 들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파바나여, 여기에 한 사람의 비구가 있어서 눈을 들어 무엇을 보았다 하자. 또 그는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 염심(染心 ; 악에 의해 더러워진 마음)을 일으켰다고 치자. 그때 그는 스스로 반성함으로써 ‘아, 내 속에 염심이 있구나.’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파바나여, 그것이 현생적인 법이니라.
우파바나여, 그런데 여기에 또 한 사람의 비구가 있어서 눈을 들어 무엇을 보았다 하자. 그러나 그는 그것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에 대해 염심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치자. 그때 그는 자기 마음을 돌아보고 ‘아 나에게는 염심이 없구나.’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파바나여, 이것이 현생적인 법이니라.”
붓다와 그 제자들의 관심사는 결국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의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을 변화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전환시키고자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정신을 차려서 돌아보기만 한다면 자기의 상태를 똑똑히 파악할 수가 있는 것이다. 집착을 안고 있는 내 마음의 움직임과 집착을 떠난 내 마음의 편안함이 그대로 이해되기 마련이다. 미망으로 뒤덮여 있는 마음의 어둠이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에 의해 홀연히 개어 가는 모습도 알 수가 있다. 이런 모양을 “어둠 속에 불을 가져와”라고 설했던 것이겠다. 이것이 붓다의 가르침을 ‘현생적’, ‘즉시적’이라 하고, “때를 격하지 않고”라고 한 까닭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세 번째는 “와서 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직역하여 ‘내견적(來見的)’이라고도 하거니와, 그 뜻하는 바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 더 현대적으로 말한다면 ‘열려 있는 진리’라는 정도의 뜻이다. ‘열려 있는 진리’에 대립하는 것은 ‘닫혀 있는 진리’이다. 세상에는 이미 그것을 믿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가르침을 주장하는 종교도 많다. 구약 성서에 나오는 아담의 신화를 믿는 이가 아니면 원죄 사상은 이해되지 않을 것이며, 무량수경에 보이는 법장비구(法藏比丘 ; 아미타불이 보살행을 닦을 때의 이름. 그는 이 때 48대원을 세워 수도한 결과, 서방 극락 정토를 건설하여 그 부처가 되었다고 함)의 서원을 믿지 않는다면 염불 왕생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은 어디까지나 ‘열려있는 진리’이므로 합리적으로 이해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생각건대 붓다의 가르침은 누구에게나 이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또 누구라도 실천함으로써 그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내용이었다. 결코 계시에 의지하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든지, 신앙의 힘에 매달리지 않으면 얻어질 수 없다든지, 또는 이방인에게는 베풀 수 없다든지 하는 그런 제한은 없었다. 허심하게 그리고 냉정하게 귀를 기울인다면 누구에게나 이해되는 내용이었으며, 편견을 떠나 눈을 들어 본다면 있는 그대로 인식되는 가르침이었다. 그러기에 “와서 보라.”고 이를 수 있는 것이며, 만인 앞에 ‘열려 있는 진리, 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네 번째에는 “잘 열반에 인도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더 원문대로 번역한다면 다만 ‘잘 인도하는 것’이 되지만, 어디에 인도하는 것이냐 할 때 열반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열반은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그것이야말로 붓다가 설정한 궁국의 목표요, 인간의 이상인 까닭이다. 인간은 대체 무엇이고자 원하고 있을까? 또는 무엇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저마다 생각이 있을 터이므로 그 생각하는 내용도 각기 다양할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현세에서의 번영을 이상으로 그리며 산다. 어떤 사람은 내세에 위안을 찾으려고 들기도 한다. 상천(上天)이니 왕생이니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제 붓다가 가리키는 목표는 ‘열반’이라고 표현된다. 그것은 닙바나(nibbana, Pali) 또는 니르바나(nirvana, SKt)의 음사인바, 마음속에서 타고 있는 격정의 불꽃이 꺼진 상태를 뜻한다. 이 말로 붓다는 마음속에 어지러움이 없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경지를 가리킴으로써, 그것을 인간의 이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잘 인도하는 것”이라는 구절은 붓다의 가르침이 사람들을 인도하여 이런 이상을 실현 시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생각건대 만일 붓다가 지향하는 궁극의 목표라는 것이, 다른 종교가들이 흔히 그러하듯 내세의 복지에 관한 것이었다고 하면, 그것은 도저히 “현실적으로 증험되는 것”이라거나 “때를 격하지 않고 과보가 있는 것”이라거나 또는 “와서 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가 없었을 터이다. 불교의 긴 흐름을 돌이켜 볼 때, 그런 내세설이 주장된 일도 있었다고 해야겠지만, 붓다의 사상에는 그런 요소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나는 목소리를 높여 확언하고 싶다.
그리고 다섯 번째로 지적된 것은 “지혜 있는 사람이면 저마다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자각에 관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붓다와 우파바나의 문답에서도 나타나듯이 스스로 내심의 동향을 살펴본다면, 내 마음에 번뇌가 있다, 또는 내 마음에 번뇌가 없다고 자각할 수 있는 문제이다. 또 내재하는 방해물이 나타나서 마음을 교란 시킨다면, 고요히 반성함으로써 그 상황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또 붓다가 가르친 방법에 따라 그 방해물을 없앤다면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누구나 자각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적어도 붓다의 제자들은 그런 일을 할 수 있던 사람들이었다. “지혜 있는 이가 저마다 스스로 알 수 있는 것” 이라는 말은 붓다의 가르침이 이런 것이었음을 나타낸다. 만약 모든 종교의 내용을 분류하여 자각의 길과 구제의 길로 나눈다면, 말할 것도 없이 붓다의 가르침은 자각의 길에 속하며 그 가장 전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