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내재하는 방해물
“대덕이시여, 흔히들 ‘악마, 악마’합니다만, 악마란 무엇입니까?”
“라다여, 만약 색(色)이 있다면 그것이 악마요 방해물이요 교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라다여, 색을 악마라 관(觀 ; 깊이 있게 보는 것)하고, 방해물이라 관하고, 교란하는 것이라 관하고, 병이라 관하고, 가시라 관하고, 고통이라고 관하라. 그렇게 관하는 것이 바른 관찰이니라.
라다여, 만약 수(受)가 있다면 그것이 악마요, 방해자요, 교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라다여, 수를 악마라 관하고, 방해자라 관하고, 교란하는 것이라 관하고, 병이라 관하고, 가시라 관하고, 고통이라 관하라. 그렇게 관하는 것이 바른 관찰이니라.” ([相應部經典] 23:1 魔. 漢譯同本, [雜阿含經] 6:10 魔)
전장(前章)에서도 비슷한 무답 형식의 일절을 인용했다. 우파바나라는 제자가 ‘현생적인 법’에 대해 물었고, 붓다는 여러 보기를 들어가며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여기서도 라다(羅陀)라는 제자가 비슷한 형식의 질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이 제자는 매우 솔직한 젊은이였던 것 같아서, 어떤 기본적인 뻔한 사실에 대해서도 자기가 납득할 수 없는 경우는 부끄러움도 모르고 어김없이 물은 듯 보인다. 이를테면 흔히들 ‘무상, 무상’ 하지만 무상이란 대체 무엇이냐고 묻기도 했다. 또 흔히 ‘고(苦)’를 말하지만 고란 무엇이냐 라든지, ‘무아, 무아’라고 하는 그 무아는 대체 무엇이냐고 묻는 식이었다. 그런 문답이 [상응부 경전]속에서는 한 곳에 모아져’라다 상응(相應)’이라는 일련의 경군(經群)을 이루고 있거니와, 그것은 우리에게 더 없이 소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거기에서 이 솔직한 젊은이는 무릇 불교의 기본적인 개념에 대해 샅샅이 묻고 있을 뿐 아니라, 붓다는 붓다대로 매우 명쾌한 답변을 하고 있으므로, 오늘 우리가 붓다는 대체 어떤 뜻으로 무상이니, 고니, 무아니 하는 말을 썼는가를 알아보려고 할 때, 이 ‘라다 상응’의 여러 경이야말로 가장 명쾌한 대답을 제공해 주는 까닭이다. 나 역시 무엇인가 불교의 기본적인 개념에 대해 의문이 생겼을 경우에는 언제나 이 경전을 들추어 보고 있다.
그런데 앞에 인용한 부분은 그런 라다와 붓다의 문답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서 라다가 물은 것은 악마란 대체 무엇이냐는 문제이다. 그런 질문 자체가 이미 악마를 객체적인 존재로 보고 있지 않다는 뜻이 될지도 모르겠으나, 아니나 다를까 붓다는 이른바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작용이야말로 악마의 정체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붓다는 인간을 관찰하고 인간을 논할 때면, 먼저 인간을 다섯 부분으로 분석하였다. 오온(五蘊)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오온은 매우 어려운 말이거니와 결국은 다섯 부분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다섯 부분이 바로 앞에 열거한 색, 수, 상, 행, 식이다. 이제 그 다섯 부분에 대해서 대강 설명을 한다면 색이라는 것은 인간의 육체, 즉 물리적인 요소를 가리키고, 수 이하의 네 가지는 그 정신적인 요소를 가리킨다. 즉 수는 감각이요, 상은 표상(表象)이요, 행은 의지요, 식은 판단 이성의 작용이다. 결국 붓다는 이 다섯 개의 개념이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정체를 나타내는 것이라 보고, 이제 라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악마란 그런 요소들이 작용해서 생기는 내재적인 방해물이요, 내재적인 교란자요, 내재적인 불안이요, 내재적인 가시라고 말한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없지 않다. 많은 고대 문헌에 자주 악마가 나오지만, 그런 경우 대개 악마를 비인간적인 존재로서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불교 문헌에서조차 후대의 것은 역시 그런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붓다와 그 제자들에게는 악마란 필경 단순한 비유에 불과하였다. 결국 악마라는 낡은 개념을 빌려 인간의 내적 방해물이나 불안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땅히 주의해 두어야 할 일로 생각된다.
또 다른 보기를 들어 보자면 [상응부경전] 22:63 ‘취(取)’라는 제목의 경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와 있다.
“색(色)에 집착할 때는 악마에게 붙잡힌다. 집착하지 않는다면 악마로부터 풀려난다.”
그리고 여기서도 또한 수, 상, 행, 식의 넷에 대해서 같은 표현을 하고 있거니와, 그 말투로 보아 인간 밖에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악마가아니라, 인간 안에 도사리고 있는 나쁜 생각을 가리킨다는 것은 명백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깨닫게 된 다음부터 나는 이제껏 별로 주의하지 않았던 아함부의 여러 경에 산재해 있는 악마 이야기를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읽어갔다. 읽어 감에 따라 그것들이 실로 중대한 뜻을 지닌 문헌임을 알게 되어, 지금까지 모르고 지냈던 일을 뉘우치기조차 하였다. 왜냐하면 그런 이야기 속에는 붓다와 그 제자들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몇 가지의 중요한 실마리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상응부 경전] 4 ‘악마 상응(相應)’이라 불리는 것은 악마 이야기를 다룬 스물다섯 가지의 경을 수록하고 있거니와, 그 첫째 경인 ‘고업(苦業)’이라는 부분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 있다.
그것은 붓다가 정각을 성취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 아직도 네란자라 강기슭의 어떤 보리수 밑에서 명상에 잠겨 있던 때의 일이다. 그때 붓다는 마음속으로 먼저 자기가 고행을 포기했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순간 마라(악마)는 붓다의 심중을 눈치 채고 게(偈)를 가지고 도전해 왔다.
고행을 떠나지 않아야 만이 사람의 마음은 청정해짐을 그대는 이것을 버린 주제에 청정한 양 자처함 우습구나야.
붓다는 그것이 마라의 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도 또한 게를 가지고 대답했다.
불사(不死) 위해 고행을 닦은 나머지
전혀 이익 없음을 깨달았노라.
육지에 놓여 진 삿대와 같아
오직 무익한 줄을 마땅히 알라.
그러자 악마는 “세존은 나를 알고 있다. 내 정체를 간파하고 있다.”고 외치면서 허둥지둥 그림자를 감추었다고 한다.
대체 경전 편집자들은 이런 데에 왜 이런 이야기를 적어 넣었던 것일까? 생각건대 앞에서도 강조했듯이 고행의 포기는 붓다로서도 매우 곤란하고 중대한 행위였음에 틀림없다. 정각 직후에 그가 아직도 그것에 대해 얼마쯤 불안을 느끼는 순간이 있었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는 줄로 안다. 그런 내심의 불안이 악마 이야기의 형식으로 여기에 표현되었다고 추측하는 것은 아무 무리도 없는 일이겠다.
더 명백하게 이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은 같은 ‘악마 상응’의 스물넷째 경(經)인 ‘칠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것 또한 정각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여전히 보리수 밑에서 명상하고 있던 붓다에게 갑자기 악마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 왔다.
불사, 안온(安穩)에 이르는 길을
네가 진정 깨달았다면
그 길을 너 홀로 감이 좋도다.
어이 남에게까지 설하려는가.
그것은 틀림없이 정각 직후, 붓다가 설법 여부를 문제 삼고 있던 때의 일이었을 것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 문제에 대해 붓다의 마음은한 때 부정 쪽으로 기울었다. 왜냐 하면 붓다는 그것에 대해 여러 가지 위구와 불안을 느낀 까닭이다. 이런 부정적 일면을 문학적으로 나타낸 것이 이 악마 이야기인 것이며, 그런 주저를 극복하고 마침내 설법을 결심하게 된 과정을 묘사한 것은 앞에 든 ‘범천 권청’의 이야기인 것이다. 즉 붓다의 심리적인 움직임이 두 측면에서 묘사됨으로써 하나는 악마 이야기가 되고, 하나는 범천 이야기가 되고 있으니, 그것들은 매우 흥미 있는 고대 문학의 표현 형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악마 이야기는 붓다가 최초의 설법에 성공하고 마침내 60명에 이르는 제자들을 전도 여행에 떠나보낼 때 다시 나타나게 된다. 그들을 보냄에 즈음하여 붓다는 “비구들아, 자, 전도를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라고 격려한 끝에 여러 가지 주의를 주었다. 우리는 그것을 붓다의 ‘전도 선언’이라고 부른다. 그것에 대해서는 앞에서 상세히 언급한 바 있거니와, 그 ‘전도 선언’이 있은 직후, 마라(악마)의 소리는 다시 붓다에게 속삭였다. [상응부 경정] 4:5 ‘계제(係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우스워라, 그대는 이 세상에서
악한 이의 올가미에 걸리고 말았도다.
그대는 악마의 사슬에 매였나니
사문이여, 그대는 자유를 잃었도다.
이에 붓다도 게를 설하여 대답했다.
나는 진정 이 세상에서
악한 이의 올가미를 벗어났도다.
나는 악마의 사슬을 풀어 버렸거니
파괴자여, 그대는 패하였도다.
생각건대 이제 설법을 결심했다는 것은 다시 또 자기 생애에 중대한 의무를 부과했다는 것이 된다. 모든 구속에서 가까스로 해탈한 지금, 그것은 또 하나의 속박이 되지 않으랴. 이런 새로운 불안이 붓다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고 해서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으리라. 이 악마 이야기는 이런 불안의 상징적인 표현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대승 불교가 전하는 악마 이야기(붓다와 관계되는)와 이 아함부에 나타난 악마 이야기는 그 시기 설정이 매우 다르게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대승에서는 그것을 모두 붓다의 성도(成道) 이전의 일이라고 기록했으며, 정각 이후의 붓다는 완전히 악마의 시련으로부터 벗어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즉 붓다의 인간성이 아함부의 여러 경전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파악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붓다가 이미 인간보다 훨씬 높은 절대자로서 인식되어, 그 인간성은 아주 희박해진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러기에 정각 이후의 붓다와 악마를 관련시킨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아함부에 보이는 악마 이야기는 주로 정각 이후의 붓다에 관련되어 있다. 앞에 든 세 개의 설화가 다 그렇거니와, 그 밖의 것들도 예외가 거의 없다. 하기야 정각 이전의 붓다에게야말로 더 많은 심중의 불안과 고민이 있었을 터이고, 따라서 악마 이야기의 형식으로 표현해야 될 많은 소재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아함부의 여러 경전들은 주로 정각 이후의 언행과 사상에 초점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함부의 이런 이야기는 바로 붓다 그분의 풍부한 인간성의 표현이 되므로, 우리에게는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아니할 수 없는 바이다.
이런 악마 이야기를 통해서 보면 붓다도 때로는 식욕의 유혹을 받기도 했도, 어떤 때는 수면의 유혹과도 싸워야 했던 모양이다. 다쳐서 누워 계셨을 당시에는 – 붓다의 만년에 데바다타(提婆達多)가 반역했을 때 – 무엇인가 불안을 느낀 적도 있었던 것 같다. 또는 여러 사람들을 상대로 법을 설하다가, 갑자기 이래서 될까 하는 불안을 느낀 적도 여러 번 있었던 모양이다.
‘악마 상응’의 14 ‘적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경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렇게 나는 들었다. 어느 시절 세존께서는 코사라 국 에카사라(一葦)라는 바라문 마을에 계셨다. 거기서도 역시 세존께서는 많은 재가 신도들을 상대로 법을 설하셨다. 그때 악한 이 마라는 이렇게 생각했다.
“지금 사문 고타마는 대중에게 에워싸여 설법을 하고 있는 중이다. 어디 내가 가서 여러 사람을 속여 줄까?”
그래서 악한 이 마라는 세존 앞에 나타나 게를 가지고 말을 걸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법을 설함은
현명한 그대의 할 일 아니니
그대여, 그 짓을 굳이 하여서
탐심과 노여움에 매이지 말라.
세존은 그것에 대답하셨다.
남의 이익과 동정을 위해
깨달은 사람은 가르치나니
탐심과 노여움을 여래는 진정
이미 모두모두 해탈했노라.
그때 악한 이 마라는 “세존은 나를 알고 있다. 나를 간파하고 있다.”고 하면서 괴로워하고 의기소침해서 자취를 감추었다.
나는 이 경전이 전하는 붓다의 설법자로서의 태도를 매우 좋다고 생각한다. 이것 역시 악마 이야기의 형식으로 표현되었으니까, 우리는 그 표현을 넘어서 붓다의 심중을 살필 필요가 있으려니와, 여기에서 발견되는 붓다의 설법태도는 다른 종교인들의 그것과는 썩 다른 면이 있는 듯하다. 그것은 거칠게 부르짖는 예언자의 태도가 아니다. 지나친 자신감으로 무반성하게 엮어 세우는 설교 태도 또한 아니다. 자기는 과연이 사람들에게 설법할 자격이 있겠는가, 그것에 정말 어울리겠는가, 또는 탐심이나 노여움에 사로잡히는 일은 없겠는가, 이런 인간다운 불안이나 반성이 마음에 오고 간다는 것은 도리어 남을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조건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붓다야마로 그런 설법자였음을 이 이야기가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