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눈 있는 이는 보라
“위대하셔라 대덕(大德 ; 지혜와 덕망이 높은 중. 본래 붓다를 일컫던 말이나, 후세에서는 일반 승려의 존칭으로 쓰였다)이시여, 위대하셔라 대덕이시여. 이를테면 넘어진 것을 일으키심과 같이, 덮인 것을 나타내심과 같이, 헤매는 이에게 길을 가르치심과 같이, 또는 어둠 속에 등불을 가지고 와서 눈 있는 이는 보라고 말씀하심과 같이, 이처럼 세존께서는 온갖 방편을 세우시어 법을 설하여 밝히셨나이다.
저는 이제 세존에 대해 귀의 하옵나이다. 또 그 법(가르침)과 승가(僧伽 ; 불교의 교단. 의역하면 ‘중(衆))에 대해 귀의 하옵나이다.
원컨대 오늘날로부터 시작하여 목숨을 마칠 때까지, 세존께 귀의하옵는 신자로서 저를 받아들여 주시옵기 바라나이다.” ([相鷹部經典] 42:6 西地人. 漢譯同本, [中阿含經] 17 伽彌尼經)
이런 대문이 아함부 경전의 도처에서 보인다. 그것은 대개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귀의하게 된 사람들이 이른바 우파사카(優婆塞, upa-saka ; 재가 신자인 남자)로서 그 신앙을 고백하는 말이다. 그것은 언제나 거의 같은 형식이므로, 어느 시기부터인가 귀의하는 신앙 고백 형태가 유형화되었던 것 같다. 그것을 여기에 인용한 것은 그것을 통해 붓다의 사상,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설법의 성격을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최초의 설법만 제외하고는 45년에 걸친 붓다의 설법은 모두가 대기 설법이었다고 한다. 문제와 사람과 장소와 때에 따라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가르쳤던 까닭이다.
어떤 때는 제자들과 함께 갠지스 강의 기슭에 서서 소떼를 이끌고 물을 건너가는 목동을 가리키면서, 현실의 이쪽 언덕(此岸)으로부터 이상의 저쪽 언덕(彼岸)에 이르기 위한 방법에 대해 말씀한 적도 있다. ‘차안, 피안’의 개념은 이렇게 하여 성립하였던 것이다.
또 하루는 물건을 훔쳐 도망친 여자를 찾고 있는 젊은이들을 만나, “도망친 여인을 찾는 것과 잃어버린 자기를 찾는 일은 어느 쪽이 더 소중하냐?”
고 말을 건 적도 있다. 그 말을 들은 젊은이들은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아, 붓다의 가르침을 받드는 비구가 되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새로 입문한 제자들을 이끌고 가야시사(象頭山)에 올라간 붓다는 일망무제하게 펼쳐진 세상의 풍경을 가리키면서, “보라, 모든 것은 타고 있다.”고 설했다. 그들은 불을 예배하는 이른바 사화외도(事火外道)에서 불교로 개종한 사람들이었으므로 “모든 것은 타고 있다.”고 말씀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꺼야 한다.”는 말이 그들에게 깊은 감동을 줄 수가 있었다. ‘불이 꺼진 상태’ 즉 열반이 영원한 평화의 경지를 가리키는 불교 용어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하루는 브라만(婆蘿門) 한 명이 나타나서 갖은 욕설을 퍼부은 적이 있다. 그러나 붓다는 침착하게 말했다.
“브라만이여, 그대가 내주는 음식을 손님이 안 먹는다면 그 음식은 누구의 것이 되겠는가?”
그것은 물론 주인의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욕설 또한 자기에게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임기웅변! 자유자재! 붓다의 대기 설법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중에서도 붓다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그것들을 일관하는 뚜렷한 성격이 있었다. 입신자들의 고백문이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넘어진 것을 일으키심과 같이”라는 말은 전도(顚倒)한 것을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전도’란 어떤 판단을 할 때 순서가 엇바뀌고 진상을 오해하는 일이다. 작은 것을 크다고 하는 것도 그것이다. 추한 것을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도 그것이다. 변화하는 것을 불변, 영원한 듯이 아는 태도도 그것이다.
후세의 불교인들은 ‘사전도’라는 말을 썼는데 이는 상(常), 낙(樂), 정(淨), 아(我)의 전도를 말한다. 첫째 상(常)전도는 이 무상한 세상이나 사람을 영원한 듯이 생각하는 일이며, 둘째 낙(樂)전도는 이 괴로운 인생을 즐겁다고 여기는 일이다. 셋째 정(淨)전도는 이부정한 것을 깨끗하다고 잘못 아는 일이며, 넷째 아(我)전도는 이 무아인 존재를 내 것이라고 착각하는 일이다.
이런 착각을 없애고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의 중요한 일면이었다. “넘어진 것을 일으키심과 같이”라는 말에는 이런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안다.
“덮인 것을 나타내심과 같이”는 앞에서도 언급한 불교의 진리관을 표현한 말이다. 어떤 경에서 붓다는 이런 비유를 설한 적이 있다.
“여기 통 안에 물이 있다 하자. 그 물이 불에 데워져 부글부글 끓고 있다든지, 또는 이끼나 풀로 덮여 있다든지, 바람이 쳐서 물결이 일고 있다든지 한다면, 그 통 안의 물은 사물의 모습을 여실히 비칠 수 있겠는가?”
물론 비칠 수 없다고 대답하여야 한다. 여기서 붓다는 만약 우리의 마음이 탐욕이나 노여움으로 뒤덮여 있을 경우에는 여실히 대상을 지견(知見)할 수 없지 않느냐고 대답을 유도해 갔다.
이렇게 ‘여실 지견’을 방해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복(覆)이라고 한다. 그런 것이 제거되고 맑은 마음으로 객관을 대할 때, 일체의 존재는 그 진상을 드러낸다. 이것이 불교의 진리관이다. 그렇다면 “덮인 것을 나타내심과 같이”라는 말은 이런 여실 지견으로 이끌고 가려는 의도임을 알 수 있다.
“헤매는 이에게 길을 가르쳐 주심과 같이”라는 말은 현대식으로 표현한다면 합리주의를 주장한 것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러나 합리주의라는 말 자체가 매우 애매한 점이 있다. 논리에 맞으면 그것으로 끝난다는 것인가, 결과가 그렇게 되는 것을 가지고 합리라고 보는 것인가? 붓다가 취한 태도는 아무래도 후자에 속하는 것 같다. 최초의 설법에서도 이런 붓다의 태도는 이미 나타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하나는 두 가지 극단, 즉 쾌락주의와 고행주의를 비판한 말 속에 나온 “무익하다”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또 하나는 그것들을 비판한 다음 중도(中道)를 주장하면서 “적정, 증지, 등각, 열반에 이바지 한다”고 말한 것이 그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붓다의 실용주의(Pragmatism)를 발견하는 것이다.
붓다가 고행을 포기한 이유에 대해 한 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를테면 물 속에 잠겨 있는 젖은 나무를 보고, 좋은 찬목(鑽木 ; 마찰하여 불을 일으키는 나무)을 가지고 와서 ‘내가 불을 일으키리라, 빛을 내게 하리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中部經典』36 薩遮迦大經)
젖은 나무라면 아무리 마찰시켜도 불이 생겨나지는 않는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고행을 해 보았자 그것으로는 깨닫지 못한다. 이것이 고행을 포기하게 된 붓다의 합리주의적인 생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합리주의적인 정신이야말로 붓다의 생애를 일관했던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나는 이장의 첫머리에 소개한 대문을 [상응부 경전] 42:6 ‘서지인’이라는 제목의 경에서 인용했던 것이지만, 그 경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붓다의 교화 태도도 전해 주고 있다.
그것은 붓다가 나란다 마을의 파바리캄바라는 숲 속에 머물렀던 때의 일이다. 이웃 마을의 촌장인 안반다카푸타(刀師子)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아마도 그는 붓다의 명성을 듣고 있었던 모양이어서, 우선 이런 것을 물었다.
“대덕이시여, 서쪽에서 온 브라만들은 물병을 높이 쳐들든지, 화환을 달든지, 물에 들어가 목욕하든지, 화신(火神)에게 공양을 드리든지 함으로써, 죽은 사람을 천상에 태어나게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대덕께서도 역시 그런 일을 하실 수 있습니까?”
지금도 종교에서 신비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거니와, 그도 그런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붓다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이렇게 반문했다.
“그러면 촌장에게 내가 한 가지 물을 것이 있다. 생각나는 대로 대답해 보라. 어떤 사람이 깊은 호수에 바위를 던졌다 하자. 그때 여러 사람들이 몰려와서 ‘바위야, 떠올라라. 바위야 떠올라라.’ 하며 기도했다고 하면 어찌 되겠는가. 그 바위는 기도의 힘으로 떠오르겠는가?”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누구나 아니라고 할 수밖에는 없으리라. 여기서 붓다는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촌장이여, 이것을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여기에 남을 죽이고, 도둑질을 하고, 거짓말을 하는 따위 온갖 나쁜 짓을 한 사람이 있다 치자. 그 사람이 죽었을 때 여러 사람이 몰려와서 ‘이 사람이 천상에 태어나게 해 주시소서.’ 하며 합장하고 기도했다면 어떻겠는가. 그는 그 기도에 의해 천상 세계에 태어나게 되겠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도 촌장은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대답하고 있는 동안에 어느 사이엔지 그를 가리고 있던 낡은 의식이 벗겨져 나가고, 그의 마음에는 한 가닥의 광명이 비쳐 왔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이장의 첫머리에 인용한 말을 하면서 재가 신자가될 것을 맹세했다는 것으로 이 경은 끝나고 있다.
“어둠 속에 등불을 가지고 와서 눈 있는 이는 보라고 말씀하심과 같이”라는 말은 이런 사실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말해 두어야 할 것이 남아 있다. 그것을 다음 장에서 서술 해 보고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