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전도(傳道)
이에 세존은 그들 사캬 족 사람들을 밤중까지 가르치고 인도하고 격려하고 기쁘게 해준 다음, 존자 아난다(阿難)에게 이르셨다.
“아난다여, 너는 나를 대신하여 카피라바투(Kapila-vatthu)의 사캬족 사람들을 위해, 그들이 도(道)를 구하는 마음이 있다면 다시 법을 설해 주려무나. 나는 등이 아프다. 잠깐 누워야겠다.”
아난다는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이리하여 세존은 옷을 넷으로 접어서 깔고, 발에 발을 포갠 다음, 정념(正念), 정지(正智)를 지니신 채 오른쪽 겨드랑이를 아래로 하고 누우셨다.([中部經典] 53 有學經. 漢譯同本, [雜阿含經] 43:13 漏法)
이제 나는 붓다 고타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 문제를 앞에 놓고 매우 당돌한 이야기일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저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가 그의 일기 속에서 한 말을 생각하게 된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와 신과 인간의 관계는 전혀 성질을 달리한다. 인간과 인간은 오래 함께 살아서 깊이 알게 되면 될수록 그 사이는 더욱 더 가까워진다. 그러나 신과 인간의 관계는 그와 전혀 반대이다. 인간이 신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신은 더욱 무한한 것이 되고, 인간은 더더욱 작은 존재가 되어 가는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 신과 함께 장난하며 놀 수도 있을 듯이 생각했다. 자란 뒤, 내 열정을 바쳐 그를 사랑한다면 신과의 교섭도 실현되려니 꿈꾸었다. 그러나 다시 나이를 먹어 가면서, 나는 신이 얼마나 무한한 존재인지, 신과 인간의 거리가 얼마나 먼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나에게는 참으로 인상이 깊었다. 내가 이 대목을 읽은 것은 벌써 꽤 오래 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그 일절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불교도인 우리가 보기에는 사정은 아무래도 그 반대일 것만 같다.
붓다와 우리의 관계는 인간의 관계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붓다에게 다가가서 그 분을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붓다는 우리에게 더욱 친근한 존재가 될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 붓다는 전혀 딴 세계에 살고 계셔서 이따금 구름이라도 타고 이 세상에 나타나시는 분으로 여겼다. 그러던 그 분이 어느 사이엔가 점점 나에게 가까운, 그리고 아주 친한 사이처럼 느껴져 왔으니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왜냐 하면 의심할 나위 없이 붓다 또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던 까닭이다.
이 일과 관련해서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이 장(章)의 첫머리에 인용한 일절을 처음으로 읽었을 때의 일이다. 그 경은 붓다가 카피라바투의 성 밖, 니그로다(Nygrodha)나무로 에워싸인 정원에 계신 데서 시작된다. 마침 그 때 사캬 족 사람들은 새 회당을 지은 참이라, 그 낙성식에 꼭 붓다가 오셔서 처음으로 입장하는 이가 되어 주십사고 청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쁘게 응낙한 붓다께서는 낙성식에 참석하시고, 밤에는 그 회당에서 늦게까지 사캬 족 사람들을 위해 설법을 하셨던 것이다. 그 다음이 앞에 인용한 대목이거니와, 붓다는 피곤했던 것일까. “나는 등이 아프다. 잠깐 누워야 하겠다.”고 말씀하고, 설법을 아난다에게 맡기신 다음 물러가 주무셨다는 것이다.
“나는 등이 아프다.” 붓다의 이 말씀은 애처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절을 읽었을 때, 나는 그 어떤 기쁨 같은 것을 느꼈던 일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왜냐 하면 붓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 때처럼 절실하게 느낀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붓다는 인간의 숙명이라고나 할 생로병사를 두 어깨에 걸머지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출가도 감행한 것이기는 하였다. 그것 역시 그가 인간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님을 증명해 주는 것이겠다. 그러나 ‘생로병사’라 할 때 그것은 어느 정도 추상화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에 의해 느껴지는 붓다의 인간성 역시 추상성을 면하지 못한다. 그런데 지금 붓다는 “나는 등이 아프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말씀은 매우 애처롭지만, 그것에 의해 나는 직접 붓다의 육신에 접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나로서는 참으로 이상한 체험이었다. 그때까지 멀리 떨어져 있던 붓다의 모습이, 이 일절에서의 감명 이래 나에게는 훨씬 친근한 것으로 느껴지게 되었다. 그와 함께 붓다의 사상 또한 왜 그런지 아득한 저쪽에 있는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붓다의 현신(現身 ; 육체를 지닌 현제의 몸)에 관한 경의 서술이 이상한 매력으로 나의 관심을 자극해 왔다. 이를 테면 [상응부 경전]22:87에 보이는 바카리(跋迦梨)에 관한 대문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것은 붓다가 라자가하(王舍城)의 교외에 있는 베루바나 정사(竹林精舍)에 머물고 계시던 때의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때 한 비구가 어느 옹기장이 집에서 앓고 있었다. ‘바카리’가 그의 이름이었다. 그의 병은 매우 중해서 도저히 회유될 가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간호해 주는 사람에게 부탁했다.
“나는 이제 죽어야 할 몸이다. 만일 붓다를 다시 한 번 뵈옵고 인사드릴 수 있다면 한이 없겠다. 그러나 이 몸으로는 정사까지 갈 수 없으니, 미안하지만 베루바나에 가서 여기까지 행차해 주실 수는 없겠느냐고 붓다께 여쭈어 주었으면 고맙겠다.”
이 말을 전해들은 붓다는 기꺼이 옹기장이네 집을 찾아갔다. 바카리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려 들었다.
“바카리야, 고요히 누워 있어라. 일어날 필요는 없다.”
붓다는 굳이 그를 눕게 하고 그 머리맡에 앉았다. 바카리는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붓다여, 저는 가망이 없나이다. 병이 악화되기만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 소원이오니, 얼굴을 우러러 뵈 오면서 붓다의 발에 정례(頂禮 ; 이마를 땅에 대는 경례. 최대의 존경의 표시)하도록 하여 주시기 바라나이다.”
그때 붓다는 힘을 주어 이렇게 말씀했다고 경전은 기록하고 있다.
“그만두라, 바카리야. 이 썩을 몸을 보아서 무엇하겠다는 것이냐? 바카리야, 법(진리)을 보는 사람은 나를 볼 것이요, 나를 보는 사람은 법을 보리라.”
그것은 참으로 엄한 말씀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여기에서 붓다는 자기에게 예배하겠다는 청을 물리치고, 오직 진리를 파악하려 힘쓰고, 진리만을 의지함이 옳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여기에 불교의 본질이 엄존한다고 하여야 되리라.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이 썩을 몸을 보아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냐?”고 한 붓다의 말이 나에게는 이상한 매력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또 이를테면 장부 경전16이나 [대반열반경]은 노쇠한 붓다에 대해 이런 서술을 남기고 있다.
“아난다여, 나는 노쇠했다. 나이가 이미 팔순이 아니냐? 비유하자면 아난다여, 낡은 수례는 가죽 끈으로 얽어맴으로써 겨우 움직일 수 있거니와 내 몸도 또한 가죽 끈으로 얽어맨 수레 같으니라.”
이 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붓다의 마지막 전도 여행과 그 고요한 죽음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한역에서는 [유행경(遊行經)]이라고 했고, 팔리 어의 동본에는 [대반열반경(Mahaparinibbana-suttanta)]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크나큰 죽음의 경’이라는 정도의 뜻이다. 그것에 의하면 라자가하에서 마지막 여행길을 떠난 붓다는 갠지스 강을 북으로 건너, 베사리 근방인 베루바나 마을(竹林村)에서 우안거(雨安居 ; 인도에서는 장마철이 길므로, 이 동안은 외출을 금하던 것. 4월 16일부터 7월 15일까지 석 달 동안)에 들어갔다. 그런데 거기에서 붓다는 장마와 습기 때문이었는지 무서운 병이 나서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 그러나 붓다는 그 고통을 잘 견디어 냄으로써 가까스로 병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오래간만에 집 밖으로 나가 응달쪽에 앉아서 바깥 공기를 즐기고 있던 참에, 아난다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하신 말씀이 이 일절이었다.
경전 속에는 곧잘 수레바퀴의 비유가 나온다. 설법하는 것을 “법의 수레바퀴를 돌린다.(轉法輪).”고 하고, 훌륭한 정치를 하는 이상적인 제왕을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낡아빠진 수레를 들어, 붓다는 자기의 몸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수레가 오래 되어서 못 쓰게 되면 그것을 가죽 끈으로 얽어매어서 사용했던 모양이다. 노쇠한 붓다는 그런 수레와 똑같다고 자기의 몸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애처롭게 들리지만, 나에게는 역시 잊을 수 없는 붓다의 말씀 중의 하나이다.
나는 이상한 대목만을 열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등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붓다, 이 썩을 몸을 예배해서 무엇을 하겠느냐고 말하는 붓다, 자기의 몸을 낡은 수레에 비유하는 붓다. 그러나 그것은 붓다의 인간성에 직접 접함으로써 친근감을 가지고 그 인격과 사상을 이해해보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육신을 아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왜냐 하면 거기에는 그 분의 인간성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아함부의 여러 경전은 이런 붓다의 인간성을 조금의 가식도 없이 전해 주고 있는 점에서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