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천송반야경 21. 인식을 위한 명칭, 존재와 언어
제석천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중생, 중생’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무엇에 대한 명칭이겠는가?”
제석천이 말했다.
“수보리 성자여, 이 중생이라는 명칭은 어떤 실체적인 존재에 대한 명칭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존재 아닌 것에 대한 명칭도 아닙니다. 이 중생이라고 하는 명칭은 다만 인식을 위해서 명칭을 세운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명칭에 의해서 나타난 실체(自性)와 본체(本體)는 없는 것입니다.”
수보리 장로가 말했다.
“제석천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지금 그대의 설명에 의해 중생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에 대해 조금이나마 명백해진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제석천이 말했다.
“성자 수보리여,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자, 수보리 장로가 말했다.
“제석천이여, 중생에 대해서 그 무엇인가 조금도 명백해진 것이 없다라고 한다면, 어떻게 중생의 무한이 있을 수 있겠는가?
제석천이여,
만약 어떤 부처님이 항하의 모래알 만큼 무수한 시간 동안 소리를 내어서 말하기를, ‘중생, 중생’ 하고 부른다 하더라도, 그 소리에 의해서 거기에 단 한 사람의 중생도 생겨나지 않았고, 미래에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고, 지금 현재도 생겨나지 않는다.
그리고 또 그 소리(언어)에 의해서 한 사람의 중생도 죽지 않았고, 미래에도 죽지 않을 것이고, 지금 현재도 죽지 않는다.”
제석천이 말했다.
“성자 수보리여, 그것은 왜냐하면 중생은 본래청정(本來淸淨)해서 태어남과 죽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수보리 장로가 말했다.
“제석천이여,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중생무변(衆生無邊)인 고로 반야바라밀 역시 무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팔천송반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