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자의 힘, 믿음과 맡김
법상스님
내가 지금 믿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부처님을 믿고 있는가, 하느님을 믿고 있는가, 아니면 어떤 사실이나 원칙, 진리를 믿고 있는가.
무엇이든 좋다.
왜 그것을 믿는가.
두렵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믿는다.
그 두려움이란 알지 못함, 즉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 알지 못한다.
어리석다.
어리석다 보니 온통 불분명하고, 불투명하며, 복잡하고, 불규칙하게 느낀다.
무엇 하나 온전한 것이 없다.
그러다 보니 두렵고 무섭다.
미래에 대해서도 두렵고, 일에 대해서도, 죽음에 대해서도, 모든 것이 알 수 없는 두려움 뿐이다.
그러다 보니 무언가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나를 안락하게 해 줄 도피처를 찾지 않을 수 없다.
바로 그 때 사람들은 어떤 ‘절대’나 혹은 ‘신’, ‘불’을 가정해 놓고, 그것만이 온전하다고 가정해 놓고, 이제부터 그것을 믿기로 작정하기 시작한다.
그럼으로써 이 세상이라는 두려운 곳에서 의지할 곳을 얻게 된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믿음’의 실체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은 언제고 바뀔 수 있다.
선택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내가 믿을 대상에 대한 확증 없이 그저 두려움 때문에 믿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언제든 나의 믿음은 바뀔 수 있다.
부처님을 믿다가 부처님이 나의 두려움을 해소시켜 주지 못하거나, 내가 바라는 바를 얻게 해 주지 못하면 선뜻 믿음의 대상을 하느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부처나 신 보다도 나무나 산이나 바다를 믿을 수도 있고, 그 믿음의 대상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것은 그 대상이 내 믿음으로 확증된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정해 놓고 믿기로 마음먹은 때부터 믿음이 시작되었기 때문이고, 그렇기에 그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온전한 믿음이라면 믿음의 대상은 바로 내가 되어야 한다.
나만이 내 스스로 경험하며,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자신에 대한 믿음, 나 자신의 근본에 대한 확신과 신뢰 그것이야말로 온전한 믿음의 시작이다.
내 바깥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선택’이다.
수많은 내 바깥의 대상들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하여 믿기로 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온전하지 못하고, 내 스스로 확증해 보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내 안의 두려움과 나약함, 그리고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 등 나의 부족함을 어떤 대상에게 의지함으로써 보상받고자 하는 허약한 심리일 뿐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만이 온전하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면 누가 나를 믿겠는가.
내가 나를 믿지 못하고 내 바깥의 대상을 믿는다면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공허할 것인가.
내 안에 내 주인을 세우지 못하고 내 바깥에 의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나약한 일인가.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다.
스스로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내 바깥의 대상을 절대화, 신격화, 진리화 시켜 놓고 그것을 믿고 의지하려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가짜 믿음이다.
그러한 종교는 가짜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와 확신이야말로 온전하고 참된 믿음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믿음을 가지는 사람은 두렵지 않다.
자기 근원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나약하지 않고, 두렵지 않으며, 강하고 용기와 자신감에 넘쳐 흐른다.
자기 자신이야말로 진리이며 신이고 부처인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랬을 때 참된 용기가 생기고, 두려움은 사라진다.
그 어떤 것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괴로움이나 두려움이 오더라도 그 경계가 자신을 휘두르지 못한다.
나야말로 진리의 나툼임을 알고 있다.
진리가 나를 헤칠 리가 없음을 알고 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다 진리다운 이유가 있기 때문임을 알고 있다.
나라는 존재는 진리의 일을 하기 위해 이러한 모습으로 여기에 있음을 온전히 알고 있다.
내 앞에 펼쳐지는 그 어떤 괴로움도, 그 어떤 경계도 기꺼이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이 내가 이 곳에 온 목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내 앞에 나타나는 그 어떤 존재도 모두가 법계에서 부여한 나름대로의 온전한 목적이 있음을 안다.
그렇기에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일도 온전히 존중하며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이 나 자신에 대한, 내 근본에 대한 믿음이다.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일체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다.
내 안의 근본에, 내 안의 진리에, 내 안의 신이며, 내 안의 부처에게 일체 모든 것을 내맡길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참된 믿음은 그렇듯 모든 것을 내맡기고 받아들일 용기와 자신감을 가져온다.
물의 흐름처럼 내 인생의 법다운 흐름에 턱 내맡기고 따라 흐를 준비가 되어 있다.
나약하고 두려우며 어리석은 사람은 결코 나 자신을 나 자신에게 내맡길 수 없다.
믿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턱 내맡기지 못한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모든 것을 내맡길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괴로울 일이 없다.
그 어떤 경계가 오더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진리의 나툼이며 내가 진리답게 살아가는 한 방식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알지도 못하는 내 밖의 어떤 존재에게 나를 행복으로 가져다 달라고, 두려움과 괴로움을 없애 달라고 믿고 의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믿음이다.
어떤 종교를 선택할 것인가.
어떤 믿음을 선택할 것인가.
‘선택’을 해서는 안된다.
어느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선택에 대한 미련이 남을 것이다.
그랬을 때 내 마음은 평온을 잃고 혼란을 가져온다.
선택하지 말고 다만 믿으라.
내 바깥을 기웃거리면 선택할 것만 계속해서 늘어난다.
그러나 내 안을 바라보고 내 내면의 근본에 대한 믿음을 가지면 분열이 없고 혼란이 없다.
그것은 선택이 아닌 당위이다.
나 자신은 여러 가지가 아니다.
여럿 중에 어떤 것을 믿을까, 선택할까의 나뉘는 문제가 아니다.
그저 나 자신을 믿는다는 것은 선택이 아닌 확신이다.
그랬을 때 힘이 생기고 자기 중심이 우뚝 서며, 일체를 내맡길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참된 믿음은 내맡김이고, 용기이다.
믿음이 없다면 불안과 두려움이 늘 나를 따라다니겠지만, 참된 믿음이 있다면 그 어떤 두려움도 불안도 없다.
오직 당당한 용기로써 내맡김 만이 있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참된 믿음으로 일체 모든 것을 맡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