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광스님─현생너머의 광대한 세상에 눈 떠라

현생너머의 광대한 세상에 눈 떠라

-지광스님-

벌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벌은 특유의 광파측정기를 보유하고 있어서 사람이 감지하지 못하는 자외선을 포착, 그 흐름에 따라 움직인다고 한다.

다시 말해 벌들은 그 같은 탐지기를 이용해서 수 십 리 길을 날아가 꿀을 채취한다.

나비도 기막힌 탐지기를 가지고 있다.

그 탐지기를 사용해서 당분의 유무를 판정한 후 다리를 뻗는다.

모기 역시 마찬가지다.

모기는 반드시 민물에다 알을 낳는데 전파탐자기를 물에 집어넣어 바닷물과 민물을 구분한다고 한다.

개미도 특유의 탐지기를 가지고 있어 아무리 먼 곳으로 먹이를 구하러가도 정확히 자신의 집을 되찾아 온다.

식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모든 식물들은 특수한 색깔을 취한 인자가 유전형질 속에 들어 있어 저마다 특유한 색깔의 꽃을 피운다.

또 빛을 탐지하는 장치가 있어 모두 해를 바라본다.

뿐만 아니라 소리를 구분하는 탐지기 역시 가지고 있다고 한다.

팝송이나 고전 음악을 들려주면 성장 속도가 빨라지고, 발로 툭툭 차면서 적의를 보이면 점차 시들다 죽는다는 연구 보고가 나와 있다.

사람도 생물인지라 특유의 탐지기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귀는 고도로 정밀한 탐지기이다.

귀는 25사이클부터 1만 2천 사이클 정도의 파장을 체크해 낼 수 있다.

한 공간에 살아가면서도 이 같이 모든 생물들은 저마다 별난 세계를 유지하며 독특한 생활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그와 동시에 피차간에 해악을 끼치지 않으며 엄밀한 조화와 질서를 이룬다.

참으로 놀라운 대자연의 이치다.

이 같은 고차원적인 대자연, 대우주의 질서를 의상조사의 법성게(*法性偈)에서는 ‘잉불잡란격별성’ 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모든 것이 “혼란 없이 정연하게 따로따로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다지도 엄밀한 조화와 질서 속에 살아가면서도 참으로 묘한 것은 모든 생물들이 자신이 지니고 있는 탐지기의 한계성 탓으로 그 바깥 세계를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경우만 하더라도 불완전한 감각기관을 지니고 사는 탓에 보이고 들리는 세계만이 전부인 양 착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눈의 불완전함을 보완하려고 현미경과 망원경을 만들어 냈지만 그것 역시 더 작고, 더 먼 물체를 감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귀도 마찬가지다.

수억만 수조 메가사이클의 광범위한 파장의 영역 가운데 극히 미세한 부분만을 체크할 따름이다.

그런데로 인간은 그것이 전부인 줄로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다.

이처럼 모든 생물들이 나름대로 가지는 한계를 불교에서는 업(業)이라고 부른다.

광대무변한 우주에는 인간이 보고 들을 수 있는 세계 너머에 또 다른 무한대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아미타 부처님은 ‘무량광(無量光), 무량음(無量音), 무량수(無量壽)’ 라는 말로 표현했다.

사바세계에서는 일곱 가지 가시광선의 혼합색만을 볼 수 있다.

그에 비해 아미타 부처님의 세계는 무량한 광선으로 구축되었으니 얼마나 장관일까? 또 사바세계에서는 일곱(사이음까지 합쳐12음), 7음계의 음악만이 전부이고 다만 그것만을 들을 수 있다.

아미타 부처님의 세계에는 음의 한계를 뛰어넘어 무량한 음의 조화가 울려 퍼진다고 하니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이렇게 보면 (화엄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고 배나무에 배가 열리듯이 중생의 업이 저마다 달라 사는 세계도 저마다 다르다.

눈에 보이는 대우주와 그 이면의 세계는 무수한 종족과 무량한 중생이 살고 있다.

보고 듣는 것 이외의 세상이 광대함을 알라! 마음이 몸의 결박으로부터 풀어질 때 광대한 세계에 눈이 뜨이리라” 우리는 대부분 보고 들리는 세계가 삶의 전부인 줄로 착각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이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그 밖에도 광대한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여기 얼음이 있다고 해보자.

얼음에 열을 가하면 녹아서 물이 된다.

그 물을 끓이면 수증기가 된다.

수증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몸을 등지면 보이지 않는 세계로 옮겨 간다.

그래서 우리가 우란분절에 돌아가신 부모와 조상을 위해 열심히 기도를 올리는 것이다.

그분들은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며 우리들을 지켜보고 계신다.

실제로 우리의 상념이 정화되면 얼마든지 그들과 교신이 가능하다.

우리가 꿈속에서 돌아가신 분들과 만나거나 하는 것은 그들과 상념의 파장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상념은 우주 공간 속에서 전파처럼 움직인다.

우주 공간에는 무수한 전자파가 동시에 존재하면서도 서로 간섭하거나 방해하지 않는다.

얼굴이 다르고 마음이 다르듯이 각각의 전파가 고유하기 때문이다.

만일 라디오처럼 고유의 전파를 잡아 내는 정치가 있다면 망자들의 상념을 체크해 내지 못할 까닭이 없다.

살아 있는 사람의 마음도 마음의 흐름이 달라지면 몸에서 발사되는 파장이 달라진다.

그것은 오로라(*Aurora) 측정기를 통해 과학적으로 검증이 되었다.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은 오로라의 빛도 같듯이 마음의 파장, 즉 상념을 맞추면 영혼과의 대화도 가능하다.

그러한 일이 대체로 꿈속에 일어나는 이유는 잠을 잘 때는 육체의 감각에 방해를 덜 받기 때문이다.

물론 오로라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존재들은 그 오로라의 빛깔에 감응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 말도 않고 아무런 행동도 않는다고 해도 그 마음은 늘 보이지 않는 세계의 존재들에게 체크당하고 있음을 잊지 말고 마음의 순화를 통해 영원의 길을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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