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광스님─탐진치 족쇄에서 자유로워져라

탐진치 족쇄에서 자유로워져라

-지광스님-

사람들은 흔히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말들을 자주 한다.

무엇에 속박되고 있기에 그러는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인가? 자유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부처님께서는 항상 자유자재의 경지를 가르치셨다.

그 어느 것에도 지배당하지 않는 해탈의 자유를 말씀하셨다.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자유라고 한다면 속박의 주체는 누구인가? 다름 아닌 바로 ‘나’란 것이다.

생각해보라.

우리는 너무 많은 굴레 속에 산다.

우선 육신의 굴레가 있다.

보는 것으로부터의 굴레, 듣는 것으로부터의 굴레, 생각하는 것으로부터의 굴레 등등 한도 끝도 없는 굴레가 우리를 속박하고 있다.

먹고, 마시는 것, 사랑하는 것, 우리를 속박하는 것 모두가 굴레다.

우리가 부처님 전에 나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 같은 굴레로부터의 해방감을 누리기 위해서다.

자유를 의미함에 있어 해탈이란 낱말만큼 멋진 단어가 있는가? 모든 굴레로부터의 해방, 그것이 해탈이다.

우리를 속박하는 모든 굴레를 번뇌라 부른다면 이들 족쇄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해탈의 길이다.

수행의 길이다.

해탈의 길 그 길을 통해 우리는 열반의 세계를 간다.

그런데 그 같은 족쇄는 누가 채웠는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스스로 채우고 스스로 고뇌하는 존재, 그가 바로 인간이다.

그를 풀어내기 위해 그는 참으로 힘겹고 어려운 길을 가야만 한다.

비우고 버리는 길 버림의 길이 바로 그 길이다.

버리지 못해 괴로운 것이요 비우지 못해 고통스러운 것이다.

버리면 참으로 자유로워진다.

버리지 못하기에 그에 지배당하는 것이다.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

해탈의 문을 열어가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부처님 마음이다.

각각의 족쇄들 재물, 색, 먹는 것, 명예, 수면 등 한도 끝도 없는 이 족쇄들에서 해방되고 싶은 마음,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 하늘의 새처럼 날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바로 우리의 본질이 부처이기 때문이다.

무소유의 대 자유란 말이 바로 그를 웅변한다.

모두가 버리지 못해 싸우는 것이요, 비우지 못해 애처로운 존재들이 되어져있는 것이다.

참으로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갖가지 족쇄로 속박된 인간은 스스로의 집착이 갖가지 재앙을 자초하는 화근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욕심이 화를 부르기에 열반경에서는 “해탈을 부처라 부른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스스로 묶어놓은 사슬을 풀어버릴 때 자유의 문이 열린다.

해탈의 문이 열린다.

감정의 노예가 되어 행동하고 감각과 욕망의 포로가 되어 행동하는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우리는 항상 자신과 싸워 이겨야만 한다.

남을 이기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를 이기는 게 중요하고, 자기를 항복받는 게 중요하다.

불교에 정통했던 헤겔 같은 이도 “자유는 필연의 자각”이라 했으며 “역사의 진보는 자유의식의 진보”라 했다.

현실에서의 자유는 “이성적 필연을 자각하는 데서 얻어 진다”고 말하기도 했다.

끊임없이 혁명을 일으키고 제도를 바꾸는 것 모두가 자유를 침해당함 때문이다.

인간 내부에 본래 자유인이 들어있기에 자유를 침해당하면 투쟁하는 것이 인간이다.

이 같은 혁명을 외부적 혁명이라 하면 내부적 혁명 역시 너무도 중요하다.

외부 자유를 소극적 자유라 한다면 내적 자유를 적극적 자유라 부를 수 있다.

자유의 적은 이렇듯 밖에도 안에도 있다.

자유는 우리의 본질적 의지이며 그의 결과는 성불이다.

우리는 진정 자유인, 해탈자로 살아야만 한다.

감각 등 갖가지 노예상태로부터 해방되어야만 한다.

역사적으로 자유라는 나무는 혁명의 피를 마시며 자랐고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해탈자의 길 역시 처절함속에서만 가능하다.

자유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분명히 알아야만 한다.

자유의 진정한 목적은 성불이다.

참 자유의 세계는 나와 남이 없는 세계요, 그 세계는 지고의 아름다움의 세계이다.

그곳에서 항상 진리와 정도는 하나가 된다.

그곳에 어떻게 부처님의 무량한 가피가 작용하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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