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광스님─정진의 깊이만큼 해탈의 빛은 밝아진다

정진의 깊이만큼 해탈의 빛은 밝아진다

-지광스님-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함께 놀았다.

땅거미가 지자 메뚜기가 말했다.

“하루살이야.

우리 내일 다시 만나 놀자.” 하루살이가 대답했다.

“내일이 뭔데?” 하루살이는 하루살이용 심장을 가졌다.

메뚜기가 개구리와 놀았다.

날씨가 추워지자 개구리가 메뚜기에게 얘기했다.

“메뚜기야 우리 내년에 다시 만나 놀자.” 메뚜기가 말했다.

“내년이 뭔데?” 메뚜기는 한 철만 산다.

잘 알려진 우화 같은 얘기지만 의미심장하다.

차원이 달라 서로의 세계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무명 중생들은 다른 차원의 세계를 모른다.

차원이 다른 즐거움이 있음을 모른다.

삼계육도는 모두가 자기가 좋아서, 자기 수준이 그것밖에 안돼서 그곳에 가는 것이다.

등불은 자기 몸을 태운다.

강렬히 태우면 강한 빛이 나온다.

자기의 몸을 태운다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런 일인가? 고통을 이겨낸 만큼 즐거움이 온다.

작은 고통을 이겨내면 작은 즐거움이 오고, 큰 고통을 이겨내면 큰 즐거움이 온다.

고통의 크기와 즐거움의 크기가 비례한다하지 않는가? 수행의 등급 따라 영혼들의 광채가 다르다.

지옥중음신은 거의 흑암에 가깝고 고차원으로 나아갈수록 중음신의 빛이 선명하고 아름답다.

욕계, 색계, 무색계 천인들의 즐거움은 서로 차원이 다르다.

초선에서의 즐거움을 이생희락지(離生喜樂地), 2선에서의 즐거움은 정생희락지(定生喜樂地)라 부르고, 3선을 이희묘락지(離喜妙樂地), 4선을 사념청정지(捨念淸淨地)라 부른다.

각각의 즐거움의 차원이 다르다.

무색계, 극락, 열반락의 차원이 다를 것은 물론이다.

자기가 갈고 닦은 만큼의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위대한 성자들의 삶을 보라.

그들은 물질세계의 즐거움을 이겼다.

그들은 이 세상 것들에 별로 연연하지 아니한다.

영원을 가는 위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차원이 다른 삶을 산다.

그들은 고통 가운데 웃을 수 있으며, 죽음의 쓴 잔 앞에서도 두려움이 없다.

죽음을 초월한 자의 위력은 영원과 맞닿아 있다.

죽음에 대한 불안을 정리하지 못하고 벌벌 떠는 영혼들의 미래는 어떠할까? 그대는 죽음의 잔을 흔쾌히 마실 수 있는가? 지금 과감히 모든 것을 던질 수 있는가? 생의 사슬을 끊을 수만 있다면 한없이 평안해진다.

불사(不死)를 체득한 사람은 환희와 열락속에 산다.

불교의 수행은 인간을 넘어선 즐거움, 차원을 달리한 열반의 즐거움을 얘기한다.

수행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적 즐거움을 부처님께서는 체득하시고 가르치셨다.

부처님은 경계를 열어보여 주시려 이 땅에 오셨다.

수행의 깊이를 더하라.

그곳에 차원이 다른 세계의 기쁨과 환희와 열락이 있다.

수행을 마다하는 인간, 고행을 마다하는 인간은 차원이 다른 세계의 환희와 열락을 모른다.

욕계의 즐거움을 떠나는 색계, 색계의 즐거움을 떠나는 무색계, 해탈 열반의 즐거움이 수행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가행 정진하라.

고행난행을 두려워 말라.

천대받고 모욕 받는 수행자의 삶을 즐겨라.

삼계를 떠나라.

체득하기 어려운 진리를 체득하라.

고통스런 수행을 이겨내면 낼수록 그 즐거움은 더하다.

해보라, 나가보라.

수행이 짧아 물질세계에 탐닉하고 관능에 몸을 던진다.

아는 것이 없어 그만큼 밖에 살지 못한다.

끝없는 수행, 끝없는 고행은 나의 영혼과 성장을 위한 밑거름이다.

끝없이 수행하면 끝없이 밝아진다.

수행자들이 고통 가운데 웃을 수 있는 비결이 있다.

죽음의 독배를 시원히 받아 마실 수 있은 용기가 그곳에 있다.

과감히 버리고 비울 수 있는 용감성도 모두가 한 결 같이 탁월한 수행에서 나온다.

수행한 만큼 부처님의 위대한 가피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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