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여는 인연법
-혜국스님-
이제껏 살아오면서 혹시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본적이 있습니까? 나는 가끔씩 ‘나와 아주 똑같은 사람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법문을 하거나 의례를 주관해야 되는데 몸이 퉁퉁 붓고 감기가 들었을때는 참으로 쉬고 싶습니다.
실로 대중 앞에 서야 하는 사람은 휴식도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사람들과의 약속, 꼭 해야 할 일등에 쫒겨 무리를 하다보면 몸의 한 쪽이 아파오기 시작합니다.
이 아픔이 무엇입니까? “야, 좀 쉬면서 하라는데 왜 계속 무리를 하는 거야? 살짝 병을 줄테니 핑계 삼아 쉬어라.
그래야 오래 건강을 유지하지” 이렇게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병의 경고음을 들으며서도 쉬지 못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바로 그때 나와 목소리가 같고 모양새가 똑같은 사람이 있었으면, “오늘은 내 대신 네가 법문 좀 해라.
나는 쉴란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 입니다.
똑같이 생긴 사람이 있으면 쉬고 싶은 날, “나 대신 우리 집에 가서 밥하고 아이들 돌보아 다오.”, “우리집 보살이 필요로 하는 일들을 두루 도와주고 와라.”고 한다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하지만 세상에 똑같이 생긴 몸은 없습니다.
지구상의 몇 십억 사람 중에 나처럼 생긴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입니다.
오직 하나뿐인 몸! 이 얼마나 귀중하고 귀한 몸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죽고 난 뒤에 이 귀중한 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신을 위해 서럽게 울어줄 수도 없고 저승길로 인도해 줄 수도 없습니다.
화장터로 옮겨져 한 줌의 재가 되거나 땅 속에 묻혀 썩어 갈 뿐입니다.
그때면 ‘아하.
내가 속았구나.
한평생 이 몸뚱이를 주인으로 모시고, 먹여 달라면 먹여주고 놀아달라면 놀아주며 살았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배신을 당했구나.’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게송을 불자들에게 자주 들려줍니다.
백년이라 눈 깜짝할 시간이건만 그동안 얻고 잃고 기뻐하고 슬퍼했던 숫한 일들을 어이 다 헤아리리.
이보게 잘난이 못난이 귀한이 천한이 필경에는 북망산의 한 줌 흙이 된다네 지난 세월을 떠올려 보면 시간이 참 빨리도 흘렀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다가오는 세월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새해가 되면 나는 늘 달력을 만들어 나누어 드립니다.
올해 달력을 만든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다시 새 달력을 만들어야 하듯, 인생은 금방금방 지나가고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인생은 무상하고 시간은 하염없이 빨리 흘러 가는데, 지금 우리는 이 하나 밖에 없는 귀중한 ‘나’를 어디로 끌고 가야 하는 것일까요? 먹고 사교하고 놀러 다니거나 연속극 등에 빠져 살아야 할까요? 오늘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을 소중히 가꾸어야 합니다.
이제 다시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인생이 과연 무엇에 의해 끌려 다니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를…우리는 이 사바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소중한 나의 몸을 잘 이끌어 가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늘 몸을 잘 이끌어 가시밭길로 가지 않고 들국화가 피어 있는 아름다운 길을 거닐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떻게 가고 있는지를 자주자주 돌아보면 틀림없이 아름다운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중생들의 삶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어떻게’를 돌아보기는 커녕 익힌 업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남 말하기 좋아하는 병, 조금 힘들면 남을 탓하는 병에 걸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무슨 일만 생기면 바로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슬픔에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가을만 와도 우울증에 빠져 잠만 잡니다.
잠을 많이 익힌 사람은 법회에 참여해서도 그 모습이 나옵니다.
법사가 애써 법문을 하고 있는데도 쭉 퍼져 자고 있습니다.
이처럼 잠을 많이 익힌 사람은 잠자는 쪽으로 스스로를 이끌고, 성을 자주 내는 사람은 성내는 쪽으로 스스로를 이끕니다.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관심이 온통 남한테로 기울고, 남 탓하고 남을 원망하는 삶은 자기 반성을 모르며, 비관적인 사람은 점점 더 우울증 속으로 빠져듭니다.
욕 잘하는 사람은 문제 해결에 앞서 욕부터 하고, 술을 많이 익힌 사람은 매사를 술로 해결하려 하며, 담배를 익힌 사람은 어떤 일이 생기면 담배부터 찾습니다.
그저 자기가 평소에 익힌대로 스스로를 이끌게 되는데, 이 익힌 것을 업이라고 합니다.
인생은 내가 지어 놓은 업에 의해, 지금까지 내가 익혀 놓은 습관에 의해 이끌려 집니다.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익힌 자신의 업, 곧 훈습된 자신의 업력에 이끌려 살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처음 그 업을 만든 것은 나인데, 나중에는 그 업이 나를 끌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실로 잘살고자 하면 바로 이때 운명을 개척해야 합니다.
업을 다스리고 바꾸는 운명 개척의 묘법을 베풀어야 하는데, 그 묘법이 바로 십이인연법, 곧 십이연기법 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연기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의 나는 무엇입니까? 바로 부처입니다.
연기를 분명히 보면 나의 참된 부처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연기는 인연소기(因緣所起)의 줄인 말입니다.
모든 것이 ‘인(因)과 연(緣)이 화합하여 생겨난다’는 뜻입니다.
곧 연기법에 의해 내 삶의 근본이 무엇인지, 나의 삶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 될 것인지, 나와 이 세상의 관계, 모든 생명의 근원 등을 알수 있게 됩니다.
십이인연법의 기초는 인과법과 인연법입니다.
인과법은 다 알고 있듯이, 어떠한 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고 그 원인에 준하여 결과가 따른다는 평범한 진리입니다.
착한 인을 심으면 착한 과보가 따르고, 악한 인을 심으면 악한 과보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인연법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나면 저것도 생겨난다’는 연생법과,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는 연멸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연생법에서 보면 인간의 괴로움이 어떻게 해서 생겨 나는지를 12단계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12연기법으로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셨습니다.
“무명을 인연하여 행(行 : 마음의 동요)이 생기고, 행을 인연하여 식(識 : 식별능력)이 생기며, 식을 인연하여 명생(名色 : 정신과 육체)이 생긴다.
명색을 인연하여 육입(六入 : 눈.귀등 여섯 감각기관)이 생기고, 육입을 인연하여 촉(觸 : 닿음)이 새기며, 촉을 인연하여 수(受 : 느낌)가 생긴다.
수를 인연하여 애(愛 : 애착)가 생기고, 애를 인연하여 취(取 : 취함)가 있으며, 취를 인연하여 유(有 : 존재)가 생긴다.
유를 인연하여 생(生 : 태어남)이 있고, 생을 인연하여 노(老 : 늙음) , 사(死 : 죽음), 우(憂 : 걱정), 비(悲 : 슬픔), 고(苦 : 괴로움), 뇌(惱 : 번뇌)가 있게 되느니라.
이렇게 늙고 죽는 등의 괴로움이 생기는 까닭을 차례로 관하는 것을 순관이라 하고 유전문이라고 합니다.
그럼 모든 괴로움을 멸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장 근본이 되는 무명을 멸해야 합니다.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하며, 나아가 늙고 죽는 등의 모든 괴로움이 다 멸하게 된다고 관해야 합니다.
이렇게 관하는 것을 역관(逆觀)이라 하고 환멸문(還滅門)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유전문을 따라 괴로움 쪽으로 흐르는 인연은 연기법에 의해 변해가는 과정의 연속일 뿐이므로 제행무상이요, 그 속에는 어는 것 하나 독립된 실체가 없으니 제법무아이며, 환멸문을 좇아 나아가면 마침내 열반적정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부처님 불변의 법문인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의 삼법인이 십이인연법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중생이라면 누구할 것 없이 살아가면서 견디기 힘든일을 겪기 마련입니다.
바로 이때, 부처님을 믿는 우리 불자들은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지 말고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왜 생겼는가? 잘 살펴보니 연기법에 의해 생겨난 것이구나.
내 무명으로 인해 지은 업 때문에 생겨난 것이구나.
이러한 고난은 나에게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지금 그 흐름을 바꾸면 능히 모든것을 녹일 수 있다.” 생각이 이렇게 바뀌면 고난을 받아들이는 방법도 달라지고, 괴로움의 깊이나 크기도 상당히 달라집니다.
부처님 당시의 이야기를 한편 하겠습니다.
중인도 마갈타국의 빈바사라왕은 석가모니불께 귀의 하여 불교 교단에 큰 힘이 되었을 뿐 아니라, 성군의 정치를 펼쳐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년은 비참했습니다.
아들 아사세 태자의 반란 때문이었습니다.
아사세 태자는 영축산의 부처님과 제자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돌아오는 부왕을 죽이고 왕이 되려하였습니다.
그러나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빔바사라왕을 감옥에 가두어 죽지 않을 정도의 물과 곡기만을 조금씩 들여 보내며 탈진하기를 기다렸습니다.
빈바사라왕은 감옥 속에서 신심으로 고통의 나날을 넘겼습니다.
그러나 한달 두달, 한해 두해가 지나고 3년이 거의 다 차게 되자 부처님을 향한 원망의 마음이 솟아 올랐습니다.
“저는 부처님과 제자들에게 수없이 고양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기도를 빠트린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결과가 이렇단 말입니까?” 그때 부처님께서는 천이통으로 빈바사라왕의 말을 듣고 계셨습니다.
‘저렇게 죽으면 왕은 무간지옥에 떨어지리라.’ 부처님께서는 곧 신통력으로 빈바사라왕 앞에 모습을 나타내어 과거를 상기 시켰습니다.
“왕이시여, 지금부터 이십 여년 전에 사람을 한명 죽이지 않았습니까?” “아, 어떻게 그것을? 부처님이시여.
죽였습니다.” “왜 죽였습니까?” “제 나이 마흔 살이 될 때까지 아들이 없었습니다.
답답했던 저는 점성가를 불러 물었고, 점성가는 비부라 산에 있는 늙은 수행자가 3년뒤에 죽어 저의 아들로 태어날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욕심이 발동한 저는 그 3년을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곧바로 비부라 산으로 달려가 수행자에게 부탁했습니다.
‘선인이시여, 당신은 나와 부자의 인연이 있음을 아실 것입니다.
저의 아들을 빨리 얻고 싶습니다.
나이도 많이 드셨으니, 곧 바꾸어 태어남이 어떠하올지요?’ ‘나는 아직 3년을 더 살 수 있소.
3년 뒤에 봅시다.’ 씁쓸한 감정을 안고 궁으로 돌아온 저는 제 욕심에 맞추어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어차피 나의 아들이 될 사람이면 3년을 더 사나 지금 죽으나 마찬가지 아닌가.
차라리 지금 죽여 왕궁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좋으리라.’ 저는 믿을만한 신하를 시켜 그 수행자를 죽였고, 그 신하는 지하 감옥에 가두었으며, 마침내 아사세가 태어났습니다.
아! 제가 그 업보를 받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아사세 태자는 장성할 때까지 밝은 정치를 펼치는 부왕을 무척이나 존경하고 따랐씁니다.
그러나 전생의 원결은 어찔 할 수 없는 법.
장성한 태자의 마음에는 부왕에 대한 알 수 없는 살심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어느 날 왕궁의 지하 감옥에 들어갔다가 가장 깊은 감옥에서 쇠사슬에 묶여 있는 죄수를 발견했습니다.” “저 사람은 누구냐? 어찌 감옥 속에서 다시 쇠사슬에 묶여 있는 것이냐?” ‘저희는 모르옵니다.
오래 전부터 이 감옥에 있었으나, 혀가 잘린 듯 말을 하지 못합니다.’ 아사세 태자는 이미 반 짐승처럼 되어버린 죄수에게 갇힌 까닭을 물었지요.
그러자 죄수는 약 20여 년전에 대왕의 명을 받아 자신이 수행자를 죽였고, 그 사실이 밖에 전해질 것을 우려하여 혀를 잘라 지하 감옥에 가둔일 등을 글로 써서 알렸습니다.
이렇게 하여 전생의 일을 알게 된 태자는 참을 수없는 분노에 휩싸여 부왕을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사세태자는 왕을 금방 죽이지 않았습니다.
목숨을 빼앗은 빚만 갚고자 했다면 바로 죽였을 것인데, 남은 생명 3년에 대한 빚이 있기 때문에 감옥 속에서 3년 동안을 굶주리며 괴로워하는 고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빈바사라왕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크게 뉘우쳤습니다.
“세상을 원망하고 부처님을 원망하였더니, 내가 지은 죄를 내가 받고 있었구나.
내가 지어놓은 만큼을 받고 있었구나.
부처님.
잘못했습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아들을 빨리 얻을 욕심으로 수행자를 죽였습니다.
이 모든 죄를 진심으로 참회하오니, 부처님이시여 길을 열어 주옵소서” 그때 부처님께서는 신통력으로 시방세계의 불국토를 왕에게 보여주셨고, 왕은 서방 극락정토를 택하였으며, 마침내 숨을 거둔 다음 부처님의 가르침과 자비력에 의지하여 극락정토에 왕생하였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빈바사라왕의 비극적인 업보는 무명의 욕심 때문에 생겨난 그릇된 업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곧 십이인연의 유전문을 따라 흘러갔기 때문에 고통의 과보를 받게 된 것입니다.
왕과 비부라산의 수행자의 전생에, “너와 나는 아버지와 아들이 되자”고 맹세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왕이 이를 어기고 아들을 갖고자 하는 욕심과 사견때문에 수행자를 3년전에 죽이게 되자 원결이 맺힌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결로 태자가 아버지를 3년 동안 감옥에 가두어 고통을 받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연법을 몰랐던 빈바사라왕은 모든것이 원망스럽고 미웠습니다.
그러다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깨닫게 됩니다.
‘아, 내가 지은 죄, 내가 지은 빚을 갚고 가는 것이었구나.
언젠가는 반드시 받아야할 이 업보, 지금 받아서 차라리 다행이다.’ 이렇게 생각을 바꾼 빈바사라 왕은 편안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었고, 마침내 극락세계로 갔으니, 그야말로 지옥과 극락이 한 생각 차이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에게도 아들 딸 중에 애먹이는 사람이 있거나, 부부 또는 고부 간에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는 이 이야기를 떠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 내가 만들어 놓은 것이지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업, 모든 액난과 고통은 내가 지어서 내가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 업이 어디서 왔을까요? 업의 근본자리는 연기법을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실로 인생은 마음이라는 백지장에 업이라는 붓이 쓰는대로 끌려 갑니다.반대로 그 쓴 것을 지워버리고 다시 백지장으로 돌아가는 것이 마음수행이요, 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연기를 아는 것입니다.
연기법을 조금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헬렌켈러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어릴 때 눈이 멀게 된 그 헬렌켈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 고통을 극복하는 대단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 세상은 그 고통을 극복하는 사람들이 이끌어 간다.” 부처님께서도 이 세상을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하셨습니다.일체개고는 ‘세상이 고통으로 꽉 차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고통은 인연으로 생겨난 것이기에 그 원인을 찾으면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연기법의 핵심요점 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사성제 법문을 잘 이해하고 팔정도를 닦으면 그 고통을 벗어나 부처를 이룰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팔정도는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으로, 백지장과 같은 마음상태로 돌아가는 여덟가지 바른 도입니다.
도(道) ! 이 도에 대한 재미있는 선문답이 있습니다.
중국 당나라때의 대도인이셨던 조주스님께 한 스님이 찾아와 물었습니다.
“도란 어떠한 것입니까?” “도는 도(道), 곧 길이다.” “그럼 길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길? 길은 저 담장 밖에 있찌.” “아니, 누가 그런 길을 물었습니까?” “그런 너는 무슨 길을 물었느냐?” “큰도, 대도(大道)말입니다.
대도.” “아, 큰 길은 장안으로 통하지.” 결국 질문한 스님은 화가 나서 가버렸지만, 조주스님의 답이 맞는 말입니다.
길은 담장 밖에 있고, 큰 길은 서울인 장안으로 통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도인들은 허례허식이 붙지 않는 참된 말을 합니다.
이 참된 말이야말로 도인들의 일구 입니다.
조주스님께서 ‘담장 밖에 있다’고 하신 것은 무자 그대로 담장 밖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질문한 스님은 이 뜻을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참말은 문자와 다릅니다.
참말은 있는 그대로 말해 줍니다.
예를 들어 유치원에 다니는 꼬맹이가 백자 도자기를 가리키며 “이건 무엇으로 만들었나요?”하고 물으면 “흙이야”라고 말해 줍니다.
흙으로 만들었으니까 ‘흙’이라고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얀 도자기를 흙이라고 하니 유치원생 아이는 도무지 믿지 않습니다.
우리도 이 아이와 같습니다.
하얀 도자기의 근본은 흙입니다.
도인의 일구는 본래의 뿌리를 말해 주는 것이요, 조주스님의 대답은 도의 근본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나아갈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공통적으로 나아갈 길은 애착과 무명 이전의 편안한 자리로 가는 길입니다.
스스로를 돌아보십시오.
세상을 살다가 조금이라도 좋은 일이 생기면 마음이 즐거워 집니다.
그러다가 몸이라도 조금 아파오면 그저 세상이 귀찮아 집니다.
남들에게 억울한 말을 들으면 속 상하고, 자식들에게 무슨일이 생기면 그냥 속이 까맣게 탑니다.
만약 여러분이 편안한 자리, 행복한 세계로 가고싶다면 도를 닦아 삶의 모든 현상이 인연이요, 연기법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인연법을 통하여 모든 업의 근원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근본자리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모든 것은 내 업과 내가 지어놓은 습관대로 끌려가는 것이다.만물의 영장이요 가장 귀중한 내가 고작 탐심과 진심과 치심이 하자는 대로 끌려 다녀서야 되겠는가? 욕망이 와서 자라고 하면 자고, 먹으라고 하면 먹고 있지 않은가? 대체 욕망이 일어나는 근본자리는 무엇인가?’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며 끊임없이 정진해야 합니다.
열성을 다해, 정성을 바쳐 노력하면 반드시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음악이 아름다운 것은 그 소리를 위해 음악가들이 인생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미술.
무용 등의 예술도 다 같습니다.
예술이란 마음을 바친 만큼 감동을 주게 됩니다.
마음공부도 마찬가지 입니다.
만약 우리가 마음공부에 정성을 쏟는다면, 살아 생전의 행복은 물론이요.
죽은 다음 염라대왕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습니다.
염라대왕이 “너는 무엇을 하다가 왔느냐?”:고 물으면 “나는 내 마음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마음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그리고 연기법을 익혀 욕망 이전의 근본자리를 찾고, ‘나는 누구인가?’하는 화두를 가지고 마음공부를 하다가 왔다” 대답하면 됩니다.
그러면 염라대왕이 달려나와 “몰라 뵈었습니다.”할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임 연기법, 이 연기법에 입각하여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내 앞에 펼쳐지는 세상이 달라집니다.
어둡던 자리가 광명으로 바뀌고 얽히고 설킨 채 무언가에 속박되어 살았던 삶이 대자유의 삶으로 바뀌며, 불행의 기운들이 행복의 에너지로 바뀝니다.
부디 연기법을 깨닫는 마음공부, 내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법을 익혀, 평화와 행복을 만끽하는 멋진 인생을 꾸려 가시기를 축원 드리면서 이달의 법문을 마감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