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광스님─무아를 실현하면 한없는 가피를 만난다

무아를 실현하면 한없는 가피를 만난다

-지광스님-

고통의 근원은 이기적인 나에서 비롯된다.

나를 버리지 못해 항상 고통스럽다.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을 인연하는 이 껍데기가 항상 문제다.

육신이란 껍데기가 걷어지고, 식이 녹아지면 우리는 그대로 법신이 된다.

법신은 무한이요, 무아요, 열반이다.

왜 부처님은 왕국을, 모든 것을 던지셔야만 했던가.

그 길이 바로 무아의 길이고, 열반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진정 버리지 않으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무아가 진전할수록 평안해지고 행복감도 더해진다.

무아가 실현될수록 극락·열반의 세계로 나아가고 사랑의 화신이 된다.

기도도, 참선도 모두 무아의 길이요, 무한 사랑과 행복의 길이다.

100km를 달리는 선수가 있다.

그는 그 고통스러운 행군 가운데에도 한없는 즐거움이 있다고 말한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 하듯이 그 누구든 나를 버리면 한없는 즐거움의 세계가 어디에서나 열릴 수 있다.

나를 던지는 처절한 훈련이 있었기에 신기(神技)가 나오고, 수많은 중생들을 황홀경으로 몰아간다.

문자 그대로 우주가 그대로 법신이요, 부처님이기에 무한 환희와 열락이 넘실댄다.

우주가 무아요, 열반이기에 나를 버리기만 하면 한없는 즐거움과 행복의 장이 열린다.

부처님은 어디 먼 곳에 계신 것이 아니고 바로 나와 함께 계시기에 나를 버리기만 하면 한없는 즐거움과 평안과 안락의 세계가 열린다.

참선을 해도, 기도를 해도, 어떤 수행을 해도 우리는 분명 부처님을 만나게 돼있다.

그 어느 곳에서도 몸과 마음을 던져 부처님과 하나가 되면 해탈 열반의 세계가 열린다.

우리는 이미 부처님과 하나이고 부처님의 품안에 있지만 육신의 굴레에 가려져 자신의 본질을 보지 못할 뿐이다.

무명 중생들의 안타까움이 그것이다.

이뭣고를 끊임없이 챙기거나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화엄성중을 소리 높여 부르면 분명히 부처님 경계를 만날 수 있다.

천 번, 만 번 당연한 일이다.

견성성불 즉신성불도 모두 그대로가 진실이다.

무아를 실현하면 모두가 가능한 일이다.

무아가 되면 참나와 하나가 되기에 몸과 마음이 한없이 맑아진다.

기가 맑아진다.

무아가 되면 세상을 맑히는 샘물이 되어 혼탁한 기운을 걷어내는 정화제가 된다.

질병과 재난이 모두 사라지고 세상을 맑고 아름답게 만든다.

끊임없는 기도정진, 참선정진을 통해 성취되는 무아는 맑은 기운을 세상에 뿜어대는 발전기가 되는 길이다.

이 몸과 마음이 수행을 통해 세상을 맑고 밝게 하는 발전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수행을 거듭하는 무아의 구도자는 법신의 위신력과 하나가 되어 세상의 고통과 액난을 걷어낸다.

반야심경에도 ‘조견오온개공 도 일체고액’이라 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무아를 실현해 나갈 때 고통과 액난을 벗어날 수 있다.

스스로에게 항상 물어라.

나는 얼마나 무아를 실현하며 사는가, 얼마나 이기심을 놓으며 사는가, 얼마나 이기심에서 벗어나 있는가 물어야만 한다.

이기심과 집착 탐욕 등은 모두 무아의 길을 벗어나 있고, 항상 고통스런 삶을 만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마음들은 항상 누구의 마음 가운데에도 존재하는 내면의 악마이다.

우리의 본질이 무아이고 열반이기에 우주는 한없는 즐거움의 세계요, 해탈 열반의 세계다.

수행은 결국 항상 가짜 나를 항복받는 길이며, 그 길 가운데 영원한 지혜와 자비, 부처님의 가피의 세계가 열린다.

우리들 모두의 마음 밑바닥에는 진정 서로를 사랑하는 하나의 마음이 있다.

바로 그 마음이 무아의 마음이고 열반의 마음이기에 무한이며, 무한 사랑의 마음이며 부처님의 마음이다.

육바라밀도, 기도도, 참선도 그 모든 수행도 하나같이 그 같은 열락의 마음을 여는 길이며 그 같은 무아의 수행 가운데 부처님의 사랑과 무한한 가피는 한없이 넘쳐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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