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 속 무량대복을 어디서 찾나 범어사 승가대학 학장 무비스님● 오늘 조계종출판사에서 제가 쓴 『신심명』 강의 출판을 기해 여러분들에게 『신심명』이란 어떤 책인지 소개도 하고 곁들여 불교의 진실을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는 인연의 자리를 마련해주어 참으로 오랜만에 여러분들과 자리를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신심명』 첫 구절에 ‘지극한 도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至道無難)’라고 했습니다.
‘지극한 도’라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바라던 목표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전제조건을 달고 시작합니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다 『신심명』의 저자 승찬 스님은 사십대의 중년 나이에 이조 혜가 스님을 만나서 비로소 불교가 무엇인지, 부처님이 무엇인지에 대해 처음으로 소개받게 된 분입니다.
승찬 스님은 나병(한센병), 우리가 흔히 문둥병이라고 하는 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이 거리 저 거리를 떠돌며 밥을 굶고 사람들로부터 멸시 받는 처참한 생활을 해 오던 바로 그 분이 사십대 중반에 혜가 스님을 만나 부처님의 정통 법맥을, 병든 몸 그대로 이어 받은 것입니다.
승찬 스님은 서기 600년경의 사람인데 지금부터 1400여 년 전에 그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의 형상을 한 이에 대한 대우가 어땠겠습니까.
그런 처참한 인생을 살며 스스로 자책하기를 ‘분명 큰 죄를 지어 이런 삶을 사는 것’이라 결론을 내고는 세상에 큰 도인이라 알려져 있는 혜가 스님을 찾아가 “나는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처참한 과보를 받고 삽니까.
도사께서 나의 죄를 참회 시켜 주셔서 병은 낫지 않아도 좋으니 죄만이라도 벗고 싶습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자 혜가 스님은 “그대가 천만근의 무게로 느끼고 있다는 그 죄를 드러내놓기만 하면 내가 참회시켜 주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승찬 스님은 그토록 무겁게 느껴지던 자신의 ‘죄업’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었고 그런 승찬 스님에게 혜가 스님은 “그대가 스스로 찾아도 진정 찾을 수 없는 것이라면 그대의 죄업은 이미 다 참회가 된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혜가 스님의 이 말씀에 승찬 스님은 눈이 훤하게 밝아졌습니다.
“그동안 죄업이라는 환상을 한 짐 짊어지고, 그것을 천만근의 무게로 지고 살았는데 알고 보니 환상이었다.
내가 수고로이 왜 그것을 찾으려고 했던가.” 승찬 스님은 그 자리에서 확연히 깨달았습니다.
‘죄가 많아 고통을 받는다.
’ 다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분의 고통은 저를 포함해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불자님들의 크고 작은 고통일수도 있습니다.
저는 근 4년 동안 힘든 병고를 겪어 냈습니다.
그 힘든 병고를 겪으며 승찬 스님의 아픔을 어느 정도 느끼고 맛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승찬 스님에 버금가는, 그것과 비슷하게 심적으로나 물적으로 고통을 겪고 살지도 모릅니다.
승찬 스님은 그 한 말씀에 깨닫고는 팔만대장경에 버금가는 이 『신심명』을 저술하셨습니다.
비록 짧은 시형식의, 몇 글자 안 되는 글이지만 승찬 스님의 그 삶을 생각해 보면 저는 이 책이 팔만대장경보다도 더 묵직한 무게의 책으로 느껴집니다.
서두에서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다’는 것은 행복한 삶, 견성, 성불이니 하는 것들이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며 ‘ 유혐간택(唯嫌簡擇)’이라 ‘오직 가려내고 선택하는 것만 경계할 뿐’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전부 차별로 봅니다.
차별로 보니까 거기에서 취사선택이 있는 것입니다.
승찬 스님의 입장에서는 건강한 모습, 얼굴에 흠 없는 모습, 완전한 손가락, 완전한 발가락, 그런 몸을 얼마가 갖고 싶었겠습니까.
그런데 승찬 스님이 눈을 뜨고 보니 그렇게 부러웠던 삶과 짐승보다 못했던 병자로서의 삶이 결코 취사선택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취사선택을 경계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만 하면 무책임한 말입니다.
분명 눈으로 보기에 이렇게 다른데 어떻게 취사선책을 안하느냐 말입니다.
하지만 그 분은 그것을 본 것이 아닙니다.
환자든, 건강하든, 남자든, 여자든, 유식하든, 무식하든, 가난하든, 부자든 그것과는 전혀 관계없이, 그것은 털끝만한 문제도 되지 않는 인간의 진정한 가치, 숭고하고 지극히 높고 가치 있는 그 세계를 당신은 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차별이 소용없는 ‘이것이야 말로 지극히 존귀하고 지극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그 실체는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런 자신감 있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마음은 끝없이 요동치는 파도 승찬 스님이 보신 초월한 그 세계란 다름 아닌 말하고 소리 듣고 이름 부르면 돌아보고 배고프면 식사하고 피곤하면 쉴 줄 아는 바로 그 능력이었습니다.
그 능력, 그 사실은 건강한 사람도 병든 사람도 문둥병 환자도 정상인도 똑같이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이 참으로 값진 존재고 위대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가치 있는 것인데, 오직 외모만 보고 차이나는 것에 너무 가치 기준을 두어 집착하고 매달리며 그것을 갖고 차별하고 자신을 비하하고 그랬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현상을 보면서 늘 습관적으로 가치 있다, 없다, 좋다, 나쁘다 합니다.
물론 육신이 병들면 당장 사는데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우리 마음이 활동을 멈춘다면 건강한 모습은 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리 많이 갖고 높은 자리에 있다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진정한 가치, 참 생명의 가치에 눈을 뜨면 되는 것입니다.
참선이다, 기도다하여 온갖 방편이 있는데 그것은 진짜 방편입니다.
『신심명』에 ‘불식현지 도로염정(不識玄旨 徒勞念靜)’이라 ‘인간 존재 실상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어서 쓸데없이 수고롭게 생각만 고요하게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위빠사나니 간화선이니 염불이니 진언이니 하면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집중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움직이고 흔들리게 돼 있습니다.
인연 따라 잘 움직이고 흘러가는 것이 본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억지로 잡아 묶어 집중시키려하니 그게 됩니까.
수천, 수만 명이 마음을 집중시키려 하지만 하루 종일 10분이 안됩니다.
그렇게 흔들리고 흘러가는 것이 마음의 본색입니다.
『금강경』에서도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 했습니다.
본래 머물지 않는 마음이니까 머물지 말고 그 마음을 내라 이 말입니다.
습관버리고 참생명 눈떠야 이 세상에 생각 고요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오직 조계사 기둥이 고요할 뿐이지요.
고요하면 그것은 죽은 사람이지요.
간화선이니 위빠사나니 해서 마음을 집중시키려 하는데 그 렇게 하지 마세요.
몹쓸 일입니다.
마음이 언제 고요해지던가요.
혹 운이 좋아 고요해졌다 해도 흙탕물을 가라앉힌 것과 같아서 바람이 불거나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다시 흙탕물이 일어납니다.
바다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물살이 흐르듯 우리 마음은 끝없이 요동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중일여, 정중일여, 몽중일여, 오매일여 하는 이런 무시무시한 관문을 설정해 놓고 거기에 도달하기 바라는 그런 엉터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거기에, 그 무시무시한 관문에 도달한 사람은 없습니다.
한 철에 ‘참선프로객’들이 2천명이 넘고 재가신도들까지 해서 요즘은 만이천명쯤 되는 불자들이 참선을 한다는데 하루 중에 단 10분이 일념이 안 됩니다.
우리마음은 본래 안 되게 돼 있습니다.
마음은 본래 원리가 흘러가게 돼 있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의 본능이라.
그런 인간실상의 내면을 여실히 알아버리면 인연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 구업녹이며 사는 것.
그런 이치만 알면 복은 저절로 자라나고 업은 저절로 녹게 돼 있는 것입니다.
소승불교가 시대에 맞지 않다하여 일어난 것이 대승불교이고 그것도 시대적 대안이 안된다고 해서 폐기처분하고 선불교가 일어나고 다른 곳에서는 비밀불교 일어나고, 또 전쟁이 일어나니 선불교니 대승불교니 다 폐기처분하고 호국불교가 등장했습니다.
이제 또 살만하니 호국불교는 물러가고 기복불교가 일어나 너도 나도 다 기복하지요.
시대 따라 옷을 갈아입는 것입니다.
갈아입을 수밖에 없어요.
그게 옳습니다.
봄 됐으면 봄옷 입듯이 여름 되면 여름옷 입는 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승찬 스님의 『신심명』과 연관시켜 이 시대의 불교로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인간불교라고 하는 것.
인간 개개인이 완전무결한 부처라는 사실입니다.
이 시대에는 인간 개개인의 가치가 드러납니다.
인간 개개인이 아주 존귀하고 높다는 사실을 누구나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어디에 의지할 것도 없고 더 새로운 것을 찾을 것도 없이 인간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이해해서 그 실상에 맞게 살아가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법화경』을 보면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께서는 만나는 사람마다 부처님으로 섬기고 받들고 존경하며 예배드렸습니다.
나는 이 말씀을 이제 이 시대에 맞는 표현으로 인간불교시대라 하고 ‘인간 그대로가 다 부처님’이라는 수기를 여러분께 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에 대한 갈등으로 시간을 다 보냅니다.
우리가 위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고도 그 가르침의 진수를 마음에 담지 못한 채 끊임없이 헤매는 것이야말로 부처님 문 앞에만 와서 서성대다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무량공덕에 눈을 떠야 합니다.
늙었든 젊었든 유식하든 무식하든 병자든 건강한 사람이든 아무 관계없이 인간 개개인 누구나 갖고 있는 무량대복이 있습니다.
육조 스님도 깨닫고 나서 첫마디가 “본래 불생불멸인 것을 내 그것을 꿈엔들 알았겠는가.
내 자신이 본래 불생불멸의 존재라는 것을 상상도 못했던 것을 알았다”고 하고 ‘하기자성본자청정(何期自性本自淸淨)’이라.
“내 자신이 본래 아주 뛰어난 존재라는 것을 오늘 아침에야 알았다”고 토로를 했습니다.
우리는 평생 불교 공부한다고 하지만 이 가르침, 이 관문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선하고 염불하고 기도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얻긴 뭘 얻습니까.
본래 자기 주머니에 있는 것을.
오늘 인간 불교 시대를 나름대로 선언하는 것은 우리 인간 개개인이 조금도 부족함이 없음을, 인간 개개인 그대로가 완전무결한 존재라는 사실에 눈을 뜨고 확신을 가져서 당당한 삶의 길을 가시길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