水流花開 –
법정스님
“텅빈충만” 중에서- 가을 산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
큰절은 노상 장바닥을 이루고있는데, 그 여파가 산 위에까지 미치고 있다.
사람은 그 계층이 각양각색이라 만나는 사람들도 저마다 다른 언동을 한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큰절까지 왔다가 한번 올라와 보았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이와같이 말하면서 기웃거리다가 이내 내려가 버린다.
아무 구경거리도 없는 어설픈 암자이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간혹, 좋은 말씀 듣고 싶어 왔다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분들에게 나는 한결같이 산이나 바라보다가 가시라고 일러준다.
눈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내게 좋은 말이 있을 턱이 없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말이기로 자연에 견줄수야 있겠는가.
자연만큼 뛰어난 스승은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사람의 말이란 자연에서 치면 한낱 파리나 모기 소리와 같이 시끄러움일 뿐이다.
산에 오면 우선 그 사람으로부터 해방이 되어야 한다.
되지도 않는 말의 장난에서 벗어나 입 다물고 자연의 일부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밖으로만 팔았던 눈과 귀와 생각을 안으로 거두어 들여야 한다.
그저 열린 마음으로 무심히 주위를 바라보면서 쉬어야 한다.
복잡한 생각일랑 그만두고 가장 편안한 마음으로 자연의 숨결에 귀를 귀울여야 한다.
이 밖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 알량한 말로 인해서 지금까지 우리는 얼마나 눈멀어 왔고 귀먹어 왔는지 냉정하게 되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남의 얼굴만을 쳐다보다가 자신의 얼굴을 까맣게 잊어버리지 않았는지 반성해 보야야 한다.
남의 말에 팔리지 말고 자기 눈으로 보고 자신의 귀로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삶을 이룰 수 없다.
자연은 때묻고 지친 사람들을 맑혀주고 쉬도록 받아들인다.
우리는 그 품안에 가까이 다가가 안기기만 하면 된다.
그래야 닳아지고 관념화되어 꺼풀만 남은 오늘의 우리들을 회복시킬 수 있다.
언젠가 학생인 듯한 한 젊은이가 찾아와 불쑥 수류화개실(水流花開室)이 어디냐고 물었다.
“네가 서있는 바로 그자리다!”라고 했더니 어리둥절해 했다.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곳이 어디이겠는가? 몰론 산에는 꽃이 피고 물이 흐른다.
그러나 꽃이 피고 물이 흐르는 곳이 굳이 산에만 있으란 법은 없다.
설사 도시의 시멘트 상자 속 같은 아파트일지라도 살 줄 아는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 삶의 향기로운 꽃이 피어나고 그 둘레에는 늘 살아 있는 맑은 물이 흐를 것이다.
사람은 어디서 무슨 일에 종사하면서 어떤 방식으로 살건 간에 자기 삶 속에 꽃을 피우고 물이 흐르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하루 사는 일이 무료하고 지겹고 시들해지고 만다.
자기 자신이 서 있는 그 자리를 두고 딴 데서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헛수고일 뿐, 그러기 때문에 저마다 지금 바로 그 자리가 자기 삶의 현장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