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스님─입 손 발등 몸 관리만 바르게 해도 극락 눈 앞에

입 손 발등 몸 관리만 바르게 해도 극락 눈 앞에,

성수스님

(법수선원 조실) 오늘 산승은 여러 대중 앞에서 사바세계의 때를 벗어 던지고 씻어 버리는 얘기부터 하겠습니다.

이 산승의 말을 듣고 신 잘 벗는 것부터 배웠으면 합니다.

자기가 신는 신 하나 제대로 못 벗는 사람은 부처님 뱃속에 들어가도 진리니, 법이니, 설법이니 하는 것을 못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신 하나만 제대로 잘 벗고, 모자 하나만 반듯하게 잘 쓰고 입을 잘관리하면 됩니다.

또 손도 소중한 손, 귀중한 손, 위대한 손인줄 알고 함부로 써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 다음엔 발걸음 한자죽 잘못 내딛으면 3대를 망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걸음 한자죽만이라도 백번을 생각하고 또 해서 한자죽 옮겨 놓을 수 있는 장부가 돼야 합니다.

쫓아가면 다 걷는줄 알지만 생각하고 걷는 것 하고, 생각않고 걷는 것하고 태도와 모습이 천지차이 입니다.

자신의 신체 하나 하나를 잘 관리하지 못한 채 부처님 앞에 절만 꾸벅꾸벅하는 것은 껍데기 불자입니다.

껍데기 불자만으로는 앞으로의 한국불교를 낙관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5백생동안 자기 눈, 입, 손, 발 관리를 잘 하셨기에 3천년 존경받는 산불자가 되셨습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승가와 우바새, 우바이도 이것들을 잘 관리해 산불자가 돼야 함을 숙지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한국불교의 미래가 밝아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간단한 문제는 아닐터입니다.

자신의 굳은 심지와 실천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굳은 각오없이는 허사로운 일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나라 불자치고 정구업(淨口業) 진언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은 없으나 실천수행하는 이들은 미약한 것 같습니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이것은 ‘입에 업되는 말을 맑게하고 참말만 하겠습니다’하고 부처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발원해 놓고 실행하지 못할 때는 스스로 벌을 설줄 알아야 하고 불제자로서 참회해야 합니다.

또한 자기 허물은 걱정않고 남의 걱정과 허물을 들춰 내기를 일삼는 불자는 부처님 앞에 합장할 자격이 없습니다.

남의 허물만 꾸짖지 말고 힘써 내 몸을 되살펴 보야야 합니다.

남을 흉보기 이전에 나는 어떤가 하고 먼저 반성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잣대에서 남을 판단하고, 강요하고 하는 것은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아닌 남의 생각도 옳을 수 있다고 항상 되돌이켜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만일 이렇게 깨달으면 그 때문에 다툼은 길이 쉬어질 것입니다.

장부는 일언이 중천금이라 했습니다.

장부가 전 인류에 살이되고 뼈가 될 수 있는 장부의 말 한마디가 수백년 없어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정구업진언을 발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참말만 하겠습니다’하고 아침에 발원하고 저녁에 가슴에 손 얹고 자기하루를 생각해보면 거짓말, 나쁜말도 했고 비겁하고 용렬한 말도 해 하루가, 전 생애가 엉망이 돼 버렸음을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 업을 지어놓고 부처님께 복달라, 명(命) 달라하는 것은 진정한 참불자의 모습이 아닐 터입니다.

스스로 수행하지 못하고 구복을 일삼는 것은 헛 껍데기에 불과한 불자입니다.

정구업진언 즉 진실한 말, 고운 말, 득이 되고 복이 될 수 있는 말 아니면 하지 않겠다는 포부와 각오를 가지고 새해를 살아야 합니다.

천타불만타불, 천등 만등 달아 발원하느니 보다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고 우선입니다.

실천하지 않는 발원은 그에 대한 업만을 계속 쌓아갈 뿐입니다.

그 다음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을 독송 합니다.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 그 입만 잘 관리해서 득이 되고, 복이 될 수 있는 말만 하면 아들딸, 온 동네가 다 편안해 질 수 있습니다.

이웃 좋고, 나라 좋고 그것이 바로 극락세계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극락세계가 멀리 있는게 아니고 내 입하나 관리 잘해서 내 마음 편하고 식구 모두 편하고 이웃, 나라가 다 편하니 그것이 바로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도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수경에서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 다음에 개경게(開經偈)를 말합니다.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黴妙法) 가장 높고 미묘하고 깊고 깊은 부처님의 법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백천만겁 지나도록 만나뵙기 어려워라.

아금문견득수지(我今聞見得受持) 내가 이제 다행히도 듣고 보고 지니오니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意) 부처님의 참된 뜻을 알아지게 하소서.

천하의 만물이 선(禪) 아닌게 없고, 세상만사가 도 아닌게 없습니다.

그게 법(法)인 것입니다.

그 법을 알고 살다보면 인생이 즐거음을 느껴, 나쁜것도 잊고, 욕심도 잊는 산불자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의 구정물이 맑아지면 저절로 피가 맑아지고, 정신이 맑아지고, 눈이 맑아집니다.

그러므로해서 10년, 100년을 내다볼 수 있는 혜안이 생기고 부처님이 왕궁과 처자를 버리고 출가한 이유 또한 이해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절에 갈 때 내 마음의 법을 스스로 갖고 절을 찾을 때만이 우리 마음 속에 득실거리는 8만4천 마구니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투철한 각오가 없으면 번뇌마구니에 휩싸여 방황하고 고통스런 인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단지 구복을 위해 절을 찾을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 자신으로 인해 복을 구할 수 있는 불자가 되도록 실천수행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5백생동안 자비보시행을 하셨습니다.

자비보시행은 물질적인 보시행 보다 정신적인 보시행에 더욱 중점을 둡니다.

나는 ‘복짓는 것은 삼세의 원수가 된다’고 말합니다.

물질 복을 짓는다고 한평생 허덕이고, 물질 복을 지어서는 만석꾼이 되어 열쇠로 물질 보관한다고 한생 또 허덕이고.

복 짓는 타령하느라 정신없이 살아 한생을 무의미하게 살게됩니다.

그러니 삼세를 헛 산것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물질 복을 지을게 아니라 지혜의 복을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물질 복을 지어 불우한 이웃을 돕거나 유용하게 쓴다면 물질 복을 짓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혜있는 사람은 욕심을 버려 한가지 물건도 가지지 않고 스스로 자기를 깨끗이하여 모든 번뇌를 지혜로 돌이킬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승가든, 재가든 물질을 너무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해서 부정부패가 생기고 세력다툼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태국 같은데서는 복을 비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태국엔 역사이래로 전쟁이 전혀 없었습니다.

옳바르게 사니깐 전쟁이 있을리 없는 것이죠.

내전에 의해 나라가 망하지 외적의 침입에 의해서 나라가 망하는 일은 전무후무한 일일 것입니다.

자기 일 잘하고 지혜를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불교이고 불제자의 도리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우리들이 기도만 하면 부 처님이 뭐든 해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작복하는 것, 복을 지으라는 것이 물질 복을 지으라는 것이 아니라 지혜의 복을 스스로 노력해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밝은 사람한테는 어둠이 다가올 수 없듯 깨달음을 위해 수행하는 이에게는 고(苦)가 있을 수 없습니다.

정신이 똑바르면 숨구멍이 트이는 법입니다.

불법을 따르고 실천하면 지혜가 광명이 되어 나옵니다.

물질에 허덕이다보면 눈도 가물가물해지고 정신도 혼미해 지는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이 끊기면 마음이 깨끗해지고 눈이 맑아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단번에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법을 실천하고 부단한 수행을 쌓아야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마음을 편하게 가지십시요.

성냄을 버려야 합니다.

또한 거만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애욕과 탐심을 버려야 합니다.

정신에도 물질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마음이 고요하고, 편안해 괴로움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짜증을 내고, 화를 내면 피가 독한 피가 되어 돌아옵니다.

거울을 한번 보십시오.

화낼 때 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느껴보세요.

험악한 얼굴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면 짜증내지 말고, 화내지 말고, 싸우지 말고, 자기 자신을 먼저 아낄 수 있는 사랑을,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독한 얼굴을 하고 부처님 앞에 합장하고 서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부처님 말씀 중에 자살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짓밟지 말고 자기를 더럽히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아끼라고 말씀하신거죠.

내가 수행할 때 효봉스님과 목욕을 해보면 효봉스님은 마치 백일난 애기 동자와도 같았습니다.

물에 꼭 솜뭉치 띄워 놓은 것 같았죠.

그러나 효봉스님의 몸을 만져보면 쇠덩이 만큼 단단했었습니다.

또 해인사 방장하실 때 20일동안 등을 땅에 붙이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다.

70노인이 고개도 끄덕않을 정도로 전혀 미동이 없고해서 살짝 옆에가서 장난삼아 가만 들여다보니깐 고개는 들고 숨소리만 색색거리시더군요.

어른을 때릴 수는 없고해서 주장자로 방바닥을 딱 때리니깐 효봉스님이 깜짝 놀래십디다.

그때 잠깐 주무신 모양입니다.

주무셔도 몸은 전혀 움직임이 없으셨던 것이었죠.

그냥 보통 수좌였다면 어림도 없는 얘기죠.

한생 닦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내생 닦아야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입만 부처라고 말하지 말고 자기를 아끼고 잘 관리하고 실천수행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산불자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불교를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어느 것보다도 자기 몸둥이 한번 만나기가 얼마나 힘이 든지 알아야 합니다.

이 몸둥이 한번 잃어버리면 다시 만나기가 하늘에 별따기 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을 짐작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 몸이 있을 때 좋은 일 많이 하고, 복도 많이 짓고, 수행도 열심히 해서 부처님 근처라도 가는 흉내라도 내야 합니다.

깨우침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일상생활에서 진실로 한마음으로 구하면 바로 곁의 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을 실천하는 실천력이 필요합니다.

말보다는 실천의 수행이 앞장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한국불교의 미래는 밝아집니다.

나를 아끼고, 이웃을 아끼고, 나라를 아껴 한마음되어 실천수행하는 것만이 개혁으로 가는 한국불교를 이끌 수 있으리라 봅니다.

무조건 절에 가서 빌고 스님에게 절한다고 해서 복 받고, 잘사는 것 아닙니다.

그것부터 불자들은 인식해야 합니다.

공부하는 불자, 실천하는 불자를 지금의 한국불교는 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하고 실천수행함으로 해서 옳은 길을 가지 못하는 스님들을 채찍질할 수 있을 것이다.

공부하는 신도들 때문에 스님들은 나태해 질 수 없는 것입니다.

승가는 승가나름대로, 재가는 재가 나름대로 제 모습 찾기에 열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공부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공부하는 것은 무모한 짓입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선(禪)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참선을 한다고 하니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불교가 발전하고 재생하려면 우선 각오와 중심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왜 불법을 공부하는지, 왜 절에 다니는지, 왜 기도하는지 알고 난 뒤에 절을 찾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알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알고 가야합니다.

알고 믿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불교를 믿어야 더 이상 한국불교가 흔들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주장자를 먼저 세우십시오.

생각이 온전하면 지혜가 생기고 생각이 흩어지면 지혜를 잃는 법.

이 두 갈래 길을 밝게 알아서 지혜를 따르면 도를 이루고 각오가 투철해 집니다.

게으름피지 말고 힘차게 일어나야 합니다.

즐거운 법을 따라 즐거이 나아가십시오.

성불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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