틱낫한스님─지금 이 순간 온전히 존재한다

지금 이 순간 온전히 존재한다

-틱낫한스님-

현대인들은 바쁜 삶을 산다.

자칫 현상세계를 깊이있게 보지 못하고 산다.

차 한잔 따라서 차의 색깔을 보면서 사물의 존재를 깊이있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차를 마시는 것’도 좋은 수행의 한 방법이다.

‘손에 쥐고 마시는 이순간 – 자신의 존재로 돌아온다’ ‘지금 이 순간 온전히 존재한다.’ 마음을 몸에 가져오고,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된다.

하나로 통일하기 위해 숨을 내쉬며, 깨어있는 마음을 유지한다.

이와 같이 수행을 하면 된다.

숨을 들이쉬고, 멈춰 5~10초, 내쉬며 내몸이 온전히 현재에 살아있음을 느낀다.

지나가버린 일에 후회하고, 오지 않은 일에 걱정을 말라.

지금 바로 현재에 깨어서 있으라.

지금 이순간 걱정, 후회, 회한으로부터 자유로워라.

지금 이순간 온전히 존재하라.

대부분 사람들은 지나간 과거와 오지 않은 미래로 걱정과 연민으로 가득차 현재에 온전히 존재하지 못한다.

항상 깨어있지 못하여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받아 들이지 못한다.

지금 이순간 과거의 후회, 미래의 걱정없이 자유로워진다면 ‘차를 온전히 마실 수 있다.’ 지금 이순간 차를 마시고 있을 뿐이다.

‘오직 차 마실 뿐이다.’ 여러분께서 온전히 깨어있는 집중된 정신으로 차를 마시는 것은 진실이고 또한 온전한 사실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차를 마시고, 밥을 먹으면서도 과거의 후회·분노, 미래의 걱정으로 현재에 온전히 존재하지 못한다.

대부분 그들은 차를 마시며 밥을 먹으며 집중을 가지지 못한다.

참선·명상은 순간순간 깨어 있는 맘, 집중으로 새로운 힘을 창출한다.

온전히 깨어 있으면서 힘을 유지하는 것은 현상을 지혜의 눈으로 통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행자는 한걸음의 발걸음에서 깨어 있으며 정념으로 집중해야 한다.

한걸음을 절대의 현재에서 바로 할 때 온전하게 살게 해준다.

한걸음 한걸음 깨어 있음은 신선하고 순수한 에너지로 존재한다.

바로 이 깨어있음과 집중·힘이 이순간 삶을 경이롭고 아름답게 해준다.

푸른 하늘·나무·보름달·차 한잔·이러한 모든 것들이 이순간 향기롭다.

깨어있고 집중하는 마음으로 순간순간에 살면 날마다 맑은 정토의 세계에서 살 수 있다.

과거에 사는 삶이거나 미래에 연연한다면 현존하시는 부처님의 정토의 세계에서 멀어만 진다.

이몸이 죽어 서방정토 극락세계 갈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지금 이순간이 극락정토의 세계이다.

늘 깨어서 자각하는 것이 수행의 핵심이다.

항상 깨어 있으며 온전히 집중한다면 바로 이순간 극락정토에 머무는 것이다.

푸른 하늘·흰구름·산천초목·새소리 이 모든 것이 극락정토 세상의 현상이다.

극락정토는 바로 지금 앉아 있는 청정의 세계이다.

멀리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극락정토의 세계에 머물러 있기위해서는 과거의 걱정으로부터 자유롭고, 미래의 염려·공포로부터 해탈해야 한다.

저는 항상 깨어 있는 마음으로 호흡하고 바로 이순간 맑고 향기로운 정토에서 즐기고 있다.

저는 어떤 날도 맑고 향기로운 정토의 곳에서 살고 있다.

또한 많은 제자들과 도반들은 내일까지 기다리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즐기며 살고 있다.

제자들은 지금 여기에서 정토를 맞이하며 사는데 마치 인스턴트 커피나 컵라면을 먹는 것처럼 손쉽게 하고 있다.

정토에서 걷고 앉고 즐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한 괴로움도 아니다.

함께 생각하고, 깨어 있는 수행을 서로 돕고 이끌어 줌으로 정토에 머무는 순간이 용이롭다.

예를 들자면 송광사 승단에서 또는 후원에서 음식을 만들 때, 온전히 깨어있어 집중한다면 거기가 정토요, 행복과 기쁨이다.

후원에서 대중을 위하여 공양준비를 하는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여 깨어 있으면 기쁨이며 행복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현재는 행복이 없고 행복은 미래에 있을 거라고 자꾸만 미래로 달려간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지금 이순간 여기에서 온전히 행복하다고 말씀하신다.

바로 지금 이순간 온전히 깨어 있으면 된다.

세속에 있으면서 깨어있고, 집중된 수행을 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부처님 경전에 ‘지금 이순간 행복하고 경이로운 순간’이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수행자는 청정한 계를 잘 지키며 마음을 온전히 집중하여 맑은 정신으로 수행해야 한다.

나는 35년간 유럽과 미국에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다.

바로 지금 이순간 온전히 깨어 있으면서 살라고…

나는 삶의 변화, 드라마틱하고 기쁘고 즐거운 맘으로 살고 있다.

정토와 선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禪은 이순간 일어나는 현상을 깊은 지혜로써 알아차리고 지혜의 눈으로 깨닫고 집중된 사고로 보는 것이다.

정토의 가르침은 죽은 후에 서방정토에 가는 것이 아니고, 지금 바로 여기이다.

서양에서도 불교를 받아들인다.

화엄경에서는 무한한 공간과 시간에 접해 있다고 말씀하신다.

여러분들은 어떤 현상을 보나 지금 이순간을 보아야 한다.

정토의 세계는 깨침의 세계로 삶의 질적인 변화를 가져 바로 지금 이순간을 알아차려야 한다.

프랑스 남부 플럼빌리지에서는 이러한 수행법을 가르친다.

‘나는 영원한 안식처에 도착했다.’ ‘나는 평온한 안식처에 도착했다.’ 여기에 도착했다는 말은 현재에 온전히 존재한다는 말이다.

안식처는 집에 돌아 왔다는 말이며, 지금 바로 여기에 온전히 살아 있다는 말이다.

순간순간에 깨어있지 못하면 안식처에 이르지 못한다.

정토에서 부처님,보살님 뵙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서만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런 가르침의 정수는 어떤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서양에서 불교는 정신세계에 가장 좋은 삶에 유용한 것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서양의 젊은이들은 기독교와 유대교에 대해서 대체로 불만족을 한다.

삶에 어떤 소용이 되는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외국에서 교회들이 자주 문을 닫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아시아 젊은이들은 서양의 스타일에서 행복을 얻으려 한다.

서양에서는 우리처럼 사는 것을 생각하는데 반해 동양의 젊은이들은 서양의 물질문명에 빠져들고 있다.

사람들은 많은 괴로움을 겪을 것이며 결국은 불교에서 행복을 찾게 될 것이다.

서양의 유대교, 기독교는 젊은이들의 욕구에 부응하고자 하는 노력과 관심을 갖기에 역부족이다.

불교가 젊은이들에 다가갈 수 있고 새로운 비젼을 제시하기에 가능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랑과 관용과 포용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저는 처음 출가를 16살에 하여 60년동안 수행을 하였다.

불교는 새로운 세계에 부응하기 위하여 재해석되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

원력과 수행히 왕성히 진행되어야 한다.

현세대에 맞게 발전되어야 한다.

저는 35년동안 서양에서 불자들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개발하여 현실속에서 어떻게 하면 서양인들의 문화속에서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기법을 창조적으로 개발하였다.

저는 깨어있는 수행을 미국과 유럽에서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노력했으며 뉴욕에서는 깨어있는 정념수행을 80~100여명의 수행자들이 1주일간 수행하는 과정으로 했으며, 수련회 동안 사람들이 불행과 괴로움에서 해탈하고, 가정불화에서 벗어나 하홰하여 삶의 질적인 변화가 있었다.

여러분께 서양인들에게 가르친 선의 방법을 소개하면 젊은 사람에게 손을 들고 깊이 바라보면 어떤 현상이 있는지 말하고자 한다.

수행자가 아니면 손을 보는 순간 그냥 손일 뿐이다.

그렇지만 수행이 깊어지면 손에서 어머니 아버지 조상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여러분은 손에서 할머니를 못볼지도 모른다.

허지만 깊이 관찰하면 조부와 조부모 그리고 조상들은 관찰할 수 있다.

이 몸은 부모님에게 받았다.

부모님은 이 몸을 주셨다.

이 몸은 부모님의 것이다.

세포 하나하나에 부모님이 온전히 계신다.

이 몸 세포 하나하나에 부모님 그리고 모든 조상들이 함께 존재하고 계신다.

하나의 세포를 떼어내 깊이 관찰하면 수억겁생 동안의 조상들이 함께 한다.

요즘 현대 과학자들이 체세포를 떼어내 동물복제하는 것을 본다.

하나의 세포 속에 수많은 생명이 존재한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 중 화엄경에 하나의 티끌 속에 모든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진리가 밝혀주는 것이다.

여러분의 아이가 열병으로 아픈 걸 가정해 보라.

아이의 이마에 어머니의 손을 대면 아이는 시원해지고, 금방 낫게 된다.

어머님이 돌아가시면 울지도 모른다.

그리워 하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손이 머리에 닿으면 청량감을 느낄 것이다.

만약에 아주 훌륭한 수행자라면 나의 이 손이 어머니의 손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이 손은 대를 이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실이고 사실이다.

부처님이나 성자가 말을 했건 안했건 엄연한 사실이다.

런던에서 어느 거리에서 길을 걸을 때 책방 윈도우에 책이 있었다.

책의 이름은 ‘어머니, 바로 당신이 어머니입니다’였다.

이 책은 불교도에 쓴 것이 아니고, 심리학자에 의해 저술된 것이다.

심리학자는 딸이 바로 어머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동서양의 젊은이들이 아버지를 불신하고 원망심을 갖고 있다.

‘나는 아버지와 관계가 없으며, 혼자 살 수 있어’ 그것은 넌센스이다.

아버지를 떠나서 살 수는 없다.

아들은 바로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하면 잘못된 행위를 안하는 것이다.

아들의 몸은 온통 아버지이다.

부처님께서는 보시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주되 되돌려 받지 않는 ‘무주상보시’야말로 진정한 보시이며, 그것은 ‘공손’이라고 표현한다.

보시에는 3가지가 있다.

주는 자, 받는 자, 물건, 이다.

예를 들어 샤워할 때 이 몸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유산이며, 조상들은 나의 부모님에게 무엇을 남겨주셨나? 여러분은 지혜의 눈으로 깊이 관찰해보면 부모님의 몸을 우리에게 전해주셨다는 것을 알아보는 것이다.

깊이 관조해보면 부모님, 수많은 조상들이 유전인자를 전해주었다는 것을 명백히 알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주는 자, 받는 자를 분리하지 않고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질문을 할 것이다.

누가 이 몸을 받았는가? 주는 자, 받는 자의 연관성은 무엇인가? 우리는 잘 안다.

3가지 보시의 요소는 서로 떼어낼 수 없다.

여러분이 아버지에 대하여 화를 내면 바로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이다.

바로 자신에게 분노하고 아버지에게 화를 내는 것은 무지의 소산이다.

여러분은 자신을 떠나 아버지가 존재할 수 없다.

아버지를 화해·용서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미국에서 말하고 그들이 자비와 사랑으로 말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

깊이있게 진심으로 경청하는 방법을 가르쳐 화해하고 자비와 사랑으로 살 수 있도록 가르쳤다.

수행의 처소에 오는 사람들에게 저는 항상 남의 말을 깊이 경청하고 괴로움을 듣고 돕기 위하여 자유스러운 말로 안내한다.

6일간의 수행을 하며 편리하게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다.

가족이 함께 오기도 하고, 청소년·어린이도 함께 온다.

수련회에서는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자유롭게 말하고, 용서하고, 참회하는 방법을 통해 서로 화해하고, 이해와 사랑으로 새로운 삶을 찾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 자비와 지혜의 힘’을 심어준다.

마음의 평온을 얻고 불화로부터 자유, 갈등 해소, 화해를 찾는다.

지난 해 6월 독일에서 수련회가 끝날 즈음 4명의 청년이 법문을 듣고 아버님을 용서하고 화해하게 되었다고 했다.

수행일정, 수련회하면서 보람을 느끼고, 훌륭하게 기뻐하는 수련회 참여하는 사람들을 보며, 가족의 화해와 평온을 찾는 모습을 보며, 환희심과 경이로움이 일었다.

도움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수없이 많으나 수행 처소의 스님은 한정되어 있다.

200여명의 스님과 50~60명의 일반교사로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많은 스님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 시대에 맞게 하여 따르고자 하는 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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