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굳건 해야만 지혜와 용기 생깁니다
-보성스님-
오늘은 모처럼 여러분들과 함께 조계사에 있다보니 많은 기억들이 스쳐지나가는군요.
이곳은 저에게 있어 즐거운 일도 많았고 괴로운 일도 많이 겪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제가 여기에서 항상 눈여겨 본 곳이 있다면 뜯어낸지 얼마되지 않은 정화회관인데, 헐려진 것을 보니 흔히들 말하는 무상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때그때 용도에 따라서 모습을 달리하고 전달하는 것이 틀리듯 부처님 말씀도 그와 같을 것입니다.
불자라면 한번쯤 부처님 말씀이 어떻게 하면 한사람 한사람에게 제대로 전달 될 수 있을까 생각한적이 있을 것입니다.
‘불교가 뭔가’라고 질타성 질문을 하기 이전에 내 스스로가 먼저 마음자리가 바르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할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바른신심으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주제로 몇가지를 말씀드릴까 합니다.
법문을 법문이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많은데, 법문을 듣고 알았다는 사람은 드뭅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불교의 행사 가운데 법사스님이 말씀해 주시는 것을 법문이라고 합니다.
법문은 법법(法), 문문(門)자를 씁니다.
글월 문(文)이 아닙니다.
진리의 문턱을 드나든다는 것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박가나 김가나, 여자건 남자건 나에게 어떠한 연관성을 가졌는가를 한번 깊이있게 돌이켜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져다 줍니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을 얼마나 보람있게 살고 있습니까? 나라는 존재를 이웃에게 제대로 소개하며, 보이고 있습니까? 단정하게 보여야죠.
그것을 겉모양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안모양은 어떻게 다듬어야 할까요.
옛 어른들이 말씀하시기를 장부는 갖춰진 삶을 가진 사람으로, 스스로 하늘을 받드는 뜻(힘)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처님이 말씀하셨다고해서 마냥 따라 할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한걸음 물러서서 좀 더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봅시다.
이자리에는 대대로 불교를 믿고 있는 집안의 불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종교를 믿다가 흔히들 말하는 개종을 한 사람이 어떤 스님이 조계사에서 법문을 한다고 하니 한번 참여해 보자는 뜻에서 오늘 여기 오신분도 있을 것입니다.
시발점은 누구나없이 다 신심으로써 이루어진 것입니다.
옛 어른이 말씀하시기를 “신심은 도의 근원이요.
진리의 근원이며, 공덕의 모체”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지극히 성실하고, 지극히 착한 분입니다.
그러나 그 분이 신령스럽고 신비스러운 힘을 가지신 분이라면 우리는 전혀 못 따라 갈 것입니다.
부처님은 누구든지 스스로 구체적인 모든 것이 갖추어진 보배로운 역량을 가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능히 이 세상뿐 아니라 저 천상을 비롯한 다른 세상을 가서 살더라도 그 인간의 근본 바탕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근본에 대해 ‘있다’고 확신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근본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만 자기의 습관에 따라 몸을 움직이고, 좇아가다 보면 결국에는 아집에 싸여 근본을 잃고 탐욕에 빠지게 됩니다.
40년전만해도 한강물에 뛰어 들어 목욕을 하고, 목마르면 한강물을 떠서 마셨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 물을 마음놓고 마실 수 없습니다.
그 물을 그렇게 오염되게 한 것은 누구일까요.
바로 인간인 우리가 아닙니까.
잘 아실것입니다.
삼재 중에 제일 무서운것이 인재입니다.
환경오염은 사람들 스스로가 자기들 사는 공간을 죽이는 일입니다.
삼재가 아닌 이제는 사재입니다.
인재라는게 하나 보태어져서 얼마나 많은 괴로움을 겪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흔히들 말하고 있습니다.
“행복을 찾는다, 행복을 찾는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을 찾고 있는지, 괴로움을 찾고 있는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위기에 이르렀습니다.
법회에 가 보면 젊은이보다는 할머니들이 많이 계십니다.
손자나 아들들이 “할머니 오늘 절에 뭐하러 가지요” 라고 질문을 할때 할머니는 나름대로 절에 가는 대답을 합니다.
“너희들을 위해서 절에 간다”고 대답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일신상 안위를 위해 예불하는 어리석음을 오늘 부터는 저기 쓰레기통에 버리십시요.
남을 따라 절에가거나 남을 위해 찾지 마세요.
이웃사람이 지게짐 지고 시장보러 가니까 지게짐 짊어지고 시장을 따라가는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말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송광사에는 심심찮게 외국사람이 찾아옵니다.
그러니 요새는 불교가 국제화 된 것이 분명한 듯 합니다.
흔히들 우리나라 스님네들 가운데에는 ‘한국 불교가 세계에서 제일이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우물안의 개구리를 못 면하고 있는것 입니다.
신도들도 외국에 나가보니 ‘한국불교가 최고더라’고 말합니다.
한국에서는 제일 이라고 해야 밥을 얻어 먹을 수 있으니 억지로이지만 스스로 칭찬을 해야 불자로서 자부심이 생기는것 같습니다.
그러나 뭐가 좋습니까.
저는 한국이란 국토에서 밥을 먹고 걸어다니지만 양심적으로 하나도 소개할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신심에 대한 얘기를 나눠봅시다.
우리는 신심이라고 하는 굳은 마음을 많이들 갖고 있지만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을 어떻게 하면 내것으로 만들어보나 하는 분은 드물 겁니다.
그래서 저는 손자가 할머니에게 질문한 내용을 인용 했습니다.
사실 불자들 가운데는 절에 있는 산신각·칠성각을 찾아 다니면서도 ‘절에 다닌다’고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대부분 일주문에 당도해서는 “이절에는 산신각·칠성각이 어디있습니까?” 라고 먼저 질문합니다.
그런 분이 제가 있는 송광사를 찾아오시면 “산신각·칠성각이 어디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 대웅전 근처에 안내하시는 분이 있으니 가보세요.
부처님한테 절을 세번하면 아실 수 있을겁니다”고 말합니다.
좀 짓궂지요.
그러나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부처님이전에 칠성각·산신각을 먼저 찾는것은 바른 신심을 갖고 있는 불자로서 해야할 일이 아닙니다.
요즘 절에는 평소에 노력하지않고 목마를때 우물을 파듯이 수능시험 합격기도다 뭐다해서 절에 와서는 그야말로 난리법석을 피웁니다.
이 몸은 무상한 것입니다.
평소 같은 마음인 평상심이 필요합니다.
덧없는 존재로 언제 어느때 어떻게 되려는지 짐작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간을 잘 만들어서 ‘내가 오늘은 헛되지 않게 지내야지’하는 성실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요즘은 책이 많이 나오고 매스미디어가 발달해서 사람들이 말을 할때 미사여구를 자주 사용 합니다.
그러나 그 여러말 가운데에서 몇마디가 나에게 다가왔는지 의심을 해봐야 합니다.
법문을 마치고 나가면 신도분들이 “스님, 오늘 법문 잘 들었습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제가 “어떤 대목이 좋던가요”라고 물어보면 모두들 대답을 못합니다.
“스님, 아까 그 말씀 가운데에서 하나 의심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묻고자 하는데요.
시간을 낼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씀하시는 분은 드물어요.
더우기 절에 와 아무개 큰스님을 뵈었다고 하는 분들이 그렇게 묻습니다.
그러니 개인적으로 스님을 관상장이로 만들어 버리죠.
당황스러운 일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내일은 내가 더 잘 알아’라는 것과 같습니다.
깊이있게 그 물음을 따라 그 진원지를 차근차근 물어들어가 보면 별것 아닙니다.
내 일을 내가 판단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쉽고도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불교와 나는 어느때에 두터운 인연을 맺을 수 있을까요.
‘소견이 들만하니 살 날이 몇일 안 되더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며칠이나 자신있게 살다가는지 그래서 옛 어른들이 말씀하시기를 ‘무(無)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고 합니다.
눈도 없고, 귀도 없고, 몸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침략을 당하고 있습니다.
눈으로써 침략을 당하고 귀로 침략을 당하고 코로 당하고 입으로 당하고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집에서 부인이 해 주는 밥은 맛이 없으니 외식을 하러 가자고 합니다.
그것은 입이 침략을 받은 것입니다.
내 몸을 내 스스로가 기르는 아량을 가지게 된다면 부처님 말씀, 큰스님네 말씀을 바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거러지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눈을 따라, 귀를 따라, 몸을 따라 거러지 노릇을 못 면하고 있습니다.
이해가 됩니까.
‘여러분 신심을 가지십시요’라고 하지마는 내가 나를 포기한 사람하고는 대화가 안됩니다.
이 몸은 얻기도 어렵지만 법문듣기도 어렵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것에는 인과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분명하게 원인과 결과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실하게 실천하며 노력하면 됩니다.
부처님 말씀을 내것으로 만들면 됩니다.
밥은 오래오래 씹을 수록 맛이 납니다.
그렇듯 노력을 하면 됩니다.
오늘부터는 노력을 한다는 생각을 가지셔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신심입니다.
내가 나를 버리지 않는다는 뜻을 포함한 신심은 ‘자성중생서원도(自性衆生誓願道)’ 즉, 내가 나의 중생심을 제도한다는 것입니다.
내 일은 내가 한다.
친정이나 이웃에 가서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내가 노력해서 내 일은 내가 이룩한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부처님은 일관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몰랐던, 잊었던 보배를 다시 찾아서 무궁한 복락을 누리기를 나는 오직 바랜다고 말씀하셨어요.
즉, 열반에 드실때까지 게으르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현행원품에 ‘나의 뜻은 저 허공이 다할망정 다함이 없으니 끊임없이 수행하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2천6백년 세월이 지난 오늘이지만 모든 신도들의 예배를 받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는 예배가 신심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이어졌을때 힘이생기고 복이되는 것입니다.
지혜와 용기는 굳건한 믿음에서 생깁니다.
이는 부처님이 증명해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분명한 부처님의 제자입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부처님의 제자로서 도리를 다 할 수 있나를 항상 염두해 두어야 합니다.
이 몸이 다하고 이 뜻이 다할 때까지 말입니다.
오늘부터 정신을 차려서 내가 오직 나를 찾는다는 결심을 해 한국불교를 이끌어야 합니다.
그럴때만이 한국불교는 희망적입니다.
그리고 이웃의 어리석음을 바꿔주겠다고 마음먹는 것이 바로 신심입니다.
내가 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먼저하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성실히 정진 수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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