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스님─만복이 깃드는 하심(下心)

만복이 깃드는 하심(下心)

-보성스님-

먼저 한편의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1966년 10월 15일, 나의 노스님이신 효봉(曉峰) 스님께서 입적을 하시고 장례위원회를 꾸릴 때였습니다.

효봉 스님께서는 종정의 신분으로 입적하셨기 때문에 종단에서는 종단장(宗團葬)을 원했습니다.

당시 총무원장이었던 청담(靑潭)스님은 효봉스님을 크게 믿고 따랐으며, 효봉스님 또한 청담스님에 대한 신뢰가 매우 깊었습니다.

효봉스님께서 조계종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을 맡게 되었을때, 스님은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름만 빌려주는 것이다.

행정은 청담스님이, 종회는 덕암스님이 맡아서 해야한다.” 이토록 두분의 관계가 돈독하였기에, 청담스님으로서는 전국적으로 추모를 할 수 있는 종단장을 더욱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장례에 대한 문도들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도시에서 돌아가셨다 할지라도 산중으로 모셔와야 한다.

하물며 산중에서 돌아가셨는데 왜 도시로 나가야 하느냐? 안 된다.” 서울로 이운(移運)해야 한다는 총무원의 입장과 그럴 수 없다는 문도들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긴장 상태에서 청담스님은 효봉스님을 마지막까지 시봉했던 나에게 물었습니다.

“시봉으로서의 네 생각을 말해 보아라.” “문도 스님들과 종단의 스님들이 상의해서 결정할 일이지요.” 하지만 속으로는 ‘양쪽 다 만족할 수 있는 묘안이 없을까?’를 깊이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청담스님이 어려운 상황에 놓이면 무서울 정도로 하심을 하는 분이라는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어 청담스님을 뵈었습니다.

“스님.

향로를 갖추어 백팔 배를 하시지요.” 청담스님께서는 금방 알아들으시고 즉각 행동에 들어갔습니다.

죽으로 아침을 먹을 참이었던 효봉스님의 문도들을 향해 절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 50배 정도 하였을 때 반응이 왔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총무원장인데 자신들을 향해 절을 하고 있으니 죽이라 한들 쉽게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다들 숟가락을 놓고 있는데, 법정스님이 나서서 말했습니다.

“구산(九山) 사형께서 알아서 결정을 하시지요.” 그러자 구산스님은 ‘청담스님께 일임하겠다’며 결론을 내렸고, 계속 이어지는 청담스님의 절도 못하게 만류하였습니다.그 결과 108배가 채 끝나기도 전에 효과가 발휘된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대중(大衆)과 하심(下心)의 만남’ 이었습니다.

대중을 설득하는 데는 하심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상황이 정리된 다음 청담스님께 여쭈었습니다.

“스님, 절을 몇 번쯤 하셨습니까?” “한 70번 했나?” “남은 절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서울 가서 하지.”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서울로 운구를 하였는데, 당시의 서울 초입인 한강에서부터 조계사까지 시민들이 손에 향을 들고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내로 들어올 때는 버스.

전차 할 것 없이 모든 차들이 다 멈추어 섰습니다.

그리하여 효봉스님의 7일장은 전 국민의 애도 속에서 스님의 참 정신을 기리며 이루어졌습니다.

이렇듯 어려운 때일수록 하심을 하면 화합을 할 수있는 방편의 길이 열리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은혜로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조금이라도 잘 살게 되면 내가 잘나서 잘 사는 줄 착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소통의 문이 닫혀 버립니다.

나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드는 것입니다.반대로 하심을 하여 ‘ 세상의 은혜로 내가 산다’고 생각하면 우쭐댈 일이 없어지고.

소통의 문이 활짝열립니다.하심을 한다는 것 , 상대에게 나를 낮춘다는 것은 반쯤 내가 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하심이야말로 상대에게 다가가고 상대를 설득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아상(我相)을 끊는 하심 하심下心은 한자의 뜻 그대로.

‘나의 마음을 내려놓아 가장 아래쪽에 두는 것’ 입니다.

나의 마음을 낮추어 남을 공경하고, 뜻을 겸손히 가져 화합하는 삶을 이루는 것이 하심입니다.그럼 어떻게 하여야 하심을 이룰 수 있는가? 한마디로 말하면 자존심.

자만심.

이기심의 밑바닥에 있는 아상(我相)을 끊는 것입니다.

야운스님의 [자경문自警文]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너다 나다 하는 상이 무너지면 위없는 도가 저절로 이루어지나니 무릇 하심을 잘 하는 사람에게는 온갖 복이 저절로 돌아오느니라 人我山崩處 인아산붕처 無爲道自成 무위도자성 凡有下心者 범유하심자 萬福自歸依 만복자귀의 인아산人我山이 무엇입니까? 바로 아상의 산입니다.

남을 업신여기고 깔아뭉개면서 끝없이 높아만 가는 아상의 산, 자꾸자꾸 높아져 결국에는 무성한 숲을 이루고야마는 아상의 산.

이 아상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나는 똑똑하다.

나는 많이 안다.

나는 잘났다.

나는 부자이다.

나는 높은 지위에 있다.

나는 너보다 낫다’ 고 하는 일상의 생각들이 바로 아상입니다.곧 너에 대한 나의 상대적인 우월감이 아상인 것입니다.

이 아상이 인간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소통을 가로막고 나의 성취를 가로막습니다.

그런데 이 아상의 산을 무너뜨리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나의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을 낮추는 것입니다.

“저는 모자라는 것이 많습니다.

제가 잘못했으니 잘 이끌어 주십시오.

마음을 낮추어 잘 배우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아상은 스르르 무너지고, 하심은 저절로 이루어집니다.하지만 삼척동자도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이 말을 나의 입으로 하기는 쉽지가 않습니다.보통 사람의 자존심은 ‘고개를 숙인다’는 생각을 하는 자체조차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억지로라도 나를 높이는 아상을 버리고 하심을 해보십시오.진실로 남을 위하는 마음을 낼 수 있게 되고 남을 위해 참된 봉사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내 마음은 저절로 편안해지며, 내 마음이 편안해지면 나를 대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도 편안해 집니다.

잊지 마십시오, 무슨 일이든 안 될 때는 조건 없이 하심하십시오.

특히 무엇인가를 성취하고자 하는 이에게는 하 심이 중요합니다.

하심을 하면서 일에 임하면 안 풀리는 일이 없습니다.반대로 자존심을 세우고 아상이 가득한 상태로 살면 복덕의 문이 쉽사리 열리지 않습니다.부디 아상에 빠지지 마십시요.

그리고 ‘못 살겠다’는 말을 하지 마십시오.

특히 부처님 전에서 ‘못 살겠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숨을 못 쉬어야 못살지, 왜 못 삽니까? ‘못 살겠다’는 그 말 자체가 아상으로 인해 들떠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상 때문에 살기 힘들게 되었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스스로의 마음을 낮출 줄 모르면서 부처님께 찾아와 못 살겠다고 떼를 쓰면 되겠습니까? 간절히 살펴보십시오.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분명하게 책임질 줄 알아야 합니다.하심을 하면서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스스로 찾을 수 있다면 능히 대성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물은 높은 데서 아래로 흘러갑니다.

곡식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입니다.

‘나는 잘났고, 너는 별 것이 아니다’고 하는 아상이 무너질때 소원은 저절로 성취되며, 아상을 다스리는 하심을 할 때 만 가지 복은 스스로 찾아 들게 되는 것입니다.

하심과 기도 이제 마지막으로 하심과 기도에 대해 잠깐 언급하겠습니다.

요즘 많은 불자들이 기도를 합니다.

참으로 좋은 현상입니다.

하지만 그냥 내 이기심으로 기도를 하면 안됩니다.

기도를 잘 해야 합니다.

좋은 쌀은 좋은 이삭에서 비롯되듯이, 기도를 통하여 좋은 결실을 거두려면 기도의 이삭이 좋아야 합니다 어떤 것이 좋은 이삭인가? 부처님 전에 가서 매달리기만 하는 것,이것이 좋은 이삭인가요? 아닙니다.

내 업은 내가 받고 내 일은 내가 해결하고자 하는 것.

이것이 기도 성취의 좋은 이삭입니다.

부처님 가르침 중 나의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을 잘 수용하여 지켜나가는 것.

이것이 기도 성취의 좋은 이삭입니다.

스스로 원을 세우고 내면의 위대한 힘을 발현시켜나가는 것.

이것이 기도성취의 좋은 이삭입니다.이렇게 하면 부처님도 힘을 주십니다.

이러한 이삭을 심고 기도를 하면 틀림없이 부처님께서 적절한 온도와 적절한 비를 베풀어, 기도 성취의 쌀알이 잘 영글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십니다.잊지 마십시오.

원願이 바르지 못한 사람이 기도를 하면 아만만 늘어나고 아상만 커지게 됩니다.

나의 그롯에 아상이 가득 차 있다면 부처님께서 복을 준들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기도를 할때, ‘자존심을 세운 채 부처님께 무조건 복을 달라고 매달려서는 안 된다’ 고 하는 것 입니다.

하심을 하여 그릇을 비우고 기도를 하십시오.

그릇을 비우는 만큼 복이 담기고, 그릇을 완전히 비우면 복이 가득 담기게 됩니다.하심을 하여 불보살님을 생각하며 참회를 하고, 한배 한 배 절을 올리며 불보살님이나 세상의 인연에 감사를 드리다 보면, 어느 순간 눈물이 펑펑 솟아지면서 업장의 밑바닥이 뜷리게 되고, 업장이 녹으면 불보살님의 가피를 입어 원성취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기도보다는 하심하여 참회하고 감사하고 새로운 원을 담아야 만복이 스스로 깃들고 멋진 삶이 전개 된다는 것을 꼭 명심하십시오.

하심은 불교수행의 근본입니다.

어찌 보면 하심이 불교수행의 전체일 수도 있습니다.

하심을 하여 나를 비우면 내가 커지게 됩니다.

반대로 하심을 잊어버리면 깨달음의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도 없고 깨달음의 세계에 이를 수도 없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또 낮추어야만 부처님의 큰 바다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부디 하심의 기도와 하심의 삶을 통하여 원성취와 더불어 크나큰 깨달음을 열어 가시기를 두손 모아 축원 드립니다.

나무행심반야바라밀 南無行心般若波羅蜜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항목은 *(으)로 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