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천수경(千手經) – 염불의 경전

의식 – 독송 편하게 재편집
대다라니 중심 — 관음신앙 고취

영국의 대문호 서머셋 모옴은 그가 가난한 무명작가 시절, 책을 한 권 출판했는데 광고비가 든다는 이유로 출판사 측에서 광고를 내 주지 않아 책이 잘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신문에다 엉뚱하게도 구혼(求婚)광고를 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인즉 “나는 백만장자로서 결혼할 여성을 찾습니다. 내가 바라는 여성상은 최근 서머셋 모옴이 쓴 소설의 여주인공과 닮은 사람입니다. 그 소설의 주인공과 닮았다고 생각되시는 분은 곧바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의 소설은 날개 돋인 듯이 일주일만에 매진이 되었답니다.

이것이야말로 “천가지 생각이 한번의 실행만 못하다”는 옛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불교에서 가장 폭넓게 유포되고 있고, 또한 가장 깊숙이 뿌리내린 경전인 천수경을 한번 독송해 보십시오.

어떠한 사찰에서나 새벽예불 때 도량석을 하거나, 사시마지(巳時摩旨)를 올릴 때, 그리고 천도재나 영산재 등 모든 법요식에서 제일 먼저 독송하는 것이 바로 《천수경》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불자님치고 《천수경》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더구나 대승불교를 표방하는 한국불교에서 우리 불자님들의 신앙생활을 이끌어가고 있는 경전이라 하여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천수경은 광본(廣本)과 약본(略本)이 있습니다. 광본의 갖춘 경명은 《천수천안관세음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千手千眼觀世音菩薩廣大圓滿無碍大悲心大陀羅尼)》로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은 어떤 인연으로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 되었는지의 설명과, 이 경전이 설해진 인연을 자세히 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약본의 이름은《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千手千眼觀自在菩薩廣大圓滿無碍大悲心大陀羅尼)》로서 다만 광본의 ‘관세음보살’이 ‘관자재보살’로 바뀌어져 있을 뿐이고, 똑같은 보살을 가리킨다는 것은 《관음경》을 다루는 장에서 이미 설명하였으니까 그것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광본이나 약본 그 어느 쪽도 “신묘장구대다라니”가 중심이 되고, 그 전후에 관세음보살의 예찬이라든가 불자들의 올바른 신행방법을 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외에도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에 의하면,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중심으로 천수천안 관세음보살 신앙을 고취하는 의궤와 경전류가 모두 19종류나 소개되어 있는데, 특히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수행방법을 설하고 있는 의궤는 7종류이고, 관세음보살의 신앙만을 고취하고 있는 경전은 12종류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천수경》의 “신묘장구대다라니”는 7세기 중엽에 가범달마(伽梵達摩)가 번역한 것입니다.

현재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천수경》은 《신수대장경》에 실려 있는 그대로가 아니고, 대비주(大悲呪) 즉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중심으로 하여 의식과 독송에 편리하도록 새롭게 재편집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신수대장경》에서는 《천수경》을 ‘밀교부’로 분류해 놓고 있는데, 왜 현교(顯敎)를 표방하는 우리나라 사찰에서 밀교계통의 경전을 매일 독송하고 있는 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천수경》의 핵심적 내용이 “신묘장구대다라니”이기 때문에 밀교부에다 소속시켰을 뿐이지, 실은 현교의 다른 경전에서도 ‘다라니’와 ‘진언’은 쉽게 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대부분의 불자들이 누구나 다 외우고 있는 《반야심경》에서도 마지막 부분이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라는 주문(呪文)으로 끝맺고 있고, 《능엄경》에서도 그 유명한 ‘능엄주(楞嚴呪)’가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불교의식을 진행하는 데도 ‘다라니’와 ‘진언’이 염불 속에 상당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천수경》에 국한되지 않고 한국불교의 의식이나 신행생활에 밀교적인 요소가 생각 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천수경에 담겨 있는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 보지요.

《천수경》의 경명(經名)이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실은 그 점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 내용은 건성으로 지나치는 경우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해제(解題), 즉 경전의 제목부터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천수천안관자재보살(千手千眼觀自在菩薩)’까지는 설명이 되었고, 그 다음 ‘광대원만(廣大圓滿)’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넓고(廣) 크며(大) 모나지 않고 둥글면서(圓) 꽉 차있다는(滿) 뜻입니다.

그 다음 무애대비심(無碍大悲心)에서 ‘무애’는 걸림이 없다는 뜻인데, 중생제도 하는데 누구의 눈치를 보거나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지 않는 대자대비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중생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이 너무나 크고 깊어서 인간적인 사랑이나 정을 뛰어넘어 자비로 승화하였기 때문에 걸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은 어째서 모든 중생들의 그 많은 요구와 그 많은 욕심에도 전혀 싫어하는 기색하나 없이 달려가 주실 수 있는 것일까? 라거나 혹은 나도 깨달음을 얻으면 저렇게 신통을 얻고 또한 저러한 무애대비심을 발휘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질런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이 바로 ‘대다라니’이지요. 다시 말해서 ‘신묘장구대다라니’입니다.

아시다시피 ‘다라니(dharani)’라는 말은 신비한 힘을 가진 주문이란 뜻인데, 한역으로는 ‘총지(總持)’라고 번역합니다. ‘총’이란 “모든 공덕이 다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고, ‘지’는 “마음에 새겨서 잊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모든 잘못을 사전에 미리 막아낸다는 뜻에서 ‘능차(能遮)’라고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진언과 다라니는 부처님의 위신력을 주문의 형식을 빌려서 적어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 원음(原音) 속에 모든 공덕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함축된 진리의 말씀이므로 진리 그 자체와 합일하기 위해서라도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원음을 따라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여 예로부터 번역하지 않고 소리나는 대로 옮겨 《천수경》의 신묘장구대다라니도 “나모라 다나다라 …”라고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접어들면서 학자들 중에는 다라니와 진언의 뜻풀이를 시도해보는 경우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정작 “아제 아제 바라아제….”를 뜻풀이해서 《반야심경》을 더 공경하게 되지도, 더 신심이 나지도 않았습니다.

학문적 입장에서는 뜻풀이가 필요할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신앙적 입장에서는 부처님의 거룩한 참된 말씀이려니 하며 그대로 독송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됩니다.

광본 천수경에서도 대범천왕이 관세음보살에게 ‘다라니’의 본질을 질문하자 관세음보살은 다음과 같이 대답해 줍니다.
“크게 자비로운 마음이고, 평등한 마음이며, 집착이 없는 마음이고, 공(空)이라 관찰하는 마음이며, 위없는 보리의 마음이니, 마땅히 알지니라. 이와 같은 마음들이 곧 다라니의 본질이니라.”

이는 다라니의 문자적 해석보다 오직 다라니를 외우면 이러한 마음을 지닐수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여하튼 지금까지의 해제를 간추려 보면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으로 세상의 소리를 다 관찰하고 계시는 관자재보살(관세음보살)의 넓고 크고 원만하며 걸림이 없는 대자대비한 마음을 지닌 다라니 경’이라는 뜻이 됩니다.

바로《천수경》의 주인공은 바로 ‘천수천안관세음보살’입니다. 그분은 왜 천 개의 손을 가지고, 천 개의 눈을 가지지 않으면 안되었을까요? 그것은 그토록 많지 않으면 도저히 중생들의 고뇌와 고통을 감싸줄 수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우리들도 때로는 더 많은 손과 눈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자비심으로 모든 중생들을 어루만져 주시고 보살펴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관세음보살님이야말로 두말 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이 필요할 것입니다. 하긴 어찌 천 개의 손과 눈뿐이겠습니까? 천 만억의 손과 눈으로도 오히려 부족할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천수경》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중심으로 그 내용에서 관음보살을 예찬하는 게송을 비롯하여 사방을 깨끗이 하는 게송, 참회하는 게송과 진언 등이 포함되어 있고 깨달음의 마음에서 물러서지 않기를 원하는 여래의 열 가지 발원과 모든 불보살이 한결같이 일으키는 총원인 ‘사홍서원(四弘誓願)’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천수경》을 통해서 관세음보살의 대자비심을 만나게 되고,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수용하고, 어떻게 베풀어야 할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과보호 속에서는 자식들의 독립과 성장을 기대할 수 없듯이, 우리도 언제까지나 관음보살의 보살핌만을 기대하지 말고, 스스로 관음보살이 되고자 다짐하고 노력할 때, 비로소 진정한 관음보살의 가피를 입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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