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해심밀경(解深密經) – 사물의 본질에 대한 탐구

가장 큰 죄는 마음으로 짓는 죄, 미혹한 마음의 본질과 전개 다뤄
일체는 분별작용에 의한 현상, 십바라밀 실천덕목 통한 깨달음 제시

저 유명한 아인슈타인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는 남보다 뛰어나려 하지 말고, 남과 다르게 되려고 노력해라” 여기서 말하는 ‘남과 다르게 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생각건대 자신의 개성을 살리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남과 다르게 되는 것을 무척이나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모습이나 태도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의견에서는 더욱 심하지요. 자기와 다른 의견이나 견해에는 무조건 잘못이라 치부하거나 나쁘게 생각해버립니다. 그러나 진정한 조화의 멋은 하나같이 서로가 다른 다양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와 같이 《해심밀경》은 다른 경전과는 서술방법이 조금 다른 독특한 경전입니다. 다른 경전들이 그대로 평범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에 반하여, 이 경전은 아비달마(阿毘達磨)적인 묘사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에 경전이라고 하기보다는 논서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이 경전의 본래 목적이 모든 사물의 본질과 모습을 분별하는 것이고, 따라서 부처님의 내증(內證)의 지극히 깊고 비밀스런 묘의를 해석한 경전이란 뜻을 제목에서도 읽을 수가 있듯이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유식불교의 기본문헌을 6경(經) 11론(論)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해심밀경》은 바로 이 6경 중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많은 유식학 논서에 두루 인용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각기 다른 이름으로 네 번씩이나 번역되어진 것을 보면, 이 경전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원측(圓測)의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에 의하면 이 경전은 원래 광본(廣本)과 약본(略本)이 있는데 전자는 십만송 후자는 오천송으로 되어있고, 중국에는 약본만이 전해졌다고 합니다.따라서 현존하는 번역본들도 경제목이 다소 다르지만 내용 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는 동일 계통의 범본인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현장법사의 5권 《해심밀경》은 가장 폭넓게 보급된 대표적인 번역본입니다.

전체적인 구성은 8품으로 되어있지만 ‘서품’을 제외한 7품 전체가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에 인용되고 있기 때문에 이 경전의 성립설에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 구성을 좀더 자세히 소개하면 제2품에서 4품까지는 이론을 전개하고, 제5품은 만법의 현상을, 제6품에서는 수행의 방법을, 제7품은 수행의 계위(階位)를, 제8품은 대과(大果)에 오르는 실천적인 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해심밀경》은 우리가 “마음, 마음” 하는 그 마음이 왜 그리 중요한 것인지 설하는 경전입니다. 흔히 우리는 ‘중생들이 입으로 짓는 죄는 바다와 같이 크고 몸으로 짓는 죄는 태산과 같이 크며, 마음으로 짓는 죄는 허공과 같이 크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가장 큰 죄는 결국 마음으로 짓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마음 다스리는 공부가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이고,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미혹의 마음이 작용하고 있는 그 이유와 전개과정을 면밀히 관찰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 유식사상이고, 《해심밀경》은 바로 이 유식사상을 다루기 시작한 최초의 경전인 것입니다.

먼저 유식(唯識)이라는 단어를 풀이하면 ‘오직 식(識)만이 있다’는 뜻이 되고, 이를 다시 의역하면 ‘세상의 일체 사물은 오직 인간의 분별 인식작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해심밀경》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우리가 객관적으로 무엇을 본다고 할 경우 실제로 보는 것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이 아니라 주관적인 마음을 볼 뿐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어떤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은 오직 주관적인 인식작용으로 이해한 것일 뿐, 객관적인 사실을 보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배중사영(杯中蛇影)”이라는 일화는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고향 선배를 찾아갔습니다. 식사를 끝내고 술상이 나왔는데 선배가 손수 부어주는 술잔을 받아든 순간, 후배는 깜짝 놀랐습니다.

술잔 속에 아주 작은 실뱀이 빠져 있었던 겁니다. 너무 놀라서 손을 떠니까 술잔 속의 실뱀도 같이 움직였습니다. 빨리 잔을 비워달라고 재촉하는 선배의 소리를 듣고, 자신의 담력을 시험하려는 것으로 생각하고 젊은이는 두 눈을 감고 술잔을 단숨에 비웠지요. 그리고서 집으로 돌아온 후에, 젊은이는 뱃속에서 뱀이 살아 점점 커지고 있다는 생각으로 구토를 하는 등 큰 병이 들어 몸져 눕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소문을 들은 선배는 젊은이를 억지로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와서 몇 달 전의 그 자리에 후배를 앉히고서 다시 술상을 차리고 똑같은 술잔에 술을 부어 주면서 마시라고 권하였지요.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또다시 술잔에는 실뱀이 들어 있었고 이를 본 후배는 금방이라도 술잔을 던져 버릴 듯이 선배를 노려보았지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선배는 후배에게 자리를 조금만 비켜 앉아 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술잔의 실뱀은 깜쪽같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어찌된 영문이냐는 표정으로 의아하게 바라보는 후배에게 선배는 웃으면서 뒷벽을 가리켰습니다.

거기에는 활이 한자루 걸려 있었고 그 활에는 옻칠로 조그만 뱀이 그려져 있었는데 바로 그것이 술잔에 비쳐서 그렇게 보였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함께 껄껄 웃었습니다. 그 후에 병이 씻은 듯이 나았음은 물론이지요.

이처럼 우리는 사물을 실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마음으로 사물을 만들고 그 마음이 만든 것에 집착하고 구속되어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이 경전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해심밀경》은 불교사상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연기법에 대한 해석도 종래와는 다른 시각에서 시도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연기법을 새롭게 해석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새로운 각도에서 불교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연기에 대한 해석으로는 업에 의한 연기(業感緣起), 식에 의한 연기(阿賴耶緣起), 진여에 의한 연기(眞如緣起), 법계에 의한 연기(法界緣起), 지수화풍공식에 의한 연기(六大緣起) 등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두 번째 아뢰야연기가 바로 유식사상에서만 주장하는 특징으로 업감연기를 전제로 한 위에서 독자적인 교리체계를 세운 연기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종래의 업감연기설에서는 업이 윤회를 만드는 주된 원인이 되는데 업이 결과를 맞이할 때까지 그 업력은 어디에 저장되어 있느냐 하는 문제는 결론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누구나 할 것 없이 업을 지으면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받기 마련인데, 그 과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곧바로 나타나기도 하고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난 후, 또는 여러 생이 지난 뒤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에게 업력은 그동안 어디에 어떻게 저장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업감연기에서는 이에 대한 설명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반면, 아뢰야연기에서는 제6식 이외에 업력 종자의 저장식인 제8 아뢰야식을 상정하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업력들은 종자가 되어 아뢰야식 내에 저장되어 있다가 인연을 만나면 비로소 연기된다고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현상세계의 일체 만물들은 아뢰야식의 종자로부터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심밀경》에는 우리들이 사물을 보고 느끼는 모습을 설명한 삼성(三性)설도 나오고 있는데, 전문적인 내용이라서 어렵게 생각될지 모르겠으나 비유로써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이해가 그다지 어렵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첫째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란, 사람들이 머리로 분별심을 일으켜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을 가진 사물을 어떤 고유의 특징을 지닌 실체처럼 착각하는 상태를 뜻하고, 둘째 의타기성(依他起性)은 상대적인 것에 의존해서 일어나는 즉 인연관계를 말합니다. 셋째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사물과 존재의 실상이 공(空)한 상태의 모습 그 자체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대한 비유를 소개하면, 깜깜한 밤길을 가다가 길바닥의 뱀을 밟고 깜짝 놀랐습니다.(변계소집성). 그러나 용기를 내서 자세히 살펴보니까 그것은 뱀이 아니라 새끼줄을 밟은 것이었습니다(의타기성). 그런데 그 새끼줄도 실은 마(痲·삼실)로 만들어진 것(원성실성)이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삼실도 처음부터 삼실이 아니라 원자의 모임에 불과하고, 원자 또한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양성자는 다시 무수한 소립자들의 운동, 즉 에너지 일뿐이지요. 따라서 사물 그 자체라고 할 만한 고유하고 고정된 자성(自性)이라고는 어느 곳에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해심밀경》은 삼성설을 통해 사물의 진실한 모습에는 항상 존재하는 실체적인 주체가 없음을 설하는 동시에 우리들에게 사물의 공(空)함을 똑바로 보고 올바르게 판단하라고 각성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해심밀경》의 제7품에서는 앞서의 아뢰야연기와 삼성설의 실천 덕목으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이 아닌 십바라밀(十波羅蜜)을 제시하고 있는데, 육바라밀외에 방편(方便), 원(願), 력(力), 지(智)바라밀이 그것입니다.

먼저 방편(方便)바라밀은 육바라밀의 보시, 지계, 인욕과 짝을 짓는 데 그것은 보시, 지계, 인욕바라밀이 중생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교화하여 구제하는 선교방편(善巧方便)이기 때문입니다.

원(願)바라밀을 정진과 짝을 짓는 것은 목표를 향해 노력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고, 력(力)바라밀을 선정과 짝을 짓는 것은 집중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며, 지(智)바라밀은 지혜바라밀과 짝이 되는데 그것은 세간을 벗어나는 반야를 일으키기 위해서라고 설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해심밀경》은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오직 인간의 분별작용에 지나지 않음을 깨우쳐 주고자 십바라밀을 제시함으로써 마음을 찾는 이들로 하여금 먼저 이러한 덕목을 실천할 것을 권하고 있는 경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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