圓覺은 걸림없는 마음의 본체, 성품 바로 보면 깨달음은 바로 그 자리에
원력은 불도를 이루는 지름길, 열두 보살 문답 통해 방법 제시
물에 대하여 생각해보신 적이 있는지요. 물은 어떤 모양의 그릇과 만나더라도 그 그릇의 모양을 싫다 좋다 하지 않고 말없이 그릇의 모양새에 따라 순응합니다. 가령 바위가 있으면 돌아서 흐르고, 웅덩이를 만나면 고였다가 넘쳐서 흐를 줄도 압니다. 따라서 어떠한 상황도 마다하지 않고 기다릴 줄을 알고, 상대에 맞추기 위해 자기 자신을 양보할 줄도 압니다.
그런데 우리는 물처럼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는 걸까요. 물과 같이 그 무엇과도 부딪침이 없이 순응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들도 원각(圓覺)이라고 하는 소중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거울이 더러운 것과 만나면 더러운 그대로 비쳐주고 예쁜 꽃과 만나면 예쁜 꽃을 그대로 조금도 훼손하지 않고 비춰주면서도, 거울 그 자체가 더 예뻐진다거나 혹은 더러워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거울의 성품이 원래 청정하기 때문이고, 비춰지는 사물에 집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사물에도 구애를 받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와 같이 ‘원각’이란 물의 성질처럼 전혀 걸림이 없고, 거울의 성품처럼 깨끗한 마음의 본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각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는데 때로는 생명의 실상이라고도 하고, 결코 더러워지지 않기 때문에 청정원각(淸淨圓覺)이라고도 하며, 변하지 않는다 하여 진여(眞如), 또는 무명(無明) 속에 묻혀있어도 무명을 극복하게 되므로 보리(菩提)라고도 부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원각은 마치 모든 물줄기를 가리지 않고 다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바다에 비유됩니다. 《원각경》에서는 이러한 마음을 원각묘심(圓覺妙心)이라고 표현하는데 부처님은 바로 이 원각묘심에 입각하여 무명(無明)을 단절하신 분이시고, 우리 중생들도 모두가 이러한 마음을 갖추고 있다고 설한 경전이 바로 이 《원각경》입니다.
《원각경》의 갖춘 이름은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이라는 긴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이를 줄여서 《원각수다라요의경》 《원각요의경》 《원각경》 등으로 약칭하고 있습니다.
그 경명(經名)을 풀어보면, 먼저 ‘대방광(大方廣)’은 원각의 체(體) 상(相) 용(用)을 가리키는 말로써, 크고도 넓은, 즉 광대 무변하다는 뜻이고, ‘원각’은 완전원만 깨달음을 뜻하며, ‘수다라(修多羅)’는 범어의 수트라(sutra)를 음사(音寫)한 것으로 경(經)을 말하고, 마지막 ‘요의경(了義經)’이란 으뜸가는 경이라는 의미인데 앞서의 수다라(經)와 중복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를 정리하면 일체 중생의 본래성불(本來成佛)을 드러내는 ‘원각’ 즉 원만한 깨달음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가장 뛰어난 경전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경의 제목에서 ‘원각’이라는 말은 《화엄경》의 ‘원만수다라(圓滿修多羅)’에서 따오고, ‘요의’는 《능엄경》에서 따왔다고 전해지고도 있습니다.
《원각경》은 현재 범본은 전해지지 않고, 유일하게 한역본밖에 없기 때문에 그 진위(眞僞) 여부가 일찍부터 거론되고 있었습니다. 7세기 말에 이 경전을 번역했다고 전해지는 불타다라(佛陀多羅)는 북인도 스님인데 그의 역경은 오직 이 《원각경》 한 권뿐이고, 더구나 이 스님에 대한 기록도 오직 ‘경전목록집’인 《개원록(開元錄)》에만 나오고 있기 때문에 더욱더 의심을 사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 학계의 연구결과로는 인도가 아닌 중국에서 만들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강하고, 그 성립시기는 8세기 초에는 이미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경전을 유포시킨 이는 중국 화엄종의 규봉종밀(圭峯宗密)스님인데, 어느 날 사찰의 경전을 보관하는 경장(經藏)속에서 우연히 《원각경》을 찾아 내고 더할 수 없는 환후심을 일으켜서 오로지 일생을 《원각경》연구에 몰두하여 많은 주석서를 남겼습니다.
《원각경》의 전체 구성은 1권 12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크게 삼분(三分)하면 서분에서는 이 경을 설하게 된 취지를 설하고, 이어서 문수보살을 필두로 하여 열 두 보살들이 차례로 부처님께 청법(請法)을 하고 그 질문들을 중심으로 부처님께서 대답을 해주시는 형식의 정종분을 설하고, 마지막 유통분은 경전을 후세에 유포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로 믿고 받들어 행하는 (信受奉行)방법과 수지독송의 공덕을 설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좀더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먼저 12장(章)의 각 보살들이 부처님께 드린 질문만을 살펴보면,
제01장은 무수보살이 법회대중과 말세중생들이 번뇌의 병을
멀리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여쭙고,
제02장은 보현보살이 말세중생들의 수행하는 방법을 물었고,
제03장은 보안보살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중생들을 위해
어떤 방편을 써야 할지를,
제04장은 금강장보살이 앞장에서의 부처님 설법에서 일으킬 수 있는 세 가지 의심을 ,
제05장의 미륵보살은 윤회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06장은 청정혜보살이 여러 가지 인간성의 차별에 따른 깨달음의 차이를.
제07장은 위덕자재보살이 점진적인 수행과정을,
제08장은 변음보살이 원각문의 수행법을,
제09장은 정제업장보살이 법회대중과 말세중생이 장래 의지할 안목을,
제10장은 보각보살이 어떻게 발심해야 그릇된 길에 빠지지 않는지를,
제11장은 원각보살이 안거(安居)방법과 세 가지 관법수행을,
제12장은 현선수보살이 이 경전의 유통에 대하여 여쭙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원각경》의 특징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면 하나는 대원(大願)에 대한 설명이고, 또 하나는 구체적인 수행방법에 대한 설명이 되겠습니다. 이와 같이 불교의 수행은 원력을 세움으로써 시작되기 때문에 청정하고도 크나큰 원은 불도를 이루는 지름길이고, 또한 일심(一心)으로 일으킨 대원이야말로 해탈의 길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법을 단지 안다는 것과 실제 수행하는 것과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원각을 이루기 위해 대원을 세우고 모든 집착을 여의고 무명을 없애는 수행만이 ‘원각묘심’을 얻는 길이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원각묘심’을 밝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냐면, 어리석은 목표,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이 영원한 줄 알고, 많은 재산이 언제까지나 자기 것인 줄 알아 허망한 욕심을 부리는 집착에서 벗어나야 하고, 더 나아가 집착을 끊어야지 또는 없애야지 하는 그 마음까지도 벗어버리는 경지에 들어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 두 개의 나무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이 두 나무토막을 서로 비비면 거기서 불이 일어나게 되고 나무가 다 타버리면 그때는 불도 역시 꺼져 버리게 됩니다. 혹시 재가 남지 않는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이 또한 고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바람에 날리면 잡을 수도 머물게 할 수도 없으며 결국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나무는 인(因)이 되고, 마찰시키는 것은 연(緣)이 되어서 불이 일어났으나, 그 인과 연이 다 되었을 때는 결국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무에서 불이 나왔지만 그 나무를 태우고 그 불까지도 꺼져버리듯이, 우리도 집착을 끊고 무명을 없애야 하고 마지막에는 없앤다고 하는 그 마음까지도 없을 때, 바로 그 자리에 원각묘심이 밝게 빛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원각과 무명은 어떻게 다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그 차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한 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무슨 얘기냐 하면 갑자기 딴 고장에 가게 되면, 어리둥절하여 동서남북을 분간하기 어려워서 동쪽을 서쪽이라고 할 수도 있고, 남쪽을 북쪽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일시적 착각에 불과할 뿐이지, 방위 그 자체가 바꾸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원각과 무명은 실은 같은 것입니다.
원래 청정한 원각묘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므로 무명에 휩싸여 있을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원각경》은 실제적인 수행방법을 여러 중생의 근기 즉 수준에 맞춰서 다양한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계율준수와 업장참회, 그리고 좌선의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설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인 신행생활에도 더없이 좋은 지침서가 되고 있는 경전입니다.
이와 같이 《원각경》은 열두 보살이 부처님과의 문답을 통해 무명을 끊고 불성을 드러내어(斷無明, 顯佛性) 본래성불인 원각(圓覺)을 찾아가는 방법을 설한 경전으로서 오늘날까지 출가자들의 교육기관인 강원에서 사교반(四敎班)의 교과목으로 연찬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