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늬바람 불자 비는 벌써 그쳤네

서풍취동우초헐 西風吹動雨初歇 하늬바람 불자 비는 벌써 그쳤네

만리장곤무편운 萬里長空無片雲 넓은 하늘에 구름조각 하나 없구나.

허실호거관중묘 虛室戶居觀衆妙 빈방에 앉아 온갖 묘한 이치를 관하니

천향계자낙분분 天香桂子落紛紛 하늘의 계수나무 향기(달빛) 어지러이 떨어진다.

이 시를 감상하면 지루한 장마가 그치고 더위를 몰아내는 하늬바람이 불어왔나 보다고 느껴진다. 하늘에서부터 가을 기운이 내려오기 시작한다. 여름의 그 많던 뭉게 구름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빈방에 홀로 앉아 좌선에 여념이 없다가 밤이 되어 달 뜬 줄도 몰랐다. 선정에서 깨어나 창문을 열었더니 달 속의 계수나무 향기가 여기 저기 떨어진다. 계수나무 향기는 곧 달빛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활약했던 서산스님의 제자 사명스님이 쓴 시다. 지리산 어느 골짜기에 앉아 여름이 물러가고 가을이 오는 절기를 느끼면서 지었는지 제목이 <靑鶴洞秋坐>라 되어 있다. 지금의 청학동이 아닌 속세와 멀리 떨어진 불로장생술을 닦는 도인들이 모이는 골짜기라는 전설적인 이상향을 상징하는 이름이 청학동이다. 하늘에 뜬 달빛이 땅에 비쳐오는 모습을 달 속에 있다는 계수나무 열매가 꽃잎처럼 떨어진다고 묘사하였다. 참으로 멋진 시구이다. 결국 달빛이 계수나무 열매의 향기라는 말이다. 때로는 먼 하늘을 바라보면 그리운 사람의 얼굴이 향기로 닦아옴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사람의 순수한 감정이다. 무심은 순수를 의미하는 것이지 아무 감정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지안스님 해설. 월간반야 2003년 7월 (제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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