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을 공휴일로

올해도 어김없이 봄은 오는 둥 마는 둥하더니 가버리고 여름이 왔다. 누가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했던가. 정말 정신없이 바쁘게 만들었던 ‘가정의 달’ 덕분에 여왕의 모습도 보지 못하고 가버렸다. 1일은 근로자의 날, 5일은 어린이날, 8일은 어버이날, 11일은 입양의 날, 15일은 스승의 날, 17일은 성년의 날, 21일은 부부의 날, 25일은 실종 아동의 날이었다. 여기다 올해는 억조창생의 참스승이신 ‘부처님 오신 날’이 21일이었으니 그야말로 바쁜 달이었다. 그밖에도 다른 기념일까지 곁들여 있는 데다 6월 2일 전국 동시 지방선거로 인한 선거열풍이 겹치니 중생의 삶은 가히 요지경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 게 있다. 그건 ‘어린이날’을 아직도 ‘공휴일’로 정해놓고 쉬게 하는 것과, ‘어버이날’을 공휴일로 정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어린이날이 만들어진 것은 1923년의 일이다. 소파 방정환 선생을 중심으로 어린이의 고유문화와 예술활동을 진작시키며 어린이의 인권의식을 기릴 목적으로 1922년 3월 일본 동경에서 ‘색동회’를 조직한 것이 모태가 되어 이듬해 1923년 5월 5일 ‘어린이날 선언문’을 발표하게 된 것이었다. 어린이가 종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완전한 인격적 대우를 받고,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연소노동을 금지하며, 어린이가 마음껏 배우고 즐겁게 놀 수 있는 가정과 사회시설을 보장할 것 등 ‘아동존중사상’을 강조한 것이었다.

사실 겉으로는 ‘어린이들에 대한 인격적 대우’나 ‘노동금지’, 사회 복지시설‘ 등을 강조하였지만 그 이면에는 일본 제국주의에 강제 합병된 이래 ‘3.1운동’ 등을 겪은 우리 민족 선각자들의 의식의 전환으로 보여진다. 구한말 개화에 뒤지고 미쳐 힘을 기르지 못했던 우리 민족이 나라를 빼앗기는 쓰라린 아픔을 겪고, 독립을 되찾으려는 거족적 노력을 기울여보았건만 큰 소득 없이 끝나자 기성세대의 힘의 한계를 절감한 선각자ㆍ선지자들은 자라나는 세대, 즉 어린이들을 잘 길러서 이들이 힘을 길러 나라와 민족 자존을 되찾아 줄 것을 기대하면서 어린이 운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참되거라! 착하여라! 아름다워라! 너희들은 대한의 새싹들이다.’ 라고 외치면서 꿈과 희망을 불어 넣어주고 격려하여 준 것이다. 그 후 일본 정부에 의해 우리 선각자들의 어린이 운동은 상당히 변질되었다가 1945년 광복 이후 다시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했고, 1961년에 제정된 ‘아동복지법’에 어린이날을 5월 5일로 명시하였으며, 1970년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으로 공휴일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작금의 현실은 어떤가. 아직도 이상과 어린이 보호법의 사각지대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어린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려운 시기에 우리가 자주 사용하였던 ‘헐벗고 굶주린’ 따위의 단어도 사라진지 오래고 오히려 어른들이 어린이의 눈치를 보는 세상이 아닌가. 우스갯말로 한 아이가 고함을 지르면 그 아이의 부모, 조부모, 외조부모 등 최소한 6명이 달려온다고 한다. 한 부모에 둘도 아닌 한 명의 자녀를 둔 가정이 많아지니 이런 소동이 날 법도 하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굳이 어린이날이 필요한가. 1년 365일이 모두 어린이날 아닌가. 이렇게 애지중지하면서 보호막 속에 사는 어린이를 더 이상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가. 거기다가 또 어린이날이라고 공휴일을 만들어 놓으니 되려 부모들에겐 고통의 날이 될 수밖에. 온 나라가 북새통이고 도로가 온통 주차장이 되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버이날은 어떤가. 전통적인 효 사상을 굳이 요구하지 않더라도, 노후에 편안히 잘 봉양하지 않더라도, 이날 하루라도 좀 뜻 있게 보낼 수 없을까. 부모가 살아 계신다면 당연히 찾아뵙고, 돌아가신 후라면 산소에 가서 술 한잔이라도 올리면 어떨까. 얼마 전 TV에 출연한 모 인사가 지금 오륙십대를 가리켜 ‘말초(末初)세대’라고 명명하는 걸 들으며 씁쓰레한 웃음을 지었다. 뜻인즉 ‘효도하는 마지막[末]세대’요, ‘효도를 못 받는 첫[初]세대’라고 하였다.

이제는 주 5일제 근무가 정착되어가고, 공휴일이 다른 나라에 비해 많다는 지적도 있는데 또 ‘어버이날’을 공휴일로 지정해달라면 가뜩이나 일손이 부족한 기업이나 생산현장에서는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뛸 테니까 새로 공휴일을 추가하기보다는 기존의 ‘어린이날’을 5월 첫째 토요일이나 일요일로 바꾸고, ‘어버이날’을 공휴일로 지정하면 어떨까.

‘효(孝)’는 ‘백 가지 행실의 근본[百行之本]’임에 틀림없다. 분명히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식은 형제간에 우애 있게 마련이고, 일가친척들과 화목하게 지낼 것이며, 나아가 직장과 사회에서 동료 선후배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가질 것임이 자명하지 않은가.

김형춘 교수님 글. 월간 반야 2010년 6월 1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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