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파불교 ‘의근’ 개념과 대승유식 심식설의 체계화

6식(識) 즉,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은 6근(根) 즉, ‘안, 이, 비, 설, 신, 의근’을 의지하여 6경(境), 이른바 ‘색, 성, 향, 미, 촉, 법경’을 반연한다. 예를 들어 사과라고 인식하는 안식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안근인 눈을 의지하여 사과라는 대상 즉 색경을 반연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6식 중 ‘의식’은 무엇을 의지하여 법경을 반연하는 것인가? 즉 의근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눈, 코, 귀, 혀, 몸의 5근은 감각기관으로서 이해가 되지만 도저히 ‘의근’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물론 뇌를 의근이라고 판단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뇌는 우리 몸의 일부일 뿐 그것을 정신적인 작용을 하는 의근과 필요충분조건이라 설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부파불교의 논서인 <아비달마구사론>에서는 이러한 의근에 대하여 “6식이 현행을 마치고 과거로 사라져 갈 때에, 사라지면서 다음 순간의 식이 발생하도록 작용하는 것이 의근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그 비유로써 아버지로부터 태어난 아들이 자라서 다시 아버지가 되는 경우와 여기서 열매인 것이 저기서는 종자로 작용하는 경우를 들고 있다. 즉 여기서의 결과가 다시 원인으로서 작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행으로서 작용하고 사라지는 현재의 6식이 다음 순간 식의 발생조건으로 작용한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이를 ‘의근’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무간멸(無間滅)의 의(意)로서 의식이 생기기 전의 이미 사라진 제6식의 총체가 곧 의식” 이라고 표현하면서 염념멸(念念滅: 생각의 찰나찰나 사라져 감) 하며 사라져간 전념(前念: 현재찰나 바로 이전의 생각)을 의근으로 하여 의식이 발생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것은 마치 6개의 창문(안이비설신의 6근)이 있는 어떤 방에 원숭이(의식) 한 마리가 앉아서 매우 빠른 속도로 창문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외부에서 보면 각 창문마다 원숭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한 마리(의식)만이 작용하는 것과 같다. 즉 안식이나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이 각각 다른 존재들이 아니라 의식의 총체이며, 이것이 찰나찰나 생겨나고 사라지는 과정에서 앞서 사라져버린 의식이 바로 의근으로 작용하여 다음 찰나의 의식을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부파불교의 아비달마이론에서는 마음의 체성(體性)은 하나이며 마음心이 곧 의(意)이며 의는 또한 식(識)으로서 이들은 이름만 다를 뿐 그 본질은 같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의식은 일체경식(一切境識)으로서 유위무위의 일체제법을 의식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에 당시에서는 ‘의식’ 하나만 가지고도 모든 인식활동을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5위무심의 상태, 즉 의식이 끊어져 더이상 의근에 의지할 수 없는 상태에 대한 의문이 등장하면서 의식만 가지고 모든 인식활동을 설명하려던 부파불교의 이론에 제동이 걸리게 된다. 왜냐하면 의식이 모든 인식활동을 관장한다면 의식이 끊어진 상태에서는 모든 인식활동은 불가능한 것이며 한 존재의 의식적 연속성은 단절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위무심(五位無心)의 상태는 다음과 같다.

1. 극수면 – 아주 깊은 잠

2. 민 절 – 기절상태

3. 무상천 – 어떠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 세계

4. 무상정 – 심리작용 멸절상태

5. 멸진정 – 모든 것이 끊어진 선정상태

따라서 대승불교에 이르러서는 비록 제6의식이 료별(了別)함을 자성으로 삼고 있지만, 근본번뇌인 아치, 아견, 아만 및 아애 등과 같은 번뇌들과 함께하며 항상 무엇인가를 살펴서 분별하는 ‘항심사량성’을 지닐 수 있는 어떤 심식과 함께 위에서 설명한 다섯가지 의식의 단절상태인 ‘오위무심의 상태에서도 끊어지지 않고 ‘의근’으로서 작용할 견고한 심식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먼저 제8아뢰아식의 성질을 가진 심식이 설정되어 마음을 영원히 유지시켜주면서 업력까지도 보존하게 하였으나 무엇인가를 살피는 이른바 심세성(審細性)이 없으므로 항심사량성(恒心思量性)을 지닌 제7말나식이 제6식과 제8아뢰아식 사이에 설정하였다.

결국 대승의 사상(유식)에서는 구사론과 같은 아비달마의 이론에서 발견될 수 있는 맹점과 오류를 제7말나식을 ‘의근’으로 설정함으로서 해결하였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은 필요에 의한 심식개념의 상정이 단지 인위적 장치라는 점에서 인간의 분별이 낳은 하나의 이론에 불과하지 않는가 하는 반박이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 유식의 논사들이 인간의 심식을 고도의 선정경지에서 파악한 것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이것은 인간의 마음을 궁구하여 얻은 하나의 수행적 결과물이라고 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신경스님, 월간반야 2010년 9월 제1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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