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는 것은 과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사과나무 밑에 앉아 있던 뉴턴이 사과가 수직으로 땅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알아냈다는 법칙이다. 또 자석의 양극 사이에 서로 다른 극이 인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상식적인 이야기가 되어 있다. 서로 당기는 힘은 뭉쳐지는 힘으로 합쳐져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힘의 작용이다.
반면에 밀어내는 힘인 척력(斥力)이 있어, 하나가 되어 같이 있지 못하고 분리되는 힘이 인력과 동시에 상존한다. 인력과 척력, 이것은 분열과 통합의 원리를 설명하는 기본 법칙인 것 같다.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도 이 인력과 척력이 작용한다.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사생활에 있어서도 이 두 힘이 수시로 작용하고 있다. 이는 간단히 말하면 좋아지는 것과 싫어지는 것이 이것이다. 못 견디게 그리운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은 마음속에 사람에 대한 인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생각하기 조차 싫은 경우도 있다. 이는 척력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남녀가 사귀다가 결혼을 하는 것은 인력에 의해서이고 살다가 헤어져 이혼을 하는 것은 척력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사람의 생각을 염력(念力)이라고 한다. 생각도 하나의 행위이며 이 생각 속에도 힘이 들어 있어 이것이 곧 업력(業力)이 된다는 것이다. 이 업력의 성질이 같으면 동업이 되고 다르면 별업이 된다는 이론도 있다. 보통 생각할 때 업력이 같으면 동화가 잘 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 반대의 현상도 있다. 음양의 이치로 말하면 양은 음을 기다리게 되며 음은 양을 기다리게 된다는 이론이다. 성별의 입장에서 보면 암수가 서로 당기는 인력을 가지고 있으며, 같은 성에서는 밀어내기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임산부가 딸을 임신했을 때, 아들을 임신할 때보다 배가 더 부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머니가 여성이기 때문에 아들은 인력을 갖고 바짝 당겨오는 반면 딸은 척력을 갖고 밀어낸다는 것으로 자석의 원리와 같이 설명된다. 이것은 다른 것과의 조화를 의미하는 상징적 메시지가 있는 이야기이다. 우선 생각이 다른 것을 반대로만 보지 말고 견해의 차이에서도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의 차원을 높여서 보면 같지 않을 때 오히려 조화가 더 잘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세상은 조화를 통하여 평화를 이루어 낸다. 서로 다르므로 조화가 필요하며 같은 것은 조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군자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 하여 높은 인격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조화를 이루어 화목하게 지내지만 같지는 않다고 했다. 우리나라 이혼율이 세계 최고가 되었는데 그 사유에 성격차이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성격차이가 오히려 인력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이 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서로 다른 것끼리의 조화가 오히려 더 잘 될 수 있는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척력을 발휘해서 갈라서기를 좋아하는 세태가 되고 있다. 또 배타적 척력이 높아지면 사회는 균열이 일어난다.
목하 우리 사회가 편 가르기로 균열을 이루는 매우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파적 붕당이 정계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종교문화계에서 조차 분파주의의 편 가르기가 유행처럼 번진다. 내 편이 아니면 여지없이 배척하려는 편 이기주의 때문에 사회 안녕이 저해 받을 지경이라고 한다. 개인이 자기 인생을 살아가면서 인생관을 선택하는 것은 편을 갈라 소속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종교적 선택이나 철학적 선택이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방편상의 선택일 뿐이다. 떼를 지어 집단적 이익을 도모하겠다는 것은 수도(修道)상에서 보면 객관에 집착하는 법집(法執)에 불과하다. 집착 없이 살라고 부처님은 가르쳤다. 수타니파타(Suta_nipata)에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하였고, 또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탕 물에 젖지 않는 연꽃처럼 살라’고 했다. 편을 갈라 공연히 불화를 조성해서는 안 된다.
한 가정이 가난해도 식구들이 화목하면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가정불화가 심하면 그 속에 무슨 행복이 있겠는가? 화목으로 가는 사회가 극락이 되고 천당이 된다. 편 가르기의 대립 자체가 지옥문이다. 사람이 때로는 남의 입장도 되어 보아야 한다. 남의 사정에도 관심을 갖고 궁금해 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남에 대한 배려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말만 하려 하고 자기 주장만 관철하려 하는 것은 소인배의 독재근성일 뿐이다. 안다는 지식이 사람의 오만을 만드는 것이 되어서도 안 된다. 분명한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이나 가지고 있는 것이 나에게 조금 익혀져 있는 것일 뿐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가 한없이 많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 때로는 내가 아는 것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양나라 무제 임금과 대화를 나누던 달마 스님이 ‘나는 오직 모를 뿐입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또 옛날 어느 왕이 고승을 불러 불법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 왕이 부처님 법에 대하여 묻자 이 고승은 “그건 별거 아닙니다. 그보다 임금의 지위가 어떠한지 그것을 제게 말해 주십시오”라고 요구했다. 정작 이 고승에게는 불법에 대해 말하는 것은 싱거운 일이고 왕에 대한 호기심이 갑자기 생겨 왕의 이모저모가 궁금했던 것이다. 때로는 남에 대한 호의적인 관심이 사회의 분위기를 살려 놓을 수 있다.
요산 지안 큰스님 글. 월간반야 2009년1월 제9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