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죽음을 두고도 미학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죽음에도 아름다움이 있다는 미의 본질적 의미를 두고 말하는 것이리라. 사실 상여를 메고 선소리꾼의 선창에 따라 사설을 읊으며 시신을 운구하여 묘지로 가는 풍경에도 미학적 관점은 충분히 있다. 애도의 행렬 그 속에도 왜 아름다움이 없겠는가?
사람의 죽음이 슬픔으로만 끝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치적으로 생각해 보면 죽는 것이나 태어나는 것이 똑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불교에서는 죽음을 열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번뇌의 불길 욕망의 불길이 다 꺼져버린 지극히 고요하고 평화스러운 경지를 열반이라 한다.
지난 주 우리 종단의 원로이셨던 활산당(活山堂) 성수(性壽) 대종사께서 열반에 들었다. 큰절 통도사에서 5일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마지막 영결식을 하는 날 수천 명의 사부대중이 모여 종사의 유훈을 기리며 애도하였다. 세수 90에 법랍 69세로 생애를 마친 노사의 영결식에서 나는 많은 감회를 느꼈다.
운구 행렬이 다비대에 가는 동안 수백 개의 만장행렬이 줄을 이었고 극락암 수좌 스님들이 메고 가는 상여의 이동을 보면서 꼭 불가의 전통 장례의식의 시범이 재현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어디서 왔는지 수많은 외국인들마저 나타나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영원한 화두이자 인생의 근본 향수가 담겨 있는 이 말을 속으로 되뇌고 죽음의 미학을 생각하며, 화장막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연기처럼 사라지는 존재의 허무감에 엄습당해 보기도 하였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죽음을 두고 인생을 정의하는 말을 남겼다. 그는 인생이 공동묘지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도보의 행진이라 하였다. 시간의 진행을 두고 여기서 저기로 가는 과정으로 보아 한 말이겠지만, 생멸현상의 한쪽을 가지고 말한 것 같다.
또 누구는 안개가 자욱이 낀 다리 위를 건너는 것과 같다는 말을 하기도 하였다. 앞이 잘 안보이고 뒤가 잘 안 보인다는 뜻으로 한 이 말은 삼세의 생을 두고 말할 때 확실히 전생을 모르고 내생을 모르는 무명 속의 인생이라 그 자초지종을 모른다는 이야기이다. 하긴 오직 모를 뿐이라고 말했던 달마의 선어로 보면, 모를 때 모든 것에서 쉬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아는 것이 남아 있으면 업이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영결식 전날에는 큰절 설선당(說禪堂)에 내려가 영정에 참배하고 만장(輓章)을 몇 개 썼다. 비단 천에 조의를 표하고 애도의 글을 써는 것이 만장이다. 자작시를 쓰기도 하지만 불가에서는 주로 역대 고승들이 남긴 송구(頌句) 등을 쓰기도 한다. 내가 쓴 만장의 글귀 가운데 동진 때 승조법사가 남긴 임종게(臨終偈)의 송구가 있다.
인간의 육신은 원래 주인이 없고 四大元無主(사대원무주)
오온은 본래 공한 것이네. 五蘊本來空(오온본래공)
번쩍이는 칼날이 내 목을 내리칠 것이지만 將頭臨白刃(장독임백인)
봄바람을 베는 것과 같으리라. 恰似斬春風(흠사창춘풍)
승조는 왕이 내린 벼슬을 거절해 왕의 노여움의 사 형장에서 처형이 되었다. 그때 그가 이런 시를 읊었다는 것은 범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죽음을 이렇게 여유 있게 맞이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미학이 아닐까?
중국의 방온(龐蘊) 거사가 어느 날 방안에서 좌선을 하다가 그냥 좌탈(坐脫). 앉아서 돌아가는 것을 하고 싶었다. 정오가 되면 떠나려 했다. 마침 딸 영조가 산에서 나물을 캐 와 마당가에서 다듬고 있었다. 방거사가 밖을 향해 물었다.
“얘, 영조야, 해가 중천에 와 정오가 되었느냐?”
딸이 대답하기를
“일식을 하는지 해가 잘 안보입니다.”
방거사가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내려왔다. 구름이 조금 하늘을 덮었으나 해는 중천에 닿아 있었다. 마당을 한 바퀴 돌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 사이 딸 영조가 방안에 들어와 아버지가 앉아 있던 방석에 앉아 있었다. 딸을 불렀다.
“얘, 영조야!”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순간 아차하고 방거사의 머리에 섬광처럼 일어나는 생각이 있었다. 자신이 좌탈 하려던 방석에 딸이 먼저 들어와 선수를 쳐 좌탈을 해버린 것이었다. 딸의 기민한 솜씨(?)에 아버지는 감탄을 했다.
할 수 없이 방거사는 자신의 입적을 며칠 미루기로 했다. 1주일이 지난 뒤 방거사가 입적을 하던 날에는 마침 양주 태수를 역임한 우적于頔이라는 사람이 찾아왔었다. 그도 선에 심취하여 가끔 방거사를 찾아와 법담을 나누곤 했다. 우적과 이야기를 나누던 방거사가 좀 눕겠다며 방바닥에 드러누워 우적의 무릎을 베더니 그만 스스로 숨을 거두어 입적을 하였다.
“허공 꽃 그림자가 어지럽게 떨어지고 아지랑이 파도가 거칠게 이는구나.”
방거사가 남긴 임종의 말이었다.
지안 큰스님 글. 월간 반야 2012년 5월 13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