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재수 좋습니다!

가질수록 더 갖고 싶어하고 더 소유하려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먹으면 먹는 대로 내일을 걱정하고, 있으면 있는 대로 더 많은 것을 탐한다. 그래서 그 채워지지 않는 욕심 때문에 괴로워한다.

나는 가장 적은 욕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행복과 친숙해졌다. 이는 서양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말이다. 많이 소유한다는 것이 결코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 것임을 간파한 말이다.

10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급한 볼일이 생겨 시내에서 김포 공항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탔을 때의 일이다. 마땅히 빈 차가 없어서 가까스로 같은 방향으로 가는 차에 합승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먼저 타고 있던 여자 손님이 나를 알아보고는, “삼중 스님 아니십니까?”하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속세로 나와 부처님의 설법을 전파하겠다고 포교승이 되어 동분서주하다 보니 굳이 절의 신자가 아니더라도 신문이나 텔레비젼에 비친 적이 있는 내 얼굴을 기억하는 이를 택시 안에서 만나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나도 예의를 갖춰 합장하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얼마 되지 않아 그 여자분은 자신의 요금을 지불한 뒤 택시에서 내리면서 다시 2만 원을 기사에게 건네 주며, “이 돈은 제가 드리는 것이니 목적지까지 모셔다 드리고 나머지는 스님께 드리세요.”라고 했다. 그러더니 내가 뭐라고 말을 할 시간도 주지 않고 차에서 내리는 것이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스님인 나를 대접한다는 의미로 대신 차비를 내주는 그 마음이 송구하고 고마워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택시 기사가, “스님, 오늘 재수 좋습니다!” 라고 하며 미터기를 다시 꺾었다. 그때만 해도 택시 기본 요금이 6백 원 하던 때이다. 목적지인 김포 공항에 다다르자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내가 내리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미터기의 요금은 4천 원이었다.

“기사님, 아까 그 여자분이 뭐라고 하신 것 같은데… 내 듣기론 요금을 뺀 나머지 돈은 내게 주라고 하지 않으셨소?”

그냥 내리려고 하다가 나는 시치미를 떼고 앉아 있는 기사의 태도가 의아해 생각을 바꿔 물어보았다.

“차를 거저 탄 것만 해도 감지덕지이지. 내가 왜 돈을 거슬러 드려야 합니까?”

“아까 그 여자분이 그러지 않았소? 그 돈은 내게 준 것이니 요금 4천 원을 제외한 나머지 1만6천원은 내게 줘야 옳지 않겠소.”

“재수없네!”

그는 별 이상한 중 다 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곤 거스름돈을 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다. 사실 바쁘게 공항에 가려던 참이라 나도 이쯤에서 그와의 실랑이를 그만두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 기사의 비뚤어진 마음자리를 보니 그냥 지나칠 수 없었고 한편으로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강경한 태도로, “당신이 그렇게 우기니 정말 안 되겠소. 누가 옳은지 우리 한번 파출소에 가서 물어봅시다.”

그러자 이제까지 꼿꼿하게 대들던 그는 파출소에 가자는 내 말을 듣더니 그제서야 한풀 꺾여 수그러들기 시작하면서 마지못해 요금을 거슬러 주려는 것이다. 나는 그의 손을 거두면서, “기사 양반, 내가 돈 1만6천 원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오. 처자식 없는 중이 돈을 가진들 무엇하겠소. 내 단지 탐심을 내어 소유하려는 댁의 마음이 흉하고 밉게 생겨서 딱하다는 생각에 이리 할 수밖에 없었소.”라고 말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그가 욕심을 내게 된 것은 단지 돈 몇 푼 때문이다. 만약 합승한 여자분이 요금을 더 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 돈을 갖겠다는 고약한 마음을 먹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인간의 마음이란 소유의 욕망 때문에 얼마나 그릇되고 추하게 변하는 것인가!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얘기 한 토막을 들려 주었다.

두 사람이 예불을 드리러 절을 찾아갔다. 법당 안으로 들어서는데 한 사람은 신발을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고, 다른 한 사람은 신발을 들고 들어섰다.

예불이 끝나고 두 사람은 신발 얘기를 했다. 한 사람은 왜 신발을 법당 밖에 가지런히 놓고, 또 한 사람은 왜 법당 안으로 신발을 가지고 들어왔느냐는 얘기였다.

먼저, 신발을 밖에 두고 온 사람이 말했다.

“제가 벗어 놓은 신발을 보면 어떤 사람은 훔치고 싶은 욕망이 생길 것입니다. 그 욕망으로 마음을 어지럽힐 수도 있지만, 그 유혹을 이겨낸다면 마음의 공덕을 쌓은 일이 되지요.”

그러자 신발을 들여온 사람이 말했다.

“견물생심이란 말이 있듯이 물건을 보면 갖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내 신발을 보고 누군가 탐심을 일으켜 훔친다면 그는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나 역시 신발을 훔치게 만든 원인을 제공했으므로 간접적으로 죄를 짓는 결과가 되지요.”

이 두 사람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서로 이 사람의 말이 옳다. 혹은 저 사람의 말이 옳다고 하면서 논쟁을 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말이 다 옳다는 사람도, 두 사람의 말이 다 그르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결론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이때 이 광경을 지켜 보던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신발 따위에 욕심을 낼 사람은 없습니다. 저기 방금 들어온 저 사람은 당신네들처럼 신발 때문에 고민하지도 않고 거침없이 법당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사람은 맨발이기 때문입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모두 머쓱해져서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이야기를 마치자 그 기사분은 나를 쳐다보면서, “알겠습니다, 스님. 만약 처음부터 신발이 없었더라면 싸움이 일어나지도 않았겠지요…”라며 이 내용의 의미를 조금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기사 양반. 처음부터 신발이란 것이 없었고 또한 법당 안의 사람들이 모두 맨발이었다면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니 하는 논쟁 따위는 없었을 것이오. 신발이 있으므로 소유를 둘러싼 시시비비의 논쟁이 일어난 것이 아니겠소.”

“그렇긴 하지만요, 어차피 이 세상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맨발로 다닐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제 말이 틀리 것입니까?”

“그렇긴 하오만, 자신의 정당한 노력의 대가일 때 소유란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겠소?”

“…”

“내 얘기는 여기서 끝이라오, 자, 그럼…”

“스님, 잠깐만 한 가지 더 물어볼 말이 있습니다.”

차에서 내리려다 말고 나는 그 기사분을 돌아보았다.

“세상은 참 불공평한 것 같습니다. 전 죽도록 고생하면서 일하는데도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만 하는 겁니까? 제 주위를 둘러보면 착하고 양심 바르게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요. 그런데 그들을 보면 평생토록 가난에 찌들려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잘살게 되는 겁니까? 그 방법을 좀 알려 주시지요.”

“마음을 바르게 하고 공덕을 지어 가십시오. 그래야 다음 생에 잘살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이란 저절로 굴러오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지요. 지금 잘 못 사는 이유는 전생의 죄업에 대한 대가요, 지금 잘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쩌면 전생에서 지은 보을 타먹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기사님께서도 잘살고 싶으면 남에게 많이 베풀면서 복을 잘 지어야 하겠지요.”

나는 인사를 하고 택시에서 내렸다. 한참을 가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아직 무슨 생각이 남았는지 떠나지 않은 채 앉아 있는 기사의 모습이 멀리 보였다.

三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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