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심은 온갖 번뇌 가운데 있더라도 오염되지 않고 엄연부동한 심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것이 여래장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출세 여부에 상관없이 상주불변한 도리입니다. 다만 범부들은 여래장이 번뇌에 덮혀 있어 참된 존재를 알지 못하고 생사윤회의 고통을 받습니다. 어떻게 청정자성을 회복할 것인가. 핵심되는 법문을 경전 말씀을 통해 배워봅시다.
저때에 세존께서 바로 앉으시고 삼매에 드시어 신통 변화를 나투셨다. 연꽃이 있는데 큰 수레바퀴와 같고 그 수량 한이 없으며 색향(色鄕)을 갖추고 아직 피지 않았다. 수많은 연꽃에서 무량한 광명을 놓으면서 모든 연꽃이 일시에 활짝 피었다. 그리고 잠시 있더니 꽃잎은 모두 시들어 떨어졌다. 꽃 가운데는 화불이 가부좌하고 앉아 있어 각기 무수 백천의 광명을 놓았다. 일체 대중은 환희 용약하며 이것이 어떠한 인연인가. 의아해 했다. 어찌하여 무수한 꽃이 홀연히 시들어 버렸는가.
그때에 세존께서 대중의 의심하는 바를 아시고 금강혜 보살이 묻는 바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선남자여, 무수한 연꽃이 홀연히 시들고 무량화볼이 연꽃 속에 앉아서 대광명을 놓았나니 선남자여, 내가 불안으로 일체 중생을 보건대 설사 탐·진·치 모든 번뇌 가운데 있더라도 여래지(智), 여래안(眼), 여래신(身)이 있어 엄연 부동하니라. 일체 중생은 번뇌 몸 가운데 있더라도 여래장이 있어 항상 물들은 바 없고 덕상을 두루 갖추어 나와 더불어 다르 바가 없느니라. 여래는 중생의 여래장을 보고 이것을 피우고자 하여경법을 설하고 번뇌를 멸하여 불성을 나타나게 한다. 제불의 법이 이러하니 여래가 출세하든 안하든 중생의 여래장은 상주 불변하니라.”『대방등여래장경』
우리들은 다들 세상에 나서 성장하고, 공부를 하고 가르침을 배워서 스스로를 성장시켜가는 가운데 여러 가지 의심도 하고, 의심을 풀어가면서 성장하고, 성장하면서부터 새로운 의심을 또 만나고 그렇게 하면서 여러 가지 인격을 갖춘 우리들 자신으로 성장됩니다. 그 가운데서도 근본적인 의심이 있습니다.
‘근본진리가 무엇인가.’ 이 문제는 성장하면서부터 의심을 갖기 시작하는 것입니다마는 좀체 그 문제는 풀리지 않은 채 세월이 갑니다. 나이가 들고 사업에 손을 대고 보면 그쪽 일에 빠져서 무엇이 진리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냥 덮어놓고 지나갑니다.
더욱이 ‘참 나는 무엇인가.’ 자기 자신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 중심에 서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판단하고 선택하는 내가 무엇인가 하는 의심도 역시 젊은 한때의 유행병처럼 누구든지 한번은 앓다가는 해결을 못한 채 그대로 그렇거니 저렇거니 하고 세상일에 매여서 그냥 지나가고 맙니다.
그러나 『여래장경』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명확한 해답을 해주고 계십니다. 착한 일, 홰 착한 일을 하는가. 착한 일은 무엇인가. 착한 일을 할 이유가 무엇인가. 착한 일을 하면 자기가 기뻐지기 때문에, 아니면 칭찬받기 때문에, 세상에 명가가 오르기 때문에, 아니면 그밖의 어떤 소득이 있기 때문에,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어던 보상심리에 의해서 얻어지는 그런 대답가지고는 만족이 되지 않습니다.
왜 착한 일을 하는가. 나는 무엇이길래 착한 일이라고 하는 권이 붙인 이름 밑에 승복해야 하는가? 아마 형제들도 이런 의심을 품은 적이 다들 있었을 겁니다. 다행히 해답을 다 얻으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제게 있어선 오랫동안 해답을 얻지 못하고 덮어놓고 다른 방면의 책을 읽고 생각하고 지내다 보니 그 문제가 머리를 들고 나왔습니다. 오히려 이 문제를 다 잊어버리고 포기하고 말았을 때 그리고 선방에 가서 참선이라고 구경을 하고 있을 때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형제들은 가장 진귀한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소홀히 넘어 갈 수밖에 없었던 가슴앓이를 일시에 풀게 됐다는 것은 여간 다행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 모인 여러 형제들 모두가 아마 과거행부터 깊은 인연이 있어서 이러한 근원적인 문제, 생명의 근원에 관한 문제, 진리의 근원에 관한 문제, 이 문제를 풀어 보고자 함께 노력했다가 이번 회상의 부처님 법문을 만나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는 것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느 점으로 봐서나 경하하며, 반갑고 고마운 형제들게 새로운 존경을 표합니다.
『여래장경』에 대해서는 기왕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이 경을 설하신 경위를 읽어보면 부처님께서는 저희들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 하고 참 자기존재를 알지 못해서 헤매고, 인생의 삶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참된 삶이며, 진실한 삶인가. 물량획득이나 많이 하고 권세나 쌓아올리고, 든든한 안전 보장이나 쳐놓으면 그것이 값있는 것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품고 있는 의심을 당시 대중들에게도 풀어주고 오늘날 우리에게까지도 다 풀어줄 수 있는 것을 부처님은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경에서는 부처님께서 성불하신 지 십 년만에 이 경을 설했다고 그랬습니다. 아마 오늘날에 경전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대승경전이 10년 후에 설해졌다는 것으로 보지 않고 사뭇 그 후에 설해졌다는 것으로 보지 앟고 사뭇 그 후에 설해지지 않았겠는가. 아함 12년 방등 8년, 그러니까 20년 이후가 아니겠는가 하고 학자들 가운데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에는 명백하게 10년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범부들이 모두가 진실한 자기가 무엇인지 모르고, 무엇이 참된 길인가 알지 못하고 헤매고 있고, 헤매면서도 그 일을 찾지 못하고 고통의 수레바퀴를 돌고 있는 그것을 지켜보면서 고통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서 진리의 바른 깨달음을 깨달아서 참으로 진리본연의 자기를 살고 진리본연의 국토실현을 하고 살도록 부처님은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은 부처님께서는 법문을 시작하시면 예를 들어서 『금강경』의 경우에는 수보리 존자가 머저 일어나서 부처님께 예배드리고 법문을 청하지 않습니까. 의심나는 것을 묻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부처님께 예배드리고 법문을 청하는 자가 나오기 전에 부처님이 먼저 법문에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한번은 부처님께서 많은 대보살들이 모이셨고, 많은 비구들이 모이셨고, 많은 대중들이 모여있는데 자리에 오르시더니 선정에 드시어서 신통을 나투십니다. 신통력을 나투시는데 신통을 나투시는 경계가 어떤 것인가 하면 거기 대중이 보이게 가득한 연꽃밭을 펼쳐 놓습니다. 연꽃이 끝없이 하늘 끝까지 눈 닿는 끝까지 피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연꽃은 연꽃봉우리가 맺혔을 따름이지 피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너디 잠시 연꽃봉우리가 피면서 백천광명이라고 했습니다마는 여러 가지 색깔의 찬란한 큰 광명을 띄웁니다. 광명을 띄우고 꽃이 피더니 얼마 머물지 않아서 곧 꽃이 시들어서 훌훌 지고 맙니다. 그리고 꽃이 진 자리 그 자리에는 부처님이 앉으셔서 꽃자리마다 광명을 놓고 계십니다. 이것이 경의 시작입니다.
이와 같은 경계를 보고 거기 있는 대중들이 다들 의심을 합니다.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무슨 뜻이 있는가. 어재서 꽃은 곧 피었다가 곧 진단말인가 하고 의심을 품습니다. 여러 대중이 의심을 품는 것을 알아 보고 그 자리에 있던 금강혜보살이라는 분이 일어서서 부처님께 예불드리고 그 뜻을 묻습니다. 그러면서 이 경이 시작됩니다.
부처님께서 아마 연꽃에 대해서 당신이 신통으로 나투시고, 그 나투신 자리에 부처님이 앉아 계셔서 광명을 놓고 계시는 그 사항을 대중이 다 봤을 때 부처님은 입을 여셔서 너희들은 보았느냐 이 꽃을, 그리고 연꽃에 앉아 있는 여래광명을….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에는 그렇게 적혀 있지는 않습니다.
꽃이 피고 꽃이 지고 다시 그 자리에 부처님의 광명은 찬란한 채 거기 앉아 계시다가 꽃이 피고 꽃이 머물고 꽃이 진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지금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이 뜻을 해석해보면 바로 우리의 세간사입니다.
이 육체, 이 물질, 우리가 헤아릴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은 잠시 머물러 있다가, 잠시 꽃피었다가 광명을 놓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가 했더니 바로 소리없이 훌훌 져버립니다. 그러나 시들은 그 자리에 여래광명은 온전하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신통력을 보이신 이 대목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육체적인 현상, 물질적인 현상, 감각적인 현상, 이 모두가 실로는 끊임없이 변해가는 것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변해져서 다 멸해 없어진다 하더라도 실로 부처님의 진리광명은 변함이 없어서 본래로 피기 전에도 거기 빛났고 꽃이 피었을 때도 거기 빛나고, 꽃이 시들어서 떨어진 후에도 부처님의 광명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빛나고 있다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 경에는 부처님의 진리광명을 여래장이라고 했습니다. 여래장이라 하면 부처님이 그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일반적으로 여래장은 불성이라는 뜻과 같이 씁니다. 불성, 부처님의 성품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다만 특이한 것은 여래장은 번뇌와 함께 한 불성, 번뇌에 가리운 바 되어 있는 불성, 그러니까 범부들이 가지고 있는 불성은 번뇌와 함께 있기 때문에 여래장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여래장은 불성 그 자체로 설명되고도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꽃이 피고 꽃이 지고 찬란한 광명을 놓으시는 부처님은 거기 앉아 계시고. 그런데 이 부처님이 앉아 계셔서 광명을 놓고 있는 사실, 그것이 바로 여래장입니다. 부처님이 당신의 깨달은 눈으로 볼 때에 일체 중생들이 탐·진·치 삼독에 물들어서 거기에 결박되어 있는 것 같아도 실로 부처님 눈으로 봐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모든 중생들은 스스로 부처님의 눈, 부처님의 지혜, 부처님의 몸, 그것을 갖추고 부처님의 온갖 덕상, 덕스러운 요인들을 모두 갖추어서 여래와 더불어 다를 바가 없다. 부처님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까 모든 중생들은 우리들이 중생이라고 보지만 부처님의 눈으로는 중생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삼독심이 부글부글 끓고 중생성이 왕성하게 나타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부처님 눈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몸, 부처님의 지혜, 부처님의 눈이 갖추어져 있어서 엄연부동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여래의 몸, 지혜, 덕상, 덕성이 갖추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내부에 있는 부처님의 덕성, 그 모두가 완전히 갖추어져 있습니다. 너와 더불어 다를바 없다고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보면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을 중생으로 보지 않으시고 실로는 바로 깨달은 부처님으로 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고통의 결과를 수이하고 있는 것같이 보여도 부처님은 바로 찬란한 공덕광명 가운데 자재한 중생성을 봅니다. 부처님 보시는 바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떤가. 우리들은 그와 같은 자기 자신에게 갖추어져 있는 여래광명, 부처님의 변치 않는 광명은 보지 못합니다. 태어날 때 얻지 못하고, 성장할 때 보지 못하고, 늙어가면서 보지 못하고, 늙어서 병나서 아주 죽은 후에도 보지 못합니다. 본래 나기 전에 거기 있었고, 나서 성장하면서 거기 있었고, 저물어서 이 땅을 떠난 후에도 거기 있어서 부처님의 광명, 부처님의 위신력이 풍족한 여래장은 원래로 변해진 것이 없건만, 부처님이 계시든 계시지 않든 영원히 거기 부처님의 광명은 변함없건만, 우리들은 그걸 보지 못하고 그냥 겉모양만 봅니다. 그것을 우리는 여기서 다시 살펴야 하겠습니다.
제가 오늘 이 법문에서 특별히 생각되는 것은 근본진리가 무엇이냐. 참으로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불광에서는 반야바라밀 수행을 하고 반야바라밀을 염합니다마는 바로 그 반야바라밀입니다. 참으로 있는 것은 반야바라밀뿐입니다. 참으로 았는 것은 부처님 광명뿐입니다. 참으로 있는 것은 부처님의 완전구족한 진리 덕성뿐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있는 것입니다. 영원히 있는 것입니다. 변치 않는 것입니다. 범부에게나 어떤 악당이라고 이름 지어진 사람에게도 변함없이 모두에게 부처님 공덕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탐·진·치 삼독의 바다가 우글거리더라도 부처님의 진리공덕이 완전한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렇게 있는 것은 진리광명이요, 진리 위덕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 한 사람의 생명의 진실이 그럴 뿐 아니라 우주적인 우주를초월한 실재의 근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문제의 해결이 납니다. 왜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너그럽게 살아야 하고 왜 좋은 일을 하고 살아야 하는가. 필경 이 땅의 평화는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가. 이 땅에 정토를 이룬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인가. 그것에 대한 대답이 한꺼번에 나옵니다.
光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