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법문은 화신불의 부사의한 공덕, 부처님의 본래 형상이 부처님이신가, 목소리가 부처님이신가 어떠한 눈으로 헤아릴 수 있고 마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부처님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다 아니라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만약 형상이 있는 것, 생각으로 잡을 수 있는 것, 그것을 부처님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하면 그것은 사도에 빠진 것입니다. 불법은 형상에 있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형상을 넘어선 형상이 아닌 진실, 무형상, 무한정, 무기정성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형상을 초월하는, 형상을 넘어선 그러한 진리가 부처님이기 때문에 이 부처님이 중생 곁에 오셔서 중생으로 하여금 이해하고 중생으로 하여금 승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불가불 방편이 필요하지요. 거기서 나타나는 것이 화신입니다. 부처님이 중생에게 알아 듣게 하기 위해서 중생으로 하여금 이해시키기 위해서 중생 곁에 오시는 모습이 화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대자비에서 화신을 나타내시고 화신을 통해서 당신이 우리에게 비춰주신 은혜의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삼신(三身)이라 그러지요.
첫째는 근본이신 법신(法身). 법신이 부처님이시고, 부처님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나투신 모습이 화신이며, 그리고 부처님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완성을 보이기 위해서 한량없이 닦고, 또 일체를 완성시켜 닦으셔서 이루신 몸을 보신(報身)이라 그럽니다. 부처님의 일체 완성의 몸이라고 하면 바로 그 보신이 일체 완성의 몸, 바로 법신과 상응하는 완전성을 지니고 있는 부처님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러한 법신과 상응하는 완전성을 지니고 있는 보신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화신을 통해서야 비로소 부처님을 가까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응신(應身)입니다. 중생의 부르심에 응해서 중생의 원함에 인해서 부처님께서 응하셔서 나투시는 몸을 응신이라고 합니다. 응신과 화신, 이 응신과 화신이 우리 가까이 오셔서 불설을 하시고 법을 설하시며 우리를 깨우쳐 주십니다.
역사 속에 들어오신 부처님은 모두가 응화신입니다. 그런데 우리 역사상에 뛰어들어 오신 최초의 화신불은 석가모니불이지요. 당신은 법신이신데 우리를 교화하시고 우리를 알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귀에 우리의 손에 우리의 감각 속에서 인식시킬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에 상응한 몸을 나투신 것이며, 그 몸이 바로 석가모니불이시라는 것을 이해하시면서 오늘의 법문에 들어가시면 좋겠습니다.
모든 화신불은 각각 32상 80종호를 갖추시고 모든 보살들과 이승(二乘) 범부들을 위하여 마땅한 바를 따라 삼승(三乘) 묘법을 설하신다. 모든 보살들을 위해서는 6바라밀을 설하여 무상보리를 얻게 하시며 벽지불을 구하는 자에게는 12인연법을 설하시고, 성문을 구하는 자에게는 4제법을 설하여 생로병사를 벗어나 열반을 얻게 하시며 그밖에 중생을 위해서는 인천교(人天敎)를 설하여 인천의 묘과를 얻게 하신다. 이와 같은 응화신불(應化身佛)은 비록 별도를 나투시더라도 불신은 상속하여 항상 머무느니라.『십지관경 보은품』
부처님께서 화신으로서 이 땅에 나투시는데 어떠한 모습으로 나투시는가? 부처님이 이 땅에 나투실 때는 32상과 80종호를 나투신다 했습니다. 32상 얘기는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완전하신 상호, 완전한 위의, 완전한 덕성 표현의 모습들, 그것을 32상 80종호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32상 80종호는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가. 그것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모습이, 평상 갖출 수 있는 모습이 32상이라 그러면 우리가 불가불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습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은 미용술, 수술 등으로 자기 용모를 다듬고 몸매 가꾸기를 값비싼 줄도 모르고 합니다마는 32상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32상 80종호라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덕행을 쌓아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형상하는 바 그 근본은 마음 상태 여하가 형상을 결정합니다. 이 몸이 이 땅에 몸을 받아서 금생에 태어났다고 하는 것도 마음의 정도에 따라서 인생을 선택했고, 인생 가운데에서도 우리라고 하는 이 정도의 인간의 몸을 받은 것처럼 그에 못지 않게 우리의 모습, 얼굴에 어떤 모습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용태가 어떻다 하는 모두가 역시 자기 마음 상태에 달려 있기 때문에 마음을 여러 가지로 닦음으로 인해서 겉모습이 달라지는 것이지요.
32상 역시 그렇습니다. 경전을 살펴보면 부처님은 그 몸이 한길이나 되는 금색광명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그러는데 부처님의 32상 가운데 하나가 그것이지요.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인가. 그것은 평소에 의복이나 음식이나 그밖의 생활도구나 장엄물 같은 그 모두를 기쁜 마음으로 어려운 사람에게 도와주고, 항상 자기 마음 가운데 그 베풀어준 것에 대해서 만족하고 감사하며, 결코 아까워 하거나 인색한 마음이 없이 항상 너그럽게 베풀어주고 기쁜 마음으로 도와주는 이 마음 상태를 지닌 사람, 이것을 닦는 사람은 비로소 그 몸에서 광채가 난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이 광채는 부처님만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제각기 그 마음에 상응하는 광(光)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로라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 광은 사람이 제각기 마음 상태가 다른 것처럼 광의 빛깔도 다릅니다.
마음이 밝고 깨끗하고 청결하고, 마음이 깊은데 안정되어 있으며 착한 마음이 가득한 그 사람은 밝은 광을 띱니다. 그밖에 어두운 생각들, 탐심이나 거칠은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는 어둡고 붉은 색깔이 보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떤 사람이 보느냐. 지금은 카메라로 찍을 수 있게 됐다고 들었습니다마는 카메라로 찍기 전에도 마음에 안정을 지켜가지고 깊은 곳의 삼매를 이루고 있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몸의 빛깔을 본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본 빛깔과 그 사람의 마음 상태의 차별같은 것을 볼 것 같으면 역시 마음이 안정되고 착하고〔착하다고 하는 것은 자기 욕심 안 부리고, 남하고 대립하지 않고 모두가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깊은 삼매 가운데 있는 사람일수록 그 몸에서 나는 분위기가 밝습니다. 밝은 광명이 납니다.
부처님이 금색광명을 띠었다 하는 것은 깊은 생명의 청정성을 지니고 있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님들이 입고 있는 회색 가사가 있는데 회색이라 하면 색깔을 문지른 것입니다. 붉은 것도 아니고, 흰 것도 아니고, 푸른 것도 아니고, 먹만도 아닌 빛깔을 뭉글어뜨려서 어느 빛깔이 아니다 하는 무정색을 만들어버린 것이 회색이라 합니다.
그러나 전해 내려오는 옛날의 가사의 빛깔만 봐도 금색가사가 있고 보라색 가사가 있고 자주색도 있고 보면 그런 자주빛, 보라빛, 금빛 이런 빛깔들이 모두가 안정된 깊이 있는 생명의 빛깔이라고 이해가 될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금색신을 이루고 있는 것은 당신이 평소에 그와 같이 대립없는 보시신, 그 모두가 함께 한 따뜻한 마음, 거기에 안정된 깊은 마음이 당신의 금색신을 성취한 것처럼 우리들도 아마 그럴 겁니다.
우리들도 그 정도는 이루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렇게 마음 씀씀이에 따라서 때로는 금색신도 되고 때로는 흑신도 되고 때로는 그밖에 거칠은 빛깔도 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생활에 굳어져 버리면 굳어진 상태로 인간의 성품이 굳어져서 그 사람의 고유의 개성있는 빛깔을 가지지 않겠는가 하는 그런 해석이 가능하지요.
하여튼 자비한 마음, 인색하지 않는 마음, 기쁜 마음으로 남을 돕는다고 하는 이것이 그 사람의 분위기를 밝게 만듭니다. 부처님과 같은 금색신의 광명과 유사한 빛을 띠우리라 하는 것을 우리들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부처님의 32상 가운데는 치아가 40치아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 40치아의 원인이 무엇인가? 대개 범부들은 이가 32개지요. 상하 16 개씩 32 치아일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화합과 관계가 있습니다. 입을 놀리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말 저말 해서 시비를 일으킨다거나 원망과 미움으로 대립된 관계 속에 있더라도 서로 화합하고 평화한 말로써 서로를 돕고, 평소에도 사섭법, 즉 사랑스러운 말을 쓰고 이로운 행을 하고 서로 도와주는 이러한 행을 할 때 그리고 끊임없이 평등한 자비를 닦을 때 40치아가 되고 치아 가운데서도 흰옥 같은 , 흰눈 같은 청결한 치아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가 맑지 못하거나 그 수가 40치아가 되지 못하다는 것은 그만한 덕성을 우리가 평소에 수행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부처님의 머리는 정상이 솟아 올랐습니다. 그래서 육계라 그럽니다. 살상투라 그러지요. 부처님의 상호는 머리가 솟아 오른 것으로 되어 있는데 솟아 올랐다는 것은 수행과 관계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수행을 하고, 자기가 배운 바를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주고, 다른 사람이 잘 닦는 것을 보면 환희하고 찬탄하며 항상 자비한 마음으로 많은 사람을 돕는 사람은 머리에 정상이 봉긋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특히 십선을 행합니다. 십선은 열 가지 착한 행으로 십악을 행하지 않는 적극적인 행입니다. 입으로 네 가지, 몸으로 세 가지, 뜻으로 세 가지가 있습니다. 입으로 네 가지라 하면 기어, 망어, 양설, 악구, 몸으로 세 가지라 하면 산목숨 죽이는 것, 남의 것 훔치는 것, 그리고 삿된 음행하는 것, 그리고 뜻으로는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생각, 이런 것들을 부리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즉 십악을 행하지 아니하면 십선이 됩니다. 이 십선을 행하는 데서 정골이 융기하는 것입니다.
光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