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를 알았을 때 萬法이 내 法이다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또 하나의 경계가 나타납니다.

산이 물이 되고 물이 산이 되는 경계, 산도 공했고 물도 공했다는 경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경계, 그 한 계단을 넘어가면 ‘할’ 소리로 모든 것을 씻어내고 내 마음을 텅 비게 한다면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라는 그러한 경계가 나옵니다.

그것을 수용(受用)의 경계라 합니다. 받을 수자, 쓸 용자, 실체와 실상과 실용을 체상용(體相用) 이라고 합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세계는 변하는 무상의 세계이기 때문에 망각의 세계입니다. 망각의 세계를 지나게 되면 진공의 세계가 나옵니다. 진공의 세계를 실체라 합니다.

실체의 세계를 지날 것 같으면 보고 듣고 하는 실상의 세계가 나오고, 그 진리의 세계를 내가 어떻게 수용해서 올바른 생활을 하느냐, 올바른 인생과 올바른 길을 찾고 올바른 생활을 하느냐, 이런 것을 수용의 세계라 합니다. 이것을 체상용(體相用)이라고 합니다.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라는 세계가 수용의 세계입니다. ‘산도 공했고 물도 공했다’라는 것은 《반야심경》과 같이 공의 세계입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는 것은 실상의 세계요,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라는 것은 수용의 세계라고 보겠습니다.

지금 불교는 차차로 세계 종교로 되어가고 세계 사람이 불교를 배우기 위해서 한국으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한국불교의 보리달마로부터 불립문자 직지인심이라는 마음을 깨치는 법을 가르쳐 주는 선법을 배우러 세계각국 사람이 우리 나라를 찾아오고 있습니다.

배우기 위해서 말로 하는 것은 얼마든지 잘합니다. 서양사람들은 팔만대장경을 몇 년 동안 배워야 합니다. 강단에 가도 4, 5년은 배워야 하는데 팔만대장경이 책자로 나왔습니다. 서양 사람들을 위한 팔만대장경은 하루 정도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문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고산스님은 한국에서 유명하신 강백스님입니다. 평생을 강의하는데 어려운 한문을 배워서 한국말로 알게 되면 어려운데 영어, 독일어나 불란서말로 된 것은 한문이 없습니다. 우리는 한 강단에 가서 4, 5년 배울 것인데 서양 사람들은 일 주일이면 팔만대장경을 다 읽습니다.

머릿속에 다 들어간다는 것이지요. 그 사람들이 배우고 나서 무엇을 하느냐면 참선을 합니다. 가는 길을 알았으니까 내 마음을 한번 찾아봐야겠다 해서 참선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불교에 많이 귀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승불교도 있고 대승불교도 있지만 한국불교가 세계각국에 얼마나 퍼져 있느냐 하면 110개의 절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한국불교를 배우고 있습니다. 몇 년 간에 한국불교가 부쩍 늘어난 것은 교나 율이나 염불이나 진언이나 또 선이나 전체가 하나가 되어서 스스로 마음을 깨달아서 성불을 하자는 데 목표가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반야심경》을 하거나 무엇을 하거나 염불을 하거나 목적이 뚜렷합니다. 모두가 하나인 것입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 그러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 한국불교이기 때문에 ‘통불교’라고 합니다.

그러나 세계를 판치고 있는 일본불교는 선하면 선, 염불하는 건 염불, 남묘호남교면 남묘호남교만 고집합니다. 남묘호남교를 하는 사람은 선은 천마요, 염불은 지옥이라고 평합니다.

다른 파를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불교는 그러는 법이 없습니다. 설사 기독교라도 기독교 옳다 이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그것이 누구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로다. 그럼 ‘나’는 누구냐. 모른다. 나는 길이요, 그럼 길은 무엇이냐. 모른다. 또 진리가 뭐냐하면 모른다. 나는 길이요 하는 것은 대도를 말합니다.

이와 같이 본체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실상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무엇인가 하면 바로 실상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하늘은 푸르고 물은 흘러가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한테 밥을 주고, 목마른 사람한테 물을 주는 것이 올바른 생활입니다.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종교의 궁극의 목적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속에 들어있는 커다란 뜻에 있습니다.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 적에 기독교나 불교나 모든 것이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고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느냐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불교의 특징입니다. 만법이 유일하고 일귀하처이니,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가 어디로 돌아가는가.

이것을 알았을 때 만법을 알게 될 것이며 하나를 알게 될 것이며, 하나를 알았을 때 만법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게송을 하나 읊고 법문을 해나갑시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데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라는 소식을 알아야 돌아가는 것을 알 것이며 하나를 알았을 때에 만법이 내 것이 됩니다.

만법이 어디로 돌아가는가. 하나는 또 어디로 돌아가는가. 돌아간 그 하나는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닌데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갑니다.

崇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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