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백낙천(白樂天)이 조과(鳥寡)선사를 찾아가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입니까?”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착한 일만 하고(諸惡莫作 衆善奉行), 그 마음을 깨끗이 쓰면 그것이 불법이다(自淨其意 是諸佛敎).”
그러나 백낙천이 껄껄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까짓 것이야 3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닙니까?”
“3척동자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80 노인도 실천하기는 어렵다.”그렇다. 불법은 행하는 데서 지혜가 생긴다.
아는 것은 아는 데서만 그치면 식(識)쟁이가 되고, 그나마 아는 것에도 나아가지 못하면 무식쟁이가 되고 만다.
그러니 불교는 믿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다. 이미 믿는 것이 확실해졌다면 실천해야지 실천하지 않는 것은 그림의 떡이다.
진리를 알아내야만 내 인생이 정립되고 우주관이 확립된다.
나는 왜 여기에 있으며, 이 세상에 태어나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말이다.
세계에는 종교도 많고, 사상도 많고, 지식도 많다. 그 모든 종교가들, 사상가들, 지식쟁이들이 각기 자기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깨닫고 보면 성경만 진리이고 불경만이 진리인게 아니라 개·돼지·소·닭 어느 것 하나 진리 아닌 것이 없다.
물소리·자동차 소리·비행기 소리·기차 덜커덩거리는 소리·마차 흔들리는 소리, 이 모든 소리가 진리 아닌 것이 없다.
그러므로 옛사람들은 상여 나가는 소리를 듣고 인생을 깨쳤고, 어떤 스님은 청소하다가 주운 돌멩이를 버리다가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도를 깨달았으며, 서산대사 같은 이는 닭소리를 듣고도 ‘발백심비백(髮白心非白)’의 소식을 얻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깨닫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자기의 입장과 처지를 분명히 깨닫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알면 그 사람이 도인이요, 철인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시급하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닭을 보지 않고 자동차를 보지 않겠는가 만은 그것을 보고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깨달을 수 있을 만한 마음의 준비가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배부른 사람에게는 백 가지 음식이 있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면 마음의 준비란 무엇인가?
나를 버리는 일이다. 나를 내세우면 바람이 오다가 먼저 부딪치므로 바람맞는 사람이 된다.
하지만 내가 없다면 허공 따라 흘러가는 바람소리에 흥겨운 노래가 흘러나올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 하는 바람소리에 흥겨운 노래가 흘러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찾아라.” 고 한 것이다.
모든 제자들이 소크라테스를 향하여
“당신은 당신을 아십니까?”하고 물으니,
“나는 나를 아직 모르지만 그 모른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네.”라고 하여 부지(不知)의 철학을 남겼다.
루소도 말하지 않았던가. “대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말이다.
스펜자도 “제1원리를 깨달으라.”고 말했다. 그 제1원리가 무엇인지는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문제를 삼고 있는 바이지만 제1원리는 곧 원점이요, 근본이다.
근본에 돌아가면 모든 것과 하나가 되고 원점에 이르면 피차가 둘이 아니므로 ‘상구보리 하화중생’이 둘이 되지 않는다.
자기완성과 불국정토, 이것은 불교의 이상인 동시에 모든 인류의 이상이며, 희망이다.
모든 인류가 너와 나를 함께 깨달아 절대적 자유와 절대적 평등 속에서 절대적 안락세계를 이룩할 때 불교의 목적은 달성되는 것이다.
崇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