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계이야기] 1. 불살생(不殺生) – 살생계는 꼭 지켜야만 하는가?

이제 마지막으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한가지 의문을 제기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살생계는 지켜야만 하는가?’ 하는 것이다.

출가 수행하는 스님의 경우는 남을 해롭게 한다는 생각을 멀리 여의었고 그와 같은 환경 속에 살고 있으므로 살생계를 지키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사회생활을 하는 재가중(在家衆), 특히 형벌을 담당하는 관리, 군인, 판사, 검사, 경찰관 등은 직업상 살생을 피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죄가 있는 이에게 벌을 주지 않고서는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할 수 없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어찌해야 하는가? 중국의 홍찬스님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고 있다.

“혹 한 사람을 죽여서 한 마을을 구하고, 많은 사람을 죽여서 큰 고을이나 한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때 훌륭한 방편을 구사하되,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야 할 것이다.”

실로 형편에 맞추어 슬기롭게 베푸는 방편은 중생을 이롭게 하는 자비행이 된다. 가령 나쁜 도적이 재물을 탐하여 많은 사람을 죽이려 하거나 덕이 높은 선지식이나 불보살을 해하려 할 때, 또는 무간지옥에 떨어질 극악무도한 짓을 하려는 것을 보았을 때, 대비심을 일으켜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가 있다.

“내가 만일 저 악독한 자의 명을 빼앗는다면 나는 틀림없이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일 지금 저 사람의 목숨을 끊지 않는다면 저 사람은 무간지옥에 떨어져 한량없는 고통을 받을 무거운 업을 지을 것이다. 차라리 내가 지옥에 떨어질지언정 저 사람으로 하여금 지옥 가운데 지옥인 무간지옥의 고통을 받게 할 수는 없다.”

이와같은 착한 마음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 사람의 목숨을 끊었다면, 그 행위는 결코 살생계를 범하였다고 보지 않는다. <다라니경>의 말씀을 살펴보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만일 무간지옥에 떨어질 다섯 가지 큰 죄를 짓거나 대승경을 비방하거나 나라의 역적을 도모하거나 정법을 어지럽히는 유의 사람을 보거든 자비로써 연민을 일으켜 마땅히 항복받을 법을 지어야 하느니라.”

이와같이 이 세상에 정법을 실현시키기 위해 살생을 하거나, 그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착한 마음과 자비심에 입각하여 살생을 하였다면 계를 범한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열반경>에 나오는 한 편의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자.

과거세 아득히 먼 겁(劫) 이전에 유덕(有德)이라 불리는 국왕이 있었다. 그 당시 아주 질이 나쁜 비구들이 진심(嗔心)을 일으켜 칼과 몽둥이 등의 흉기를 가지고 덕이 높은 선지식을 해하려 하였다.

왕은 정법을 보호하기 위하여 곧 5계를 버리고 나쁜 비구들을 물리치고 선지식을 구할 수 있게 되었지만, 왕 또한 온몸에 상처를 입었다. 그 때의 상처로 왕은 곧 죽게 되었고, 동방의 부동불국(不動佛國: 곧 아촉불의 세계)에 태어나서 부처님의 제일 큰 수제자가 되었다.

이야기를 마친 부처님께서는 이 사건과 관련된 삼세인과(三世因果)를 말씀하셨다.

“그 때의 왕이 지금의 나이고 그 때의 법사가 가섭불이시다. 내가 오늘날 갖가지 상호(相好)를 얻어 거룩하게 장엄하였고, 법신을 얻어 무너짐이 없는 몸을 성취한 것은 이와같이 정법을 보호한 한량없는 공덕의 과보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이 <열반경>이야기는 곧 계를 지키는 데 있어 지키고 범하고 열고 닫는 지범개차(持犯開遮)의 원리가 있음을 보인 것이다.

선량한 사람을 보호하고 악한 사람으로 하여금 한 번이라도 죄를 덜 짓게 하는 것이 불자의 자비심이며, 참으로 계를 잘 지키는 이라고 할 수가 있다.

만약 극악중생이 있어 수많은 대중을 함부로 죽이려 하거나 재물을 욕심내어 선지식이나 대덕을 해하려 하면, 마땅히 큰 자비심으로 악한 사람이 저지르게 될 무간죄업을 막아야 한다. 이와같이 연민하는 마음으로 악한 사람의 목숨을 끊는 것은 범계가 아니며, 그 근본정신은 보살정신에 입각한 계율의 지범개차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많은 중생이나 선량한 대중, 선지식을 보호하기 위하여 살생을 한다고는 하지만, 그 때의 상황이 꼭 그와같은 살생을 범할 상황인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다. 그러므로 상당한 지혜와 인연을 살필 만한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연민심으로 임해야 하며, 조금이라도 탐욕심이나 진한심(嗔恨心)을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실로 불살생계에 담긴 참뜻은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생명을 존중하고 생명의 가치를 깨달아, 서로 돕고 서로 살리며 살아가도록 하는 데 있다.

서로의 생명 속에 숨겨져 있는 능력이 매몰되지 않도록 하고, 숨은 능력이 잘 발휘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면, 그 노력 자체가 깨달음의 씨가 되어 무한한 행복과 자유라는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부디 우리 불자들이 이 불살생계를 잘 지켜, 잘 살고 잘 살리는 삶을 이루게 되기를 축원해 마지 않는다.

日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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