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4. 아끼고 가꾸어야 할 보배

이상의 이야기는 사람들의 세상사는 모습을 일부다처제 시대의 경황에 비유한 것으로, 이야기 속의 넷째 부인은 세상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돈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잠을 줄여가면서까지 몰두를 한다. 사탕이나 꿀물처럼 당장 우리 자신을 달콤하게 만드는 것이 돈이요, 없으면 당장 비참함과 무력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한평생 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돈이 필요불가결한 것이기는 하지만, 돈은 결코 나의 진정한 반려자가 될 수는 없다. 넷째 부인이 “당신이 나를 사랑했지 내가 당신을 사랑한 줄 아세요?”라고 하였듯이, 사람이 돈을 좋아했지 돈이 사람을 좋아한 것이 아니다. 돈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정신없이 달려들었지, 돈이 사람 좋다고 달려드는 경우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돈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은 것이 돈이다. 물론 돈만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이성교제, 음식, 명예도 다를 바가 없다. 남녀관계도 밝히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잘 먹고 잘 입는 것도 끝이 없고 명예나 권력 또한 누려도 누려도 한이 없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점검해보자.

‘나는 지금 참된 자기를 팽개치고 돈의 노예, 쾌락의 노예, 명예나 권력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지나 않은지?’

셋째 부인은 아들, 딸, 집안 식구, 친척 등을 가리킨다. 부모들은 자식들 때문에 평생을 가슴 조이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대신 아파주거나 대신 울어주거나 대신 죽어줄 수는 없다. 내가 죽은 다음 화장막의 불 속이나 무덤 속까지 함께 들어갈 가족은 결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족, 친척이란 모두가 보이지 않는 업으로 맺어진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족에 대한 도리는 다하되, 지나친 기대나 집착을 가져서는 안된다. 오직 내가 베풀 수 있는 사랑, 서로를 살리는 사랑을 나누면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둘째 부인은 무엇인가? 바로 나의 몸, 이 몸뚱이이다. 이 몸뚱이는 아무리 잘 먹이고 잘 돌보아도 나이 60이 되기 전에 고물자동차가 되어버린다. 단 10년이라도 더 끌고 다니고 싶다면 곱게 곱게 몰아야지, 험한 길 비포장도로로 끌고 다니면 금방 고장이 나 버린다.

그런데 이 몸뚱이가 죽고 싶어 죽는 경우는 세상 천지에 없다. 수명이 다하고 세상 인연이 다하였으니 할 수 없이 죽어갈 뿐이다. 이렇게 할 수 없이 죽는 것이지, 죽음이 좋아서 사라져가는 몸뚱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서 둘째 부인이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지만, 당신이 가자고 하니 할 수 없이 따라간다.”고 한 것이다.

이제 본부인에 대해 알아보자. 본부인은 곧 도를 가리킨다. 돈과 정반대의 입장에 있는 도가 본부인인 것이다.

그렇다면 도가 무엇인가? 마음 닦는 것이 도이다. 나의 참된 마음자리를 살펴보고 자성불을 잘 돌보는 것이 도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1년 365일 중 단 하루라도 마음자리를 가꾸며 살아가고 있는가?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자리를 괄시하고 살아간다. 매일같이 돈과 가족과 몸뚱이를 돌보기에 급급하여 마음자리 따위는 아예 무시해버린다. 곧 눈에 보이는 각종 번뇌를 좇아 밖으로 밖으로 헤맬 뿐이다.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도 잠시 보이지 않으면 온동네를 돌아다니며 찾기 마련인데, 참된 주인공인 마음부처가 희노애락, 우비고뇌 속에서 수없이 상처받고 시달려도 찾아보기는커녕 한차례 다독거려주는 일조차 마다하며 살아 가고 있다.

왜 우리들의 삶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왜 중생들은 끊임없는 행복, 더 큰 자유를 추구하면서도 고통의 삶을 거부하지 못하는 것일까? 피하고만 싶은 고난이 닥쳐와도 무조건 당하고 무조건 받으며 사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이유는 시작없는 옛적부터 금생에 이르기까지 나의 참된 마음자리를 등지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둘째, 셋째, 넷째 부인에게 차례로 빠져서 조강지처인 본부인을 아예 돌아보지도 않는 삶, 몽상 속에 빠져 거꾸로 사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내 마음의 청정한 자리, 나의 자성불, 내 스스로 갖추고 있는 부처님 자리를 등져버린 채 결코 주인이 될 수 없는 객진번뇌를 좇아 흘러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참된 주인공인 마음자리를 돌아보지 않고 돈, 가족, 몸뚱이를 주인으로 삼아 노예처럼 살아왔으니, 어찌 자유가 있겠으며 괴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참된 ‘나’를 버리고 부산히 먼지를 일으키는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나’는 고통과 비애와 불행이 가득한 세상의 한복판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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