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3. 언제나 ‘나’와 함께 하는 것

우리는 부처님처럼 진아를 찾아야 한다.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참된 ‘나’를 찾아야 한다. 참된 ‘나’를 찾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살리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생에게는 ‘나’가 많다. 너무나 오래 잊고 살았기 때문에 참된 ‘나’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이 몸을 ‘나’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마음 또는 정신을 ‘나’라고 생각하며,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나’라고 하는 이도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참된 ‘나’인가? 이와 관련된 재미있는 비유담이 있다.

옛날, 어느 고을의 나이 20세 된 사내가 이웃 고을의 처녀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들은 아주 갓난아기 때 양가 부모가 혼약한 사이였으므로 혼인 전에는 서로 얼굴도 성품도 모르고 지냈었다. 그런데 막상 결혼을 하고 보니 신부의 얼굴이 약간 곰보인데다가 몸매도 좋지 않고 무뚝뚝한 것이 도통 정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워낙 가난한 집안인지라, 두 부부는 서로에 대한 불평 없이 부지런히 일을 하며 세월을 보냈다.

고진감래라고, 결혼 후 10년이 지나자 집안은 어느 정도 먹고 살 만큼 되었다. 그때서야 남녀간의 달콤한 관계를 그리워하게 된 남편은 인물이 좋은 규수를 얻어 둘째 부인으로 삼았다. 동시에 본부인에 대한 남편의 괄시도 함께 시작되었다.

“당신은 오늘부터 뒤채를 쓰시오, 그것이 싫거든 이 집을 나가든지.”

그러나 원래 투기할 줄 모르는 본부인은 뒷방으로 물러나 온갖 구박을 받으면서도 집안 구석구석의 일을 꾸려 나갔다. 부엌살림에 논도 매고 밭도 매고, 그야말로 본부인이 아니라 머슴처럼 살았다.

또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더욱 부자가 된 남편은 기방 출입을 시작하였다. 특히 눈웃음을 잘 짓는 춘심이라는 기생은 옆에 찰싹 달라붙어 갖은 애교를 다 떨었고,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다 했다. 그것이 마음에 든 그는 춘심이를 셋째 부인으로 맞이했다. 이제 남부러울 것 없게 된 그였지만, 워낙 욕심이 많았던지라 편히 지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열심히 일하며 논밭을 사고 재산을 모았던 것이다.

어느덧 나이 50줄을 넘어선 그는 고을 제일의 부자가 되었고, 남은 생을 편히 즐기며 살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평생을 돈과 일에 매달려 살았던 탓인지, 멋있게 사는 방법에 대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기껏 생각해 낸 것이 딸같이 젊고 아리따운 아가씨를 데리고 살면 즐겁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때마침 그 고을 최고의 미인이요 애교 만점인 처녀가 불의의 사고로 부모를 잃고 동생들을 돌보며 살고 있었다. 역시 돈은 좋은 것이었다. 많은 돈을 주자, 그녀 또한 그의 것이 되었다. 그는 사는 즐거움을 그녀에게서 찾았고, 넷째 부인 또한 늙은 그에게 미소를 잃지 않았다.

“서방님, 보약 대령이옵니다.”

“제 다리를 베고 누우세요. 귀를 후벼 드릴께.”

마음에 드는 말과 갖은 아양에 노인은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고, 마침내 돈금고와 쌀창고 열쇠까지 넷째 부인에게 모두 넘겨주었다.

그러던 어느날, 노인은 갑자기 병이 들었다. 용한 의원을 데려다가 진맥을 받았더니 더욱 비관적인 말을 하였다.

“여자를 너무 가까이하여 진액이 고갈되었으니, 보약으로 몸을 보하기는 하되 아무래도 죽을 준비도 함께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제 고을 제일의 부자가 되었고, 마음에 드는 여자도 얻어 즐겁게 살고 있는데 죽어야 하다니… 염라대왕이 질투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와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노인은 그 무엇보다 혼자 염라대왕 앞으로 가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듯한 넷째 부인에게 물었다.

“넷째야, 이제 내가 죽을 날도 멀지 않은 것 같구나. 그런데 그 무서운 염라대왕 앞에 혼자 가기가 너무 싫구나. 너는 그동안 온갖 정성으로 나를 보살피고 사랑했으니 당연히 나와 함께 가주겠지?”

“영감님, 그런 말씀 마세요. 사실 당신이 나를 사랑했지 제가 당신을 사랑한 줄 아세요? 제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영감님의 재산입니다. 불쌍한 제 동생들을 먹여 살리고, 영감님 돌아가신 후에 한밑천 얻기 위해 열심히 사랑하는 척 했을 뿐이에요. 어찌 저라고 하여 꽃다운 이 나이에 젊은 남정네와 사랑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함께 죽어 저승길을 가지 않으렵니다. 다만 영감님의 빈소 앞에서는 열심히 명복을 빌어 드릴께요.”

노인은 그렇게 말하는 넷째 부인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조금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혼자 가기는 싫어 셋째 부인을 불렀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셋째 바로 너란다. 셋째야, 나랑 같이 죽자.”

“이제 와서 무슨 그런 말씀을! 영감은 넷째를 가장 좋아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세요.”

“넷째는 안 가려고 하더구나. 그러니 너라도 따라가자꾸나.”

“제가 그동안 넷째 때문에 얼마나 속을 썩였는지 아십니까? 그것을 생각하면… 그렇지만 그동안 당신 신세를 많이 졌으니 화장막 앞까지만 따라갈께요. 그 이상이야 어떻게 따라가겠습니까? 시뻘건 불구덩이에 함께 들어가는 것은 정말 싫어요.”

노인은 다시 둘째 부인을 불렀다.

“둘째야, 셋째, 넷째는 나와 함께 가지 않겠다는구나. 너라도 따라가자.”

“아이구, 영감. 나는 당신한테 속아서 시집온 것이나 다름없소. 처음에는 한평생 원앙새처럼 부부정을 나누자더니, 셋째, 넷째를 들이고부터는 밤낮없이 청소나 시키고… 이제 와서 염라대왕 앞까지 나를 함께 끌고 가려 해요?”

“그래 그래. 내가 잘못했다. 그러니 너만이라도 나와 함께 가지.”

“… 할 수 없지요. 죽으나 사나 당신한테 매인 몸이니…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지만 가자고 하니 가겠소. 그렇지만 내가 영감을 따라가고 싶어서 가는 것은 절대로 아니오.”

가고 싶지 않다는 둘째를 억지로 끌고가기도 그러하여 노인은 마지막으로 본부인을 찾았다. 몇 년만의 남편 호출에 지레 겁을 먹은 본부인은 벌벌 떨면서 방문을 열고 한 발을 들여놓았다. 순간 노인의 눈에는 처음 혼인할 때 쪽두리를 쓰고 얌전하게 서 있던 신부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것이었다.

“당신이 나 하나 믿고 시집을 왔는데, 평생 나 때문에 고생만 하고 살았구려.”

노인은 감정이 복받쳐 본부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동안 궂은 일만 도맡아 했던 본부인의 손은 수세미보다 더 거칠었고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머리에는 백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여보, 정말 미안하오. 그동안 내가 너무 심했소. 용서하구려.”

그리고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본부인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는 살아도 당신집 사람이요, 죽어요 당신집 귀신, 열녀는 불사이부라 하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죽으면 나는 살아 있어도 죽은 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가자시면 천리고 만리고 염라대왕 앞이고 무조건 따라갈 터이니 걱정마세요.”

본부인의 끝없는 사랑에 감격한 노인은 눈물을 글썽였다.

“여보, 고맙소. 역시 당신뿐이구려.”

본부인은 감정에 휩싸인 남편을 찬찬히 바라보다가 자신있게 말했다.

“그런데 영감, 내가 보기에는 당신이 죽을 것 같지 않은데 무얼 그렇게 걱정하십니까? 여기 누워 보세요.”

그리고는 꿀물을 한 사발 타다가 남편에게 먹이고 팔다리를 물껑물껑 주물러주었다. 노인은 온몸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한숨 푹 자고 일어나니 몸이 거뜬한 게 죽을 것 같지가 않았다. 노인은 네 명의 부인을 불러들였다.

“내 일찍이 <반야심경>을 보았더니 그 속에 ‘원리전도몽상 하라’는 법문이 있었소. ‘전도된 몽상을 멀리 떠나라.’,’몽상 때문에 거꾸로 된 것을 멀리 떠나라.’는 말씀이었지. 이때까지는 그 말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는데, 오늘의 일을 당하고 보니 사랑할 것을 사랑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을 것을 사랑한 것이 바로 전도몽상임을 깨달았소.”

숙연해진 네 명의 부인을 차례로 돌아보던 노인은 넷째 부인에게 시선을 주고 말했다.

“넷째야, 젊디젊은 너를 꼼짝도 못하게 아랫목에 앉혀놓고 ‘이게 뉘 궁둥인고, 뉘 궁둥인고’ 하였으니 얼마나 답답했겠느냐? 그동안 하찮은 늙은이 옆에서 욕 많이 봤다. 내일부터는 나가서 부엌일을 맡아라. 밥도 하고 국도 끓이고 찌게도 만들고 설거지도 해라. 앞치마 입고 소매 걷어붙이고 신바람나게 일해라.”

“셋째야, 너는 아직 젊으니까 일꾼들과 함께 논도 매고 밭도 매고 풀도 매도록 해라.”

“둘째, 당신은 오십줄을 바라보고 있으니 너무 힘든 일은 하지 말고 집안 청소나 하며 사시오.”

“부인! 그동안 참으로 고생 많이 했소. 오늘부터는 넷째가 앉았던 이 아랫목을 차지하고 금고 관리나 하시오. 그리고 비단옷 입고 화장도 하고 건강이나 잘 보살피시오.”

그날부터 집안은 완전히 바뀌기 시작했다. 젊은 부인들이 나가 일하니 음식도 좋아지고 농사도 잘 되었으며 집안은 구석구석까지 깨끗해졌다. 뿐만 아니라 늙은 할머니가 아랫목에 앉아 돈금고를 잘 관리하니 재산은 늘어만 갔다. 금고에는 돈이 들어가면 살살 빠져나가기만 했던 넷째 부인의 시절과는 달리 본부인이 관리하자 한번 금고로 들어간 돈은 좀처럼 나올 줄을 몰랐다. 금고는 하나씩 하나씩 늘어만 갔고 마침내 이 집안은 백만장자가 되었으며, 노인 내외는 백년해로 하였다고 한다.

日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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